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크랩] 별자리와 칠성 신앙

2019. 1. 3. 09:18별 이야기

별자리와 칠성 신앙


누구든 어릴적 시골에서 밤하늘의 별을 바라보면서 갖가지 상상의 나래를 펴본 일이 있을 것이다. 그 중에서도 북쪽 하늘에 밝게 빛나는 작은 곰자리의 북극성과 더불어 우리들의 눈을 고정시키는 별자리는 단연 작은 곰자리의 북두칠성이다.
 
그 국자 같이 생긴 7개의 별은 특히 여름날에 유난히도 개구장이들의 동심에 가까이 다가와 할머니 할아버지가 들려주신 옛날 이야기와 더불어 신비스럽게 아롱져내린다. 별똥별 하나가 흰 줄을 그으며 떨어져 내릴 때면 신비감은 더욱 달떠오른다.

이러한 신비로운 감정은 그 별자리가 사람의 운명과 함께 한다는 생각과 어울리면서 별자리로 사람의 운명을 점치는 점성술을 만들어냈다. 그것은 단순한 상상력의 산물이 아닌 오랫동안 별자리와 사람의 운명을 관찰한 통찰의 결과였다.
 
거기에 따라 각 별이 관장하는 역할도 분명하게 드러나게 되었다. 그 중에서도 북극성과 북두칠성이 관장하는 영역은 단연 으뜸이다. 이와 관련하여 고대 우리나라에서도 일관(日官)의 역할이 중요시되었으며, 김유신 장군이나 안중근 의사는 북두칠성의 정기를 받도 태어난 인물로 묘사되고 있다.

인도에서는 이 북극성을 일러 묘견보살(妙見菩薩)이라 했고 큰 곰자리의 7개 별을 북두(北斗) 내지는 북두칠성(北斗七星)이라 불러서 이들 별을 신격화했는데, 북극성인 묘견보살은 칠성을 그 권속으로 거느리고 있다.

특히 묘견보살은 눈이 밝고 청정하여 사물을 잘 보아 인간의 선악을 기록하며, 국토를 옹호하여 재난을 제거하고 적을 물리치며 사람의 복을 증장시키는 님으로 신앙되었다. 이러한 신앙은 인도의 북두 만다라와 관련된 얘기지만, 그 북극성에 대한 신앙은 중국 도교의 칠성 신앙과 관계를 ꂙ으며 동양인의 마음에 확고하게 자리잡는다.

아무튼 북극성, 그것은 그렇게 밝게 빛나기에 별들의 왕이라 불리기에 충분했을 것이다. 오죽했으면 그 빛나기가 너무나도 유별나게 밝아서 치성(熾盛)이라 했을까. 사실 이 치성이라는 말은 금륜불정치성광여래(金輪佛頂熾盛光如來)에서 나온 말로, 이 여래는 치성스러운 광염(光焰)을 방출하여 해와 달, 그리고 별과 그 별이 머무는 자리(日月星宿) 등 광요(光曜)가 있는 제천을 다스리고 명령해서 절복시킨다.
 
 또다른 정의에 의할 것 같으면, 일자 금륜(一字金輪)과 같은 부처님으로 석가여래의 수미산정 성도에서 륜보(輪寶)를 나타내어 제천 요숙(諸天曜宿)을 절복시킨 쪽을 금륜불정(金輪佛頂)이라 하고 무한한 광명을 발하여 교령(敎令)한 쪽을 치성광(熾盛光)이라 한다. 그는 해와 달을 비롯해 칠성 등 빛을 간직한 무리들의 최고 부처님이었던 것이다. 그의 특징적인 모습은 손바닥에 금륜(金輪)이나 약합을 오려놓고 있다는 것.

도교는 북극성이나 북두칠성뿐만 아니라 뭇 별자라가 인간의 운명을 좌우한다는 믿음이 유달리 강했다. 구체적으로 도교에서는 북극성을 모든 별을 통솔하는 자미대제(紫微大帝)라고 불렀고, 북두칠성의 일곱개의 별은 그 휘하에서 인간의 여러 가지 운명을 관장하는 칠원성군(七元星君)으로 모시고 있다. 이러한 신앙 형태는 밀교의 북두 만다라와 매우 유사한데, 다만 그 역할에서 차이가 날 뿐이다.

도교에서 칠성은 인간의 수명 장수와 비를 내리게 하는 탁월한 기능 및 재물과 재능을 담당하는 신격으로 다가온다. 그래서 우리네 조상들은 칠성에게 가족 구성원의 건강과 장수와 소원 성취, 평안 무사 등을 기원하였다. 대개 칠성단은 뒤뜰의 장독대에 위치하며 제사를 드리는 날은 일정치 않다. 제사를 드릴 때는 특별한 제물이 없이 정화수 한그릇을 떠놓고 비는 형식이다.

이렇게 민간에서 강력한 신앙을 획득한 칠성 신앙을 사찰에서 받아들인다. 그만큼 칠성을 섬기는 민중들의 염원이 간절하여 그들의 신앙을 더욱 공고하게 다잡아 주고 부처님 품안으로 수용하기 위해서 불교의 호법신으로 그들에게 자리를 내 준 것이다.
 
그래서 104위 신중 탱화에서 칠성은 중단(中壇)의 수호신으로서 신선의 모습에 살짝 미소를 머금은 얼굴, 내지는 해와 달을 담은 관을 쓴 관리의 모습으로 참여하다가 나중에는 그 역할이 점차 강조됨에 따라 조선 중기 무렵에는 사찰에 칠성각을 만들어 그 안에 칠성 탱화를 모시게 이른다.

칠성 탱화에서 자미대제는 치성광여래로, 칠원성군은 칠여래(七如來)로 대치된다. 그 위에 해와 달을 일광변조소재보살(日光遍照消災菩薩)과 월광변조소재불살(月光遍照災菩薩)로 불러서 치성광여래를 보좌하는 좌우 보처 보살로 등장시킨다. 칠원성군은 바로 칠여래의 화현인 것이다.
 
 특히 수명 연장을 관장하는 파군성군(破軍星君)을 약사여래의 화현으로 받아들이는 데목에서 약사 신앙과 칠성 신앙의 결합을 조심스럽게 부각시키는 이도 있다. 추측컨대 밀교의 별자리 신앙과 도교의 칠성 신앙은 그 유사한 구조 때문에 애초부터 결합 가능성을 강하게 품고 있었다고 해야 할 것이다.

칠성각은 다른 나라에는 없는 우리들만이 간직한 독특한 전각이다. 칠성각의 존재는 산신과 함께 토착 신앙이 불교에 유입된 전형적인 예를 보여주는데, 사찰에서의 그 역할은 인간의 수명을 기원하는 믿음에 바탕을 두며 가람 수호의 기능까지 맡는다.

이렇게 칠성은 우리 나라 불교 속에서 처음에는 단순한 수호신으로서 수용되었다가 다시 칠성 본래의 모습이 강조되었고, 그 결과 이를 더욱 불교화시켜 사찰 외각에 독립된 칠성각을 만들어 모셔지게 된 것이다. 조선 후기의 상월당 새봉(霜月堂 璽捄, 1687 - 1767) 스님은 북두칠성을 섬긴 것으로 유명하다.


칠성 신앙과 우리 문화


안양시 석수동 삼막사에는 유독 민간 신앙의 자취가 많이 배어 있는데, 특히 거기 칠성각에는 바위면에 새겨져 있는 마애 삼존불상이 모셔져 있다. 중앙의 본존불은 약합을 손바다 위에 얹어 놓은 채 가부좌를 튼 치성광여래(熾盛光如來)이고 좌우 협시 보살은 머리에 인 삼산관(三山冠)에 일광 월광이 표현된 일광변조소재보살과 월광변조소재보살이다. 불화로서 치성광 후불탱은 상당 수 남아 있으나 이러한 마애불로서의 치성광여래는 매우 희귀하다.

칠성 탱화의 도설 내용을 보자. 중앙에 치성광여래를 두고 좌우보처 보살로 일광보살과 월광보살, 그리고 상단 좌우에 7여래, 하단 좌우에 칠원성군이 배치되어 있다. 바로 치성광여래가 7여래를 거느리고 있는 모습과 그 화현인 칠원성군을 표현하고 있는 것이다.
 
그 밖에 삼태(三台) 육성(六星), 28숙(宿)이 탱화의 윗쪽 좌우에 도설되어 있기도 하다. 여기서 삼태는 북두칠성 그 큰 곰자리의 상태, 중태, 하태성을 의미하며, 28숙이란 달이 희미하게 모습을 보인 뒤 만월에 이르기까지 1개월간의 운행 경로인 백도상(白道上)에서의 28성좌명(星座名)으로, 하나의 성좌에 날마다 '달이 머무른다〔宿〕'라는 데서 그렇게 부른 것이다.

치성광여래는 일광 월광변조소재보살과 칠여래, 그 화현인 칠원성군과 많은 성군들을 휘하에 거느리고 인간의 길흉화복을 주관한다. 칠성 각각의 담당 역할을 보자. 제1성은 자손에게 만덕(萬德)을 주고, 제2성은 인간의 장애와 재난을 없애주며, 제3성은 업장을 소멸시키고, 제4성은 구하는 모든 것을 모두 얻게 하며, 제5성은 1백가지 장애를 없애주고, 제6성은 복덕을 두루 갖추게 하며, 제7성은 수명을 오래도록 연장시켜 준다.

특히 음력 7월7일은 칠석(七夕)날이라 하여 불가의 명절은 물론 우리 민족의 세시 풍속으로 자리잡아 왔는데, 이 날은 전국의 사찰에서 치성광여래에게 재를 올린다. 이를 칠석재라 하는데 치성과여래에게 성대한 재를 올려 그 불가사의한 신통력으로 모든 재앙을 소멸시켜 주고 복덕을 달라고 기원하는 것이다. 이 날 신도들은 가족들의 수명 장수와 가정 평화를 기원하는 등 자신의 소원을 마음껏 빈다(7월 15일 우란분절까지 기도 정근한다).
 
 특히 칠석날 비가 오면 풍년이 든다고 하는데, 그 비와 관련하여 견우와 직녀의 애틋한 얘기가 전해온다. 견우와 직녀는 1년 동안 헤어져 있다가 7월7일날 까치와 까마귀가 몸을 서로 이어서 만들어낸 오작교에 만나 뜨거운 눈물을 흘리는데 그것이 지상에서는 비가 되어 내린다는 얘기다.

이렇게 불교에서 받아들인 칠성 신앙은 다시 무속에 영향을 미친다. 그 대표적인 예가 수명 장수를 목적으로 하는 칠성굿이다. 이에 대해서 민속학자 김종대 씨는 다음과 같이 말하고 있다.

'평안도 다리굿의 경우 4번째 거리로 칠성굿이 행해지는데, 이때 무녀의 복장은 장삼에 가사를 메고 고깔을 쓴 형태이다. 무녀는 나무아미타불을 부르며 긴 염불과 잦은 염불, 그리고 불사와 칠성 의식을 청하고 공수를 주기 시작한다. 춤의 형태도 법고춤과 바라춤, 천수 바라춤, 염불 바라춤을 춘다 '

앞서도 말했듯이 칠성 신앙은 불교 고유의 신앙이 아니다. 불교가 고유의 민간 신앙을 포섭하면서 불교화한 신앙이다. 특히 이러한 민간 신앙과의 습합이 조선 시대에 많이 이루어져 조선 시대 불교는 민속불교적 특징을 띠게 된다. 그것은 아무래도 불교가 사대부들로부터 학대를 받으며 산중으로 스며들면서 핍박받던 서민 내지는 여인네들의 안식처 구실을 하게 된 결과이리라고 본다. 더욱이 아이, 특히 사내 아이를 못낳던 여인들에게 칠성님은 널리 자애로운 님으로 다가왔을 것이다.
출처 : 逍遙遊(소요유)
글쓴이 : 山木 원글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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