[스크랩] 북한산 / 배우리의 땅이름 기행. 180910 경인방송

2018. 12. 26. 23:29산 이야기

북한산 / 배우리의 땅이름 기행. 180910 경인방송

 

배우리의 지역명 탐구(경인교통방송)

 

북한산 

 

 

 

1. 오늘은 어디로....?

 

이제 백로 절기도 지났으니 본격적으로 가을이라고 보아야 한다.

경기권에서 유명한 산을 들라면 관악산, 팔달산, 문수산, 용문산, 감악산, 소요산, 북한산, 명성산, 백운산, 화악산 등 많은 산들이 있지만, 그 중에 가장 잘 알려진 산은 아무래도 북한산일 것이다.

그래서 오늘 북한산으로....

 

 

2. 북한산, 한 마디로 이 산의 매력이 있다면 무엇일까요?

 

이병주(1921~1992)씨의 수필 '산을 생각한다'에선 모든 서울 시민의 사랑을 받는 북한산을 이렇게 찬미하였다."

산은 이처럼 고마운 것인데, 특히, 북한산이 고마운 것은 그 섬세한 아름다움이다. 지리산처럼 거창하지 않고, 설악산처럼 정교하고 치밀하지는 않지만, 소박한 가운데 산이 갖추어야 할 아름다움을 죄다 북한산에서 찾을 수가 있다."

 

 

3. 이 산은 특히 서울 사람들에게 큰 사랑을 받죠? 외세의 침입을 많이 받았을 때는 서울의 보호막 구실을 했다고도 하구요.

 

서울은 크게 두 겹의 산 울타리로 천연의 방벽을 이루었다.

안쪽을 두른 4개의 산을 '내사산'이라 하고, 바깥쪽을 두른 4개의 큰 산을 '외사산'이라 한다.

내사산은 북악, 인왕, 낙산, 남산을 가리키고, 외사산은 용마, 덕양, 관악, 북한산을 가리킨다. 안쪽의 네 산이 서울 분지를 이루어 놓은 데 반해

바깥쪽 울타리격인 네 산은 그 내사산을 보호해 주는 듯한 모습으로 서울 외곽을 든든히 둘러 떠받쳤다.

조선이 건국되고, 한양이 수도로 정해지면서 내사산을 이어 도성을 쌓았는데, 이 도성은 그 바깥쪽의 외사산과 함께 인공과 천연의 요새를 이루어 놓는다.

서울의 진산이라는 점에서도 그 가치가 더욱 크다.

남쪽으로 힘차게 뻗어 내려온 백두대간으로부터 서쪽으로 갈라져 한북정맥을 이루면서 도봉산을 솟구친 후 우이령에서 조금 숨을 죽였다가 서울 북방에 이르러 마지막 힘을 다하여 세차게 솟구친 북한산. 예부터 한양(서울)에선 이 산을 진산이라 한 것은 한양 고을을 북쪽에서 든든히 받쳐 주고 있기 때문이었다.

여기서 주의할 점 하나.

경복궁 뒷산인 북악산(배악)을 진산이라 하는 사람도 있지만, 이 산은 진산이라기보다는 주산이라 해야 맞다.

 

 

4. 북한산은 삼각산이라고도 하죠?

최고봉인 백운대(837미터)를 비롯하여 인수봉, 만경대, 노적봉 등 큰 바위봉들이 서로 이웃하여 있다. 산 전체가 화강암 덩어리. 15천만 년 전 지구 지각 변동 때 굳어진 것이란다.

'삼각산'이라고 한 것은 백운, 인수, 국망 등의 세 봉우리가 세 뿔처럼 돋았다 해서...

산마루의 큰 바위가 흡사 아이를 업은 모습이라 해서 '부아악'이라고도 했다.

이 산은 또 '중악' 또는 '화산'이라 하기도 했고, '산신령의 산'이라 해서 '부루칸모로'라고도 했단다. 우이동쪽에서는 소의 귀처럼 보여 '귀봉'이라고도 했다.

'백운대'란 이름은 태조 이성계가 잠저에 있을 때, 이 산에 올라와 지은 시에서 따온 이름이라고 한다. 백운대 남쪽의 국망봉은 '만경대'라고도 하는데, 이는 태조가 무학대사와 도읍을 옮기는 일을 논의한 자리라 하여 나온 이름이란다. 백운대 동쪽의 인수봉은 '인자요산 인자수', '마음이 어진 사람은 마음이 산을 닮아 산을 좋아한다'란 뜻에서 붙여진 이름이라 하고.

 

 

5. 삼국시대에도 신라, 백제, 고구려가 이 북한산과 한강 일대를 서로 차지하려고 했다는 것을 역사책에서 많이 배웠어요.

<동국여지승람>에선 북한산을 '삼각산'이라며 다음과 같은 기록을 남긴다.

"고구려 동명왕의 두 아들 비류와 온조가 남쪽으로 내려와서 한산에 이르러 부아악에 올라 살 만한 땅을 찾은 곳이 바로 이 산이다."

처음엔 백제 땅이었다가 고구려 장수왕 때 남진정책으로 백제는 도읍을 웅진으로 옮겨 버렸고, 백제 26대 성왕이 신라 진흥왕과 손을 잡고 잃어버렸던 한강 유역과 북한산을 회복하는데 성공하지만, 다시 2년 뒤 신라에게 그 땅을 빼앗기고 만다.

신라 24대 진흥왕은 한강 유역을 차지했다는 승리감에서인가, 북한산 비봉에 순수비를 세웠다.

진흥왕은 북한산에서 사냥도 하고 민심을 살폈단다. 비봉 절벽 위에 세워진 순수비는 지금은 국립 중앙박물관에 옮겨 두었고, 대신 그 자리엔 모조된 비를 앉혀 놓았다.

북한산에선 고려 고종 때인 1232년에 몽고군과의 격전도 벌어졌다.

 

 

6. 이 산에 산성(북한산성)을 쌓은 것은 바로 그러한 지리적 중요성 때문?

북한산성을 처음 쌓은 것은 백제 온조왕 때 이 산을 점거하여 성을 쌓았다는 기록으로 보아 삼국시대까지 거슬러 올라가지만, 이 때 쌓은 성은 백제가 망하는 바람에 황폐해진 것으로 보인다.

고려시대에도 이 산에 몇 차례 성을 수축했으나, 현존 산성의 형태는 조선 숙종 37(1711)에 쌓은 것이다.

임진왜란과 병자호란으로 인해 국토가 황폐해지고 나라의 권위가 땅에 떨어진 조선 왕조는 인조에 뒤이어 왕위에 오른 효종에 의해 북벌론이 나오게 된다. 그러나, 병자호란으로 맺은 청나라와의 강화조약으로 조선에서는 새로운 축성이나 옛 성의 수축마저 못하게 돼 있었다.

숙종 때에 이르러 청나라에서 반란이 일어나자, 청나라 진향사로 갔던 사람이 돌아와서 청나라에서 조선에 원군을 청할 것이란 보고를 했다. 이 때 조정에서는 이 일에 어떻게 대처할까 의견이 분분했는데, 영의정 허적을 비롯한 대신들이 이 기회에 병자호란의 치욕을 설욕해야 한다며 산세가 험준한 북한산에 산성을 쌓자는 주장을 펴게 된다.

숙종 원년, 1675의 이 북한산성 축성론은 청나라에서 원군 요청이 없자 그대로 흐지부지된다.

그 후, 숙종 17년년에 우의정 신완이 북한산성의 중요성을 다시 지적, 산성 축성론이 다시 고개를 든다. 결국 숙종 373월에 산성 축성의 각 부서를 정하고, 4월에 공사를 시작, 6개월 여만에 북한산성을 축성하였다. 그러나, 이 북한산성은 전쟁에는 전혀 사용되지 않았고, 대부분의 문루나 전각들은 화재로 타 없어졌다. 헐린 산성과 돌기둥만이 남아 있던 보국문, 대동문, 대서문 등은 1990년대에 일부가 복원되었다.

 

 

7. 북한산 봉우리 이름들이나 사찰들을 보면 불교와 특별히 관련이 많은 듯.

 

북한산의 절들은 대개 이름난 이들이 창건했거나 중건한 것이다.

큰 마애불과 비구니의 도량으로 알려진 절인 비봉 아래 승가사는 신라 경덕왕 15년에 수태선사가 창건했고, 우이동의 도선사는 경문왕 2년 도선국사가 조성했다. 고려 태조 왕건은 임금이 되던 해 중흥사를 창건했고, 고려 예종 때 탄연은 대남문쪽 문수봉 밑에 문수사를 세웠다. 고려 말 국사이자 왕사였던 보우는 중성문 위쪽에 태고사를 창건하고.

이 외에도 왕과 고승과 명신들의 발길이 북한산에 빈번했다.

조선시대에 이르러 세종대왕은 집현전을 설치하고 이들 가운데 젊고 총명한 사람들을 다시 추려 승가사, 진관사 등지에 보내 계속 글을 읽게 하고 학사들이 깊은 산사에서 마음놓고 공부에 정진할 수 있도록 철 따라 식찬까지 몸소 챙겼단다. 그런가 하면 세조 임금도 북한산을 보현봉에 즐겨 올랐다 하잖는가.

숙종 때의 성호 이익은 산성이 축조되기 4년 전 하룻밤을 묵으며서 이 산에 <유삼각산기>를 남겼다. 그러나, 무척이나 많던 북한산의 사찰들은 불에 많이 타 없어지고 산성 내에는 태고사, 봉성암, 상운사 절만이 남아 있다.

인수봉에는 1926년 경성 주재 영국 총영사관의 부영사 아처와 일본인 하야시가 자일 등 근대적 등반 장비를 갖추고 등반했다는데, 이것이 이 봉우리 등반의 최초 시도가 아닌가 한다.

오늘날 서울 시민들이 편안하게 오르고 있는 백운대 쇠난간은 19273월에 설치됐다.

북한산 백운대 정상에는 독립운동 정신이 새겨져 있다. 태극기가 펄럭이는 백운대 최정상 바닥 암반에 삼일독립운동의 정신, 민족의 얼이 69자로 새겨져 있다. '독립선언서는 기미년 210일에 육당 최남선이 썼고 31일 탑골공원의 독립선언만세는 정세용이 선도했다' 는 내용. 네 귀퉁이에는 경천애인, 즉 하늘을 공경하고 사람을 사랑한다는 네 글자를 좀더 큰 글씨로 새겨져 있다.

 

 

8. 약수도 참 많았다는 얘기도 들었는데... 그 많던 약수들 다 어디로 갔을까요?

북한산은 약수가 많기로도 유명했다.

평생 동안 북한산을 사랑하다가 타계한 소설가 이병주는 산을 자주 올라 샘물 마시기를 즐겼다. 그는 80년대 초만 해도 평창동에서 대성문으로 이르는 길가에만도 6 개의 옹달샘이 있었다 했다. 북한산성 축성 당시의 일을 기록한 <북한지>에 따르면 북한산성을 중수했을 당시 북한산 일대에는 적어도 99 개의 옹달샘이 있었다 한다.

서울의 약수는 대개 높은 산을 끼고 있다. 북한산, 도봉산, 남산, 인왕산 등의 산에서는 지하 수맥을 통해서 바위 틈에서 물이 솟아난다. 그러나, 이 산들이 70년대 이후 등산객이버리는 쓰레기로 오염돼서 마실 수 없게 된 약수도 많다.

 

 

9.. 북한산 근처에서 소개해 주실 만한 지명들에는 어떤 것이 있는지?

 

북한산의 동쪽 기슭, 쇠귀같이 보이는 봉우리 아래로 아늑하게 자리잡은 동네가 '쇠귓골', 즉 지금의 우이동이고, 그 근처의 고개가 '쇠귓고개, 우이령'이다.

쇠귓골 외에 수유동 근처의 무너미, 가오리, 정릉 부근의 살한이, 송계동, 능말 등도 북한산 일대에서 유명한 마을이었다.

붙임바위고 부르는 서울 종로구의 부암동은 옛날에 아기낳기를 원하는 여자들이 많이 찾던 곳이다.

북한산 만경대 근처로는 육모정고개, 하루재, 깔딱고개, 해골바위 등의 땅이름이 있고, 원효봉 서족으로는 밤골, 청담골, 효자골, 밤나무골 등의 옛 마을들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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