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크랩] 조선의 왕(7Point 글씨)

2019. 1. 14. 14:39우리 역사 바로알기

태조 1392.07.17(丙申)
태조가 수창궁(壽昌宮)에서 왕위에 올랐다. 이보다 먼저 이달 12일에 공양왕(恭讓王)이 장차 太祖의 사제(私第)로 거둥하여 술자리를 베풀고 태조 와 더불어 동맹(同盟)하려고 하여 의장(儀仗)이 이미 늘어섰는데, 시중(侍中) 배극렴(裵克廉) 등이 왕대비(王大妃)에게 아뢰었다.
“지금 왕이 혼암(昏暗)하여 임금의 도리를 이미 잃고 인심도 이미 떠나갔으므로, 사직(社稷)과 백성의 주재자(主宰者)가 될 수 없으니 이를 폐하기를 청합니다.”
마침내 왕대비의 교지를 받들어 공양왕 을 폐하기로 일이 이미 결정되었는데, 남은(南誾)이 드디어 문하평리(門下評理) 정희계(鄭熙啓)와 함께 교지를 가지고 북천동(北泉洞)의 시좌궁(時坐宮)에 이르러 교지를 선포하니, 공양왕이 부복(俯伏)하고 명령을 듣고 말하기를,
“내가 본디 임금이 되고 싶지 않았는데 여러 신하들이 나를 강제로 왕으로 세웠습니다. 내가 성품이 불민(不敏)하여 사기(事機)를 알지 못하니 어찌 신하의 심정을 거스린 일이 없겠습니까?”
하면서, 이내 울어 눈물이 두서너 줄기 흘러내리었다. 마침내 왕위를 물려주고 원주(原州)로 가니, 백관(百官)이 전국새(傳國璽)를 받들어 왕대비전(王大妃殿)에 두고 모든 정무(政務)를 나아가 품명(稟命)하여 재결(裁決)하였다. 13일(임진)에 대비(大妃)가 교지를 선포하여 태조를 감록국사(監錄國事)로 삼았다. 16일(을미)에 배극렴 과 조준 이 정도전 · 김사형(金士衡) · 이제(李濟) · 이화(李和) · 정희계(鄭熙啓) · 이지란(李之蘭) · 남은(南誾) · 장사길(張思吉) · 정총(鄭摠) · 김인찬(金仁贊) · 조인옥(趙仁沃) · 남재(南在) · 조박(趙璞) · 오몽을(吳蒙乙) · 정탁(鄭擢) · 윤호(尹虎) · 이민도(李敏道) · 조견(趙狷) · 박포(朴苞) · 조영규(趙英珪) · 조반(趙胖) · 조온(趙溫) · 조기(趙琦) · 홍길민(洪吉旼) · 유경(劉敬) · 정용수(鄭龍壽) · 장담(張湛) · 안경공(安景恭) · 김균(金稛) · 유원정(柳爰廷) · 이직(李稷) · 이근(李懃) · 오사충(吳思忠) · 이서(李舒) · 조영무(趙英茂) · 이백유(李伯由) · 이부(李敷) · 김로(金輅) · 손흥종(孫興宗) · 심효생(沈孝生) · 고여(高呂) · 장지화(張至和) · 함부림(咸傅霖) · 한상경(韓尙敬) · 황거정(黃居正) · 임언충(任彦忠) · 장사정(張思靖) · 민여익(閔汝翼) 등 대소신료(大小臣僚)와 한량(閑良)·기로(耆老) 등이 국새(國璽)를 받들고 태조의 저택(邸宅)에 나아가니 사람들이 마을의 골목에 꽉 메어 있었다. 대사헌(大司憲) 민개(閔開)가 홀로 기뻐하지 않으면서 얼굴빛에 나타내고, 머리를 기울이고 말하지 않으므로 남은 이 이를 쳐서 죽이고자 하니, 전하가 말하기를,
“의리상 죽일 수 없다.”
하면서 힘써 이를 말리었다. 이날 마침 족친(族親)의 여러 부인들이 태조 와 강비(康妃)를 알현하고, 물에 만 밥을 먹는데, 여러 부인들이 모두 놀라 두려워하여 북문으로 흩어져 가버렸다. 태조 는 문을 닫고 들어오지 못하게 했는데, 해 질 무렵에 이르러 극렴(克廉) 등이 문을 밀치고 바로 내정(內庭)으로 들어와서 국새(國璽)를 청사(廳事) 위에 놓으니, 태조가 두려워하여 거조(擧措)를 잃었다. 이천우(李天祐)를 붙잡고 겨우 침문(寢門) 밖으로 나오니 백관(百官)이 늘어서서 절하고 북을 치면서 만세(萬歲)를 불렀다. 태조가 매우 두려워하면서 스스로 용납할 곳이 없는 듯하니, 배극렴 등이 합사(合辭)하여 왕위에 오르기를 권고하였다.
“나라에 임금이 있는 것은 위로는 사직(社稷)을 받들고 아래로는 백성을 편안하게 할 뿐입니다. 고려 는 시조(始祖)가 건국(建國)함으로부터 지금까지 거의 5백 년이 되었는데, 공민왕에 이르러 아들이 없이 갑자기 세상을 떠나셨습니다. 그 때에 권신(權臣)이 권세를 마음대로 부려 자기의 총행(寵幸)을 견고히 하고자 하여, 거짓으로 요망스런 중[妖僧] 신돈(辛旽)의 아들 우(禑)를 공민왕의 후사(後嗣)라 일컬어 왕위를 도둑질해 있은 지가 15년이 되었으니, 왕씨(王氏)의 제사(祭祀)는 이미 폐(廢)해졌던 것입니다. 우(禑) 가 곧 포학한 짓을 마음대로 행하고 죄 없는 사람을 살육하며, 군대를 일으켜 요동(遼東) 을 공격하는 지경에 이르렀는데, 공(公)이 맨 먼저 대의(大義)를 주창하여 천자(天子)의 국경을 범할 수 없다고 하고는 군사를 돌이키니, 우(禑)는 스스로 그 죄를 알고 두려워하여 왕위를 사양하고 물러났습니다. 이에 이색(李穡) · 조민수(曹敏修) 등이 신우(辛禑)의 처부(妻父)인 이임(李琳)에게 가담하여 그 아들 창(昌)을 도와 왕으로 세웠으니, 왕씨(王氏)의 후사(後嗣)가 두 번이나 폐(廢)해졌습니다. 이것은 하늘이 왕위(王位)로써 공(公)에게 명한 시기이었는데도, 공은 겸손하고 사양하여 왕위에 오르지 아니하고 정창 부원군(定昌府院君) 을 추대하여 임시로 국사(國事)를 서리(署理)하게 했으니, 거의 사직(社稷)을 받들어 백성을 편안하게 할 수가 있었습니다. 전일에, 신우(辛禑)의 악(惡)은 여러 사람이 다 같이 아는 바인데, 그 무리 이색 · 우현보(禹玄寶) 등은 미혹됨을 고집하여 깨닫지 못하고 신우(辛禑) 를 맞아 그 왕위를 회복할 것을 모의하다가 간사한 죄상이 드러나매, 그 죄를 모면하려고 하여 그 무리 윤이(尹彝) · 이초(李初) 등을 몰래 보내어 중국 에 도망해 들어가서, ‘본국(本國) 151) 이 이미 배반했다.’고 거짓으로 호소하고는, 친왕(親王)에게 청하여 천하의 군사를 움직여 장차 본국(本國)을 소탕하고자 하였으니, 그 계책이 과연 행해졌다면 사직(社稷)은 장차 폐허(廢墟)에 이르고 백성도 또한 멸망에 가까울 것입니다. 이것을 차마 하는데 무슨 일을 차마 하지 못하겠습니까? 간관(諫官)과 헌사(憲司)가 소(疏)를 번갈아 올려 계청(啓請)하기를, ‘ 이색 · 우현보 등이 사직(社稷)에 죄를 얻고 백성에게 화(禍)를 끼쳤으므로써 마땅히 그 죄를 다스려야 되겠습니다.’ 하여 글이 수십 번 올라갔는데, 정창군(定昌君)은 인아(姻婭)의 관계라는 이유로써 법을 굽혀 두호(斗護)하여 언관(言官)을 곤장을 쳐서 쫓으니, 이로 말미암아 간사한 무리들이 중앙과 지방에 흩어져 있으면서 더욱 법을 두려워하지 않았습니다.
김종연(金宗衍)은 도피 중에 있으면서 당(黨)을 결성하여 난리를 꾀하고, 김조부(金兆府) 등은 안에 있으면서 그 변(變)에 응하기를 도모하여, 화란(禍亂)의 일어남이 날마다 발생하여 그치지 않았는데, 정창군(定昌君)은 사직(社稷)과 백성을 위하는 큰 계책을 돌보지 아니하고 사사의 은혜를 베풀어 인망(人望)을 수습하고자 하여, 다만 법을 범한 사람이 있으면 반드시 모두 용서해 주고 곡진히 더 탁용(擢用)하였으니, 《서경(書經)》의 이른바, ‘달아난 죄수를 수용하는 괴수가 되어 물고기가 연못에 모이듯, 짐승이 숲에 모이듯 한다.’는 것입니다. 도와서 왕을 세울 계책을 결정한 것으로써 말한다면 공로가 사직(社稷)에 있으며, 대의(大義)를 주창하여 군사를 돌이킨 것으로써 말한다면 덕택이 백성에게 가해졌는데도, 이에 좌우에 있는 부인(婦人)과 환자(宦者)의 참소를 지나치게 듣고서 반드시 죽을 곳에 두려고 하고, 사람들이 강직하여 아첨하지 않는 사람이 있으면 또한 모두 죄를 주니, 참소하고 아첨한 무리들이 뜻대로 되고, 충성하고 선량한 사람들은 기(氣)가 꺾여져서, 정치와 형벌이 문란하여 백성들이 그 수족(手足)을 둘 데가 없었습니다. 하늘이 견책(譴責)하는 뜻을 알려서, 성상(星象)이 여러 번 변하고 요얼(妖孽) 153) 이 번갈아 일어나니, 정창군(定昌君) 도 스스로 임금의 도리를 이미 잃고 백성의 마음이 이미 떠나가서 사직과 백성의 주재자(主宰者)가 될 수 없음을 물어 알고 물러나와 사제(私第)로 갔습니다. 다만 군정(軍政)과 국정(國政)의 사무는 지극히 번거롭고 지극히 중대하므로, 하루라도 통솔이 없어서는 안 될 것이니, 마땅히 왕위에 올라서 신(神)과 사람의 기대에 부응하소서.”
太祖는 굳이 거절하면서 말하기를,
“예로부터 제왕(帝王)의 일어남은 천명(天命)이 있지 않으면 되지 않는다. 나는 실로 덕(德)이 없는 사람인데 어찌 감히 이를 감당하겠는가?”
하면서, 마침내 응답하지 아니하였다. 대소 신료(大小臣僚)와 한량(閑良)·기로(耆老) 등이 부축하여 호위하고 물러가지 않으면서 왕위에 오르기를 권고함이 더욱 간절하니, 이날에 이르러 태조 가 마지못하여 수창궁(壽昌宮)으로 거둥하게 되었다. 백관(百官)들이 궁문(宮門) 서쪽에서 줄을 지어 영접하니, 태조는 말에서 내려 걸어서 전(殿)으로 들어가 왕위에 오르는데, 어좌(御座)를 피하고 기둥 안[楹內]에 서서 여러 신하들의 조하(朝賀)를 받았다. 육조(六曹)의 판서(判書) 이상의 관원에게 명하여 전상(殿上)에 오르게 하고는 이르기를,
“내가 수상(首相)이 되어서도 오히려 두려워하는 생각을 가지고 항상 직책을 다하지 못할까 두려워하였는데, 어찌 오늘날 이 일을 볼 것이라 생각했겠는가? 내가 만약 몸만 건강하다면, 필마(匹馬)로도 피할 수 있지마는, 마침 지금은 병에 걸려 손·발을 제대로 쓸 수 없는데 이 지경에 이르렀으니, 경(卿)들은 마땅히 각자가 마음과 힘을 합하여 덕이 적은 사람을 보좌하라.”
하였다. 이에 명하여 고려 왕조의 중앙과 지방의 대소 신료(大小臣僚)들에게 예전대로 정무(政務)를 보게 하고, 드디어 저택(邸宅)으로 돌아왔다.

태조 1408.05.24(壬申)
태상왕(太上王)이 별전(別殿)에서 승하(昇遐)하였다. 임금이 항상 광연루(廣延樓) 아래에서 자면서 친히 진선(進膳)의 다소(多少)와 복약(服藥)에 있어서 선후(先後)의 마땅함을 보살폈는데, 이날 새벽에 이르러 파루(罷漏)가 되자, 태상왕께서 담(痰)이 성(盛)하여 부축해 일어나 앉아서 소합향원(蘇合香元)을 자시었다. 병(病)이 급하매 임금이 도보(徒步)로 빨리 달려와 청심원(淸心元)을 드렸으나, 태상이 삼키지 못하고 눈을 들어 두 번 쳐다보고 승하하였다. 상왕(上王)이 단기(單騎)로 빨리 달려오니, 임금이 땅을 치고 발을 구르며 울부짖는 소리가 밖에까지 들리었다. 치상(治喪)은 한결같이 《주자가례(朱子家禮)》 에 의하고, 봉녕군(奉寧君) 복근(福根) 으로 하여금 전(奠)을 주장하게 하였다. 예조(禮曹)에서 아뢰기를,
“삼가 《문헌통고(文獻通考)》 에서 《동한지(東漢志)》 의 국휼고사(國恤故事)를 상고하면, ‘백관(百官)이 5일에 한 번 회림(會臨)하고, 고리(故吏)로는 이천석(二千石)의 자사(刺史)와 경도(京都)에 머무르고 있는 각 지방의 상계 연리(上計掾吏)는 모두 5일에 한 번 회림(會臨)하고, 천하(天下) 이민(吏民)은 발상(發喪)하여 3일을 임(臨)한다.’ 하였고, 또 대명(大明) 영락(永樂) 5년 7월 초4일 황후(皇后) 붕서(崩逝) 때의 예부 상례 방문(禮部喪禮榜文)을 상고하면, ‘경사(京師)에 있는 문무 백관(文武百官)은 본월(本月) 초6일 아침에 각각 소복(素服)·흑각대(黑角帶)·오사모(烏紗帽)를 갖추고 사선문(思善門) 밖에 다달아, 곡림례(哭臨禮)가 끝나면 봉위례(奉慰禮)를 행하고, 초8일 아침에 각 관원(官員)은 소복(素服)으로 띠[帶]와 효복(孝服)1265) 을 가지고 우순문(右順門) 밖에 이르러 착용하고, 성복(成服)을 기다려서 사선문(思善門) 에 들어와, 곡림례(哭臨禮)가 끝나면 효복(孝服)으로 바꾸어 입고 봉위례(奉慰禮)를 행하고, 이것이 끝나면 각각 효복(孝服)을 가지고 나간다. 초9일·초10일도 예(禮)가 같다.’고 하였습니다. 지금 우리 대행 태상왕 전하(大行太上王殿下) 께서 5월 24일에 승하하시었으니, 즉일(卽日)로 각사(各司)에서 소복(素服)·흑각대(黑角帶)·오사모(烏紗帽)를 갖추고 곡림 봉위(哭臨奉慰)하고, 26일에 이르러 각각 효복(孝服)을 착용하고 곡림 봉위하며, 28일 즉 승하하신 후 제5일에 이르러 시왕(時王)의 복제(服制)에 따라 삼차(三次)의 곡림 봉위례(哭臨奉慰禮)를 행하게 하소서.”
하고, 예조(禮曹)에서 또 아뢰었다.
“경외(京外)의 음악(音樂)을 정지하고, 도살(屠殺)·가취(嫁娶)를 금하고, 대소례(大小禮)와 조시(朝市)1266) 를 정지하고, 제3일에 이르러 대신(大臣)을 보내어 종묘(宗廟)에 고하소서.”

정종 1398.09.05(丁丑)
임금이 도승지 이문화에게 일렀다.
“내가 병에 걸려서 오랫동안 정사를 청단(聽斷)하지 못했지마는, 하룻동안에도 만 가지 일이 발생하니 그만둘 수가 있겠는가? 생각이 이에 이르게 되매 병이 더욱 더하게 되었다. 지금 세자에게 왕위를 전해 주고 마음을 편안히 먹고 병을 치료하여 여생(餘生)을 연장하고자 하니, 그대가 문신(文臣)에게 명하여 교서(敎書)를 지어서 바치게 하라.”
문화 가 즉시 이조 전서(吏曹典書) 이첨(李詹)에게 명하여 교서를 지어 바치게 하였다.

태조 1398.09.05
영삼사사(領三司事) 심덕부(沈德符) 에게 명하여 태묘(太廟)에 고하였다.
“내가 착하지 못한 사람으로 조종(祖宗)의 덕을 계승하여 신민(臣民)을 통치한 지가 지금 7년이나 되었는데, 나이 많으매 병이 발생하고, 여러가지 사무가 많고 복잡하여 아침저녁으로 정사에 부지런하기가 어려우므로, 빠뜨려진 것이 많을까 염려되나이다. 왕세자 이방과(李芳果) 는 자신이 적장(嫡長)의 처지에 있어 일찍부터 인덕(仁德)과 효도로서 나타났으며, 또한 개국(開國)의 초기를 당하여 나를 보좌한 일이 많았으므로, 이에 왕위에 오르기를 명하여 선대의 제사를 받들게 하고 감히 밝게 고하나이다.”
또 판삼사사(判三司事) 설장수(偰長壽) 와 예조 전서(禮曹典書) 김을상(金乙祥) 을 경사(京師) 에 보내어 상주(上奏)하였다.
“신(臣)이 젊을 때부터 군려(軍旅)에 노역하여 풍습병(風濕病)을 앓았는데, 지금 연기(年紀)가 쇠로(衰老)하여 일찍 늙게 되매, 여러가지 사무를 맡기가 어렵습니다. 장남(長男) 방과(芳果) 는 타고난 자질이 순수하고 근신하며, 의지와 행동은 단아(端雅)하고 정대(正大)하므로 뒷일을 부탁하여 동쪽 변방에서 있는 힘을 다할 만합니다. 삼가 홍무(洪武) 31년 9월 초5일에 세자에게 국사(國事)를 임시로 서리(署理)하게 하였으니, 삼가 황제의 명령이 내리기를 바랍니다.”
임금이 근시 내관(近侍內官)으로 하여금 부축해 일으키게 하고 세자를 부르니, 세자가 공복(公服)을 갖추어 입고 임금의 앞에 나아와서 땅에 엎드리었다. 임금이 친히 교서(敎書)를 주니, 세자가 받아 품속에 넣었는데, 그 교서에 이러하였다.
“왕은 말하노라. 내가 덕이 없는 사람으로 조종(祖宗)의 음덕(蔭德)을 계승하고, 천자(天子)의 존엄(尊嚴)을 받들어 국가를 처음 세워 신민(臣民)을 통치한 지가 지금 7년이나 되었는데, 군려(軍旅)에 오래 있음으로 인하여 서리와 이슬을 범하여, 지금에 와서는 나이 많고 병이 발생하여 아침저녁으로 정사에 부지런하기가 어렵겠으므로, 여러가지 사무의 많고 번잡한 것을 빠뜨린 것이 많을까 염려된다. 다만 너 왕세자 방과(芳果) 는 자신이 적장(嫡長)의 지위에 있어 일찍부터 인덕(仁德)과 효도를 나타냈으며, 또한 개국(開國)의 초기를 당하여 나를 보좌한 일이 많은 것은 온 나라 신민(臣民)들이 모두 이를 알고 있다. 그런 까닭으로, 홍무(洪武) 31년 9월 초5일에 종묘(宗廟)에 고하고 왕위에 오르기를 명하니, 너는 전장(典章)을 따라 행하여 군자를 친근히 하고 소인을 멀리 하며, 보고 듣는 것은 자기 한 사람의 편사(偏私)를 없게 하고, 좋아하고 미워하는 것은 나라 사람들의 공론(公論)에 따라 감히 혹 폐기(廢棄)하지도 말며, 감히 혹 태만하지도 말아서, 그 지위를 영구히 편안하게 하여 후사(後嗣)를 번성(繁盛)하게 하라. 아아! 너 아버지는 덕이 적은 사람이므로 비록 본받지 못할 것이지만, 선성(先聖)의 도(道)가 간책(簡冊)에 실려 있으니, 새벽에 일어나고 밤늦게 자서 너는 항상 공경할 것이다.”
다음에는 좌정승과 우정승을 부르니, 또한 공복(公服)을 갖추어 입고 들어왔다. 임금이 말하였다.
“내가 지금 세자에게 왕위를 전해 주니, 경 등은 힘을 합하여 정치를 도와서 큰 왕업(王業)을 퇴폐(頹廢)시키지 말게 하라.”
이에 전국보(傳國寶)를 그들에게 주고, 다음에는 이문화 에게 명하여 세자를 모시고 나오게 하였다. 좌정승과 우정승이 전국보(傳國寶)를 받들고 앞에서 인도하고 이문화 가 세자를 모시고 근정전(勤政殿) 에 이르렀다. 세자가 강사포(絳紗袍)와 원유관(遠遊冠)을 바꾸어 입고 왕위에 올라 백관(百官)들의 하례(賀禮)를 받고 이름을 고쳐 경(曔) 이라 하였다. 면복(冕服) 차림으로 백관(百官)들을 거느리고 부왕(父王)에게 존호(尊號)를 올려 상왕(上王)이라 하고는, 백관들을 거느리고 절하면서 치하(致賀)하였다.

태종 1400.11.11(辛未)
임금이 王世子에게 禪位하였다. 判三軍府事 李茂 는 敎書를 받들고, 都承旨 朴錫命은 國寶를 받들고 仁壽府에 나아가서 올리니, 세자가 울면서 받지 않았다. 임금이 세자에게 전지(傳旨)하였다.
“내가 어려서부터 말 달리고 활 잡기를 좋아하여, 일찍이 학문을 하지 않았는데, 즉위한 이래로 혜택이 백성에게 미치지 못하고, 재앙과 변괴가 거듭 이르니, 내가 비록 조심하고 두려워하나 어찌할 수 없다. 세자는 어려서부터 배우기를 좋아하여 이치에 통달하고, 크게 공덕이 있으니, 마땅히 나를 대신하도록 하라.”
세자가 부득이하여 受禪하였다. 그 敎書는 이러하였다.
“공손히 생각하건대, 조종(祖宗)께서 어질고 후하시므로 덕을 쌓아 큰 명(命)을 성취하고, 우리 ‘신무 태상왕(神武太上王)’이 처음 일어날 때에 미쳐, 왕세자(王世子)가 기선(幾先)에 밝아서 천명(天命)을 명확히 알고, 먼저 대의(大義)를 주창(主唱)하여 큰 기업(基業)을 세웠으니, 우리 조선(朝鮮) 의 개국이 세자의 공이 많았다. 그러므로, 당초에 세자를 세우는 의논에서 물망이 모두 돌아갔는데, 뜻하지 않게도 권간(權姦)이 공을 탐하여 어린 얼자(孽子)를 세워 종사를 기울어뜨리려 하였다. 하늘이 그 충심(衷心)을 달래어 계책을 세워 감정(戡定)해서 종사를 편안히 하였으니, 우리 조선 을 재조(再造)한 것도 또한 세자의 공에 힘입은 것이다. 나라는 이때에 이미 세자의 차지가 되었으나, 겸허(謙虛)를 고집하여 태상왕께 아뢰서 착하지 못한 내가 적장자(嫡長子)라 하여 즉위(卽位)하도록 명하게 하였다. 내가 사양하여도 되지 않아서 면강(勉强)하여 정사에 나간 지 지금 3년이 되었으나, 하늘 뜻이 허락하지 않고, 인심이 믿지 않아서, 황충과 가뭄이 재앙으로 되고, 요얼(妖孽)이 거듭 이르니, 진실로 과인[寡昧]의 부덕한 소치로 말미암은 것이므로, 무서워하고 두려워하여 하늘과 사람에게 부끄러움이 있다. 하물며 내가 본래 풍질(風疾)이 있어 만기(萬機)에 현란(眩亂)하니, 정신을 수고롭게 하여 정무에 응하면, 미류(彌留)에 이를까 두려웠다. 무거운 짐을 내놓아 덕 있는 사람에게 부탁해 볼까 생각하였으니, 거의 위로는 하늘 마음에 보답하고, 아래로는 여망(輿望)을 위로할 수 있을 것이다. 왕세자는 강명(剛明)한 덕을 품수(稟受)하고 용맹과 지략의 자질이 빼어났다. 인의(仁義)는 타고날 때부터 가졌고, 효제(孝悌)는 지성(至誠)에서 비롯되었다. 학문은 의리에 정(精)하고, 영명한 꾀는 변통(變通)에 합하였다. 진실로 예철(睿哲)하기가 무리에 뛰어나는데, 겸공(謙恭)하기를 더욱 부지런히 하였다. 일찍이 제세(濟世) 안민(安民)의 도량으로 능히 발란(撥亂) 반정(反正)의 공을 이루었다. 구가(謳歌)가 돌아가는 바요, 종사(宗社)가 의뢰하는 바이니, 어질고 덕 있는 사람이 마땅히 대통(大統)을 이어야 하겠다. 이제 세자에게 명하여 왕위(王位)를 전하여 즉위하게 한다. 나는 장차 물러나 사사 집에 돌아가서 한가롭게 놀고 편안히 봉양받으면서 백세(百歲)를 보전하겠다. 아아! 하늘과 사람의 정(情)은 반드시 덕 있는 사람에게 부탁하고, 종사의 대통(大統)은 마땅히 지친(至親)에게 전하여야 한다. 그러므로, 부자 형제가 서로 잇는 것이 실로 고금의 통한 의리이다. 아아! 너희 종친(宗親)·기로(耆老)·대소 신료(大小臣僚)는 모두 내 뜻을 받아서 길이 유신(維新)의 정치를 보전하도록 하라.”
참찬문하(參贊門下) 권근(權近) 이 지은 것이다. 좌승지 이원(李原) 을 보내어 태상왕에게 선위(禪位)할 뜻을 고하니, 태상왕이 말하였다.
“하라고도 할 수 없고, 하지 말라고도 할 수 없다. 이제 이미 선위하였으니 다시 무슨 말을 하겠는가!”

태종 1400.11.13(癸酉)
세자가 예궐(詣闕)하여 조복을 갖추고 명(命)을 받고, 연(輦)을 타고 壽昌宮에 이르러 卽位하였다. 백관의 朝賀를 받고 宥旨를 반포하였다. 왕은 이렇게 말하였다.
“우리 ‘계운 신무 태상왕(啓運神武太上王)’께서 조종(祖宗)의 쌓은 덕을 이어받고 천인(天人)의 협찬(協贊)을 얻어서, 크나큰 명(命)을 받고서 문득 동방(東方)을 차지하여, 성한 덕과 신통한 공과 큰 규모와 원대한 도략으로 우리 조선 억만년 무궁한 운조(運祚)를 이룩하였고, 우리 상왕(上王)께서는 적장자(嫡長子)로서 공경히 엄한 명(命)을 받고서 보위(寶位)에 즉위하여, 정신을 가다듬어 다스림을 이룬 지 이제 3년이다. 지난번에 적사(嫡嗣)가 없었으므로 미리 저부(儲副)를 세워야 한다고 하니, 이에 소자(小子)가 동모제(同母弟)의 지친(至親)이고, 또 개국(開國)하고 정사(定社)할 때 조그마한 공효가 있다 하여 나를 책봉해 세자를 삼고 감무(監撫)의 책임을 맡기었는데, 감내하지 못할까 두려워 매양 조심하고 송구한 마음을 품었다. 어찌 생각하였으랴! 이달 11일에 홀연히 교지(敎旨)를 내려 이에 즉위하도록 명하시었다. 두세 번을 사양하였으나 이루어진 명령을 돌이킬 수가 없어서, 이미 13일 계유(癸酉)에 수창궁에서 즉위하였다. 돌아보건대, 이 작은 몸이 대임(大任)을 응하여 받으니 무섭고 두려워서 깊은 물을 건너는 것과 같다. 종친(宗親)·재보(宰輔)·대소 신료(大小臣僚)에 의뢰하니, 각각 마음을 경건히 하여 힘써 내 덕을 도와 미치지 못하는 것을 바로잡도록 하라. 명에 응하는 처음을 당하여 마땅히 너그러운 은전(恩典)을 펴서 경내에 사유(赦宥)하여야 하겠다. 건문(建文) 2년 11월 13일 새벽 이전의 상사(常赦)에서 용서하지 못하는 것을 제외하고, 이미 발각되었거나 발각되지 않았거나, 이미 결정되었거나 결정되지 않았거나, 모두 용서하여 면제한다. 감히 유지(宥旨) 전의 일을 가지고 서로 고하여 말하는 자는 그 죄로 죄주겠다. 아아! 천지(天地)의 덕은 만물을 생산하는 것보다 더 큰 것이 없고, 왕자(王者)의 덕은 백성에게 은혜롭게 하는 것보다 더 큰 것이 없다. 하늘과 사람의 두 사이에 위치하여 위로 아래로 부끄러움이 없고자 하면, 공경하고 어질게 하여, 하늘을 두려워하고 백성에게 부지런히 하는 것이다. 힘써 이 도에 따라서 부하(負荷)된 임무를 수행하겠다. 너희 신민들은 나의 지극한 회포를 몸 받도록 하라.”

세종 1422.05.10(丙寅)
태상왕이 〈연화방(蓮花坊)〉 신궁(新宮)에서 훙(薨)하니, 춘추가 56세이었다. 태상왕은 총명하고 영특하며, 강직하고 너그러우며, 경전과 사기를 박람(博覽)하여 고금의 일을 밝게 알고, 어려운 일을 많이 겪어 사물의 진위(眞僞)를 밝게 알며, 한 가지 재주와 한 가지 선행(善行)이 있는 자도 등용하지 아니한 일이 없고, 선대의 제사에는 반드시 친히 참사하고, 중국 과의 교제에는 반드시 정성을 다하고, 재상에게 〈국사를〉 위임하고 환관을 억제하며, 상줄 데 상주고, 벌줄 데 벌주되, 친소(親疎)로 차등을 두지 아니하고, 관직을 임명하되, 연조로 계급을 올려 주지 아니하고, 문교(文敎)를 숭상하고 무비(武備)를 닦으며, 검박한 덕을 행하고 사치와 화려한 것을 없애어, 20년 동안에 백성이 편하고 산물이 풍부하여, 창고가 가득 차 있고, 해적들이 와서 굴복하고, 예의가 바르고 음악이 고르며, 〈모든 법의〉 강령이 서고 조목이 제정되었다. 성품이 신선과 부처의 도를 좋아하지 아니하고, 사사(寺社)를 개혁하여 노비를 거두고 전답을 감하였으며, 원경 왕태후 의 초상에 유학의 예법을 준행하고 불사(佛事)는 하지 아니하였다. 다만, 칠재(七齋)만 배설하게 하였는데, 모두 검약하게 하였으며, 능 옆에는 사찰을 건축하지 못하게 하고, 근신에게 이르기를,
“이 능은 백 세 뒤에 내가 들어갈 데인데, 더러운 중들을 가까이 오게 할 수 없는 것이다. 칠재(七齋)도 배설하지 아니할 것이나, 다만 명나라 에서 부처를 신봉하므로, 대국을 섬기는 나라로서 선뜻 달리할 수 없기 때문이다.”
하고, 또 근신에게 이르기를,
“내가 건원릉(健元陵) 과 제릉(齊陵) 에 사찰을 건축한 것은 태조 의 뜻을 이루어 드린 것이다. 그러므로 근일에 또한 종을 만들어 개경사(開慶寺) 에 달게 하였으나, 내 마음에 드는 일은 아니다. 이제 왕후의 초상에는 내가 법을 세워서 자손에게 보이는 것인데, 만세 뒤에 자손들이 지키고 아니 지키는 것은 저희들에게 달린 것이다.”
하고, 또 일찍이 좌우에 말하기를,
“세상을 혹(惑)하게 하고 백성을 속이는 것은 신선과 부처와 같은 것이 없다. 내가 일찍이 이궤조(李軌祖) 의 전(傳)을 보고 신선과 부처의 심히 허황하고 망령됨을 알았다.”
하고, 또 근신에게 이르기를,
“이제 들으니, 왕후의 재를 올릴 때, 대소 관원들로부터 노복에 이르기까지 한데 섞여서 떠들어대어 거의 천 명이나 된다 하니, 부처에게 영이 없다면 몰라도, 만일 영이 있다면, 이런 것은 공경하여 섬기는 도리가 아니라.”
하고, 마침내 영을 내려 기신(忌晨)이나 대부(大夫)·사(士)·서인(庶人)의 〈명복을〉 추천(追薦)하는 재는 모두 수륙재(水陸齋)만 배설하고, 절에 나가는 인원도 일정한 수를 제한하게 하였다.

세종 1418.08.11(戊子)
임금이 근정전 에 나아가 교서를 반포하기를,
“삼가 생각하건대, 태조께서 홍업(洪業)을 초창하시고 부왕 전하께서 큰 사업을 이어받으시어, 삼가고 조심하여 하늘을 공경하고 백성을 사랑하며, 충성이 천자(天子)에게 이르고, 효하고 공경함이 신명(神明)에 통하여 나라의 안팎이 다스려 평안하고 나라의 창고가 넉넉하고 가득하며, 해구(海寇)가 와서 복종하고, 문치(文治)는 융성하고 무위(武威)는 떨치었다. 그물이 들리면 눈이 열리듯이 대체가 바로 서매 세절(細節)이 따라 잡히어, 예(禮)가 일어나고 악(樂)이 갖추어져 깊은 인애와 두터운 은택이 민심에 흡족하게 젖어들었고, 융성(隆盛)한 공렬(功烈)은 사책(史冊)에 넘치어, 승평(昇平)의 극치(極致)를 이룸이 옛적에는 없었나니, 그러한 지 이에 20년이 되었다.
그런데 근자에 오랜 병환으로 말미암아 청정(聽政)하시기에 가쁘셔서 나에게 명하여 왕위를 계승케 하시었다. 나는 학문이 얕고 거칠며 나이 어리어 일에 경력이 없으므로 재삼 사양하였으나, 마침내 윤허를 얻지 못하여, 이에 영락 16년 무술(戊戌) 8월 초10일에 경복궁 근정전 에서 위에 나아가 백관의 조하(朝賀)를 받고, 부왕을 상왕으로 높이고 모후를 대비(大妃)로 높이었다. 일체의 제도는 모두 태조 와 우리 부왕께서 이루어 놓으신 법도를 따라 할 것이며, 아무런 변경이 없을 것이다. 그리고 이 거룩한 의례에 부쳐서 마땅히 너그러이 사면하는 영을 선포하노니, 영락 16년 8월 초10일 새벽 이전의 사건은 모반 대역(謀叛大逆)이나 조부모나 부모를 때리거나 죽이거나 한 것과 처첩이 남편을 죽인 것, 노비가 주인을 죽인 것, 독약이나 귀신에게 저주하게 하여 고의로 꾀를 내어 사람을 죽인 것을 제하고, 다만 강도 외에는 이미 발각이 된 것이나 안 된 것이거나 이미 판결된 것이거나 안 된 것이거나, 모두 용서하되, 감히 이 사면(赦免)의 특지를 내리기 이전의 일로 고발하는 자가 있으면, 이 사람을 그 죄로 다스릴 것이다. 아아, 위(位)를 바로잡고 그 처음을 삼가서, 종사의 소중함을 받들어 어짊을 베풀어 정치를 행하여야 바야흐로 땀흘려 이루어 주신 은택을 밀어 나아가게 되리라.”
하였다. 처음에 임금이 지신사(知申事) 이명덕(李明德) 을 보내어 상왕께 아뢰기를,
“원컨대 존호(尊號)를 태상황(太上皇)으로 올리고자 하나이다.”
하니, 상왕이 말하기를,
“상왕을 태상왕으로 높히고, 나는 상왕으로 함이 마땅하다. 내가 겸양하는 것이 아니다. 천륜(天倫)으로 말하는 것이니, 주상이 나에게 효도하고자 할진댄, 모름지기 내 말을 좇아야 할 것이라.”
하고, 상왕도 또한 사람을 보내어 말하기를,
“태상(太上)의 칭호는 내가 감당할 바가 아니다.”
하여, 이에 태상왕으로 높이는 예는 거행하지 아니하였다.

세종 1450.02.17(壬辰)
임금(세종)이 영응대군(永膺大君) 집 동별궁(東別宮)에서 훙(薨)하였다. 처음에 영응대군 집을 지을 때, 명하여 한 궁을 따로 집 동편에 세워서 옮겨 거처할 곳을 준비하였다. 임금은 슬기롭고 도리에 밝으매, 마음이 밝고 뛰어나게 지혜롭고, 인자하고 효성이 지극하며, 지혜롭고 용감하게 결단하며, 합(閤)에 있을 때부터 배우기를 좋아하되 게으르지 않아, 손에서 책이 떠나지 않았다. 일찍이 여러 달 동안 편치 않았는데도 글읽기를 그치지 아니하니, 태종(太宗) 이 근심하여 명하여 서적(書籍)을 거두어 감추게 하였는데, 사이에 한 책이 남아 있어 날마다 외우기를 마지 않으니, 대개 천성이 이와 같았다. 즉위함에 미쳐, 매일 사야(四夜)4437) 면 옷을 입고, 날이 환하게 밝으면 조회를 받고, 다음에 정사를 보고, 다음에는 윤대(輪對)를 행하고, 다음 경연(經筵)에 나아가기를 한 번도 조금도 게으르지 않았다. 또 처음으로 집현전(集賢殿)을 두고 글 잘하는 선비를 뽑아 고문(顧問)으로 하고, 경서와 역사를 열람할 때는 즐거워하여 싫어할 줄을 모르고, 희귀한 문적이나 옛사람이 남기고 간 글을 한 번 보면 잊지 않으며 증빙(證憑)과 원용(援用)을 살펴 조사하여서, 힘써 정신차려 다스리기를 도모하기를 처음과 나중이 한결같아, 문(文)과 무(武)의 정치가 빠짐 없이 잘 되었고, 예악(禮樂)의 문(文)을 모두 일으켰으매, 종률(鍾律)과 역상(曆象)의 법 같은 것은 우리나라에서는 옛날에는 알지도 못하던 것인데, 모두 임금이 발명한 것이고, 구족(九族)과 도탑게 화목하였으며, 두 형에게 우애하니, 사람이 이간질하는 말을 못하였다. 신하를 부리기를 예도로써 하고, 간(諫)하는 말을 어기지 않았으며, 대국을 섬기기를 정성으로써 하였고, 이웃나라를 사귀기를 신의로써 하였다. 인륜에 밝았고 모든 사물에 자상하니, 남쪽과 북녘이 복종하여 나라 안이 편안하여, 백성이 살아가기를 즐겨한 지 무릇 30여 년이다. 거룩한 덕이 높고 높으매, 사람들이 이름을 짓지 못하여 당시에 해동 요순(海東堯舜) 이라 불렀다. 늦으막에 비록 불사(佛事)로써 혹 말하는 사람이 있으나, 한번도 향을 올리거나 부처에게 절한 적은 없고, 처음부터 끝까지 올바르게만 하였다.

문종 1450.02.23(丁酉)
임금이 면복(冕服) 차림으로 널[柩] 앞에서 유명(遺命)을 받고 빈전(殯殿) 문밖의 장전(帳殿)에 나가서 즉위(卽位)의 예식(禮式)을 행하였는데, 의식대로 하였다. 슬피 울면서 스스로 견디지 못하니 옷소매가 다 젖었다. 임금이 면복(冕服)을 벗고 상복(喪服)을 다시 입었다.

문종 1450.09.01
세종을 현릉(顯陵)에 장사(葬事)하였다. 그 애책(哀冊)에 이르기를,
“ 문종 흠명 인숙 광문 성효 대왕(文宗欽明仁肅光文聖孝大王) 이 대궐에서 훙서(薨逝)했습니다. 이 해 가을 9월 경인에 장차 영좌(靈座)를 현릉(顯陵) 에 옮기려 했으니, 예절인 때문이다. 그린 찬궁(攢宮)에는 휘장을 걷고, 아로새긴 상여(喪轝)에는 굴대끝을 장식했습니다. 우교(羽翹)는 행렬의 앞에서 인도하고, 신의(蜃儀)는 삼엄하게 호위했습니다. 운정(雲旌)은 쌀쌀하게 가을에 휘날리고, 노발(露綍)은 처량하게 새벽에 인도되었습니다. 풍금(楓禁)의 깊숙함[蠖濩]을 등지고, 백성(栢城)의 아득함[漂渺]을 지향(指向)하였습니다. 효자 사왕(孝子嗣王)이 하늘에 부르짖으면서 슬피 사모하고, 서리를 밟으면서 슬픈 눈물을 흘려, 삼조(三朝)의 일찍 어김을 몹시 슬퍼하고, 오월(五月)의 상제(喪制)가 있음을 개탄했습니다. 봉어(鳳馭)를 더위잡으려 해도 미치지 못하니, 용안(龍顔)을 상상(想像)하면서 모시고 있는 듯했습니다. 이에 윤음(綸音)을 난파(鑾坡)에 내리어, 방명(芳名)을 옥자(玉字)에 전하도록 했습니다.
그 문사(文詞)에 이르기를, ‘빛나는 문종(文宗)께서는, 굉광(耿光)을 현양(顯揚)했습니다. 중화(重華)는 요제(堯帝) 에 화합(和合)했으며, 일덕(一德)은 탕왕(湯王)과 같았습니다. 창제(蒼帝)의 진궁(震宮)에서 탄생하여 일찍이 전성(前星)3971) 에 자리잡았습니다. 모처럼 깊은 마음과 바다처럼 윤택한 덕택이며, 종(鍾)을 쳐 시작하여 경(磬)을 쳐 마무리하듯 사물(事物)을 집대성(集大成)하였습니다. 선왕(先王)께서 노년(老年)에 정사에 피로하셔서 감무(監撫)의 직책을 총령(總領)하도록 하셨으니 화육(化育)을 참여해 도왔으며, 문무(文武)를 경위(經緯)했습니다. 대보(大寶)3977) 를 받아 천명(天命)을 계승했으며, 천기(天紀)를 순응하여 형재(衡宰)를 맞이했습니다. 사인(邪人)을 제거할 적엔 의심하지 않았으며, 선언(善言)을 진헌(進獻)할 적엔 기(旗)가 있었습니다. 수찰(手札)을 써서 직언(直言)을 구하고, 친히 과제(科題)를 내어 인재(人才)를 뽑았습니다. 선비는 상도(常道)를 벗어난 사람을 좋아했으며, 충성은 촉노(觸怒)한 행동도 받아들였습니다. 형벌을 밝히면서 신중히 하라 하고, 노인을 공경하되 효도에서 출발했습니다. 군병(軍兵)을 정련(整練)하고 학교를 수목(修睦)했습니다. 가색(稼穡)으로써 백성을 양육(養育)하고, 필분(苾芬)으로써 제사를 지냈습니다. 요역(徭役)을 덜어 주고 부세(賦稅)를 경감(輕減)하며, 검소를 힘쓰고 사치를 버렸습니다. 본심(本心)에 따라 복경(福慶)을 돈독히 하니 이미 요제(堯帝)의 친족(親族)을 화목하게 했으며, 덕망을 숭상하여 전례(典禮)를 상고했으니, 비로소 우(虞)나라 의 빈객(賓客)을 대우했습니다. 큰 집[廣廈] 밑과 가는 담요[紐氈] 위에서, 학자(學者)들을 연접(延接)하고 인진(引進)하시니, 덕은 날로 새로와지고 학문은 때때로 힘쓰게 되었습니다.
성상(聖上)께서는 또 재능(才能)이 많으셔서 신묘(神妙)함은 여러 가지 뛰어난 재주를 겸비했습니다. 전모(典謨)와 같은 문장(文章)이요, 법도(法度)에 맞는 신필(神筆)이었습니다. 깊은 학문은 성리(性理)를 연구했으며, 미묘(微妙)한 조예(造詣)는 운력(韻曆)을 탐구(探究)했습니다. 밤 이경(二更)에 이르도록 피로함을 잊으시고, 신심(身心)이 편안하면 해독이 됨을 경계했습니다. 바야흐로 새벽녘에 옷을 찾아 입고서 영원한 계획을 세우려고 했는데, 갑자기 신을 벗고 먼 곳으로 올라가 버렸으니, 아아! 슬픈 일입니다. 효성을 타고난 천성(天性)으로써 삼년(三年) 동안을 거상(居喪)하셨는데, 한(漢)나라 의 제도의 상기(喪期)가 짧은 것을 싫어했으며, 순제(舜帝) 의 부모를 사모하는 마음은 더욱 깊었습니다. 지극한 슬픔을 대상(大祥)과 담제(禫祭)에서 줄였으며, 성대한 예절을 증제(烝祭)와 상제(嘗祭)로써 맞게 했습니다. 장찬(璋瓚)은 높다랗고[峩峩] 소균(韶鈞)은 장장(鏘鏘)했습니다. 패환(佩環)은 추창(趨蹌)하는 데 어지럽고, 면류관(冕旒冠)은 숙목(肅穆)하는 데 엄연(儼然)했습니다. 환성(歡聲)이 만성(萬姓)에서 다투어 일어나고, 가기(佳氣)가 사역(四域)에서 번갈아 날치는데 어찌 병환이 발생하자 위독해졌으며, 병이 나을 것이라 하여 약을 쓰지 말도록 했습니까?
회춘(回春)을 금등(金縢)에 점쳤는데 유명(遺命)을 갑자기 옥궤(玉几)에서 부탁하시니, 아아! 슬프도다. 자신전(紫宸殿)은 밤이 되려고 하는데, 보의(黼扆)는 그전과 같았습니다. 궁거(宮車)가 행진하지 않고 선장(仙仗)이 기색이 처참했습니다. 곡성(哭聲)은 천신(薦紳)들에게 천둥처럼 일어나고, 눈물은 자신전(紫宸殿)에서 비처럼 내렸습니다. 단정(丹鼎)은 형호(荊湖)에 두고 백운(白雲)을 타고 제향(帝鄕)에 가셨습니까? 용(龍)의 수염을 더위잡고 따라가려고 해도 어떻게 따라가겠습니까? 다만 떨어뜨린 임금의 활만 안고서 슬픔을 더할 뿐입니다. 아아! 슬프도다. 수원(壽原)은 옛부터 있었으니 시기에 먼저 만들어도 어긋나지 않습니다. 용부(龍阜)에 초목이 무성하니 상설(象設)이 어렴풋이[依稀] 보이는 듯합니다. 구슬 술잔은 전석(前夕)의 조전(朝奠)에 드리고, 금근거(金根車)는 새벽 출발에 대기(待機)했습니다. 바람은 잇달아 부는데 기[旐]가 한가히 펄럭이고, 달은 조용히 가는데 만가(挽歌)는 슬퍼 목이 메었습니다. 의관(衣冠)은 창오산(蒼梧山) 들판에서 볼 수가 없는데, 검석(劍舃)은 마침내 교산(橋山)에 숨겨졌습니다. 겹친 구름은 막막(漠漠)한데 요비(瑤扉)는 잠겨 있고, 깊은 밤은 침침(沈沈)한데 옥갑(玉匣)은 싸늘했습니다.
아아! 슬프도다. 하늘이 그 물체(物體)가 기울어지니 태양이 그 빛을 감추었습니다. 큰 덕망이 어찌 능히 반드시 오래 살 수가 있겠습니까? 지극히 밝음도 혹시 오랫동안 비칠 수가 없습니다. 이수(理數)를 연구해 보아도 가지런하지 아니하고, 궁창(穹蒼)4013) 에 호소해 보아도 아득하도 어두울 뿐입니다. 성대한 사업의 광휘(光輝)가 크게 밝음과, 거룩한 덕화의 높고 커서 명칭하기 어려운 점을 돌이켜 보니, 청편(靑編)4014) 에 남긴 법도가 가득히 차겠으며, 백대(百代)까지 좋은 명성(名聲)이 전하겠습니다. 아아! 슬프도다.”
하였다.

문종 1452.05.14(丙午)
유시(酉時)에 임금(문종)이 강녕전(康寧殿)에서 훙(薨)하시니, 춘추(春秋)가 39세이셨다. 이때 대궐의 안팎이 통하지 않았는데, 오직 의관(醫官)인 전순의(全循義) · 변한산(邊漢山) · 최읍(崔浥) 만이 날마다 나아와서 안부(安否)를 보살폈지마는, 모두가 범용(凡庸)한 의원(醫員)이므로 병증(病症)을 진찰(診察)할 줄은 알지 못하여, 해로움이 없을 것이라고 여기면서 임금에게 활쏘는 것을 구경하고 사신(使臣)에게 연회를 베풀도록까지 하였다. 종기(瘇氣)의 화종(化腫)이 터지므로 전순의(全循義) 등이 은침(銀針)으로써 종기(瘇氣)를 따서 농즙(濃汁)을 두서너 홉쯤 짜내니, 통증(痛症)이 조금 그쳤으므로, 〈그들은〉 밖에서 공공연히 말하기를,
“3,4일만 기다리면 곧 병환이 완전히 나을 것입니다.”
하였다. 의정부(議政府)와 육조(六曹)에서는 날마다 임금의 기거(起居)를 물으니, 다만 대답하기를,
“임금의 옥체(玉體)가 오늘은 어제보다 나으니 날마다 건강이 회복되는 처지입니다.”
하였다. 이날 아침에 전순의 등이 나아가서 안부(安否)를 보살피고는, 비로소 임금의 옥체(玉體)가 위태로와 고생하는 줄을 알게 되었다. 세자(世子)는 말하기를,
“나는 나이 어려서 어찌할 줄을 알지 못하겠습니다.”
하였다. 의정부의 대신(大臣)들이 빨리 내정(內庭)에 나아가서 임금의 안부(安否)를 묻고, 의정부에서는 모두 근정전(勤政殿) 의 뜰에 나아가서 진무(鎭撫)로 하여금 성문(城門)을 나누어 지키게 하고, 죄수를 석방하려고 하여 세자(世子)를 통하여 아뢰니, 임금이 벌써 말을 하지 못하면서 다만 대답하기를,
“불가(不可)하다.”
하였다. 수양 대군(首陽大君)이 외정(外庭)에서 통곡하면서 말하기를,
“어째서 청심원(淸心元)을 올리지 않는가?”
하니, 전순의(全循義)가 비로소 청심원을 올리려고 했으나 시기가 미치지 못하였다. 조금 후에 임금이 훙서(薨逝)하였다. 이때 의정부의 대신(大臣)들이 임금의 병환이 위급한 때를 당하여, 본부(本府)에 앉아서 사인(舍人)을 시켜 안부(安否)만 물었을 뿐이고, 한 사람이라도 임금을 뵈옵고 병을 진찰(診察)하기를 청하지는 않고서 범용(凡庸)한 의관(醫官)에게만 맡겨놓고 있었으니, 그때 사람들의 의논이 분개하고 한탄하였다. 의정부에서 병조 판서 민신(閔伸) 과 도진무(都鎭撫) 정효전(鄭孝全) · 조혜(趙惠)로 하여금 내금위(內禁衛)를 거느리고 함원전 후문(含元殿後門)을 지키고 또 여러 문을 나누어 지키게 하고, 또 윤암(尹巖) · 이완(李梡) · 이령(李齡) · 최숙손(崔叔孫)으로써 궁성 사면 절제사(宮城四面節制使)로 삼아서 각기 군사를 거느리고서 주위에 빙 둘러서 경비하고 지키게 하였다. 의정부에서 세종(世宗) 의 빈(嬪) 양씨(楊氏) 로 하여금 세자(世子)를 받들어 함원전(含元殿) 에 옮겨 거처하도록 했으니, 빈(嬪)은 세자(世子)에게 보호하여 기른 은혜가 있는 때문이었다. 영천위(鈴川尉) 윤사로(尹師路)를 수릉관(守陵官)으로 삼고, 공조판서 정인지(鄭麟趾) ·의정부 참찬(參贊) 허후(許詡) ·예조참판(禮曹參判) 정척(鄭陟)을 빈전도감 제조(殯殿都監提調)로 삼아서 상사(喪事)를 주관(主管)하게 하였다. 종친(宗親)과 문무백관(文武百官)들은 백의(白衣)와 오대(烏帶) 차림으로써 모여서 통곡하고 이내 습전(襲奠)을 설치하였다. 여러 신하들이 모두 통곡하여 목이 쉬니, 소리가 궁정(宮庭)에 진동하여 스스로 그치지 못하였으며, 거리[街巷]의 소민(小民)들도 슬퍼서 울부짖지 않는 사람이 없었다. 이때 사왕(嗣王)이 나이 어려서 사람들이 믿을 곳이 없었으니, 신민(臣民)의 슬퍼함이 세종(世宗)의 상사(喪事)보다도 더하였다.
임금은 천성(天性)이 너그럽고 무거워서 장난하는 것을 좋아하지 않으셨다. 나이가 겨우 10여 세가 되자, 황제(皇帝)의 사신이 왔으므로 세종(世宗) 이 채붕(彩棚)을 설치하여 맞이하니, 서연관(書筵官)이 임금에게 채붕(彩棚) 앞의 수레를 멈추도록 하고, 영인(伶人)이 다투어 기예(伎藝)를 바쳤으나 임금은 조금도 보시지 아니하였다. 이미 돌아와서는 궁료(宮僚)에게 이르기를,
“어찌 나에게 채붕(彩棚) 앞에 수레를 멈추도록 했는가?”
하니, 모두 대답할 말이 없었다. 동궁(東宮)에 있을 때 날마다 서연(書筵)을 열어서 강론(講論)하기를 게을리 하지 않았으며, 모두 동작(動作)을 한결같이 법도(法度)에 따라 하였다. 희노(喜怒)를 얼굴에 나타내지 않고 성색(聲色)3858) 을 몸에 가까지 하지 않으며, 항상 마음을 바르게 하여[居敬] 몸을 수양(修養)하며, 신심(身心)과 성명(性命)의 이치를 환하게 살펴서, 평상시에는 다른 사람과 논변(論辨)하지 않지마는, 논난(論難)한 데 이르러서는 비록 노사 숙유(老師宿儒)일지라도 대답하지 못하였다. 시선(侍膳)3859) 하고 문안(問安)하기를 날로 더욱 신중히 하여, 세종(世宗) 께서 일찍이 몸이 편안하지 못하므로 임금이 친히 복어(鰒魚)를 베어서 올리니 세종 이 맛보게 되었으므로 임금이 기뻐하여 눈물을 흘리기까지 하였다. 또 후원(後苑)에 손수 앵두[櫻桃]를 심어 매우 무성하였는데 익은 철을 기다려 올리니, 세종께서 반드시 이를 맛보고서 기뻐하시기를,
“외간(外間)에서 올린 것이 어찌 세자(世子)의 손수 심은 것과 같을 수 있겠는가?”
하였다. 임금이 날마다 세종(世宗) 의 옆에 모시면서 정사를 보살피는 여가에 경사(經史)를 강론(講論)하면서 부지런히 힘쓰면서 그치지 않았으니, 《역경(易經)》과 《예기(禮記)》는 모두 세종께서 가르친 것이었다. 이미 성리(性理)의 글을 통달하고 나서 표현하여 문장을 만들게 되니, 모든 교명(敎命)은 모두 붓을 들고 곧 그 자리에서 써서 조금도 막힘이 없었다. 일찍이 목척(木尺)에 우연히 쓰기를,
“이 자[尺]처럼 범용(凡庸)한 물건도 사용하여 굽은 것을 바르게 할 수가 있으니, 이로써 천하의 정사가 사정(私情)만 없으면 누군들 복종하지 않겠음을 알 수가 있겠다.”
하였으니, 그의 도량이 이와 같았다. 또 조자앙(趙子昻)의 글씨를 좋아하여 왕우군(王右軍)의 서법(書法)으로써 혼용하여 써서 혹은 등불 아래에서 종이에 임하더라도 정묘(精妙)하여 영묘(靈妙)한 지경에 들어갔으니, 그의 촌간(寸簡)과 척지(隻紙)를 얻은 사람은 천금(千金)처럼 소중하게 여기었다. 과녁을 쏠 적에도 또한 지극히 신묘(神妙)하여 겨냥한 것은 반드시 바로 쏘아 맞혔다. 또 천문(天文)을 잘 보아서 천둥이 모시(某時)에 모방(某方)에서 일어날 것을 미리 말했는데, 뒤에 반드시 맞게 되었다. 세종께서 매양 거둥할 적에는 반드시 천변(天變)을 물었는데, 말하면 반드시 맞는 것이 있었다. 문사(文詞)·초예(草隷) ·역산(曆算)·성운(聲韻)과 백가(百家)의 중기(衆技)에도 또한 그 신묘(神妙)한 경지에 도달하지 않는 것이 없었다. 세자(世子)의 자리에 있은 지 30년에 부왕(父王)을 섬김이 지성(至誠)에서 나왔으니, 매양 진선(進膳)할 때마다 반드시 친히 어주(御廚)에 서서 매양 음식을 먹을 적엔 먼저 맛을 보고 나서야 올렸으며, 날마다 이를 보통의 일로 삼았었다. 그가 즉위(卽位)해서는 행동은 대체(大體)를 따라 하였다. 임금의 자상(姿相)은 존엄(尊嚴)하고 성용(聲容)은 원화(圓和)하여, 처음에 세자(世子)가 되었을 적에 칙사(勅使) 해수(海壽)와 낭중(郞中) 진경(陳敬) 을 객관(客館)에서 보았는데, 이때 나이 겨우 10세였는데도 자상(姿相)이 백옥(白玉)처럼 부드럽고, 읍양(揖讓)과 보추(步趨)가 예절에 맞지 않는 것이 없었으니, 해수(海壽)와 진경(陳敬)이 서로 더불어 칭찬하기를 그치지 아니했다. 해수(海壽)가 임금을 사랑하여 손을 잡고 더불어 이야기하며 친히 안고 문 밖에 나가서 말 타는 것을 보려고 하는데, 임금께서 예절로써 굳이 사양했으나, 억지로 시키므로 그제야 말을 탔다. 해수가 재상(宰相) 이원(李原) 과 탁신(卓愼) 에게 이르기를,
“세자(世子)로 하여금 학문을 좋아하도록 해야 합니다.”
하였다. 후에 내관(內官) 제현(齊賢)과 행인(行人) 유호(劉浩)도 또한 임금을 보고는 탄상(歎賞)하기를,
“이 나라는 산수(山水)가 기절(奇絶)하기 때문에 이런 아름다운 재질(材質)을 출생시킬 수 있었다.”
하면서 이내 글 읽기를 권장하고 술을 적게 마시도록 하였다. 시강(侍講) 예겸(倪謙)과 급사중(給事中) 사마순(司馬恂)이 우리나라에 왔을 적에 임금께서 바야흐로 등창[背疽]이 막 났기 때문에 안색(顔色)이 그전보다 못했는데도, 예겸(倪謙)과 사마순(司馬恂)은 한 번 보고서 경의(敬意)를 다하고, 물러가 사관(使館)에 돌아가서는 탄미(歎美)하기를 그치지 아니했다. 그가 동궁(東宮)에 있을 적에는 일을 크고 작은 것을 논할 것 없이 모두 임금[ 세종 ]에게 상주(上奏)하여 시행하였다. 서연(書筵)에 납시어 글을 강독(講讀)하는 이외에는 다른 일에 미치지 아니했으며, 여러 가지 정무(政務)를 참여하여 결정할 적에는 윤번(輪番)으로 참석하여 정사를 보살폈다. 무릇 여러 신하들이 일을 아뢸 때는 모두 말하기를,
“마땅히 지존(至尊)께 아뢰어야 할 것이다.”
하고는 자기가 가부(可否)를 결정하지 아니했다. 처음부터 끝까지 30년 동안에 근신하기를 하루같이 하였다. 저녁때가 되도록 세종(世宗)을 모시면서 곁을 떠나지 아니했으며, 세종(世宗)께서 노경(老境)에 피로하시게 되자, 나라의 일은 모두 임금에게 결정되었으니 여러 가지의 정무가 대단히 번거롭고 바쁜데도 시약(侍藥)하고 정사를 보살핌을 일찍이 잠시도 폐(廢)하지 아니했으며, 물러나오면 빈우(賓友)와 더불어 경사(經史)를 강론(講論)하면서 하루 동안에 조금도 편안하고 한적(閒適)한 때가 없었으니, 측근의 사람이 일찍이 게으른 용모를 가짐을 볼 수가 없었다. 일찍이 근신(近臣)에게 이르기를,
“근일에 《근사록(近思錄)》과 사서(四書)를 보므로 소득(所得)이 자못 많게 되니 어릴 때의 독서(讀書)와 같지 않다.”
하였다. 또 말하기를,
“무릇 학문은 더욱 강론할수록 더욱 밝아지는 법인데 지금의 배우는 사람들은 책에 있어서 자못 다른 것이 있으니, 경(卿) 등은 나를 위하여 두 가지를 말하여 보라.”
하였다. 일찍이 말하기를,
“남녀(男女)와 음식(飮食)의 욕심은 가장 사람에게 간절한 것인데, 고량(膏粱)의 자제(子弟)들은 이것 때문에 몸을 망치는 이가 많게 된다. 내가 매양 여러 아우들을 보고는 순순(諄諄)히 경계하고 타일렀으나 과연 능히 내 말을 따르는 지는 알 수 가 없다.”
하였다. 즉위(卽位)한 이후에는 한결같이 세종(世宗)의 고사(故事)에 의거하여 허심탄회(虛心怛懷)하게 간언(諫言)을 받아들이고 자기 마음을 기울여 현인(賢人)을 생각하여, 직언(直言)을 구하는 교서(敎書)를 내려서 언로(言路)를 열고 승출(陞黜)하는 법을 제정하여 현우(賢愚)를 분별하며, 문교(文敎)를 숭상하고 무비(武備)를 중시(重視)하며, 왕씨(王氏)의 후손(後孫)을 찾아서 봉(封)했으며, 농사에 힘쓰고 형벌을 근신했으며, 변방을 지키는 군사를 줄이고 급하지 않은 일을 정지시키며, 쓸데없는 비용을 줄이었다. 항상 스스로 탄식하기를,
“어떻게 정사가 까다롭지 않고 형벌이 지나치지 않아서 우리 백성들로 하여금 일이 없도록 할 수 있겠는가?”
하였다. 이치를 봄이 매우 밝아서 고금(古今)의 일을 환하게 관찰(觀察)하시어 훙서(薨逝)할 때 임해서도 오히려 사유(赦宥)를 아끼셨으니, 그가 사생(死生)의 이치를 통달했음이 지극한 편이었다. 임금의 성품이 지극히 효성이 있어 양궁(兩宮)에 조금이라도 편안치 못한 점이 있으면 몸소 약 시중을 들어서 잘 때도 띠를 풀지 않으시고 근심하는 빛이 얼굴에 나타났었다. 소헌 왕후(昭憲王后)가 병환이 났을 적에 사탕(沙糖)을 맛보려고 하였는데, 후일에 어떤 사람이 이를 올리는 이가 있으니, 임금이 이를 보시고는 눈물을 흘리면서 휘덕전(輝德殿)에 바치었다. 세종(世宗) 이 병환이 나자 근심하고 애를 써서 그것이 병이 되었으며, 상사(喪事)를 당해서는 너무 슬퍼하여 몸이 바싹 여위시였었다. 매양 삭망절제(朔望節制)에는 술잔과 폐백을 드리고는 매우 슬퍼서 눈물이 줄줄 흐르니, 측근의 신하들은 능히 쳐다볼 수 가 없었다. 3년을 마치도록 외전(外殿)에 거처했으니, 대개 또한 우리 조정[朝家]의 법이었다.

단종 1452.05.18(庚戌)
노산군(魯山君)이 근정문(勤政門)에서 즉위(卽位)하고, 반교(頒敎)하기를,
“공손히 생각건대 우리 태조(太祖)께서 하늘의 밝은 명령을 받아 대동(大東)을 웅거하여 차지하고, 태종(太宗) · 세종(世宗)께서 선업(先業)을 빛내고 넓히어 문치(文治)로 태평에 이르고, 우리 선부왕(先父王)께서 성한 덕과 지극한 효도로 큰 기업(基業)을 이어받아서 정신을 가다듬어 정치를 하여 원대한 것을 도모하였는데, 불행하게도 임어(臨御)한 지 얼마 되지 않아서 갑자기 여러 신하를 버리었으니 땅을 치고 울부짖어도 미칠 수 없어 애통이 망극하다. 돌아보건대 큰 위(位)는 오래 비워 둘 수 없어 경태(景泰) 3년44) 5월 18일에 즉위하노라. 생각건대 소자(小子)가, 때는 바야흐로 어린 나이에 외로이 상중에 있으면서 서정(庶政) 만기(萬機)를 조처할 바를 알지 못하니, 조종(祖宗)의 업을 능히 담당하지 못할까 두려워하여 못[淵]과 얼음을 건너는 것과도 같이 율률(慄慄)하게 염려하고 두려워한다. 모든 사무를 매양 대신에게 물어 한결같이 열성(列聖)의 헌장(憲章)에 따라서 간난(艱難)을 크게 구제하기를 바라니, 너 중외의 대소 신료(臣僚)는 각각 너의 직책을 삼가하여, 힘써 나의 정치를 보좌해서 끝이 있도록 도모하기를 생각하라. 추은(推恩)의 법전과 연방(延訪)하는 조목과 합당히 행할 일들을 뒤에 조목조목 열거한다.
1. 경태(景泰) 3년48) 5월 18일 새벽녘 이전부터 모반(謀反)·대역(大逆)·모반(謀叛)과, 자손(子孫)으로서 조부모(祖父母)·부모(父母)를 모살(謀殺)·구매(毆罵)한 것과, 처첩(妻妾)으로서 남편을 모살한 것과, 노비(奴婢)로서 주인을 모살한 것과, 고의로 살인(殺人)한 것과, 고독(蠱毒)·염매(魘魅)한 것과, 다만 강도를 범한 것을 제외하고, 이미 발각되었거나 아직 발각되지 않았거나, 이미 결정(結正)되었거나 아직 결정되지 않았거나, 모두 용서하여 면제한다. 감히 유지(宥旨) 이전의 일을 가지고 서로 고하여 말하는 자는 그 죄로써 죄 주겠다.
1. 제도(諸道) 여러 고을의 인민들이 받은 의창(義倉)의 곡식은 각각 원수(元數)에서 3분의 1을 감하여 민생을 소생시킬 것.
1. 공처(公處)의 모실(耗失)·포흠(逋欠)51) ·일체의 추징(推徵)하는 물건은 모두 다 감면할 것.
1. 옥(獄) 속의 괴로움이란 하루를 한 해같이 지낸다. 원통하고 지체됨이 있어 혹 화기(和氣)를 상할까 염려되니, 모름지기 급히 신리(申理)하고 분변하여 오래 체류(滯留)하게 하지 말고, 그 중에 마땅히 가두어 두어야 할 자도 또한 좋게 보호하여 큰 추위와 더위·장마에 병이 나서 옥중에서 죽는 일이 없게 할 것.
1. 환과 고독(鰥寡孤獨)과 독폐잔질(篤廢殘疾)은 어진 정사의 우선되는 것이니, 중외의 유사(有司)는 곡진히 존휼(存恤)을 가하여 살 곳을 잃지 말게 할 것.
1. 효자(孝子)·절부(節婦)는 중외의 유사가 실적을 명백하게 갖추어 계달(啓達)하여 정표(旌表)에 빙거할 것.
1. 변방을 수비하고 농사에 힘쓰는 것을 제외하고 중외의 긴요하지 않은 공역(工役)과 일체의 부비(浮費)를 모두 다 정지하여 파할 것.
1. 부역(賦役)을 평균하게 하는 것은 민정(民政)의 중요한 일인데, 모든 차역(差役)하는 관리들이 과정(科定)하기를 한결같게 하지 못하여, 호부(豪富)하고 세력 있는 자는 구차히 면하고 고과(孤寡)가 오로지 그 괴로움을 받으니 내가 심히 불쌍하게 생각한다. 이제로부터 감히 전과 같이 불공평하게 하는 자가 있으면 감사(監司)가 규찰하여 다스릴 것.
1. 농상(農桑)과 학교(學校)는 왕정(王政)의 근본이니, 소재(所在)의 수령(守令)들은 허문(虛文)을 일삼지 말고, 독려하고 권과(勸課)하여 힘써서 실효를 보게 할 것.
1. 각도의 절제사(節制使)·처치사(處置使) 및 연변(沿邊)의 진수관(鎭守官)은 힘써 병마(兵馬)를 조련(操練)하고 군사를 무휼(撫恤)하며, 항상 조심스럽게 지키도록 노력하여 일체의 방어 사무를 감히 조금이라도 게을리 하지 말 것.
1. 감사(監司)는 법으로는 한 방면을 영솔하고 직책은 출척(黜陟)을 오로지 하니, 그 수령들이 위로하고 사랑하는 것이 방법에 어긋나고, 탐하고 방종하여 법대로 하지 않으며, 백성을 병들게 하고 다스림을 해치는 자는 거듭 규리(糾理)를 가할 것.
1. 내가 이제 어리고 학문이 성취되지 못하여 예전의 거상(居喪)하던 대로 예(禮)의 글을 읽음에 있어서, 비록 빈소 옆에 있더라도 학업을 폐하지 않고 항상 경연관(經筵官)과 더불어 함께 있으면서 상례(喪禮)를 읽고, 날마다 경연 대신과 같이 강론에 힘쓰겠다.
1. 고사(古事)의 정사가 모두 중국 서적에서 나왔는데, 하물며 내가 어리고 시위(施爲)에 어두우니 무릇 조치(措置)하는 것을 모두 정부(政府)·육조(六曹)와 더불어 의논하여 행하겠다.
1. 전에 육조에서 항상 직접 아뢰던 공사(公事)를 지금으로부터 모두 정부에 보고하여 계문(啓聞)해서 시행할 것.
1. 당상(堂上) 이상 관원과 대성(臺省) 정조(政曹)와 방어(防禦)에 긴하게 관계되는 연변(沿邊) 장수(將帥)와 수령의 제수는 모두 정부 정조(政曹)와 더불어 함께 의논하여 시행하고 그 나머지 3품 이하의 제수도 또한 모두 살피어 박의(駁議)하라. 무릇 제수에 관하여서는 내가 사사로이 가까운 자들은 쓰지 않고, 모두 공론대로 하겠다. 만일 특지(特旨)로 제수할 자가 있으면 반드시 모든 정부 대신에게 의논하여 모두 가하다고 말한 연후에 제수하겠다.
1. 대소 과죄(科罪)는 모두 정부에 내리어 의논한 연후에 내가 마땅히 친히 결단하겠고 감히 좌우의 사사로운 청으로 가볍게 하고 중하게 하지는 않겠다.
1. 이미 이루어진 격례(格例)나, 가하다 부하다 할 것이 없는 일체의 항상 행할 수 있는 잡사(雜事)를 제외하고 그 나머지 공사는 모두 승지(承旨)로 하여금 면대하여 아뢰게 할 것이며, 그 중에서도 다시 상량(商量)하고 가부(可否)할 일이 있으면 반드시 정부 대신과 더불어 친히 의논하여 결정하겠다.
1. 승정원(承政院)은 직책으로서 출납을 맡게 되는데 관계되는 일이 가볍지 않으니, 대소 인원들은 일체 사사로운 일은 아뢰지 말 것.
1. 언로(言路)54) 가 열리고 막히는 것은 이란(理亂)55) 에 관계되는 것이니, 대간(臺諫)이 일을 말하는 것과 여러 사람이 진언(陳言)하는 것을 아울러 받아들이고 말이 비록 맞지는 않더라도 또한 마땅히 너그러이 용납하겠다.
1. 대소 신료들이 사사로이 서로 붕비(朋比)56) 하여 공사를 폐하고 사사(私事)를 영위하거나 혹 망령되이 사설(邪說)을 일으켜서 시비를 어지럽게 하는 것은 공가(公家)에 이익될 것이 없고 자기에게도 손(損)이 있으니, 이것은 예나 지금이나 크게 경계하는 것이다. 만일 범하는 자가 있으면 반드시 죄 주고 용서하지 않겠다.
1. 군사[兵]를 맡은 대신의 집 군사는 진퇴시키지 못하고 한결같이 《육전(六典)》 에 의할 것이며, 어기는 자는 헌사(憲司)가 규리(糾理)할 것.
1. 이조(吏曹)·병조(兵曹)의 집정가(執政家)에 분경(奔競)57) 하는 것을 금하는 것은 이미 나타난 법령이 있지마는, 다만 서무(庶務)를 헤아려 의논하는 정부의 대신 및 귀근(貴近) 각처에서는 분경을 금하는 일이 없기 때문에, 무뢰(無賴)·한잡(閑雜)의 무리들이 사사로이 서로 가서 뵈옵는 폐단이 진실로 다단(多端)하니, 이제부터 이후로는 한결같이 집정가들의 분경하는 예에 의하여 시행하고 공사로 인하여 진퇴하는 것과 출사하는 자는 이 한계에 두지 않을 것.
1. 상례(常例)를 제외하고 무릇 특사할 일이 있으면 비록 작은 것이라도 반드시 정부에 의논한 뒤에 행할 것.
1. 대저 기교(奇巧)·완호(玩好)에 관계되는 물건은 진상하지 말고, 대소 신료가 식(式)에 의해 사은(謝恩)·하직(下直)·복명(復命)·문안(問安)하는 등의 일 외에 사사로운 일로 대궐에 나와 인연(因緣)으로 계달(啓達)하는 자는 반드시 유사에 붙이고 혹시라도 용서하지 말 것.
아아! 새로 천명을 받아 특별히 비상한 은혜에 젖었으니, 길이 기쁨을 누릴 것이며 무강한 복을 넓히기 바라노라.”
하였다. 처음에 제수하는 조목을 의논할 때에 겸판이조(兼判吏曹) 허후(許詡) 는 3품 이하를 모두 정부로 하여금 의논하여 정하려고 하였으나, 이조 참판(吏曹參判) 이계전(李季甸) 과 예문 제학(藝文提學) 정창손(鄭昌孫) 이 반박하였다. 이날에 위사(衛士)와 백관들은 모두 소리 없이 울었고 세조(世祖) 가 가장 비통해 하였다. 이용(李瑢) 은 승하한 뒤로부터 매양 대궐 뜰에 들어오면 기뻐하는 것이 얼굴빛에 나타났다. 상제(喪祭)에 곡림할 때 세조 께서 애통함이 지성에서 나오니 조신(朝臣)들로 바라보는 자는 눈물을 흘리지 않는 사람이 없었는데, 이용 만은 한 번도 참여하지 않고 술을 마시고 고기를 먹는 것이 평일과 다름이 없었다. 세조 가 사저(私邸)로 물러나와 자성 왕비(慈聖王妃) 와 더불어 서로 대하고 울어서 비통함이 지나쳐 기운이 막히니 약을 먹고 풀기까지 하였다. 세조 가 말하기를,
“대행(大行)의 은덕을 어떻게 다 말할 수 있으랴. 내마음을 다하기를 원할 뿐이다. 대행이 천성이 어질고 효도하여 사람들에게 대하여 신의가 두터워서 가볍게 절물(絶物)을 하지 않았다. 세종 의 상사 때 졸곡 후에 내가 본래 일을 다스리는 데 있어서 반드시 집에 있는 것을 좋아하지 않을 것이라 하여 항상 와서 시선(侍膳)할 것을 명하였고, 또 나더러 정대하고 충성하고 지식이 다른 사람보다 다르다 하여 항상 더불어 일을 논하였다. 일찍이 진법(陣法)을 만들었는데 말씀하기를, ‘ 이정(李靖) · 제갈량(諸葛亮) 인들 어찌 수양(首陽) 보다 나을까?’ 하였다. 또 일찍이 내궁에서 칭찬하기를, ‘ 수양 은 비상한 사람이야.’ 하였다. 대저 형제간에 우애하는 마음이 천성에서 나왔으니, 우리 형제가 이로써 감격하여 울기를 끝없이 하였다.”
하였다. 대행왕께서 병환이 위독하자 좌우에 말하기를,
“ 수양 이 보고 싶다.”
하였으나, 좌우에서 그릇 숙의(淑儀)로 알아듣고 마침내 부르지 않았는데, 대개 후사를 부탁하고자 함이었다.


세조 1455.+06.11(乙卯)
세조가 우의정(右議政) 한확(韓確) ·좌찬성(左贊成) 이사철(李思哲) ·우찬성(右贊成) 이계린(李季疄) ·좌참찬(左參贊) 강맹경(姜孟卿) 등과 더불어 의정부(議政府)로부터 대궐로 나아가서 병조판서(兵曹判書) 이계전(李季甸) ·이조판서(吏曹判書) 정창손(鄭昌孫) ·호조판서(戶曹判書) 이인손(李仁孫) ·형조판서(刑曹判書) 이변(李邊) ·병조참판(兵曹參判) 홍달손(洪達孫) ·참의(參議) 양정(楊汀) ·승지(承旨) 등과 같이 빈청(賓廳)에 모여 의논하기를,
“ 혜빈양씨(惠嬪楊氏) · 상궁박씨(尙宮朴氏) · 금성 대군(錦城大君) 이유(李瑜) · 한남군(漢南君) 이어(李) · 영풍군(永豊君) 이천(李瑔) ·동지중추원사(同知中樞院事) 조유례(趙由禮) ·호군(護軍) 성문치(成文治) 등이 난역(亂逆)을 도모하여 이에 참여한 일당(一黨)이 이미 많았으니 가볍게 할 수 없다.”
하였다. 이에 합사(合司)해 계청(啓請)하기를,
“ 금성대군(錦城大君)이 전의 일을 스스로 징계하지 아니하고 오히려 무사(武士)들과 은밀히 결탁하고 그 일당에게 후히 정을 베풀면서 다시 혜빈(惠嬪) ·상궁(尙宮) 등과 서로 결탁하여 그의 양모(養母) 의빈(懿嬪) 으로 하여금 혜빈궁(惠嬪宮)에 들어가 거처하게 하고 그 유모(乳母) 총명(聰明) 등을 시켜 은밀히 상시 왕래하여 왔고, 유(瑜) 도 또한 왕래하였으며, 또 상궁(尙宮)에게 계집종[婢]을 주고는 서로 통하며 안부를 전하여 왔습니다. 또 이 밖에도 한남군(漢南君) · 영풍군(永豊君) 및 정종(鄭悰) 등과 더불어 혜빈 ·상궁과 결탁하여 문종 조 때부터 궁내에서 마구 권세를 부려와 그 불법한 일은 이루 열거(列擧)할 수가 없습니다. 또 대신(大臣)과 종실들의 의논을 기다리지 않고 독단하여 의빈(懿嬪) 의 친척인 박문규(朴文規) 의 딸과 또 유(瑜) 처족인 최도일(崔道一)의 딸을 왕비(王妃)로 세우려다가 뜻을 얻지 못하고 드디어는 중궁(中宮)이 자기가 세운 바가 아니라 하여 온갖 계교로 이간(離間)하여 왔습니다. 또 정종 이 은밀히 혜빈 과 금성 대군 유(瑜)를 섬겨온 것은 온 세상이 다 아는 사실이며, 조유례(趙由禮) 도 역시 그들의 일당입니다. 신 등이 계달하려고 한 것이 이미 오래인데, 그 기세가 날로 심한즉 종사(宗社)의 대계를 생각하여 어찌 사사로운 정으로써 공공의 일을 폐하도록 하겠습니까? 청컨대 조속히 그 죄를 밝히고 바로 잡으소서.”
하니, 임금이 그대로 따라서 의금부에 명하여 혜빈양씨(惠嬪楊氏)를 청풍(淸風)으로, 상궁박씨(尙宮朴氏)를 청양(靑陽) 으로, 금성대군 유(瑜)를 삭녕(朔寧)으로, 한남군 이어(李)를 금산(錦山)으로, 영풍군 이천(李瑔)을 예안(禮安)으로, 정종을 영월(寧越)로 각각 귀양보내고, 조유례는 고신(告身)을 거두고 가두었다. 또 성문치(成文治)와 이예숭(李禮崇) · 신맹지(申孟之) · 신중지(申仲之) · 신근지(申謹之) · 신경지(申敬之) 의 고신을 거두고는 먼 변지로 떠나보내어 충군(充軍)하게 하였다. 환관(宦官) 전균(田畇)으로 하여금 한확(韓確) 등에게 전지하기를,
“내가 나이가 어리고 중외(中外)의 일을 알지 못하는 탓으로 간사한 무리들이 은밀히 발동하고 난(亂)을 도모하는 싹이 종식하지 않으니, 이제 대임(大任)을 영의정(領議政)에게 전하여 주려고 한다.”
하였다. 한확 등이 놀랍고 황공하여 아뢰기를,
“이제 영의정이 중외의 모든 일을 다 총괄하고 있는데, 다시 어떤 대임을 전한다는 것입니까?”
하여, 전균(田畇)이 이를 아뢰니, 노산군(魯山君)이 말하기를,
“내가 전일부터 이미 이런 뜻이 있었거니와 이제 계책을 정하였으니 다시 고칠 수 없다. 속히 모든 일을 처판(處辦)하도록 하라.”
하였다. 한확 등 군신들이 합사(合辭)하여 그 명을 거둘 것을 굳게 청하고 세조 또한 눈물을 흘리며 완강히 사양하였다. 전균이 다시 들어가 이러한 사실을 아뢰었다. 조금 있다가 전균 이 다시 나와 전교를 선포하기를, ‘상서사(尙瑞司) 관원으로 하여금 대보(大寶)를 들여오라는 분부가 있다.’고 하니, 모든 대신들이 서로 돌아보며 얼굴빛을 변하였다. 또 명하여 재촉하니 동부승지(同副承旨) 성삼문(成三問)이 상서사(尙瑞司)로 나아가서 대보를 내다가 전균 으로 하여금 경회루(慶會樓) 아래로 받들고 가서 바치게 하였다. 노산군이 경회루 아래로 나와서 세조를 부르니, 세조가 달려 들어가고 승지(承旨)와 사관(史官)이 그 뒤를 따랐다. 노산군이 일어나서니, 세조가 엎드려 울면서 굳게 사양하였다. 노산군이 손으로 대보를 잡아 세조 에게 전해 주니, 세조 가 더 사양하지 못하고 이를 받고는 오히려 엎드려 있으니, 노산군이 명하여 부액해 나가게 하였다. 세조가 이에서 나와 대군청(大君廳)에 이르니, 사복관(司僕官)이 시립(侍立)하고 군사들이 시위(侍衛)하였다. 의정부(議政府)에서 집현전 부제학(集賢殿副提學) 김예몽(金禮蒙) 등으로 하여금 선위(禪位)·즉위(卽位)의 교서(敎書)를 짓도록 하고 유사(有司)가 의위(儀衛)를 갖추어 헌가(軒架)를 근정전(勤政殿) 뜰에 설치하였다. 세조 가 익선관(翼善冠)과 곤룡포(袞龍袍)를 갖추고는 백관을 거느리고 근정전 뜰로 나아가 선위(禪位)를 받으니, 그 선위 교서(禪位敎書)에 이르기를,
“나 소자(小子)가 방가(邦家)의 부조(不造)57) 하지 못할 때를 당하여 어린 나이에 선왕의 대업을 이어받고 궁중 안에 깊이 거처하고 있으므로 내외의 모든 사무를 알 도리가 없으니, 흉한 무리들이 소란을 일으켜 국가의 많은 사고를 유발하였다. 숙부 수양 대군(首陽大君) 【 세조 의 휘(諱).】이 충의(忠義)를 분발하여 나의 몸을 도우시면서 수많은 흉도(兇徒)를 능히 숙청하고 어려움을 크게 건지시었다. 그러나 아직도 흉한 무리들이 다 진멸(殄滅)되지 않아서 변고가 이내 계속되고 있으니, 이 큰 어려움을 당하여 내 과덕한 몸으로는 이를 능히 진정할 바가 아닌지라, 종묘(宗廟)와 사직(社稷)을 수호할 책임이 실상 우리 숙부에게 있는 것이다. 숙부는 선왕의 아우님으로서 일찍부터 덕망이 높았으며 국가에 큰 훈로(勳勞)가 있어 천명(天命)과 인심의 귀의(歸依)하는 바가 되었다. 이에 이 무거운 부하(負荷)를 풀어 우리 숙부에게 부탁하여 넘기는 바이다. 아! 종친(宗親)과 문무의 백관, 그리고 대소의 신료(臣僚)들은 우리 숙부를 도와 조종(祖宗)의 아름다운 유명(遺命)에 보답하여 뭇사람에게 이를 선양할지어다.”
하였다. 노산군이 다시 좌승지(左承旨) 박원형(朴元亨)에게 명하여 태평관(太平館)으로 가서 명나라 사신에게 말하기를,
“내가 어린 나이로 즉위하니, 계유년에 안평 대군(安平大君) 이용(李瑢)이 반란을 꾀하여 숙부 수양대군(首陽大君)이 이 사실을 나에게 고하고 평정하였다. 그러나 그 남은 일당들이 아직도 존재하여 다시 궤도(軌道)에 벗어나는 일을 꾀하고 있으니, 이 어찌 유치한 내가 능히 진정할 바이겠는가? 수양 대군 은 종실(宗室)의 장(長)으로서 사직(社稷)에 공로가 있으니 중임(重任)을 부탁할 만하다. 이에 그로 하여금 국사를 임시 서리(署理)토록 하고 장차 이를 주문(奏聞)하겠다.”
하니, 명나라 사신이 말하기를,
“이는 곧 국가의 대사인데, 이제 그 유서(諭書)를 받으니 기쁩니다.”
하였다. 세조가 사정전(思政殿)으로 들어가 노산군을 알현(謁見)하고 면복(冕服)을 갖추고, 근정전(勤政殿) 에서 즉위(卽位)하였다. 한확(韓確) 이 백관을 인솔하고 전문(箋文)을 올려 하례하니, 그 전문에 이르기를,
“아래 백성이 도와 군왕이 되시니, 우러러 천명(天命)을 받으셨고, 큰 덕이 있어 그 보위(寶位)를 얻으시니, 굽어 인심에 순응하셨습니다. 무릇 이를 보고 듣는 자라면 그 누가 기뻐 도무(蹈舞)하지 않으리오. 공경히 생각하건대 총명(聰明) 예지(叡智)하시고 강건(剛健) 수정(粹精)하신 자품으로, 그 신성하신 문무의 재덕은 곧 큰 기업의 귀속하는 바가 되고, 그 위대하신 공렬(功烈)의 수립은 진정 중한 책임을 사양하기 어렵게 되셨습니다. 사직(社稷)이 안정을 얻으니 조야(朝野)가 모두 기뻐하고 있습니다. 신 등은 다같이 용렬한 자질로 다행하게도 경사로운 때를 맞아, 저 서기(瑞氣) 어린 해와 구름 속에 천명(天命)도 새로운 거룩한 성대(盛大)를 얻어 보고 태산(泰山) 과 반석(盤石) 같은 바탕에서 다시 무강(無彊)하신 큰 계책을 기대하는 바입니다.”
하였다. 이에 임금이 하교하기를,
“공경히 생각하건대 우리 태조(太祖)께서 하늘의 밝은 명을 받으시고, 이 대동(大東)의 나라를 가지셨고, 열성(列聖)께서 서로 계승하시며 밝고 평화로운 세월이 거듭되어 왔다. 그런데 주상 전하(主上殿下)께서 선업(先業)을 이어받으신 이래, 불행하게도 국가에 어지러운 일이 많았다. 이에 덕없는 내가 선왕(先王)과는 한 어머니의 아우이고 또 자그마한 공로가 있었기에 장군(長君)인 내가 아니면 이 어렵고 위태로운 상황을 진정시킬 길이 없다고 하여 드디어 대위(大位)를 나에게 주시는 것을 굳게 사양하였으나 이를 얻지 못하였고, 또 종친(宗親)과 대신(大臣)들도 모두 이르기를 종사(宗社)의 대계로 보아 의리상 사양할 수 없다고 하는지라, 필경 억지로 여정(輿情)을 좇아 경태(景泰) 6년59) 윤6월 11일에 근정전(勤政殿) 에서 즉위하고, 주상(主上)을 높여 상왕(上王)으로 받들게 되었다.
이렇게 임어(臨御)하는 초기를 당하여 의당 관대한 혜택을 베풀어야 할 것이므로 경태 6년 윤6월 11일 새벽 이전에 있었던 일로서 모반(謀反)과 대역(大逆) 모반(謀叛), 또 자손으로서 조부모 또는 부모를 모살(謀殺)하였거나 또는 구매(歐罵)60) 한 자, 처첩(妻妾)으로서 지아비를 살해한 자, 노비(奴婢)로서 주인을 모살(謀殺)한 자와 고의로 살인을 꾀한 자, 고독(蠱毒)61) ·염매(魘魅)한 자와 다만 강도(强盜)를 범한 자를 제외하고는, 이미 발각되었거나 아직 발각되지 않았거나 또는 이미 결정하였거나 아직 않았거나 모두 용 서하여 면제하며, 앞으로 감히 유지(宥旨) 전의 일을 가지고 서로 고하여 말하는 자가 있으면 그 죄로써 죄줄 것이다. 아! 외람되게도 중대한 부탁을 이어받으니 실상 두려운 걱정이 마음에 넘치는 바, 실로 두렵고 삼가는 마음으로 이에 큰 은혜를 널리 베풀어 경신(更新)의 치화(治化)를 넓히고자 하는 바이다.”
하였다. 예(禮)를 마치고 법가(法駕)를 갖추어 잠저(潛邸)로 돌아갔다. 종친과 문무백관(文武百官)·기로(耆老)·족친(族親)들이 중궁(中宮)에 하례(賀禮)를 드리니, 이를 받지 아니하였다. 이날 밤 이고(二皷) 무렵에 임금이 서청(西廳)에 임어하니 병조판서(兵曹判書) 이계전(李季甸) ·이조판서(吏曹判書) 정창손(鄭昌孫) ·도승지(都承旨) 신숙주(申叔舟) ·좌부승지(左副承旨) 구치관(具致寬) 등이 입시하였는데, 하동 부원군(河東府院君) 정인지(鄭麟趾)를 영의정(領議政)으로 삼았다.

세조 1468.09.08(甲子)
태상왕(太上王)이 수강궁(壽康宮)의 정침(正寢)에서 훙(薨)하였다.

세조 1468.11.28(갑신)
태상왕(太上王)을 광릉(光陵)에 장사지냈다. 그 애책문(哀冊文)은 이러하였다.
“유(維) 성화(成化) 4년 세차(歲次) 무자(戊子) 9월 정사삭(丁巳朔) 초8일 갑자(甲子)에 세조 승천 체도 열문 영무 지덕 융공 성신 명예 흠숙 인효 대왕(世祖承天體道烈文英武至德隆功聖神明睿欽肅仁孝大王)께서 정침(正寢)에서 훙(薨)하시어 이해 겨울 11월 28일 갑신(甲申)에 영좌(靈座)를 광릉(光陵) 에 옮기었으니, 예(禮)이었습니다. 용순(龍輴)을 조심스럽게 이끌고, 신로(蜃輅)가 길을 열어 진상(陳象)을 원침(園寢)에 설치하고, 허위(虛衛)8662) 에 지발(池綍)을 엄(儼)히 하매, 많은 백성들이 거리와 들에서 비오듯 울고, 만령(萬靈)이 요곽(寥廓)에서 바람처럼 호곡(號哭)합니다. 효자(孝子) 사왕(嗣王)은 땅을 쳐도 용납할 데가 없고, 하늘이 다하더라도 어찌 다하겠습니까? 계침(雞寢)이 영원히 어기는 것을 슬퍼하고, 봉어(鳳馭)를 더위잡으려 해도 미치지 못합니다. 난전(鸞殿)에서 윤음(綸音)을 내리어 휘유(徽猷)를 옥첩(玉牒)에 찬술(撰述)합니다.”
그 사(辭)는 이러하였다.
“선리(仙李)는 뿌리를 뻗고, 전조(傳祚)는 잎을 거듭하여 성계(聖繼)가 신령스럽게 이어지고, 중희 누흡(重熙累洽)하였으며, 태도(泰道)는 중미(中微)하였고, 둔운(屯運)을 마침 만나서 성한 가지가 그 사이에서 움트고, 신기(神器)를 비예(睥睨)하게 되었습니다. 세조(世祖) 께서 잠저(潛邸)에 계시니 종사(宗社)는 옳게 지키어지고, 지명(至明)은 밝은 징조를 보였으며, 대용(大勇)이 전체(電掣)하여 천보(天步)는 다시 편안하여졌습니다. 역수(曆數)에 매이는 바 되어 굳게 사양함을 얻을 수 없어서 대통(大統)을 입계(入繼)하시었습니다. 군웅(群雄)을 가어(駕馭)하시니 일세(一世)를 고무(鼓舞)케 하시고, 서정(庶政)을 정신(鼎新)하며, 옛 적폐(積弊)를 고쳤습니다. 성학(聖學)이 고명(高明)하고 도묘(道妙)가 묵계(默契)하여, 지나간 심전(心傳)을 계승하고, 《주역(周易)》 의 구결(口訣)을 정(定)하셨습니다. 숙유(宿儒)를 초연(招延)하여 전석(前席)에서 강론(講論)하게 하고 때로는 훈사(訓辭)를 저술하여 날로 세자의 덕을 이루게 하였습니다. 남교(南郊)에서 하늘에 제사 지내고, 태학(太學)에서 선비를 뽑으셨습니다. 밝게 깨끗이 세탁한 옷으로 검박하게 하시고 힘써 화식(華飾)을 배척하시었습니다. 초곤(椒壼)은 의례를 바르게 하고, 제악(棣萼)으로 은총을 넓게 하였으며 오형(五刑)은 오직 구휼로 하고, 태형(笞刑) 한대라도 그릇되는 것을 경계하여 원민(冤民)이 거의 없었고, 늙은이를 잘 봉양하였습니다. 대사(大事)는 군사에 있는 것이므로, 열무(閱武)에 주의(注意)하시고, 위장(衛長)·부장(部長)에게 명(命)하여 총관부(摠管府)를 두었으며, 선전(宣傳)하는 데에 관직(官職)을 설치하고, 《병장설(兵將說)》 을 저술(著述)하였으며, 장정(壯丁)을 호패(號牌)로 총괄하고 액수(額數)를 군적(軍籍)에 더했습니다. 동쪽으로 순행(巡行)하시고 남쪽으로 순행하시어 백성을 물부(物阜)로 편안하게 하고, 농잠(農蠶)을 먼저 하게 하여 부(富)를 창유(倉庾)에 쌓았습니다. 조과(條科)를 참작(參酌)하시어 전장(典章)을 늑성(勒成)하였고, 진교(眞敎)를 여사(餘事)로 하시어 도량(道場)에 공손히 예(禮)하니 천화(天花)가 낮에 내리고, 감로(甘露)가 밤에 내리어 협기(協氣)는 골고루 오르고, 정부(貞符)는 여러 번 빛났으며, 백록(白鹿)이 와서 깃들고, 청학(靑鶴)이 비상(飛翔)하였습니다. 위풍(威風)이 북쪽으로 떨치어 삭정(朔庭)이 드디어 비었고, 신화(神化)가 동쪽으로 번지어 항해(航海)하여 내동(來同)하였으며, 농금(隴禽)으로 입공(入貢)하고, 수흉(水兇)이 주석[錫]을 바쳤습니다. 지치(至治)의 형상은 오직 덕(德)으로 만물을 긴절(緊切)히 하시매 도둑은 공험(公險)에 의거하고 군사는 황지(潢池)를 희롱하며, 감히 건유(虔劉)를 함부로 하거나, 스스로 정휘(旌麾)를 옹립하면 장수에게 명(命)하여 깃발을 뽑아 버리고 납후(拉朽) 건영(建瓴) 하게 하시었습니다. 호로(胡虜)가 변방을 범하였을 때에 천자(天子)께서 군사를 부르시어 만군(萬軍)을 일제히 향하게 하매, 군추(群醜)가 이에 굴복하고, 삼위(三衛)를 혈도(穴擣)하여 부로(俘虜)를 구궐(九闕)에 바쳤습니다. 황제께서는 비적(丕績)을 가상(嘉尙)히 여기시어 예권(睿眷)을 더욱 윤택하게 하였으니 성덕(盛德)과 신공(神功)은 지금까지도 없었으며, 앞으로도 없을 것입니다. 억년의 장수(長壽)를 빌었고, 만민(萬民)의 아버지를 위하였는데, 어찌 의빙하여 이를 예상이나 하였겠습니까까? 재앙의 기운이 갑자기 궁궐을 찾아와 수레로 안출(晏出)하시니, 아아! 슬프도다. 성상은 본래 나면서부터 아셨고, 예(藝)와 재(材)가 많았으며, 오로지 한결같이 대(對)하시고, 넓게 관찰(觀察)하시어 대도(大度)가 더욱 더 넓고 커서 구우(區宇)를 확청(廓淸) 하셨습니다. 두 번이나 요에(妖曀)를 일소(一掃)하시매 훈충(勳忠)과 석보(碩輔)는 띠[帶]와 같고 숫돌[礪]과 같았습니다. 을야(乙夜)까지 여정(厲精)하시고 연익(燕翼)을 이모(貽謀) 하시어 태평(太平)이 이르도록 도모하셨고, 삼오(三五) 동안 만륭(娩隆)하시었습니다. 그 위(位)를 극간(克艱)하시어 14년 중 절선(節宣)하심에 어긋남이 있었고, 우로(憂勞)가 오래도록 쌓이어, 아직 대점(大漸)에 이르지 못하였을 때에 드디어 무거운 짐을 놓으시고, 한가히 거(居)하시어 이양(怡養)하시기를 바라셨고, 경조(慶祚)에서 영형(永亨)하시기를 바랐습니다. 아아! 금방(金方) 에 양약(良藥)이 효험이 없어서 이에 옥궤(玉几)에 말명(末命)이 잠깐 사이에 이르렀습니다. 아아! 슬프도다. 해[日]가 갑자기 잠기매 창을 휘둘러도 머물지 않고, 하늘이 무너지매 돌을 단련(鍛鍊)하여서라도 누가 보충하오리까? 정호(鼎湖) 에 활을 버림이요, 교산(橋山) 에서 빛을 거둔 것입니다. 상고(喪考)를 슬퍼하여 수레를 붙들고 호곡(號哭)하옵고, 유곡(孺哭)을 애통하여 오열(嗚咽)하옵니다. 아아! 슬프도다. 백운(白雲) 을 타시고 제향(帝鄕)으로 가시옵니까? 청조(靑鳥) 를 가려서 수원(壽原)으로 가시옵니까? 밤에 올리오니 경가(瓊斝) 이옵고, 새벽에 떠나오니 금근(金根) 이옵니다. 기성(綺城)의 애장(哀仗)을 벌리고 자교(滋橋)의 도헌(度幰)을 이끄니, 바람은 처초(悽楚)하여 산조(酸旐)를 불어오게 하고, 달은 참담(慘淡) 하여 고만(苦輓)을 흐느끼게 합니다. 선유(仙遊)를 우러러 보오매 표묘(縹緲)하옵고, 야대(夜臺) 를 다듬으매 격적(閴寂) 하옵니다. 아아! 슬프도다. 대덕(大德)이 반드시 장수하지 못하니, 교역(巧歷)을 능히 헤아릴 수 없고, 요명(窅冥) 의 이수(理數)를 맡기매 외탕(巍湯)한 공렬(功烈)을 높이 올립니다. 현양(玄壤)을 뒤로 하여 장존(長存)케 하옵고, 창궁(蒼穹)을 관(冠)하오니 망극(罔極)하옵니다. 아아! 슬프도다.”
그 지문(誌文)은 이러하였다.
“유명(有明) 조선국(朝鮮國) 세조 승천 체도 열문 영무 지덕 융공 성신 명예 흠숙 인효 대왕(世朝承天體道烈文英武至德隆功聖神名睿欽肅仁孝大王) 광릉(光陵) 이라 하였다.넓게 생각 하건대, 우리 세조 대왕(世祖大王) 의 성덕(盛德)과 대업(大業)은 외탕(巍湯)하고 혁탁(赫濯)하여 모두 명언(名言)할 수가 없으나 이제 경개(梗槪)를 대략 서술하여 현궁(玄宮)에 기록하는 데에 쓰고자 합니다. 삼가 살펴보건대 대왕(大王)은 세종(世宗) 의 제2자(第二子)로 소헌 왕후(昭憲王后) 심씨(沈氏) 가 영락(永樂) 15년 정유(丁酉) 9월 병자(丙子) 일에 탄생하셨습니다. 왕(王)은 영예(英睿)하시고 학문(學問)을 좋아하여 게을리하지 아니하였으므로 양궁(兩宮)께서 특별히 사랑하시어 진양 대군(晉陽大君) 으로 봉(封)하였다가 뒤에 수양대군(首陽大君) 으로 고쳤습니다. 정통(正統) 11년 병인(丙寅)에 소헌 왕후가 훙(薨)하고, 경태(景泰) 원년(元年) 경오(庚午)에 세종이 훙하니, 왕은 애훼(哀毁)하며 예(禮)를 다하시어 보는 자가 비감(悲感)하지 아니함이 없었습니다. 임신년에 문종(文宗) 이 훙하여 황제(皇帝)가 사신(使臣)을 보내어 시호(諡號)와 제문(祭文)을 내려 주었고, 또 사왕(嗣王)의 고명(誥命)을 내려 주었으므로 사왕은 왕을 보내어 표(表)를 받들고 중국 서울에 가서 진사(陳謝)하게 하였습니다. 계유년8721) 에 간신(姦臣)이 정사를 오로지하고 무리를 모아 불령(不逞)하게 변란(變亂)을 도모하므로, 왕이 사왕에게 고(告)하여 이들을 베고, 공훈(功勳)으로써 ‘분충 장의 광국 보조 정책 정란공신(奮忠仗義匡國輔祚定策靖亂功臣)’에 봉(封)해져 백관(百官)을 거느리어 정사를 돕고, 중외(中外)의 병마(兵馬)와 여러 군사를 모두 통솔하였습니다. 을해년 후6월(後六月)에 사왕이 유충(幼沖)하고 또 병이 있으므로 왕에게 선위(禪位)하였습니다. 왕은 이미 왕위에 이르러서는 아침부터 밤까지 근심하고 부지런하며 항상 농사를 권하고, 학교를 일으키며, 어진이를 구(求)하고, 군사를 기르는 것을 선무(先務)로 삼았으며, 하교(下敎)하여 백성의 장(長)이 된 자에게 돈독히 권려하였습니다. 7월에 적자(嫡子) 이장(李暲) 을 세워 세자(世子)로 삼고, 왕은 한위(捍衛)의 노고(勞苦)를 생각하여 좌익공신(佐翼功臣) 43인을 봉하였습니다. 천순(天順) 원년(元年)8724) 정축(丁丑)에 군신(群臣)이 존호(尊號)를 올리어 이르기를, ‘승천 체도 열문 영무(承天體道烈文英武)’라고 하였습니다. 가을 9월에 세자 이장(李暲) 이 병들어 졸(卒)하였으므로 시호(諡號)를 의경(懿敬) 이라 하사(下賜)하고, 금상(今上)을 세워 세자(世子)로 삼고서, 선성(先聖)을 배알(拜謁)하고 치주례(齒胄禮)를 행하였습니다. 왕은 매양 일을 당하면 반드시 비유(譬喩)를 원인(援引)하여 세자를 교회(敎誨)하고, 또 친히 훈사(訓辭) 1편을 저술(著述)하였는데 늘 변함없이 한결같은 덕을 가질 것[恒德], 신(神)을 공경하여 섬길 것[敬神], 간언을 받아들일 것[納諫], 참소를 막을 것[杜讒], 사람을 쓰는 일[用人], 사치하지 말 것[勿侈], 환관을 부리는 일[使宦], 형벌을 삼가는 일[愼刑], 문무(文武), 부모의 뜻을 잘 좇을 것[善述]의 열 가지 일을 항목(項目)으로 삼아 항상 이를 외우게 하였습니다. 문신(文臣)에게 명(命)하여 선조(先祖)의 가모(嘉謀)와 선정(善政)을 엮어서 이름을 《국조보감(國朝寶鑑)》 이라 이르고, 또 《동국통감(東國通鑑)》 을 찬술(撰述)하였는데, 모두 예단(睿斷)을 받은 것입니다. 무인년에 호패(號牌)의 법을 세웠고, 기묘년에 국학(國學)에 행행(行幸)하여 선성(先聖)을 배알(拜謁)하고 책사(策士)8728) 하였으며, 왕은 학자(學者)들의 사수(師授)가 분명(分明)치 못하고 사람마다 각각의 소견(所見)이 있는 것을 걱정하여 여러 선비들을 모아 오경(五經)의 동이(同異)를 논란(論難)하게 하고, 친(親)히 스스로 결정하였으므로 여러 가지 의심이 얼음 녹듯이 풀리었고, 또 《역학계몽요해(易學啓蒙要解)》 를 저술(著述)하여 학자를 이끌어 주셨습니다. 경진년에 왕(王)이 이르기를, ‘ 한(漢)나라 광무제(光武帝) 는 천하(天下)가 컸어도 오히려 이직(吏職)을 감손(減損)하여 열에 그 하나만을 두었는데, 나라는 작고 관리(官吏)가 많아서 먹는 것이 일보다 지나치니, 어찌 천록(天祿)을 무겁게 여기는 뜻이겠느냐?’하고 드디어 용관(冗官)8730) 백여 원(員)을 도태(陶汰)시켰습니다. 가을에 동여진(東女眞) 의 낭복아합(浪卜兒哈)이 반란을 꾀하므로 복주(伏誅)하고, 그 아들 아비거 가 당류(黨類)를 불러 모아 변어(邊圉)를 침요(侵擾)하므로 왕이 군사를 발(發)하여 이를 토평(討平)하였습니다. 겨울에 임금이 서쪽으로 순행하여 평양(平壤) 에 이르러, 책사(策士)하고 뜰에서 기애(耆艾)8732) 들을 잔치하였으며, 지나는 곳의 전조(田租)를 감하였습니다. 신사년에 명하여 제도(諸道)의 군적(軍籍)을 개수(改修)하게 하고, 평안도(平安道) 와 황해도(黃海道) 의 두 도는 백성의 사는 것은 드물고 넓었으므로 백성을 모아서 여기에 옮기고 10년을 급복(給復)8734) 하였습니다. 계미년8735) 에는 교지(敎旨)를 내리어 장수를 구(求)하며 벼슬이 낮거나 높거나 친척이거나 인척이거나에 구애되지 말고 재행(才行)을 기록하여 계문(啓問)하게 하였습니다. 왕은 융사(戎事)8736) 에 열심히 하여 매달 두 번씩 진(陣)을 사열(査閱)하고, 춘추(春秋)로 강무(講武)하였으며, 스스로 《병장설(兵將說)》 등을 제술(製述)하여 여러 장수를 훈려(訓勵)하였습니다. 매양 장사(將士)에게 말하기를, ‘무(武)를 하면서 문(文)을 하지 아니하면 장수가 아니다.’ 하고, 드디어 돈독히 권려함을 더하니 무릇 행간(行間)에 있으면서도 독서(讀書)를 하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 성화(成化) 원년(元年) 을유년 가을에 남쪽으로 순행하여 온양(溫陽) 에 이르러 책사(策士)와 양로(養老)하기를 서쪽 순행의 예(禮)와 같이 하였습니다. 병술년에는 왕이 누조(累朝)에서 입법(立法)한 것의 과조(科條)가 진실로 번거롭고 상완(商琬)이 손익(損益)되었다 하여 《경국대전(經國大典)》 을 정(定)하여 만드셨고, 또 경비(經費)가 의거할 데가 없으므로 공부(貢賦)가 고르지 못하였으므로 규식(規式)을 상정(詳定)하였으니, 이에 괸리(官吏)들이 쉽게 봉행(奉行)할 수 있게 되었고, 민폐(民弊)를 모두 덜어주었습니다. 동쪽으로 순행하여 강릉(江陵) 에 이르러 책사(策士)하고, 포흠(逋欠)을 견면해 주고서, 전조(田租)를 감해주었습니다. 정해년8741) 에 함길도(咸吉道) 사람 이시애(李施愛)가 절도사(節度使) 등을 교살(矯殺)하고 백성을 꾀어 반란(反亂)을 일으켰으므로, 장수에 명(命)하여 이를 토평(討平)하고, 군사가 돌아오자 장수(將帥)와 사졸(士卒)에게 상(賞)을 주기를 차등(差等)이 있게 하고, 적개공신(敵愾功臣) 45인을 봉하였습니다. 가을 8월에 중국 황제(皇帝)가 사신(使臣)을 보내어 건주 삼위(建州三衛)의 여러 오랑캐를 공벌(攻伐)하는 데에 군사를 도와줄 것을 청하자, 왕은 장수에게 명(命)하여 군사 1만 명(名)을 거느리고 파저강(婆豬江) 올미부(兀彌府) 의 여러 채(寨)를 격파(擊破)하고 부로(俘虜)를 바치니, 황제께서 중사(中使)를 보내어 포장(褒奬)을 하면서 상(賞)을 내리어 준 것이 넉넉하고 후하였는데, 여러 장수에게도 각각 하사(下賜)가 있었습니다. 무자년8742) 9월 8일(갑자)에 임금이 병으로 수강궁(壽康宮) 의 정침(正寢)에서 훙(薨)하시니, 향년(享年) 52세였고, 재위(在位)한 지는 14년이었습니다. 왕은 예지롭고 영의(英毅)하시며, 관간(寬簡)하고 인검(仁儉)하시며, 용력(勇力)은 세상을 뒤덮을 만하였고, 학문(學問)에는 내전(內典)과 제가(諸家)를 두루 꿰뚫으시고, 또한 몸소 연구하지 않음이 없었으며, 일을 처리하는 데는 정대(正大)하고, 말 한 마디와 한 가지 동작도 간연(間然)한 것이 없었습니다. 제부(諸父)를 공경스럽게 섬기고, 여러 형제들은 우애(友愛)롭게 하여 모두 기뻐하였습니다. 규위(閨闈)8745) 는 옹목(雍睦)하게 하고, 명분(名分)을 정숙(正肅)하게 하였으며, 선민(先民)8746) 을 돈박(敦朴)하게 여기고, 몸에는 세탁한 옷을 입었으며, 궁인(宮人)은 다만 쇄쇄(灑灑)할 사람만 갖추고 나머지는 모두 내어 보냈습니다. 날마다 대신(大臣)을 인견(引見)하여 치도(治道)를 자방(咨訪)하거나 혹은 유아(儒雅)에 미치기도 하시었으며, 역대(歷代)의 치란(治亂)의 자취를 상론(尙論)하기도 하고, 도학(道學)의 깊은 뜻을 강명(講明)하기도 하여, 미미(亹亹)하며 피로를 잊으셨으며, 혹은 야분(夜分)에 이르러서야 겨우 파(罷)하였습니다. 정사에 다스리는 데에는 여정(勵精)하시고, 하루하루를 삼가하셨으며, 공(功)을 높이시고, 어진이를 숭상하였으며, 삿된 자를 내치고, 아첨하는 자를 멀리하였으며, 상(賞)을 주는 것을 믿음있게 하고 벌(罰)주는 것을 밝게 하였습니다. 백성에게 적축(積蓄)하기를 권하고, 요역(徭役)을 가볍게 하였으며, 거두는 것을 박하게 하고 부비(浮費)를 태거(汰去)하여 재용(財用)을 절약함으로써 수년이 되지 않는 사이에 부고(府庫)는 가득차고 민물(民物)은 은부(殷阜)하였습니다. 매양 감사(監司)와 수령(守令)에게 거듭 경계하고, 혹은 사자(使者)를 보내시어 염문(廉問)하기도 하였으며, 조신(朝臣)과 외보자(外補者)에게 모두 폐사(陛辭)8747) 를 허락하고, 분우(分憂)의 뜻을 면전에서 개유하여 성효(成效)를 책(責)하였습니다. 다스림에 있어서 남달리 재능이 있는 자는 관질(官秩)을 더하여 넉넉히 포상(褒賞)하고, 혹 어탈(漁奪)하거나 남형(濫刑)하는 자는 비록 세세(細細)한 일이라도 용서하지 않았으며, 준이(俊異)한 선비를 찾아 모아 작은 선(善)이나 한 가지의 재주가 있으면 모두 기록하였다가 왕왕(往往)히 불차(不次)로 탁용하였습니다. 선비를 만나서 한번 안색(顔色)을 보면 폐부(肺腑)까지 통조(洞照)하시어 뒤에 어질고 그렇지 못함을 말하시는데 하나도 맞히지 않음이 없었습니다. 환과(鱞寡)를 혜선(惠鮮)하고 널리 묻고 찾아서 민은(民隱)을 구(求)하는 데에 힘쓰니 전리(田里)에 원통함을 품은 자가 없었습니다. 14년 동안 하늘을 공경하고 백성을 다스리는 데에 부지런히 하였는데 한결같이 지성(至誠)에서 나왔습니다. 사대(事大)와 교린(交隣)에 있어 모두 그 도리를 다하여, 섬의 오랑캐와 산(山)의 오랑캐가 진귀한 물건을 받들고 성심으로 복종하며 멀리서 이르지 않는 자가 없었으니, 동방(東方)의 다스림이 이로써 성(盛)하게 되었습니다. 백성은 어리거나 크거나를 막론하고 영원히 오래 살기를 크게 바랐는데 호천(昊天)이 부조(不弔)하여 팔음(八音)이 갑자기 그쳤으니, 애통(哀痛)함을 이길 수 있겠습니까? 궤(几)에 기대어 〈훙하기〉 하루 전에 왕은 옥쇄(玉璽)를 금상 전하(今上殿下)에게 전(傳)하시고, 후사(後事)를 유명(遺命)하시어 모두 검약(儉約)에 따르도록 하시니 금상(今上)께서는 양음(亮闇)에 예(禮)를 다했으며, 군신(群臣)을 거느리고 시호(諡號)을 올리기를, ‘ 승천 체도 열문 영무 지덕 융공 성신 명예 흠숙 인효(承天體道烈文英武至德隆功聖神明睿欽肅仁孝)’라 하고, 묘호(廟號)를 세조(世祖) 라 했습니다. 11월 28일(갑신)에 양주(楊州) 치소(治所) 아래의 동쪽 풍양현(豐壤縣) 직동(直洞) 언덕에 장사 지내고 이름하기를, ‘광릉(光陵)’이라 하였습니다. 아아! 글에서는 성신(聖神) 문무(文武)하시고, 역(易)에는 강건(剛健) 수정(粹精)하시며, 시(詩)에는 명류 장군(明類長君)이시니, 우리 세조 대왕(世祖大王)께서는 실로 이를 겸(兼)하였습니다. 태비(太妃) 윤씨(尹氏) 는 파평(坡平)의 세가(世家)인 증 좌의정(贈左議政) 윤번(尹璠)의 딸인데, 성상(聖上)의 배필(配匹)이 되시어 덕(德)을 길러 2남(二男) 1녀(一女)를 탄생하였으니, 맏이는 의경 세자(懿敬世子)며 다음은 우리 전하(殿下)이시며, 딸은 의숙 공주(懿淑公主)입니다. 세조(世祖)는 처음에 전하(殿下)를 상당군(上黨君) 한명회(韓明澮)의 여식(女息)에게 장가들게 하여서 빈(嬪)으로 삼으니 아들 하나를 낳았는데, 빈과 아들이 모두 먼저 죽었고, 또 청천군(淸川君) 한백륜(韓伯倫)의 딸에게 장가들게 하여 아들 둘과 딸 하나를 낳았는데, 다 어리고, 아들 하나는 먼저 죽었습니다. 세조가 이미 왕위를 전하에게 전하고, 봉하여 비(妃)를 삼도록 명(命)하였습니다. 의경세자는 처음에 도원군(桃原君)에 봉해졌으며 우의정(右議政) 한확(韓確)의 딸에게 장가들어 아들 둘을 낳았으니, 맏이는 이정(李婷)이라 하며 월산군(月山君)에 봉해졌고, 병조판서(兵曹判書) 박중선(朴仲善)의 딸에게 장가들었으며, 다음은 【금상의 휘.】인데 자을산군(者乙山君)에 봉해졌고 한명회의 차녀(次女)에게 장가들었으며, 딸은 승빈(承賓) 홍상(洪常)에게 시집가고, 의숙 공주는 하성군(河城君) 정현조(鄭顯祖)에게 시집갔으며, 귀인(貴人) 박씨(朴氏)가 아들 둘을 낳았으니, 맏이는 이서(李曙)라 하는데, 덕원군(德源君)에 봉하였고, 다음은 이성(李晟) 이라 하는데 창원군(昌原君)에 봉하였습니다. 덕원군은 사직(司直) 김종직(金從直)의 딸에게 장가들어 아들 둘과 딸 하나를 낳았는데 모두 어립니다.”

세조 1468.09.07(癸亥)
세조가 수강궁(壽康宮)으로 이어(移御)하였다. 병이 점점 위중하니, 예조판서 임원준(任元濬)을 불러서 전교하기를,
“내가 세자에게 전위(傳位)하려 하니, 모든 일을 준비하라.”
하니, 임원준이 나가서 하동군(河東君) 정인지(鄭麟趾) · 고령군(高靈君) 신숙주(申叔舟) · 상당군(上黨君) 한명회(韓明澮) · 능성군(綾城君) 구치관(具致寬) ·좌의정(左議政) 박원형(朴元亨) · 인산군(仁山君) 홍윤성(洪允成) · 산양군(山陽君) 강순(康純) · 창녕군(昌寧君) 조석문(曹錫文) ·우의정(右議政) 김질(金礩) ·좌찬성(左贊成) 김국광(金國光)에게 고하였다. 정인지 등이 아뢰기를,
“성상의 병환이 점점 나아가시는데 어찌하여 갑자기 자리를 내어 놓으려고 하십니까? 신 등은 옳지 못하다고 생각합니다.”
하므로 임원준이 이를 아뢰니, 世祖가 노하여 말하기를,
“운(運)이 다하면 영웅도 마음대로 못하는데 너희들이 나의 하고자 하는 뜻을 어기니, 이는 나의 죽음을 재촉하는 것이다.”
하고, 내시(內侍)로 하여금 면복(冕服)5) 을 가져오게 하여 친히 세자에게 내려 주니, 세자가 굳이 사양하였으나 할 수 없었다. 임원준 이 임금의 뜻을 돌이키지 못할 것을 알고 나가서 여러 재추(宰樞)에게 고하고, 백관을 모아서 의위(儀衛)를 갖추었으며, 날이 저물자 세자가 수강궁(壽康宮) 중문(中門)에서 즉위(卽位)하였다. 백관들이 하례하고 경내(境內)를 사유(赦宥)하였는데, 그 교서(敎書)는 이러하였다.
“내가 덕이 부족한 몸으로서 일찍이 세자의 자리에 있어 오직 뜻을 공경히 이어 받들지 못함을 두려워하였는데, 성화(成化) 4년6) 9월 초7일에 부왕(父王) 전하께서 명을 내리시기를, ‘내가 병이 들어 오랫동안 정사를 보지 못하여 만기(萬幾)의 중함을 생각하니, 더욱 마음에 병이 된다. 너에게 중기(重器)7) 를 부탁하고 한가롭게 있으면서 병을 잘 조리하겠다.’ 하시기에, 내가 두세 번 굳이 사양하였으나 할 수 없어서 승락하고, 이날에 마지못해 대위(大位)에 올랐다. 부왕을 높여서 태상왕(太上王) 으로 하고 모비(母妃)를 왕태비(王太妃)로 하며, 오직 군국(軍國)의 중한 일은 승품(承稟)8) 하여 행하겠다. 돌아보건대 나의 작은 몸으로 큰 자리를 이어받아 근심하고 두려워하여 오직 조심하였을 뿐인데, 여러 신하들의 한 마음으로 도움에 힘입어 어렵고 큰 명(命)을 저버림이 없기를 바란다. 이 처음 일을 당하여 너그럽고 어짐을 펴는 것이 마땅하므로, 이달 초7일 매상(昧爽) 이전으로부터 십악(十惡)과 강도(强盜)를 제외하고는 모두 용서하여 면제한다. 아아! 이미 무궁한 역수(歷數)를 이었으니, 여러 신민과 함께 새로와질 것이다.”
<십악(十惡) : 《대명률(大明律)》에 정한 열 가지의 큰 죄. 《당률소의(唐律疏義)》에 의하면, 모반(謀反)·모대역(謀大逆)·모반(謀叛)·악역(惡逆)·부도(不道)·대불경(大不敬)·불효(不孝)·불목(不睦)·불의(不義)·내란(內亂)을 말하는데, 사유(赦宥)에서 제외되었음>
睿宗 8卷, 1年(1469.11.28(戊申)
己丑 / 명 성화(成化) 5年) 11月 28日 4번째기사
辰時에 임금(예종)이 자미당에서 薨하다
예종 1469.11.28(무신)
임금이 즉위하고 대행대왕이 승하(昇遐)한 것을 종묘(宗廟)·영녕전(永寧殿)·영창전(永昌殿)·사직(社稷)에 고하였다.

성종 1469.11.28(무신)
왕이 경복궁(景福宮) 에서 즉위(卽位)하였다. 이날 예종(睿宗) 께서 병세(病勢)가 위독(危篤)하니, 고령군(高靈君) 신숙주(申叔舟) · 상당군(上黨君) 한명회(韓明澮) · 능성군(綾城君) 구치관(具致寬) · 영성군(寧城君) 최항(崔恒) ·영의정 홍윤성(洪允成) · 창녕군(昌寧君) 조석문(曺錫文) ·좌의정 윤자운(尹子雲) ·우의정 김국광(金國光) 이 사정전(思政殿) 문 밖에 모였다. 진시(辰時)에 예종(睿宗) 이 훙서(薨逝)하니, 대비(大妃)가 내관(內官) 안중경(安仲敬) 에게 명하여 나가서 신숙주 및 도승지(都承旨) 권감(權瑊) 을 불러 들어오게 하였다. 조금 후에 신숙주 등이 밖으로 나가서 여러 원상(院相)4) 및 승지 이극증(李克增) · 윤계겸(尹繼謙) · 한계순(韓繼純) · 정효상(鄭孝常) · 이숭원(李崇元) 과 더불어 의논하여 병조(兵曹)로 하여금 여러 위(衛)의 군사를 거느리고서 대궐의 안팎 문과 마땅히 숙위(宿衛)해야 할 곳을 근엄(謹嚴)하게 지키도록 하였다. 대궐에 입직(入直)한 도총관(都摠官) 노사신(盧思愼) 도 또한 부름을 받고서 이르렀다. 신숙주 가 권감(權瑊)에게 이르기를,
“국가의 일이 이 지경에 이르렀으니, 상주(喪主)를 마땅히 서둘러 품달(稟達)해서 결정해야 될 것이오.”
하고는, 하성군(河城君) 정현조(鄭顯祖)로 하여금 대비(大妃)에게 아뢰게 하기를,
“마땅히 상주(喪主)부터 먼저 정하여야 할 것인데, 큰 일을 중사(中使)에게 전하여 아뢰게 할 수는 없으니, 청컨대 직접 품달(稟達)하게 하소서.”
하므로, 정현조(鄭顯祖) 가 대궐에 들어가서 아뢰었는데, 교지(敎旨)를 받들어 갔다 왔다 한 것이 너더댓 번 되었다. 한참 있다가 대비(大妃)가 강녕전(康寧殿) 동쪽 편실(便室)에 나와서 신숙주 등과 권감(權瑊)을 불러서 들어오게 하였다. 대비가 얼마간 슬피 울고 나서 정현조(鄭顯祖)와 권감에게 명령하여 여러 원상(院相)에게 두루 묻기를,
“누가 주상(主喪)할 만한 사람인가?”
하니 신숙주 등이 말을 같이하여 아뢰기를,
“이 일은 신(臣) 등이 감히 의논할 바가 아닙니다. 교지(敎旨)를 듣기 원합니다.”
하였다. 대비가 말하기를,
“원자(元子)는 바야흐로 포대기 속에 있고, 월산군(月山君)은 본디부터 질병이 있다. 자산군(者山君)은 비록 나이는 어리지마는 세조(世祖)께서 매양 그의 기상과 도량을 일컬으면서 태조(太祖)에게 견주기까지 하였으니, 그로 하여금 주상(主喪)하게 하는 것이 어떻겠는가?”
하니 신숙주 등이 대답하기를,
“진실로 마땅합니다.”
하였다. 의논이 마침내 정해지자 대비가 목이 메어 울면서 슬픔을 견디지 못하니, 신숙주 가 앞으로 나아가 아뢰기를,
“국가의 액운(厄運)이 이 지경에 이르게 된 것은 어찌할 수가 없는 것이오니, 원컨대 종사(宗社)를 생각하시어 지극한 정리(情理)는 조금 억제하시고 사군(嗣君)을 잘 조호(調護)하여 기업(基業)을 보전하게 하소서.”
하였다. 또 아뢰기를,
“신(臣) 등은 밖으로 나가지 않고 사정전(思政殿) 뒷뜰에 남아서 여러 가지 일을 의논하겠습니다.”
하고는, 드디어 뒷뜰로 나아갔다. 신숙주가 최항(崔恒)과 더불어 같이 교서(敎書)를 찬술(撰述)하고, 또 위사(衛士)를 보내어 자산군(者山君) 을 맞이하려고 했는데, 미처 아뢰기 전에 자산군(者山君)이 이미 부름을 받고서 대궐 안에 들어왔다. 드디어 승지 한계순(韓繼純)을 보내어 내관(內官) 3인, 겸사복(兼司僕) 10인과 오장 차비인(烏杖差備人)을 보내어 자산군 부인(者山君夫人) 한씨(韓氏)를 그 사제(私第)에서 맞이해 왔다. 신숙주 등이 대비(大妃)에게 같이 정사(政事)를 청단(聽斷)하기를 청하니, 대비가 전교(傳敎)하기를,
“내가 복이 적어서 이러한 자식(子息)의 흉사(凶事)를 당했으므로, 별궁(別宮)으로 나아가 스스로 보양(保養)하려고 한다. 더구나 나는 문자(文字)를 알지 못해서 정사(政事)를 청단(聽斷)하기가 어려운데, 사군(嗣君)의 어머니 수빈(粹嬪)은 글도 알고 또 사리(事理)도 알고 있으니, 이를 감당할 만하다.”
하였다. 신숙주 등이 아뢰기를,
“온 나라 신민(臣民)의 소망(所望)이 이와 같으니, 힘써 따르시기를 원합니다.”
하니 대비가 사양하기를 두세 번이나 하였다. 신숙주 등이 굳이 이를 청하고, 이내 장계(狀啓)를 올리기를,
“신(臣) 등이 가만히 생각하건대, 국가가 하늘의 노(怒)함을 만나서 화환(禍患)이 서로 잇따르게 되어 세조 대왕(世祖大王)께서 향년(享年)이 장구하지 못하였고, 지금 또 대행 대왕(大行大王)께서 갑자기 제왕의 자리를 떠나시게 되었으며, 사왕(嗣王)이 나이가 어리니 온 나라 신민(臣民)은 허둥지둥하면서 어찌할 바를 모르고 있습니다. 엎드려 생각하건대, 자성 왕대비 전하(慈聖王大妃殿下)께서는 슬픈 정리(情理)를 조금 억제하시고, 종사(宗社)의 소중함을 깊이 생각하시어 위로는 옛날의 전례(典禮)를 생각하시고, 아래로는 여러 사람의 심정(心情)을 따라서 모든 군국(軍國)의 기무(機務)를 함께 들어 재단(裁斷)하여 사군(嗣君)이 능히 스스로 정사(政事)를 총람(摠攬)하기를 기다려 환정(還政)하시면 매우 다행하겠습니다.”
하니 대비(大妃)가 이를 허락하였다. 전교(傳敎)하기를,
“지금 국가에는 일이 많아서 용도(用度)가 대단히 많이 들게 되니, 상장(喪葬)의 여러 가지 수용(需用)은 중국 물건을 쓸 필요가 없다. 그것은 우리나라에서 쉽게 준비할 물건으로 이를 대체(代替)시키라.”
하였다. 원상(院相) 등이 아뢰기를,
“동소(東所)·남소(南所)·서소(西所)에 입직(入直)한 위장(衛將)은 각기 그 방위(方位)에 따라 궁성(宮城)의 여러 문(門)을 지키도록 하소서.”
하니 전교(傳敎)하기를,
“좋다.”
하였다. 미시(未時)에 거애(擧哀)하니, 종친(宗親)과 문무백관(文武百官)들이 근정전(勤政殿) 뜰에 나아가서 곡림(哭臨)하였다. 대비(大妃)가 교서(敎書)를 내리기를,
“아아, 하늘이 돌보아 주지 않고 우리 왕가(王家)에 재앙을 내리어 세조 대왕(世祖大王)께서 향년(享年)이 장구하지 못하니, 사왕(嗣王)이 부왕(父王)의 승하(昇遐)를 슬퍼하다가 병을 얻어 갑자기 일어나지 못하게 되었다. 화환(禍患)이 서로 잇닫게 되니, 몹시 슬픈 형상을 이루 말하겠는가? 내가 생각하건대, 대위(大位)는 잠시 동안이라도 비워 둘 수는 없는데, 사왕(嗣王)의 아들은 바야흐로 포대기 속에 있고 또 본디부터 병에 걸려 있으며, 세조(世祖) 의 적손(嫡孫)으로는 다만 의경 세자(懿敬世子)의 아들 두 사람이 있으나, 월산군(月山君) 이정(李婷)은 어릴 때부터 병이 많고, 그 동모제(同母弟) 자산군(者山君) 이혈(李娎)은 재질(才質)이 준수(俊秀)하여 숙성(夙成)하였으므로, 세조(世祖)께서 매양 자질과 도량이 보통 사람보다 특별히 뛰어났음을 칭찬하면서 우리 태조(太祖)에게 견주기까지 하였다. 지금 나이가 점차 장성하여 학문이 날로 진보(進步)되어서 큰일을 맡길 만하다. 이에 대신(大臣)들과 의논하니 대신들도 말을 같이하여, ‘진실로 여러 사람의 희망에 부합(符合)합니다.’ 하므로, 이에 이혈(李娎)을 명하여 왕위(王位)를 계승하도록 한다. 〈국가의〉 존망(存亡)을 감념(感念)하건대, 마음이 놓이지 않는다. 그대들 대소 신료(大小臣僚)는 내 뜻을 잘 본받아서 힘을 다하여 좌우에서 보좌하라. 아아, 슬프다.”
하였다. 백관(百官)들이 나가니, 여러 원상(院相)들이 의논하여 아뢰기를,
“사군(嗣君)이 성복(成服)한 후에 즉위(卽位)하는 것이 전례(前例)이지마는, 지금은 이와 같이 할 수가 없으니, 마땅히 먼저 즉위(卽位)하여 인심(人心)을 안정시켜야 할 것입니다.”
하니 대비(大妃)가 전교(傳敎)하기를,
“좋다.”
하였다. 신시(申時)에 임금이 면복(冕服)을 갖추고 근정문(勤政門)에 나가서 즉위(卽位)하니, 문무백관(文武百官)들이 조복(朝服)을 갖추고 하례(賀禮)를 올렸다. 이에 교서(敎書)를 내리기를,
“생각건대, 우리 국가가 큰 명령을 받아서 열성(列聖)이 서로 계승하였는데, 하늘이 돌보아 주지 않아 세조 대왕(世祖大王)께서 갑자기 제왕의 자리를 떠나시니, 대행 대왕(大行大王)7) 께서도 슬퍼하다가 병이 되어 마침내 세상을 떠나시게 되었다. 태비(太妃) 자성 흠인 경덕 선열 명순 원숙 휘신 혜의 전하(慈聖欽仁景德宣烈明順元淑徽愼惠懿殿下)께서 나에게 명하여 왕위(王位)를 계승하도록 하셨으므로, 굳이 사양타 못하여 마침내 대위(大位)에 나아가게 되었다. 자성 왕대비(慈聖王大妃) 를 높여서 대왕대비(大王大妃)로 삼고, 대행왕비(大行王妃)를 높여서 왕대비(王大妃)로 삼는다. 지금 사위(嗣位)한 처음에 당했으니, 마땅히 관대(寬大)한 은전(恩典)을 펴야만 할 것이다. 이제부터 11월 28일 이른 새벽 이전의 모반(謀反)과 대역 모반(大逆謀叛), 자손(子孫)이 조부모(祖父母)와 부모(父母)를 모살(謀殺) 또는 구매(敺罵)8) 한 것, 처첩(妻妾)이 남편을 모살(謀殺)한 것, 노비(奴婢)가 주인을 모살(謀殺)한 것, 고독(蠱毒)9) ·염매(魘魅) ·모고살인(謀故殺人)한 것이나, 다만 강도(强盜)를 범한 것을 제외하고는, 이미 발각(發覺)되었거나 발각되지 않았거나, 이미 결정(決正)되었거나 결정되지 않았거나, 이를 모두 사면(赦免)할 것이니, 감히 유지(宥旨) 전의 일을 가지고 서로 고언(告言)하는 사람은 그 죄로써 죄줄 것이다. 관직에 있는 사람은 각기 1계급을 올려 주고, 직첩(職牒)을 회수당한 사람은 돌려주며, 도형(徒刑)·유형(流刑)·부처(付處)·정속(定屬)된 사람은 죄의 경중(輕重)을 분변하여 석방(釋放)할 것이다. 내가 어린 몸으로 외롭게 상중(喪中)에 있으니 어찌할 바를 모르겠다. 그대들 대소 신료(大小臣僚)는 마음과 힘을 합하여 나의 미치지 못한 점을 보좌하여, 나로 하여금 우리 조종(祖宗)을 욕되게 하는 일이 없도록 하고, 우리 사직(社稷)을 영구히 보전하도록 하라.”

성종 1494.12.23(甲寅)
영의정(領議政) 이극배(李克培) 등을 명하여 부르도록 하고, 전교하기를,
“정승(政丞)들은 비록 밤이라고 하더라도 물러가지 말고 승정원(承政院)에 머물면서 세자(世子)와 일을 의논하라.”
하였다.
미시(未時)에 명하여 파평 부원군(坡平府院君) 윤필상(尹弼商) ·영의정(領議政) 이극배(李克培) ·좌의정(左議政) 노사신(盧思愼) ·우의정(右議政) 신승선(愼承善) ·영돈녕(領敦寧) 윤호(尹壕)를 부르게 하였는데, 윤필상 등이 이르자, 전교하기를,
“내가 경 등을 오랫동안 보지 못하였으므로, 이에 인견(引見)하고 겸하여 병증(病證)을 보이려고 한다.”
하였다. 승정원(承政院)에서 아뢰기를,
“승지(承旨)와 주서(注書)·사관(史官)이 따라 들어가기를 청합니다.”
하니, 전교하기를,
“도승지(都承旨)만 들어오라.”
하였다. 신시(申時)에 윤필상 · 이극배 · 노사신 · 신승선 · 김응기(金應箕) 등이 침전(寢殿)에 들어가니, 임금이 곤룡포(袞龍袍)를 입고 앉았고, 세자(世子)와 한 소환(小宦)이 모시고 있었다. 임금이 말하기를,
“이 병은 내가 처음에 대수롭게 여기지 아니하였는데, 점점 음식을 먹지 못하여 살이 여위어졌다.”
하자, 이극배가 아뢰기를,
“원하건대 성상께서는 공사(公事)를 생각하지 마시고, 군신(群臣)을 접견하지 못하시는 것을 생각하지 마소서. 그리고 모든 생각을 잊으시고 힘써 스스로 조섭(調攝)하시면, 봄날이 화창하고 따뜻해질 때에 마땅히 저절로 나으실 것입니다.”
하고, 노사신은 아뢰기를,
“원하건대 생각과 걱정을 버리시고, 평온한 마음으로 조섭하시면, 마땅히 점점 나으실 것입니다.”
하고, 신승선은 아뢰기를,
“신이 몇 해 전 10월에 또한 이 증세로 앓았는데, 3, 4월에 이르러 바람이 온화하고 날씨가 따뜻해지자 저절로 나았습니다.”
하고, 윤필상이 아뢰기를,
“만약 갈증(渴證)을 없애면 저절로 점점 나으실 것입니다. 신이 듣건대 제호고(醍醐膏)가 갈증을 그치게 한다고 하니, 청컨대 이를 올리게 하소서”
하고, 마침내 부복(俯伏)하였는데, 조금 지나서 임금이 물러가도록 명하였다. 세자가 윤필상 등을 돌아보면서 말하기를,
“성상께서 물러가도록 명하십니다.”
하니, 윤필상 등이 추창(趨蹌)하여 나왔다.

성종 1494.12.24(己卯)
영의정(領議政) 이극배(李克培) 등을 명하여 부르도록 하고, 전교하기를,
“정승(政丞)들은 비록 밤이라고 하더라도 물러가지 말고 승정원(承政院)에 머물면서 세자(世子)와 일을 의논하라.”
하였다.

午時에 임금이 大造殿에서 薨하였는데, 春秋는 38세이다. 임금은 聰明英斷하시고, 寬仁恭儉하셨으며, 天性이 孝友하시었다. 학문을 좋아해서 게을리하지 아니하여 경사(經史)에 널리 통하였고, 射藝와 書畫에도 지극히 精妙하시었다. 大臣을 尊敬하고 臺諫을 禮遇하셨고, 名器를 중하게 여겨 아끼셨으며, 刑罰을 明確하고 愼重하게 하시었다. 儒術을 崇尙하여 異端을 물리치셨고, 百姓을 사랑하여 節義를 褒奬하셨고, 大國을 精誠으로 섬기셨으며, 신의로써 交隣하시었다. 그리고 힘써 다스리기를 도모하여 처음부터 끝까지 삼가기를 한결같이 하였다. 文武를 아울러 쓰고 內外를 함께 다스리니, 南北이 賓服하고, 四境이 按堵하여 백성들이 生業을 편안히 여긴 지 26년이 되었다. 聖德과 至治는 비록 三代의 聖王이라도 더할 수 없었다.

연산군 1506.09.02(己卯)
(今上) 중종이 경복궁에서 즉위하고 왕(연산군)을 폐(廢)하여 교동현(喬桐縣)으로 옮겼다.
처음에 왕의 어머니 폐비 윤씨(廢妃尹氏)가 성질이 모질고 질투하였다. 정희(貞喜) · 소혜(昭惠) · 안순(安順) 세 왕후가, 윤씨의 부도(不道)한 짓이 많음을 보고 매우 걱정하여 밤낮으로 훈계하였으나, 더욱 순종하지 않고 악행(惡行)이 날로 심하므로, 성종(成宗)이 할 수 없이 의지(懿旨)를 품(稟)하여 위로 종묘에 아뢰고 〈왕비를〉폐하였었다.
왕은 그때 아직 강보(襁褓) 속에 있었는데, 자라남에 미쳐 성종 은 그가 어머니 여읜 것을 불쌍히 여기고, 또 적장(嫡長)이기 때문에 왕세자(王世子)로 세웠다. 그런데 시기와 모짐이 그 어미와 같고 성질이 또한 지혜롭지 못하므로 성종 은 당시의 단정한 선비들을 골라 뽑아 동궁(東宮)의 관원으로 두어 훈회(訓誨)하고 보도(輔導)함을 특별히 지극하게 하였다.
왕이 오랫동안 스승 곁에 있었고 나이 또한 장성했는데도 문리(文理)를 통하지 못했다. 하루는 성종이 시험 삼아 서무(庶務)를 재결(裁決)시켜 보았으나 혼암하여 분간하지 못하므로 성종 이 꾸짖기를 ‘생각해 보라. 네가 어떤 몸인가. 어찌 다른 왕자들과 같이 노는 데만 힘을 쓰고 학문에는 뜻이 없어 이같이 어리석고 어둡느냐?’ 하였었는데, 왕이 이 때문에 부왕(父王) 뵙기를 꺼려 불러도 아프다고 핑계하고 가지 않은 적이 많았다.
하루는 성종 이 소혜 왕후에게 술을 올리면서 세자를 명소(命召)하였으나, 또한 병을 칭탁하고, 누차 재촉해도 끝내 오지 않으므로, 성종이 나인(內人)을 보내어 살피게 하였더니, 병이 없으면서 이르기를 ‘만약 병이 없다고 아뢰면 뒷날 너를 마땅히 죽이겠다.’ 하매, 나인은 두려워서 돌아와 병이 있다고 아뢰었다. 성종 은 속으로 알고 마음에 언짢게 여기며 그만두었었다. 이로부터 〈세자를〉 폐하고 싶은 마음이 많았으나 금상(今上)이 아직 어리고, 다른 적자(嫡子)가 없으며, 또한 왕이 어리고 약하여 의지할 곳이 없음을 불쌍히 여겨 차마 못하였다.
성종 이 승하하자 왕은 상중에 있으면서도 서러워하는 빛이 없으며, 후원의 순록(馴鹿)을 쏘아 죽여 그 고기를 먹으며 놀이 즐기기를 평일과 같이 하였고, 심지어 군신(群臣)들을 접견(接見)하고 교명(敎命)을 내리면서도 숨기고 가리며 거짓 꾸미기를 힘썼는데, 외부 사람들은 알지 못했었다. 그러나 그 초년에는 선조(先朝)의 옛 신하들이 많이 남아 있어 아직 조정이 완전하므로 정령(政令)이 문란하지 않았는데, 무오년 주륙(誅戮)이 있는 뒤부터는 왕의 뜻이 점차 방자해져, 엄한 형벌로 아랫사람들을 억제하매, 선비의 기개가 날로 꺾여져 감히 정언(正言) 극론(極論)을 하는 사람이 없으므로 왕이 더욱 꺼릴 것 없어 멋대로 방탕해졌다.
임술·계해년 무렵에 이르러서는 장녹수(張綠水)에게 빠져 날로 방탕이 심해지고 또한 광포(狂暴)한 짓이 많으므로 소혜 왕후가 걱정이 되어 누차 타일렀지만 도리어 왕의 원망만 사게 되었다. 외부에까지 왕왕 듣고 서로 보여 귓속말을 하며 그윽이 근심하게 되므로, 소혜 왕후가 또 다시 몰래 대신들에게 유시를 내려 간절히 간하게 하니, 왕이 더욱 분해했다. 그리하여 항상 조정에 구애되어 하고 싶은 대로 못하는 것을 불만스럽게 여겼으나 발로할 수 없었다.
이때 임사홍(任士洪)이 음험하고 간사한 자로 선조(先朝) 때부터 내쫓긴 지 거의 30년이나 되므로 항상 이를 갈다가, 그 아들 임숭재(任崇載)가 옹주에게 장가듬을 인하여 금중(禁中)을 출입할 수 있게 되자 왕의 뜻을 짐작하고 마침내 조정을 위협하는 술책으로써 가만히 뜻을 갖추니, 왕이 크게 기뻐하여 급히 숭품(崇品)에 발탁, 아무 때나 불러 보았으며, 무릇 하고 싶은 일이 있으면 묻지 않는 것이 없었는데, 사홍이 부름을 받으면 반드시 미복(微服)으로 어둠을 타 편문(便門)으로 들어갔고 왕은 항상 내 벗 활치옹(豁齒翁)이 왔다 하였으니, 아마 사홍 이 이가 부러져 사이가 넓었기 때문이리라. 왕은 이에 크게 형륙(刑戮)을 자행하였는데 언관(言官)들을 추구(追究)하여 대신으로부터 대간(臺諫)·시종들까지 거의 다 죽이거나 귀양 보내어 조정이 텅 비었고, 폐비한 일을 원망하여 성종 의 후궁을 장살(杖殺)하고 그 자녀를 귀양 보내거나 죽이고, 그 며느리를 남의 첩으로 시집보내거나 제군(諸君)·부마(駙馬)에게 주어 갖게 하였고, 소혜 왕후를 후욕(詬辱)하여 마침내 근심과 두려움으로 병나 죽게 하고서는 그 상기(喪期)를 단축하되 날을 달로 치는 제도[以日易月制]로써 하였고, 대행(大行)이 아직 빈소에 있는데도 풍악을 그치지 않았다. 폐비하는 의논에 참여한 자와 추숭(追崇)을 불가하다고 의논한 자를 모두 중형(重刑)에 처하되, 죽은 자는 그 시체를 베고 가산을 몰수하며, 그 족속을 연좌하고, 살아 있는 자는 장신(杖訊)하여 멀리 귀양보냈는데, 교리(校理) 권달수(權達手)는 먼저 주창하였다 하여 죽임을 당했다.
드디어 조종(祖宗)들의 옛 제도를 모두 고쳐 혼란케 하였는데, 먼저 홍문관 사간원을 혁파하고 또 사헌부의 지평 2원(員)을 없애므로써 언로(言路)를 막았고, 손바닥 뚫기[穿掌]·당근질하기[烙訊]·가슴빠개기[斮胸]·뼈바르기[剮骨]·마디마디 자르기[寸斬]·배가르기[刳腹]·뼈를 갈아 바람에 날리기[碎骨飄風] 등의 이름이 있었으며, 말이 조금만 뜻에 거슬리면 명령을 거역한다 하고, 말이 내간(內間)에 미치면 촉상(屬上)5699) 이라 지적하여, 얽어 죄를 만들되, 기제서(棄制書)를 경률(輕律)로 삼고 족속을 멸하는 것[夷族]을 상전(常典)으로 여겨 한 번만 범하면 부자 형제가 잇달아 잡혀 살륙되고 일가까지도 또한 찬축(竄逐)을 당했고, 익명서(匿名書) 및 다른 죄로 잡힌 자가 사연이 서로 연루되어 옥을 메웠는데, 해를 넘기며 고문하여 독한 고초가 말할 수 없었다.
심지어 옛 당직청(當直廳)이 협소하다 하여 이내 복야청(僕射廳)으로 옮겨 넓히되 밀위청(密威廳)이라 하고 감옥의 관원을 더 두었으며, 죄수를 신문함에 있어서도 반드시 삼공(三公)과 승지·금부 당상이 섞여 다스리게 하였는데, 사대부로서 매를 맞는 자가 빈 날이 없었으나 모두 그 죄가 있어서가 아니었고, 또 비방하는 의논이나 우어(偶語)를 금하는 법을 만들어 감찰로 하여금 날마다 방방곡곡을 사찰하였다가 초하루 보름으로 아뢰게 하였고, 온갖 관사(官司)와 여러 부(府)도 또한 초하루 보름으로 시사(時事)를 비방하는 자가 있나 없나를 적어 아뢰게 하여, 비록 부자간이라도 관에 보고한 뒤에라야 서로 만나도록 하므로, 모두 서로 손을 저어 말을 막았고, 사람마다 스스로 위태롭게 여겨 길에서 눈짓만 했다.
또 도성(都城) 사방에 백 리를 한계로 모두 금표를 세워 그 안의 주현(州縣)과 군읍(郡邑)을 폐지하고 주민을 철거시켜 비운 뒤에 사냥터로 삼고, 만약 여기에 들어가는 자는 당장 베어 조리를 돌리고, 기전(畿甸) 수백 리를 한없는 풀밭으로 만들어, 금수를 기르는 마당으로 삼았다. 그리고 내수사 종 중 부실(富實)한 자를 가려 들어가 살게 하여 몰이하는 데 편리하게 하니, 본래 살던 사람들이 뿔뿔이 흩어지고 사망하여 길에 즐비하였고, 능침(陵寢)이 다 금표 안에 들어가 지키는 사람이 없어 향화(香火) 역시 끊겼다.
또 도성 안 대궐에 가까운 인가를 철거하고 동서로 돌성을 쌓아 한계를 정하고 문묘(文廟)의 신판(神版)을 옮긴 뒤 그 안에 짐승을 길렀으며, 수리 도감(修理都監)을 두고 크게 공사를 일으켜 사방의 공장(工匠)을 모으고 민호(民戶)를 징발, 모두 서울에 집중시켜 궁실을 넓히고, 대사(臺榭)를 더 지어 강가나 물구비에 그들먹하게 벌여 놓으며, 높은 곳은 깎고 낮은 곳은 메워 큰 길을 이리 저리 내고, 밤낮으로 시녀들과 오가며 놀았다. 그중에서 가장 큰 것은 삼각산 밑 장의사동(藏義寺洞)에 있는 탕춘정(蕩春亭)인데, 시냇물이 구비쳐 흐르는 위에 위치하여 단청(丹靑)이 수면에 현란하고, 시내를 가로 질러 낭원(廊院)을 벌여 지었는데 규모가 극히 웅장하였다. 일찍이 강물을 끌어 정자 밑에 이르게 하고 또 산을 뚫어 다른 시냇물을 끌어 정자 밑에 합류시키려 했는데, 모두 이루지 못했다.
창덕궁 후원에 있는 것은 서총대(瑞葱臺)라 하는데, 높이가 수십 길이며 넓기도 높이와 걸맞았다. 그 아래 큰 못을 파는데 해가 넘도록 공사를 마치지 못했다. 또 임진강 가 툭 내민 석벽 위에 별관을 지어 유행(遊幸)하는 장소를 만들었는데, 굽이진 원(院)과 빙 두른 방(房)이 강물을 내려다보아 극히 사치스럽고 교묘하다.
또 이궁(離宮)을 장의사동(藏義寺洞)과 소격서동(昭格署洞)에 짓게 하여 바야흐로 재목을 모아 역사를 하는데, 모든 역사를 감독하는 벼슬아치들이 독촉하기를 가혹하고 급하게 하여 때리는 매가 삼단과 같으며, 조금만 일정에 미치지 못하면 또한 반드시 물건을 징수하므로, 원망과 신음이 길에 잇달았다.
축장군(築墻軍)·축성군(築城軍)·서총정군(瑞葱亭軍)·착지군(鑿地軍)·이궁 조성군(離宮造成軍)·인양전 조성군(仁陽殿造成軍)·재목 작벌군(材木斫伐軍)·유하군(流下軍)이라고 부르는 따위의 징발하는 명목을 다 셀 수가 없다. 그러므로 중외(中外)가 모두 지치고 공사(公私)가 탄갈(殫竭)하여 유리 멸망이 서로 잇달아 온 고을이 거의 비게 되었으며 서울에서 역사하는 자는 주리고 헐벗고 병들어서 죽는 자가 태반이었다. 마을과 거리에 시체가 쌓여 악취를 감당할 수 없는데, 더러는 굶주리고 지친 나머지 길가에 병들어 쓸어진 자가 아직 숨이 붙어 있지만, 그 근방에 사는 사람들이 시체를 버려 두었다는 죄를 입을까 겁내어 서로 끌어다 버리므로 죽지 않는 자가 없었다.
구수영(具壽永)은 영응대군(永膺大君)의 사위이고, 그 아들은 또 왕의 딸 휘순 공주(徽順公主)에게 장가들어, 아첨과 간사로 왕에게 굄을 받았는데, 그는 미녀(美女)를 사방으로 구하여 바치니, 왕이 매혹되어 수영 을 발탁, 팔도 도관찰사(八道都觀察使)를 삼으니 권세가 중외를 기울였다.
이때부터 내총(內寵)이 점차 성하였는데, 그중에서 가장 굄을 받은 것이 전숙원(田淑媛)과 장소용(張昭容)이다. 왕이 두 후궁에게는 하는 말을 따르지 않음이 없고, 하려는 것을 해주지 않는 것이 없으므로, 옥사(獄事)를 농간하고 벼슬을 팔며 남의 재물·장획(臧獲)·가사(家舍)를 빼앗는 등 못하는 짓이 없었고, 조금이라도 자기 뜻에 거슬리면 반드시 화로써 갚으므로 종척(宗戚)이나 경대부(卿大夫)들이 그들의 침해와 모욕을 받지 않는 사람이 없으니, 주인을 배반하고 이익을 노리는 무뢰배로서 일가라 일컫고 투탁(投托)하는 자가 다 셀 수 없었다. 두 집의 도서(圖書)나 서찰을 가진 자가 사방에 널려 이르는 곳마다 소란을 피우며 수령을 업신여기고, 백성들에게 못살게 굴어 기세가 넘쳤으나 아무도 감히 범접하지 못하고 조심스럽게 빌며 사양하고 움츠려 피할 뿐이었다.
왕이 이들을 위하여 큰 집을 짓되, 대관(臺官)에게 감독하게 하여 지어 주었는데, 그들이 만약 부모를 뵈러 출입할 때면, 중관(中官) 및 승지·주서(注書)·재상들이 모두 따라가며 앞에서 인도하고 뒤를 감싸 마치 왕비의 행차와 같았다. 또 시녀 및 공·사천(公私賤)과 양가(良家)의 딸을 널리 뽑아 들이되, 사자(使者)를 팔도에 보내어 빠짐없이 찾아내어 그 수효가 거의 만 명에 이르렀으며, 그들의 급사(給使)·수종(隨從)과 방비(房婢)라고 일컫는 자도 그 수와 같았으며, 7원(院) 3각(閣)을 설치하여 거처하게 했는데, 운평(運平)·계평(繼平)·채홍(採紅)·속홍(續紅)·부화(赴和)·흡려(洽黎) 따위의 호칭이 있었으며, 따로 뽑은 자를 흥청악(興淸樂)이라 하고 악에는 세 과(科)가 있었는데, 굄을 거치지 못한 자는 지과(地科)라 하고 굄을 거친 자는 천과(天科)라 하며, 굄을 받았으되 흡족하지 못한 자는 ‘반천과(半天科)라 하고, 그중에서 가장 굄을 받은 자는 작호를 썼는데, 숙화(淑華)·여원(麗媛)·한아(閑娥) 따위의 이름이 있으며, 그 기세와 굄이 전숙원이나 장소용과 더불어 등등한 자도 또한 많았다.
왕이 그 속에 빠져 오직 날이 부족하게 여기며 흥청 등을 거느리고 금표 안에 달려 나가 혹은 사냥, 혹은 술 마시며 가무(歌舞)하고 황망(荒亡)하였다. 성질이 광조(狂躁)하여 한 곳에 오래 머물지 못하고 내달려 동쪽에 있다 서쪽에 있다 하므로 비록 가까이 모시는 나인이라도 그 행방을 헤아리지 못했다. 또 자전(慈殿)을 효도로 받든다 하고 날마다 연회를 베풀되 때로는 밤중에 달려가 연회를 베풀기도 하고 때로는 시종들을 핍박하여 험한 곳에 놀이를 나가기도 하였는데, 대비(大妃) 또한 능히 감당치 못하면서도 두려워 감히 어기지 못하였으며, 언제나 내연(內宴)을 베풀되 반드시 종재(宗宰)·사대부의 아내를 입참(入參)하도록 하였는데, 연달아 밤낮으로 나오지 못하는 자가 있으므로 추문(醜聞)이 파다하였다.
이때 대비는 경복궁으로 옮겨 거처하였는데, 왕은 대비를 위하여 경회루 연못에 관사(官私)의 배[船]들을 가져다가 가로 연결하고 그 위에 판자를 깔아 평지처럼 만들고 채붕(彩棚)을 만들었으며, 바다에 있는 삼신산(三神山) 을 상징하여 가운데는 만세산(萬歲山), 왼쪽엔 영충산(迎忠山), 오른쪽엔 진사산(鎭邪山)을 만들고 그 위에 전우(殿宇)·사관(寺觀)·인물(人物)의 모양을 벌여 놓아 기교를 다하였고, 못 가운데 비단을 잘라 꽃을 만들어 줄줄이 심고 용주 화함(龍舟畫艦)을 띄워 서로 휘황하게 비췄는데, 그 왼쪽 산엔 조정에 있는 선비들의 득의양양한 모양을 만들고 오른쪽엔 귀양 간 사람들의 근심되고 괴로운 모양을 만들었다.
왕은 스스로 시(詩)를 지어 걸고 또 문사들도 짓되, 모두 세 산(山)을 명명한 뜻을 서술하게 하고 날마다 즐겁게 마시며 놀되, 화초와 인물의 형상이 비를 맞아 더러워지면 곧 새 것으로 바꾸었다. 대비가 억지로 잔치에 참석은 하였지만 연회가 파하면 늘 한숨쉬며 즐거워하지 않았다.
또 궁내(宮內)에 조준방(調隼坊)을 두어 매와 개를 무수히 기르므로 먹이는 비용이 걸핏하면 1천(千)으로 헤아렸고, 사방의 진기한 새와 기이한 짐승을 모아 들여 역시 그 속에 두되, 따로 응군(鷹軍)이란 것을 두어 내응방(內鷹坊)에 소속시키고 번갈아 바꾸도록 하여 1만 명이나 되는데 두 대장에게 나누어 소속시키고, 또 위장(衛將)이 있어 여러 장수들의 수를 서로 통솔하게 하고, 고완관(考頑官)과 해응관(解鷹官)을 두어 매와 개를 몰아 사냥하는 일을 살피도록 하는데, 모두 미치고 방종한 무뢰한이었다. 왕이 사냥을 하려 하면 대장 이하가 각기 응군을 거느리고 달려오는데 이것을 내산행(內山行)이라 했다. 또 사방의 준마(駿馬)를 모아 용구(龍廐)·인구(麟廐)·운구(雲廐)·기구(麒廐)·신준방(神駿坊)·덕기방(德驥坊)·봉순사(奉巡司)를 따로 두어 기르되, 사복시의 관원을 더 두어 오로지 감목(監牧)하게 하여, 유행(遊幸)·출엽(出獵)할 때 썼다.
왕은 스스로 자신의 소행이 부도(不道)함을 알고 내심 부끄러워하여 인도(人道)를 혼란시켜 자기와 같게 만들려고 하여, 사대부의 친상(親喪)을 단축하였으며, 효행(孝行)이 있는 사람을 궤이(詭異)하다 하여 죽였고, 형제들을 핍박하여 그 첩을 서로 간범하게 하니, 삼강(三綱)이 끊어지고 이륜(彝倫)이 소멸되었다. 그래서 모든 사람이 배반하고 친척들이 이탈하여 중외(中外)가 다 원망하는데, 오직 사홍(士洪) · 수영(壽永) 및 간사하고 아첨하는 군소(群小) 무리들이 세력을 믿고 스스로 방자하므로, 당시 대신의 반열에 있는 자들은 방관할 뿐 어찌 할 수 없었다. 총애를 탐내며 화를 두려워함이 날로 더하여 사직을 보전할 계책을 도모하는 자는 아무도 없었다.
왕은 항상 귀양 간 사람들이 원한 때문에 일을 일으킬까 염려하여 모두 절도(絶島)에 유배시켜 고역(苦役)을 치르게 하고, 2품(品) 당상을 진유 근리사(鎭幽謹理使)라 칭하여 보내되 각기 종사관 1명씩을 거느리고 가서 검찰하고 구류당한 죄수들을 얽매어 자유롭지 못하게 하니, 사람들이 모두 죽음이 조석간에 있음을 알았다.
왕은 오랠수록 더욱 의심하여 모두 없애려고 하였으며, 이장곤(李長坤)이 가장 용맹한 사람이니 마침내 변을 일으킬까 싶다 하여, 경사(京師)로 잡아 보내게 하여 장차 먼저 죽이려고 하므로 장곤 이 듣고 곧 망명하니, 왕은 크게 노하여 상금을 걸고 체포를 서둘되, 경조관(京朝官)을 보내어 모든 도에 있는 관원과 함께 군대를 풀어 찾게 하니, 도하(都下)가 흉흉하여, 혹자는 이장곤 이 망명하여 무리들을 모아 거병(擧兵)한다 하였다.
평성군(平城君) 박원종(朴元宗)과 전 참판 성희안(成希顔)이 한 마을에 살았는데, 서로 만나 시사를 논할 적마다 ‘이제 정령(政令)이 혼암 가혹하여 백성이 도탄에 빠졌으니 종묘사직이 장차 전복될 것인데, 나라를 담당한 대신들이 한갓 교령(敎令)을 승순(承順)하기에 겨를이 없을 뿐, 한 사람도 안정시킬 계책을 도모하는 자가 없다. 우리들은 함께 성종 의 두터운 은혜를 입었는데, 어찌 차마 앉아서 보고만 있겠는가. 천명과 인심을 보건대 이미 촉망된 바 있거늘, 어찌 추대하여 사직을 바로 잡지 않을 수 있으랴.’ 하고, 드디어 큰 계책을 정했는데 모사에 참여할 자가 있지 않았다.
부정(副正) 신윤무(辛允武)는 왕의 총애와 신임을 받는 이로서 평소에 늘 근심하고 두려워하기를 ‘일조에 변이 있게 되면 화가 장차 몸에 미치리라.’ 생각하고, 원종 등에게 가서 말하기를 ‘지금 중외(中外)가 원망하여 배반하고 왕의 좌우에 친신(親信)하는 사람들도 모두 마음이 떠났으니, 환란이 조석간에 반드시 일어날 것이오. 또 이장곤은 무용과 계략을 가진 사람인데, 이제 망명하였으니 결코 헛되이 죽지는 않으리다. 만약 귀양 간 사람들을 불러 모으고, 군읍(郡邑)에 격문을 보내어 군사를 일으켜 대궐로 쳐 들어온다면, 비단 우리들이 가루가 될 뿐 아니라, 사직이 장차 다른 사람의 손에 넘어갈 것이니, 일이 그렇게 된다면 비록 하고자 한들 미칠 수 없게 될 것이오.’ 하니, 원종 등이 뜻을 결정하였다. 이조 판서 유순정(柳順汀)은 함께 일할 수 있다 하고, 그 계획을 말하자 따르므로 이어 장정(張珽) · 박영문(朴永文)을 불러 윤무(允武) 와 더불어 무사를 모을 것을 언약하였다. 또 용구(龍廐)의 모든 장수들과 각기 응군(鷹軍)을 거느리고 오기로 약속하였다.
이윽고 무인일5700) 저녁에 모두 훈련원에 모여 희안이, 김수동 · 김감에게 달려가 함께 가자고 하니, 감 은 즉시 따랐고 수동 은 두려워 망서리다가 결국 따랐다. 또 유자광이 지모가 많고 경력이 많다고 하여, 역시 불러 함께 하는 한편 용사들을 임사홍과 신수근 · 신수영의 집에 보내어 퇴살(椎殺)하고, 또 사람을 보내어 신수겸(愼守謙)을 개성부 에서 베니, 이를 들은 도중(都中)의 대소인들이 기약도 없이 모여 들어 잠깐 동안에 운집하자 즉시 모든 장수들을 편성하고 용구마(龍廐馬)를 내어 주어 각기 군사를 거느리고 궁성을 에워싸고 지키게 하였으며, 또 모든 옥에 있는 죄수들을 놓아 종군하게 하니, 밤이 벌써 3경이었다.
윤형로(尹衡老)를 금상(今上)의 사제(私第)에 보내어 그 사유를 아뢰고 그대로 머물러 모시게 하고, 이어서 운산군(雲山君) 이성(李誠)과 무사 수십 명을 보내어 시위하여 비상에 대비하게 하였다. 희안 등은 모두 돈화문 밖에 머물러 날새기를 기다리니, 숙위(宿衛)하던 장사와 시종·환관들이 알고 다투어 수채 구멍으로 빠져 나가 잠시 동안에 궁이 텅 비었다.
승지 윤장(尹璋) · 조계형(曺繼衡) · 이우(李堣)가 변을 듣고 창황히 들어가 왕에게 사뢰니, 왕이 놀라 뛰어 나와 승지의 손을 잡고 턱이 떨려 말을 하지 못하였다. 장(璋) 등은 바깥 동정을 살핀다고 핑계하고 차차 흩어져 모두 수채 구멍으로 달아났는데, 더러는 실족하여 뒷간에 빠지는 자도 있었다.
원종 등은 내시를 시켜 장사 두어 명을 거느리고 왕에게 가 옥새를 내놓고 또 동궁에 옮길 것을 청하였으며, 전동(田同) · 심금손(沈金孫) · 강응(姜凝) · 김효손(金孝孫) 등을 군중(軍中)에서 베었다.
여명(黎明)에 궁문이 열리자 원종 등이 경복궁 에 나아가 대비에게 아뢰기를 ‘주상이 크게 군도(君道)를 잃어 종묘를 맡을 수 없고 천명과 인심이 이미 진성 대군 〈 이역(李懌) 〉에게 돌아갔으므로, 모든 신하들이 의지(懿旨)를 받들어 진성 대군을 맞아 대통(大統)을 잇고자 하오니, 청컨대 성명(成命)을 내리소서.’ 하니, 대비는 전교하기를 ‘나라의 사세가 이에 이르렀으니 사직을 위한 계책이 부득이하다. 경 등이 아뢴 대로 따르리라.’ 하였다.
순정 이 전지를 받들고 즉시 금상의 사제로 가 아뢰니, 상이 굳이 사양하기를 ‘조정의 종묘사직을 위한 대계(大計)가 진실로 이러해야 마땅하나 내가 실로 부덕하니 어떻게 이를 감당하겠는가.’ 하고, 재삼 거절한 뒤에야 비로소 허락하였다. 순정 이 호종 시위하여 경복궁 에 들어가니, 길에서 첨앙(瞻仰)하는 백성들이 모두 눈물을 흘리며 모두들 ‘성주(聖主)를 만났으니 고화(膏火) 속에서 벗어나게 되었다.’고 하였다.
신시(申時)에 근정전 에서 즉위하여 백관의 하례를 받고 대사령(大赦令)을 중외에 내렸으며, 대비의 명에 의하여 전왕을 폐위 연산군으로 강봉하여 교동(喬桐)에 옮기고, 왕비 신씨를 폐하여 사제(私第)로 내쳤으며, 세자 이황(李) 및 모든 왕자들을 각 고을에 안치시키고, 전비(田非) · 녹수 · 백견(白犬) 을 군기시(軍器寺) 앞에서 베니, 도중(都中) 사람들이 다투어 기왓장과 돌멩이를 그들의 국부에 던지면서 ‘일국의 고혈이 여기에서 탕진됐다.’고 하였는데, 잠깐 사이에 돌무더기를 이루었다.
策功을 議定하게 하자, 원종 등이 여러 종실·재상들과 공을 나눔으로써 뭇사람의 마음을 안정시키려 하니, 처음부터 모의에 참여하지 않은 유순(柳洵) 등 수십 인이 다 정국공신에 참여되었다. 당초에 원종 등이 돈화문 밖에 모여 순(洵)에게 사람을 보내어 순(洵)을 부르니, 순 이 변이 있는 줄 알고 어찌할 바를 몰라 나와 문틈으로 엿보다가 도로 들어가기를 너덧 차례나 하였으며, 또 문틈으로 말하기를 ‘나는 구항(溝巷)에서 죽고 싶지 않으니, 이번 일이 가하오. 마음대로 하오.’ 하고, 오랫동안 다른 일이 없음을 알고서야 나왔다. 그리고 구수영(具壽永)은 당초 원종 등이 거의(擧義)했다는 말을 듣고, 즉시 훈련원에 달려가 제장들을 보았다. 여러 장수들이 서로 돌아보며 놀랬지만, 벌써 와 몸 바치기를 허하였으므로, 마침내 훈적(勳籍)에 참여할 수 있었다.
이때 적인(謫人) 유빈(柳濱) · 이과(李顆) · 김준손(金駿孫) 등은 무리들을 불러 모아 전라도 에서 거병하기로 하고, 조숙기(曺淑沂) 등은 또한 경상도 에서 거병하기로 의논하여, 모두 금상을 추대하려 하였다가 상이 이미 즉위했다는 말을 듣고 곧 중지하였다.
처음에 왕이 백관에게 충(忠)자·성(誠)자를 새겨 사모(紗帽)의 앞뒤에 붙이게 하였으니, 대개 충성으로써 책려(責勵)하려 한 것이요, 모든 유행(遊行)과 출입을 행행(行幸)이라 일컬음을 금하고 거동이라 하게 하였으며, 또 흥청을 선치(選置)하되 기필코 1만 명을 채우려고 했었는데, 교동으로 폐천(廢遷)되어 가시 울타리 안에 거처하게 되자 백성들이 왕을 뒤쫓아 원망하여 이가(俚歌)를 지어 부르기를,
충성이란 사모요
거동은 곧 교동일세.
일 만 흥청 어디 두고
석양 하늘에 뉘를 좇아가는고?
두어라 예 또한 가시의 집이니
날 새우기엔 무방하고 또 조용하지요.
하였으니, 대개 사모(紗帽)와 사모(詐謀), 거동(擧動)과 교동 은 음이 서로 가깝고, 방언에 각시[婦]와 가시[荊棘]는 말이 서로 유사하기 때문에 뜻을 빌어 노래한 것이다.
폐부(廢婦) 신씨(愼氏) 는 어진 덕이 있어 화평하고 후중하고 온순하고 근신하여, 아랫사람들을 은혜로써 어루만졌으며, 왕이 총애하는 사람이 있으면 비(妃)가 또한 더 후하게 대하므로, 왕은 비록 미치고 포학하였지만, 매우 소중히 여김을 받았다. 매양 왕이 무고한 사람을 죽이고 음란, 방종함이 한없음을 볼 적마다 밤낮으로 근심하였으며, 때론 울며 간하되 말뜻이 지극히 간곡하고 절실했는데, 왕이 비록 들어주지는 않았지만, 그렇다고 성내지는 않았다. 또 번번이 대군·공주·무보(姆保)·노복들을 계칙(戒勅)하여 함부로 방자한 짓을 못하게 하였는데, 이때에 이르러서는 울부짖으며 기필코 왕을 따라 가려고 했지만 되지 않았다.

중종 1544.11.15(庚戌)
유시(酉時). 상이 환경전(歡慶殿) 소침(小寑)에서 훙(薨)하였다.
사신은 논한다. 상은 인자하고 현명하여 세상에 뛰어난 자질로 혼암(昏暗)한 폐조(廢朝)의 시대를 당하여 효도와 우애를 독실히 하고 신하의 도리에 극진하였다. 폐주(廢主)의 난정(亂政)이 더욱 혹독하여 백성들이 도탄에 빠지자 황천(皇天)의 돌보심으로 천명(天命)이 돌아오게 되었다. 신민의 추대를 사양할 수가 없어 드디어 임금의 자리에 오르니 귀신과 사람이 모두 기뻐하고 종묘와 사직이 의탁할 곳이 있게 되었다. 중흥한 공적은 너무도 높아서 어떻게 이름지을 수 없다. 즉위한 이래 학문에 있어서는 정일(精一)의 묘리(妙理)를 궁구했고, 뜻은 당(唐) · 우(虞) 의 다스림에 간절하여 백성을 언제나 불쌍히 여겼고 간언(諫言)을 따르는 데 어김이 없었다. 재위 39년 동안에 치도(治道)를 이루기 위해 근심하고 괴로와한 것이 모두가 하늘을 두려워하고 백성을 사랑하는 정사였으니 진실로 세상에 드문 현주(賢主)라 할 수 있다. 애석하게도 인자하고 온화함은 넉넉했으나 과단성이 부족하여 진퇴(進退)시키고 용사(用捨)하는 즈음에 현·불초(賢不肖)가 뒤섞이게 하는 실수를 면하지 못했다. 그래서 군자와 소인이 번갈아 진퇴함으로써 권간(權奸)이 왕명을 도둑질하여 변고가 자주 일어났고 정치가 조금도 나아지지 않았으며, 재변이 중첩해서 일어나 삼한(三韓)의 신민이 끝내 다시는 삼대(三代)의 정치를 볼 수 없게 되었으니, 임금은 있으나 신하가 없다는 탄식이 어찌 한이 있겠는가. 이와 같이 옛것을 좋아하고 선을 즐기는 정성으로 만일 함께 일을 할 만한 신하를 얻어서 일을 맡기고 소인이 그 사이에 끼어들지 못하게 하였다면 군신이 덕을 함께 하고 시종 서로 신임하여 완성된 미덕을 이루었으리니, 그 치적이 융성함과 공업의 성대함이 어찌 여기에 그칠 뿐이었겠는가.
사신은 논한다. 신은 상고하건대, 중종대왕은 공검(恭儉) 인자(仁慈)하시어 재위 40년 동안에 안으로는 성색(聲色)을 즐기는 일이 없었고, 밖으로는 사냥하며 즐기는 데 빠진 적이 없었다. 즉위한 이래로 힘써 치도(治道)를 강구하여, 조야(朝野)가 모두 바라보고 태평을 기약했는데 신하의 보좌를 받을 즈음에 적합한 사람을 얻지 못하여, 처음에는 기묘년에 징계되고 나중에는 정유년에 실수하여21210) 조정이 조용하지 않고 붕당을 지어 서로 모함함으로써 드디어는 어진이를 좋아하고 선행을 즐기는 마음이 잠시 열렸다가 끝내 닫혀지고 말았다. 이는 다름이 아니라, 조광조(趙光祖) 등이 옛것을 사모한다는 이름만 있었고 옛것을 사모하는 실상은 없이 한갓 번잡하게 고치는 것만 일삼았으며 점차로 개선해 나가는 방도를 생각하지 않고, 오직 배척만을 힘써 자신의 흉중에 품은 생각을 대폭적으로 실행하려 한 데서 말미암은 것이니, 삼대(三代)의 정치가 진실로 이러한 것인가. 그후로는 비록 아름다운 말과 착한 행실을 누가 혹 앞에서 진술하더라도 전후로 징계된 바 있어 허심탄회한 마음으로 청납(聽納)하는 일이 없었으니, 이것이 이른바 ‘아무리 슬기 있는 사람도 뒤끝을 잘 맺기 어렵다.’는 것이다. 그러나 그 잘못을 추구해보면 모두가 기묘년 사람들이 단서를 열어놓은 것이다. 그러나 인후한 성덕으로 부지런하고 공손하게 상국을 정성으로 섬기고, 오랑캐를 도로써 통솔하며, 백성들의 질고를 잘 알아 크고 작은 고통을 어루만져 구휼함에 힘입어 나라 안이 소생되고 원망이 없어졌으니, 참으로 중흥의 성군이라고 할 만하다. 묘호(廟號)를 중종(中宗) 이라 하였으니 그 또한 이 때문인가 보다.
사신은 논한다. 상은 인자하고 유순한 면은 남음이 있었으나 결단성이 부족하여 비록 일을 할 뜻은 있었으나 일을 한 실상이 없었다. 좋아하고 싫어함이 분명하지 않고 어진 사람과 간사한 무리를 뒤섞어 등용했기 때문에 재위 40년 동안에 다스려진 때는 적었고 혼란한 때가 많아 끝내 소강(小康)의 효과도 보지 못했으니 슬프다.
사신은 논한다. 인자하고 공검한 것은 천성에서 나왔으나 우유부단하여 아랫사람들에게 이끌리어 진성군(甄城君)을 죽여 형제간의 우애가 이지러졌고, 신비(愼妃)를 내치고 박빈(朴嬪)을 죽여 부부의 정이 없어졌으며, 복성군(福城君)과 당성위(唐城尉)를 죽여 부자간의 은의(恩義)가 어그러졌고, 대신을 많이 죽이고 주륙(誅戮)이 잇달아 군신의 은의가 야박해졌으니 애석하다.
중외에 사면을 반포하고 백관은 도로 상복을 입고 반열에 나왔다. 봉례(奉禮) 이기(李䕫)가 교서 읽기를 끝마치자 밤은 2고(二鼓)가 되었다.

“왕은 이르노라. 황천(皇天)이 우리나라에 상란(喪亂)을 내리시되 조금도 늦추지 않으시어 소자(小子)가 망극하게도 참혹한 해독을 당하니 의지할 곳이 없도다. 오직 우리 대행 대왕께서는, 착한 성품은 하늘로부터 받았고 큰 덕으로 대위(大位)를 얻으시었도다. 정일(精一)의 공은 이제(二帝)21217) 의 학문을 이어받았고 근심하고 부지런한 마음은 삼왕(三王)의 마음을 체득하였다. 음악이나 여색과 사냥놀이의 즐거움은 끊었고, 조심하고 삼가며 직언을 청납하는 미덕만을 가지셨다. 백성 보기를 적자(赤子)처럼 하여 굶주림과 추위와 질병을 마치 당신 자신의 일로 여기셨고, 사람을 쓸 때는 오직 어진 인재로 하여 출척(黜陟)과 진퇴를 반드시 정도로 하시었다. 재위 39년 동안에 한결같이 변하지 않으시니 인덕을 입은 억조 창생이 모두 다 영원히 받들기로 생각했는데, 애통하게도 이렇게 빨리 대고를 당하니 하늘을 우러러 통곡하나 부여잡을 곳이 없도다. 바야흐로 상을 당해 슬퍼하는 중에 어찌 차마 편안히 왕위에 오를 수 있겠는가. 그러나 대위(大位)는 하루도 비울 수 없기 때문에 유교를 억지로 좇아 12월 20일 기묘에 창경궁 명정전 에서 즉위하였다.

대행왕의 비는 왕대비(王大妃)로 올리고 빈(嬪) 박씨(朴氏)는 왕비로 삼는다. 선인(先人)의 위를 잇는 시초를 당하여 의당 허물을 용서하는 은전을 베풀어야 하니 오늘 새벽 이전까지의 범죄자 가운데 모반 대역(謀反大逆) 및 구살조부모부모(毆殺祖父母父母)·처첩모살부(妻妾謀殺夫)·노비모살주(奴婢謀殺主)·고독 염매(蠱毒魘魅)·관계국가강상(關係國家綱常)·사간장오(事干贓汚)·강절도(强竊盜) 이외의 잡범(雜犯)으로서 사죄(死罪)·도류(徒流)·부처(付處)·안치(安置)·충군(充軍)으로 이미 배소(配所)에 이르렀거나 이르지 않았거나, 발각되었거나 발각되지 않았거나, 죄가 결정되었거나 결정되지 않았거나 모두 사유한다. 아! 하늘에 계신 조종의 신령께서 나에게 국가를 부촉하셨으니 여러 신하들은 옆에서 도와 영원한 태평 시대를 이루기를 바란다. 이에 교시(敎示)하노니 모두들 잘 알아야 한다.”

인종 1544.11.20(乙卯)
창경궁(昌慶宮)에서 즉위하여 명정전(明政殿) 첨하에서 여러 신하들의 하례를 받았다. 종친 및 문무백관들은 모두 명정전 의 동서쪽 뜰로 나아가고 통례가 태화문 밖에 나아가 나오시기를 청하였다. 시각은 이미 캄캄하여 촛불을 밝히고 나오는데 태복(太僕)이 승여(乘輿)를 올렸으나 상이 물리치고는 타지 않고 간신히 걸어서 어좌(御座)의 옆에 이르러 차마 앉지 못하고 오랫동안 국궁(鞠躬)하고 서 있었다. 승지가 앞으로 나아가 아뢰기를,
“자리에 오르신 뒤에라야 여러 신하들이 하례를 올릴 수 있습니다. 지금 자리에 오르지 않으시니 예식이 이루어지기 어렵습니다.”
하니, 상이 이에 억지로 자리에 올라앉았으나 오히려 불안한 자세였고 너무 애통하여 눈물이 비오듯이 떨어지자 좌우의 뜰에 있던 여러 신하들도 오열하며 눈물을 흘리지 않는 사람이 없었다. 예식이 끝나자 상이 또 걸어서 여차에 들어가 면복(冕服)을 벗고 도로 상복을 입었다.
사신은 논한다. 즉위하기를 청했으나 상이 대답하지 않아 아랫사람들이 한창 민망할 때에 대사성 이준경(李浚慶)이 앞에 있던 우찬성 성세창(成世昌) 을 보고 나아가 묻기를 ‘오늘은 이미 날이 저물었고 사군(嗣君)께서는 거둥하지 않으시니 대례를 어떻게 해야겠는가?’ 하니, 성세창이 답하기를 ‘권정례(權停禮)로 하더라도 해로울 것이 없겠다.’ 하였다. 성세창이 계획하는 일은 거의 다 생각이 없이 하는 일이어서 사림이 비난하고 업신여겼다.

인종 1545.07.01(辛酉)
묘시(卯時)에 상(上)이 청연루(淸讌樓) 아래 소침(小寢)에서 훙서(薨逝)하였다.
사신은 논한다. 상은 자질이 순미(純美)하여 침착하고 온후(溫厚)하며 학문은 순정(純正)하고 효우(孝友)는 타고난 것이었다. 동궁(東宮)에 있을 때부터 늘 종일 바로 앉아 언동(言動)은 때에 맞게 하였으니 사람들이 그 한계를 헤아릴 수 없었다. 즉위한 뒤로는 정사(政事)할 즈음에 처결하고 보답하는 데에 이치에 맞지 않은 것이 없었고, 때때로 어필(御筆)로 소차(疏箚)에 비답(批答)하되 말과 뜻이 다 극진하므로 보는 사람이 누구나 탄복하였다. 외척(外戚)에게 사정(私情)을 두지 않고 시어(侍御)에게 가까이하지 않으므로 궁위(宮闈)가 엄숙하였다. 중종(中宗) 이 편찮을 때에는 관대(冠帶)를 벗지 않고 밤낮으로 곁에서 모셨으며 친히 약을 달이고 약은 반드시 먼저 맛보았으며 어선(御膳)을 전연 드시지 않았다. 이렇게 한 것이 거의 20여 일이었고 대고(大故)를 만나게 되어 음료(飮料)를 마시지 않은 것이 5일이었으니 애통하여 수척한 것이 예도에 지나쳐서 지극히 쇠약하여 거의 스스로 견딜 수 없었다. 졸곡(卒哭)이 되어 조정(朝廷)이 권제(權制)를 따르기를 청하였으나 고집하여 허락하지 않다가, 대신이 백관(百官)을 거느리고 청하게 되어서야 비로소 허락하였으나 실은 실행하지 않았다. 창덕궁(昌德宮) 에서 경복궁(景福宮)으로 이어(移御)하여서는 중종(中宗)이 평일에 거처하던 곳을 보고 가리키며 ‘여기는 앉으신 곳이고 여기는 기대신 곳이다.’ 하고 종일 울며 슬피 사모하여 마지않았다. 병이 위독하던 밤에는 도성(都城) 사람들이 모여서 밤새도록 자지 않고 궐문(闕門)에서 오는 사람이 있으면 문득 상의 증세가 어떠한가 물었으며, 승하하던 날에는 길에서 누구나 다 곡하여 울며 슬퍼하는 것이 마치 제 부모를 잃은 것과 같았다.

명종 원년 1545.07.06(丙寅)
미시(未時)에 사왕(嗣王)이 면복(冕服)을 갖추고 여차(廬次)에서 나와 사정전(思政殿)의 동쪽 뜰에 있는 욕위(褥位)에 나아가 꿇어앉아, 사향(司香)이 향을 올린 뒤에 사배(四拜)하고 나서, 동쪽 섬돌로부터 올라가 향안(香案) 앞에 나아가 꿇어앉았다. 영의정 윤인경이 유교를 받들고 나와서 사왕에게 주니 사왕이 유교를 받아서 보고 나서 도승지 송기수에게 주고, 좌의정 유관 이 대보(大寶)를 받들고 나와서 사왕에게 주니 사왕이 받아서 좌승지 최연(崔演) 에게 주었다. 왕이 동쪽 뜰에 있는 욕위로 내려가 사배하고 나서, 사정문(思政門) 밖에 있는 악차(幄次)로 나갔다. 통례원(通禮院) 이 백관(百官)의 반열(班列)이 정제되었음을 고하자, 왕이 악차에게 나와 여(輿)를 타고 나와서 근정문(勤政門)에서 즉위하였다. 백관이 사배삼고두(四拜三叩頭)하고 산호(山呼)하고 또 사배하고 나서 상이 대내(大內)로 돌아와 면복을 벗었다.

명종 1567.06.28(辛亥)
축시에 상이 경복궁 양심당(養心堂) 【소침(小寢)이다.】에서 훙(薨)하였다. 중전이 정원에 전교하였다.
“다시는 가망이 없으니【승전색 이충방(李忠邦)이 와서 전했다.】 내외가 거애(擧哀)하라.”
이준경 등이 아뢰기를,
“사자(嗣子)가 처음으로 들어오고 또 나이가 어리니 모든 정무(政務)는 수렴(垂簾)하고 임시로 함께 처분하셔야 합니다.”
하니, 전교하기를,
“내가 본래 문자(文字)를 모르니 어떻게 국정에 참여하겠는가. 사자가 이미 성동(成童)이 지났으니 친히 정사를 볼 수 있을 것이다.”
하였다. 이준경 등이 다시 아뢰기를,
“사자가 나이는 비록 찼으나 동궁(東宮)에서 자란 것에 비교해서는 안 됩니다. 여염에서 자라 정사의 체모를 모를 것인데 군국(軍國)의 큰 일을 어찌 홀로 결단할 수 있겠습니까. 군국의 일이 많아서 한갓 사양하는 덕만 고집하실 수 없습니다. 옛일을 따라 수렴권청(垂簾權聽)하소서.”
하니, 전교하기를,
“대신의 보도(輔導)가 있으니, 친히 정사를 보는 것이 옳다.”
하였다. 이준경 등이 세 번째 아뢰기를,
“수렴해야 한다는 뜻을 이미 다 아뢰었습니다. 옛일을 따르소서.”
하니, 아뢴 뜻을 알았다고 전교하였다.
사신은 논한다. 수렴하는 것이 비록 우리나라 조종의 가법(家法)이나 이는 다만 어린 임금을 위해 부득이해서 하는 일이다. 지금 사군의 나이가 이미 성동을 넘었고, 자전께서 두세 번이나 사양했으니 대신 자는 이로 인하여 여러 세대의 잘못됨을 바로잡았어야 한다. 한갓 옛일 따르는 것만 알고 잘못된 일을 따라서는 안 된다는 것은 몰라 국정이 사군에게서 나오지 못하게 하고 사양하는 덕을 자전께 돌리지도 못했으니 대신의 도리가 본디 이래야만 하는가. 아, 애석하기 짝이 없다.

선조 1608.02.01(무오)
유영경이 여러 대신들의 말로 아뢰기를,
“고례(古禮)에 부인(婦人)의 손에서 임종하지 않는다고 하였는데 대신들의 뜻이 모두 이와 같으므로 감히 아뢰는 것입니다.”
하고, 또 여러 대신들의 말로 아뢰기를,
“예문(禮文)에 모두 안정하고 기다린다고 하였으니, 의관(醫官)으로 하여금 입시(入侍)케 하소서.”
하였다. 여러 대신들이 모두 울면서 나왔는데, 잠시 후 곡성(哭聲)이 안에서 밖에까지 들리자 여러 대신 및 궁궐 뜰에 있던 자가 모두 통곡하였다.

광해군 1623.03.14(甲辰)
대왕대비가 왕을 폐하여 광해군(光海君)으로 삼고, 이질을 서인(庶人)으로 삼고, 금상을 책명(冊名)하여 왕위를 계승하게 하였는데, 그 교지는 다음과 같다.
“ 소성정의 왕대비(昭聖貞懿王大妃) 는 다음과 같이 이르노라. 하늘이 많은 백성을 내고 임금을 세우게 하신 것은 인륜을 펴고 법도를 세워 로 종묘를 받들고 아래로 백성을 잘 다스리게 하려고 하신 것이다. 선조 대왕(宣祖大王)께서 불행하게도 적자(適子)가 없으시어 일시의 권도에 따라 나이의 순서를 뛰어넘어 광해(光海)를 세자로 삼았다. 그런데 그는 동궁에 있을 때부터 잘못하는 행위가 드러났으므로 선조께서 만년에 몹시 후회하고 한스럽게 여기셨고, 그가 왕위를 계승한 뒤에는 도리어 어긋나는 짓을 그지없이 하였다. 우선 그 중에서 큰 죄악만을 거론해 볼까 한다. 내가 아무리 덕이 부족하더라도 천자의 고명(誥命)을 받아 선왕의 배필이 되어 일국의 국모 노릇을 한 지 여러 해가 되었으니 선조 의 아들이라면 나를 어머니로 여기지 않을 수 없을 것이다. 그런데 광해 는 남을 참소하고 모해하는 자들의 말을 신임하고 스스로 시기하고 혐의하는 마음을 가져 우리 부모를 형벌하여 죽이고 우리 일가들을 몰살시켰으며 품속에 있는 어린 자식을 빼앗아 죽이고 나를 유폐하여 곤욕을 치르게 하였으니, 그는 인간의 도리가 조금도 없는 자이다. 그가 이러한 짓을 한 것은 선왕에게 품었던 유감을 풀려고 한 것인데 미망인에 대해서야 무슨 짓인들 못하겠는가. 그는 형과 아우를 살해하고 조카들을 모조리 죽였으며 서모(庶母)를 때려죽이기까지 하였다.
그리고 여러 차례 큰 옥사를 일으켜 무고한 사람들을 가혹하게 죽였고, 민가 수천 호를 철거시키고 두 궁궐을 창건하는 데 있어 토목 공사의 일이 10년이 지나도록 끝나지 않았다. 그리고 선왕조의 원로대신들을 모두 축출시키고 인아(姻婭)·부시(婦寺)들로서 악한 짓을 하도록 권유하는 무리들만을 등용하고 신임하였으며, 정사를 하는 데 있어 뇌물을 바친 자들만을 기용했으므로 무식한 자들이 조정에 가득하였고 금을 싣고 와서 관직을 사는 자들이 마치 장사꾼이 물건을 흥정하듯이 하였다. 그리고 부역이 많고 수탈이 극심하여 백성들이 살 수가 없어서 고난 속에서 아우성을 치고 있으니, 국가의 위태로움은 말할 수 없었다. 어디 그뿐이겠는가. 우리나라가 중국을 섬겨온 지 2백여 년이 지났으니 의리에 있어서는 군신의 사이지만 은혜에 있어서는 부자의 사이와 같았고, 임진년에 나라를 다시 일으켜준 은혜는 영원토록 잊을 수 없었던 것이다. 이리하여 선왕께서 40년 간 보위에 계시면서 지성으로 중국을 섬기시며 평생에 한 번도 서쪽으로 등을 돌리고 앉으신 적이 없었다. 그런데 광해 는 은덕을 저버리고 천자의 명을 두려워하지 않았으며 배반하는 마음을 품고 오랑캐와 화친하였다. 이리하여 기미년1240) 에 중국이 오랑캐를 정벌할 때 장수에게 사태를 관망하여 향배(向背)를 결정하라고 은밀히 지시하여 끝내 우리 군사 모두를 오랑캐에게 투항하게 하여 추악한 명성이 온 천하에 전파되게 하였다. 그리고 우리나라에 온 중국 사신을 구속 수금하는 데 있어 감옥의 죄수들보다 더하였고, 황제가 칙서를 여러 번 내렸으나 군사를 보낼 생각을 하지 아니하여 예의의 나라인 우리 삼한(三韓) 으로 하여금 이적 금수의 나라가 되는 것을 모면하지 못하게 하였으니, 가슴 아픈 일을 어떻게 다 말할 수 있겠는가. 천리(天理)를 멸절시키고 인륜을 막아 로 중국 조정에 죄를 짓고 아래로 백성들에게 원한을 사고 있는데 이러한 죄악을 저지른 자가 어떻게 나라의 임금으로서 백성의 부모가 될 수 있으며, 조종의 보위에 있으면서 종묘·사직의 신령을 받들 수 있겠는가. 이에 그를 폐위시키노라.
능양군(綾陽君) 이종(李倧)은 선조대왕 의 손자이고 정원군(定遠君) 이부(李琈)의 첫째 아들인데 총명하고 효성스러우며 비상한 의표를 지니고 있으므로 선조께서 특별히 사랑하시어 궁중에서 키우게 하셨고 그에게 종(倧) 자의 이름을 지어주신 데에는 은미한 뜻이 있었던 것이며, 용상에 기대어 계실 때 그의 손을 잡고 탄식하시며 여러 손자들보다 특별한 관심을 가졌었다. 그런데 이번에 대의를 분발하여 혼란스러운 조정을 토평하고 유폐되어 곤욕을 치르고 있는 나를 구해냈으며 나의 위호(位號)를 회복시켜 주어 윤기(倫紀)가 바르게 되고 종묘사직이 다시 편안하게 되었다. 공덕이 매우 성대하여 신명과 인민이 그에게 귀의하고 있으니 보위에 나아가 선조대왕의 후사를 잇게 하노라. 그리고 부인 한씨(韓氏) 를 책봉하여 왕비로 삼노라. 이리하여 교시하노니, 모두 알라.”
승지 정립(鄭岦), 예조 참의 목장흠(睦長欽)을 보내어 제주 에 가서 노씨(盧氏)를 맞이하여 오게 하였다.【 노씨는 대비의 어머니이다. 대비가 계축년에 서궁(西宮)에 유폐된 이후로 내외와 소식이 격절되었으므로 심지어 연흥부원군(延興府院君)이 추형(追刑)을 당하고 노씨 가 안치된 일에 대해서도 반정이 일어난 뒤에야 듣게 되었다. 노씨 가 늙고 병들어 바다를 건너올 수 없을까 염려되었으므로 특별히 승지·예관을 보내어 간호하여 오게 한 것이다. 대비가 서궁에 유폐되어 있을 때 궁인 연이(連以)가 외부 사람과 소식을 교통했다는 것으로 무함을 받아 참혹한 형벌을 받았다. 이에 광해 가 다시 시녀를 보내어 대신하게 하고 겸하여 기찰도 하게 하였는데, 시녀들이 서궁에 들어온 뒤에는 모두 대비의 편이 되어 성심으로 받들었다. 궁 안에 원래 있었던 의복과 기물이 아무리 오래 사용하더라도 부족하지 않았고 외부에서 전례에 따라 어물·육류·소금·쌀 등의 물품을 끊임없이 공급하였다. 대비는 화란을 겪은 이후 소복을 입고 소식(素食)을 하자 시녀들도 모두 소식을 하였으므로 어육을 담 밖으로 도로 버렸는데 까마귀·솔개가 늘 모여들어 쪼아 먹었고 썩는 냄새가 궁 안에까지 풍겼다. 궁인들이 궁 안의 공지에 채소를 심어 아침ㆍ저녁의 찬거리를 마련하였고, 또 햇솜이 없었는데 궁인 한 사람이 요 속에서 몇 알의 목화씨를 찾아내어 해마다 심어서 솜저고리를 지어 올렸다. 그리고 외부 사람들이 궁 안의 상황을 알지 못하여 어떤 사람은 대비가 벌써 돌아가셨다는 말을 전달하기까지 했었는데, 이 때에 이르러 처음 알게 되었다.】

광해군 1623.03.23(癸丑)
광해 및 이질을 강화(江華)에 옮겨 안치시켰다.【 광해와 폐비 유씨는 같은 집에 안치시키고, 질과 폐빈 박씨를 같은 집에 안치시켰다. 그리고 중사(中使) 및 별장(別將)을 배치시켜 감호하게 하였다.】

인조 1649.05.08(병인)
상이 창덕궁(昌德宮)의 대조전 동침(東寢)에서 승하하였다. 미시에 상의 병이 위독하므로 세자가 의관에게 하령(下令)하니, 의관들이 약을 받들고 달려 들어갔다. 약방 도제조 김자점(金自點), 제조 조경(趙絅), 부제조 김남중(金南重), 주서 이후(李垕), 검열 서필원(徐必遠), 조사기(趙嗣基) 등이 희정당 동쪽에 들어와 앉고, 이윽고 좌의정 이경석(李景奭)도 들어왔는데, 어의(御醫)들이 다 증후가 위독하다고 하였다. 세자가 월랑(月廊)에 자주 나와 어의에게 상의 증후를 말하면 죽력(竹瀝)·청심원(淸心圓) 등의 약을 잇따라 바쳤다. 신시에 세자가 하령하기를,
“상후(上候)가 이에 이르렀는데 중전(中殿)께서 현재 경덕궁(慶德宮)에 계시니 서둘러 모셔왔으면 한다.”
하니, 대신이 함께 아뢰기를,
“하령이 매우 마땅하십니다.”
하고는, 목메어 울었는데, 사관·의관 등도 모두 눈물을 흘렸다. 드디어 승지 박장원(朴長遠) ·가주서 이만길(李晩吉) ·검열 조귀석(趙龜錫) ·병조 참의 김수익(金壽翼)으로 하여금 가서 중전을 맞이하여 오게 하였는데, 내시가 안에서 잇따라 나와 매우 급하게 재촉하니, 중외가 황급하였다. 대신이 내관에게 말하기를,
“힘써 진정하고 일체 동요하지 말라.”
하고, 물러나오려 할 때에 내시가 말을 전하기를,
“동궁께서 머물러 기다리라 하십니다.”
하였다. 호조 판서 원두표(元斗杓)가 밖에서 와서 말하기를,
“예조판서 자리가 비었으니 빨리 차출하소서.”
하고, 대신이 김육(金堉)을 예조판서로, 정세규(鄭世規)를 공조판서로 권차(權差)하기를 청하니, 세자가 그리하라고 답하였다. 대신이, 대장(大將)들은 궁성(宮城)을 호위하라는 뜻을 원두표에게 말하여 내보냈다. 세자가 하령하기를,
“대신은 들어오라.”
하여, 대신과 제조들이 들어가려 하는데, 조사기가 동열(同列)에게 말하기를,
“우리들도 따라 들어가야 한다.”
하니, 이경석이 말하기를,
“사관은 들어올 것 없다.”
하였다. 조사기가 말하기를,
“어찌 대신이 안에 들어가는데 사관이 따르지 않는 이치가 있는가.”
하고, 이후 도 말하였다. 그래서 이후 · 서필원 · 조사기 등이 따라 들어가 침전(寢殿)에 이르니, 상은 이미 말을 하지 못하였다. 김자점 · 이경석 이 방 안에 들어가니, 세자가 말하기를,
“사관은 들어오지 말라.”
하므로, 사관 등은 드디어 문 밖에 서고 조경 · 김남중도 문 밖에 있었다. 세자가 상의 귓가에 대고 말하기를,
“들리십니까? 신이 누구입니까?”
하기를 세 번 하였으나, 상이 답하지 못하였다. 김자점 · 이경석도 말하기를,
“신들이 여기 왔습니다.”
하였으나, 상이 또한 답하지 못하였다. 대신들이 다 물러나왔는데, 김육이 밖에서 들어와 말하기를,
“빙궤고명(憑几顧命) 등의 일을 빨리 거행해야 하겠습니다.”
하니, 김자점이 그렇다고 하였다. 이경석 이 말하기를,
“대제학은 빨리 유교(遺敎)를 지어야 하겠습니다.”
하였으나, 그때 조경이 대제학인데 불가하다 하며 말하기를,
“유교가 없었는데 굳이 거행하려 한다면 곧 명을 사칭하는 것입니다.”
하니, 김자점도 그렇다고 하여 드디어 그만두었다. 세자가 또 대신을 불러 김자점 · 이경석과 조경 · 김남중 · 이후 · 서필원 · 조사기 등이 들어가 침방 안에 이르렀는데, 울부짖는 소리가 이미 궁중에서 났다. 세자의 왼 손가락에 피가 줄줄 흘렀는데, 이는 세자가 손가락을 잘랐으나 대군(大君)의 도움으로 뼈가 절단되지는 않은 것이었다. 중전이 경덕궁 에서 돈화문(敦化門)을 거쳐 협양문(協陽門)으로 들어와 대내(大內)에 돌아올 때에 상이 승하하였는데, 일관(日官)이 막 유시(酉時)를 알린 때였다.
이날 아침에 김자점이 이경석에게 말하기를,
“산천에 기도하지 않아서는 안 되겠습니다.”
하므로, 이경석 이 글로 김신국(金藎國)에게 묻기를,
“임금의 질병에는 반드시 기도를 거행하는데, 선조(先朝)의 고례(古例)는 어떠하며 종묘에 비는 축문(祝文)의 머리말은 또한 어떻게 써야 합니까?”
하니, 김신국이 답하기를,
“전에 들으니, 인종(仁宗)께서 동궁(東宮)에 계실 때에 중종(中宗)을 위하여 기도하였는데 축문의 머리말에 인종의 어휘(御諱)를 썼다 합니다. 이 일이 《회재집(晦齋集)》에 실려 있다 하는데, 그 상세한 것은 기억할 수 없습니다. 백관(百官)이 기도하는 경우는 전례가 있는지 모르겠습니다.”
하였다. 이경석 이 이 말을 세자에게 아뢰니, 조경 을 시켜 글을 짓게 하였다. 이 날 중신(重臣)을 보내어 세자를 대신해서 사직 과 종묘 에 기도하게 하려 하였으나, 미처 거행하지 못하였다.
김자점 · 이경석 · 조경 · 김육 · 김남중 등이 곧 들어가 대행왕(大行王)의 침상 앞에 이르렀는데, 원두표도 들어왔다. 대신이 내시를 시켜 대행왕의 침상을 옮겨 머리를 동쪽으로 할 것을 청하고, 이어서 속광(屬纊)을 행하였다. 속광이 끝나고 내시 두 사람이 전(殿) 지붕 위에 올라가 ‘상위복(上位復)’이라고 세 번 부르니 대신 이하가 곡하고 나왔다. 정원(政院)·옥당(玉堂)·춘방(春坊)의 관원이 옷을 갈아입고 합문 밖에서 곡림(哭臨)하고, 대신이 백관을 거느리고 인정전(仁政殿) 뜰에서 곡림하였다. 내관 나업(羅嶪)이 안에서 나와 무예별감(武藝別監)을 거느리고 들어가 호위하였다. 함릉군(咸陵君) 이해(李澥)를 수릉관(守陵官)으로, 금림군(錦林君) 이개윤(李愷胤)을 대전관(大奠官)으로, 이경석(李景奭)을 총호사(摠護使)로 삼았다. 세자의 영으로 구인전(具仁廛)과 정선흥(鄭善興)을 불러 대내에 들어와 상사(喪事)를 돌보게 하였는데, 두 사람은 다 내척(內戚)이다.
닷새가 지난 5월 12일에 의례(儀禮)대로 대렴(大殮)하고, 엿새가 지난 13일에 의례대로 성복(成服)하고 세자가 인정문(仁政門) 에서 즉위하고 뭇 신하를 거느리고 ‘ 헌문 열무 명숙 순효(憲文烈武明肅純孝) ’라는 시호를 올리고 ‘ 인조(仁祖) ’라는 묘호(廟號)를 올렸다. 다섯 달이 지난 9월 20일에 장릉(長陵)에 장사지냈다. 좌의정 이경석(李景奭)이 행장(行狀)을 지어 바치고, 대제학 조경이 지문(誌文)을 짓고, 대사헌 조익(趙翼) 이 시책(諡冊)을 지어 바치고, 제학 김광욱(金光煜)이 애책(哀冊)을 지어 바쳤다.

효종(孝宗 봉림대군 1619.05.22 - 1649.05.08-1659.05.04 갑자(甲子)>
상이 대조전에서 승하하였다. 약방 도제조 원두표(元斗杓), 제조 홍명하(洪命夏), 도승지 조형(趙珩) 등이 대조전의 영외(楹外)에 입시하고 의관 유후성(柳後聖) · 신가귀(申可貴) 등은【이때 신가귀는 병으로 집에 있었는데 이날 병을 무릅쓰고 궐문(闕門) 밖에 나아가니, 드디어 입시하라고 명하였다.】 먼저 탑전에 나아가 있었다. 상이 침을 맞는 것의 여부를 신가귀에게 하문하니 가귀가 대답하기를,
“종기의 독이 얼굴로 흘러내리면서 또한 농증(膿症)을 이루려 하고 있으니 반드시 침을 놓아 나쁜 피를 뽑아낸 연후에야 효과를 거둘 수 있습니다.”
하고, 유후성은 경솔하게 침을 놓아서는 안 된다고 하였다. 왕세자가 수라를 들고 난 뒤에 다시 침을 맞을 것을 의논하자고 극력 청하였으나 상이 물리쳤다. 신가귀에게 침을 잡으라고 명하고 이어 제조 한 사람을 입시하게 하라고 하니, 도제조 원두표가 먼저 전내(殿內)로 들어가고 제조 홍명하 , 도승지 조형 이 뒤따라 곧바로 들어갔다. 상이 침을 맞고 나서 침구멍으로 피가 나오니 상이 이르기를,
“ 가귀가 아니었더라면 병이 위태로울 뻔하였다.”
하였다. 피가 계속 그치지 않고 솟아 나왔는데 이는 침이 혈락(血絡)을 범했기 때문이었다. 제조 이하에게 물러나가라고 명하고 나서 빨리 피를 멈추게 하는 약을 바르게 하였는데도 피가 그치지 않으니, 제조와 의관들이 어찌할 바를 몰랐다. 상의 증후가 점점 위급한 상황으로 치달으니, 약방에서 청심원(淸心元)과 독삼탕(獨參湯)을 올렸다. 백관들은 놀라서 황급하게 모두 합문(閤門) 밖에 모였는데, 이윽고 상이 삼공(三公)과 송시열(宋時烈) · 송준길(宋浚吉), 약방제조를 부르라고 명하였다. 승지·사관(史官)과 제신(諸臣)들도 뒤따라 들어가 어상(御床) 아래 부복하였는데, 상은 이미 승하하였고 왕세자가 영외(楹外)에서 가슴을 치며 통곡하였다. 승하한 시간은 사시(巳時)에서 오시(午時) 사이였다.

현종 1659.05.09(己巳) - 1674.08.18(己酉)
성복(成服)하였다. 왕세자가 인정전(仁政殿)에서 즉위하였다. 백관이 진하(陳賀)하고, 사면령을 내리고, 중외에 교서(敎書)를 반포하였다.

현종(顯宗 1659.05.09(己巳)
상의 병이 크게 위중해지더니 이날 밤 해시에 창덕궁의 재려(齋廬)에서 승하하였다.

숙종(肅宗 1674.08.18 - 1720.06.08(癸卯)
임금이 승하(昇遐)하였다. 시약청(侍藥廳)의 세 제조(提調)와 사관(史官) 등이 어제 저녁부터 입시(入侍)하여 밤을 새우고 기둥 밖으로 물러나왔는데, 조금 후에 날이 밝았다. 도제조(都提調) 이이명(李頤命)이 환시(宦侍)로 하여금 중궁(中宮)께 아뢰기를,
“날이 이미 밝았으니, 신 등이 잠시 물러갔다가 문안(問安)드릴까 합니다.”
하였다. 이윽고 빠른 걸음으로 걸어 나오자 사관(史官)이 뒤따라 나왔는데, 막 시약청에 이르자 환관(宦官)이 급히 나와 내교(內敎)를 전하기를,
“우선 문안드리지 말고 빨리 들어오라.”
하였다. 이이명 등이 사관과 함께 황급히 달려 들어가니, 연잉군(延礽君)이 이이명을 맞으며 말하기를,
“드셨던 약물(藥物)을 모조리 토해 내셨습니다.”
하였다. 여러 신하들이 와내(臥內)로 들어가니, 임금이 목구멍 속에 담(痰) 끓는 소리가 크게 났다. 환시(宦侍)가 큰소리로 조정(朝廷)·승정원(承政院)·옥당(玉堂)이 문안드린다고 아뢰었으나, 임금이 알아듣지 못하였다. 도승지 윤헌주(尹憲柱)가 세자에게 고하기를,
“감군(監軍)의 단자(單子)는 성상의 환후가 이와 같으시니 낙점(落點)할 수가 없겠습니다. 어제 낙점한 것으로 그대로 시행하는 것이 어떻겠습니까?”
하니, 세자가 허락하였다. 연잉군이 내전(內殿)으로부터 나와 말하기를,
“다만 부원군(府院君)만 남아 있고 도제조 이하의 관원들은 조금 물러가 있으라.”
하였다. 세 제조와 사관이 물러나 기둥 밖에 엎드려 있었는데, 이때 궁녀(宮女)들의 울부짖는 소리가 밖에까지 들렸고 환시들도 눈물을 흘리며 몹시 바쁘게 다녔다. 조금 후에 부원군 김주신(金柱臣)이 나와 기둥 밖에 이르러 이이명에게 말하기를,
“내전(內殿)께서 그래도 만에 하나 성상의 병세가 회복되기를 기대하시므로, 방금 다시 어떻게 해 볼 도리가 없다는 뜻으로 주달(奏達)하였습니다.”
하였다. 이윽고 내시(內侍)가 여러 신하들을 불러서 도로 들어가니, 중궁(中宮)이 연잉군으로 하여금 전교(傳敎)하게 하기를,
“일찍이 듣건대 ‘ 명성 왕후(明聖王后)께서 병환이 나셨을 때는 단지 가슴 앞에 한 점(點)의 미지근한 온기(溫氣)가 있을 뿐이었는데도 능히 회복을 하셨다.’ 한다. 성상의 병환이 비록 위중하기는 하지만 가슴과 배에 모두 온기(溫氣)가 있으니, 약물(藥物)을 신중히 써서 기필코 회복을 기약하도록 하라.”
하였다. 이이명이 대답하기를,
“만일 할 수 있는 방도만 있다면 감히 정성을 다하지 않겠습니까?”
하였다. 중궁이 또 연잉군으로 하여금 나와 전교하게 하기를,
“ 금평위(錦平尉) 박필성(朴弼成) · 동평위(東平尉) 정재륜(鄭載崙) · 임창군(臨昌君) 이혼(李焜) ·어영대장(御營大將) 김석연(金錫衍) 【바로 주상의 내구(內舅)이다.】과 시임(時任)·원임(原任) 대신(大臣)들을 모두 동궁(東宮)에게 품하여 입시(入侍)하게 하라.”
하고, 또 연잉군을 시켜서 이이명에게 묻기를,
“ 원명귀(元命龜) 【 숙경 공주(淑敬公主)의 아들이다.】· 정건일(鄭健一) 【 숙휘 공주(淑徽公主) 의 아들이다.】· 김도협(金道浹) 【 김석연(金錫衍) 의 아들이다.】 등을 모조리 같이 불러들이는 것이 어떻겠는가?”
하니, 이이명이 대답하기를,
“너무 광범위합니다.”
하였다. 연잉군이 들어가 아뢰고, 다시 나와 심정보(沈廷輔) 【 숙명 공주(淑明公主)의 아들이다.】를 부르라고 명하였다. 또 어유귀(魚有龜) · 김동필(金東弼) 두 사람을 불러들이라고 명하니, 이이명이 말하기를,
“이런 때에 어찌하여 반드시 인척을 다 불러들이겠습니까? 부디 이런 뜻으로 품주(稟奏)하소서.”
하였다. 연잉군이 들어가 아뢰고 나와 내교(內敎)를 전하기를,
“진달한 바가 옳다.”
하였다. 이에 시임·원임의 여러 대신이 다 같이 와내(臥內)로 들어왔는데, 이이명이 어탑(御榻) 아래로 나아가 큰 소리로 아뢰기를,
“시임·원임 대신이 들어왔습니다.”
하고, 영의정(領議政) 김창집(金昌集)이 또 큰소리로 아뢰기를,
“소신(小臣) 창집 등이 들어왔습니다.
하였으나, 임금이 알아듣지 못하였다. 연잉군이 어수(御手)를 붙들고 울면서 말하기를,
“손가락이 이미 다 푸른색으로 변했습니다.”
하였다. 의관(醫官)이 나아가 콧마루를 살피고, 이어서 진맥(診脈)을 한 뒤 물러나와 말하기를,
“오른쪽 맥(脈)이 먼저 끊어졌고, 왼쪽의 맥은 바야흐로 들떠 흔들리며 안정이 되지 않고 있습니다.”
하였다. 중궁이 환시를 시켜서 전교하기를,
“종전에 약(藥)을 쓰는 길이 잘못되었기에 이미 이런 지경에 이른 것이다. 이런 때에 약을 쓰기란 더욱 어려우니, 반드시 상세히 살펴서 쓰라.”
하니, 이이명이 울면서 대답하기를,
“신 등이 보호(保護)하는 처지에 있으니, 비록 하교(下敎)가 없으시더라도 어찌 십분 상세히 살피고 싶지 않겠습니까? 하지만 본래 약리(藥理)에 어두운 까닭으로 이런 지경에 이르렀으니, 죽어도 여죄(餘罪)가 있습니다. 지금 약을 쓰는 길이 여러 가지가 있기에 바야흐로 세심하고 신중히 골라쓰고는 있으나 그것이 합당한지 합당하지 않은지는 알지 못하겠습니다.”
하였다. 조금 후에 임창군(臨昌君) 혼(焜) · 동평위(東平尉) 정재륜(鄭載崙) · 금평위(錦平尉) 박필성(朴弼成) ·어영대장(御營大將) 김석연(金錫衍) ·원주 목사(原州牧使) 심정보(沈廷輔)가 들어왔다. 이이명이 연잉군에게 묻기를,
“지난번 시약청을 설치할 때 빈전(嬪殿)의 일로 하교한 바가 있었는데, 선정전(宣政殿) 은 창덕궁(昌德宮)에 있어서 불편하여 시행하기 어려운 단서가 있습니다. 그때 진달하고자 하였으나 차마 아뢰지 못하였습니다.”
하니, 연잉군이 말하기를,
“이것은 바로 유교(遺敎)이니, 어찌 차마 어기겠는가?”
하였다. 이때 여러 신하들이 모두 조용히 탑전(榻前)에 엎드려 있었는데, 임금이 기식(氣息)과 담향(痰響)이 점차 가늘어지다가 갑자기 크게 토한 뒤 드디어 승하(昇遐)하였다. 이때가 바로 진정(辰正) 2각(二刻)이었는데, 북쪽 협실(夾室) 안에서 일시에 울부짖고 곡(哭)하며 문을 밀치고 나오려 하다가 연잉군이 문을 막고 금하자 환시가 수족(手足)을 정돈하였다. 중궁(中宮)이 연잉군을 시켜 전교(傳敎)하기를,
“초상(初喪)에 있어서의 모든 일들을 중궁이 주관하라는 뜻으로 직접 성상의 하교를 받았다. 이제 마땅히 이것에 의거하여 시행할 것이니, 대신(大臣)은 모름지기 이 뜻을 알아야 할 것이다.”
하니, 김창집이 부복(俯伏)하여 말하기를,
“삼가 마땅히 전교를 받들겠습니다.”
하였다. 이때 밖에 있던 여러 승지와 종척(宗戚)들이 모두 들어왔다. 대신(大臣) 이하가 흐느껴 울면서 허둥지둥 어쩔 줄을 몰랐다. 《오례의(五禮儀)》와 등록(謄錄)을 들추어 열람하면서 임금이 승하하신 시각이 꽤 오래 되었는데도 곧바로 속광(屬纊)을 하지 않았다. 승지 한중희(韓重熙)가 갑인년의 일기(日記)를 예조판서(禮曹判書) 이관명(李觀命)에게 보이며 말하기를,
“그때는 장선징(張善瀓)이 예조 판서로서 속광을 행하였으니, 오늘은 그대가 마땅히 속광하여야 합니다.”
하니, 이관명이 말하기를,
“ 장선징은 바로 척속(戚屬)이었기 때문이었다. 나는 불가하다.”
하였다. 여러 의론이 박필성(朴弼成)과 혼(焜)으로 하여금 하게 하려고 하였는데, 결정이 나지 않았다. 우의정(右議政) 이건명(李健命)이 손에 의주(儀註)를 들고 방(房)으로 들어와 말하기를,
“속광의 절차는 내척(內戚)이 마땅히 행해야 할 것이니, 심정보(沈廷輔)로 하여금 하도록 하는 것이 좋겠다.”
하였다. 이때 심정보가 대궐 밖으로 나가서 곧 들어오지 않았으므로 찾느라고 어수선한 사이에 내시(內侍)가 이미 속광(屬纊)하였다. 중궁이 연잉군을 시켜 전교하기를,
“성상께서 평일에 매양 습렴(襲殮) 등의 여러 가지 절차를 기필코 정제(整齊)하게 하라는 뜻으로 누누이 하교하셨다. 대신(大臣)들은 부디 이 뜻을 깊이 체념하여 큰일은 내간(內間)에 품하고 세세한 절차는 짐작하여 시행하되, 반드시 꼭 정성을 쏟도록 하라.”
하니, 김창집과 이건명이 대답하기를,
“감히 마음을 다하지 않을 수 있겠습니까?”
하였다. 대신(大臣)이 내시 두 사람으로 하여금 호복(呼復)19713)을 하게 하니, 내시 두 사람이 함(函)에다 강사 곤룡포(絳紗袞龍袍)를 담아 대궐 지붕으로 올라가 세 번 주상의 존호(尊號)를 불렀다. 내시가 남쪽 협실(夾室)에서 왕세자(王世子)를 부축하고 나와 입(笠)과 사포(紗袍)를 벗기고 머리를 풀고 거애(擧哀)19715) 하였다. 연잉군이 옷을 벗고 머리를 풀고 기둥 밖에서 거애하였다. 대신 이하가 침문(寢門) 밖에서 부복(俯伏)해 거애하였는데, 뒤죽박죽으로 질서가 없었다. 곡이 끝나자 김창집이 주서(注書)로 하여금 ‘상대점(上大漸)’이란 세 글자를 써서 외정(外庭)에 내다보이게 하였다. 이때 비가 퍼붓듯 크게 쏟아졌다. 백관(百官)들이 세 곳에 나뉘어 모여 있었는데, 주서가 두루 돌아다니며 들어 보이니, 백관들이 모두 곡하였다. 대신이 마침내 외정으로 물러나와 옷을 바꿔 입고 백관을 인솔하여 거애한 뒤 숭정전(崇政殿) 의 동쪽 월랑(月廊)에 모였다. 승정원(承政院)·옥당(玉堂)·춘방(春坊) ·익위사(翊衞司) 등은 흥태문(興泰門) 밖에 모였다.

경종(景宗 1720.06.13 - 1724.08.25(을미)
경종 1720.06.13(戊申)
임금이 경덕궁(慶德宮)에서 즉위(即位)하였다. 정원(政院)·옥당(玉堂)·춘방(春坊)의 관원이 조복(朝服)을 갖추고 자정문(資政門) 밖 동쪽 뜰에서 열지어 앉아 욕위(縟位)를 설정(設定)하였다. 김창집(金昌集)이 말하기를,
“사위(嗣位)할 때에 명보(明寶)를 쓰는 것은 대행 대왕(大行大王)의 유교(遺敎)입니다.”
하고, 드디어 중궁전(中宮殿) 승전색(承傳色)을 불러 아뢰게 하였다. 예조판서(禮曹判書) 이관명(李觀命)이 여차(廬次)에 나아가 최복(衰服)을 벗고 면복(冕服)을 갖추기를 청하였다. 통례(通禮)가 집화문(集和門) 밖에서 나오기를 청하니, 사왕(嗣王)이 평천구류관(平天九旒冠)을 쓰고 흑면복(黑冕服)을 착용하고, 큰 띠[帶]를 띠고 붉은 신을 신고 청규(靑圭)를 가지고 걸어서 집화문을 나갔다. 사왕(嗣王)이 욕위(縟位)에 나아가 사배(四拜)한 후에 향안(香案) 앞에 오르니, 김창집이 빈전(殯殿)에 나아가 대보(大寶)를 가져다 바쳤다. 사왕이 대보를 받아 도승지(都承旨)에게 주고 욕위에 나아가 사배례(四拜禮)를 행하고는 걸어서 숭정문(崇政門) 동쪽 협문(夾門)을 나갔다. 정문(正門)의 중앙에 어좌(御座)를 베풀었는데, 사왕이 어좌의 동쪽에 서서 사양하고 나아가지 않다가, 승지와 대신이 앞으로 나아가 힘써 청하니 비로소 어좌에 올랐다. 3품 이상은 조복(朝服)을 갖추어 입고 3품 이하는 흑단령(黑團領)을 갖추어 입었다. 백관이 머리를 조아리고 산호천세(山呼千歲)를 부르니, 환궁(還宮)하였다.

경종 1724.08.25(을미)
이날 사시(巳時)에 왕세자가 숭정문(崇政門) 에서 사위(嗣位)하였다.
밤에 유성(流星)이 앙성(昻星) 아래에서 나왔으며 또 정성(井星) 위에서도 나왔다. 축각(丑刻)에 임금이 환취정(環翠亭)에서 승하(昇遐)하니, 내시(內侍)가 지붕에 올라가 고복(皐復)을 하고 곧 거애(擧哀)를 하였다. 예조(禮曹)에서 세제(世弟)가 피발(被髮)을 하는 것이 마땅한지 아니한지를 가지고 유신(儒臣)들에게 문의하였는데, 유신 등이 말하기를,
“ 《오례의(五禮儀)》 참최변복조(斬衰變服條)에 왕세자(王世子)와 대군(大君) 이하가 피발하는 글이 있는데, 저하(邸下)가 대행대왕(大行大王)2161) 에게는 왕통(王統)을 계승(繼承)하는 의(義)가 있으니, 상복(喪服)을 변통하는 절차는 당연히 《오례의》에 의거하여 거행하여야 합니다.”
하니, 세제가 드디어 피발을 하였다. 임금은 타고난 성품이 인자(仁慈)하고 덕스러운 의용(儀容)이 혼후(渾厚)하였으며, 인현왕후(仁顯王后)를 섬기는 데 성효(誠孝)를 돈독히 다하였고, 어린 나이에 일찍 학문이 이루어졌으며, 또한 물욕(物慾)의 누(累)도 없었다. 불행한 소조(所遭)에 걸려서 변통하며 지내는 데 지극히 어려움이 있었는데도 그에 대해 헐뜯고 칭찬함이 전혀 중외(中外)에 들리는 바가 없으니, 사람들은 모두 신성(神聖)한 덕(德)이 있다고 하였다. 그러나 근심과 두려움이 쌓여 병을 이루었고 깊어갈수록 더욱 고질화해서, 즉위한 이래로 정사(政事)를 다스리는 데 게을리하였고 조회에 임하여는 침묵으로 일관하였으며 정사를 여러 아랫 신하들에게 맡겼는데, 그런데도 승하하신 날에는 뭇 신하들과 백성이 달려와 슬피 부르짖지 않는 사람이 없었으니, 아! 그 애통함을 백성에게 베풀지 않았는데도 백성은 애통해 하였고 공경(恭敬)함을 백성에게 베풀지 않았는데도 백성은 공경하였다고 이를 만하다. 12월 16일 을유(乙酉)에 의릉(懿陵)에 안장(安葬)하였다.

영조(英祖) 1724.08.30 - 1776.03.05(병자)
영조 1724.08.30(更子)
경종 대왕(景宗大王) 4년【 청(淸)나라 옹정(雍正) 2년이다.】 8월 을미(乙未)【25일이다.】에 경종 대왕이 창경궁(昌慶宮) 환취정(環翠亭)에서 승하(昇遐)하였다. 그 후 6일째 되는 날인 경자 오시(午時)에 왕세제(王世弟)가 창덕궁(昌德宮) 인정문(仁政門)에서 즉위(卽位)하였다. 원상(院相)·승지(承旨)·사관(史官)은 조복(朝服) 차림으로 돈례문(敦禮門) 밖 서정(西庭)에 동쪽을 향하여 앉고, 홍문관(弘文館)은 승정원(承政院)의 다음에 앉고, 시강원(侍講院)은 동정(東庭)에 서쪽을 향하여 앉고, 익위사(翊衛司)는 시강원의 다음에 앉고, 병조(兵曹)·도총부(都摠府)는 융복(戎服) 차림으로 동쪽·서쪽에 앉아서 때가 되기를 기다렸다. 왕세제(王世弟)가 최복(衰服)을 벗고 면복(冕服) 차림으로 여차(廬次)에서 나오니, 좌통례(左通禮)가 왕세제를 인도하여 대행 대왕(大行大王)의 빈전(殯殿)에 나아가 서계(西階)를 거쳐 욕위(褥位)에 올라갔다. 찬의(贊儀)가 큰 소리로, ‘배(拜), 궤(跪)’ 하고 선창(先唱)하니, 좌통례(左通禮)가 낮은 소리로 ‘궤(跪)하소서.’ 하고, 고하기를,
“사왕(嗣王)은 보위(寶位)를 받으소서.”
하였다. 상향례(上香禮)를 마치고 왕세제(王世弟)가 내려와 막차(幕次)로 들어갔다. 조금 있다가 막차에서 나와 걸어서 돈례문(敦禮門)의 동쪽 협문(夾門)을 지나 동계(東階)로 내려가 연영문(延英門) 을 거쳐 남쪽으로 가다가 서쪽으로 꺾어 숙장문(肅章門)의 동쪽 협문(夾門)으로 나가서 북쪽으로 꺾어 인정문(仁政門)의 동쪽 협문 밖에 이르러 멈추어 섰다. 그 곳 한복판에 어좌(御座)를 설치하였는데, 왕세제가 어좌에 올라가니 백관(百官)이 네 번 절하고 ‘천세(千歲)!’ 하고 호창(呼唱)하였다. 임금이 어좌에서 내려와 인정문(仁政門)의 동쪽 협문(夾門)으로 들어가 인정전(仁政殿) 정로(正路)를 거쳐 인정전 에 올라갔다. 임금이 여차(廬次)로 돌아와 면복(冕服)을 벗고 최복(衰服)을 다시 입었다. 이보다 4일 전에 예조(禮曹)에서 사위(嗣位)하는 절목(節目)을 올렸는데, 왕세제가 영지(令旨)를 내려 돌려주게 하였다. 의정부(議政府)에서 백관(百官)을 거느리고 하루 세 번씩 도로 올렸으며, 승정원(承政院)· 사헌부(司憲府) ·사간원(司諫院)·홍문관(弘文館)에서도 번갈아 계청(啓請)하였으나, 윤허(允許)하지 아니하였다. 성복(成服)하는 날에 이르러 외부 의식이 이미 마련된 다음에 원상(院相) 이광좌(李光佐)가 여차(廬次) 앞에 이르러 면복(冕服)으로 갈아입기를 간청하였으나, 왕세제가 눈물을 흘리며 점침(苫枕)7) 에 엎드려서 끝내 허락하지 아니하였다. 이광좌가 왕대비전(王大妃殿)과 왕비전(王妃殿)의 승전색(承傳色)을 불러 구전(口傳)으로 내전(內殿)에서 나아가도록 계청(啓請)하니, 왕대비전과 왕비전에서 언문 교지(諺文敎旨)를 내려 나아가도록 권유하였다. 그제서야 왕세제가 남여(籃輿)를 물리치고 걸어서 어좌(御座) 앞에 이르렀는데, 그래도 울부짖으며 어좌에 오르지 않고 말하기를,
“내가 옛날에 여기에서 영고(寧考)를 모셨었는데 지금 무슨 마음으로 어좌에 오를 수 있겠는가?”
하고, 목이 메어 소리를 내지 못하였다. 이광좌 등이 누누이 간청하니, 한참 후에 등극(登極)하였다. 정시(正時)가 되니, 예조(禮曹)에서 비로소 사시(巳時)가 되었다고 계하(啓下)하였다. 오시(午時)에 이르러 마침내 즉위(卽位)하고, 혜순 자경 왕대비(惠順自敬王大妃) 김씨(金氏) 를 높여 대왕대비(大王大妃)로, 왕비(王妃) 어씨(魚氏)를 왕대비(王大妃)로, 빈(嬪) 서씨(徐氏)를 왕비(王妃)로 삼고, 마침내 인정문(仁政門)에서 교서(敎書)를 반포(頒布)하였는데, 이르기를,
“왕은 말하노라. 하늘이 어찌 차마 이런 재앙을 내리는가? 거듭 큰 상(喪)을 만났는데, 나라에는 임금이 없을 수 없으므로 억지로 군하(群下)의 청을 따랐노라. 지극한 슬픔을 억제하기 어려운데 보위(寶位)가 어찌 편하겠는가? 삼가 생각하건대, 대행 대왕(大行大王)께서는 타고난 천성이 관대하고 어질었으며 그 마음은 효우(孝友)하였다. 저위(儲位)에 있은 지 30년에 온 국민이 목숨을 바칠 정성이 간절하였고, 조정의 정사를 대리한 지 4년에 성고(聖考)께서는 수고로움을 나누는 기쁨이 있었다. 남몰래 부각된 실덕(實德)은 지극히 어려움을 겪으면서도 마침내 정고(貞固)8) 하게 대처했고, 말없이 운용한 신기(神機)는 지극히 비색함을 돌려서 태평하게 하였다. 하늘이 널리 덮어서 만물을 길러주어 모두 형통하게 하고, 태양이 높이 매달려 퍼지는 불길한 기운을 신속하게 쓸어버렸네. 놀이와 사냥과 음악과 여색은 하나도 좋아함이 없었으므로, 정령(政令)을 시행함에 있어 모두 그 적절함을 얻었다. 위대하신 선왕(先王)의 덕을 크게 이어받았으니, 거의 삼대(三代)9) 의 다스림을 회복할 수 있었으나, 기거(起居)도 못하고 잠도 이루지 못하다가 문득 구령(九齡) 의 징조를 잃었도다. 반야(半夜) 사이에 갑자기 빙궤(憑几)의 유명(遺命)을 받게 될 줄 누가 알았겠는가? 불행하게도 5년 안에 두번이나 승하(昇遐)의 슬픔을 품게 되었으니, 애처로운 나는 고아[嬛孤]로서 이렇게 혹독한 벌을 받게 되었다. 여차(廬次)에서 곡읍(哭泣)을 하며 명령을 내릴 경황이 없었는데, 왕위(王位)에 오를 면복(冕服) 차림으로 어찌 차마 대통(大統)을 계승할 생각을 할 수 있겠는가? 비록 백료(百僚)들의 요청이 더욱 간절하다 하나, 다만 슬픈 감회만 더할 뿐이다. 돌이켜 보건대, 양전(兩殿)께서 특별히 간곡하게 권유(勸諭)하시니, 감히 초지(初志)를 고집할 수 있겠는가? 윤리(倫理)로는 형제이고 의리로는 부자이니, 진실로 지극히 애통함이 끝이 없다. 조종(祖宗)을 계승하여 신민(臣民)의 주인이 되었으나 보잘것없는 몸이 감당하기 어려움을 어찌하겠는가? 환규(桓圭)12) 를 잡고서 오동잎[桐葉]의 희롱을 생각하였고, 법전(法殿)에 임해서 동기간(同氣間)에 쓸쓸함을 슬퍼하노라.
갱장(羹墻)의 사모함이 간절하니 차례를 계승하는 생각 잊을 수가 없고, 근심이 더욱 깊었으니 임금이 되는 것이 어찌 기쁘겠는가? 높은 지위에 오르니 두려움이 마음을 놀라게 하고, 성대한 의식을 보니 끊임없이 눈물만 흐른다. 선왕(先王)의 성덕(盛德)과 선행(善行)에 뒤따라 이어가기를 어찌 바라겠는가? 열성(列聖)의 대업(大業)과 큰 규모(規模)를 무너뜨릴까 매우 걱정이로다. 조종(祖宗)께서 잇따라 멀리 떠남을 슬퍼했으니, 나라를 장차 어떻게 다스릴 것이며, 인종(仁宗) · 명종(明宗)처럼 서로 계승하기를 내가 어찌 감히 본받을 수 있겠는가? 이에 중외(中外)에 널리 알려서 사민(士民)과 기쁨을 함께하리라. 비록 옛 나라이나 새로운 명을 받았으니, 정치는 시작을 잘해야 할 기회를 당했고, 허물과 수치를 깨끗이 씻어내기 위하여, 이에 함께 살기 위한 인덕(仁德)을 베푸노라. 이달 30일 새벽 이전부터 잡범(雜犯)으로서 사죄(死罪) 이하는 모두 사면(赦免)하고, 관직(官職)이 있는 자는 각각 한 자급(資級)을 올려 주되 자궁자(資窮者)는 대가(代加)하게 한다. 아! 편안하고 위태로움과 다스려지고 혼란스러운 계기가 처음 시작에 있지 않음이 없으니, 협력하여 도와주어 유지할 수 있는 힘은 오직 여러 신하에게 기대하노라. 그래서 이렇게 교시(敎示)하니, 잘 알 것으로 생각한다.”


영조 1776.03.05(병자)
묘시(卯時)에 임금이 경희궁(慶熙宮)의 집경당(集慶堂)에서 승하(昇遐)하였다. 임금이 대점(大漸)하여 장차 고복[復]하려 할 때에 영의정 김상철(金尙喆)이 말하기를,
“복의(復衣)는 곤룡포(袞龍袍)로 해야 하고, 고복한 뒤에는 왕세손이 침문(寢門) 밖에 나가 거애(擧哀)해야 합니다.”
하니, 왕세손이 말하기를,
“황급한 때에는 모든 일이 전도되고 틀리게 되기 쉬우니, 《상례보편(喪禮補編)》을 상고해 보는 것이 옳겠다.”
하였다. 내시(內侍)가 복의를 받들고 동쪽 낙수받이에 사닥다리를 놓고 올라가 고복하였다. 끝나고서 협시(挾侍)가 왕세손을 부축하여 침문 밖에 나가 거애(擧哀)하였다. 이때 대신(大臣)은 북영(北楹) 밖의 서쪽 가까운 곳에 서고 승지(承旨)·사관(史官)은 동영(東楹) 안팎에 서고 궁관(宮官)은 북영 밖에 서서 마주 보고 집사관(執事官)은 어상(御床) 앞에 서고 예관(禮官)은 동계(東堦) 위에 서서 서쪽을 향하여 고복이 끝나기를 기다렸다가, 예방 승지가 복의를 받들어 어상 옆에 놓으니, 비로소 자리[位]를 설치하고 곡(哭)하였다. 액정서(掖庭署)에서 청사에 점차(苫次)19496) 를 설치하고 협시가 왕세손을 부축하여 점차로 갔다. 왕세손이 부복(俯伏)하고 곡하여 극진히 애도하고, 대신과 입참(入參)한 여러 신하와 내시 이하가 모두 곡하였다. 조정(朝廷)에서 중궁전(中宮殿)에 정후(庭候)하고 정원(政院)·옥당(玉堂)·약방(藥房)에서 중궁전·혜빈궁(惠嬪宮)·세손궁(世孫宮)·빈궁(嬪宮)에 정후하였다.
사신(史臣)은 말한다. “우리 대행대왕(大行大王)은 53년 동안의 인수(仁壽)한 정치와 희흡(熙洽)한 교화가 넘치고 풍부하며, 성대한 덕과 지극한 선(善)이 백왕(百王)에 뛰어나고 깊은 인애(仁愛)와 두터운 은택이 사람들의 피부와 뼈에 두루 미쳤다. 이것은 지극히 크고 지극히 넓은 천지(天地)와 같아서 한 사신(史臣)이 그 만분의 일이라도 그려 낼 수 있는 것이 아니나, 더욱이 지극히 효성스럽고 지극히 우애로운 행실은 험난을 겪고서 더욱 나타나고 지극히 인자하고 지극히 밝은 덕은 종사(宗社)를 더욱 굳게 하셨다. 구순(九旬)의 정섭(靜攝)하는 가운데에서도 영구한 계책을 깊이 생각하고 큰 계책을 빨리 결정하시어 우리 왕세손 저하에게 명하여, 기무(機務)를 대섭(代攝)하게 하여 인심을 일찍 붙이고 군흉(群凶)이 엿보는 간사한 싹을 미리 꺾어서 나라의 반석(磐石)· 태산(泰山) 같은 큰 기업(基業)을 영구히 세우셨으니, 아! 아름답고 성대하다. 만년에 옥후(玉候)가 점점 더 깊어져 오래 끌다가 마침내 대점(大漸)에 이르러, 우리 춘궁 저하(春宮邸下)가 근심을 머금고 아픔을 품게 하시어, 울부짖는 슬픔과 부여잡고 가슴 치는 통곡이 신하들을 감동시켜 차마 우러러볼 수 없었으니, 아! 마음 아프다.”
7월 27일 유시(酉時)에 원릉(元陵) 【 건원릉(健元陵) 오른쪽 둘째 산등성이에 있다.】에 장사하였다.

정조(正祖 1776.03.10 - 1800.06.28(己卯)
1776.03.10()
영종 대왕 52년(1776)【 청나라 건륭 41년이다.】 3월 병자일(丙子日)에 영종이 훙(薨)하고, 6일 만인 신사일(辛巳日)에 왕이 경희궁(慶熙宮)의 숭정문(崇政門) 에 즉위하였다. 왕은 영종 28년(1752)【임신년이다.】 9월 기묘일(己卯日)【22일 축시(丑時)이다.】 창경궁(昌慶宮)의 경춘전(景春殿)에서 탄생하였다. 처음 장헌 세자가 신룡(神龍)이 구슬을 안고 침실로 들어오는 꿈을 꾸고서, 꿈을 깬 다음에 손수 꿈속에서 본 대로 그림을 그리어 궁중벽에 걸어 놓았었다. 탄생하면서 영특한 음성이 큰 종이 울리듯 하므로 궁중 안의 사람들이 모두 놀랐는데, 영종 이 친림하여 보고서 매우 기뻐하며 혜빈(惠嬪)에게 하교하기를, ‘이 애는 너무도 나를 닮았다. 이런 애를 얻었으니 종사가 근심이 없게 되지 않겠느냐?’ 하고, 그날로 원손(元孫)으로 호를 정하였다. 30년(1754)【갑술년이다.】 가을에 보양청(輔養廳)을 설치했고 35년(1759)【기묘년이다.】 2월 계해일(癸亥日)에 왕세손(王世孫)으로 책립(冊立)되었다가 윤6월 경자일(庚子日)에 명정전(明政殿)에서 책(冊)을 받게 되었고, 37년(1761)【신사년이다.】 3월 기유일(己酉日)에 입학하였고 8일 만인 정사일(丁巳日)에 경현당(景賢堂)에서 관례(冠禮)를 행하고 38년(1762)【임오년이다.】 2월 병인일(丙寅日)에 어의궁(於義宮) 【 효종(孝宗) 의 잠저(潛邸)인 곳이다.】에서 가례(嘉禮)를 거행하니, 빈(嬪)은 김씨(金氏)이다.【본적은 청풍(淸風)이고 청원부원군(淸原府院君) 김시묵(金時默)의 딸이다.】 윤5월에 장헌 세자가 훙하였고, 7월에 명(明)나라 의 고사에 의하여 세손궁(世孫宮)을 동궁(東宮)으로 칭하며 다시 춘방(春坊)1) 과 계방(桂坊)2) 을 설치했고, 40년(1764)【갑신년이다.】 2월 임인일(壬寅日)에 왕을 효장 세자(孝章世子)의 후사로 삼아 종통(宗統)을 이어받도록 하고, 51년(1775)【을미년이다.】 12월 경술일(庚戌日)에 서정(庶政)을 대청(代聽)하며 경현당(景賢堂)에서 조하(朝賀)를 받았다. 이에 이르러 영종 이 세상을 떠나게 되자 왕이 정도에 지나치게 슬퍼하며 물이나 미음도 들지 않았고, 상사(喪事) 이외의 일은 명계(命戒)하는 바가 없었다. 대신과 여러 신하들이 왕위를 이어 받기를 청하였으나 왕이 울며 허락하지 않았고, 여러 날을 정청(庭請)하는 동안 계사(啓辭)가 올라오면 그만 울기만 하다가, 성복(成服)하는 날에 이르러서야 비로소 억지로 따르며 하교하기를, ‘뭇 신하들의 심정에 몰리어 장차 왕위에 서기는 하겠지만, 면복(冕服)차림으로 예식을 거행하기는 내 마음 속에 더욱 두려움을 느끼게 된다. 이 예(禮)는 《서경(書經)》의 강왕지고(康王之誥)에 보이는데, 소식(蘇軾)의 주설(註說)에 ‘상복(喪服) 차림 그대로 관례(冠禮)를 거행해야 한다.’라고 한 대문을 인용하여 예법이 아닌 일이라고 비난해 놓은 것을 채침(蔡沈)이 《서집전(書集傳)》에 수록해 놓았었다. 양암(亮闇)에 관한 법을 비록 거행하지는 못한다 하더라도, 최복(衰服)을 벗고 길복(吉服)을 입는 것이 가하겠는가?’ 하였다. 여러 신하들이 옛적의 예법과 국조(國朝)의 법제를 들어 극력 청하자, 왕이 그제야 허락하였다. 오시(午時)에 대신들이 어보(御寶) 받기를 청하니 왕이 굳이 사양하다가 되지 않자, 면복(冕服)을 갖추고 부축을 받으며 빈전(殯殿)의 문밖 욕위(褥位)로 나아가 사배례(四拜禮)를 거행하였고, 영의정 김상철(金尙喆) 은 유교(遺敎)를 받들고 좌의정 신회(申晦)는 대보(大寶)를 받들어 올리니, 왕이 눈물을 흘리며 억지로 받고서 다시 사배례를 거행하였고, 자정문(資政門)으로 나와 승여(乘輿)를 타고 숭정문(崇政門)에 이르러 승여에서 내리었다. 종친(宗親)들과 문무백관이 동서로 나뉘어 차례대로 서서 의식대로 시위하니, 왕이 울먹이며 차마 어좌(御座)에 오르지 못하였다. 대신 이하가 또한 극력 청하자 왕이 울부짖기를, ‘이 어좌는 곧 선왕께서 앉으시던 어좌이다. 어찌 오늘 내가 이 어좌를 마주 대할 줄을 생각이나 했겠는가?’ 하였다. 대신들이 해가 이미 기울어진 것을 들어 누누이 우러러 청하자, 왕이 드디어 어좌에 올랐는데 백관들이 예를 행하니, 면복을 벗고 도로 상복을 입었다.

정조 1800.06.28(己卯)
이날 유시(酉時)에 상이 창경궁(昌慶宮)의 영춘헌(迎春軒)에서 승하(昇遐)하였는데 이날 햇빛이 어른거리고 삼각산(三角山)이 울었다. 앞서 양주(楊州)와 장단(長湍) 등 고을에서 한창 잘 자라던 벼포기가 어느날 갑자기 하얗게 죽어 노인들이 그것을 보고 슬퍼하며 말하기를 ‘이것은 이른바 거상도(居喪稻)이다.’ 하였는데, 얼마 안 되어 대상이 났다.
1800.11.06(갑신) 자시(子時)에 건릉(健陵)에 장사지냈다.

순조(純祖 1800.07.04 - 1834.11.13(甲戌)
순조 1088.07.04(갑신)
정종 대왕 24년【청(淸)나라 가경(嘉慶) 5년이다.】 여름 6월 기묘일(己卯日)에 정종이 훙서(薨逝)하였다. 6일이 지난 가을 7월 갑신일(甲申日)에【초4일이다.】 왕이 창덕궁(昌德宮) 인정문(仁政門)에서 즉위(卽位)하였다. 왕은 정종 14년【경술년이다.】 여름 6월 정묘일(丁卯日)에【18일 신시(申時)이다.】 창경궁(昌慶宮) 집복헌(集福軒)에서 탄강(誕降)하였다. 처음 정종 이 재위(在位)할 때 오랫동안 저사(儲嗣)를 두지 못하자 중외(中外)에서 걱정하였었는데, 기유년1) 에 궁인(宮人)이 용(龍)이 나르는 상서로운 꿈을 꾸자 수빈 박씨(綬嬪朴氏)가 임신하였고, 왕이 탄강할 때에 이르러서는 오색 무지개가 묘정(廟井)에서 뻗혔고 신비로운 광채가 궁림(宮林)을 감쌌다. 정종 이 와서 보고 나서 말하기를, ‘이 아이의 복록(福祿)은 내가 따라갈 수 있는 바가 아니다.’ 하였고, 효의후 김씨가 취하여 자신의 아들로 삼아 원자(元子)로 호칭을 정하였다. 왕은 어릴 때부터 뛰어나게 총명하였고 지극한 효성(孝誠)을 타고났으므로 부왕(父王)을 섬김에 있어서는 그지없이 경근(敬謹)하여 감히 뜻을 거스르는 일이 없었으며 전궁(殿宮)을 섬김에 있어서도 하나도 지적할 만한 것이 없었음은 물론 효의후에 대해서는 경애(敬愛)가 더욱 현저하였다. 금년 봄에 왕세자(王世子)에 책봉(冊封)되고 관례(冠禮)를 행하였는데 보령(寶齡)이 곧 11세였다. 정종이 훙서하자 대신(大臣)이 유교(遺敎)에 따라 도승지로 하여금 대보(大寶)를 받들어 전하게 하였으나, 왕이 받지 않고 울부짖으며 통곡하기를 그치지 않았다. 대신(大臣)·예관(禮官)·삼사(三司)가 또 누차 사위(嗣位)할 것을 청하였으나 따르지 않자, 대신이 백관을 거느리고 정청(庭請)하면서 복합(伏閤)하니, 비로서 윤허하여 따랐다. 이날 성복(成服)한 뒤에【묘시(卯時)이다.】 임금이 면복(冕服)을 갖추고 빈전(殯殿)에 나아가 대보(大寶)를 받고 나와서 인정문(仁政門)으로 나아가 즉위한 다음 반교(頒敎)하였다. 그리고 종친(宗親)과 문무백관의 하례(賀禮)를 받기를 예(禮)와 같이 하였으며 왕대비를 높여 대왕대비로 삼고 왕비를 왕대비로 삼았다. 그리고 다시 대왕대비를 모시고 수렴청정(垂廉聽政)의 예를 희정당(熙政堂)에서 행하였는데, 대신(大臣)과 여러 신하들이 임금의 나이가 아직 어리다는 이유로 송조(宋朝) 의 선인 태후(宣仁太后)와 국조(國朝)의 정희 성모(貞熹聖母)의 고사(故事)에 의거하여 대왕대비가 수렴하고 함께 청정(聽政)할 것을 청하였는데, 복합하여 일곱 번 청하기에 이르러서야 비로소 마지못하여 허락하였다. 대왕대비가 적의(翟衣)를 갖추고 희정당으로 나아와서 동쪽 가까이에서 남쪽을 향하여 앉고 전영(前楹)에 수렴하니, 임금이 전정(殿庭)에 나아가서 백관(百官)을 거느리고 하례(賀禮)를 올린 다음 전상(殿上)으로 올라가 발을 드리운 바깥쪽에 서쪽 가까이에서 남쪽을 향하고 앉았다. 대신(大臣)과 각신(閣臣) 2품 이상이 따라 올라와서 문후(問候)를 마치자 임금이 도로 상복(喪服) 차림을 하고 대내(大內)로 돌아갔다.
【예조(禮曹)의 수렴청정 절목. 이번 대왕대비 전하(大王大妃殿下)께서 수렴하고 청정하게 된 것은 이 방가(邦家)에 관계된 것이 더없이 중대한 예(禮)인지라 삼가 송조(宋朝) 선인 태후(宣仁太后)의 고사(故事)와 국조(國朝) 정희 성모(貞熹聖母)의 휘규(徽規)를 상고하여 마련해서 거행하는 것이다. 1. 수렴하는 처소(處所)는 편전(便殿)으로 하고 임시(臨時)하여 정원으로 하여금 품지(稟旨)하게 한다. 1. 수렴할 때 대왕대비 전하는 발의 안쪽에서 동쪽으로 가깝게 하여 남쪽을 향해 전좌(殿坐)하고 전하(殿下)는 발의 바깥쪽에서 서쪽으로 가깝게 하여 남쪽을 향해 시좌(侍坐)하게 했는데 그 뒤에 중앙에서 남쪽을 향하는 것으로 개서(改書)하여 봉입(捧入)하였다. 조하(朝賀)할 때에는 선인 태후 의 고사에 의거하여 문무관(文武官)이 먼저 대왕대비 전하에게 사배(四拜)를 행하고 나서 반열(班列)을 조금 서쪽으로 옮겨 전하에게 사배를 행한다. 1. 수렴할 때 송조(宋朝)에서는 발의 앞쪽에서 통어(通語)하는 내시(內侍)가 전선(傳宣)하였는데, 아조(我朝)에서는 대신(大臣)이 하고 대비 전하가 직접 서무(庶務)를 결재하는 것도 가(可)하다. 깊은 궁중(宮中)에 있을 때에는 불가한 일이라 하여 내관(內官)을 시켜 명(命)을 전하여 영(令)을 청하고 주사관(奏事官)이 문자(文字)를 해석해서 아뢰면 특별히 친청(親聽)을 허락하였는데, 이번에는 대왕 대비전과 대전(大殿)이 함께 청정(聽政)하는지라 주사관이 먼저 전하에게 아뢰면 전하가 혹은 직접 결재하기도 하고 혹은 자지(慈旨)를 앙품(仰稟)하기도 하며, 대왕대비 전하께서는 혹 직접 자교(慈敎)를 내리기도 하고 여러 신하들이 혹은 직접 발의 앞쪽에서 아뢰게 함으로써 일당(一堂)에서 상하(上下)가 보익(輔翼)하고 참찬(參贊)하는 방도로 삼는다. 1. 한 달에 여섯 번 청대(請對)하게 하고 조참(朝參)·상참(常參)은 준례에 따라 품지(稟旨)하게 한다. 함께 청정하는 것은 송조(宋朝) 에서 일참(日參)5) ·육참(六參)6) 으로 한 예(例)에 의거하며 대정령(大政令)·대전례(大典禮)와 시급한 변보(邊報)에 관해서는 수시로 청대할 것을 허락한다. 혹 선소(宣召)하거나 사전(祀典)을 내리거나 병관(兵官) 등의 직무에 관한 중요한 업무는 모두 곧바로 전하에게 아뢰어 자지(慈旨)에 품(稟)하여 재결(裁決)한다. 1. 자교(慈敎)는 대왕 대비 전왈(大王大妃傳曰)이라고 칭하고 상교(上敎)는 전왈(傳曰)이라고 칭하며, 대왕대비 전하의 교령(敎令)은 송조(宋朝) 에서 나[予]라고 칭한 예(例)를 적용한다. 내외(內外) 자물쇠의 개폐(開閉)와 군병(軍兵)의 해엄(解嚴)에 대해서는 대전(大殿)에게 아뢰면 대전은 이를 자지(慈旨)에 앙품한 뒤에 표신(標信)·신전(信箭)을 사용하여 거행한다. 1. 여러 신하들의 소장(疏章)은 정희 성모 때의 고사에 의거하여 전하에게 올리며 대계(臺啓)와 각사(各司)의 계사(啓辭), 제도(諸道)의 장문(狀聞)도 또한 전하에게 아뢰어 혹 직접 재결하기도 하고 자전에게 품지한 뒤에 비답(批答)을 내리기도 한다. 1. 정조(正朝)·동지(冬至)·탄일(誕日)의 삼명일(三名日)에 각도(各道)에서 대왕 대비전에 진전(進箋)하는 것은 한결같이 대전에 진전하는 예(例)에 의거하고 방물(方物)과 물선(物膳)도 대전 예에 의거하여 거행한다. 1. 전하가 경연(經筵)에 나아갈 때는 대왕 대비전께서 발 안쪽에 수시로 친림(親臨)하여 강(講)하는 것을 듣는다. 1. 전하가 인정문(仁政門)에서 즉조(卽祚)한 뒤 그대로 면복(冕服)을 갖추고 대왕대비 전하가 나아가 있는 편전(便殿)으로 나아가 백관(百官)을 데리고 전정(殿庭)에서 사배례(四拜禮)를 행한다. 끝난 다음 전하가 전상(殿上)으로 올라가 시좌(侍坐)하면 대신(大臣)과 2품 이상이 차례로 따라 올라가서 대왕 대비전과 전하에게 문후(問候)하고 나서 전하는 도로 복위(復位)한다. 대왕대비 전하가 대내(大內)로 돌아가면 전하는 면복을 벗고 도로 상복(喪服)을 입은 다음 대내로 돌아가며, 여러 신하들은 물러간다. 1. 수렴하고 함께 청정하는 전례(典禮)는 지극히 중대한 것이므로 정희 성모 때의 일을 모방하여 특별히 중외(中外)로 돌아간 뒤에 종친(宗親)과 문무백관들이 베[布]로 된 공복(公服)을 갖추고 권정례(權停例)로 거행한다. 이번 초4일 수렴할 때 대왕 대비전은 적의를 갖추고 전좌(殿座)하며 상시(常時)에는 평상시 입는 옷을 입는다. 수렴할 때 전좌의 배설에 관한 제반 일은 액정서(掖庭署)와 각 해사(該司)로 하여금 진배(進拜)하게 한다. 1. 수렴에 대한 고유(告由)는 사직(社稷) · 종묘(宗廟) · 영녕전(永寧殿) · 경모궁(景慕宮)에 지내되 길일(吉日)을 가려서 거행한다.】

순조 1834.11.13(갑술)
해시(亥時)에 임금이 경희궁(慶熙宮)의 회상전(會祥殿)에서 승하하였다.

헌종(憲宗 1834.11.18(己卯) - 1849.06.06(임신)
임금이 숭정문(崇政門)에서 즉위하였다. 왕대비(王大妃)를 받들어 수렴청정(垂簾聽政)의 예(禮)를 흥정당(興政堂)에서 행하고, 조하(朝賀)를 받은 다음 교서(敎書)를 반포(頒布)하고 대사(大赦)를 베풀었다.
왕세손(王世孫)이 빈전(殯殿)에 나아가 대보(大寶)를 받았다.
1834.04.무신(戊申)에 교하(交河)의 인릉(仁陵)에 장사지냈다.

헌종 1849.06.06(임신)
오시(午時)에 임금이 창덕궁(昌德宮)의 중희당(重熙堂)에서 승하하였다.
대왕 대비(大王大妃)가 하교하기를,
“종사(宗社)의 부탁이 시급한데 영묘조(英廟朝)의 핏줄은 금상(今上)과 강화(江華)에 사는 이원범(李元範)뿐이므로, 이를 종사의 부탁으로 삼으니, 곧 광(㼅)의 세째 아들이다.”
하였다.

철종(哲宗) 1849.06.09(을해)
임금이 인정문(仁政門)에서 즉위하였다. 사위(嗣位)할 때에 면복(冕服)을 갖추고【예방승지(禮房承旨)가 내시와 더불어 대왕대비전(大王大妃殿)의 합문(閤門) 밖에 나아가 대보(大寶)를 내주기를 청하여 빈전(殯殿)에 봉안하였다.】 대보를 빈전에서 받아 인정문(仁政門)에 납시니, 백관들이 행례(行禮)하였다. 이어 교서(敎書)를 반포하고 여차(廬次)로 돌아왔다.

철종 1863.12.08(庚辰)
묘시(卯時)에 임금이 창덕궁(昌德宮)의 대조전(大造殿)에서 승하(昇遐)하였다.
대왕 대비전(大王大妃殿)에서 흥선군(興宣君)의 적자(嫡子)인 제2자(第二子)에게【 명복(命福) 이다.】 사위(嗣位)시키라고 명하고, 영의정 김좌근(金左根)과 도승지 민치상(閔致庠)을 보내어 잠저(潛邸)에서 봉영(奉迎)하여 오게 하였다.
영중추부사(領中樞府事) 정원용(鄭元容) 이 아뢰기를,
“나라의 형편이 위태롭게 되어 사람들의 마음이 안정되지 못했을 때 다행히 자성 전하(慈聖殿下)께서 발 안에서 정책(定策)한 명을 내려 주신 덕분에 태평성대를 맞이하게 되었으니 하늘의 해와 같은 기상을 우러러보고서 뭇 사람들이 기뻐하지 않는 이가 없습니다.”
하니, 대왕대비가 이르기를,
“이처럼 망극한 중에도 대책(大策)이 이미 정해졌다. 게다가 익성군(翼成君)이 어린 나이에 범절(凡節)이 숙성하고 총명하니, 참으로 종묘사직을 위해 아주 다행스럽다.”
하였다. 판중추부사(判中樞府事) 김흥근(金興根)이 아뢰기를,
“자성의 명교(明敎)를 받들어 종묘사직의 대책을 정하였으니, 진실로 참으로 만만(萬萬) 번 경축할 일입니다.”
하고, 영의정(領議政) 김좌근(金左根)은 아뢰기를,
“정책하고 받들어 맞이하여 경광(耿光)을 우러러 보니 너무나 경사스럽고 기쁩니다.”
하고, 좌의정(左議政) 조두순(趙斗淳)은 아뢰기를,
“이런 망극한 때에 자성 전하의 교지(敎旨)가 특별히 내려져 종묘사직이 의탁할 데가 있게 되었으니, 온 나라 사람들이 기쁨을 금치 못합니다.”
하니, 대왕대비가 이르기를,
“이처럼 망극한 중에서 도리어 경사스럽고 다행한 일이다.”
하였다. 김좌근이 아뢰기를,
“주상(主上)께서 어린 나이에 왕위를 물려받는 경우 일찍이 수렴청정(垂簾聽政)하는 전례(典禮)가 있었습니다. 이번에도 규례대로 마련하는 것이 어떻겠습니까?”
하니, 대왕대비가 이르기를,
“어떻게 차마 그것을 하겠는가마는, 오늘날 나라의 형편이 외롭고 위태롭기가 하루도 보전하지 못할 것 같으므로 다른 것을 돌아볼 겨를이 없다. 다만 응당 힘써 따라야 하겠다.”
하였다. 이어서 수렴청정의 절차를 기유년(1849)의 전례대로 거행하라고 명하였다.
1907.07.19
장례원 경(掌禮院卿) 박용대(朴容大)가 아뢰기를,
“태자가 정사를 대리할 길일(吉日)은 언제쯤으로 잡을까요?”
하니, 비준하기를,
“오늘 거행하라.”
하였다. 또 아뢰기를,
“황태자가 정사를 대리하는 일로 인하여 원구(圜丘), 종묘(宗廟), 영녕전(永寧殿), 경효전(景孝殿), 사직(社稷)에 고유제(告由祭)를 오늘 설행하되 축문은 시독(侍讀)으로 하여금 지어내게 하고, 조서(詔書)의 반포는 즉시 거행하는 것이 어떻겠습니까?”
하니, 윤허하였다. 또 아뢰기를,
“황태자가 정사를 대리하게 된 것을 진하(陳賀)하는 의식을 규례대로 중화전(中和殿)에 친림하는 것으로 마련하고, 황태자가 예를 행하는 의절도 규례대로 마련하는 것이 어떻겠습니까?”
하니, 제칙(制勅)을 내리기를,
“권정례(權停例)로 하라.”
하였다.
【음력 정미년(丁未年) 6월 10일】
순종이 명을 받들어 대리청정(代理聽政)하였다. 선위(禪位)하였다.
고종1921.01.21()
순종 1926.04.25
묘시(卯時)에 창덕궁(昌德宮) 대조전(大造殿)에서 훙(薨)하였다. 다음날이 복(復)을 하였다.









洪武帝 太祖
1328.09.18-1398.+5.10
朱元璋


1328.10.21-1398.06.24
建文帝 惠帝
1377.12.05-1402.07.13
朱允文



永樂帝
1360.05.02-1424.08.05




鴻熙帝 仁宗
1378.00.00-1425.00.00




宣德帝
1398.02.25-1435.01.31




正統帝
1427.11.29-1464.02.23




景泰帝 代宗
1428.09.21-1457.03.14




成化帝 憲宗
1447.12.09-1487.09.09
朱堅梁



弘治帝 孝宗
1470.07.30-1505.06.08




正德帝 武宗
1491.10.26-1521.04.20
朱厚照



嘉靖帝 世宗
1507.09.16-1566.01.23
朱厚摠



隆慶帝 穆宗
1537.00.00-1572.00.00
朱載垕



萬曆帝 神宗
1563.00.00-1620.08.28




崇禎帝
1610.12.24-1644.03.19

李自成 攻擊을 받자 自決于景山

1611.02.03-1644.04.25
天啓帝
1605.12.23-1627.09.30
朱由敎



泰昌帝
1582.08.28-1620.09.26
주상락
卽位 29日만에 죽음



1360.05.02-1424.08.05





1360.05.02-1424.08.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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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 국사(연표) 연구
글쓴이 : tlrhftkfka 원글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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