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크랩] 하남 감일동 백제 최고위층 석실묘 50기 쏟아져 (18-04-22) 外

2018. 12. 29. 18:22우리 역사 바로알기



2018/04/22 06:00

하남 감일동에서 백제 최고위층 석실묘 50기 쏟아져

중국 교류 증거 청자 계수호〉 〈부뚜막형 토기첫 출토

한성도읍기 백제 역사 구명할 핵심 유적

하남 감일동에서 나온 백제 횡혈식 석실분

하남 감일동 횡혈식 석실분. 벽에 회()가 남아있다

한성도읍기 백제왕성이 확실시되는 서울 풍납토성(사적 제11)과 약 4떨어진 경기 하남 감일동에서 백제 최고위층 무덤 수십 기가 나왔다.

422일 하남시와 하남역사박물관에 따르면, 고려문화재연구원(이사장 김병모)201511월부터 진행 중인 하남 감일 공공주택지구 조성사업 부지에서 4세기 중반5세기 초반에 제작된 것으로 추정되는 횡혈식석실분(橫穴式石室墳 굴식돌방무덤) 50기가 발견됐다.

조사단은 지금까지 전국에서 확인된 백제 횡혈식석실분은 모두 70여 기로, 서울 인근에서 이처럼 많은 백제 석실분이 나온 것은 처음이라고 강조했다.

이 고분들은 학계에서 한성도읍기 백제왕릉급 무덤으로 보는 서울 송파구 석촌동, 가락동, 방이동 일대 고분군이 도시 개발로 대부분 파괴된 상황에서 당시 백제 건축문화와 생활상, 국제교류 양상을 보여주는 중요한 유적으로 평가된다.

최병현 숭실대 명예교수백제 중심부에서 상상도 못한 유적이 나온것이라며 한성도읍기 백제는 고분은 망가지고 기록은 소략했는데, 감일동 고분군은 백제사를 구명하고 복원할 수 있는 핵심자료라고 할 수 있다고 말했다.

감일동에서 확인한 횡혈식 석실분은 크게 4곳에 무리를 이루었다. 경사면에 땅을 파서 직사각형 묘광(墓壙·무덤 구덩이)을 만들고, 바닥을 다진 뒤 길쭉하고 평평한 돌을 차곡차곡 쌓아올린 구조다.

묘광과 돌 사이는 판축기법(흙을 얇은판 모양으로 켜켜이 다져 올리는 방법)을 썼고, 천장은 점차 오므라드는 소위 궁륭식(穹窿式)이다. 일부 무덤은 벽을 마감한 회()가 남았고, 무덤으로 통하는 길인 연도는 대부분 오른쪽에 마련됐다. 무덤 크기는 묘광(墓壙)이 세로 330670, 가로 230420이고, 석실(石室)은 세로 240300, 세로 170220. 높이는 180내외다. 무덤간 거리는 약 1020m.

감일동 횡혈식 석실분에서 나온 부뚜막형 토기

청자(靑瓷) 계수호(鷄首壺)

문재범 하남역사박물관장일부 무덤은 2번 이상 사용한 흔적이 있다. 시신과 껴묻거리를 안치했다가 시간이 흐른 뒤 안쪽으로 밀어넣고 또다시 장례를 치른것 같다고 말했다.

부장품으로는 풍납토성에서 나오는 토기와 매우 흡사한 직구광견호(直口廣肩壺·아가리가 곧고 어깨가 넓은 항아리)를 비롯해 중국에서 제작된 청자 계수호(鷄首壺 닭머리가 달린 항아리)와 부뚜막형 토기 2점이 출토됐다.

문재범 관장백제 무덤은 신라 무덤과 비교하면 껴묻거리가 많지 않다. 공주 수촌리 유적에서 흑유(黑釉 흑색유약) 계수호(鷄首壺)가 나온 적은 있지만, 국내에서 청자계수호가 발굴되기는 최초다. 사각뿔에 동그란 구멍을 뚫은것 같은 부뚜막형 토기도 처음 출토됐다고 설명했다. 그는 이어 청자(靑磁)는 당시 중국에서만 만들수 있었고, 부뚜막형 토기를 무덤에 묻는 풍습도 중국에 있었다. 백제가 중국과 활발하게 교류했음을 알려주는 결정적 증거라고 주장했다.

권오영 서울대 교수지금으로 치면 감일동 고분군에는 글로벌화한 사람들이 묻혔다고 볼 수 있다. 일본 오사카(大阪), 나라(奈良)에서 나오는 5세기 후반 백제계 석실분의 원형이라는 생각도 든다는 의견을 내놨다.

하남시는 석실분 28기가 밀집한 지역을 역사공원으로 조성하기로 결정했다. 공원 한편에는 이전·복원할 석실분 15기와 유물을 전시할 박물관이 들어선다.

문재범 관장『〈감일동 고분군공주 송산리 고분군〉 〈부여 능산리 고분군과 이어지는 백제 고분유적이라며 유네스코 세계유산인 백제역사유적지구는 백제가 웅진(熊津)과 사비(泗沘)를 도읍으로 삼았을때 유적을 아우르는데, 세계유산을 한성도읍기 백제유적으로 확장 등재한다면 감일동 고분군도 포함해야 한다고 말했다 / (서울=연합뉴스) 박상현 기자 psh59@yna.co.kr


2018/04/22 06:01

하남 감일동 고분군은 백제의 北邙山

45세기 백제 최고위층 공동묘지

상상도 못한 유적혹은 복권 당첨

하남 감일동에서 나온 백제 횡혈식 석실분

하남 감일동 석실분에서 나온 부뚜막형 토기

4세기 중반부터 5세기 초반 사이에 조성된 것으로 추정되는 백제 석실분이 무더기로 발견된 하남 감일동 고분군왕족과 귀족이 묻힌 백제의 북망산(北邙山)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중국에서 고고학 박사학위를 받은 문재범 하남역사박물관장422일 한성도읍기 백제(BC 18475) 횡혈식 석실분(橫穴式石室墳 굴식 돌방무덤) 50기가 밀집한 경기 하남 감일동을 북망산(北邙山)에 비유했다.

중국 허난성 뤄양(洛陽) 북쪽에 있는 북망산(北邙山)에는 나라 이후 帝王, 貴人, 名士 무덤이 만들어졌다. 사람이 죽으면 묻힌다는 북망산천(北邙山川)북망산에서 유래했다.

하남 감일 공공주택지구 조성사업 과정에서 나온 백제고분군은 정교하고 치밀하게 건축한 석실분을 제외한 다른 무덤이 없고, 중국에서 제작한 뒤 백제로 건너온 것으로 짐작되는 청자 계수호(鷄首壺 닭머리가 달린 항아리)부뚜막형 토기가 국내 최초로 출토됐다는 점에서 최고위층 집단묘지라고 할 수 있다.

횡혈식 석실분은 백제를 대표하는 무덤 양식이다. 직사각형으로 땅을 파서 바닥을 다진 뒤 길쭉하고 평평한 돌을 차곡차곡 쌓고, 한쪽에 무덤방에 드나들 길을 만든 구조다.

감일동 고분군조성시기는 백제 전성기를 이끈 近肖古王(재위 346375) 이후와 겹친다. 학계가 이 고분군을 상상도 못한 유적혹은 복권 당첨이라고 표현하며 한성도읍기 백제사 비밀을 풀 열쇠로 보는 이유는 한 곳에서 50기에 달하는 한성시대 석실분이 나온 적이 없고, 이 시기 왕성(王城)으로 확실시되는 풍납토성과 매우 가깝기 때문이다.

지금까지 전국에서 확인된 한성백제 횡혈식 석실분은 모두 70여 기로 알려졌다. 경기도에서는 성남 판교 유적에서 약 10기가 나왔고, 감일동 고분군에서 동쪽으로 2남짓 떨어진 하남 광암동 고분군화성 마하리 고분군에서 한두 기가 확인됐다. 그런 희소성이 두드러진 석실분이 50기나 한꺼번에 발견됐으니 흥분할만한 사건임에 틀림없다.

일제강점기 조사에 따르면, 한성도읍기 백제왕릉급 무덤으로 지목되는 서울 송파구 석촌동·방이동·가락동 일대 고분대략 300기에 달했으나, 급격한 도시개발로 대부분 조사도 없이 파괴되고 말았다.

감일동 고분군과 다른 유적 사이의 거리를 보여주는 지도. 붉은색 화살표가 감일동 고분군

감일동 고분군은 풍납토성과 4, 몽촌토성이나 방이동고분군에서는 약 3떨어져 있다. 백제가 초축한 것으로 알려졌지만, 그 축조 주체가 백제인지 신라인지 논란이 많은 하남 이성산성3거리에 있다. 사비도읍기 백제왕성 자리로 추정되는 부여 관북리 유적과 왕릉급 무덤이 모인 능산리 고분군사이 거리가 대략 3.

신희권 서울시립대 교수고고학 연구자들은 풍납토성과 몽촌토성 동쪽 강동구 둔촌동과 하남 능선에 백제석실분이 있을 것으로 예상했으나, 감일동 고분군같은 유적이 존재할 줄은 몰랐다고 말했다. 그는 감일동 고분군은 상태가 매우 양호한데다 백제 유물밖에 나오지 않았고 100년 안팎 기간에 집중적으로 조성됐다는 점에서 순수성이 있다. 무덤을 조성한 시기와 나라에 대한 논란이 없다는 점에서 주목할 수밖에 없는곳이라고 덧붙였다.

최병현 숭실대 명예교수왕성과 가까운 곳에서 대규모 고분군이 나왔다는 점만으로도 의미가 크다. 문헌 사료가 부족한 한성도읍기 백제사를 연구하는데 큰 도움이 되는 유적이라고 평가했다. 아울러 감일동 고분군은 백제와 신라 중 어느 나라가 만들었는지에 관해 논란이 이어지고 있는 방이동 고분군성격을 구명하는 기준점 역할도 할 것으로 보인다.

신희권 교수감일동에 있는 무덤은 향후 한성도읍기 백제석실분의 전형이자 잣대가 될 수도 있다고 말했다.

문재범 관장석촌동, 방이동, 가락동과 달리 하남은 오랫동안 그린벨트로 묶여 개발이 제한된 탓에 석실분이 잘 보존됐다. 논쟁거리인 백제석실분 봉분 형태가 원형인지, 직사각형인지에 대한 단서도 찾을수 있을것으로 기대한다고 강조했다 / (서울=연합뉴스) 박상현 기자 psh59@yna.co.kr


2018/04/24 17:24

부여 사비백제 왕궁 찾기본격 시작 추정지 보상 추진

부여읍 관북리·쌍북리 지역 2020년까지 토지보상 완료

부여 백제왕도 복원 조감도

찬란했던 사비백제 왕궁 찾기가 본격적으로 시작된다.

충남 부여군은 사비왕궁터로 추정되는 사적 제428호 관북리 유적지구쌍북리 일대 발굴을 위한 토지보상 작업을 본격 진행한다고 24일 밝혔다.

보상 지역은 부여읍신진마트에서 부여도서관까지 약 22필지와 부여도서관, 부여여고, 쌍북리 주변이다. 2020년까지 토지보상을 마칠 예정이다.

부여군은 관북리 유적의 원활한 토지보상 추진을 위해 319일 주민을 대상으로 설명회를 개최하고, 그동안의 진행상황과 추진방향을 설명했다.

은 주민 의견을 적극적으로 수렴해 사업과정에 반영하고, 투명하게 소통해 민원 발생을 최소화한다는 계획을 세웠다.

쌍북리 지역주민 대상 설명회도 개최하고, 주민이주대책 마련, 한국토지주택공사(LH)와 함께 토지비축 사업 등을 추진해 그동안 특별보존지구 지정에 따른 각종 규제로 어려움을 겪던 주민 불편을 해소할 방침이다.

토지비축 사업은 부여군이 한국토지주택공사(LH) 토지은행에서 돈을 빌려 일시에 자금을 투입, 해당 토지를 사들이고 이 비용을 단계적으로 갚아나가는 방식이다.

또 쌍북리 지역에서 가장 문제가 되는 부여도서관, 부여여고 이전을 위해 충남도교육청과 협약해 이전대상지 선정 및 예산확보 등에 박차를 가할 계획이다.

관계자는 찬란했던 사비백제 왕도를 찾는 숙원사업의 원활한 추진을 위해 토지소유자와 관계인의 많은 협조와 관심을 부탁한다고 말했다 / (부여=연합뉴스) 정찬욱 기자 jchu2000@yna.co.kr


2018/04/26 09:37

정읍 북서쪽 백제석실분 56기 사적 지정

문화재 명칭은 정읍 은선리와 도계리 고분군

은선리 고분군 a19호분

정읍 은선리와 도계리 고분군

문화재청은 전북 정읍 북서쪽 영원면 은선리덕천면 도계리 일원에 있는 백제 횡혈식 석실분(橫穴式石室墳, 굴식돌방무덤) 50국가지정문화재 사적 제543로 지정했다고 26일 밝혔다.

문화재 명칭은 정읍 은선리와 도계리 고분군으로, 이곳은 전북 지역에서 확인된 최대규모 백제 고분군이다.

정읍 영원면 일대에서는 2005년과 2013년 이뤄진 지표조사 결과, 반경 2이내 구역에 백제고분 270여 기가 분포하는 것으로 파악됐다. 그중 은선리와 도계리 접경지역에 밀집한 무덤 56만 이번에 사적(史蹟)으로 지정됐다.

무덤은 대부분 사비기(泗沘期 AD 538660)에 조성됐으나, 일부는 이보다 앞선 웅진(熊津期 AD 475538)에 만들어진 것으로 추정돼 웅진기부터 사비기까지 백제고분 축조 양상이 어떻게 변화했는지 알수있는 유적으로 평가된다.

유적 주변에는 백제시대에 초축한 성으로 백제지방 행정구역 오방(五方) 중 중방(中方)으로 비정되기도 하는 고사부리성(古沙夫里城 사적 제494)마한계 분구묘(墳丘墓 흙이나 돌로 봉분을 쌓고 그위에 매장시설을 만든 무덤)가 있다.

지정조사단은 보고서에서 백제석실분이 이처럼 많다면 백제가 정읍 영원면 일대를 중요거점으로 삼았을것이라며 육상·수로 교통요지이고, 농사를 짓기좋은 땅이었던 점이 작용한 것으로 보인다고 분석했다.

지정심의에 참가한 문화재위원은 백제 횡혈식석실분은 보통 지하식인데, 영원면 석실분은 대부분 지상식 구조여서 마한 분구묘 전통이 이어진 측면이 있다. 고사부리성(古沙夫里城)을 통치한 귀족과 관료가 묻혔을 가능성이 크다고 주장했다.

문화재청 관계자는 백제시대 중앙과 지방관계, 정치세력 변천을 연구하는 단서가 될수있는 유적이라며 체계적 보존·관리·활용방안을 마련하겠다고 말했다 / (서울=연합뉴스) 박상현 기자 psh59@yna.co.kr

 

정읍 고사부리성(古沙夫里城) : 정읍시 고부면 고부리 산1-1

http://blog.naver.com/PostView.nhn?blogId=gwancheong&logNo=221195490220

정읍 고사부리성(古沙夫里城)

http://blog.naver.com/PostView.nhn?blogId=bogirang&logNo=221200445241

    


출처 : 환경동네
글쓴이 : 운영2 원글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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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제


최근 수정 시각:


  후삼국시대에 견훤이 세운 국가에 대한 내용은 후백제 문서를 참조하십시오. 


하위 문서: 백제/왕사, 백제/인물, 백제부흥운동, 후백제와 백제 부흥 운동과의 연관성 문제  



백제
百濟

[1]

파일:백제의 지도 (4세기, 진출지 표시).png
▲ 백제의 진출지가 표시된 4세기 경의 지도[2]

국호

십제[3]백제[4]

위치

황해남도 동남부, 경기도 영서 일부 → 충청도, 전라도 일대[5] → 전라도 일대[6]

인구[7]

당평 백제비: 24만호 620만 구 / 삼국유사: 전성시 호수 15만 2300호 / 당서: 76만 호

수도

위례성[8]웅진[9]사비[10]

정치 체제

군주제

국성

부여(扶餘)[11]

국가 원수

어라하 / 건길지 / 대왕 / 마한황제 제왕[12]

언어

백제어

민족

한민족[13]

종교

토착 신앙불교

존속 기간

기원전 18년[14] ~ 660년 7월 18일 (678년)

주요 사건

기원전 6년 하남위례성 천도 → 260년 관등 제정 → 384년 불교 전래 → 475년 웅진 천도 → 538년 사비성 천도

성립 이전

마한

멸망 이후

신라[15]


1. 개요2. 국호3. 역사
3.1. 건국
3.1.1. 명칭3.1.2. 건국 연대 논쟁
3.2. 발전3.3. 위기 및 혼란
3.3.1. 끊임 없는 정쟁과 왕들의 시해
3.4. 중흥기
3.4.1. 북위와의 전투
3.5. 대신라 전쟁3.6. 멸망
3.6.1. 멸망 과정3.6.2. 백제부흥운동3.6.3. 백제 유민의 집단 일본 이주3.6.4. 통일 신라에서의 백제 유민3.6.5. 소백제 (요동 건안성)3.6.6. 후백제
4. 영역과 행정구역5. 마한 정복에 관한 논란
5.1. 구 온조왕 완전병합설5.2. 구 근초고왕 완전병합설 5.3. 6세기 완전병합설 (정설; 전북 동남부, 전남 지역 병합)5.4. 백제와 마한의 경계는?
6. 일본과의 관계7. 백제의 문물, 제도, 사회
7.1. 사회7.2. 관직7.3. 군사7.4. 언어7.5. 연호7.6. 종교, 문화, 역사7.7. 건축7.8. 시가7.9. 예술
8. 평가9. 왕사10. 인물11. 참고 문서12. 백제를 소재로 한 작품13. 둘러보기


1. 개요[편집]

고구려와 같은 부여의 뿌리가 한강에 자리 잡아 삼국 중 가장 먼저 전성기를 이룩한 한국의 고대 왕조.

흔히 고구려가 군사적으로 강성했던 것이 강조되고, 신라가 삼국통일과 황금으로 유명하다면, 백제는 삼국 중 가장 섬세하고 세련된 문화를 가지고 있었다는 것이 강조된다.

2. 국호[편집]

세계의 백제 국호

한국어

십제(十濟)/백제(百濟)/남부여(南扶餘)/응준(鷹準)/나투(羅鬪)[16]

최초 건국 당시에는 십제였으나 이후 백제로 바꾸었다. 이후 성왕 16년인 536년에 남부여로 국호를 바꾸었으나 이후에도 중국 사서에서 백제라는 국호로 등장하는 것으로 보아 제대로 정착되지는 못한듯 보여진다. 그 외에 고구려광개토왕릉비에서는 백제를 백잔(百殘)이라고 칭하는데 이는 잔인할 잔(殘)을 사용한 것으로 백제를 깔아내리는 비하어로 추정된다.

중국어

바이지(Bǎi jì)

일본어

쿠다라(くだら)

신라와 마찬가지로 초기부터 일본과 거리가 가깝고 서로 많이 얽혔던 관계라 일본서기를 비롯한 각종 사서에 언급된다.

아랍어

مملكة بايكتشي

영어

Baekje

3. 역사[편집]

3.1. 건국[편집]

貴須王者百濟始興第十六世王也
귀수왕(근귀수왕)은 백제가 처음 일어난 때로부터 제16세(16대) 왕[17]입니다.


속일본기》 연력 9년 7월


백제의 건국자는 주몽의 재취처인 소서노아들온조왕이라 하는데, 김부식의 《삼국사기》 등의 건국 전설에 의하면 고구려에서 비류와 온조 형제가 함께 남으로 내려와 각각 미추홀(인천)과 위례(경기도 하남 추정)에 도읍을 세웠는데, 미추홀에서 건국한 비류는 결국 자결하여 그의 나라는 동생 온조에게 병합되었거나, 또는 신채호의 《조선상고사》에 보면, 고구려 왕비였던 소서노가 남하하여 건국했다고도 한다. 《주서》를 비롯한 중국 사서 등에는 시조로서 "우태" 혹은 "구태"라 하는 인물이 등장하여 혼란을 주고 있다.[18]

확실한 것은 백제를 세운 지배 계층이 부여계로 보이며 마한의 지배 세력과 융화되었다고 생각된다. 지배 계층과 피지배계층의 언어가 달랐다는 떡밥도 있지만 검증된 사실은 아니다. 건길지 항목 참조.

3.1.1. 명칭[편집]

고려시대의 《제왕운기》에 따르면 백제 말고도 응준(鷹準), 나투(羅鬪) 등으로 불렸다고 한다. 나중에는 아예 부여로 나라 이름을 바꾼다. 백제를 부여의 계승국으로 생각한다면 "남부여"라고 부르기도 하지만, 연구에 따르면 이 호칭은 성왕 시절에만 잠시 쓰였던 것으로 보인다. 후삼국 시대로 접어들 무렵 견훤이 신라에 반란을 일으킬때 명분을 주기 위해 백제를 부흥한답시고 국명을 백제(후백제)로 지었고, 이 지역을 계속 백제로 부르는 데서도 알 수 있다.

일본에서는 "쿠다라"라고 부르는데[19] 이에 대해서 여러가지 학설이 공존하고 있다. 역사스페셜에 출연한 일본의 모 교수는 유력한 학설 중 하나로 "큰 나라"라는 한국말이 '쿠다라'의 유래가 되었을지도 모른다는 추측을 하기도 했다. 동영상 그리고 웅진(熊津)과 관계가 있을 것으로 추정하기도 한다. 얼추 쿠다라와 곰나루의 발음이 비스무리한 거 같기도 하다.[20] 한편 과거 백제에서 일본으로 떠나는 배가 출항했을 장소로 여겨지는 하구 지역이 해당 지역의 노년층 주민의 증언에 의하면 최근까지도 구드래[21][22]라는 이름으로 불렸다고 하니, 이 또한 연관이 있을 공산이 없지는 않다. 구다라의 어원 추정

참고로 1910년 일제의 조선 침략 이전까지만 해도 일본 각지에 ‘구다라고우리(百濟郡)’ ‘구다라손(百濟村)’ ‘구다라강(百濟川)’ 나아가 ‘구다라대교(百濟大橋)’ ‘구다라평야(百濟平野)’ 같은 '구다라'라는 명칭의 행정지명들이 널리 쓰였다고 한다. 그러나 일제가 조선을 강제 병합한 후, 백제와 관계된 대부분의 일본 지명들이 다른 이름으로 바뀌어서 ‘백제’가 지명으로 남아 있는 곳은 지금 현재 일본에서 단 두 군데에 불과하다고 한다. 현재 남아있는 지명 두 곳은 나라현 ‘고료초 구다라(廣陵町 百濟)’[23]교토시 동쪽의 ‘히가시 오우미시 햐쿠사이지초(東近江市百濟寺町)’[24]이 두 곳 뿐이다. 하지만 이 두 곳의 지명 또한 언제까지 이어질지는 알 수 없다. # ##

3.1.2. 건국 연대 논쟁[편집]

김부식의 《삼국사기》를 제외한 사료에서 백제가 처음 등장하는 것은 신라와 마찬가지로 중국 사서 《정사 삼국지 위지 동이전》이며, 여기서는 "백제(伯濟)"란 이름으로 나타난다. 그러나 국외 사료에서 처음 등장하는 왕명은 그보다도 100여 년이 지난 근초고왕으로서, 370년에 최초로 중국동진 왕조 및 열도와 수교를 맺었다고 하며, 현재 일본에 소장되어 있는 칠지도는 바로 이 시기에 백제에서 열도로 넘어간 것이라는 설이 일단 다수설을 차지하고 있다. 삼국사기 자체가 고려시대에 쓰여진 역사서이다 보니 편의상 초고왕 이전도 백제라고 기술하였다. 항상 삼국사기가 고려시대에 쓰여진 역사서라는 걸 염두에 둬야만 한다. 고구려 건국연대만 하더라도 광개토대왕비문에는 광개토대왕이 주몽의 17세손이라고 하였는데, 삼국사기에는 주몽의 12세손으로 기술하였다. 삼국사기보다는 당연히 광개토대왕의 아들인 장수왕의 기록을 신뢰하는건 당연하다.

이런 이유로 8대 고이왕 이전 임금들에 대해서는 계속 의문이 제기된다. 특히 초고왕 대 이전의 다루, 기루, 개루왕의 경우 즉위 연대 자체도 비현실적으로 길며 《삼국사기》 내용에서도 당대 일로는 믿을 수 없는 부분이 많아 인정하지 않는 경우가 많으며, 특히 노중국 교수는 그의 백제 정치사 연구에서 5대 초고왕을 현실적으로 백제의 첫 왕으로 본 바 있다.

풍납과 몽촌 양 토성의 발굴은 이를 논하는 데 굉장히 중요한 발굴로 여겨진다. 2000년대까지는 일단 이러한 건축물이 지어지려면 백제가 상당히 체계화된 국가임이 분명하고, 그 시기가 기원전까지 올라갈 수 있다고 보아(2001년의 논문, 2002년의 논문) 고이왕 이전 백제사에 대해서도 긍정하는 시각이 늘어났다.

그러나 2010년대 이후 중국계 유물에 대한 연대관이 정리되면서 풍납 토성과 몽촌 토성의 주요 부분이 축조된 시기가 주로 기원후 3세기 ~ 4세기에 걸쳐 있다는 의견이 다수가 되면서(2012년의 논문) 백제의 고대 국가로서의 진정한 출발에 대해선 《삼국사기》의 연대를 그대로 믿긴 어려워졌다. 다만, 발견된 중국계 유물을 봐선 백제는 4세기 말이 아닌 3세기 초에 중국의 국가와 교류했다고 볼 수는 있게 되었다.

최근 고고학적인 발전으로 탄소 연대 측정법으론 일부 성벽의 일부 누층의 축조 연대를 기원전으로 내릴 수 있으나 본격적으로 축조가 이뤄진 구간은 아니며, 따라서 어쨌든 풍납 토성의 일부 하층부에서는 기원전 1세기에 속하는 층이 있기에 이를 최초의 백제 유적이라고 보고 3 ~ 4세기에 체제가 크게 발전하면서 대대적인 증축이 되었다고 볼 수는 있게 되었다. 석촌동 고분군의 초기 고분 또한 대략 기원후 200년 전후에 축조되어 이 지역에서 중요한 발전이 있었음을 시사한다. 사실 《삼국사기》에 등장하는 건국년도는 약간의 오차가 있는 고구려를 제외한 신라와 백제는 신뢰도가 많이 떨어지는 편이기 때문에 발굴 조사에 의존할 수밖에 없다. 일단 풍납 토성의 축조 연대는 기원전이고, 이후 대대적으로 축조에 들어가 4세기에 완성된 걸로 볼 수 있다.

일이러한 내용에 대한 일반적인 역사학계의 결론은 "백제는 약 250 ~ 300년 사이에 국가 단계에 들어서서 대외 교류가 시작되었다" 라고 할 수 있으며 이 시기는 율령 반포로 유명한 고이왕의 후기 치세 및 책계왕 치세와 일치한다. 즉, 그 이전에 (2세기 ~ 3세기) 소국 형태로 존재했던 백제는 3세기 말 국가로서의 체계를 갖추며 어느 정도 주위 지역에 비해 우위에 올랐으며 4세기 들어 대 대방 교류 및 흡수, 마한 정벌을 통해 전성기를 맞이한 것으로 보여진다. 마한 정벌은 실제 명확한 근거가 없음에도 불구하고 이것이 정설로 주장되었다. 하지만 이후 문헌 연구 및 고고학적 발굴에 의해 이러한 추정은 현재 완전히 부정되며, 최근에는 6세기 중엽까지 마한이 건재했다는 게 학계의 정설이다. 사실 백제는 마한 연맹체 구성국가들 중 하나로 출발했으니 정벌이라는 표현 자체가 모순이긴 하다.

3.2. 발전[편집]

초기부터 강성한 국가는 아니었다.[25] 고구려가 건국되었다는 시기 백제의 중심지인 한강 유역을 포함한 곳은 마한의 영향권이고, 마한 지역에서 목지국[26]이 그 패권을 쥐고 있었는데, 목지국의 왕은 삼한에서 가장 강하다고 해서 그 왕이 진왕[27]으로까지 불리기도 했다. 백제는 마한과의 대립경쟁 속에서 성장했다. 사실 마한과의 대립이라기보다는 정확히 표현하자면 백제 자체가 마한 연맹체의 구성국가였고, 이로부터 출발하였다.

초기엔 한강 유역에 머물렀으나 점차 팽창하며, 마한의 여러 소국들을 차례로 정복해 나갔다. 고이왕(재위 234년 ~ 286년) 때 율령 반포 및 중앙 집권이 이루어졌다. 그리고 313년, 314년에 낙랑군과 대방군이 고구려의 공격을 받고 무너지는데, 고이왕 시절부터 낙랑군, 대방군과 우호적인 관계를 맺고 있던 백제는 분서왕 때 낙랑을 공격하기도 하였다.

마한 지역에 대한 정복 과정은 현재 일치된 설이 존재하지 않을 정도로 문헌에 대한 해석이 다양한데 이에 대해서는 아래에 별도의 문단이 존재한다. 하여튼 고고학적으로 확실한 것은 3세기 말까지 백제가 경기도 지역을 석권했으며, 근초고왕 때인 4세기 중후반에 걸쳐 북쪽으로는 황해도 일부 지역과 남쪽으로는 금강 유역까지, 5세기 중후반에 들어서는 전북 지역까지 영역화했다는 것이다. 한편 《일본서기》에 근거하여 한성 백제기 동안에 전남 지역까지 복속시켰다는 해석이 있었으나, 이는 현재 고고학적 연구 결과에 의해 부인되고 있다.[28] 2000년대 이후 활발히 진행된 전라남도의 고고학적 연구 결과 6세기 초중반까지 전라남도 전역에 걸쳐 백제와는 다른 독자적인 마한 세력이 존재하고 있었음이 밝혀졌다.

어쨌든 백제의 강성해진 국력이 대외적으로 알려지기 시작한 것은 근초고왕(재위 346년 ~ 375년) 시대로, 이 시대의 백제는 동진에 사절을 보냈고 앞서 언급했듯 《일본서기》의 신공황후기에 따르면 일본과도 국교를 맺고 칠지도와 칠자경을 보내는 등 밀접한 관계를 맺었다고 한다. 백제는 이로서 국제적 국가로 성장하기 시작하였다. 중국 사서인 송서와 양서에는 근초고왕 때 백제인들이 요서까지 진출하였다고 하였다. 이전까지 고구려와 별다른 충돌이 없었으나 근초고왕 대인 369년 고구려 고국원왕이 백제의 치양을 공격하면서 백제와 고구려의 다툼이 시작되었고, 2년 후 근초고왕은 고구려평양성까지 진격하여 황해도까지 영토를 넓혔다. 이 과정에서 고구려는 고국원왕이 전사(371년)하는 치욕을 겪었으며, 이후 고구려는 백제를 '불구대천의 원수'로 여기게 되었다. 하지만 근초고왕 만년에는 국력의 쇠퇴가 시작되어 고구려로부터 빼앗았던(369년) 수곡성[29]을 고구려 소수림왕의 침공으로 다시 빼앗겼고(375년), 신라의 국력이 점점 강해져 독산성(禿山城) 성주가 주민들과 함께 신라에 투항했을 때(373년) 대응하지 못하였다.

3.3. 위기 및 혼란[편집]

침류왕(재위 384년 ~ 385년) 때 불교를 수용했다(384년).[30] 근초고왕의 사후 이어지는 근구수왕(재위 375년 ~ 384년), 진사왕(재위 385년 ~ 392년), 아신왕(재위 392년 ~ 405년)대를 거치면서 국세가 현격히 약화되었다. 당시 백제는 고구려를 상대로 군사 활동을 벌였으나 국력이 크게 소모된 반면 영역화한 지역이 적었다. 근구수왕 대 평양을 공격하기도 했지만, 진사왕 원년에 청목령(개성)에 방어성을 축조하고 관미령(한강 또는 임진강 연안?)에서 전투하는 등 백제의 방어선은 이미 예성강 선으로 후퇴해 있었다. 예성강 방어선도 진사왕 말년에 광개토대왕에 의해 갈려버렸다. 백제는 외부로부터 고구려 압박뿐만 아니라 내부의 끊임없는 정쟁과 권력 암투로 혼란한 시기를 보냈다.

야심과 집념의 소유자였던 아신왕(재위 392년 ~ 405년)은 자신에게 돌아왔어야 할 왕위를 가로채간 진사왕에게 복수하기 위해 일본의 지원을 받아 정변을 일으킨 후 진사왕을 죽이고 왕위에 올랐다. 아신왕은 왕위에 오른 후 고구려 땅이 된 관미성을 차지하기 위해 수 차례 고구려를 공격(393년 정월, 394년 7월[31], 395년 8월, 395년 11월)했으나 실패하고 오히려 고구려의 반격으로 영토와 병력을 계속 상실하면서 백제의 국력이 상당히 소진되었다. 아신왕의 계속된 공격에 광개토대왕은 396년 백제 원정을 단행하여 한강 이북의 58성 700촌을 점령하고 백제 수도 한성을 포위했다[32]. 수도가 함략당할 위기에 처하자 아신왕은 성문 밖으로 나와 광개토대왕 앞에서 무릎을 꿇고 노객이 되겠다는 굴욕적인 항복을 했다. 그러나 이같은 굴욕적인 패배 이후 아신왕은 복수에 집착하여 귀족들의 반대에도 불구하고 고구려에 대한 복수를 위해 더욱 강도 높은 전쟁 준비에 매진했다. 아신왕은 397년 5월 왜의 군사적 지원을 받는 조건으로 태자 영(전지왕)을 일본에 볼모로 보냈다. 아신왕은 백성들을 수시로 군사 훈련과 축성 공사에 동원했다. 398년 마침내 고구려 정벌을 위한 대규모 징집을 실시했다. 그러나 계속되는 군사 훈련과 징집에 지친 백성들이 이웃나라인 신라 등으로 대규모로 도망가 버리는 바람에 백제의 인구가 감소하면서 결국 고구려 정벌은 취소되었다. 백성들이 대거 신라로 도망가자 아신왕의 분노는 신라로 향하기 시작했다. 399년 아신왕은 가야, 왜와 연합하여 대규모로 신라를 공격하지만 신라와 동맹 관계에 있던 광개토대왕이 출병하는 바람에 패했다. 404년 고구려가 후연과 전쟁을 하고 있는 틈을 타 아신왕은 왜와 연합군을 구성하여 고구려의 대방을 공격했다. 후연과의 전쟁 중에 있던 광개토대왕은 급히 친위부대를 이끌고 나타나 왜와 백제 연합군을 섬멸했다. 왕에 대한 국내의 불만이 극도로 높아진 상황에서 405년 아신왕은 정쟁으로 갑작스레 죽음을 맞이한다. 그의 사망 즈음 백제의 국력은 현격히 약화되었다.[33]

의 도움으로 쿠데타를 일으켜 왕위에 올랐던 아신왕은 즉위 후 왜와의 우호 관계에 상당한 공을 들였다. 왕인, 아직기 같은 석학들을 보내어 선진 문화를 전파시켜 줌으로써 일본의 발전과 선진화에 크게 기여했다. 또 아신왕 대의 대규모 징집을 피하기 위해 일본으로 도망친 유민들의 행렬도 일본이 한 단계 성장하는 데 도움이 되었다. 또한 아신왕은 태자(전지왕)[34]를 일본으로 보내 장기 체류시키기도 했다. 전지왕의 경우 일본에 있다가 돌아와서 왕이 되었는데, 볼모라고 표현되어 있지만 우리 나라에서는 진짜 볼모라기보다는 백제 국제 정세가 어지럽기 때문에 해외 유학을 보내놓은 것에 가깝다고 보는 사람이 많다.[35] 하지만 아신왕이 광개토대왕에게 노객이 되겠다고 말하는 굴욕을 당한 직후 일본에 군사적 지원을 요청하면서 태자를 보냈기 때문에 말 그대로 볼모의 성격이라는 의견도 있다.

아신왕 사후 태자 영(전지왕)이 일본에 있었던 까닭에 아신왕의 동생 훈해가 섭정이 되었으나 아신왕의 막내 동생 설례가 정변을 일으켜 훈해를 죽이고 스스로 왕(폐왕 설례)이 되었다. 왜와 해씨 세력의 도움을 받은 태자가 내분에서 승리하여 왕위(전지왕(재위 405년 9월 ~ 420년))에 올랐지만, 즉위 후 해충, 해수, 해구 등 그를 왕위에 올려준 외척 해씨 세력이 권력을 장악하여 왕권이 크게 약화된다. 한편 송서에 의하면 진나라 말기에 고구려가 요동을 경략하자 전지왕 때 백제 역시 요서와 진평 땅을 거점삼아 백제군을 두었다고 한다.

전지왕 이후 고구려가 장수왕(재위 412년 ~ 491년)으로 이어지는 전성기를 맞는 동안 백제는 계속해서 어린 왕이 즉위했다가 젊은 나이에 죽는 일이 반복되었다.[36] 이 시기 백제는 잦은 섭정으로 외척 세력인 해씨 등이 권력을 장악하고 이를 둘러싼 권력 암투 등으로 왕권이 약해지며 어려운 시기를 겪었다. 구이신왕(재위 420년 ~ 427년)과 비유왕(재위 427년 ~ 455년) 모두 정변으로 살해된 것으로 추정된다. 변란으로 선왕이 살해되는 혼란스러운 와중에 즉위한 개로왕(재위 455년 ~ 475년)은 즉위 후 내분으로 왕권을 제대로 행사하지 못하는 어려운 시기를 겪어야 했다.[37] 백제 조정이 어수선한 틈을 타 456년 12월 고구려 장수왕이 침공해 왔으나 신라의 원군으로 가까스로 고구려군을 막아내었다. 오랜 내분 끝에 개로왕이 마침내 내분을 수습하고 정권을 장악했다.[38] 고구려의 위협에 압박감을 느낀 개로왕은 북위에 사신을 보내 고구려에 협공을 가하자고 제안했으나 사신이 고구려에 발각되는 바람에 오히려 장수왕의 분노를 초래하고 말았다. 475년 고구려 장수왕은 백제 원정을 단행했다. 개국 이래의 수도였던 한성이 다시 함락되고 개로왕과 왕족들이 고구려군에게 비참하게 처형되는 등 거의 파멸상태에 이른다(475년).[39]

이때 나제동맹 관계에 있던 신라가 보낸 지원군과 백제 귀족 지원군이 도착하기 전에 이미 한성이 함략되었으며, 백제 귀족 지원군보다 신라 지원군이 오히려 먼저 도착하는 안습한 상황이 벌어졌다. 그때 신라에서 지원군을 얻어 돌아오던 개로왕의 동생[40] 또는 아들[41]이었던 문주는 한성이 함략되었다는 소식을 듣고 그 길로 신라 지원군을 이끌고 남하하여 방어에 유리한 지형을 갖고 있는 웅진(공주)에 새로 도읍을 정하고 문주왕(재위 475년 ~ 477년)에 즉위한 후 즉각 고구려에 대한 항전 태세에 들어갔다.[42] 한편 고구려 장수왕은 한성을 점령하고 다시 군대를 이끌고 남하하여 충청도에 남성골산성[43]을 구축하고 대전 월평 산성을 점령하여 주둔하였으나 오랫동안 유지되지는 못하였다.[44]

하지만 이미 왕권이 크게 실추되어 각지에서 도적이 일어나고, 조정에서는 좌평 해구 등 외척 세력인 해씨들이 나라를 좌지우지했고, 이에 반대하는 세력들이 진로 등 진씨 세력을 중심으로 결집하여 수시로 정변을 일으키는 등 혼란스러운 상황이 이어졌다. 어수선한 상황 속에서 문주왕이 실추된 왕권을 다시 세우려고 곤지를 중용했으나 이에 반발한 해구에 의해 문주왕이 암살되고 만다. 이어 문주왕의 장남 삼근왕(재위 477년 ~ 479년)이 13세의 어린 나이에 즉위했다. 그러나 어린 왕은 실권이 없었으며, 권신 해구가 섭정을 위임받아 국정을 좌지우지했다. 479년 해씨 세력과 정쟁을 벌이던 진씨 세력이 마침내 해씨 세력을 제거하는 데 성공하며 정권을 장악했고, 이때 삼근왕도 죽음을 당했다.

3.3.1. 끊임 없는 정쟁과 왕들의 시해[편집]

백제는 왕비족 가문들간의 끊임없는 정쟁과 정변이 이어지며 이 와중에 수많은 왕들이 시해당했다. 제 명에 죽은 왕이 거의 없을 정도인데 역사적 기록이 비교적 자세히 나타나기 시작하는 근초고왕 이후를 보면 15대 침류왕, 16대 진사왕, 17대 아신왕, 폐왕 설례, 19대 구이신왕, 20대 비유왕, 22대 문주왕, 23대 삼근왕, 24대 동성왕이 모두 정변으로 시해되었거나 또는 시해로 추정되는 죽음을 맞았고, 21대 개로왕과 26대 성왕은 각각 고구려 장수왕과 신라군에게 참수당했다. 이후 27대 위덕왕, 태자 아좌, 28대 혜왕, 29대 법왕도 정쟁으로 혼란스러운 상황 속에서 시해로 추정되는 의문스러운 죽음을 맞았다.

원래 고대 시대 왕과 귀족은 부족장에서 시작되어 가장 강한 부족이 왕족이 되고, 그 다음으로 강한 부족이 왕비족이 된다. 왕권이 약한 고대 국가에서 귀족(부족장)들은 사병을 거느린 봉건 제후나 마찬가지다. 백제의 경우 왕비를 독점적으로 배출한 왕비 가문(대성8족)의 세력은 거의 왕족에 근접할 정도로 막강했다. 이들 왕비족을 얼마나 빨리 때려잡느냐가 진정한 왕권 강화인 동시에 중앙 집권화가 되는 것인데[45], 백제 왕족인 부여씨는 왕비족을 누르고 중앙집권화를 이루는데 그리 성공적이지 못했다. 백제 왕비족들은 정변을 일으켜 반대파벌 왕을 죽인 후 정권을 잡고 새로운 왕을 앉히는 것을 반복했고, 이렇게 해서 즉위한 왕들은 자신을 왕위에 올려준 귀족 세력들에게 권력을 내주고 마는 악순환이 백제 시대 내내 반복된다. 백제의 경우 왕족인 부여씨가 고구려로부터 이주해 온 세력이었기 때문에 인구 등 규모에 있어서 처음부터 한계가 분명했고, 이 때문에 한성 토착 세력이었던 '진씨'와 '해씨'의 도움 없이는 국가의 유지가 어려웠을 것이다. 이러한 연유로 백제에서는 토착 세력인 진씨와 해씨가 오히려 왕권을 능가하는 세력을 형성한 것으로 보인다. 백제는 건국 때부터 진씨와 해씨라는 두 개의 우열을 가리기 힘든 대등한 세력의 왕비족을 가지고 출발한 것이 어쩌면 비극의 씨앗이었는지도 모른다.

백제는 건국기부터 '해씨', '진씨'가 왕비 가문으로서 왕권 못지 않은 권세를 누려왔다. 이 두 가문은 정쟁을 통해 자신들끼리 정권 교체를 이루며 권력을 양분해왔다. 여기서 말하는 정권 교체란 바로 왕의 시해다. 왕이 죽어야만 자체 가문 출신의 왕비로 교체할 수 있었기 때문이다. 웅진 천도 후 동성왕 시대부터는 충청남도계 토착 세력인 '사씨', '백씨' 등이 왕비족으로 가세하면서 왕비 가문은 대성8족으로 확대, 정사암 회의를 지배하게 된다.

이웃 나라들과 비교해 보자면, 고구려의 경우 왕비족이 절노부 하나여서 왕비족들 간의 정쟁이 발생할 여지가 없었다. 신라의 경우 건국 초기 왕비족으로 성장할 수 있었던 6개 성씨(이씨, 정씨, 최씨, 손씨, 배씨, 설씨)가 있었다. 그러나 이 6개 성씨들은 서로 엇비슷한 세력을 가지고 균형을 이루고 있어서 특정 가문이 왕비족으로 부각되지 못했다. 이후 신라 왕족 김씨는 아예 성골끼리 통혼하는 관습을 만들면서 왕비족 자체가 형성되지 못했다.

대성8족으로 상징되는 중앙 귀족들과는 별도로 지방 세력 역시 독립적인 힘이 강했다. 마한의 소국들이 순차적으로 백제에 병합되면서 마한의 기존 부족장들이 백제의 지방 귀족화되었는데, 이들 지방 세력들은 백제 병합 후에도 독자적인 권력을 상당히 유지했던 것으로 보이며, 심지어 백제가 위기 상황을 겪을 때 다시 마한으로 독립하는 경우도 있었다.[46] 백제 지방 세력은 잘나갈 때도 왕권의 발목을 잡는 것은 기본이고, 나라가 망할 지경일 때도 대립 양상이 해소되지 않았다. 개로왕 때 수도 한성이 함락당하는 절체절명의 위기 속에도 백제의 귀족 지원군은 늦장을 부리다 출동해 신라 지원군보다도 늦게 한성에 도착했다. 장수왕에게 한성을 함락 당한 후 천도한 웅진 시대에도 각지에서 반란이 잇따랐다. 백제의 멸망 시기에도 이 대립이 결정타가 되었다.[47] 그래서 국왕들은 조금만 국력이 회복되면 왕권 강화를 시도했고,[48] 지방 세력은 나라가 망하는 것보다 몰아내는 데 더욱 신경을 썼다.[49]

3.4. 중흥기[편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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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제의 상징 칠지도

백제의 중흥기는 동성왕(재위 479년 ~ 501년), 무령왕(재위 501년 ~ 523년)과 성왕(재위 523년 ~ 554년)으로 이어지는 5세기 말 ~ 6세기 중반기 시기였다.

개로왕의 죽음과 웅진 천도 이후 왕권이 땅에 떨어졌고, 외척인 해씨 세력이 문주왕과 삼근왕을 거치는 동안 권력을 잡고 전횡을 일삼았다. 그러나 이와중에 또다른 유력 외척 세력인 진씨 세력이 해씨 세력에 대항하면서 정변이 이어지는 혼란스러운 상황이 이어졌다. 마침내 진씨 세력은 정변을 일으켜 해씨 세력을 제거하는데 성공하고 정권을 장악했다. 이때 삼근왕이 갑작스러운 죽음을 맞게 되고, 진씨 세력은 일본에 있던 왕족 모대(동성왕, 재위 479년 ~ 501년)를 새로운 왕으로 추대하여 한다.[50] 진씨 세력은 해씨 세력이 그랬던 것처럼 동성왕을 허수아비왕으로 앉힌 후 권력을 휘두르려 했으나, 동성왕은 진씨 세력과 권력 투쟁을 벌이며 사씨, 연씨, 백씨 등을 중용하는 등 실추된 왕권을 다시 강화하고 국가의 재건을 시도한다. 정권이 안정된 후 동성왕은 고구려에게 빼앗긴 영토의 일부를 다시 수복하고 남쪽으로는 마한 세력을 공격했다.[51] 또 신라 소지왕과 혼인 동맹을 통해 나제동맹을 강화하는 한편, 중국 남조와 국교를 재개했다. 그러나 지나친 토목 공사와 만년으로 갈수록 향락으로 인한 불만이 커지면서 해씨 세력 등 반대파의 힘이 커졌다. 결국 좌평 백가가 난을 일으켜 동성왕을 살해한다.

백가의 난으로 동성왕이 피살된 후 일본에서 태어난 동성왕의 이복형인 무령왕[52](재위 501년 ~ 523년)이 동성왕 반대파의 추대로 왕위에 올랐다.[53] 즉위 후 백가의 난을 진압한 무령왕은 기록상으로 다시 한강 유역, 심지어는 북한강 중상류, 예성강 유역까지 올라가 고구려와 싸웠다고 되어 있으며 무령왕이 한성을 순시했다는 기록도 있다. 그러나 이 점은 다시 학설에 따라 첨예한 논쟁의 대상이다. 일단 이때 한강 유역을 온전히 수복했으면 성왕이 한강 유역을 차지하기 위해 신라와 동맹을 맺었다가 한강을 뺏기는 구구절절한 사건이 생길 일도 없지 않은가... 이에 대해서는 이 기록이 모두 맞으며 백제가 이 지역을 점령했지만 오곡원 전투 이후 다시 이 지역을 상실했다는 설, 무령왕 대까지 이 지역에서 군사 활동을 한 것은 사실이지만 점령한 것은 아니었다는 설, 한성을 잃은 이후 경기도 ~ 황해도의 지명이 옮겨 갔다는 설, 아예 이전 시기의 기록이 잘못 옮겨졌다는 설 등이 모두 존재한다.

고고학적으로 살펴보면, 고구려가 한강 이남까지 내려온 것은 이미 고고학적으로 증명된 지 오래되었다. 일단 몽촌 토성에서는 고구려 토기들이 발견되고 있으며 더 나아가서는 앞서 소개했던 세종, 대전 인근에도 고구려 요새와 토기들이 발견 된 상황이다. 참고로 고구려 토기와 백제 토기는 상당히 달라서 원저계가 주류인 백제와 달리 고구려 토기는 평저가 주류를 이루며 대상파수 또는 교상파수라고 불리는 손잡이는 고구려 토기의 특징이다(이 파수는 지금의 항아리에도 남아있다). 다만 사비기 백제 토기의 경우 4세기 ~ 5세기 고구려계 토기가 갑자기 6세기 백제 수도에 등장하는데, 이는 최근 들어 무령왕 또는 성왕 대의 영토 회복 과정에서 고구려 지배하에 있던 백성들을 사비 건설을 위해 사민 정책을 펴면서 이런 토기들이 나오게 된 것으로 보고 있다. 참고로 남부여라고 국명을 고친 것도 사실 이런 주민들을 흡수하기 위한 성왕의 계책이 아닌가 생각되기도 한다.

한편 이 시기는 앞서 언급했던 전라남도 지역에 있던 마한 세력에 대한 정복 활동이 활발히 이루어진 시기이기도 하다. 고고학적으로 볼 때 5세기 중후반부터 백제계 석실묘와 문제의 한반도 전방후원분이 등장하는데, 대체로 이는 백제와 백제가 끌어들인 일본계 세력이 침투하는 과정으로 보고 있다. 전방후원분은 1세대가 넘지 않아 사라지기 때문에, 일본계 세력은 사실상 용병에 가까운 세력이었거나 빠르게 정체성을 잃고 현지 지배 구조에 흡수된 것으로 보인다. 동성왕 대 '탐라'가 복속해 왔다는 기술은 이 전남 지역 혹은 제주도의 복속을 가리키는 것으로 보인다.[54] 무령왕 대에는 이를 기반으로 섬진강 지역을 정복하여 소위 대가야(반파국)의 해안 출구를 끊었으며, 해외에도 이를 알려 <양서> 백제전에 백제에 복속된 소국들이 기록되기도 한다. 흥미로운 것은 여기에 사라가 포함되어 있다는 점으로, 당시 백제는 신라 사신의 파견을 알선해 주기도 했지만 이상의 사실로 보아 순수한 의도만은 아니었던 것으로 보인다.

3.4.1. 북위와의 전투[편집]

양나라소자현이 쓴 남제서에 의하면 백제가 북위와 전쟁을 벌여 이겼다는 기록이 있는데 동성왕 12년(490년)에 북위가 백제를 공격하니 목간나등을 파견하여 크게 무찔렀다고 한다. 그리하여 495년에 공을 세운 장군들에게 내린 벼슬을 남제국에 승인해달라 하였다. 《삼국사기》의 백제 본기에서도 488년 위나라가 백제에 패하였다고 하였으니(十年魏遣兵來伐爲我所敗) 이를 통해 당시 백제의 강성함을 알수 있다. 그러나 그걸로 백제의 요서경략설에 힘이 실리고 있다고 보기엔 갈 길이 멀다. 일단 요서 지역에서 백제와 연관이 있는 고고학적 유물의 증거가 없는데다, 북위가 바다를 건너와서 백제를 쳤다고 해석해도 말이 안 되는 건 아니기 때문.

때문에 북위가 고구려와의 서신 교환 중 고구려에게 속아 백제를 지나치게 과소 평가한 나머지 서해를 건너와 백제를 쳤다가 연안 지역에서 크게 패했다는 설, 백제가 흡사 백제 - 왜의 관계가 그러했듯 남조 측에 지원 병력 즉, 용병을 파병했다는 설 등이 경쟁하고 있으며 확고히 결론난 건 현재 시점에선 없다.

일단 백제는 동성왕 때 바다를 건너 사신을 보내다가 고구려에게 저지된 적이 있고, 비슷한 시기 일본에서도 '고구려가 자꾸 방해해 자주 올 수가 없었다'라고 하는 사료가 존재한다(<송서> 왜국전의 왜왕 무 상표문). 그러나 이는 반대로 해석하면 백제가 어쨌든 힘든 상황에서도 (아마도 연안 항로를 거쳐) 사절을 보낼 여력이 있었거나 적어도 그게 가능하다고 생각했다는 의미가 된다. 실제로 이 이외에도 백제가 중국에 사절을 보낸 사료는 충분히 많으며, 백제로부터 항로를 빌렸을 왜국의 경우에도 결국 중국에 도달해서 보고를 올렸기 때문에 저 기록이 남은 것이다.

남조가 정치적으로 백제를 끌어들이기 위해 기록을 날조했다는 가설도 있으나 이 가설은 근거가 좀 미흡하다고 평가되는 요서 경략설보다도 설득력이 떨어진다. 동서고금 외국의 지원을 받기 위해 어떤 관계성을 강조하는 날조나 견강부회는 있어왔지만, 그걸 위해 있지도 않은 정복 기사를 날조해서 자국의 역사서에 끼워넣는다? 물론 정복 기사를 날조하는 짓은 있었으나 그런건 타국을 지배하거나 정복하기 위해 하는 것으로 남조와 백제 사이에선 성립하지 않는 얘기다. 이런 건 중국사는 물론이고 세계사적인 관점에서 봐도 사례가 없다.

그외 내용은 동성왕 문서도 참고.

3.5. 대신라 전쟁[편집]

성왕(재위 523년 ~ 554년)은 수도를 웅진에서 사비(현 부여)로 옮겨 왕권 강화와 수도의 방어력 강화를 꾀하였다. 또 동쪽의 신라의 세력을 방어하기 위해 가야연맹의 재건을 꿈꾸었으나,[55] 결국 신라의 대가야 유화 정책에 의해 실패로 돌아갔다. 551년에는 신라 진흥왕과 협력하여 한강 하류 유역을 되찾았다. 그러나 한강 하류 지역 세력의 반발, 고구려 및 신라의 군사적 압박 등으로 한강 유역에서 철군하고 말았고, 이에 무주공산이 된 한강 유역을 신라 진흥왕이 접수하고 말았다.[56] 이에 성왕은 한강 하류 수복을 위해 귀족 세력들의 반대에도 불구하고 나제동맹을 깨고 관산성 전투(554년)를 일으켜 신라를 공격했으나 오히려 신라군[57]에게 사로잡혀 참수당하는 비운을 겪는다. 결국 관산성 전투에서 백제군은 좌평 4명을 비롯해 3만 명의 군사가 전멸[58][59]하고, "말 한 마리도 살아 돌아오지 못했다"는 대참패를 당하고 만다.

국왕이 전사하고 주력군이 전멸한 어려운 상황 속에서 태자 창(위덕왕, 재위 557년 ~ 598년)은 귀족들의 반대로 왕위에 오르지 못했다. 그것은 귀족들의 무수한 반대에도 불구하고 관산성 전투 출병을 주장했던 이가 바로 태자 창이었고, 관산성 전투에서 주력군을 지휘했던 이도 태자 창이었기 때문이었다. 관산성 전투가 참패로 끝나면서 출병을 반대했던 귀족 세력들은 태자 창에게 선왕의 전사와 패전에 대한 책임을 물었다. 태자 창은 반성과 자숙의 의미로 절에 들어가는 등의 퍼포먼스를 펼친 끝에 성왕 사후 3년만인 557년에야 가까스로 즉위할 수 있었다. 우여곡절 끝에 왕위에 올랐지만 이미 왕권은 땅에 떨어진 상태였고 실권은 대성팔족 귀족 가문들이 행사했다. 위덕왕의 재위 초기는 귀족들의 권력 다툼과 정쟁으로 혼란한 정국이 이러진다. 이러한 혼란 속에 고구려와 신라의 잇따른 침공으로 더욱 곤경에 처하게 되었다. 초기의 혼란이 어느 정도 수습된 후 위덕왕은 신라와 고구려에 대한 복수를 위해 왜와의 동맹을 강화한다. 이어 왜와 연합하여 신라를 몇 차례 쳐들어갔으나 성과 없이 국력만 낭비하고 말았고 오히려 신라 진흥왕의 반격으로 어려움을 겪어야 했다. 백제는 관산성 전투 이후 가야에 대한 영향력을 상실했고, 이에 562년 위덕왕은 가야에 대한 영향력을 회복하기 위해 왜와 연합[60]하여 신라를 공격했으나 신라에게 패해하고 말았다. 오히려 이 사건은 신라 진흥왕을 자극하였고, 진흥왕은 가야 전역을 완전히 병합하게 된다(562년). 위덕왕은 젊은 시절 관산성 전투를 적극적을 추진하는 등 호전적인 강경파였지만 연이은 패배를 겪은 후, 재위 중기 이후에는 더 이상의 전쟁을 피하고 방어에만 치중하는 수동적인 모습으로 변모한다. 위덕왕은 신라와 고구려로부터의 침공을 저지하기 위해 왜, 중국과의 외교에 각별히 신경을 썼다. 때문에 그의 치세 후반기에는 별다른 전쟁이 없었다. 백제가 더 이상 호전적인 모습을 보이지 않고, 왜, 중국과의 동맹을 강화하자 신라도 이를 의식하여 더 이상 공격해오지 않았다. 그러나 위덕왕은 589년 수나라가 중국 대륙을 통일하자, 수나라에 사신을 보내 수나라가 고구려를 침공한다면 백제가 돕겠다고 제안했다. 597년 위덕왕의 병환이 심해지자 그 틈을 타 위덕왕의 동생인 부여계(훗날 혜왕)가 권력을 장악했다. 598년 수문제가 고구려를 침공(1차 고구려-수나라 전쟁)하자 약조대로 백제도 고구려의 배후를 공격하며 수나라를 도왔다. 그러나 고구려는 수나라를 격퇴했고, 고구려가 보복으로 백제를 침공하여 어려움을 겪게 되었다.

이처럼 나라가 혼란스러운 와중인 598년 위덕왕과 태자 아좌가 동시에 의문스러운 죽음을 맞게 되었고[61], 당시 정권을 장악하고 있었던 부여 계(季)가 왕위에 올라 혜왕(재위 598년 ~ 599년)이 되었다. 혜왕은 즉위한지 1년 만에 죽었고 법왕이 즉위했다. 《일본서기》와 《수서》에는 법왕이 위덕왕의 아들이라고 되어 있는데[62], 이 기록이 맞다면 법왕이 정변을 일으켜 혜왕에게 복수하고 왕위에 오른 것으로 보인다. 법왕 역시 젊은 나이에도 불구하고 즉위한지 1년이 채 되지 않아 죽음을 맞는데, 정변에 의해 살해당한 것으로 보고 있다.

이러한 위기는 7세기 초반의 무왕(재위 600년 ~ 641년) 대에 이르러서야 어느정도 회복되었다. 무왕은 내부적으로 왕권을 회복을 위해 노력했다. 또한 대외적으로 신라와의 전쟁에 총력을 기울였다. 무왕은 재위 기간 중 신라와 10여 차례에 걸친 전쟁을 치렀다. 한편 무왕은 북쪽의 고구려를 견제하기 위해 수나라와 당나라에 계속 사신을 파견하여 고구려를 침공해 줄 것을 요청하며 중국과 우호 관계를 유지했다. 또한 무왕은 수도를 익산으로 옮기려는 구상을 하기도 했지만 실현되지는 않았다.

무왕의 뒤를 이어 즉위한 의자왕(재위 641 ~ 660년)은 백제 역사에서 손에 꼽을 만한 호전적인 군주였다. 그는 즉위 이듬해인 642년 신라를 공격하여 신라의 전략 요충지인 대야성(합천)을 함락시키는 것을 비롯해 여러 성을 함략하는 전과를 올렸다. 이후에도 의자왕은 재위 기간 동안 총 10차례 신라를 공격했다. 그러나 김유신이 활약하는 신라의 반격도 만만치 않아 일진일퇴의 소모적인 상황이 반복되었다. 그러나 의자왕의 끊임없는 신라 공격은 효과가 없는 것은 아니었는데, 신라는 백제 말고도 호전적인 연개소문의 고구려와도 싸워야 했기 때문이었다. 의자왕은 고구려와 신라가 싸우는 와중에 신라의 배후를 공격하여 재미를 보기도 했다. 그러나 의자왕은 외교적으로 치명적인 실수를 저질렀는데, 선대 무왕 시절부터 우호 관계를 유지해 왔던 당나라에 대한 의리를 깨버렸고, 그 결과 당태종의 분노를 사서 당나라와의 외교 관계가 완전히 끊기고 말았다.[63] 당나라는 한반도에서 백제, 신라와 모두 동맹을 맺고 있었으나 신라와는 몇 가지 분쟁으로 껄끄러웠던 반면[64] 백제와는 무왕 시절부터 우호적인 관계를 유지해 오고 있었다. 그러나 645년 의자왕의 배신으로 당태종은 백제와 단교했고, 대신 신라와의 동맹을 강화하여 648년 나당동맹이 체결된다.

3.6. 멸망[편집]

의자왕이 당나라를 배신한 후 648년 나당동맹이 맺어지고, 660년 당나라와 연합한 신라에 의해 멸망했다.

멸망 직전 백제는 의자왕의 과도한 전쟁과 향락으로 인해 내부적으로 심각한 와해가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의자왕의 향락에 대해서는 승자 입장에서 기록된 《삼국사기》에서 사실을 왜곡했을 가능성이 제기되는 경우가 많다. 하지만 이에 대한 반론이 있다. 첫째는 승자 입장에서 굳이 패자를 왜곡하며 비하할 이유가 없다는 것. 둘째로 현대 사학계에서 삼국사기와 중국 문헌들과 철저한 교차 검증이 이루어지면서 삼국사기가 생각했던 것 이상으로 매우 정확하고 공정한 사서라는 점이 입증되었기 때문이다. 삼국사기는 사실상 문헌 자료를 참고할 수 없는 건국시기에 관해 어쩔 수 없이 일부 구전 전설을 참고한 것을 제외하면 역사 시대 이후에 대해서는 중국과 당시 한반도에 존재하던 각종 1차 사료를 바탕으로 상당히 공정하고 정확하게 기록되었다는 점이 인정되고 있다. 삼국사기가 수세기가 흘러서 고려시대에 쓰여진 역사서라는걸 잊으면 안된다. 그 시대에 수세기가 흘러서 역사서를 쓴다는건 오류를 감안해야만 한다. 고구려 건국연대만 하더라도 광개토대왕비문에는 광개토대왕이 주몽의 17세손이라고 하였는데, 삼국사기에는 주몽의 12세손으로 기술하였다. 삼국사기보다는 당연히 광개토대왕의 아들인 장수왕의 기록을 신뢰하는건 당연하다. 다만 사실 향락은 중국 역대 사서에서도 전왕조가 멸망했을 때마다 주로 첫순위로 꼽히는 원인이기 때문에 다소 의례적인 측면이 있다.

의자왕의 빈번한 전쟁과 공포정치로 인한 백제 지배층의 분열도 멸망의 중요한 원인으로 꼽히고 있다. 전쟁은 국가 재정에 엄청난 부담을 준다. 의자왕은 삼국시대에서도 첫손에 꼽힐 정도로 많은 전쟁을 일으킨 왕이었다.[65] 의자왕의 빈번한 전쟁은 필연적으로 백성들과 귀족 층의 많은 반발을 불러왔다. 문제는 의자왕의 잦은 전쟁의 결과가 성과를 논하기 애매한 상황이었다는 점이다. 관산성 전투처럼 아예 심각한 패배를 당했다면 왕권이 심각하게 제한을 받았고 귀족들이 장악한 조정에 의해 당분간 전쟁 자체가 안일어났을 것이고,[66] 성왕처럼 가시적인 성과가 보일 경우 오히려 왕권이 강화될 수 있다. 의자왕은 아버지 성왕보다 더 많은 전쟁을 일으켰지만 그 성과는 아버지에 미치지 못했다. 이에 조바심을 느낀 의자왕은 계속해서 전쟁을 일으키게 된다. 과도한 전쟁과 위에 나온 향락의 결과 내부 반발은 심각해져갔다. 이에 의자왕은 반대 세력을 제압하고 왕권을 강화하기 위해 친위 쿠데타를 일으킨다.

일본서기 등에 따르면 의자왕은 조선시대의 사화와 비슷한 친위 쿠데타를 일으켜 반대파 중신들을 제거한 후 공포 정치를 펼쳤던 것으로 보인다. 의자왕은 656년 친위 쿠데타를 일으켜 숙청을 통해 조정의 반대 세력들을 제거했고 태자 부여융을 폐세자하고 부여효로 태자를 교체하였다. 숙청 과정에서 성충, 흥수 등 충신들까지 제거하자 민심과 귀족 세력의 지지를 크게 잃게 되었으나 의자왕은 오히려 공포 정치를 강화해 나갔다.

물론 백제 지배층의 분열과 권력 암투는 하루이틀 일은 아니었다. 백제 역사를 돌이켜 보면 외척 세력 등 권세를 가진 귀족 세력들이 권력을 장악하여 전횡을 일삼았고 그들끼리 피비린내 나는 정쟁을 치룬 것이 거의 일상에 가까울 정도로 빈번했다. 정쟁으로 인해 수많은 왕들이 암살당했고, 외척 세력에 눌려 왕권을 제대로 행사하지 못한 허수아비 왕들도 많았다. 이런 시절들과 비교한다면 의자왕은 백제 시대를 거쳐간 31명의 왕중 유능한 편에 속할지도 모른다. 의자왕 시절의 정쟁과 지배층의 분열이 이전 시대보다 심한 것이 아니었는데도 백제가 멸망한 것은 결국 나당연합군의 규모 자체가 과거의 위협들과는 차원이 달랐기 때문이었다.[67]

3.6.1. 멸망 과정[편집]

7월 9일 김유신 등이 이끄는 신라군과 계백 장군의 5천 결사대 간의 황산벌 전투가 시작되고, 같은 날 당나라군이 기벌포에 상륙한다. 흔히 나당 연합군이 공격해 왔을 때 백제의 계백 장군은 남은 군사 5천 명을 전부 이끌고 황산벌 전투에서 싸우다 장렬하게 전사한 것으로 묘사되기도 하는데, 백제 전군이 5천 명이 다였던 것은 아니다. 《구당서》 등을 참고할 때 기벌포에서 당나라군을 방어한 병력과 사비성 방어 병력이 별도로 존재한다.[68]

구당서》 소정방전(참고 문서)에는 소정방이 이끄는 당군이 강의 입구에 도착했을 때 백제군이 방어진을 치고 있었고, 이에 상륙 작전을 벌여 백제군을 격파해서 수천 명을 죽였으며, 당군이 그 후 수륙 병진으로 사비성으로 진격하자 백제는 나라를 기울여 저항하여 대전투가 벌어졌고 이때 다시 백제군을 격파하여 만여 명을 죽이거나 사로잡았다고 기술하고 있다. 이 내용은 《삼국사기》에도 나온다. 더구나 여기에는 백제군의 전멸을 암시하는 말[69]이 없으므로 실제 백제군의 규모가 몇만 명 수준은 되었을 것으로 보인다. 신라와의 싸움에 5천 명밖에 동원하지 못한 것은 주력이 당군을 요격해야 했기 때문일 가능성이 높다.[70]

이때 흥수는 당군과 신라군을 각각 좁은 길목인 기벌포와 탄현에서 막을 것을 제안하였으나 의자왕 및 백제 수뇌부는 당군과 신라군이 좁은 길목을 통과한 직후에 공격해서 섬멸시키자는 작전을 채택하였다. 《삼국사기》 백제 본기 의자왕 편에는 신하들의 말이 다음과 같이 기록되어 있다.

"당병으로 하여금 백강에 들어와서 흐름에 따라 배를 정렬할 수 없게 하고 신라군은 탄현에 올라서 소로를 따라 말을 정렬할 수 없게 한 다음 군사를 놓아 치면, 마치 조롱 속에 있는 닭을 죽이고 그물에 걸린 물고기를 잡는 것과 같습니다."
그러나 신라와 당 중에서 어느 쪽과 먼저 싸울 것인지는 결정하지 못했다.


삼국사기》 의자왕 본기

이러한 작전 내용과 실제로 요격하는 데 동원한 군대의 규모를 고려해 보면 두 가지의 해석이 가능하다. 물론 그 이외의 해석도 있을 수 있다.

  • 첫번째는 백제군은 내선의 이점을 살려 먼저 계백이 소수의 군사로 신라군을 저지하는 동안 전력을 기울여 당군을 격파하고 군을 돌려 다시 신라군을 격파하자는 결정을 내렸다는 것이다. 당군을 요격한 백제군의 숫자가 신라군을 저지한 계백의 부대의 수에 비해 압도적으로 많기 때문이다. 단, 이 해석대로라면 수도 가까이에서 결전이 벌어진 것은 백제의 작전대로였다는 의미가 되므로, 계백이 출전할 때는 아직 그 전투가 벌어지기도 전인데 벌써부터 처 자식을 죽여야 할 정도로 비관할 필요는 없었을 게 의문으로 남는다.

  • 두번째는 반대로 백제군이 당군의 진격을 저지하면서 먼저 신라군부터 격파할 작전을 세웠다는 것이다. 실제로 신라군은 별 저항을 받지 않고 탄현을 넘은 것과는 달리 당군은 강어귀에서부터 백제군의 요격을 받았기 때문이다. 즉 백제군은 강어귀에서 당군을 저지하려는 시도를 실제로 했던 것이다. 이 해석대로라면 백제의 원래 계획과는 달리 당군이 백제군의 저항을 물리치고 오히려 신라군보다 더 빠른 속도로 진격해왔기 때문에 백제군의 작전이 완전히 무너져버린 셈이다. 그렇다면 백제군은 신라군과의 일전을 준비하다가, 신라군의 위협은 그대로 남은 상태에서 다시 당군과의 갑작스러운 전투에 휘말려 앞뒤로 적의 공격을 받는 상황이 되었을 것이다. 그렇다면 백제 본기 의자왕 편에 의자왕이 당군을 먼저 공격하자는 주장과 신라군을 먼저 공격하자는 주장 중에서 어느 쪽도 선택하지 못한 것으로 기록된 점도 설명가능하며, 계백이 황산벌로 출전할 때 이미 처 자식을 자기 손으로 벨 정도로 절망적인 상황이었던 것과도 부합된다.[71]


7월 12일 신라군과 당나라군이 합류한다.[73] 같은날 나당연합군이 사비성을 포위했다. 사비성에서 백제 주력군이 궤멸되자 13일 의자왕은 태자 부여효와 함께 사비성을 탈출하여 방어에 유리한 웅진성으로 도피한다. 사비성에서는 장자 부여융, 차남 부여태가 남아 있었는데 이들은 항복을 놓고 의견 충돌을 벌인 것으로 보인다. 부여태는 끝까지 저항하려 했던 것 같고 스스로 왕위에 오르려는 시도까지 했다. 그러나 부여융, 부여태의 아들 문사, 대좌평 사택천복 등은 상황이 이미 돌이킬 수 없을 정도로 악화된 것을 알고 성 밖으로 나와 항복하였다. 결국 부여태 또한 항복함으로서 7월 13일에 사비성은 나당 연합군에게 함락당했다.

7월 18일에 웅진성으로 달아났던 의자왕과 태자 부여효 또한 항복하였다. 이로써 백제는 개국한 지 678년 만에 망하게 되었다. 백제가 멸망한 후, 당나라는 의자왕과 장자 부여융[74]을 비롯하여 약 1만 명의 백제인을 당나라로 압송했다(660년).

백제 멸망 과정과 관련하여 2007년 새로운 유적의 발굴로 새로운 떡밥이 투척되었다. 예식진 항목 참조. 예군 항목도 보면 알겠지만 예씨 일족은 백제 멸망 때 당에 빌붙어 크게 출세한 것으로 추정된다.

3.6.2. 백제부흥운동[편집]


나당동맹 체결시(648년) 당태종과 신라 김춘추는 대동강을 경계로 국토를 분할하기로 약조한 바 있었다. 그러나 당 태종의 아들인 당 고종은 약조를 깨고 백제 지역에 웅진도독부를 비롯한 5도독부를 설치하여 직접 통치에 나섰다. 백제 땅에 5도독부를 세운 당나라는 백제 지역에서 무자비한 약탈과 학살을 일삼았다. 이에 백제의 장수 출신인 귀실복신, 도침 등이 백제 부흥 운동을 전개했다. 이들은 왕에게 요청하여 일본에 있던 왕자 부여풍을 귀국(662년 5월)시켜 풍왕으로 추대했다.

한편 당나라로 압송되었던 태자 부여융은 당으로 귀화하여 당나라 장수 신분으로 돌아와 당군을 이끌고 동생 부여풍이 이끌던 백제 부흥 운동을 토벌했다. 신라 역시 당나라의 지원 요구에 응하여 백제 부흥 운동 토벌에 나섰지만, 신라는 유화정책을 펼치며 당나라와는 다르다라는 인식을 백제 유민들에게 심어줬다. 신라군은 당군과 가급적 독자적으로 작전을 펼치며 토벌된 지역을 직접 신라 영토에 귀속시켜 나갔다.

여기서 주의할 점은 백제 부흥 운동의 1차적 대상은 당나라였다는 점이다. 당나라가 5도독부를 설치한 후 행한 무자비한 통치가 현지 주민들에게 커다란 저항감을 불러일으켰기 때문이다. 이는 몇 년 후 나당전쟁이 일어나자 백제 유민들이 신라 편에서 당나라와 싸우는 것을 택한 사실에서도 잘 나타나고 있다.

이 와중에 백제 부흥군 지도부 내에선 심각한 내분이 일어나 복신도침을 죽이고, 다시 부여풍이 복신을 죽이는 데에 이른다. 이런 상황에서 663년 9월 김유신이 이끄는 신라군과 유인궤, 부여융 등이 이끄는 당군이 백제 부흥군의 본거지인 주류성을 포위했고, 당군의 170여 척의 배가 주류성 입구인 백강을 둘러쌌다. 백제 부흥군의 지원 요청을 받은 가 2만 7천 대군과 1000척의 대함대를 파병하여 백강 전투가 벌어졌지만 결국 나당 연합국에 궤멸됐고, 부여풍은 고구려로 달아났다. 이어 주류성이 함략되면서 백제 부흥 운동은 이 단계에서 실패가 분명해진다.

본진인 주류성이 함략된 후에도 아직 임존성에 백제 부흥군 잔여 세력이 있었지만, 그간 부흥 운동을 이끌던 흑치상지가 돌연 부흥군을 배반하고 당나라군에 투항한 후 당군을 이끌고 나타나 임존성을 공격했다. 결국 임존성의 지수신이 패하면서 백제 부흥 운동은 완전히 종결되었다(664년). 임존성 함략 직후 664년 4월 사비성 봉기가 일어났지만 진압당했고 이를 끝으로 옛 백제 왕족의 주도하는 백제 부흥 운동은 완전히 끝나게 된다.

3.6.3. 백제 유민의 집단 일본 이주[편집]

백제가 멸망한 이후 백제의 여러 유력 씨족은 신라 밑에 있기보다는 우호가 깊던 일본으로 이주하는 길을 택했다. 많은 백제 유민이 왜로 건너갔던 당시 선박으로 왜(일본)로 향하는 백제 남부에서 큐슈로 향하는 루트는, 백제와 왜의 교역이 자주 이뤄졌고 왜의 사신이 중국에 조공할 때 이용하던 경로기도 했다. 양잠 기술 등 고급 기술을 지닌 씨족이나 학문, 과학 분야의 씨족 등이 대규모로 일본으로 떠났고, 야마토 조정은 이 횡재를 맞아 이들을 여러 지역으로 분산시키고 그 능력을 흡수하여 국력과 왕권을 강화했다.[75] 고구려 유민 일부도 이러한 길을 걸었다. 이렇게 조정에서 대우를 받은 부류는 유용한 기술을 갖고 있던 운이 좋은 집단이었고, 굴러들어온 돌을 위해 이미 기반을 잡고 있던 기존 기득권의 세력을 떼어줄 수도 없는 노릇이었기 때문에 고구려, 백제, 신라 출신을 불문하고 애매한 부류는 대부분 당시로선 미개척지였던 관동 지방 개척을 위해 이주된다. 지금은 관동이 중심지가 된 것이 역사의 아이러니. 일본으로 건너간 백제 유민들은 일본 고대 국가 형성에 크게 기여한 것으로 보고 있다. 일본이 백제 멸망 직후인 671년 갑자기 국호를 바꾸고 이어 수도를 새로 짓고 율령을 만드는 등 급작스런 변화와 발전을 이룩한 것이 백제 유민들이 몰려온 충격파의 영향인 것으로 해석된다.

다만 유민들에게 나름의 굴곡이 없었던 건 아니었다. 의자왕의 아들인 부여풍(扶餘豊)은 왜에 체류하고 있다가 달솔이였던 부여복신(扶餘福信)과 함께 일본에서 백제로 귀국하여 백제 부흥군에서 왕으로 추대되었으나 663년 백촌강 전투에서 나당 연합군에게 패배하였다. 백제의 무령왕이 일본에 체류하고 있을때 일본 여성과 결혼하여 낳은 먼 후손인 황후 타카노노 니이가사(高野 新笠)가 낳은 간무 덴노는 모계가 상대적으로 천한 직급에 있어 왜 왕실의 많은 반대가 있는데도 불구하고 왜왕으로 추대되었다. 이를 보면 망국 유민의 설움이 없었던 건 아니며, 《일본서기》에 의하면 멸망전 도래한 백제인 또는 백제에 파견되어 체류하던 왜의 관리 등은 높은 벼슬도 한 것으로 보이나 멸망 후 도래한 백제인의 직급도 생각보다 꽤 하급이다. 오히려 어떻게 보면 정복 직후 상류층에 한정하여 통일 신라의 백제인 대우가 더 괜찮았던 걸로 보인다.

일단 부여풍의 형제인 선광(善光)의 자손은 백제왕(百済王)이라는 성을 왜 왕실에서 부여받았고, 《일본서기》에 의하면 4세기말에 하타씨라고도 불리우는 궁월군(弓月君)이 사람들을 이끌고 왜에 귀화하였다고 한다. 현 일본의 큐슈 미야자키현의 난고 촌(南郷 村)이라는 작은 마을에 백제 왕이 숨어살았다던 전설이 있다.

3.6.4. 통일 신라에서의 백제 유민[편집]

당나라의 무자비한 통치를 경험했던 백제 유민들은 나당전쟁이 발발하자 당나라에 대한 적개심을 가지고 신라 편에서 싸웠다. 나당 전쟁이 끝난 후 백제 지역은 전쟁이 끝난 평화를 맞이했으며 그 지역에 살던 백제 유민들은 한동안 신라인으로 만족하며 살았으나, 한편으로는 신라의 골품제 탓에 상대적인 차별을 느껴야 했다.

통일 신라가 문무왕 재위기에 모든 백제인에게 수도와 지방의 벼슬을 주었다고 하지만, 골품제 하에서 백제인에게 가능한 관등은 기껏해야 고작 5두품이 한계였다. 진골은커녕 6두품도 주지 않았던 것. 그나마도 가장 높은 지위에 있던 자가 그 정도인데, 초반의 정복기에 잠깐 옛 백제의 고관들에게 경관 벼슬을 주었다고 해서 그것이 이후 백수십 년의 지배 내용 전체를 대표했다고 보는 것은 대단한 단견이다. 그렇게 따지면 어디 일본 제국은 조선의 고관들에게 상응하는 지위를 보장하지 않았는가? 많은 양반들에게 지위와 재산을 약속하며 포섭을 했었으나 이런 걸로 일제가 조선을 과연 융화시키는데 성공했다고 볼 수는 없는 노릇이다.

백제가 망했을 때 별다른 강등 조치는 없었고 다들 신라의 성씨를 부여받았다고 보는 건 상당히 지나친 추측에 불과하다. 1차 사료에 나오는 통합기 초반의 몇 줄 기록이 전부면 왜나라만큼 조선인을 우대한 나라가 없으나 실상이 그러했는지는 상당한 의문이다. 한국사에서 비신라계 호족들에게 성씨가 보편화되는 건 왕건의 토성분정 이후부터다.

또한 673년에 문무왕이 적극적인 융합 정책을 실시하여 모든백제인들에게 서울과 지방의 벼슬을 주었다고 하면서 본디 정복민은 노예가 되거나 죽임을 당하는 게 일반적인데 유독 신라만 포용 정책을 실시했다고 보는 주장이 있으나, 이는 터무니없는 오해고 포장이다. 이러한 초반의 통합 정책이라 함은 정복 국가면 다들 시행하는 것으로, 신라만 하는 게 아니다.[76]

고구려계 유민의 경우 왕족이 진골, 귀족은 6두품으로 대우 받았던 것에 비하면 한 단계씩 낮춰서 골품제에 편입된 백제계는 상대적으로 낮은 대우에 차별을 당한 건 사실이다. 일단 고구려계는 안승이 이끌고 온 군사들과 백성들인데, 이들은 신라의 경계선 바깥 즉 대동강 이북 지역에 거주했던 자들로서 고구려 멸망 후 당나라가 설치한 안동 도호부의 지배를 거부하고 자발적으로 대동강을 건너 신라로 귀순했고, 게다가 안승이 이끌고 온 고구려계 병사들은 귀순 직후에 벌어진 나당 전쟁에서도 상당한 전과를 올렸기 때문에 이러한 배경이 작용하여 진골 및 6두품으로 편입될 수 있었다.

백제 유민들도 나당 전쟁에서 공을 세우긴 했지만 고구려 유민들과는 이러한 상황의 차이가 있었다. 다만 소수 귀족이나 유력자가 아닌 경우 이러한 정도의 차별은 수용이 가능한 정도였고, 신라가 백제 유민들에게 시행한 포용 정책이 진한, 가야, 고구려 유민에게 행했던 것처럼 기존의 지위를 완전히 인정해주는 정도까지는 아니었지만 계속해서 승산도 없는 전투를 벌이거나 당의 치하로 들어가느니, 신라의 백성으로 사는 건 적어도 백제 멸망 직후엔 매력적인 선택지였다.

다만 그럼에도 백제 유민들이 전반적으로 고구려 유민들에 비해선 반항이 거셀 수밖에 없었던 건, 고구려계 유민들 같은 경우 그나마 황해도 지역은 중앙 정부의 힘이 잘 미치지 않아 반쯤은 자치적이었으며 경기도 일대도 그렇게 큰 지역에 태수는 하나뿐이어서 압박이 덜했으나 옛 백제 지역은 행정 구역도 많고 중앙 정부의 통제도 꽤 잘 되어 있어서였던 데 원인이 있었다. 신라 왕실이 딱히 의도적으로 백제계를 탄압하고자 했던 건 아니었지만, 이러다 보니 시간이 지날수록 성장하는 지역 세력의 역량에 비해 대우는 그만 못한 모순은 결국 옛 백제 지역에 집중될 수밖엔 없게 된다.[77]

3.6.5. 소백제 (요동 건안성)[편집]

태자 부여융은 사비성과 웅진성이 함략되면서 백제가 멸망(660년)한 후 생포되어 신라 태자 김법민에게 굴육을 당한 후 당나라로 압송(660년)되었다. 당나라 수도 장안으로 압송된 부여융은 당나라로 귀화한 후 당의 장수가 되어 당군을 이끌고 돌아와 동생 부여풍이 이끌던 백제 부흥군을 토벌했다(...). 부여융은 663년 백강 전투에도 참전하여 백제 부흥군과 왜군을 궤멸시키고 주류성을 함략했다.

한편 백제 부흥 운동을 진압하는 과정에서 신라군이 진압한 영토들이 신라 본토로 직접 귀속되면서 당나라는 기존의 5도독부를 유지할 수 없게 되자 웅진도독부로 단일화한 후 나머지 네 개의 도독부를 폐지했다. 부여융은 665년 통합된 웅진 도독부 도독에 임명되었고, 괴뢰국 백제 왕을 자처했다. 그러나 곧 나당전쟁이 발발했고(669년), 전세가 신라 쪽으로 기울자 결국 당나라의 장안성으로 돌아갔다. 신라는 웅진도독부를 축출하고, 백제 전역을 완전히 편입했다.

당으로 돌아간 부여융은 나당 전쟁이 완전히 종결된 676년 요동의 건안성에 웅진 도독부를 세우고, 백제 멸망(660년) 당시 당나라로 압송된 약 1만 명의 백제 유민들을 모아 지배했다. 이를 소백제라고 부른다. 당나라에서 부여융에게 내린 작위는 대방군왕, 옛 백제 왕들과 같은 동일한 직위였다.

부여융의 손자인 부여경측천무후 대에 대방군 왕으로 임명된 것을 끝으로 작위 세습에 관한 기록이 전무한 것을 보면 8세기 초에 소멸되었을 가능성이 높다.

당의 역사서 《구당서》는 이 건안성이 발해에게 흡수된 것을 백제의 멸망이라고 보고있는데, 이는 건안성으로 이주한 백제 유민들을 염두한 것으로 보이긴 한다.

그리고 2009년 괵왕 이옹과 그의 부인 합장묘가 발굴이 되어 큰 화제가 되었는데 화제의 이유는 그녀의 성이 '부여' 백제 왕족이라 멸망한 이후의 백제에 새로운 해석이 나오게 되었다.

3.6.6. 후백제[편집]

서기 900년, 견훤이 옛 백제를 계승한다며 세운 나라이다. 자세한 내용은 후백제 문서 참조.

3.6.6.1. 후백제와 백제부흥운동의 연관성[편집]

4. 영역과 행정구역[편집]

파일:baekje_map_ge.jpg

백제의 최대 판도.


각 지명에 대한 설명은 가나다순으로 한다.


한성백제 및 웅진 천도 초기에는 담로제(擔魯制)를 시행하였다. 이는 사료 《양서(梁書)》 북사 열전 백제조에서 확인할 수 있다.

號所治城曰固麻謂邑擔魯 如中國之言郡縣也 其國有二十二擔魯 皆以子弟宗族分據之
(백제는) 도성을 고마라고 부르며 속읍을 담로라고 부르는데, 이는 중국의 군현제와 같은 것이다. 그 나라에는 22개의 담로가 있는데, 모두 왕의 자제와 종족으로 하여금 다스리게 하였다.


이후 백제 성왕대에 이르러 수도와 지방을 각각 5부5방으로 나누었으며, 각 방에는 방령이라고 하는 지방관을 파견하였다. 방령은 달솔(達率)[79]의 관등을 가진 자에게 임명되었으며 아래에 두 명의 방좌(方佐, 차관)를 둘 수 있었다. 사비 천도기 이후로는 5방체제가 더욱 굳어지고 요새화되어서, 방령이 군정권과 군령권을 행사하는 등 도시의 요새화가 진행되었다.


5. 마한 정복에 관한 논란[편집]

마한은 기원전 2세기 무렵부터 존재했던 것으로 추정된다. 이후 고구려계 유민들이 마한 지역의 일부였던 한강 하류로 내려와 백제를 건국했다고 전해진다. 이후 백제는 지속적으로 전투를 벌이며 마한 54개국을 점진적으로 복속하면서 영토를 확장해 왔다.

백제가 언제 마한 전체를 복속시켜왔는가에 대해서는 오랫동안 논란이 있다. 그동안 《일본서기》에 근거하여 369년 근초고왕 대에 백제가 마한 전역을 정복했다는 설이 주류였다. 그러나 근초고왕설의 유일한 근거인 《일본서기》 기록은 근초고왕 24년 남쪽 오랑캐를 무찔렀다는 식으로 표현되어 기록 자체가 애매한데다가 마한 전체를 확실히 정복했다는 이야기도 없기 때문에 근초고왕 정복설에 대해서도 많은 논란이 있었다. 무엇보다 백제 자체가 마한 연맹체의 구성국가였으니 마한과 대립하며 마한을 정복하였다는 표현 자체가 모순이 있다.

그러다가 2010년 이후 전라남도 지역의 여러 고고학적 성과가 발표되면서 현재는 6세기 초중반까지 전라남도에 독자적인 마한 세력이 존재했고, 백제가 전라남도 마한 지역과 병합한 것은 적어도 530년 이후라는 것이 정설이 되어가고 있다.

5.1. 구 온조왕 완전병합설[편집]

삼국사기》에는 백제가 '마한(왕)'을 거꾸러 뜨린 것이 온조왕 대라고 기술하고 있다. 그러나 적어도 3세기까지 경기도 ~ 충청도 일대에 걸친 통일적인 정치 세력이 존재했다는 근거가 없기 때문에 온조왕이 마한 54개 소국 중 하나만 정복했거나 잠시 군사 활동만 하고 왔을 뿐 대규모적인 정복 활동은 하지 않았다고 보아야 한다. 설령 기록이 사실이라고 주장해도 '마한 왕' 한 명을 몰아낸 것뿐이 되고 '마한을 정복했다'는 말이 무의미해진다. 그렇기 때문에, 실제로 '마한을 정복했다'고 말할 만한 시점은 경기도 지역에 백제 토기가 대대적으로 확산되는 3세기 후반에 근거하여 고이왕 대 일어난 사건이라는 설, 벽골제 건축 기사 등에 근거하여 비류왕 대 일어난 사건이라는 설, 근초고왕 대 초기 기사의 공백과 4세기 중후반 충청도 북부 지역에서 고분군의 교체 등에 근거하여 근초고왕 대 일어난 사건이라는 설 등이 갈리고 있다. 이중 근초고왕 대에 마한을 정복했다는 설이 가장 큰 지지를 받았다.

5.2. 구 근초고왕 완전병합설 [편집]

고고학적 연구가 부실했던 1990년대까지는 근초고왕 때 백제가 마한을 완전 정복했다는 설이 큰 지지를 받아왔다. 그러나 현재 근초고왕이 마한을 완전 정벌했다는 설은 사실상 폐기되었고, 근초고왕의 마한 정벌은 차령산맥 또는 노령산맥 이북 지역까지 한정된 것으로 보고 있다.

근초고왕 정복설은 《일본서기[80]에 근초고왕 24년(369년) 남서쪽 오랑캐를 정발했다는 기록을 근거로 삼고 있다. 하지만 이 기사 자체가 사실적인 신뢰성이 없다고 하여 근초고왕의 마한 정벌설에 대해 비판하거나 부정하는 견해도 있어 왔다.[81] 또한 기록이 사실이라 치더라도 마한 전체를 완전히 정복했다는 근거가 되지는 못한다. 게다가 근초고왕 이후에도 동성왕, 무령왕 등이 계속 남쪽 세력과 전쟁을 벌이는 기록이 나온다는 점도 근초고왕의 마한 완전 정복설을 부정하는 중요한 근거였다.

한편 그 외에 일부 견해는 근초고왕 대에 마한 세력을 거의 병합했으나, 근초고왕 사후 백제가 쇠퇴하면서 마한 세력이 다시 부흥했다고 보는 다소 절충론적인 설도 있었다. 그러나 추가적인 고고학적 연구 결과 현재 이러한 절충설도 부정되고 있다.

2000년대 이후 전라남도의 고고학 발굴 결과들이 나오면서 6세기 중반까지 전남과 전북 일부 지역에 독자적인 마한 세력이 존재했음이 사실로 확인되었고, 근초고왕이 마한을 완전히 정복했다는 설은 현재에는 부정되고 있다. 현재 학계에서는 근초고왕 대 백제의 남쪽 경계선에 대해 차령산맥 이북설과 노령산맥 이북설이 논쟁 중에 있다. 일부는 차령산맥과 노령산맥 사이 지역, 즉 지금의 전라북도 지역 중 서쪽 해안 지역은 백제에 복속되었고 동쪽 산악 지역은 마한에 남아 있다고 보는 이들도 있다.

현재 학계 정설은 근초고왕의 마한 정벌 당시 백제의 직할지가 된 지역은 노령산맥 이북 지역이고 노령산맥 이남과 영산강 유역은 5세기 후반~6세기 중반부터 서서히 편입된 것으로 보인다. 단, 일본서기는 이 지역이 독립 세력이면서도 한편으로 백제의 간접 지배를 받았다고 한다.

이는 대소왕 이후 고구려의 보호국이 된 동부여랑 유사한 부분이다. 대소왕 이후의 동부여는 한동안 혼란을 겪다 후기 동부여로 넘어가는데 후기 동부여는 사실상 고구려의 비호를 받으며 살아가는 고구려 경내에 속한 국가나 마찬가지였다. 그리고 동옥저의 경우도 건국 초기부터 복속되어 뒤에 동천왕 시기에 위나라를 격퇴한 고구려가 내친 김에 동옥저를 완전히 병합해버렸다. 동부여나 동옥저의 사례를 보면 마한 침미다례 세력도 간접 지배를 받다 5세기 후반 이후로 완전히 병합되었을 가능성이 높다.

마한이 530년대에 완전히 정벌된 건 학계의 공통 의견이지만 현재 학계의 주류는 근초고왕 때 적어도 전라북도 북부 지역까지 정벌한 건 사실로 보고 있다. 근초고왕 시대 직후인 4세기 후반~5세기 중반 때 전라북도 서북부 지역에 소수나마 백제식 묘제가 발견되는 것은 이 지역이 미약하게나마 중앙 정부의 통제를 받았다는 것을 의미한다. 이런 고분은 백제의 지원을 받는 유력 세력이 존재했다는 사실을 의미하기도 한다.

5.3. 6세기 완전병합설 (정설; 전북 동남부, 전남 지역 병합)[편집]

과거에는 정황상 근초고왕 시기를 전후로 목지국 등 마한의 전 지역을 백제가 병합한 것으로 추론하는 시각이 우세했다. 하지만 1990년대 후반 이후 전라남도 지역의 고고학적 발굴이 활발히 진행되었고 최근 그 발굴 결과들이 연이어 발표되면서 결국 기존 학설은 완전히 뒤집히게 되었다. 근래의 여러 고고학적 발굴의 결과 6세기까지 전라남도 전역에 걸쳐 백제와는 다른 독자 세력이 존재했음이 확인되었다. 전라남도의 독자 세력들은 해상으로 백제, 대가야, 일본, 중국과 교류하기도 했다. 이들이 축조한 고분들은 당시 백제의 왕릉을 능가하는 규모를 가지기도 했다. 나주시 ‘신촌리 9호분’을 만들려면 연인원 5000명 이상이 동원됐을 것으로 추정되기 때문에 고대 국가 체계에 근접했을 것으로 추정되고 있다. 다만 전라남도 마한 세력이 고대 국가 단계에 이르렀는지에 대해서는 아직까지 자료가 불충분한 상황이다. 이러한 고고학적 발견이 이어지면서 '근초고왕 대에 전라남도 '마한' 지역은 정복되지 않았다'는 설이 크게 지지를 받게 되었다.

전라남도 지역에 대한 백제의 침투는 5세기 중후반부터 시작하여 방 - 군 - 성제가 시행되었을 6세기 초중반이 되어서야 끝난다. 백제는 6세기까지 남방을 경략할 여력이 없었다. 지속적으로 강성해지며 남하하는 고구려를 방어하기에 급급했고 475년 한성을 상실하고 웅진으로 천도하면서 바닥부터 다시 올라와야 했다. 나주 신촌리 고분군 등은 이 시기에 그 규모가 급속도로 커지는 모습을 보인다.

초기에는 백제계 석실분으로 보아 백제 측에서 직접 개입하기도 하였지만, 전방후원분(장고형 무덤)이 등장하기도 하기 때문에 부족한 힘을 보탤 세력을 찾아 일본계 세력을 끌어들이기도 한 것으로 보인다. 그러나 전방후원분은 한 지역에 1개, 많아야 2개가 존재하는 정도이고 고분'군'을 형성하지 못하는지라 일본계 세력은 백제와 협력한 개인이 사망하여 전방후원분을 축조한 이후에는 한반도에서 기반을 유지하지 못하거나 현지에 동화된 것으로 보인다. 이 과정에서는 백제의 압력이 있었을 것임을 충분히 예상할 수 있다.

기록상으로 볼 때 백제는 동성왕무령왕 등을 거치면서 여러 차례 정벌에 나선 끝에 6세기 중반[82]에 전라남도 마한 세력을 백제에 완전히 복속한 것으로 보인다.

백제와 전라남도 마한의 관계에 대해 전쟁과 같은 긴장 관계가 없었을 것이라는 주장도 있다. 성곽의 흔적이 발견되지 않은 점으로 보아 마한과 백제간에 전쟁이 없었다고 보여지며, 고분군의 현지 세력들 또한 대백제 협력자였을 것으로 추정할 수 있다는 것이다. 또 전남 지역에 대한 영토화 과정 전체는 백제가 통제하고 있었고 장기간에 걸친 점진적인 과정이었기에, 현지 세력들이 강한 힘을 가진 백제를 인정하며 자발적으로 백제에 순응하며 점차 백제의 관료화되었을 것이라는 것이다.

그러나 이러한 주장은 다소 감상적인 주장에 가깝고, 실제로 문헌 기록과 최근 고고학적 발굴 결과로 미루어 볼 때 백제와 마한은 기본적으로 군사적으로 적대적 긴장 관계에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우선 동성왕, 무령왕 대에 백제가 마한 정벌에 나선 기록이 있으며, 백제가 마한을 완전 병합하고 나서 전라남도의 복속 지역 백성들에게 상당히 차별적인 푸대접을 했다는 기록이 있다. 또한 최근 고고학적 발굴 결과로 미루어 볼 때 마한 세력은 멸망하기 직전까지 백제와는 근본적으로 다른 고유의 문화를 유지했고, 일본, 신라, 가야에도 외교 사절을 파견하는 등 독자적인 국가를 운영하기 위해 노력한 흔적이 발견된다. 마한의 성곽이 별로 남아있지 않은 것은 마한의 세력이 대규모 성곽을 건설할 만큼 강력한 통일 세력을 이루지는 못했다고 추론할 수 있는 부분이다. 이는 백제 역시 마찬가지여서 백제의 성곽 유적은 신라나 고구려에 비해 매우 부실한 편이다. 때문에 현재 학계의 주류는 백제가 마한과 치열한 전투 끝에 마한을 병합해 나갔던 것으로 보고 있다.

한편 일각에서는 현재 단순히 '마한'으로 단순히 지칭하고 있는 전남 지역을 계속 '마한'으로 부를 수 있는지 재고할 필요가 있다는 견해를 보이고 있다. 《정사 삼국지 위지 동이전》 및 《진서》 동이전에서 '마한'이라는 용어가 사용된지 200년이 넘게 지난 시점까지 전남 지역이 독자적인 모습을 보이기 때문이다.[83] 때문에 최근 고고학계의 일각에서는 이 지역을 '영산강 지역' 내지 '전남 지역'이라고 하여 논란을 일으키지 않을 표현을 써서 지칭하는 경우도 있다. 아직까지 다수의 학자들과 전라남도 현지 지자체들은 대체로 '마한'이라는 용어를 그대로 사용하는 경우가 많다. 애초에 '마한'이라는 단어 자체가 단일 세력을 지칭하는 것이 아니라 넓게 퍼져 있는 수십개의 소국들을 통칭하는 용어에 불과하기 때문이다. 변한이 가야로 명칭이 변한 것처럼, 전라남도 마한 또한 자신들을 지칭하는 별도의 별칭이 있었을 지도 모른다. 그러나 신라를 통해 기록이 후세까지 전달된 가야와는 달리 전라남도 마한에 대해서는 남아있는 문헌 자료가 거의 없고 거의 전적으로 고고학적 연구에 의존하고 있기에 이를 밝혀내기가 쉽지 않을 것으로 보인다.

박중환 국립 나주 박물관장은, 전라남도 역사에서 100여년에 불과한 백제라는 ‘지류’가 700여년간 이어진 마한이라는 ‘본류’를 잠식한 형국이라면서 이제라도 역사를 바로잡을 필요가 있다고 지적했다.

자세한 내용은 마한 문서 참조.

5.4. 백제와 마한의 경계는?[편집]

6세기 중반에 백제가 마한을 완전히 병합했다는 것이 정설이 된 현재는 근초고왕대 이후 백제와 마한의 경계선이 어디인지에 대한 논쟁이 진행되고 있다. 현재까지 확인된 고고학적 자료에 따르면 백제는 적어도 경기 남부 및 충청 북부지역까지는 직접지배를 실시했고 충청 남부 및 전라도 일대에 대해서는 간접지배를 실시했던 것으로 보고 있다. 그러나 경기 남부 및 충청 북부지역에서도 마한 재지세력의 전통이 강하게 남아있는 지역이 있는 반면 빠르게 백제화 되는 지역도 있기 때문에 지역에 따른 차이가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이를 보여주는 유적이 화성 마하리 고분군과 오산 수청동 고분군이다. 화성 마하리와 오산 수청동은 모두 경기 남부지역에 위치하지만 무덤의 변화양상은 전혀 다르게 나타난다. 마하리 고분군은 목관묘(널무덤) 또는 목곽묘(덧널무덤)에서 석곽묘(돌덧널무덤)와 석실분(굴식돌방무덤)으로 변화한다. 반면 수청동 고분군은 주구토광묘(주구움무덤)라고 하는 마한의 특징적인 무덤이 지속적으로 만들어진다.
뿐만 아니라 같은 주구토광묘라고 하더라도 경기 남부지역과 충청 북부 그리고 각각의 지역 내에서도 무덤의 방향, 부장품(껴묻거리)의 위치 등에 차이가 나타난다. 즉, 지역적인 특색이 상당히 강했던 셈이다. 게다가 경기도김포, 충청남도 서산 등 서해안지역을 따라서는 주구토광묘와 형태는 비슷하지만 축조방법이 다른 '분구묘'라고 하는 특징적인 무덤이 확인되고 있다.(연구자에 따라 분구묘를 주구토광묘와 동일한 것으로 보는 입장도 있다.)
간접지배를 실시했던 것으로 보여지는 충청 남부지역과 전라도 지역, 강원도 영서지역에서는 유력세력 또는 요충지에 위치한 세력에게 수준높은 물품을 하사함으로써 영향력을 행사한 것으로 보인다. 수준높은 물품이란 바로 금동제품. 원주 법천리, 공주 수촌리, 고창 봉덕리, 익산 입점리, 고흥 길두리에 있는 무덤들에서 백제의 금동관모, 금동신발 등이 확인된 바 있다. 그러나 이에 대해서도 논쟁이 있는데, 간접지배지역에 대해서만 금동제품을 하사했다고 하기 어려운 것이 위에서 언급한 직접지배에 해당하는 충청 북부지역에서도 금동제품이 확인된다는 점이다. 이를 두고 경기 남부지역까지가 직접지배의 한계라고 보는 시각도 있고 금동제품의 성격을 다르게 봐야 한다는 주장도 있다. 그런데 2014년 경기도 화성시 요리cook이 아니다에서 금동관과 금동신발이 확인되었다. 따라서 백제의 세력권과 금동제품의 성격에 대한 논쟁이 더 활기를 띨 것으로 보인다.
전라남도 지역은 6세기 중엽까지 마한이 존재했다는 것이 확정적이다.[84] 문제는 전라북도 지역이다. 전북지역은 금동제품이 확인되고 분구묘를 비롯한 마한의 무덤이 확인되고 있지만 다른 지역에 비해 마한.백제 관련 고고학 연구는 부분적으로 시행되고 있을 뿐 상당히 미흡한 실정이다. 때문에 마한.백제 역사 규명을 위해 향후 전라북도에서 본격적인 고고학 연구가 진행될 필요가 있다. 그러나 고고학적 연구는 지연되고 있는 가운데, 개발로 대다수의 고분들이 파괴되고 있는 실정이다. 전북 초촌리 고분군의 경우 1978년 발굴 조사 당시 삼국시대에 축조된 고분이 211기에 달했으나, 현재는 거의 파괴된 상태다...

전라북도 지역에 대한 현재까지의 연구 결과를 요약하면

(1) 전라북도의 최북서쪽인 금강 하구인 군산 지역은 5세기 무렵 가장 먼저 백제의 영토가 된 것으로 추정된다.
(2) 구 이리시를 중심으로 하는 익산 지역, 그리고 완주군, 전주시를 비롯한 만경강 유역 이남 지역은 웅진 천도(475년) 시기까지는 마한 분구묘가 주를 이루지만 이후 급격히 줄어들고 백제계 석축묘가 주를 이룬다. 따라서 만경강 유역은 웅진 천도 후에야 백제에 귀속되었을 가능성이 높다.
(3) 정읍동진강 이남 지역은 웅진 천도 이후에도 강성한 마한 세력이 존재하다가 6세기 중엽 전라남도 마한과 같은 시기에 백제에 병합되었다.

충청남도와 경계를 이루고 있는 가장 북쪽의 금강 하구 지역은 전라도에서 가장 먼저 5세기에 이미 마한의 분구묘가 백제의 석축묘로 대체되었다. 백제의 웅진 천도 무렵 이미 군산 지역은 백제 영역화가 이루어졌음을 뜻한다. 사실 과거부터 군산 대야면 등에서 마한의 유물이 대량으로 발굴된 적이 있었다. 그러나 현재 군산, 익산 지역은 백제 성왕 시절 익산 천도론이 크게 부각되면서 백제의 중심 지역을 자처하는 분위기에 매몰된 채, 마한 관련 연구가 억제되고 있는 형편이다.

하지만 군산 바로 아래인 구 이리시부터는 다른 양상이 나타난다. 구 이리시, 미륵산 일원과 완주지역에서는 5세기 중엽까지도 마한 분구묘의 전통이 지속적으로 유지되고 있음이 확인된다. 그 이유는 미륵산에서 모악산에 이르는 분지형의 공간적 범위, 곧 만경강을 중심으로 군집을 이루고 축조된 토광묘 집단은 마한 성립의 주체로 추정되고 있다. 따라서 군산 지역에 비해 마한 분구묘의 전통이 오랜 기간 지속되는 것으로 판단된다. 전주 혁신도시 조성시 발굴된 고분에서는 이미 마한이 백제에 완전히 귀속된 이후인 백제 말기에 건설된 고분임에도 마한 분구묘 양식이 강하게 남아 있는 모습이 발견되기도 했다.

최근(2018년) 발표된 전라북도 정읍 지역 고고학 연구 결과에 따르면, 정읍 지역에서는 웅진 시기(475~538년)에는 마한계 분구묘가 주류를 차지하고 있는 가운데 백제계 석축묘가 소수 분포하고 있으나, 사비 천도(538년) 이후 백제계 석축묘가 주류를 차지하고 있는 것으로 나타났다. 즉 전라남도와 인접한 전라북도 정읍 지역은 백제의 웅진 천도 이후에도 마한 세력이 주류를 차지하며 백제 세력과 항쟁하다가 사비 천도 이후 백제에 완전히 병합된 것으로 해석된다. 즉 전라남도 마한과 거의 같은 시기에 백제에 병합된 것이다. 웅진 시절, 정읍 지역에 존재하던 마한 세력이 백제와 항쟁한 흔적은 백제 동성왕, 무령왕이 남쪽으로 정벌을 나섰던 기록과 연결된다. 정읍 지역의 마한 분구묘는 만경강 지역의 분구묘보다 규모가 크고 집단화되어 있어 이 지역에 강성한 마한 지배 세력이 존재했음을 암시하고 있다.

일본서기에서 백제삼서를 인용해 서술한 근초고왕 때 고사부리성을 쌓았다는 기록도 사실일 수 있다. 왜냐하면 백제 고사부리성의 축성 시기가 4세기 중반으로 나오고 건축 양식도 백제계 토성으로 나오기 때문이다. 하지만 직할 영역이 되었다고 하나 계속해서 마한 토호 세력의 항거가 있었고 이 세력이 6세기 중반에 완전히 병합되었다고 보는 것이 맞음.

6. 일본과의 관계[편집]

백제와 일본 지역 간의 관계는 각별했다. 4세기 이후까지 일본 열도는 아직 통일 왕국을 이루지 못한 채 기나이의 야마토 정권을 주축으로 하여 호족 연합을 이루고 있었다. 이 시기에 백제가 왜에 전해준 문물은 건축, 토목, 제철, 목마, 양초, 직조, 양응, 의약, 음악 등 매우 다앙했는데, 생활에 필요한 분야가 대부분이었다. 이는 사회가 일상생활에 필요하면서도 생산력을 높일 수 있는 문물을 백제로부터 받아들인 것을 보여준다. 이러한 선진문물들을 바탕으로 하여 야마토는 당시 일본에 위치한 타 국가들에 비해서 강대한 국력을 갖추게 되어 당대에 존속해있던 주변국가들을 하나 하나 병합시켜나갈수있었고, 서기 7세기 무렵이 되면 규슈 북부에서부터 간토에 이르는 넓은 영역을 야마토로 통합시키는데 성공을 거둘수 있었다.

왜는 또한 국가 운영에 필요한 이념으로 기능하는 유교, 불교, 도교 등을 백제로부터 받아들였다. 백제가 유교를 왜에 전수해 주었다는 것은 근초고왕아직기와 박사 왕인을 왜에 파견하고 또 한자, 천자문과 논어를 보내주었다는 사실에서 확인된다(372년 / 404년). 참고로 근초고왕칠지도 또한 일본에 내려주었다. 이후 백제는 무령왕때 오경 박사 단양이, 고안무 등을 왜에 파견하여 유교 경전에 대한 이해를 높였다(516년).

불교는 사비 도읍기에 성왕이 왜에 '노리사치계'를 파견해 전해주었다(552년). 이후 백제는 많은 승려와 사찰 건립 기술자들을 파견하여 계율을 가르치고, 사찰 건립을 도왔다. 한편 승려 관륵은 승관 조직을 정비하여 교단의 기율을 바로 잡았을 뿐만 아니라 천문지리, 둔갑, 방술 등 도교 사상도 전해주었다. 이러한 사실은 왜가 유교, 불교, 도교 등을 국가 통치이념으로 확립하는 데 백제의 영향이 매우 컸음을 보여준다.

심지어 스이코 덴노 시절에는 "스이코 여왕과 만조백관들이 '백제옷'을 입었으며 구경하는 사람들이 기뻐했다"라는 기록도 나온다. 이는 당시 가 얼마나 적극적으로 백제의 '선진 문물'들을 전해 받았는지 알 수 있는 중요한 증거이다.

백제가 왜에 '선진 문물'을 전수하는 방법은 기술자들이 도왜[85]하는 경우가 대다수였다. 이들 도왜인들은 자신의 학문이나 기술 등을 바탕으로 왜의 지배층에 편입되어 들어갔고, 이들 가운데 일부는 왜 조정에서 중요한 역할을 하게 되면서 백제와 왜의 관계에 어느 정도 영향을 끼치기도 하였다. 이렇게 문화 교류가 왕성했기 때문에 야마토 정권에서 백제계 도래인 출신들도 많이 활동을 할 수 밖에 없었고 일본 왕실과도 혈족적 연계를 갖는 수준까지 올라가게 된다. 이는 나중에 모계 혈통적인 입장에서 백제계 2세가 덴노가 되는 경우까지도 나올만큼 일본과 백제의 관계는 매우 돈독했으며 백제 왕족들이 일본에서 활동하기도 했다.[86]

심지어 비다츠 덴노조메이 덴노 시절에는 아예 왕도에 ‘백제궁(百濟宮)’이라고 호칭하는 왕궁(王宮)을 짓고 살았을 정도였다. 거기다 조메이 덴노는 백제궁(百濟宮)에서 사망하였는데 사망 후에 ‘백제의 대빈’이라고 부르는 백제 왕실식 장례를 치루었을 정도였다. “641년 10월9일에 천황이 '백제궁'에서 붕어하시다. 18일에 왕궁 북쪽에 안치하고 빈궁을 만들었다. 이것을 ‘백제의 대빈(百濟の 大殯)’이라고 부른다.”(十三年冬十月己丑朔丁西, 天皇崩于百濟宮. 內午, 殯於宮北. 是謂百濟大殯). 조메이 덴노의 장례를 '백제의 대빈'으로 모셨다는 기록으로 여기서 말하는 '백제의 대빈'이란 백제 본국 왕실의 3년상 '국장의례'를 가리킨다.[87] 어째서 조메이 덴노의 장례를 '백제의 대빈'으로 모셨는지는 확실하게 밝혀진건 아직 없지만 적어도 조메이 덴노 시절 백제계들의 영향력이 일본 조정내에서 굉장히 컸던 것은 사실로 보인다. 즉, '백제궁'과 '백제의 대빈' 모두 당시 왜국에서 백제계들의 정치적 영향력이 매우 컸음을 알려주는 중요한 증거들이다.

이러한 백제와 일본의 밀접한 혈맹 관계나 다름없는 모습은 신라를 공격할 때 백제에 지원 병력을 파병하여 적극적으로 돕는 모습으로 나타나며 백제 멸망기 때에는 백강 전투처럼 일본의 국력을 대거 쏟아부어서 백제 부흥 운동을 지원하는 혈맹적 관계를 보여주기도 했다. 실제 백제계 유민들이 나라를 잃었을 때 상당수가 새롭게 정착한 곳도 일본이었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백제와 항상 관계가 좋았던 것만은 아닌데, 대표적인 시기가 백제 무왕 초기로 일본서기 推古天皇 16年(608) 6월 조에 따르면 隋(수나라)에 갔던 왜의 사절 오노노 이모코(小野臣妹子)가 수양제에게서 왜왕에게 보내는 국서(返書)를 소지하고 귀국하던 도중에 백제에 이를 강탈당했다고 한다(...). 이를 통해 유추해보면 당시 왜의 대중국 독자 외교에 대해서 이유야 어찌되었든 당시 백제가 굉장히 불쾌하게 생각했던 것으로 보인다.[88] 당시 왜가 북규슈에서 간토 지방에 이르는 넓은 영역을 손에 넣으면서 영토가 백제보다 훨씬 커져있던 상황이었고 이 때문에 콧대가 크게 높아진 상황이었다. 실제로 일본서기에서도 602년 10월에서 615년 사이에 약 12년 동안 백제와 왜의 외교관계 기록이 보이지 않는 등 의외로 백제와 왜의 외교관계가 안 좋았던 시기도 있었다고 추정할 수 있다.

여담으로 고대 백제어일본어에 영향을 주었다는 주장도 있다.

7. 백제의 문물, 제도, 사회[편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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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1. 사회[편집]

백제의 형벌은 엄격하여, 반역자, 전쟁터에서 도주한 군사, 살인자는 참수에 처했다. 도둑귀양을 보내고 훔친 물건은 2배의 값을 치뤄서 배상하게 하였다. 관리뇌물을 받거나 횡령을 했을때는 종신형에 처하고, 3배의 값을 치뤄서 배상하도록 했다.

백제의 신분은 크게 지배 신분층, 평민층, 천인층으로 나누어 볼 수 있다. 백제의 지배층은 왕족 부여씨와 대성팔족이라 불리는 귀족으로 이루어져 있었다. 대성팔족은 왕실과의 혼인이 허락되어 외척이 될 수 있는 왕비족이다. 당대의 왕비를 배출하면 '길사'라고 하며, 왕권에 버금가는 세력이 된다. 신분제는 관등, 관직제를 규정하기 때문에 신분에 따라 관등, 관직, 복색, 대색에도 구별이 있었다. 왕은 금화로 장식한 오라관(烏羅冠)을 쓰고, 흰 가죽띠를 두르고, 검은색의 비단신을 신었다. 지배 신분층 가운데 좌평 계열과 솔 계열은은 자복을 입고, 은화로 장식한 관을 썼다. 덕 계열은 비복을 입었고, 자대에서 황대까지의 띠를 띠었다. 무명 계열은 청복을 입되, 황대에서 백대까지의 띠를 둘렀다.

백제의 귀족층은 중국과 교류가 빨랐으며, 중국 문화를 많이 받아들였다. 이들은 중국의 고전 서적을 즐겨 읽었으며, 한문을 능숙하게 구사했다. 투호바둑, 장기 등의 오락을 즐겼다.

7.2. 관직[편집]

제1품

좌평(佐平)

내신좌평(內臣佐平) / 내두좌평(內頭佐平) / 내법좌평(內法佐平) /
위사좌평(衛士佐平) / 조정좌평(朝廷佐平) / 병관좌평(兵官佐平) 佐平 계열

제2품

달솔(達率)

북사에 따르면 정원은 총 30명이었다고 한다. 率 계열

제3품

은솔(恩率)

率 계열

제4품

덕솔(德率)

率 계열

제5품

한솔(扞率)

率 계열

제6품

나솔(奈率)

나솔까지가 관(冠)을 은화장식했다고 한다. 率 계열

제7품

장덕(將德)

德 계열

제8품

시덕(施德)

德 계열

제9품

고덕(固德)

德 계열

제10품

계덕 (季德)

德 계열

제11품

대덕(對德)

德 계열

제12품

문독(文督)

武名 계열

제13품

무독(武督)

武名 계열

제14품

좌군(佐軍)

武名 계열

제15품

진무(振武)

武名 계열

제16품

극우(克虞)

武名 계열


좌평 및 '솔' 계열, '덕' 계열, '무명' 계열은 각각 자색, 비색, 청색 공복을 입었다.

7.3. 군사[편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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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제는 행정 구역이 바로 군사 제도의 형태의 군사 행정 제도 체제였다. 따라서 행정 체제가 군사 편제라고 볼 수 있다. 중앙은 달솔이 지휘하고 지방인 방은 방령이 지휘관을 맡았다. 즉 좌평 혹은 지휘관 -> 달솔 -> 방령 체제였는지는 애매한 편이다.

백제에 싸울아비 - 무절이라는 조직이 있었다는 주장을 하지만 싸울아비라는 말 자체가 20세기에 튀어나온 용어이며 무절이라는 용어도 위서의 용어이기에 백제에 고구려와 같은 경당(扃堂) 체제가 있었는가 여부는 불분명하다. 백제도 고대 국가들처럼 기병 - 보병 - 궁수의 병과 체제로 있었고 주력이자 정예병은 기병이었을 가능성이 크나 상대적으로 영토가 목축 지대가 아닌 지역인 경기 - 충청 - 전라도에 분포해 있었기에 기병보다는 보병이 주력이었을 확률이 매우 크다. 이는 훗날 후백제의 사례에서도 유사하게 볼 수 있다. 백제도 북방에서 내려와서 건국되었기 때문에 찰갑을 보편적으로 이용하는 형태였다. 물론 한반도 남부의 보편화된 갑옷이었던 판갑도 나오며, 고구려와 다르게 혼용으로 운영했던 것으로 보인다.

위 아래 길이가 크게 비대칭인 일본활(유미)과 비슷한 형태의 목궁으 출토되었으며 북방계 민족들의 영향을 받기 전까지 한반도에서도 목궁을 이용했다는 사실이 드러나면서 백제의 활 형태가 일본과의 교류 과정에서 일본 활에 영향을 주지 않았나는 주장도 있지만, 연구가 제대로 이루어 지지 않았다.

백제군의 총 병력은 확인되기 어려우나 최대 3만명 규모까지 원정에 동원되었던 것으로 보인다. 전성기인 근초고왕 시절과 중흥을 이끈 백제 성왕 시절의 동원 능력을 보면 3만명 규모를 언급하고 있기 때문이다. 관산성 전투 당시 성왕이 이끌던 병력은 29600명에 좌평 4명이 포함되어 있었다. 대략적으로 계산하면 좌평 4명이서 29600명이니 29600 / 4 = 7400명이므로, 6좌평이 거느린 총 병력은 44400명이 된다. 물론 이는 어디까지나 추정치일 뿐이며, 좌평들이 모두 동일한 병력을 거느렸을 리도 없고, 예비대도 존재했을 것이므로 백제군의 총 병력이 어느 정도의 규모였는지는 정확히 알 수가 없다.

대중들에겐 백제가 "해상 왕국"의 이미지로 각인되어 있는데, 백제의 수군 역시 그 규모가 명확하지 않으며, 백제가 강력한 해상 통제력을 발휘했다고 뒷받침할만한 사료는 부족한 편이다. 백제의 수군과 관련된 기록은 남제서에 나오는 "목간나가 침략군의 선박을 깨뜨렸다."라는 구절 하나 뿐인데, 이는 백제에 수군이 존재했다는 근거가 될 뿐, 수군이 강력했다는 근거는 되지 못한다. 하지만 동남아와 중국 그리고 일본과의 적극적인 교역을 해왔던 점을 감안하면 나름의 해상력을 확보하는 수준의 수군을 운영했던 것으로 보이나 점차 쇠퇴한 형태가 된 것이 아닌가 한다. 이는 고구려에 의해 서해의 해상 통제권의 영향을 받았던 점이나 백제 멸망 때 소정방이 이끄는 당군을 방어하는 역할을 제대로 수행하지 못했던 점을 기인해본다면 그러할 것이다.[89]

7.4. 언어[편집]

학자들은 일반적으로 초기 고구려계 유이민들의 영향으로 부여계 언어를 썼을 것이고, 호남 지역으로까지 영토가 넓어지자 호남 지방에서 주로 쓰이던 마한어까지 혼용되어 후대로 갈수록 마한계 언어적 성향이 짙어졌을 것으로 추론하고 있다. 일단 백제 존속 시기에 성립한 중국의 문헌에는 다음과 같이 기록되어 있다.

지금 언어와 복장이 고구려와 대략 같다.
今言語服章略與高驪同
梁書 卷54 「列傳」48 '諸夷'


중국의 사서인 주서(周書)에 의하면, 백제의 귀족들은 왕을 어라하(於羅瑕)라고 불렀고 백성들은 건길지(鞬吉支)라고 불렀다고 한다. 이것을 이유로 백제의 지배층들은 부여계 언어를 사용했고 백성들은 한(韓)계 언어를 사용했으므로, 백제는 지배층들과 백성들의 언어가 서로 달랐다고 주장하는 학자들이 있다. 하지만 조선 시대 신하들은 왕을 주상, 전하로 불렀고 백성들은 나랏님, 임금님으로 불렀으므로 왕을 일컫는 어휘만 보고 언어가 다르다고 속단하는 것은 옳지 않다고 주장하는 학자들도 있다.

백제인들의 인명, 백제의 지명을 통해 백제어를 유추하기도 한다, 하지만 지명으로 그 나라의 언어를 연구하는 것에 회의적인 입장을 나타내는 학자들이 많다.[90]

충청남도 부여군에서 백제 목간이 발견되어 학계에 영향을 주고 있다.
그 중 향찰 표기가 눈에 띄는데 백제의 향찰 표기가 신라보다도 이른 시기에 형성된 것으로 추정하고 있다.

7.5. 연호[편집]

백제는 일반적으로 연호를 써서 년도를 표기하던 다른 국가들과 달리 60갑자로 연호를 표기했다. 《한원(翰苑)》에서 인용된 《괄지지(括地志)》에서 "연도를 기록할 때 따로 연호를 쓰지 않고 60갑자로만 차례를 삼는다[其紀年, 無別號, 但數六甲爲次第]"라는 기록이 남아있고 후에 발견된 사택지적비도 "甲寅年正月"로 60갑자가 사용되었다.
다만 칠지도의 "태화" 연호에 대해 근초고왕의 연호가 일시적으로 사용되었다는 설, 동진의 연호라는 설 등 여러 해석이 존재한다.

7.6. 종교, 문화, 역사[편집]

일찍부터 중국의 선진 문물을 받아 유학이 발전하였으며 고흥이《서기》를 편찬했다. 또한 《일본서기》의 기록에 따르면《백제기》,《백제본기》, 《백제신찬》등의 역사책이 있었다는 기록이 있다. 《일본서기》의 기록이 백제기, 백제 본기, 백제 신찬 등의 기록을 많이 참고했을거라는 설이 있으며 이 서적들은 현재는 현존하지 않는다. 왕인을 왜에 파견하여 천자문논어를 전수했고, 무령왕 대에는 오경 박사 단양이(段楊爾)와 고안무(高安茂)를, 성왕 대에는 오경 박사 왕유귀(王柳貴)를 왜에 파견하여 왜가 유학에 대한 이해를 높이는데 중심적인 역할을 하였다.

백제 불교는 침류왕 시기인 384년에 서역승 마라난타가 동진으로부터 들어오면서 시작되었다. 이듬해 침류왕은 한산에 불사를 이룩해 승려 10명을 거처하게 하였다. 성왕 이후 백제에서는 많은 승려와 예술가들을 일본에 보내 일본의 불교 문화 융성에 크게 기여하였다. 또 불교 사상에 심취한 법왕은 불교 사상에 따라 생물을 죽이지 못하도록 하는 방생을 명령하였다. 민간에서 기르던 를 야생에 풀어주고, 고기 잡이와 사냥을 하는 도구들을 불태우도록 했다.

백제 불교는 계율 연구가 활발했다. 백제 승려 겸익은 대표적인 계율종 승려였다.

도교는 사비 도읍기에 성하여 부여 능산리 사지에서 발견된 백제금동대향로의 상단 뚜껑 쪽에 새겨진 문양은 주제가 신선이 살았다는 봉래산(蓬萊山)을 중심으로 하고 있고, 익산 왕궁면 왕궁리에서 발굴된 원지는 우리 나라 고유의 산악 숭배와 더불어 신선 사상 및 도교 사상의 영향을 보여준다.

7.7. 건축[편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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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본의 나라, 아스카 시기 건축물에서 백제의 흔적을 찾을수 있으며 현대 한국에 남아있는 건축물들은 분묘나 석탑 종류에 불과하다. 백제의 건축은 절터, 탑, 고분[91] 등이 있다.

한성 백제 시대 고분은 서울 송파구 석촌동의 돌무지 무덤이 대표적이다. 돌무지 무덤은 고구려 초기 고분(졸본 부여 시기)과 유사한 양식이다. 웅진 시대에 만들어진 것으로 추정되는 공주시 송산리에 있는 여러 고분들[92]은 백제 중기를 대표하는 굴식돌방무덤(橫穴式石室墳)이다. 후기의 무령왕릉과 같은 벽돌 무덤은 중국 남조의 영향을 받았다.

백제 건축물들의 남은 터로 그 규모를 짐작할 수 있는데 대부분 상당히 장대했을 것으로 보인다. 많은 사찰이 건축된 기록이 있으나 현존하지는 않는다. 주로 백제의 옛 도읍지였던 공주시, 부여군 일대에서 그나마 백제의 옛 흔적을 찾을수 있다. 무령왕릉이나 미륵사지가 대표적인 유적들이라고 할 수 있다.

7.8. 시가[편집]

작자·연대가 미상인, 현존 유일의 백제 노래 정읍사악학궤범에 전해지며, 고려사 <악지>에 제목만 등장하는 《지리산가》《무등산가》《방등산가》《선운산가》 등이 있다.

7.9. 예술[편집]

백제 시기의 그림 예술 역시 워낙 오랜 세월이 지난 관계로 남아 있는 것이 얼마 없다. 다행히 백제 역시 고구려와 비슷하게 고분에 벽화를 그리는 풍습이 있었기 때문에[93] 천마도와 나머지 몇몇이 고작인 신라보다 남아있는 회화는 오히려 더 많다. 능산리 고분에는 연화문(연꽃 무늬), 운문(구름 무늬), 사신도를 그린 벽화가 있으며, 송산리 고분이 있다. 백제 시기에 이름이 알려진 화가로는 아좌태자, 하성 등이 있다.

백제의 음악은 어느 정도 수준이 되었던 것으로 보인다. 백제에는 고·각·공후·쟁 등의 악기가 있었다고 하며, 5세기 ∼ 6세기에 중국 남송(남조 조송)과 북위의 기록에 백제의 음악이 소개된 것이 있다. 《일본서기》의 기록에 따르면, 백제의 악사가 일본에서 음악을 가르쳤다고 한다. 7세기 초 백제 사람 미마지가 중국 오나라 음악을 배워서 일본에 전했다는 기록이 유명하다.

서예 작품으로는 사륙변려문으로 쓰여진 사택지적비, 남조 대 전형적 해서체로 쓰여진 무령왕릉 지석 등이 있다.

조경 면에서는 도교식 인공 정원을 당나라로부터 수입하여, 무왕궁남지를 만들고, 백제인들이 일본에 건너가서 비슷한 것을 만들어준 기록이 있다. 통일신라안압지도 여기서 영향을 받았을지도 모른다.

8. 평가[편집]

삼국 중에서 제일 넓은 영토를 가졌고 중화에 반대하며 군사적으로 대단한 면모를 보인 고구려, 가장 긴 역사를 지니고 삼국 통일을 이루었던 신라에 비해 관심도가 조금 떨어지는 편이며, 사료마저도 삼국 중 가장 부족하다. 고조선,발해와 함께 사료가 매우 부족한 왕조 탑3로 꼽힐 정도다.

고구려에 비해 작은 영토로 상당한 국력을 보여준 것을 단순히 충청·전라도 지방의 비옥한 평야의 힘으로만 볼 수는 없다.[94] 전라도 지방에서 출토되는 유물을 보면 백제가 한창 잘나가던 시기에도 호남 지방에는 독자적인 마한 호족의 힘이 강했다. 백제가 전라도 지방과 강하게 유착되는 것은 고구려에 밀려 수도를 남쪽으로 옮긴 후다.[95]

백제의 국력은 바다의 세력이 크게 뒷받침되었다고 보기도 한다. 물론 자료가 너무 없어서 이것을 정확하게 재구하기는 힘들지만, 바다를 통해 중국의 선진 문물을 받아 신라나 가야, 왜에 전파하는 대신 외교적으로 우위를 차지했다는 것은[96] 거의 정설로 받아들여지고 있다.

다만 백제가 '해상 무역' 으로 발전했다는 것은 학계에서는 부정적으로 추측한다.[97] 도대체 백제가 뭘 사고 팔았는지에 대한 사료가 전혀 없기 때문이다. 물론 단순히 중국에 조공을 바쳤다거나 하는 기록은 《삼국사기》나 중국 측 사서에 많이 보이지만, 그것도 그냥 '조공을 바쳤다'는 식이지 뭘 얼마나 바쳤는지에 대한 기록은 없다고 해도 좋을 정도. 또한 한반도 내의 고대 유적지 가운데 돌로 포장된 도로. 즉 상업용 도로가 발견된 예가 전혀 없다는 것 역시, 이러한 주장을 뒷받침할 수 있는 근거가 된다. 즉 백제의 경제적 기반은 어디까지나 농업에 있었으며, 백제 문화제 같은 데에 가면 볼 수 있는 '해상 왕국'이라는 말도 중국의 문화를 바다를 통해 받아들이고 일본 등에 전해주었다는 의미에서라면 맞는 말이지만 '활발한 해상 교역' 어쩌고는 무리수.

생산력 면에서 고구려와 비교할 경우 백제 당시 전라도 지방의 호남 평야가 농경지로 개발되었다는 근거는 아직 없다. 고구려의 송화강 유역(부여), 두만강 유역(옥저)이 농경지로 괜찮았다는 기록에다 고구려와 중국의 농경 수준이 비슷했다는 기록(생산력이 비슷했다는게 아니라 농업기술)이 있다. 고구려에는 송화강 유역, 두만강 유역만 있는 것도 아니고 요하 유역과 대동강 유역의 농경지까지 있다.

이 나라에 대한 대표적인 떡밥으로는 백제가 요서 지역에 영토를 두었다는 요서경략설이 있는데, 이는 송서 등 중국 사서의 기록을 주된 근거로 삼고 있다. 하지만 이 설은 당시 요서를 관장하던 북조계 사서에 전혀 기록이 없고, [98] 이 지역에서 백제 계통이 유물이 출토되지 않는다는 점에서 의심받고 있다. 백제가 아닌 어떤 세력(그러니까 낙랑이나 부여)의 진출 내지 다른 세력을 백제로 오기하며 빚어진 것으로 보는 학계도 있다.[99] 위의 인구 기록이나 식민 사관, 승자의 왜곡된 기록이라는 역사의 특성을 살펴볼 때 실제로 백제가 현재의 중국 대륙인 요서 지방을 영토로 포함라고 있었거나 / 강한 해상력을 통해 일시적으로 요서 지방을 통치했었거나 / 경략이라기보다는 후대의 청해진 활동 수준에 그쳤다는 3가지 중 하나를 취사 선택, 연구해야 할 것이다.

백제는 국토의 전 지역을 전제 왕권으로 다스리지 않았다는 것이 통설이다. 이는 고구려나 신라 등도 다 마찬가지이지만 백제가 고구려의 남하로 한강 유역을 잃은 시기 전후로 이런 현상이 유난히 심했다.[100] 이것을 단순히 국론 분열로만 보면 안된다. 어차피 과거 삼국 시대의 국가들은 죄다 여러 세력의 연합체였고, 그 연합도 매우 느슨했다. 그니까 원래 국론이 분열되어 있는 나라들인 것이다. 반란이 일어나 왕이 시해되는 것은 세력 간 조율이 잘 안 된 결과인 것이지, 단순히 신하가 왕을 시해했다고 보면 안 되는 것이다.

사실상 삼국 시대의 왕들은, 조선 왕조의 왕 같은 게 아니라, 여러 세력 집단의 대표자 정도의 역할을 했다고 보는 게 낫다.[101][102] 따라서 각 세력은 자기 세력의 이익을 최우선으로 하는 것이 당연하며, 오늘날과 같은 민족 국가 개념과는 좀 달랐다. 백제에 있던 세력이 백제가 마음에 안 들거나 일이 잘 안 풀리면 일본으로 건너갈 수도 있고, 중국으로 건너갈 수도 있는 것이다. 이걸 오늘날 감각으로 반역이나 배신 같은 걸로 볼 수는 없는 것이다. 물론 하나의 공동체를 이루니 서로 협력하는 것이 가장 좋기는 하다.

의자왕이 패배한 후에도 백제 전토가 제압되지 않고 계속 당과 신라와 전쟁을 벌인 것도 의자왕이 여러 세력 중 하나에 불과하다는 것을 말해준다. 그 이후 더이상 백제가 부흥되지 않음을 깨닫게 되었을 때, 각 세력은 일본으로 건너가거나, 중국이나 신라로 소속을 옮기게 되는 것이다. 그러나 신라와의 연합은 생각보다 꽤 빨리 이뤄진 편. 당군이 옛 백제 지역에서 벌인 패악질은 상상을 초월하는 것이었으며, 백제 유민들은 이에 저항하려면 신라에게 적극적으로 협력하는 것 외엔 다른 방법이 없었다.

일본과는 그냥 친한 정도가 아니라 혈맹 관계로 역사 관련 창작물 등에 떡밥을 많이 뿌린 국가다. 특히 그 중에서도 백제 부흥 운동 당시 일본의 파격적인 부흥 운동 세력 지원은 그야말로 입이 떡 벌어진다. 사이메이 천황이 661년에 급서했는데 황태자였던 나카노오에 태자가 즉위식도 미뤄가면서 부흥 운동 지원에 전력을 다했을 정도였다. 이 당시 일본이 백제 부흥 세력을 지원하기 위해 파병한 병력의 규모는 자그마치 400척(!!)[103]에 4만 2천명의 병력을 지원했다.[104] 다만 문제는 당시 동아시아에서 비교적 깡촌이였던 일본의 400척 대함대가 당시 전세계 최강이였던 당나라 군대 170척에게 백강 전투에서 궤멸당했다는 것… 전투 결과는 비록 일본 함대의 참패로 끝났지만 이런 파격적인 지원은 당시 백제와 일본의 관계가 얼마나 친밀한 관계였는지를 알려준다. 오늘날의 한일 관계와 비교해본다면 천지 차이. 이게 왜곡되어서 일본은 백제 꼬봉이라서 일본이 그렇게 정성껏 지원해준거라거나, 일본이 백제 정권을 막후에서 주도하던 종주국이었다는 《일본서기》식의 과장된 주장이 보이기도 한다.

어쨋든간에 백제와 일본의 혈맹 관계는 매우 친밀하여 관서 지역 -특히 오사카- 에는 지명 이름부터 해서 백제라는 이름이 정말 많이 남아 있으며 잘 찾아보면 그 외에도 백제에서 넘어간 것으로 추측되는 문물이 매우 많다.

최근 들어 심상치 않은 내용을 담은 백제의 목간들이 계속 발굴되고 있어서 학계에 자잘한 파문을 일으키고 있다.

<고침> 문화(<"가장 오랜 향찰 표기는 백제의 '돼지'">)

"백제 향찰 표기 신라보다 한세기 앞서"

"계양 산성 논어 목간은 400년대 백제 작품"

나주 복암리 목간, 백제 지방관 동향 보고 문서?

7세기 백제 시대 목간 28점 공개

백제에 일반 쌀 아닌 특정 품종 있었다… 부여 구아리 유적터 발굴 목간 내용 공개

일본, 신라 금속 공예술의 기원이 백제라는 증거도 발견되었다.

60년만에 나온 답은 백제였다.

예전부터 지역주의자들이 경상도 신라 놈, 전라도 백제 놈 운운하면서 서로 싸우는 모습이 많이 보였다. 심지어 경상도 내에선 경상남도를 보고 가야 놈이라고 하고 경상북도 보고 신라 놈이라고 나눠서 서로 지역 드립치기도 한다. 특히 김해 쪽 경우 건국 설화까지 얽혀있다 보니 더 가야색이 짙다. 다만 이 드립 경우 백제 드립만큼 험악하게 심하지는 않고 웃자는 것에 가까운 드립이다. 경상북도 고령군: 어리둥절 주위가 신라 인상이 심한 경상북도 모양 탓을 하렴. [105][106] 게다가 요즘에는 사실 삼국시대 때는 충청도, 전라도, 경상도 개념이 없었다. 즉 고대 국가를 현대의 행정 구역에 억지로 끼워 맞춘 것이다. 예를 들어 오늘날 금산논산의 행정구역 일부도 따지고 보면 1963년의 행정 구역 개편 전에는 전라북도 소속이었다.

굳이 따지자면 백제의 수도는 서울 - 공주 - 부여로, 서울특별시 -충청남도 중부 - 충청남도 남부였다. 물론 충남 부여군은 전라북도 익산시와 맞닿아 있고, 충남 남부와 전북은 백두대간으로 막힌 영호남과는 달리 평지로 연결되어 밀접한 관계에 있다. 충청도만 백제라는 인식도 상당히 무리한 게, 백제 역사의 시작점인 초 중기에는 마한 일부 지방인 경기도와 황해도, 충청도 북부 절반 지역에 국한되었으며, 나머지 충청 전라 지역에는 4세기 넘게 목지국을 비롯한 다른 마한 세력들이 공존했다. 백제국이 전라남도 지역까지 완전히 장악하는 데는 오랜 전투를 통한 꽤나 긴 시간과 노력이 걸렸고, 그 후에도 전남에 소재한 지방 세력은 백제에 상당히 배타적인 지역이었다. 물론 전라도가 백제에게 중요한 지역이었음에는 틀림이 없으나, [107] 마한 주도권을 기반으로 한 백제의 영토는 우리가 아는 것보다도 훨씬 위, 즉 황해도까지 뻗어있었다.

백제 = 전라도 인식은 전라도에 거점을 둔 후백제에 의해 생긴 게 아니라, 근대 와서 생긴 지역 감정에서 현대 한국 대중 중에서 경상도와 전라도, 충청도가 본디부터 제각기 다른 역사적 실체였을 거란 망상이 대두한 게 원인이다. 애초에 백제의 남진 이전에는 경상남도와 전라남도 동부가 변한 -가야의 영역으로 서로 같은 공동체였다! 백제의 영역은 700여년이라는 세월에서 500여년간 마한의 일부 지역인 경기도 + 충청도 + 전북(익산 등)에 머물렀고 나머지 마한 지역인 전라남도까지 완전히 통합시킨건 200여년 남짓. 게다가 충청북도 전체는 장수왕 이후엔 아예 고구려의 강역이었고, 진흥왕의 신라가 이 지역을 고구려에게서 탈취한 후론 백제는 의자왕이 일부 수복한 예를 제외하면 신라에게서 빼앗아오질 못했다. 그러니까 지역 감정을 머나먼 고대까지 끌어올리는건 무리수. 사실 고려 이전에는 전라도, 경상도 개념이 아예 없었다. 통일 신라 행정 구역만 봐도 전라도 경상도는 없다. 차라리 남북 갈등이라면 모를까. 지역 감정의 경우 '만들어진 현실'을 비롯한 사회학적 연구 성과들이 나와있으니 관심있는 분은 참고하면 좋을 듯하다.

삼국 중에서 무장들간에 알력이나 혹은 무장들의 견제가 생각만큼 가장 심했던 곳으로 군인에 대한 대접이 썩 좋지 못했다. 무장들간에 알력은 본시 8성씨 귀족들은 각기마다 창칼을 꽤 잘다루는 귀족들이 많았으며, 무장들의 숙청은 왕조차도 신라와 고구려와 달리 백제는 제일 먼저 해구 연신의 난같은 무장 반란을 겪은 통해 무장들의 견제도 필요했는데, 성주 무인들이 터트린 간주리의 난과 귀족 무인들이 터트린 비담의 난 전에 해구 연신의 난이 터진 이후 무장들의 견제가 심해졌는데, 백제가 신라의 대야성을 함락시키고 몇십여성을 차지하자 그때 무인들은 《삼국사기》에 흔적이 찾아보기가 힘들었다. 더욱이 백제 지역은 곡창 지대가 즐비했는데, 정작 백제의 마지막 전투에서 군량미의 지급이 바닥났다는 이야기가 들리는 것을 보니 군량미를 지급할 제도를 안만들 정도로 군인들에 대한 처우는 신라보다는 백제가 더 심각했다. 승려들이 무인들보다 더 대접을 받고, 무력을 기반으로 하는 8성씨 귀족들간의 알력과 군량미를 마련할 둔전 같은 것도 없었고, 특히나 귀족들에게 있어서 군량미에도 쓰일 쌀까지 절간에 내놓지 않으면 몰락했던 것과 중간중간 시행되는 무리한 왕권 강화가 큰 원인이었다. 그래서인지 무장과 군인에 대한 이야기는 고구려나 신라에 주로 쏠려있다. 백제를 좋아하는 측도 무리한 왕권 강화를 좋아하지 않는 경우가 많았다. 자칫 전란 중에 왕권 강화를 하게 될 경우 바깥에서 싸우는 귀족들도 숙청당하기 때문인데, 그래서 의자왕의 왕권 강화는 굉장히 시기상조라고 했다.

9. 왕사[편집]

10. 인물[편집]

시대순 정렬. 이름순에 따른 일람은 백제/인물 문서 참고.

  • 1세기

    • 비류 ( ? ~ ? )

    • 소서노 ( 기원전 66년 ~ 기원전 6년)

    • 오간 ( ? ~ ? )
      개국 공신. 온조왕이 남하할 때 동행한 십제 공신 중 한 명.

    • 마려 ( ? ~ ? )
      개국 공신. 온조왕이 남하할 때 동행한 십제 공신 중 한 명.

    • 흘우 (? ~ 48년)

    • 진회 ( ? ~ ? )
      다루왕 때의 대신. 8개의 힘있는 성씨인 대성팔족 중의 하나인 진(眞)씨 출신. 진씨 중 가장 처음 나오는 인물. 흘우가 좌보가 되자 그가 우보를 이어받든다.

  • 2세기

    • 부여질 ( ? ~ ? )
      왕족. 기루왕의 아들.

    • 길선 ( ? ~ ? )
      신라 귀족으로, 아찬을 지냈다. 155년에 반란을 일으켰다가 실패하고 백제로 망명한 것을 개루왕이 받아줘 대접해줬다. 이 일에 대해 삼국사기의 저자 김부식은 배신할 지도 모르는 길선을 받은 개루왕이 어리석다고 비난했다. 실제로 다음 백제 왕인 초고왕 시기에는 길선의 송환 문제로 신라와 백제는 감정의 골이 파이기 시작했고, 신라가 백제를 쳐서 많은 인명 피해가 나기도 했다.

  • 3세기

    • 보과 부인 ( ? ~ ? )
      책계왕의 왕비. 대방군(帶方郡) 태수의 딸.

  • 4세기

    • 우복 ( ? ~ 327년)
      비류왕의 배다른 동생. 321년에 내신 좌평에 임명되었으나 결국 327년 북한산성에서 반란을 일으켰고 토벌되었다.

    • 목라근자 ( ? ~ ? )

    • 막고해 ( ? ~ ? )
      371년에 있었던 고구려와의 전투에서 등장. 백제에 패배한 고구려 고국원왕이 도망가자 "뒤쫓지 마시고 여기서 만족하며 돌아가죠"라는 뜻으로 도덕경을 인용한다. 백제가 도교가 전파되었던 국가임을 알 수 있는 근거 중 하나.

    • 고흥 ( ? ~ ? )

    • 아직기 ( ? ~ ? )
      학자. 일본에 처음 말을 전파하고, 일본 태자의 스승이 된다. 후에 왕인을 추천하여 왕인이 일본으로 오게 된다.

    • 왕인 ( ? ~ ? )

  • 5세기

    • 도미 ( ? ~ ? )
      도미설화의 주인공.

    • 도림 ( ? ~ ? )

    • 재증걸루 ( ? ~ ? )
      고구려의 장군. 실은 백제 귀족으로, 고구려에 망명을 했다. 장수왕의 명령으로 백제를 침략하여 개로왕을 잡은 뒤 먼저 절을 한 후 다시 얼굴에 침을 뱉고 목을 배었다고 한다.

    • 고이만년 ( ? ~ ? )
      고구려의 장군. 실은 백제 귀족으로, 재증걸루와 같이 행동했다.

    • 목협만치 ( ? ~ ? )
      목례만치라고도 불린다. 《삼국사기》에 등장하는 것은 개로왕이 죽은 뒤 조미걸취와 함께 태자 문주를 모시고 남으로 피난간다. 그리고는 문주를 문주왕으로 옹립하여 웅진 시대를 연다. 그리고는 기록이 없다.

    • 해구 ( ? ~ 478년)
      문신. 병관 좌평.(최고위 관직인 좌평의 하나로, 군사 업무 관장) 해(解)씨는 8개의 힘있는 성씨인 대성팔족 중의 하나. 해구는 그 중에서 눈에 띄는 권력자였다. 왕이었던 문주왕을 살해했을 정도. 이후 삼근왕을 옹립하였고, 훗날 478년에 대두성에서 반란을 일으켰으나 역관광 당해 처형당했다.

    • 곤지 ( ? ~ ? )
      왕족. 문주왕의 동생이며, 내신 좌평(왕명의 출납을 관장)이었지만 해구에게 살해당했다.

    • 진남 ( ? ~ ? )
      좌평. 진로와 함께 해구의 반란을 진압했다. 진로와 함께 대성팔족 하나인 진(眞)씨 출신 귀족.

    • 진로 ( ? ~ 497년)
      병관 좌평. 진남이 왕명으로 군사 2천 명을 거느리고 해구를 진압하려 갔지만 이기지 못하자 진로가 5백명으로 해구를 제압한다. 원래 덕솔(4등급)이었으나 해구의 반란을 진압하고 482년에 병관 좌평까지 올라갔다.

    • 연신 ( ? ~ ? )
      은솔(3등급). 대성팔족(大姓八族) 중의 하나인 연(燕)씨. 해구가 문주왕을 살해한 이후부터 쭉 국정을 맡다가 해구와 같이 반란을 일으킨다. 해구가 잡혀 죽자 혼자 고구려로 도망갔지만, 가족들은 잡혀서 웅진 시장에서 처형당했다.

  • 6세기

    • 겸익 ( ? ~ ? )
      승려. 성왕 시기인 531년에 인도에서 유학을 마치고 돌아왔다. 백제 율종(律宗)의 시조.

    • 노리사치계 ( ? ~ ? )
      달솔. 승려. 백제 성왕 시기인 552년에 일본에 불교 전파해준 인물이다. 《일본서기》에만 등장.

    • 아좌태자 ( ? ~ ? )

    • 금강중광 ( ? ~ ? )
      578년에 일본으로 건너가 593년에 시텐노지를 세운 세 명의 목수 중 하나. 그의 자손들은 곤고구미를 세워 대대손손 시텐노지를 보수한다.

  • 7세기

    • 선화공주 ( ? ~ ? )
      신라 진평왕의 셋째 딸이자 무왕의 왕비인 동시에 서동설화의 히로인. 그러나 미륵사에서 발견된 기록 때문에 실존했다는 것이 의문시되는 상황이다. 실존했다는 설에 의하면 무왕의 첫째 부인이다.

    • 사택적덕 ( ? ~ ? )
      좌평. 사택왕후의 아버지. 미륵사 탑의 기록에서 나온 인물.

    • 사택왕후 ( ? ~ ? )
      사택적덕의 딸로, 무왕의 왕비. 《일본서기》에는 의자왕의 어머니가 642년에 죽었다는 기록이 있는데, 사택 왕후가 의자왕의 어머니라는 가정을 하면 642년에 죽었다고 추정할 수도 있다. 미륵사 관련 기록 때문에 선화 공주에 이은 두번째 부인이라는 추정이 있지만.. 진실은 아무도 모른다. 다만 사택 왕후가 실존한 것은 사실이다. 미륵사 탑의 기록에서 나온 인물.

    • 사택지적 ( ? ~ ? )
      대좌평. 642년 일본에 갔다 왔으며, 654년에 은퇴. 642년의 일본 방문이 의자왕이 부여교기를 쫓아낸 것과 관계가 있다는 추측이 존재.관련링크. 말년에 사택지적비를 세운 인물.

    • 부여교기 ( ? ~ ? )
      의자왕의 동생. 642년에 (누군지는 정확히는 몰라도) 아버지 무왕의 왕비가 죽자 의자왕은 부여교기와 그를 따르던 신하 40여명을 일본으로 추방한다. 일설에 의하면 부흥군의 풍왕이 이 부여교기였다는 말이 있다.

    • 성충 ( ? ~ 656년)
      문신. 상좌평. 성은 부여. 일명 정충. 백제 3충신.

    • 윤충 ( ? ~ ? )
      장군. 642년 신라의 대야성 등을 빼앗음. 김춘추의 사위 김품석과 딸 고타소를 살해. 그가 부여씨이며, 성충의 동생이라는 것과 누명을 쓰고 파직되어 홧병으로 죽었다는 것은 신채호의 조선상고사에만 나오는 기록이다.

    • 아비지 ( ? ~ ? )
      건축 엔지니어. 645년에 신라로 건너가서 황룡사 9층 목탑을 건설했다.

    • 의직 ( ? ~ 660년 )
      백제의 장군. 의자왕 시기인 647년에 신라를 쳐서 전공을 세우다가 희대의 먼치킨 김유신과 붙어서 패배한다. 이듬해인 648년에 신라를 쳐서 10여 성을 습격하여 빼앗았으나 옥문곡으로 진격하다가 김유신에게 또 걸려서 대패하였다. 김유신이 백제 장수 8명을 사로잡자 김춘추는 이들과 자신의 딸과 사위의 유골을 교환하였다. 훗날 좌평이 되어 660년에 나당 연합군과 기벌포에서 2만명을 이끌고 싸우다가 소정방의 13만에게 패해 전사하였다. 운이 좀 부족했던 인물...(...)

    • 흥수 ( ? ~ ? )
      문신. 성충과 함께 의자왕에게 정신 좀 차리라고 하다가 유배. 백제 3충신.

    • 계백 (612년 ~ 660년)

    • 예식진 (615년 ~ 672년)
      장군. 의자왕을 당나라에 바친 매국노.

    • 풍왕 ( ? ~ ? )

    • 도침 ( ? ~ 661년)
      승려. 부흥군이었으나 복신에게 제거당했다.

    • 복신 ( ? ~ 663년)
      왕족. 성은 부여. 부흥군으로 유명하나, 도침과 반목하다가 도침을 죽인다. 결국은 풍왕까지 제거하려다 역관광 당하고 잡혀서 목이 베인다. 의외로 풍왕이 믿고 의지했었는지 복신의 처형을 망설였다는 기록이 있다.

    • 덕집득 (? ~ ?)
      달솔. 풍왕을 모시는 부흥군의 한 명. 복신이 풍왕을 죽이려다가 역으로 잡혔는데, 풍왕이 마음이 약해서 복신을 죽일지 망설이자 덕집득이 죽이라고 의견을 제시했다. 그러자 복신이 덕집득에게 침을 뱉고 "이 썩은 개 못난 노예 놈"이라고 욕을 했다는 기록이 《일본서기》에 있다.

    • 흑치상지 (630년 ~ 689년)

    • 충상 (? ~ ?)
      좌평. 김유신 열전에 처음으로 등장하는 인물로 황산벌에서 계백의 부장으로 출전하여 20여명의 부하와 함께 항복하였다. 후에 백제 부흥 운동이 일어나자 길앞잡이 노릇을 하며 출전하였다가 패배하였고 이로 인해 문책을 받았다.

    • 융왕 (615년 ~ 682년)
      왕족. 성은 부여. 웅진 도독으로 왕을 자처하나 실패로 끝났다.

    • 지수신 ( ? ~ ? )
      임존성의 부흥군. 배신한 흑치상지 등이 당나라 편에 붙어 공격해오자 포기하고 고구려로 망명갔다.

    • 사타상여 ( ? ~ ? )
      백제 부흥군에 속해 있었으나 흑치상지와 함께 부흥군이 실패로 끝나게 되자 당나라에 붙었다.


11. 참고 문서[편집]

12. 백제를 소재로 한 작품[편집]

13. 둘러보기[편집]

백제 국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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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삼국사기근초고왕 본기에 다음과 같은 문구가 등장한다. “겨울 11월, 한수 남쪽에서 크게 군대를 사열하였다. 모두 황색의 깃발을 사용하였다.” 물론 여기서 황색 깃발이 단순 의장기인지 왕실의 상징인지 백제의 국기인지 무엇인지는 정확하게 알 도리가 없다.[2] 다만 최근의 연구결과 전라도 지역은 당시 마한이 독자 세력으로 남아있었다. 따라서 이 지도 내용도 수정이 필요한 상황. 이에 대해 일본서기영산강 유역의 침미다례를 백제에 주었다는 기록이 있는 걸로 봐서 백제가 근초고왕시기부터 이 지역을 간접 지배하기 시작한 것으로 보인다는 견해도 있다.[3] (十濟), 건국 초기 일시적으로 사용되었다. 또한 응준(鷹準)/나투(羅鬪) 등으로도 불렸다.[4] 성왕 시기 사비 천도 후에 '남부여'로 국호를 변경했으나 이 명칭은 성왕 대에 잠시 사용했기 때문에 공식 명칭으로 부르기는 좀 애매하다. 더구나 보통 제대로된 국호에는 방위명을 붙이지 않는다는 점. 부여와 백제의 연계성, 외교 활동에서의 사용 빈도 등으로 미루어, 공식 국호로 사용하려는 의도가 있었는지조차 의심스럽다. '남부여'라는 국호는 일시적인 이벤트성이 짙은 것으로 보인다.[5] 5세기 후반에 황해남도 동남부와 한강 유역, 영서 지역 등을 상실한다.[6] 6세기 후반에 일시적으로 수복한 한강 지역과 충청도 지역을 상실한다.[7] 다만 편차가 있기 때문에 정확성에 대한 논란이 있다.[8] ~ 475년. 하남 위례성(혹은 한성)에 해당하는 지역은 풍납토성몽촌토성 그리고 석촌동 고분군이 있는 오늘날의 서울 송파구 일대에 해당한다. 풍납토성 성벽 아래에서는 삼중환호가 확인되어 성벽 축조 이전부터 해당지역에 어느 정도 세력을 가진 집단이 살았던 것으로 보인다.[9] 475년 ~ 538년[10] 538년 ~ 660년. 백제 근초고왕이 고구려 고국원왕을 전사시키고 난 후의 반격에 대비하여 '한산'으로 옮기기도 했다. 현재의 경기도 광주 일대가 한성 백제의 수도 중 하나인 한산으로 유력시된다. 고려 시기에도 이 지역을 한산이라고 부른 기록이 나온다.[11] 오늘날 남아있는 그들의 후손은 부여 서씨, 의령 여(余)씨가 된다.[12] 일본 오우씨 족보의 임성태자 편 서문에 백제국 마한황제 제왕의 제2자라 표현되어 있다[13] 예맥 / 부여 / 삼한[14] 다만 건국년도에 대한 논의는 계속되고 있다. 자세한 내용은 "건국" 문단 참조.[15] 백제부흥운동[16]제왕운기》에 따르면 백제 말고도 응준(鷹準), 나투(羅鬪) 등으로 불렸다고 한다. [17]삼국사기》 백제 본기 기준으로는 14대왕, 《속일본기》와 《제왕운기》에 따르면 근구수왕 이전의 백제의 왕계가 2대가 누락되었다는 걸 의미한다. 이 기록은 사실 《속일본기》 연력 9년 7월조에서 극히 일부만을 인용한 것이고 생략된 부분에서 '도모(都慕)가 태양의 감응을 받고 부여를 세웠다'는 골자의 내용을 적어놓았다. 그렇다면 도모가 1대가 되고, 2대는 미상이다. 이는 주몽비류일 수도 있고, 동명이나 우태(구태)일 수도 있다.[18] 이강래의 《삼국사기》 주석에 따르면 구태는 부여왕 위구태를 말하는 것으로 북쪽의 부여와 백제의 다른 이름인 남부여를 혼동하여 기록했을 것이라고 한다. KBS대하드라마 근초고왕에서는 근초고왕의 아버지로 그려진다.[19] 요즈음은 교과서 등에서 음독하여 ひゃくさい/はくさい(햐쿠사이/하쿠사이) 등으로 적는 경우도 있으나, くだら 쪽이 옛날부터 써오기도 했고 지금도 이렇게 부르는 경우가 많다. 특히 오사카 쪽 지명에 百濟(쿠다라)를 쓰는 경우가 많은데, 이는 오사카 지역에 12세기경까지 백제군(百濟)이 존재했기 때문이다.[20] 일본어로 곰을 쿠마라고 부르고, 나루의 옛 발음은 나와 루 둘 다 똑같이 아래아로 되어 있다.[21] 종래까지 '구드레'라고 적혀 있었는데, 오기다. 충남 부여(옛 전라북도) 일원에서는 명확히 '구드래'라고 쓴다. 물론 현지 군민들도 자주 틀린다는 게 문제[22] 현재도 구교리 금강 유역(충남 방언으로는 '백마강')에 구드래 조각 공원이 위치하고 있으며, 부여군에서 출하하는 농산품의 브랜드 '굿뜨래(Good + 뜰에)'의 유래가 바로 이 구드래다. 최근까지가 아니라 현재도 백제 마지막 도읍으로서 부여를 대변하는 고어(古語, 비정) 중 하나.[23] 이곳에는 2007년 11월 현재 ‘구다라 우편국(百濟郵便局)’도 영업 중이다.[24] 이 이름은 일본 최대의 비와코 호수 너머 스즈카산(鈴鹿山) 등성이에 우뚝 서 있는 유서 깊은 사찰에서 비롯됐다. 이 사찰의 이름은 ‘샤카산 햐쿠사이지(百濟寺)’, 일본에서는 ‘百濟寺’를 ‘구다라 데라’라고 하는데 유독 이 사찰만은 ‘百濟寺’의 한자어를 소리 나는 대로 읽어 ‘햐쿠사이지’로 부른다.[25] 이는 신라도 마찬가지.[26] 현재 충청남도 천안에서 전라북도 익산에 이르는 지역 중 어딘가로 추정. 안성천 남쪽 금강 북쪽에서 크다 싶은 유적마다 '여기가 목지국이다'라고 주장하는 경우가 더러 있을 뿐 확실한 비정안이 없다.[27] 진왕이 백제 고이왕이라는 설도 있다. 이 경우라면 목지국은 백제의 다른 이름이 된다. 그러나 이는 1970년대 나와서 지지하는 학자가 사실상 끊어진 설이다. 《정사 삼국지 위지 동이전》에서 기리영 전투로 인해 '한(韓)을 멸망시켰다'(滅韓)고 한 이후 진왕에 대한 기록이 끊어지는 반면 백제는 이 근처 시기 사로잡았던 군현의 포로를 돌려주고 그 뒤로 성장을 이어나가기 때문이다.[28] 정복으로 볼 수 없고, 교역으로 보아도 무방한 정도의 유물만 나왔다.[29] 황해도 신계.[30] 이웃 신라에서 불교가 토착 세력의 반발 속에서 법흥왕이차돈의 순교로 어렵게 수용된 후 곧바로 호국불교로 급속히 발전했던 것에 비해, 백제에서는 침류왕 때 수용된 이후 한동안 불교에 기록이 전혀 없는 것으로 보아 신라만큼 불교가 크게 융성하지는 않은 것으로 보인다.[31] 이때는 수곡성을 공격했다.[32] 광개토대왕릉비 2면 5행에 의거함. 다만 학계에서는 58성 700촌 중 일부는 이전에 아신왕의 관미성 침략 때 반격으로 빼앗은 것을 일괄 합산하여 기록한 것으로 보고 있다.[33] 아신왕이 좀 더 오래 살았더라면 정말로 백제가 망했을지도 모른다는 견해가 있을 정도.[34] 재위 405년 ~ 420년[35] 애당초 백제가 보냈다는 볼모에 대해서는 그 속까지 파고 들어가봐야 하는 게, 정작 '백제'와 '왜'라는 양 당사자 간에는 "선왕이 쌓은 우호를 잇기 위해 방문하였다"라는 백제삼서의 기록과 "내조하였다"라는 일본 쪽의 기록만이 있지, 볼모를 보냈다는 기록은 없다. 즉, 일본서기에도, 또 일본서기에서 인용했다는 백제의 기록에서도 '볼모'라는 표현은 전혀 없고 오직, 한참 후대에 쓰인 '삼국사기'에만 나오는 표현일 뿐이다. 오히려 이 당시 일본으로간 태자는 볼모가 아니라 외교관으로 갔다는 주장도 있으니, 지금 현재로서는 볼모라고 단정 지을 수가 없다. 한편으로는 당시 태자를 맡길 만큼 백제왕과 일왕과의 관계가 매우 친밀했음을 알 수 있다.[36] 고구려 장수왕 재위 기간(412년 ~ 491년) 동안 백제는 전지왕, 구이신왕, 비유왕, 개로왕, 문주왕, 삼근왕, 동성왕을 거쳤을 정도이다.[37] 오랜동안 선왕 비유왕의 시신조차 수습하지 못할 정도였던 것으로 보아 수년간 개로왕이 제대로 통치권을 행사하지 못했을 정도로 심각한 내분이 지속되었던 것으로 보고 있다.[38] 이 과정에서 권력에서 밀려난 재증걸루, 고이만년 등이 고구려로 달아난 것으로 보인다. 이는 나중에 치명적인 결과를 초래했는데 475년 장수왕의 백제 원정 때 이들이 선봉에 선 것.[39]일본서기》에는 이때 백제가 멸망했다고 서술되어 있다. 국내 역사학자 중에서도 이때 백제는 사실상 멸망했고 웅진에 나라를 다시 세웠다고 보는 의견이 있다.[40]일본서기》의 기록.[41]삼국사기》의 기록.[42] 때문에 웅진 천도 시기를 서진 멸망 이후의 동진에 빗대는 사람이 많다. 둘 다 북방 세력에게 박살나서 군주가 죽었고, 남쪽으로 피신하였으며, 외적의 방어에 좀 더 쉬운 곳에 새로 도읍을 정했다는 것.[43] 현재 세종특별자치시 부강면.[44] 이 점에 대해서는 당시 고구려의 공세 한계선에 다다랐다는 평가가 많다. 고구려가 한강 유역을 차지했다고 하지만 실제 이 지역에 형성된 고구려 성은 수십 ~ 수백 명이 주둔할 정도 규모밖에 되지 않는 경우가 많으며 이처럼 고구려가 점령에 소홀했던 양상은 초토화되었다고는 하나 왕성이었던 풍납 토성조차 예외가 아니다. 고구려 입장에서도 주된 전선은 마침 물길이 활개를 치던 북쪽이었고 백제 지역은 수시로 건드려는 보지만 점령하고 주둔할 의지까지는 없었다. 오히려 한성 함락 후에는 구석에 알 박고 성 도배하면서 백제를 돕던 신라에 대한 공격이 훨씬 더 날카로웠던 편.[45] 참고로 왕권 버금 세력이 사라진 것이 확실한 처음 시기는 왕비족이 사라지는 신라 무열왕 대부터, 분권의 상징인 사병이 완전히 혁파되는 것은 조선 태종 시기는 되어야 한다.[46] 475년 한성 함략 이후 전라도 지역의 마한 독자 세력들이 급성장하는 모습을 보인다.[47] 계백에게 주어진 군대 숫자가 5천 명밖에 안 된 이유로 제기되기도 한다. 다만 대다수 군대를 당군과 싸우게 하다보니 남은 군대가 5천 명밖에 없었다는 설도 있다. 어쨌든 백제가 왕과 지방 세력 간의 대립이 이 당시 고구려나 신라에 비해 심각한 수준이였다는 것은 설득력이 높다.[48] 단적으로, 장수왕의 공격으로 개로왕이 죽을 때, 문주왕이 이끌고 온 군대의 주력은 백제 귀족들의 군대가 아닌 신라군이었다. 다시 말해 신라로부터 원군 1만을 거느리고 한성 위례성에 도착하였으나 백제 귀족의 응원군은 오지 않은 채 수도가 점령되고 부왕은 시해. 웅진 시대에 국력 회복이 어느 정도 된 동성왕은 과하다 싶을 정도로 왕권 강화를 시도했고, 결국 측근 세력으로 보았던 백가를 중심으로 한 세족들의 반란으로 사망. 의자왕 역시 왕권 강화를 위해 노력한 결과 백제 귀족들의 지원은 뜨뜻미지근한 수준을 넘어서지 못했다. 실제로 의자왕의 사망 역시 그 짧은 시간에 배반에 의한 것이었다.[49] 이러한 정황들에 근거해 백제가 점령 합병한 마한 세력의 유지들을 효과적으로 다스리는데 실패했다는 의견도 제기된다. 백제의 주요 왕들이 상당히 뚜렷한 업적과 성과를 보였음에도 그리 크지 못한 나라로 인식되는 이유는, 나라가 팽창의 탄력을 받을 시기에 유독 지방 귀족들의 왕권에의 방해 견제 공작이 있었기 때문. 이는 백제의 지배 계층 내에서 왕족과 귀족 간의 상당한 이질감이 계속되었다는 것을 의미한다. 외국의 침략에 수도가 함락되는 상황에서조차 밍기적댄 백제 지방 귀족들의 모습에는 사실상 백제 왕실이 망하길 바라는 그들의 욕망이 엿보인다.[50] 문주왕의 형제인 곤지의 아들이 무령왕(장남)과 동성왕이다. 동생인 동성왕이 먼저 왕위에 오르게 된 것은 정변으로 권력을 잡은 진씨 세력이 더 어리고 고분고분해 보이는 모대를 왕위 계승자로 선택했기 때문이었을 것이다.[51] 이 문서 하단의 '마한 정복에 관한 논란' 문단을 볼 것.[52]삼국사기》에 따르면 무령왕은 동성왕의 아들인 것으로 기록되어 있는 반면, 《일본서기》에는 동성왕의 이복형이자, 곤지의 장남이라고 기록되어 있다. 무령왕의 생몰연대 상으로 동성왕의 형이라는 설이 유력하다.[53] 동성왕 생존 당시 무령왕은 동성왕 반대 세력에 가담해 있었다. 때문에 동성왕의 피살에 무령왕이 관여되어 있을 가능성이 제기되고 있지만, 기록 미비로 사실 여부를 확인하기는 어렵다.[54] 이와 관련된 재미있는 기록으로 고구려에서 북위에 '우리가 부여산 금이랑 섭라(탐라로 추정)산 패물을 썼는데 부여는 물길한테 쫓겨나고 섭라는 백제가 처묵처묵해서 조공을 못합니다.'라고 변명한 기록이 있다. 북위는 이에 대해 '당신들이 잘하면 되지 왜 우리한테 와서 칭얼대냐, 잘 좀 해봐라'고 깠다.[55] 다만 이는 프로파간다에 가깝고 실제로는 가야 지역에 방 - 군 - 성 조직을 설치하려는 모습을 보인다. 이를 간파한 이 지역 소국들은 사비회의를 어떻게든 피하려고 하며 신라에서 관직을 타내는 모습까지 보인다. 당연히 성왕은 피꺼솟.[56] 임용한 등의 해석에 따르면 백제 왕실과 지방 세력 간의 분열로 인해 지방 세력이 왕권을 강화해줄 것이 뻔한 한강 유역을 개발하는 데 협조하는 것을 거절했고, 여기에 북쪽의 고구려와 남한강의 수운을 업은 신라의 양측의 압박을 받는 현상을 극복하지 못하고 성왕이 철군하자, 신라 진흥왕이 '잘 먹겠습니다'하고 한강 유역을 접수했다는 것이다. 《일본서기》에도 "백제가 한성을 버렸다"라고 적혀있다. 자세한 내용은 신라의 한강 유역 점령 문서 참조.[57] 성왕의 목을 벤 자는 《삼국사기》에는 비장 고간 도도라고 되어 있다. 도도가 노비라는 설이 있는데, 이와 관련된 내용은 《일본서기》에 나오는 표현으로, 정확하게는 도도가 노비라고 기록된 것이 아니라 사로잡힌 성왕이 도도를 꾸짖으면서 천한 노비라고 부른 것이므로, 노비라는 표현이 꼭 도도의 실제 신분을 반영한다고 보기는 어렵다.[58] 정확히는 2만 9천 6백 명. 같은 신라의 자료를 인용한 김유신 열전에는 1만의 목을 베었다고 썼다. 김유신 열전부터도 과장이 심하다고 김부식부터 깠던 것을 고려하면, 본기의 과장이 의심되는 부분.[59]삼국사기》의 기록을 보면, 백제군 패배의 결과로 성왕이 사로잡힌 것이 아니라 왕이 사로잡혀 처형당했기 때문에 백제군이 무너진 것이다. [60] 당시 왜는 가야와 무역을 통해 식량 문제를 해결하고 있었다. 때문에 가야에 대한 영향력을 회복할 절실한 필요성이 있었다.[61] 태자 아좌의 경우 혜왕에 의해 살해된 것으로 보고 있다. 다만 위덕왕의 경우 나이가 연로했기 때문에 암살인지 자연사인지는 불분명하다.[62] 《삼국사기》에는 법왕이 혜왕의 아들이라고 기록되어 있으나, 백제 왕들의 가족 관계에 대한 삼국사기의 기록은 틀릴 때가 많다.[63] 선왕인 무왕은 고구려를 견제하기 위해 당나라와의 외교에 많은 공을 들였다. 무왕은 당나라가 고구려를 침공하면 백제가 도와주겠다고 약조하면서 여러 차례 당나라에 고구려의 침공을 요청했다. 그러나 정작 당나라가 645년 고구려 정벌에 나서자 의자왕은 약속을 깨고 당나라를 도와주지 않았다. 오히려 의자왕은 당나라의 또다른 동맹국인 신라가 당나라를 도와 고구려 원정에 나섰을 때 신라의 배후를 빈집털이 공격했다. 이에 당 태종은 분노하여 죽을 때까지 백제의 사신을 받지 않았다. 당 태종이 죽고 당 고종이 즉위하자 의자왕은 당나라와 관계 개선을 위해 다시 사신을 파견하였으나 당 고종 역시 냉담했고, 결국 652년 이후 당나라로 사신을 파견하지 않았다.[64] 당나라는 신라가 독자적인 연호를 쓰는 것에 대해 시비를 걸었고, 또 신라 왕이 여왕인 것을 비웃어 신라 조정을 화나게 하는 등 두 나라간의 외교 관계는 순탄치 않았다.[65] 물론 사서에 모든 전쟁이 기록된 것이 아니고, 삼국 시대 후대에 갈수록 기록이 자세해지기 때문에 의자왕이 삼국시대에 가장 많은 전쟁을 일으킨 군주인지 여부는 확인하기 어려운 문제다.[66] 패전의 책임으로 태자 위덕왕은 하마터면 왕위에 오르지도 못할 뻔 했다.[67] 이 시기가 바로 당태종 - 당고종으로 대표되는 당나라의 전성기로서, 비단 당나라 뿐만 아니라 중국 역사를 통틀어도 가장 강력한 전성기 중 하나다. 또한 백제는 국가 총 동원 해도 병력 10만이 넘을 가능성이 희박한데 비해, 당은 여러 국가와 전쟁을 하면서 한 전선의 원정에만 적어도 수만 명 이상의 군사를 여러 차례 보낼 수 있는 국가였으며 백제 원정 당시 병력은 13만에 달했다. 기본 체급이 다른 국가와의 싸움이었다.[68] 5천 명이라는 수치는 김부식의 《삼국사기》 신라 본기를 참고한 것인데 사실 신라 본기에도 5천 명이 백제군의 전부였다고 직접적으로 서술하고 있지는 않다. 신라 본기 태종 무열왕 편에는 의자왕계백에게 5천 명의 군사로 신라군과 싸우라고 했다는 이야기가 나올 뿐 그 후 사비성이 함락될 때까지 백제군의 저항과 병력수에 대해서는 구체적으로 서술되어 있지 않기 때문이다. 《삼국사기》 신라 본기의 기록으로 볼 때도 계백의 신라군 방어 병력 이외에 최소한 사비성 방어 병력이 별도로 있음을 추론할 수 있다.[69] '살아 돌아간 자가 거의 없었다' 등.[70]삼국사기》 백제 본기 의자왕 편에도 동일한 기록이 실려 있으므로 《삼국사기》의 편찬자들도 《구당서》의 내용이 신뢰성이 있다고 본 것을 알 수 있다. 《삼국사기》는 "사대주의적"이라는 비판을 받기도 하지만, 고구려 태조왕에 대한 기록 등에서 볼 수 있듯이 중국측 기록이 우리측 기록과 어긋나는 경우에는 우리측 기록을 우선시 했으며 주석을 달아 "중국측 기록은 이러하다."라는 식으로 작성되어 있다. 반면 중국 기록만 있을 경우에는 거리낌없이 취했다. 피휘의 문제로 연개소문이 천개소문으로 기록된 당나라 기록을 취한 결과 연개소문은 《삼국사기》에 천개소문으로 등장한다.[71] 또 다른 의문점은 당군이 어느 강을 거슬러 올라갔는가이다. 《삼국사기》 백제 본기에서 의자왕과 신하들이 작전을 논의할 때는 당군이 '백강'을 거슬러 올라올 것으로 예상하고 기벌포를 막을 것인가를 논의했으며, 《삼국사기》 신라 본기에도 기벌포에서 백제군과 싸웠다고 되어 있다. 그런데 《구당서》 및 백제 본기에는 '웅진강' 입구에서 상륙 작전으로 백제군을 격파하고 강을 거슬러 올라간 것으로 나오며, 상륙한 곳은 강의 동안(東岸)(《신당서》에는 좌안(左岸)으로 표기)이라고 기록되어 있다. 문제는 웅진강과 백강이 같은 강인지, 그리고 그것이 어느 강인가 하는 점이다. 강 이름의 차이를 문자 그대로 해석해서 웅진강과 백강을 서로 다른 강으로 생각한다면, 백제 측은 당군이 백강을 거슬러 올라올 것을 예상했는데 당군이 실제로는 웅진강을 선택함으로써 백제군의 의표를 찔렀다고 볼 수도 있다. 그러나 통설은 백강과 웅진강은 모두 같은 금강이라고 보는 것인데, 이는 신라 본기에서 기벌포를 언급하고 있으며 기벌포는 금강 하구의 장항으로 보고 있기 때문이다.[72] 그런데 통설을 따르는 경우 금강 하구에서 강의 동안은 기벌포와는 반대편인 군산 방면이라는 점이 의문으로 남는 등의 문제가 있어서 아직 논란이 끝난 것은 아니다. 일부에서는 백제 부흥 운동의 마지막을 장식한 백강 전투와 관련하여 백강이나 웅진강을 금강이 아닌 동진강으로 보기도 한다. 또한 참고로 《일본서기》 제명기에는 당군의 상륙 지점이 미자진으로 기록되어 있는데, 미자진이 곧 기벌포인지 혹은 어디를 의미하는지는 불명이다.[72] 백제 부흥 운동 과정에서 마지막 결전이 이루어진 곳은 백강이며, 역시 기벌포가 언급되고 있으므로 백강 = 금강이라는 점에는 큰 이견이 없다. 다만 '백강'이라는 이름이 다소 혼란스럽게 사용되어 동진강과 금강 사이에서 왔다갔다했다는 견해는 있다.[73] 신라군이 합류한 것이 백제와의 결전 이전인지 이후인지에 대해서는 《구당서》나 《삼국사기》 모두 분명하게 설명하지 않고 있다. 《삼국사기》 신라 본기에는 신라군이 당군과 합류한 다음날 사비성을 함락시켰다고 기록되어 있으며 황산벌 전투 이후 사비성 함락까지는 백제군과의 본격적인 전투에 대한 언급이 전혀 없고 《삼국사기》 백제 본기에도 백제군과의 결전 부분에 당군만이 언급될 뿐 신라군에 대한 언급은 없으므로, 신라군의 합류는 백제군과의 결전 이후인 것으로 보인다. 하지만 결전이 벌어진 곳이 사비성에서 불과 20 ~ 30리 떨어진 곳이었으며 당군이 후퇴하는 백제군을 추격해서 곧 사비성에 입성했다고 기술된 점에서 신라군이 그 전에 합류했을 가능성도 있다. 신라군의 합류 시점이 백제와의 결전 이후라면, 당군은 백제의 주력을 격파하고 약속한 날짜에 도착했는데 신라군은 계백의 별동대의 저항을 처리하지 못해서 날짜를 지키지 못한 셈이 되므로 소정방이 격분해서 신라 독군의 목을 베겠다며 날뛴 것도 무리는 아닐 것이다.[74]삼국사기》를 제외하고 중국의 모든 사서와 삼국유사는 부여융을 태자로 기록하고 있다. 다만 《삼국사기》는 부여융이 태자로 책봉되었으나 나중에 부여효로 태자가 교체된 것으로 기록되고 있다. 일단 다수의 사서에서 부여융을 태자로 기록하고 있는 만큼 부여융이 태자였다는 기록의 신빙성을 높게 보고 있다. 다만 《삼국사기》의 기록이 맞는다면 이는 655년 정월에 발생한 친위 쿠데타와 관련된 것으로 보고 있다.[75] 물론 이걸 갖고 백제인은 대부분 일본으로 떠났으니 따라서 한국과 백제는 전혀 관련이 없다라고 보면 곤란하다. 당대의 기술로는 배를 통해 그것도 해상으로 대규모로 타국으로 이주하는 것에는 한계가 많고 더더군다나 국가 주도의 원정도 아닌 규모가 미약한 일개 가문들의 해상이동이었다. 게다가 일본으로 가는 가장 좋은 루트는 이미 한반도 남부를 점령한 신라에 의해 막혀 있었기에 국가 단위의 대규모 이동이었다면 당연히 신 국토 개간을 위한 노동력이 매우 필요하며, 수군이 건재한 신라가 그것을 보고만 있었을 리가 없다. 또한 상식적으로 생각해도 이미 농경이 주류산업인 상태에서는 수렵시대와는 달리 인구가 매우 불어나 있기에 부양능력도 없이 대규모로 어딘가로, 그것도 바다를 통해 떠난다는 건 자살행위나 다름없는 굉장히 위험한 일이다. 애초에 백제인이 거의 안 남아 있었다면 후백제의 발흥은 설명 자체가 안 된다.[76] 또한 통합 초기에야 다들 유화적으로 옛 지배층을 회유하려는 건 세계사적으로 일반화된 현상으로 이 또한 신라만 했다고 보는 건 실제와 거리가 먼 주장. 훗날 유대인들과 용서없이 학살을 주고 받게 되는 셀레우코스 제국만 해도 초반에는 대단히 적극적인 우대로 유대 지배층의 마음을 사로잡았고, 반항하는 그리스 도시 몇 개를 지구상에서 없애버린 로마 제국도 협조하는 그리스 도시 국가들의 지배층들은 거의 자기네와 대등한 우대를 해줬다. 페르시아만 해도 동류인 마다이인들에겐 거의 대등한 대우를 해줬으나 신바빌로니아인들에겐 그런 대우를 해주지 않았음에도 일단 그 상류층들과는 통혼이나 파격적인 대우를 해줬다. 이 부분이 더 궁금하면 페르시아와 성경, 존 폴슨의 유대인의 역사 등 참조. [77] 신형식의 신라 통사 참조. 고려 국가와 집단 의식 참조.[78] 왕의 이름자는 함부로 사용할 수 없는데, 이룰 성(成)이 너무 자주 사용되는 한자라 스스로 '이단(李旦)'으로 개명하였다.[79] 제2품. 좌평보다 한 단계 낮은 관직.[80] 신공황후 49년조[81] 오해를 막기 위해 첨언하자면 이 주장이 백제가 충청 ~ 전라 지역을 차지하지 못했다고 보는 것은 아니다. 다만 이러한 주장은 연대나 사실 관계 면에서 신뢰할 수 없는 기록이 실제 백제, 그 중에서도 근초고왕 한 명만이 '마한'을 정복하고 확장하는 과정에 대응할 수 없다고 보며, 아예 관련 기록이 후대에 정치적 목적에 따라 소급된 것이라고 보는 것이다. 즉 고고학적 사실은 인정하되, 문헌의 사실성은 비판적으로 보는 것. 《일본서기》의 기초적인 신뢰도 자체가 굉장히 의심스럽기에 나올 수 있는 주장이다.[82] 최소한 530년대 이후[83] 마한의 마지막 조공 기사인 3세기 후반(《진서》 마한전 등)과 '마한' 영역이 완전히 백제에게 정복된 것으로 이견이 없는 6세기 중반 사이 시기에 '마한'이 사료에 뚜렷하게 등장하는 사례는 《송서》에서 야마토 정권이 '왜 백제 신라 임나 가라 진한 모한 7국 제군사'로 책봉을 요구해 백제만 빼고 받은 사례가 유일하다. 그러나 《송서》 열전에서는 이전과 이후의 사서들과 달리 한반도와 일본 열도 여러 국가의 내부 사정에 대한 기사 없이 책봉 기사만 기록하고 있어 책봉을 받은 당사국의 사정을 제대로 파악하고 있었다는 근거가 전혀 없다. 또한 무엇보다도 저 기사는 소위 임나일본부설 문제에서 언급된지 오래되어, 한국에서의 연구를 통해 야마토 정권이 뻥카를 던지며 외교를 한 흔적일 뿐 실제 한반도 남부의 사정을 반영하지 못한 것이라는 반박이 이미 상식적으로 자리잡아 있다. 다시 말해 사실로 믿을 수 없는 기사에만 '마한'의 이름이 잔존해 있는 것이다.[84] 영산강 일대에는 6세기까지 거대한 항아리를 무덤으로 사용하는 문화를 가진 마한세력이 존재했음이 고고학적으로 확인되었다.[85] 일본에서는 이들을 건너온 사람들이란 의미인 도래인이라 표기한다. 한반도 입장에서는 이들은 일본 열도로 건너간 사람들이므로 도왜인이라고 표기할 수도 있다.[86] 다만 이들이 인질이었는지 아니면 백제 - 야마토(왜)간의 외교 대사 역할을 수행함과 동시에 야마토 조정에 백제계를 대표하는 존재였는지는 여전히 학계의 논란거리다.[87] 백제 제25대 무령왕(501∼523 재위)이 왕도(王都)였던 곰나루(웅진, 공주) 지역에서 ‘백제대빈’을 치렀다는 사실이 1971년 출토된 무령왕의 ‘묘지명’을 통해 입증되었다. 백제 왕실의 성대한 장례 의식을 에서도 똑같이 거행했다는 것은 당시 나라 땅에 거주하던 백제계 세력들의 영향력이 절대적이었음을 추찰케 한다.[88] 노중국 교수도 당시 '백제의 국서 강탈 사건'을 왜의 독자적인 대중국 외교정책에 대한 백제측의 불만으로 일어난 사건이었다고 평가했다. 노중국 교수의 설명에 따르면 593년부터 603년까지 왜와 백제는 긴밀한 관계를 추구하였으나. 603년 이후 614년 사이에(실제로 일본서기에서도 602년 10월에서 615년 사이에 약 12년 동안 백제와 의 외교관계 기록이 보이지 않는다.) 변화가 나타난다는 점, 당시 성덕태자의 관위와 憲法 시행과 朝禮 개정 등의 일련의 정책, 607년 수에 전해진 왜왕의 국서에 ‘日出處天子’라고 했듯이 왜가 독자성을 강조한 점 등을 지적하면서, 국서탈취 사건은 왜가 선진문물을 직접 받아들이기 위해 대수접근을 적극적으로 시도하고 이에 수도 사신을 파견하는 등 호응하는 상황에서 이를 탐탁치 않게 생각한 백제가 양국의 관계를 파악하기 위한 의도에서 일어난 사건이었다고 평가했다.[89] 물론 사료 부족이 커서 명확하지는 않다.[90] 지명이 가진 특성 중 하나가 바로 보수성이 강하다는 점이다. 외국의 사례만 봐도 런던(London)은 고대 로마 시기의 론디니움(Londinium)에서 파생되었으며, 중동 지역의 많은 오래된 도시들의 지명이 옛날 지명을 그대로 따서 쓰고 있는 경우가 많기 때문이다. 그렇기에 한반도 중부의 고구려 지명들은 오히려 기존 마한 토착 세력들이 쓰던 지명을 그대로 썼을 가능성이 많다. 이러한 이유로 지명을 가지고 고대 언어를 연구하는 것에 회의감을 나타내는 학자들이 많다.[91] 백제의 장례 양식은 독특한 측면이 있는데, 시체를 한 번 가매장한 다음 일정한 기간이 지난 다음 파내며, 그 를 깨끗하게 씻고 장례 의식을 행한 뒤 다시 매장하는 복장 형식이었다.[92] 무령왕릉과 관련이 있을 것으로 보이는데, 대부분 도굴됐다.[93] 그러나 고구려에 비해 벽화의 수는 훨씬 적다.[94] 하지만 지리적 조건에 기반한, 삼국 중 백제의 국력을 가장 높게 보았던 다산 선생의 평가 역시 무시할 수는 없을 것이다. 고구려에서는 워낙 땅이 땅이다 보니 비옥하면서도 광활한 경작지가 별로 없었고, 신라 역시 경상도 일대 만을 점유하고 있던 시절에는 낙동강 중상류의 분지 및 하류의 김해 평야를 제외하고는 산투성이였으니…[95] 정확하게는 동성왕 시기다. 동성왕은 제주도까지 통일했다는 학설이 존재할 정도로 남부 지역의 정리에 성공한다. 무령왕 시기의 중흥은 이런 바탕 속에서 가능했다. 중국으로 치자면 남북조 시대가 되면서 장강이 개발되기 시작한 것과 마찬가지다. 이전까지 중국의 중심은 황하 유역으로 그외에는 오랑캐 취급받았다. 춘추 전국 시대의 오, 월, 초가 괜히 촌놈 소리 들은 것이 아니다. 물론 계속 조용했던건 아니고 동성왕 이후에도 자잘한 충돌이 있었다.[96] '선진 문물 줄 테니 군사를 빌려다오' 하는 식. 특히나 왜와 이런 거래를 하는 모습이 많이 보인다.[97] 물론 긍정적으로 보는 학자도 있겠지만, 공주 대학교의 정재윤 교수와 이남석 교수 등 현재 국내에서 백제사 연구를 주도한다고 할 수 있는 학자들은 부정적으로 보고있다.[98] 북조계 자료는 충공깽이라 적혀있는 것도 왜곡되거나 믿기 어렵다는게 문제.[99] 이런 설의 가장 큰 문제는 이 시기 정도 되면 낙랑이고 부여고 다 망한 이후라는 것이지만…[100] 물론 가야 정도로 극단적이지는 않았다.[101] 참고지만 한민족이 세운 국가는 보통 왕이 무소불위의 권력을 휘두를 수 있었던 때가 꽤 적은 편이다. 전부는 아니지만 보통 고서에 서술이 아주 안 좋은 왕이 그런 권력을 휘두를 수 있었던 왕이다. 고구려는 중기까지 소노(消奴)·절노(絶奴)·순노(順奴)·관노(灌奴)·계루(桂婁)이상 5부에서 왕과 왕비가 배출되었으며, 신라는 중기까지 국왕이 6부의 왕의 대표라는 노태돈의 주장에 힘이 실리고 있다. 고려의 경우에도 명군이라는 고려 현종거란의 침입 때 호족들로부터 굴욕을 당할 정도로 지방 호족들의 세가 막강했다.[102] 예외가 조선 왕조의 왕들로, 이 시대의 왕들은 말기를 제외하면, 제아무리 왕권이 미약해도 신하들이 감히 눈도 못 마주치고 바짝 엎드려 있어야 했고, 왕권이 절정에 달했던 태종 ~ 연산군 시기나, 숙종 ~ 정조 시기에는 왕의 말 한마디에 정승도 모가지되는 살벌한 상황까지 있었다. 심지어는 세도정치에도 초반에는 나는 새도 떨어뜨리는 세도 가문의 사람이 왕한테 무례하다고 디스당한 것 때문에, 트집잡힐까봐 무서워서 자살한 사례도 있었을 정도다. 그러나 이건 조선 왕조가 유난히 특이했을 뿐.[103] 기록에서는 1000척이라고 하지만 1000척은 과장이고 실제로는 400척이라고 추정한다.[104] 시대와 총 인구의 차이를 감안해보면 훗날 임진왜란과 비견될 수도 있을 정도의 대병력이라고 볼 수 있다.[105] 고령군이 2015년 고령 군청 소재지인 고령읍의 명칭을 대가야읍으로 변경했을 만큼 고령군은 대가야의 중심지다.[106] 말이야 맞는 말이지만 사실 경상남,북도 지역모양를 보면 모양새 자체가 교과서에서 나오는 가야와 고대 신라와 교과서에서 나오는 후삼국 신라 영토랑 비슷한지라 대가야 고령군을 단번에 떠올리기엔 인상이 희박한 감이 크다. 대가야 전성기 영토또한 경상남도 쪽에 많이 차지하고...심지어 본거지인 고령군 경우 대가야라는 소리에 고령군이 경상남도 쪽이라 오해하는 사람도 종종 있다.(...) 고령 사람들은 울어도 좋다.[107] 그 증거로, 옛 지금의 전라북도 익산의 금마, 왕궁 근처에는 백제 시대의 유적이 엄청나게 많이 남아있다. 왕궁(王宮)은 아예 지명이 백제가 있던 시절에 이 지역의 중요성을 온몸으로 알리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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