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조영 / 이이화의 인물한국사 外

2018. 12. 29. 00:27우리 역사 바로알기



이이화의 인물한국사  

대조영

大祚榮

발해를 건설한 고구려 유민


요약 테이블
출생 미상
사망 719년

고구려 유민 대걸걸중상과 대조영

   대조영(大祚榮, ?~719)은 누구일까? 이 의문을 제일 먼저 던진 사람은 조선 후기의 실학자 유득공(柳得恭)이었다. 유득공은 대조영을 우리 역사의 영웅으로 부각시킨 학자이다. 오늘날에는 의심없이 그를 남북국시대 발해의 창업군주로 받들고 있다.

   대조영이 살던 시대에 당나라의 국경도시 영주(營州)에는 여러 종족의 주민들이 어우러져 살았다. 이들은 자기네 고유의 옷을 입고 자기네 말로 떠들면서 살았으나 늘 중국 사람들의 눈치를 살펴야 했다. 그곳의 북쪽으로는 만리장성이 길게 뻗어 있고 동북쪽으로는 요동과 요서의 경계인 요하(遼河)가 흐르고, 남쪽으로는 발해만의 북쪽 끝자락이 비죽이 나와 있었다. 또 요동에서 유주(북경)로 들어가는 통로가 길게 뻗어 있었다. 고구려 사신들은 육로로 당나라에 들어갈 때 이곳을 거쳤다.

   영주는 넓은 지역이라 치안 상태가 늘 불안했다. 군대를 주둔시키고 주민을 관리 감시하는 역할을 맡은 도독부(都督府)를 안전한 지대인 유성현(오늘날의 조양)에 두었다. 영주의 성곽은 위압감을 줄 정도로 견고하고 장대하게 조성되어 있었다. 이곳을 드나드는 북쪽사람들에게 먼저 겁부터 주려는 의도로 조성된 것이다. 만리장성 끝자락에 있는 산해관으로 들어갈 때부터 사람들은 위압감을 느꼈다.

   영주성 언저리에는 원래 북쪽에 근거지를 둔 거란족이 많이 살았으며 다른 종족들도 섞여 있었다. 고구려 주민을 비롯해 북쪽의 돌궐족과 거란족, 동쪽의 말갈족이 어우러져 살았던 것이다. 이들은 전쟁을 벌이지 않을 때에도 서로 경쟁심을 가지고 으르렁대기 일쑤였다.

   당나라는 고구려가 멸망한 뒤, ‘얽어매 두려는 정책’을 써서 고구려 유민과 말갈족 · 거란족을 영주로 강제 이주시켜 살게 했다. 강제로 이주해 온 사람들은 대개 귀족이나 벼슬아치 등 유력자들이었다. 또 중국 내지로 끌려가던 고구려 포로 가운데 일부도 이곳에 마을을 이루고 살았다. 당나라는 이들을 이곳에 살게 하면서 회유해서 복종시키거나 호되게 강제 노역으로 내몰기도 했다. 포로가 아닌데도 포로와 같이 학대했고 노예가 아닌데도 노예처럼 부렸다.

   고구려 유민들 가운데 대걸걸중상(大乞乞仲象)대조영(大祚榮) 부자가 끼어 있었다. 당나라 사람들은 이들 부자가 말갈족의 한 갈래인 속말부(粟末部)의 추장이거나 고구려의 별종(別種)이라고 했다. 또한 고구려에서 장수노릇을 했다고도 했다.

   이러한 기록들을 종합해 보면, 대걸걸중상 부자는 고구려의 귀족이거나 무사계급에 속했을 것이다. 두 사람은 거란 땅으로 옮겨가서 벼슬을 했다. 대걸걸중상이 거란의 대사리(大舍利) 벼슬을 했는데 ‘대사리’의 ‘대’자를 따서 성으로 삼았다. 대사리는 장수에게 붙이는 호칭이었다. 그의 자녀도 성을 대(大)로 삼았으니 걸걸중상은 대씨의 시조인 셈이다.

   이들 부자는 신분에 걸맞게 가족과 함께 종들을 데리고 와서, 고구려 유민들이 모여 사는 마을에서 자연스레 지도자로 군림했다. 이들은 영주에 거주하는 고구려 유민들 속에서 10여 년 동안 어우러져 지내면서 유력한 지도자로 추대되었다. 대걸걸중상과 대조영은 거란족이나 말갈족과 마찰을 일으키지 않으려고 조심하면서 고구려 유민들을 단속하며 때를 기다렸다. 또 이들 부자는 말갈족의 유력한 추장인 걸사비우와 친분을 나누며 동지애를 키웠다.

   당나라 사람들은 고구려를 멸망시키고 나서도 고구려 주민을 어느 종족보다 미워했다. 유민들이 끈질기게 저항했기 때문이다. 당나라 사람들은 고구려 주민을 ‘거즈우리 팡즈(高句麗幇子)’(고구려 치들)라거나 ‘거즈우리 노(高句麗奴)’(고구려 종놈)라고 부르면서 얕보았다.

   당나라 지배자들은 고구려 주민들과 말갈족을 이간질시켰다. 고구려가 대제국을 건설하는 과정에서 두 민족은 여러모로 서로 협조했고 정복전쟁에도 힘을 합해 싸웠다. 당나라 지배자들은 이들이 다시 단결하면 변경정책에 방해가 될 것이라고 여겼던 것이다.

마침내 반란의 때가 왔다. 영주도독으로 부임해 온 조문홰는 영내의 주민을 오랑캐라고 얕보면서 모질게 다루었다. 그는 다른 도독들보다 더욱 심하게 이들 민족을 야만인으로 다루었고 때로는 채찍을 휘두르면서 노예로 부렸다.

조문홰는 전형적인 당나라 지배세력의 한 사람으로, 변경의 종족들을 채찍으로 다스려야 한다는 생각을 가진 벼슬아치였다.

게다가 늘 술에 취해 여자를 낀 채로 나날을 보냈다. 또 흉년으로 주민들이 굶어 죽고 있는데도 구호할 생각을 전혀 하지 않고 남의 일인 양 바라보기만 했다.



   이곳에 거란 추장 출신이진충(李盡忠)손만영(孫萬榮)도 거주하고 있었다. 지략과 용기를 두루 갖춘 두 사람은 거란족의 단결을 고취해 하나의 세력으로 키웠다. 두 지도자는 고구려 유민과 말갈족에게도 손을 뻗쳐, 영주도독을 죽이고 당나라 군사를 몰아내 영주를 차지하기로 뜻을 모았다.

   이진충은 반란군의 총지휘자가 되어 자신을 ‘위가 없는 칸(無上可汗)’(칸은 임금의 뜻)이라고 표방하고 거란인의 완전 독립을 선포했다. 당나라 황제를 인정하지 않겠다는 것이다. 손만영은 총대장이 되어 주변의 작은 성들을 함락시키고 초기 단계부터 추종자를 수만 명으로 키웠다. 그런데 이진충은 처음부터 너무 성급하게 자신을 임금이라고 표방함으로써 다른 종족들을 주저하게 했다. 반역이 성공을 해도 그의 신하가 되어야 했기 때문이다.

    696년 5월, 연합부대는 영주성과 유성현으로 쳐들어가서 조문홰를 단숨에 죽이고 성을 차지했다. 이들 연합부대는 각기 목적이 달랐다. 고구려 유민은 조국의 부흥을 꾀하려는 계획이었고, 말갈족은 고향으로 돌아가 살려는 속셈이었다. 그리고 거란족은 당나라 세력이 다시는 자기네 영역을 침략하지 못하게 변방의 힘을 약화시키려는 의도였다.

   당나라 조정에서는 즉시 토벌사령부를 설치하고 수만 명의 군사를 파견했다. 그러나 당시 당나라서남쪽의 토번(티베트) 정벌에 힘을 쏟느라 전력을 기울일 수 없었다. 토번은 당나라 영역을 야금야금 먹어들어오고 있었기 때문이다. 연합부대는 이런 정세를 타고 유주(오늘날의 북경) 근처까지 진출해 승리의 기쁨을 누렸다.

   당나라 조정에서는 당황하여 토벌군을 대거 투입하고 이진충을 ‘이진멸(李盡滅)’(깡그리 없애 버린다는 뜻), 손만영을 ‘손만참(孫萬斬)’(만 번 목을 벤다는 뜻)이라고 지목하며 소탕 의지를 다졌지만 1년이 넘도록 그 뜻을 이루지 못했다. 두 지도자는 유주까지 점령하며 기세를 올리면서 완강하게 버텼던 것이다.

청년 대조영의 눈부신 활약

반란의 시기, 서부전선이 최전선이라면 동부전선은 후방에 해당했다. 동부전선은 당나라로부터 가장 먼 변경지대였고 그 바깥에 있는 요동은 고구려의 옛 영토였다. 대걸걸중상대조영말갈족의 추장 걸사비우와 힘을 합해 동부지역 평정에 나섰다. 이들 연합부대는 당나라에 복속하던 여러 성들을 손쉽게 차지했다. 더욱이 이해 9월에는 평양에서부터 고구려 유민에게 쫓겨 요서 고성에 옮겨와 있던 안동도호부를 공격해 심각한 타격을 입혔다.

   안동도호부 “동쪽을 편안하게 하는 임무를 띠고 군사와 벼슬아치를 두어 보호한다”는 뜻으로 지은 관부의 이름인데, 이때에 와서는 전혀 제 구실을 못하고 이름만 유지하는 정도였다.

그동안 중국에서는 압록강 건너편에 있는 국경도시를 ‘안동(安東)’이라고 했다. “동쪽 오랑캐를 편안케 한다”는 뜻이다. 중국 사람들은 이와 같은 뜻으로 서쪽에는 안서(安西)를 두고 남쪽에는 안남(安南)을 두었다. 그러다가 중화인민공화국이 성립된 뒤에는 안동을 ‘단동(丹東)’(동쪽을 붉게 물들인다는 뜻)이라 고쳐 부르고 있다. 이처럼 안동이란 지명은 고구려와 당나라의 긴장 관계 속에서 붙여진 이름이다.

   대조영은 요동 일대의 안동 관할지역이자 옛 고구려 땅을 하나씩 차지하며 전과를 올리고 있었다. 당나라 중앙군은 이진충의 반란군에 가로막혀 동쪽 전선으로는 전혀 진출할 수 없었다. 대조영이 요동을 근거지로 삼자, 당나라로서는 ‘코붙임’의 형국이 되었다. 바둑을 둘 때 돌 한 점이 진로를 가로막게 되면 떼어 버리기도 어렵고 그대로 두고 비켜 갈 수도 없는 난처한 형국을 말한다. 이렇게 되자 안동도호부 관할의 작은 성들은 연합군에게 목숨을 구걸하는 처지로 내몰렸다. 고구려 유민은 대조영이 거느린 군사 대열에 호응하며 속속 합류했다.

   이럴 때 정세의 변화가 왔다. 북쪽에 도사리고 있던 돌궐의 우두머리 묵철이 당나라와 연합해 거란족 공격에 나선 것이다. 묵철은 이 기회를 이용하여 거란족의 힘을 약화시키고 돌궐족의 영역을 넓혀 돌궐 왕국을 확고히 하고자 꾀했다.

또 당나라에서 빼앗아 간 북쪽의 넓은 영토와 수천 호의 주민, 그동안 약탈해 간 식량 · 무기 · 농기구 · 철 · 옷감 따위의 물자를 돌려달라고 요구했다. 게다가 그는 두 나라 왕실이 혼인을 맺자고 떼를 썼다.

당나라로서는 자존심이 무척 상했지만 함부로 거절할 수 없는 처지였다. 더욱이 당의 측천무후는 조정을 마음대로 주물러 당의 이름을 지우고 새 나라 주(周, 685~704)를 세웠다. 측천무후는 새 왕조를 여는 과정에서 반대파를 제압해야 하는 내부의 버거운 과제를 안고 있었다.

    측천무후와 손을 잡은 돌궐족 영주의 후방을 공격했다. 이진충은 양쪽의 적을 막느라고 군사를 분산시킨 탓에 역량이 많이 소모되었다. 마침내 총사령관인 손만영이 후퇴하는 도중 당나라 군사에게 살해되었고, 이 사건을 계기로 영주를 중심으로 한 거란족의 반란은 1년 여 만에 당나라에 심각한 타격을 주고 마무리되었다.

거란족이 서부전선에서 치열한 전투를 벌이는 동안 대조영은 동부에서 점령지를 확대시키고 군사 규모를 늘렸다. 거란족이 주도한 영주 반란은 고구려 유민과 말갈족 연합부대에게 새 나라 건설의 여명을 열어 주었다.

   측천무후는 계속 분열정책을 써서, 당나라를 반대하는 대오를 여러 갈래로 쪼개서 반란군을 무너뜨리려 했다.

한편으로는 이진충과 전쟁을 벌이면서 다른 한편으로는 고구려 유민과 말갈족을 이끄는 두 지도자를 회유하려 들었다. 그럴듯한 미끼를 던지는 수법을 쓴 것이다.

그리하여 걸사비우에게는 허국공(許國公)을, 걸걸중상에게는 진국공(震國公)을 책봉하여 각기 확보한 영역을 승인해 주었다. 예전부터 써먹던 수법대로 두 지도자를 회유하는 데 이만한 이득은 주어야 했던 것이다. 이 책봉은 정식 국호를 주기 전에 해당된다. ‘국공’은 황제의 나라에서는 3등급에 해당하는 작위다. 높다면 높을수 있는 자리였지만, 두 지도자는 이 제의를 보기 좋게 거절했다.

   두 장수는 각기 자기 휘하의 부하를 거느리고 영주 영역에서 벗어나 계속 동쪽으로 진출했다. 두 세력은 요동 일대에서 일정한 영역을 차지하고 세력을 떨쳤으니 왕국이라 불러도 크게 어긋나는 일은 아니었다.

그러면 두 지도자는 왜 중국의 황제가 내려 주는 화려한 관복과 함께 봉작(封爵, 작위를 봉해 주는 것)을 거부했을까? 거기에는 특별히 숨은 뜻이 있었다. 두 장수는 요동을 중심으로 고구려의 옛 땅을 나누어 임금 노릇을 하기로 뜻을 모았던 것이다. 두 지도자가 서로 싸움을 벌이지 않고 따로 왕국을 세우려는 계획은 다행스런 일이었다.

   그때 요양 일대의 고구려 유민은 거의 독립 상태를 유지하고 있었는데 당나라와 가까운 세력도 있었고 당나라를 철저하게 반대하는 세력도 있었다. 이들의 저항 때문에 안동도호부 또는 안동도독부가 이동을 거듭했던 것이다. 당나라 벼슬아치들은 이곳이 “다시 계륵(鷄肋)이 되었다”며 골치를 썩였다. 계륵이란 삼킬 수도, 뱉을 수도 없는 난처한 처지에 놓인 것을 뜻했다. 두 지도자는 차근차근 영역을 넓혀 나갔다.

    걸사비우가 거느린 말갈 군사이해고가 거느린 당나라 군사들과 맞서 싸웠다. 그런데 어찌된 영문인지 말갈 군사는 당나라 군사에게 쉽게 패배했고, 걸사비우도 전사했다. 걸사비우가 죽은 뒤 말갈 군사 대부분이 대조영 휘하로 들어왔다. 걸사비우의 패배는 대조영에게 세 번째로 행운을 안겨 준 셈이었다. 이 무렵 대걸걸중상도 병들어 죽어서 이제 새 나라 건설의 과업은 아들 대조영에게 고스란히 넘어갔다.

   모든 군사 지휘권이 대걸걸중상에게서 젊은 대조영에게로 넘어가자, 이후의 모든 전투에서 대조영은 자연스럽게 총지휘자로 나섰다. 이해고 군사들은 거리낌 없이 진격해 오고 대조영의 군사들은 한발씩 물러가는 형국이었다각주1) .

   뒤로 물러가던 대조영군은 커다란 난관에 부딪쳤다. 요동에서 후퇴할 때 사람이 먹을 양식은 물론 말이 먹을 꼴도 제대로 확보하지 못한 것이다. 후방에서 공급하는 통로도 없었다. 당시 요동 들판은 오랫동안 전쟁터여서 양식과 꼴을 구하기가 매우 힘들었다. 더욱이 추운 겨울에 행군을 했기에 추위와 피로가 겹쳤다. 사람과 말이 굶고 있어서 지연전술을 펼칠 수도 없었다. 당군도 추위 속에서 연일 추격을 하느라 사기가 떨어져 대오가 여기저기 흩어졌다.

천문령대첩으로 새 나라의 초석을 놓다

   대조영군이 천문령각주2) 에 이르렀을 때 당군이 급박하게 산을 포위했다. 마침 대조영군은 휴식을 취하고 피로를 푼 뒤였다. 군사들은 승리를 해야 실컷 먹고 마실 기회가 온다고 여겼다. 대조영은 이런 분위기를 파악하고 배수전(背水戰, 강물을 등지고 싸우는 전술)을 벌이기로 하고 군사를 강물 앞으로 배치했다.

당군이 무모하게 진격해 오자, 대조영군은 맞받아 공격전을 펼쳤다. 대조영은 당군의 진격 통로를 살핀 뒤 기습작전을 감행했다. 당군이 전투준비를 갖추지 못하고 있을 때였다. 치열한 공방전을 벌인 지 한참 만에 당군은 수많은 시체를 남기고 줄행랑을 쳤고, 당군의 사령관 이해고는 겨우 몸을 빼서 숲 속으로 도망쳤다. 대조영군은 이로부터 추격하는 적군을 염려하지 않고 편안한 마음으로 앞길을 개척할 수 있게 되었다.

   이 전투는 698년 초봄에 일어난 ‘천문령대첩’이다. 이 전투의 승리는 대조영의 위신과 지위를 한껏 올려 주었고, 군사와 백성을 단결시켜 새 나라를 건설하는 결정적인 초석이 되었다. 고구려 유민들은 그전보다 더 대조영의 지도력을 믿고 따랐으며 말갈족도 더욱 심복하게 되었다.

대조영은 송화강을 건너고 목단강 상류를 지나 계속 동쪽으로 진출했는데 고구려 유민과 말갈족이 몰려들어 세력이 하루가 다르게 커졌다. 대조영은 자신의 휘하에 군사 수만 명을 거느리게 되자 새 나라 건설의 시기가 왔다고 판단했다.

대조영은 산을 넘고 물을 건너 드넓게 펼쳐진 분지에 이르렀는데 그곳이 바로 지금의 돈화시인 동모산 언저리였다. 동모산의 높이는 600미터 가량 된다. 백두산에서 300리각주3) 가량 떨어져 있다. 동모산은 낮은 산이었지만 주위로 아주 험준한 산줄기가 에워싸고 그 중간에 분지가 있다.


동모산

발해의 시조 대조영이 건국의 근거지로 삼은 곳이다. 오늘날 지린성 돈화시 부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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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 분지는 산줄기가 겹겹이 장벽을 이룬 곳으로, 들판에 밀림이 빽빽이 들어찼고 토지는 기름지고 생산되는 물품은 넉넉했다. 즉 도읍지로서 외부의 침입을 막고 주민이 생활하기에 좋은 조건을 두루 갖춘 것이었다. 이곳의 동북쪽으로는 백두산에서 발원한 송화강이 북쪽으로 흐르는데, 그 지류인 홀한하(忽汗河, 오늘날의 목단강) 상류가 뱀처럼 구불구불 뻗어 있고 그 언저리에는 너른 들판이 펼쳐져 있다. 이곳은 영주와 2000여 리 떨어져 있으며 그 중간에 거란이 길을 막고 있어서 당나라의 침공 범위에서 멀리 벗어나 있었다. 즉 사정거리에서 벗어나 있는 셈이었다.

   대조영은 동모산 언저리에 머물면서 고구려 유민과 말갈족을 모았다. 대조영의 명성을 듣고 사람들이 앞다투어 몰려들었다. 대조영은 군사와 말을 거두어 성채를 쌓았다. 동모산과 그 언저리의 산과 들에는 새로운 집들이 즐비하게 들어섰고 궁궐도 이룩되어 어느덧 새 수도의 면모를 갖추게 되었다.

   대조영은 698년 여름, 정식으로 나라이름을 진국(震國, 또는 振國)이라 명명했다. 대걸걸중상이 진국공으로 봉해졌으니 아버지의 뜻을 따른 것이기도 했다. 대조영은 고구려의 유민과 말갈족의 추대로 새 나라의 첫 임금으로 즉위했다. 고구려가 멸망한 지 꼭 30년이 지난 뒤였다. 그동안 이 일대의 고구려 영역은 당나라의 통치력이 흔들려 무정부 상태였다. 빈 터로 버려진 땅도 많았다. 그러한 곳에 고구려를 계승한 왕국이 들어선 것이다.

   대조영은 영주를 떠날 때 1000여 명의 무리를 데리고 나왔다. 이들 무리가 동북쪽으로 오면서 고구려 유민과 말갈족이 계속 합류해 불어났다. 대조영이 나라를 세울 무렵에는 그 무리가 40여만 명이라고도 하고, 80여만 명이라고도 하는 기록이 남아 있다. 결국 발해는 1000여 명을 기초로 하여 기하급수적으로 늘어난 유민을 중심으로 새로운 왕국을 연 것이다.

   대조영이 나라를 세울 때 그의 나이는 몇 살이었을까? 그가 고구려에서 장수 노릇을 했고 고구려가 망한 지 28년 뒤에 반란에 가담하여 그로부터 2년 만에 새 나라를 열었으니 추산이 가능하다. 그가 즉위한 연대는 698년이다. 고구려는 668년에 망했다. 그가 20대 중반의 나이에 장수를 지냈다고 보면 임금이 될 때의 나이는 50대 중반쯤 되었을 것이다.

   그렇다면 나라이름인 ‘진국’은 무슨 의미를 지니고 있었을까? ‘진’은 《주역》의 진괘에서는 첫째 아들을 나타내고, 다른 한편으로는 동방을 상징하기도 한다. 또 천둥 번개가 치는 하늘의 변화를 뜻하기도 한다. 그러니 진국은 ‘첫째가는 나라’, ‘동방의 나라’ 또는 ‘진동하는 나라’라는 뜻을 지니고 있는 셈이다. 근대에 들어서도 중국 사람들은 우리나라에 대한 별칭으로 이 이름을 붙이곤 했다.

동모산에 도읍을 세우다

   모든 고대국가는 나름의 건국설화를 가지고 있지만 발해는 건국설화라고 할 만한 내용이 거의 없다. 대조영의 사람됨을 두고 중국의 역사책에는 “사람됨이 호방하고 명쾌했으며 문과 무를 고루 갖추었고, 생김새가 당당하여 하나같이 영웅의 기개에 부응했다”고 적혀 있다. 또 “동쪽으로 들어올 때 대조영의 일 처리가 공평했으며, 어려운 일을 만나도 처리를 잘했고 어그러지는 일이 있어도 잘 풀어 나갔다”고 기록되어 있다.

   《신당서》에는 “제1대 왕인 대조영은 첫째가는 걸출한 통치자로 대표적인 인물이었다. 그는 중국의 정치와 문화의 영향을 받았고 소수민족 중에서 가장 용맹스럽고 전투를 잘했으며, 슬기로운 꾀가 그들 무리들 속에서 뛰어난 군왕(郡王, 작은 지역을 다스리는 임금)이었다”고 칭송했다.

   또 같은 책에는 “발해는 2대 왕 40여 년 동안 마음을 다해 다스려서 동북지구의 일대 지배세력으로 발전했다. 발해는 전란 시기에 분산되어 있던 말갈인과 요동 일대의 고구려 등 여러 민족의 유민을 널리 불러모아 신민(臣民)으로 만들었다. 특히 무력을 써서 정복하여 자기의 세력범위를 확대했다”고도 했다.

이들 기록에는 대조영의 영웅적 활동과 정복전쟁을 기술하면서도 신비한 요소는 배제했다. 고대국가에서 흔히 볼 수 있는 신비스럽고 이적이 담긴 건국설화가 기술되지 않은 것이다. 조상이나 본인이 하늘에서 내려왔다든지, 알에서 태어났다든지 하는 이적에 대한 기록이 전혀 없었다.

   다만 대조영의 아버지가 평범하지 않은 장수였고, 대조영이 문무를 두루 갖춘 용맹과 판단력을 지닌 영웅으로만 부각되었다. 즉 대조영 개인의 자질이 뛰어나 새 나라를 건국한 것일뿐 하늘이나 신인의 도움으로 나라를 열었다는 탄생설화는 없었다.

이것은 대조영보다 앞서서 나라를 연 부여나 고구려, 신라의 건국설화와는 사뭇 다른 모습이었다. 신비와 초능력을 배제한, 진전된 역사 기록으로 중세국가의 단계에서 보이는 사실 중심으로 이루어졌다.

   다만 대조영이 전쟁터에서 어려운 일을 겪을 때 경박호 호수왕이 도움을 주었다는 민간전설이 전해지는 정도였다. 이 전설을 요약해 설명하면 다음과 같다.

그가 영주에서 동쪽으로 진출할 때, 이해고가 바짝 추격해 왔다. 그때 식량이 바닥나서 군사들의 불만이 높았다. 비록 슬기로운 꾀가 많은 대조영도 험한 지역에서는 어쩔 도리가 없었다. 바로 이때 속말(粟末, 말갈족의 한 갈래로 대조영의 조상이라고도 함)의 한 노인이 나타나서 “수령께서는 걱정할 필요가 없소. 지금 시급한 것은 양식과 꼴을 확보하는 것입니다”라고 말했다. 대조영이 공손하게 노인에게 가르침을 청하자, 노인이 방법을 일러 주었다.

저 위에 경박호가 있다. 우리 말갈의 한 선인들이 여러 대에 걸쳐 여기에 살면서 경박호 왕과 돈독한 우의를 나눈 이야기가 세상에 전해진다. 지금 조상의 정의로 경박호 왕에게 구원을 요청함이 좋을 것이다. 물고기를 보내 달라고 요청해서 주린 사람들을 먹인 뒤 기회를 엿보아 당나라 군사들을 치는 것이 좋을 것이다.

대조영이 급하게 경박호 왕에게 편지를 써서 노인과 함께 경박호 호반에 이르러 분향을 하고 무릎을 꿇어 편지를 던져 넣었다. 경박호 왕이 새우 졸개들과 게 장수들을 불러 놓고 “숙신(肅愼, 고대 종족)은 본디 우리의 이웃이었다. 지금 그 후예인 대조영이 나에게 구원을 요청해 왔으니 응당 들어주어야 할 것이다. 너희들이 속히 홍미어(꼬리가 붉은 고기)를 잡아와서 남쪽 언덕으로 보내 사람들의 주린 배를 채워 주게 하여 속말의 여러 사람들의 위급함을 풀어 주라”고 분부했다.

대조영이 호반 위에서 조용히 회답을 기다리고 있을 때, 갑자기 가까운 곳에서 떠드는 소리가 들리면서 물고기 떼가 몰려왔다. 사람들이 미친 듯이 기뻐 날뛰며 감격에 겨워 눈물을 흘리며 “대조영은 신인이다”라고 외쳤다. 군사들은 너나없이 배불리 먹고 당나라 군사들과 천문령에서 싸워 승리를 거두었다.

하지만 이 전설은 속말부의 말갈인이 꾸며 낸 이야기이다(황빈《발해국사화》). 천문령과 경박호는 먼 거리에 떨어져 있다. 경박호는 말갈족의 생활터전이었는데 발해가 뒷날 그 근처에 상경용천부를 두어 도읍지로 삼았다. 이 이야기는 사실에 근거해서 일종의 이미지 조작으로 이루어진 것이다. 대조영이 경박호 왕의 도움을 받았다고 꾸며 신비스럽게 보이려는 수준에 지나지 않는다.


발해의 상경용천부 성터

발해에 둔 오경의 하나. 발해의 3대 문왕이 755년에 중경현덕부에서 옮긴 후 멸망할 때까지의 수도이다. 이곳에는 궁궐터와 돌로 쌓은 궁궐문과 우물이 보존되어 있다. 

오늘날 중국 흑룡장성 등경성 발해진에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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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대조영은 동모산 도읍지에서 건국의 기초를 하나씩 다져 나갔다. 동모산은 외딴 산이다. 이 산 위에서 사방을 바라보면 전망이 탁 트인다. 오늘날 돈화시에서 서남쪽으로 22킬로미터 가량 떨어진 대석하(大石河) 가의 남쪽에 있다. 대석하는 목단강 상류의 한 지류이다. 산성의 동남쪽에는 목단강이 뱀처럼 구불구불 흐르고 있다.

여기에 산성을 타원형으로 둘러쌓았는데, 성벽의 길이는 2킬로미터이며 흙에 돌을 섞어 쌓았다. 산성의 규모와 축성기술면에서 아직은 완전한 돌성을 쌓을 수 없었다. 동모산을 중심으로 분지처럼 들이 펼쳐져 있다. 이 산성을 오늘날 ‘성산자산성’이라고 부른다. 산성은 대석하를 끼고 있어 자연 해자를 이루어서 방어하기가 쉬우며, 적이 공격해 올 때 맞받아치기에도 효율적이다. 게다가 교통 요충지여서 생산물을 거두어들이기에도 편리하다.

이어 동모산 주변에 오동성을 쌓았다. 동모산과 오동성의 거리는 15킬로미터이다. 오동성은 오늘날 돈화 시내에 있는데 바로 목단강 옆에 자리를 잡았다. 여기도 분지의 중간에 자리하고 있어서 농사짓기에 알맞은 조건을 갖추었다.

군사지리로 보면 서북쪽은 거란과 돌궐이 차지하여 당나라와 중간 차단의 장벽이 되어 주었으며, 남쪽은 장백산(백두산)의 긴 산줄기가 뻗어 있어서 천연의 험한 보호막이 되어 주었다. 요동에서 멀리 떨어져 있었고 그 가운데에는 준령이 통로를 가로막고 있었다.

이를 두고 당나라 사람들은 “먼 곳을 믿고 나라를 세웠다”고 했고, 신라의 최치원 “사마귀만 한 마을에서 나라가 생겨났다”고 했다. 당나라 사람들의 평가가 그 당시 사정에서는 온당한 것 같지만 최치원의 말은 이죽거림에 지나지 않았다.

당나라는 이해고가 패전한 뒤 다시는 발해에 군사를 보내지 않았다. 영주에서 2000리(약 1000킬로미터)나 떨어져 있었던 동모산성은 중국 사람들이 보기에는 머나먼 오지였다. 동모산과 오동성은 초기 나라를 세우던 고난의 시절에 정한 수도로서 적당한 도읍지였다.

역사에 오른 발해의 이름

   대조영은 즉위 후 2년 동안 정복활동을 세차게 벌였다. 동모산성과 오동성을 근거지로 삼아 주변 세력들을 하나씩 모았다. 때로는 전쟁을 통해서 숨통을 조이고, 때로는 회유의 수법을 써서 국경을 넓혀 나갔다.

대조영은 차츰 부채살 모양으로 영역을 넓혀 나갔다. 북쪽에 도사리고 있는 흑수말갈과는 아직 전쟁을 벌이지 않았으나 그 대비를 소홀히 하지는 않았다. 그는 임금 노릇을 하는 동안 독자의 연호를 사용하면서 당나라에 복속을 표시하지 않았다. 먼저 이웃 나라인 돌궐에 새 나라를 연 사실을 통고하여 인정을 받았다. 진국은 돌궐과 선린 관계를 맺고 당나라의 침략에 공동대처하려는 의도를 보였다.

또 남쪽의 신라에도 사신을 보내 우호를 표시했다. 신라에서는 대조영에게 낮은 등급인 5품의 관등을 내리고 새 나라를 인정해 주었다. 최치원의 말대로 ‘사마귀만 한 나라’로 여겼으니 얕보는 태도를 보일 수도 있었다.

잔꾀가 많고 자부심이 강한 측천무후는 진국이 새 나라를 세우고 자신에게 조공(朝貢, 복속하여 공물을 바치는 의식)을 하지 않으면서 나날이 크는 모습을 보고 그냥 넘길 수만은 없었다. 무슨 수를 써서라도 굴복시켜야 했다.

돌궐은 당시 거란을 대신해 요동에서 위세를 떨치고 있었다. 돌궐의 지도자 묵철은, 이진충이 제거된 뒤 이 일대의 실권을 잡았다. 북쪽에서 정세를 살피고 있던 묵철은 요동과 영주 주변이 혼란한 틈을 타서 손을 뻗었다.

   측천무후는 대조영이 나라를 세운 지 1년 뒤인 699년 보장왕의 손자 고덕무를 안동도호부의 후신인 안동도독부의 도독으로 삼아 고구려 유민을 관리하게 했다. 연이어 측천무후요동에 새로운 나라 ‘소고구려국’을 세우고 고덕무를 왕으로 삼았다. ‘소고구려국’이야말로 측천무후의 사기극에서 나온 작품이었다. 그러나 요동 일대의 고구려 유민들이 예전과 다름없이 이를 받아들일 리가 없었다.

   측천무후는 진국이 책봉을 요청해 오지도 않고 조공도 바치지 않았으니 무력을 사용해 굴복시켜야 했지만 뾰족한 방법이 없었다. 마음을 바꾸어 먹고 진국에 사신을 보내 진국을 인정해 주려 했지만 요동길이 막혀 이마저도 뜻을 이루지 못했다.

705년, 그 말썽 많던 여걸 측천무후가 죽었다. 새 황제 중종은 측천무후가 저지른 일을 모조리 원상 회복시켰다. ‘주’로 바꾸었던 나라 이름도 다시 당나라로 고쳤고, 평화적인 방법으로 진국과 외교를 트려고 노력했다.

당나라 조정에서는 남쪽의 티베트가 법석을 떠는 마당에 진국과 돌궐이 손을 잡고 만리장성을 넘어오는 사태를 가장 우려했다. 그렇게 되면 산해관 일대와 영주는 다시 수습할 수 없는 지경으로 빠질 것이었다. 그 무렵에도 돌궐과 거란은 해마다 변경을 침입해 와서 하루도 싸움 잘 날이 없었다.

   당 조정은 진국의 사정을 염탐하고 우호를 보이기 위해 장행급을 진국으로 보냈다. 당나라 사절들은 위세를 보이려 화려한 조복(朝服, 벼슬아치들의 옷)을 입고 발해 땅으로 들어왔다. 어렵사리 동모산에 이른 장행급은 우호의 방문이라는 것을 강조했고 진국에서는 융숭한 환영식을 열어 환대했다.

   대조영과 장행급은 모처럼 찾아온 기회를 잘 이용하고자 했다. 장행급은 대조영의 환대를 받고 흡족하게 여겼다. 그는 대조영이 선입관과는 달리 포악하지도 않고 인품도 넉넉하다고 생각했고, 본국으로 돌아가서 대조영을 칭찬했다. 장행급이 귀국할 때, 대조영은 둘째 아들인 대문예(大門藝)를 딸려 보냈다. 대문예는 이름 그대로 학문과 예술에 소양이 깊은 문사의 기질이 있었다. 대조영은 나라를 위해 사랑하는 아들을 먼 나라에 보내는 결단을 내렸다. 이때부터 중종은 대조영을 정식으로 책봉하여 두 나라의 우호를 다졌다.

   대문예는 세계도시인 장안(오늘날의 시안)에 머물면서 숙위(宿衛)각주4) 를 했다. 신라의 여러 왕자들도 당나라에 숙위로 들어갔다. 그러나 대문예는 두 나라의 분쟁이나 갈등을 조정하고 풀어 주는 외교 임무를 수행하는 한편, 당의 조정이나 왕실에서 일어나는 일을 수집해 고국에 알리는 첩자 노릇을 했다.

   713년, 대조영이 나라를 세운 지 16년째 되던 해에 새로 등극한 현종은 진국과의 우호를 다지기 위해 최흔을 사자로 보냈다. 최흔은 장안을 떠나 육로로 산동 땅의 등주(登州, 오늘날의 봉래)에 도착했고 다시 파도를 헤치고 발해만의 바다를 건너 여순 해안에 있는 도리진에 올랐다. 그는 다시 압록강을 거슬러 올라가서 험한 길을 뚫고 동모산성에 이르렀다. 북쪽의 영주 길이 막혀 남쪽의 험한 길을 택한 탓에 많은 고생을 겪었다. 그는 1년 가까운 세월을 허비하며 바닷길 · 물길, 맹수가 득실거리는 밀림을 뚫고 들어왔다. 이 길은 뒷날 발해의 조공로가 된다.

   대조영은 책봉을 받는 의식을 성대하게 거행했다. 당의 황제는 대조영에게 세 개의 관직을 내려 주었다. 첫째는 대장군, 둘째는 발해군왕, 셋째는 홀한주도독이다. 첫째 벼슬은 의례로 주는 헛 감투로, 직함만 있지 아무런 실속이 없었다. 둘째 벼슬이야말로 진짜 직함이었다. 하지만 국왕이 아니라 국왕보다 한 등급 낮은 군왕이었다. 셋째는 실직이기는 하지만 가치가 없었다. 홀한주는 대조영의 관할 아래 있는 곳이었기 때문이었다. 그동안 중국에서는 변방 나라에 이런 직함을 주고 승인하는 형식을 취하면서 조공을 바치게 하여 복속을 다지기도 했다. 또한 하사품을 내리기도 하고 때로는 다른 적대국이 도전하면 보호해 주기도 했다.

   의식을 통해 대조영은 발해군왕으로 책봉되었는데, 이때 처음으로 발해라는 이름을 사용했다. 대조영은 당나라에서 자신의 나라를 침략하지 않겠다는 약속을 받아 내고 사신을 교환했다. 그러면서 해마다 조공사절을 보내 복속을 표시하면서 신하의 예도 보였다. 이제부터 약속에 따라 평화의 관계가 이루어진 것이다.

그런데 발해라는 국명은 어떻게 나온 것일까? 당나라에서 붙여 준 것처럼 기록되었지만 관례상 대조영이 먼저 지어서 알려 주었을 것이다. 고구려와 고려는 나라이름을 승인해 달라고 구걸하지 않았지만, 이성계는 새 왕조를 열고 ‘조선’과 ‘화령’ 두 개의 나라이름을 가지고 명 태조의 승인을 받으려고 사신을 보냈다. 그리고 명 태조는 ‘조선’으로 지정해 주었다.

그러면 왜 발해일까? 발해는 황해의 위쪽, 중국 북쪽의 내륙에 붙어 있는 만(灣), 곧 산동반도와 요동반도에 둘러싸인 황해의 안방 바다이다. 중국의 북쪽을 가르는 황하도 이 발해만으로 흘러든다.

   ‘발해’라는 이름은 ‘안개가 자욱하게 끼는 바다’라는 유래를 지니고 있다. 실제로 이 바다에는 안개가 자주 낀다. 예전 중국 사람들은 이 바다의 안개 속에 나타나는 신기루를 보고 신선이 사는 삼신산이 있다고 믿었다. 그래서 등주를 삼신산의 하나로 꼽는 봉래(蓬萊)라 부르기도 한다. 또 발해는 수와 당이 고구려를 침략할 때 늘 이용하던 바다이다. 수와 당의 수군이 출발하여 요동반도의 연안을 따라 압록강이나 평양의 앞바다로 진격하는 해로로 이용되었다.

   또 발해의 서쪽 땅에 발해군이란 곳이 있다. 발해군은 한나라 때부터 설치했는데 《한서》에 따르면, 발해의 바닷가에 있는 곳이라 하여 이 이름을 붙였다고 한다. 이곳은 작은 시골일 뿐 이름을 떨칠 만한 특징은 별로 없다.

대조영은 이 언저리에 있는 영주에서 처음 일어났다. 따라서 발해는 대조영의 뿌리라고 해도 틀리지 않을 것이다.

발해는 이런 유래를 지니고 있었기에 대조영으로서는 굳이 거부할 이유가 없는 자랑스러운 나라이름이었을 것이다. ‘발해군왕’은 발해군을 실제로 다스리라는 직책이 아니라 하나의 명예직으로, 알맹이는 그 앞에 접두사로 붙어 있는 ‘발해’였던 것이다.

   진국은 712년부터 발해국으로 바뀌어 역사에 이름을 올렸다. 당나라에서는 발해를 공식 명칭으로 사용하면서 그동안 얕보는 투로 쓰던 말갈 또는 속말부 따위의 이름을 지워 버렸다. 하지만 일반인들은 곧잘 발해를 말갈이라고 했다.

발해는 고구려의 아들

   발해를 구성하는 종족고구려 유민을 중심으로 말갈족이 다수를 이루었고 거란족이 섞여 있었다. 하지만 엄밀한 의미에서는 이들이 모두 고구려의 지배를 받았던 유민에 속한다. 발해의 지배세력이 말갈 사람들을 압제하거나 얕잡아 보았다는 기록이 전혀 없으며 갈등이 일어났다는 기록도 없다. 또 오랫동안 서로 뒤섞여 살다 보니 언어나 풍속이 비슷하여 종족을 유난스럽게 구별할 필요도 없었을 것이다.

대조영은 스스로 고구려 유민임을 강조했고 고구려의 정통을 계승했다는 것도 밝혔다. 더욱이 발해의 지배세력은 대씨와 함께 고씨가 거의 상층부를 이루었다.

   말갈족도 상층부에 전혀 끼어들지 않았다고 할 수는 없으나 주로 하부 구성원을 이루었다고 보아야 한다. 하지만 말갈족은 오랫동안 고구려에 귀속했고 발해에서도 이 전통이 그대로 이어져 별다른 마찰이 일어나지 않았던 것이다.

발해 사람들은 일본과 교류를 트면서도 늘 자신들이 고구려의 후예임을 자처하고 고구려를 계승했다고 표방했다. 이웃 나라에도 고구려를 계승했다는 사실을 알렸다.

   대조영은 고구려 영토를 상당 부분 회복하면서 나라를 반석 위에 올려놓았다. 하지만 임금 노릇을 한 지 21년 만에 죽었다. 그가 죽은 뒤 뒷사람들은 그의 시호를 고왕(高王)이라고 했다. 보통의 경우는 창업의 시조를 태조라고 하는데 대조영에게는 이런 관례와 달리 유별나게 고왕이라고 했다. 고왕은 ‘고구려의 왕’이라는 의미를 담고 있다.

실학자 유득공발해에 대해 “그 대(大)씨는 누구였던가? 그는 고구려 사람이었다. 또 그들이 차지했던 땅은 어디였던가? 그곳은 우리의 고구려였다”고 쓰면서 지난 역사책에 대해 통탄해 마지않았다각주5) . 그런데 지금 중국에서는 발해를 중국의 지방정부라고 하면서 연변 조선족 자치주 역사교과서에 그런 줄거리를 엮어 가르치고 있다. 이처럼 발해 문제는 고구려 문제보다 더 심각하게 왜곡되어 있다.

이런 왜곡과 오류는 어디에서 온 것인가? 첫째는 김부식 등 썩은 사대사가 탓이다. 김부식은 고구려 역사마저 왜곡 축소했고 그 계통을 이은 발해를 완전히 깔아뭉갰다. 그 후 일제 식민사학자들은 발해의 상부 구조를 고구려 계통으로 보면서도 그 하부 구성원이 말갈족이라는 이유로 발해를 한국사에서 제외시키려는 의도를 보였다.

다른 외부적 조건으로는 발해가 문화적으로 열등한 거란에 망한 탓으로 그 유적이나 사료가 유실되었기 때문이다. 이에 중국의 사가들이 편승해 발해사를 축소하거나 왜곡한 것이다.

오늘날 발해 유적은 러시아 땅인 아무르강 동남쪽에 수없이 널려 있고 일본과 바닷길을 열었던 항구에는 왕터도 남아 있지만 보존하지 않고 버려 둔 게 지금의 현실이다. 이제는 발해사의 정당한 복원으로 대조영의 참모습을 찾아야 할 때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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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이화 집필자 소개

민족문화추진회(현 한국고전번역원)서울대 규장각 등에서 우리 고전을 번역하고 편찬하는 일을 했으며, 서원대, 성심여대 등에서 역사학을 강의했다. 역사문제연구소 소장, 역사잡지 <역사비평>의 편집인으로 활동하면서 동학농민혁명기념재단 이사장도 맡았다. <허균의 생각>, <한국의 파벌>, <조선후기 정치사상과 사회변동> 등의 저서가 있다.접기

출처

이이화의 인물한국사
이이화의 인물한국사 | 저자이이화 | cp명주니어김영사 도서 소개

역사를 이끈 왕과 신화들, 새 세상을 꿈꾼 개혁가와 의학 및 과학자들, 학문을 꽃피운 사상가와 예술가들, 나라를 위해 몸 바친 독립운동가와 개화기 지식인 등 고대부터 현대까지 한국사 역사인물들 중에서 꼭 알아야 할 100여 명을 엄선하여 생생하게 재조명한다.접기

전체목차
1부. 한국 고대사의 지도를 그리다

2부. 누가 성군이고 누가 폭군인가

3부. 충절과 변절의 갈림길

4부. 정치가의 고민, 명분인가 실리인가

5부. 멀고도 험한 개척자의 길

6부. 천대받던 상업으로 이룬 부의 신화

7부. 시대에 맞서 변혁을 꿈꾸다

8부. 민중봉기의 주역들

9부. 문치주의를 보완한 과학자와 의학자

10부. 조선인은 조선의 시를 쓰라

11부. 세상을 위한 학문을 하라

12부. 진리는 다르지 않아

13부. 동학 지도자

14부. 개화기 지식인

15부. 독립 운동가






한국사를 움직인 100인 

대조영

大祚榮 

요약 테이블
출생 미상
사망 719년


왕(高王, 재위 698~719년). 발해의 시조.

   고구려의 유민으로 고구려 멸망 후 고구려 유민과 말갈족을 규합하여 698년 동모산을 도읍으로 한 진국(震國)을 세웠다.
713년 국호를 발해로 바꾸었다.

고구려를 계승하다

   대조영은 발해의 시조로 ‘고왕’이라고 한다. 고구려 유민과 말갈족을 규합하여 나라를 세운 뒤 ‘발해’로 국명을 바꿨다. 그는 스무 살도 채 되지 않은 나이에 고구려군의 일원으로 당나라와의 전쟁에 참여했다. 고구려가 멸망한 후 당의 고구려 유민 분산 정책에 따라 대조영도 가족과 함께 랴오허 서쪽의 차오양(營州) 지역으로 이주한 것으로 보인다. 당시 차오양은 당나라의 내몽골과 동북아 지역을 통괄하는 군사적 요충지이자 여러 민족이 얽힌 교역의 중심지였다. 이곳에서 대조영은 옛 고구려의 주민이었던 말갈족과 연대감을 키우는 등 역량을 키워 나갔다.

   696년 이진충(李盡忠), 손만영(孫萬榮)이 이끄는 거란 족이 반란을 일으켜 차오양을 공격했다. 이를 틈타 대조영은 함께 억류되어 있던 고구려 유민과 말갈족을 이끌고 동쪽으로 탈출해 자립에 성공했다. 당시 당의 측천무후(則天武后)가 대조영의 아버지를 진국공(震國公)에, 말갈족의 우두머리인 걸사비우를 허국공(許國公)에 봉해 회유하려고 했지만 대조영은 이를 거부했다. 당은 우선 거란 족의 반란을 진압한 뒤 대조영 무리를 쫓았다. 하지만 대조영은 천문령(天門嶺, 지금의 지린 성 하따링)에서 당나라군을 크게 무찔러 추격권에서 벗어났고 지도자로서 입지를 확고히 다지게 되었다.



거란 인의 출렵도

유목민인 거란 족에게 있어 사냥과 전쟁은 생계 수단에 다름 아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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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대조영은 동부 만주 쪽으로 이동해 699년쯤 지금의 지린 성 둔화현(敦化縣)인 동모산(東牟山)에 성을 쌓고 도읍을 정했다. 국호는 진(震), 연호는 천통(天統)이라고 했다. 무단장 상류에 자리 잡은 이 지역은 창바이 산맥의 짙은 원시림으로 둘러싸인 천혜의 요충지였다. 이곳은 또한 계루부(桂婁部)의 옛 땅이었기에 훗날 대조영의 장남 대무예(大武藝, 무왕)도 계루군왕으로 불렸다.

이때부터 대조영은 진을 구심점으로 고구려 유민과 말갈족을 결집시켜 세를 키웠다. 오랫동안 당에 억류되었고, 당과 전쟁을 치르며 이동하는 동안 대조영 집단은 강한 전투력을 갖춘 집단으로 성장했다. 대외 활동도 시작했다. 대조영은 당과 대립하던 튀르크와 국교를 맺고, 신라에도 사신을 보내 진의 건국을 알렸다. 당나라의 위협에서 국가를 지키기 위해 외교책을 쓴 것이다.

한때 대조영을 없애려 했던 당나라는 대조영이 진을 건국한 이후 유화 정책으로 돌아섰다. 당중종은 705년 사신을 보내왔고, 대조영도 둘째 아들 대문예(大門藝)를 당에 보내 우의를 표했다. 713년 당현종은 ‘좌효위대장군발해군왕홀한주도독(左驍衛大將軍渤海郡王忽汗州都督)’이라는 별직을 대조영에게 주었고, 양국은 건국 초기의 갈등을 봉합했다. 같은 해 대조영은 국호를 진에서 발해로 바꾸었다.


   발해는 대조영이 건국한 이후 약 200여 년 이상을 이어가며 동북아시아의 강국으로 우뚝 섰다. 현재의 만주 동부 지역을 중심으로 남쪽으로 한반도 북부 지역, 북쪽으로 헤이룽(黑龍), 서쪽으로 랴오둥, 동쪽으로는 동해안에 이르는 만주-연해주-북한을 아우르는 넓은 땅에 걸쳐 있던 대제국 발해, 발해는 고구려를 계승한 한민족의 마지막 대륙국가로서 그 의미가 크다.




발해의 발전과 주변국과의 관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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윤재운 집필자 소개

고려대 사학과와 동대학원에서 문학박사 학위를 취득했다. 고려대학교 아세아문제연구소 한국사연구실, BK21한국학 교육연구단 국제화팀에서 연구원을 지냈으며, 민족문화연구원 한국사연구소에서 고대사에 관한 다양한 연구를 진행하고 있다. 현재 대구대학교 역사교육과에 있으며, 한국 고대사 연구에 힘쓰고 있다. 그 동안 쓴 책으로 『한국 고대무역사 연구』가 있고, 여러 선생님들과 함께 쓴 책으로 『천년을 여는 미래인 해상 장보고』『새롭게 본 발해사』『고구려 문명기행』『발해의 역사와 문화』등이 있다.접기

장희흥 집필자 소개

동국대학교 대학원 사학과 졸업(문학박사), 현 대구대학교 역사교육과 교수. 조선 시대사, 정치사에 관심이 많으며 연구 논문으로 <조선시대 정치권력과 환관>, <소통과 교류의 땅 신의주>(공저) 등이 있다.접기

출처

한국사를 움직인 100인
한국사를 움직인 100인 | 저자윤재운 | cp명청아출판사 도서 소개

한국 고대사부터 현대사에 이르기까지 한국사를 움직인 100인의 생애와 활동을 소개하고 있다. 정치와 경제, 문화와 예술 영역의 인물이 두루 다루어지도록 구성했다. 인물을 통해 한국사에 깃든 생동감과 역동성, 그리고 인간성을 발견하면서 쉽게 이해하도록 이끈다. 특히 인물이 관여된 중심적 사건에 대해서도 파악할 수 있다. 접기

전체목차
조선부터 대한민국까지      변방의 무장에서 새 왕조의 주인으로, 이성계500년 조선왕조의 기반을 다지다, 정도전      태종의 치적 뒤에 자리한 장자방, 하륜     조선 역사상 가장 위대한 왕, 세종     청백리의 표상, 황희신분의 굴레를 뛰어넘은 최고의 과학자, 장영실     왕위 찬탈자인가, 위대한 군주인가, 세조     모사가인가, 지략가인가, 한명회     단종을 향한 일편단심, 성삼문     국력을 신장시킨 외교와 국방의 달인, 신숙주     사림의 영수, 김종직     비운의 폐왕, 연산군도학 정치를 꿈꾼 급진적 이상주의자, 조광조     조선 최초의 자연철학자, 서경덕     조선 주리철학의 선구자, 이언적      중세의 봉건적 질서에 반기를 들다, 임꺽정     동방의 주자, 이황     조선의 주자학을 일구다, 조식     동서 분당의 시대, 정인홍     어린 천재에서 희대의 정치가로, 이이       전란 속에서 나라를 구한 재상, 유성룡     한국 해전의 역사를 새로 쓰다, 이순신조선 의학의 집대성 《동의보감》, 허준     천하는 일정한 주인이 따로 없다, 정여립       홍길동의 아버지, 허균대동법을 실시한 실리적 개혁가, 김육명분인가 실리인가, 최명길     우리말의 가락을 살려 우리 글자로 쓰다, 윤선도     유림 위에 군림한 정치 사상계의 거장, 송시열     성리학계의 이단아, 윤휴     붓으로 살려낸 만물의 조화, 정선     경세치용의 학문을 열다, 이익     당쟁 속에서 탕평을 실천한 재상, 채제공     못다 한 개혁의 꿈, 정조정조의 남자, 홍국영     실학의 아버지, 박지원     조선의 레오나르도 다 빈치, 정약용      한국화의 전통미를 일구어 낸, 김홍도조선을 뒤흔든 농민봉기의 지도자, 홍경래     한국적 서체를 완성하다, 김정희     자주적 근대화를 주장한 개화 사상가, 박규수      동학의 창시자, 최제우      조선의 마지막 봉건주의자, 이하응격동의 역사 속 비운의 황제, 고종풍전등화의 조선에서 치열하게 살다 간 여걸, 명성황후     암살당한 개혁의 불꽃, 김옥균한     국 민중 저항사의 상징, 전봉준     민중 계몽으로 자주독립을 꾀하다, 서재필     청년들의 민족의식을 일깨운, 안창호       총 한 자루로 제국주의를 처단하다, 안중근〈님의 침묵〉, 한용운     나라는 망해도 민족은 망하지 않는다, 신채호     항일 무장 투쟁의 영웅, 김좌진      삼천 만 동포에게 고함, 김구          좌익과 우익, 한국 현대사의 갈림길에서, 여운형       대한민국의 초대 대통령, 이승만      시대를 앞서 간 비운의 여인, 나혜석성공한 쿠데타는 처벌받지 않는다, 박정희     인간다운 삶을 위하여, 전태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