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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9. 1. 3. 10:52율려 이야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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V. 고전주의 시대의 음악


고전주의(古典主義; classicism)는 조화, 균형, 명석함을 추구하는 고대 그리스·로마의 예술 사조로부터 유래하였다. 절대 왕정의 붕괴와 함께 찾아온 시민 계급 시대의 유럽은 새로운 시대를 맞아 고대 그리스의 예술 사조에서 정신적인 돌파구를 찾게 되었다.


이 시대의 음악은 음악 자체로서의 깊이를 더하게 된다. 가사가 없이 음악 자체로 설득 논리를 갖는 소나타 구조가 확립된 것은 고전시대가 오늘날에 물려준 가장 큰 유산이라 할 수 있다.



1 고전주의 시대의 음악


❶ 고전주의 음악은 계몽주의적 가치관에 바탕을 두고 이를 음악적으로 구현했음을 이해할 수 있다.
❷ 전(前) 고전주의 시기는 고전주의의 정신적 가치관과 예술 양식을 형성한 시기였음을 이해할 수 있다.
❸ 본격적인 고전주의 시대에는 빈 고전파 중심으로 음악이 발전하였음을 이해할 수 있다.



(1) 고전주의의 문화적·사회적 배경


고전주의는 조화와 균형 그리고 명석함을 추구하는 고대 그리스·로마의 예술 사조를 부흥시킨 것이다.


음악사에서의 고전주의는 일반적으로 18세기 중엽부터 19세기 초엽의 시기인데, 시기적인 의미보다는 하이든(Franz Joseph Haydn; 1732~1809), 모차르트(Wolfgang Amadeus Mozart; 1756~1791), 베토벤(Ludwig van
Beethoven; 1770~1827)의 빈 고전파의 음악 양식을 일컫는 의미가 크다.


고전주의 시대로 분류하는 18세기 후반부터 19세기 초반까지의 유럽 사회는 여러 방면에서 큰 변화가 있었다. 이성의 시대와 계몽주의로 대변되는 이시기는 칸트(Kant) 이외에도 볼테르(Voltaire), 루소(Rousseau), 아담 스미스(Adam Smith) 등과 같은 역사적인 인물들의 철학 사상이 널리 퍼진 시기였다.

자유주의 사상과 세계주의적인 사상은 프랑스 혁명에 이어 미국의 독립 선언과 독립 전쟁을 촉발시켰고, 과학 분야에서는 영국의 산업 혁명을 추진시키는 원동력이 되었다. 음악은 교회와 궁중뿐만 아니라 가정과 지역 사
회에서도 점차 생활화되었고, 아마추어 음악가들도 많이 생겨났다.


18세기 말에 접어들면서 여러 도시를 돌며 연주하는 직업 연주가들이 많아졌고 연주회에는 입장권이 등장하였다. 높아진 시민 계급의 위상에 따라 이처럼 공공 음악회가 점차 증가하였으나, 교회와 궁중의 후원 없이는 아직도 음악가들이 자립하기 힘든 과도기적 상태였다.


  하이든, 모차르트, 베토벤이 이미 세상을 떠난 1834년에 키제베터(Raphael Georg Kiesewetter, 1773~1850)는 이 세 작곡가를 고전파작곡가라고 처음으로 칭하였다.


Liberty Leading the People (1830), Louvre, Paris . 민중을 이끄는 자유의 여신>. 1830 

▲ 민중을 이끄는 자유의 여신 들라크루아(1830년)
18세기 말, 귀족들도 세금을 내야 한다는 평민들의 주장에 군대는 총칼을 들이댔다. 기아에 허덕이던 평민들의 분노는 폭발하여 혁명으로 연결되었다. 개인의 권리를 존중하는 혁명 정신은 예술에도 큰 영향을 미쳤다.


높아진 시민 계급의 위상에 비하여 귀족들은 재정적 어려움에 처하기 시작하였다.
이에 음악가들은 점차 궁중밖으로 진출해야만 했다. 이것은 귀족들의 전유물이었던 예술 음악이 일반인에게 알려지게 되는 중요한 계기가 되었다.



(2) 전(前) 고전주의 시대


18세기 전반에 이미 새로운 음악의 움직임이 나타나고 있었다. 이 전(前)고전주의는 다가올 고전주의의 시대정신과 음악 양식을 확립한 중요한 시기였다.

1720년대, 바흐와 헨델이 바로크 음악을 완성하며 왕성한 활동기를 보내고 있을 때, 한편으로 음악의 새로운 움직임이 생겨났다. 이때부터 빈 고전주의가 시작되는 1780년대 초까지의 과도기적 기간을 전 고전주의 시대라고 한다. 이것은 계몽주의를 그 배경으로 삼고 있는데, 계몽주의는 인간의 분별력·비판력을 통해 더 행복한 세상을 만들 수 있다고 생각했고, 자유·평등과 같은 사회적 목표를 성취하려고 노력했다.


Johann Sebastian Bach and his sons

Carl Philipp Emanuel, Johann Christian, Wilhelm Friedemann, and Johann Christoph Friedrich

▲ 바흐의 아들
바흐의 둘째 아들 칼 필립 엠마누엘 바흐(왼쪽 두번)와 막내아들 요한 크리스찬 바흐(왼쪽 세번)


[1] 전 고전주의의 정신과 음악적 특징


예술가들도 계몽주의 사상의 실천에 적극적으로 동참했으며, 예술은 단순 명료하고 간결하며, 인간의 실체와 정신의 조화를 이루는 것을 이상으로 하였다. 전 고전주의 시대의 대표적인 작곡가들은 바로크를 대표했던 요한 세바스찬 바흐의 아들들이었던 장남 빌헬름 프리데만 바흐, 차남 칼 필립 에마누엘 바흐, 4남 요한 크리스천 바흐였다. 그들은 아버지로부터 어렵고 지적인 음악 공부를 했으나, 시대가 변하면서 아버지의 음악에 반대하여 고전적인 음악적 가치를 여는 선구자들이 되었다. 특히 칼 필립 에마누엘 바흐(C. P.E. Bach)는 전 고전주의 시대를 연 대표적인 작곡가였다.


이러한 시대정신으로 나타난 음악 양식이 바로 ‘갈랑(Galant) 양식’,‘ 감정과다(das Emfindsame) 양식’,‘ 질풍노도(Sturm und Drang) 양식’이다.


  전 고전주의가 바로크를 집대성한 J. S. 바흐의 아들로부터 시작한다는 사실은 흥미로운 일이다.


앞에 다루어진 것처럼 로코코풍의 예술은 귀족들의 권태로움을 달래는 장식적인 기능을 했으나, 결과적으로는 관념적이고 무거운 바로크적 특성을 타파하는 역할을 하기도 했다. 따라서 로코코 양식은 고전주의로 진
입하기 위한 전 고전주의의 계기를 마련했다.



1) 갈랑 양식
갈랑(Galant) 양식은 자연스럽고 우아하며 편안한 특징의 음악들을 일컫는데, 이것은 바로크 시기의 무거운 양식에 대비되는 것이었다. 이 시기에 소규모 음악을 즐기는 문화가 발달한 것에 기인한다. 공공 연주장이 생기기도 했지만, 마을의 유지 격인 가정의 거실에서 자연스럽고 편안한 분위기의 음악회가 자주 열렸던 것이다.


18세기 초부터 프랑스의 클라브생 음악에서 많이 선보인 이 양식의 음악가로는 쿠프랭(F. Couperin; 1668~1733), C. P. E. 바흐(Carl Philipp Emanuel Bach; 1714~1788), 텔레만(Georg Philipp Telemann; 1681~1767) 등이 대표적인 작곡가로 손꼽힌다.


※ 갈랑(Galant)
‘갈랑’ 이란 프랑스어로 ‘우아한’ 이라는 뜻을 지닌다.
갈랑 양식은 앞서 나왔듯이 로코코(rococo) 양식에서 시작되었다.



2) 감정 과다 양식과 질풍노도
귀족들의 자연스러운 분위기를 대변하던 로코코 양식은 프랑스 혁명 이후, 일반 대중의 자연스러움을 대변하는 쪽으로 전이되어 발전하게 된다.


감정 과다 양식(Empfindsamer stil, expressive style)은 주로 건반 악기를 중심으로 나타났다. 이 음악은 효과적인 선율과 리듬을 통해 일반 대중의 감정을 표현해 주고자 하는 것이었으며, 이후 18세기 중반의 음악에 큰 영향을 미쳤다.


현실 세계에 슬픔이 많다는 이유로 단조 음악이 많이 쓰였으며, 민요에 대한 애착도 보여 주고 있다.

감정 과다 양식은 갈랑 양식의 대표적 작곡가였던 C. P. E. 바흐가 이끌었는데 이외에 대표적인 작곡가로는 텔레만, 런던의 J. C. 바흐(Johann Christian Bach; 1735~1782), 빈의 바겐자일(Georg Christoph Wagenseil; 1715~1777), 만하임의 슈타미츠(Johann Stamitz; 1717~1757) 등이다.


질풍노도(Sturm und Drang) 음악은 기본적으로 감정 과다 양식과 맥을 같이 하지만, 시기적으로 후기에 속하며 오케스트라 음악을 포함한 전반적 양식 변화로 나타났다. 이것은 당대 연극계의 움직임으로부터 영향을 받은 것이기도 하다.


청중의 힘을 알게 된 만하임 오케스트라는, 다양한 음색의 악기들이 모여서 내는 음향에 청중들이 흥분하자 연주 효과를 더욱 극대화하여 화제를 불러일으켰다. 감정을 격양시키기 위하여 이들은 많은 오케스트라 효과를 만들어 냈다. 18세기 중반에 활동했던 오케스트라 음악 작곡가들이 이 경향에 속하는데 C. P. E. 바흐, 슈베르트(Johann Schubert; 1720~1767), 그리고 만하임악파의 슈타미츠, 리히터(Franz Xaver Richter; 1709~1789) 등이 대표적이다.


  당시 연극에는 ‘질풍과 노도(Sturm und Drang)’ 라는 작품이 있었는데, 이것을 감정적 경향 예술 운동을 일컫는 말로 사용하게 된 것이다.


  만하임악파의 창시자는 요한 슈타미츠이다. 만하임 오케스트라 효과 중 대표적인것은 크레셴도-데크레셴도 효과, 로켓 음향 효과, 탄식 음향 효과, 회전 음향 효과, 미끄러지는 꾸밈음들, 번개음향 효과 등이었다.

이런 효과들이 오케스트라의 음향으로 전달되면 매번 청중들은 일어나서 큰 박수를 보냈다고 한다.



(3) 고전주의 시대


[1] 양식적 특성


고전주의에 이르러서 음악은 양식을 초월하여 순수한 형식을 통해 정신세계를 표현하는 것에 이르렀다. 본격적인 고전주의는 18세기 중엽에서 19세기 초엽에 걸쳐 주로 오스트리아의 빈을 중심으로 융성하였던 빈 고전파 음악을 가리킨다. 하이든, 모차르트와 더불어 베토벤은 빈 고전파를 대표하는 작곡가이다.

빈 고전파의 음악은 뚜렷한 가락에 풍요로운 화음이 수반되고 곡의 형식이 엄격한 ‘소나타 형식’ 을 취하고 있어 대체로 논리적이고 정돈된 느낌을 준다.


고전주의 시대에는 또한 합리적 사고에 바탕을 둔 보편적 음악이 강조되었다. 이것은 가사가 없는 기악 음악을 통해 인간의 감정을 드러내려는 노력으로 나타났는데, 가사 없이 소리로만 표현해도 누구에게나 음악의 내용이 전해진다면 음악가들은 그러한 규칙을 찾아 익혀야 한다고 생각했다.


  오스트리아의 황제 요셉 2세는 음악을 사랑하고 음악가들을 보호했다. 때문에 빈은 음악가들에게 매우 중요한 거점이 되기 시작했다.


  계몽주의의 이상을 음악적으로 실현하고자한 노력은 다음과 같다.
㉠ 선율을 짧고 단순하게, 민요적 성격의 편안한 선율로 나타낸다.
㉡ 리듬은 짝수 단위로 마디를 끊어서 규칙적인 흐름을 유도한다.
㉢ 음역은 큰 기교를 요하지 않도록 하여 일반인도 연주할 수 있도록 한다.
㉣ 일반 대중의 감정적 흐름을 그대로 음악으로 표현할 수 있도록 셈여림의 강도를 자주 바꾸고 조절한다.


Frederick, Prince of Wales, and his sisters by Philip Mercier

▲ 음악 파티(필립 메르시에 그림/1733년)
오스트리아 조지 2세의 맏아들인 프레데릭 황태자가 남매들의 반주에 맞추어 첼로를 연주하는 장면이다.
이들 남매는 모두가 헨델의 제자였다.



[2] 기악곡의 장르와 형식


전 고전주의 시대를 포함한 고전주의 시대의 대표적인 장르는 바이올린 소나타, 피아노 소나타, 3중주~8중주, 협주곡, 교향곡 및 대부분의 오페라 서곡들이었는데, 이 대부분의 곡들이 소나타 악장을 포함한 소나타로 작곡되었다. 현악 4중주는 바로크 시대의 트리오 소나타를 잇는 장르로서, 저음을 보강한 3화음 중심의 성부 진행을 보이며, 네 성부 구조의 모범으로 여겨진다.
바로크 시대의 콘체르토가 악기들 간의 음향 대비를 통한 경쟁의 성격이 강하였다면, 고전주의 시대의 협주곡은 독주 악기와 오케스트라가 서로 협력관계에서 음악을 전개시킨다.


기악 음악의 최고봉은 교향곡(symphony)이라 할 수 있는데, 이것은 원래 이탈리아의 신포니아(sinfonia)에서 유래하였으며, 오페라나 칸타타, 오라토리오 등에서 이루어진 성악곡을 연주하기 전에 순수한 기악곡으로 연주하던 음악이었다. 이것이 고전파 시대에 소나타 형식의 악장을 포함한 독립적인 다악장의 곡으로 변모한 것이다. 고전주의 시대 많은 작품의 주축이며 작곡 양식이었던 소나타는 두 가지의 의미를 가지고 있다.

첫 번째는 장르로서의 소나타이며, 두 번째는 한 악장에 드러나는 악장 구조로서의 소나타 형식이다.


  당시 뛰어난 오케스트라를 소유하고 있던 만하임 궁중악단(만하임악파)이 교향곡 발달에 큰 기여를 하였다.



1) 장르로서의 소나타


바로크 시대에 모음곡 수준이었던 다악장의 곡들도 소나타 악장 형식을 포함한 소나타로 진화하였다. 이것을 다악장 소나타라고도 하는데, 고전주의 시대에 소나타라고 이름 붙은 작품은 대개 독주 피아노 소나타이거나 피아노와 함께 연주하는 소나타였다.


특히 어떤 음악이 소나타인가 아닌가를 결정하게 되는 주요 기준은 그 작품의 1악장과 4악장이 소나타 형식으로 구성되었는가 구성되지 않았는가에 달렸다.


다악장 소나타는 보통 세 개의 악장 또는 네 개의 악장으로 이루어져 있다.
1악장은 빠르고 극적이며 표현하고자 하는 바를 두 개의 주요 주제에 실어서 제시하는 악장이다.

2악장은 그 긴장을 이완시키는 느리고 서정적인 노래 형식으로 이루어져 있다.

3악장은 일반적으로 춤곡인 미뉴에트가 사용되었으나, 베토벤은 보다 해학적인 스케르초를 쓰기도 했다.

4악장은 다시 빠른 템포로 돌아와 1악장에서 사용했던 조성을 그대로 사용하면서 전체를 마무리한다. 장르로서의 소나타는 이와 같이 3~4 악장으로 구성된 작품 전체를 일컫는다.


  시대에 따른 소나타의 의미
㉠ 바로크 초기: 기악으로 연주하는 모든 곡
㉡ 바로크 후기: 느림-빠름-느림-빠름의 기악적 악기곡 모음(교회 소나타) 혹은 몇 개의 악기로 연주되는 춤곡 중심의 모음(실내 소나타)
㉢ 고전주의 소나타: 4개의 악장 구조를 가지며 1악장과 4악장이 소나타 형식으로 작곡된 것



2) 악장 형식으로서의 소나타
바로크 시대에 발달한 기악곡은 고전주의 시대에 드디어 제시-발전-재현부의 논리적 구조를 갖추게 되었다. 이것은 한 악장의 전개를 나타내는 개념이며 소나타 형식이라고도 한다. 고전주의 소나타 형식에서 핵심적인 것은 두 개의 주제이다. 두 개의 대비적 주제들 및 그에 따른 제시부, 발전부, 재현부의 틀은 부분적으로 C. P. E 바흐나 알베르티(Domenico Alberti; 1710~1740년경) 등 전 고전주의 시대 작곡가들의 작품에서 이미 발견되었다. 하지만 주제와 동기의 발전을 통한 내적 유기성의 강화는 하이든에 의해 성취되었다.


제시부는 중심 조성의 제1주제와 5도 관계로 제2주제가 대비되는 것을 골자로 한다. 단조일 경우 제2주제는 대개 병행조로 나타난다. 제1주제와 제2주제는 조성뿐만 아니라 선율적 성격도 대비되는 것이 일반적이다.


발전부에서는 확대와 축소, 반복과 화성 변화 등을 통해 주제와 동기의 가공 작업이 본격적으로 펼쳐진다. 이전의 동기 및 보조 요소들을 잘게 쪼개고 재구성하여 극적인 발전을 이루어 낸다.


재현부에서는 앞의 제시부가 다시 나타나는데, 곡의 마감을 중심 조성으로 하기 위하여 제시부에서와는 다르게 제2주제가 중심 조성으로 옮겨져서 나타난다. 간혹 제시부에 느린 도입부가 선행되기도 하고, 재현부 끝에 효과적인 기교로 마무리를 하는 코다(coda)가 붙기도 한다.


Portrait by Ludwig Guttenbrunn, painted c. 1791–92, depicts Haydn c. 1770

▲ 하이든의 초상(루트비히 구텐브룬 그림/1770년경)
하이든은 ‘파파 하이든’이라고 불릴 정도로 점잖고 모범적인 성품으로 존경을 받았다.


변증법적 사고에 동조했던 마르크스(Adolf Bernhard Marx; 1795~1866)는 19세기 중엽에 이르러 정-반-합의 변화와 조화원리를 소나타 형식에 적용하여 설명하기도 했다.


바로크 시대의 기악곡에서는 하나의 악장이 하나의 감정을 표현해야 할 것으로 여겨져 두 개의 주제가 설정되지 않았다.



[3] 고전주의의 성악 음악


1) 오페라(오페라 세리아, 오페라 부파, 오페라 코미크, 징슈필)


고전주의 시대에는 이탈리아의 오페라 세리아에 대한 인기가 점차 줄어들게 되었다. 오페라 세리아가 지나치게 아리아를 중심으로 구성되기 때문에 극적인 전개가 부자연스럽다는 지적이 끊이지 않아 이에 따라 레시터티브의 역할이 강화되었다.


지속되는 저음 악기에 의한 레시터티브 세코(recitativo secco) 형태를 벗어나 오케스트라가 풍부한 음향으로 반주되는 레시터티브 아콤파냐토(recitativo accompagnato) 형태로 강화되어 보다 성악적인 선율인 아리오
소가 된 것이다.


이와 같은 오페라 개혁의 중심에는 글룩(Christoph Willibald Gluck; 1714~1787)이 있었다. 그는 경직된 오페라 세리아의 문제를 극적 줄거리의 강화로 풀어 나가고자 했다. 오페라 서곡을 작품 전체의 흐름과 연계하여 작곡하였으며, 아리아의 숫자를 줄이고 오케스트라 반주의 레시터티브의 숫자를 늘렸으며 합창과 중창을 강화시켰다.


극적 전개가 중시되는 흐름은 그 당시 각광받던 오페라 부파의 영향 때문이었다. 오페라 부파는 일상적인 언어에 의한 가사, 서민적이고 진보적인 줄거리, 자연스러운 아리아로 이루어졌으며 이는 줄거리의 내용을 알기 쉽게 전달해 주었다.


18세기 중엽까지만 하더라도 한 등급 낮은 장르로 여겨지던 오페라 부파를 예술적으로 끌어올려 고전적 이상에 부합시킨 사람은 모차르트였다. 모차르트의 오페라 부파들은 오페라 세리아에 뒤지지 않는 높은 음악적 완성도를 보이며, 흥미와 더불어 짜임새 있는 구조에서 오는 음악적 아름다움을 전했다. ‘피가로의 결혼(Le Nozze di Figaro; 1786)’, ‘돈 조반니(Don Giovanni; 1787)’,‘ 코시 판 투테(Cosi fan tutte; 1790)’는 모차르트의 대
표적인 오페라 부파이다.


이탈리아의 오페라 부파는 각 지역에 영향을 미쳐 특징적으로 발전하게 되었는데 프랑스에서는 오페라 코미크(opera comique)가 발달하였다. 1752년 이탈리아의 페르골레지의‘마님이 된 하녀’가 프랑스에서 연주된 후 촉발된 부퐁 논쟁은 오페라 부파와 같은 파격적인 장르를 용인할 수 있는가에 대한 진보와 보수의 격렬한 논쟁이었다. 이것은 도리어 오페라 코미크 발전에 도화선이 되었으며, 음악의 자연스러움을 주장하던 사상가 루소는 직접 막간극 ‘마을의 점쟁이’를 작곡하였다.


독일에서는 18세기 중엽에 독일어로 쓰여진 희극 오페라가 나왔는데 이를 ‘징슈필(Singspiel)’이라고 한다.

징슈필은 레시터티브 대신 말로 하는 대화를 사용하였는데, 고전주의 시대의 징슈필은 동화적이며 이상주의적인 내용을 포함하기도 했으며, 반드시 유희적이지만은 않았다. 징슈필을 높은 예술적 경지로 끌어올린 사람은 바로 모차르트이다. 모차르트의 징슈필 중 대표적인 것은‘후궁으로부터의 도주(1782)’,‘ 요술피리(1791)’이다.


모차르트 징슈필의 음악적 기초는 민요이지만, 이탈리아적 콜로라투라 아리아, 프랑스적 보드빌 등 여러 나라의 양식이 혼합되어 있다.


  오페라 세리아
오페라 세리아는 신화나 전설 등의 심각한 줄거리를 대본으로 하였으므로 계몽 시대의 흐름에는 맞지 않았다.


  아리오소
아리오소(arioso)는 전통적인 레시터티브와 아리아의 중간에 해당된다.


The Mozart Family

▲ 모차르트 일가(J. N. 델라 크로체 그림/1780년경)


  모차르트의 오페라 부파 ‘피가로의 결혼’, ‘돈 조반니’, ‘코지 판 투테’는 모두 다 폰테(Lorenzo da Ponte; 1749~1838)의 대본에 의한 것이다.


Le Nozze di Figaro - MET (2012) - Le Nozze di Figaro - MET (2012)

▲‘피가로의 결혼’의 한 장면
하녀 수잔나와 피가로의 결혼을 방해하는 알마비바 백작의 수난을 다룬 오페라로, 타락한 지배 계급을 비판하고 있다.


※ 프랑스적 보드빌
오페라 코믹에서 많이 볼 수 있는 것으로, 등장인물들이 돌아가면서 노래 한 구절씩을 부르면 합창적 후렴구가 뒤따르는 형식.



2) 고전주의 시대의 교회 성악 음악


교회 음악 분야에서는 오라토리오와 미사의 전통이 이어졌으나, 그 비중은 이전보다 훨씬 낮아졌다. 르네상스의 반종교 개혁에 의한 전통으로 악기를 사용한 극적 미사에 대하여 교회에서는 부정적인 입장을 보였으나, 작곡가들은 교회 음악을 통하여 예술적 이상을 드러내려고 했고, 오케스트라 음향을 섞은 장대한 미사 음악은 고전주의 시대에 하이든, 모차르트, 베토벤에게서 나타났다.


그 당시 빈에서 교회 음악의 장대함을 금지하는 칙령에 따라 많은 작품이 남아 있지는 않지만, 하이든은 10여 개의 미사를 작곡하였고, 모차르트는 20개에 가까운 미사를 남겼으며, 베토벤은 ‘C장조 미사(1807)’ 와 ‘장엄 미사(1819~1823)’를 남겼다. 베토벤의 ‘장엄 미사’ 는 전례적 기능을 탈피한 연주회용 음악의 성격을 띠는데, 그는 이 미사 작품의 일부를 일반 공연장에서 연주하였다.


18세기 중엽을 지나면서 오라토리오에는 자국어를 사용하게 되었는데, 고전 시대의 대표적 오라토리오 작곡가는 하이든이다. 하이든이 작곡한 첫 오라토리오는‘천지 창조(Die Scho¨`pfung, 1798)’였는데, 그는 이 작품에서 교향악적인 음향에 영국 전통의 풍부한 합창 음향을 결합시켰다.


  베토벤의 장엄 미사는 그의 사후인 1830년에 바른스도르프(varnsdorf)의 성 베드로 및 바오로 교회에서 처
음으로 전례에 사용되었다.


A portrait of Ludwig van Beethoven, 1820


Ludwig Van Beethoven (retrato de Joseph Stieler)

▲ 베토벤의 사후 초상화 (요제프 슈틸러 그림)



3) 고전주의 시대의 가곡


고전주의 시대에는 피아노 반주가 딸린 노래들도 작곡되었다. 대부분 편안한 선율에 단순한 화성을 붙인 것들이어서 예술적 가치는 미약했지만 하이든, 모차르트와 베토벤의 일부 가곡들은 수준 높은 음악성을 보여 준다.


하이든은 수많은 영국 민요를 편곡하여 피아노 반주를 붙였으며, 40여 곡의 가곡을 남겼다. 모차르트는 30여 곡의 가곡을 작곡했으며 그의 작품 가운데 통절 가곡 ‘오랑캐꽃(Das Veilchen, K. 476)’ 은 괴테의 시를 사용하여 줄거리의 각 장면을 극적으로 표현했다. 베토벤은 90여 곡의 가곡을 남겼는데 ‘그대를 사랑해(Ich liebe dich, WoO. 123)’와 ‘아델라이데(Adelaide, Op. 46)’가 대표적인 작품이다. 특히 ‘먼 곳의 연인에게(An die ferne Geliebte, Op.98)’는 최초의 연가곡으로서 조성이 순환하는 방식을 사용했으며, 첫 곡의 선율 동기를 끝 곡에서 사용하여 작품 전체의 유기성을 강화하였다. ‘3 songs, Op. 83’에서는 세 개의 노래를 묶어서 하나의 작품 번호 안에 두었다.


Immagine di Esterhazy Palace, Eisenstadt: The Haydn Concert Hall in the Esterhazy Palace -

▲ 아이젠슈타트에 있는 에스테르하지 궁
하이든은 한때 유럽 최고의 귀족이었던 에스테르하지 가문의 전속 음악가로 30년 이상을 지내며 수많은 곡을 작곡하였다.



[4] 고전주의 시대의 피아노 소나타


고전주의 시대에 이르러 피아노는 실내악 작품에서 주도적인 역할을 하며 2중주 소나타는 대개 피아노와 함께 편성되었다. 고전주의 시대의 전성기에 이르러서는 피아노와 독주 선율 악기가 대등한 입장에서 역할을 맡게 되었다.


이전의 쳄발로 및 클라비코드는 피아노로 대체되었다. 이탈리아의 크리스토포리(Bartolomeo Cristofori; 1655~1731)는 18세기 초에 해머(hammer; 작은 망치) 장치를 이용해 줄을 섬세하고 강하게 내려칠 수 있도록 고안하였다. 이 악기의 공식 명칭은 피아노포르테(Pianoforte) 또는 포르테피아노(Fortepiano)로서 음량을 자유자재로 연주할 수 있다는 뜻을 포함하고 있다.


하이든의 초기 피아노 소나타들은 칼 필립 에마누엘 바흐(C. P. E. Bach)의 환상적 요소의 작품들로부터 많은 영향을 받았으며, 1770년대에 들어서면서 다른 장르에서와 마찬가지로 감정 과다 양식이 드러난다.


베토벤은 모차르트와 더불어 당대의 뛰어난 피아니스트였는데, 그의 후기 피아노 소나타에서는 극단적인 대비와 대위법적 구성으로 깊은 내면에 대한 추구를 표현하였다.


  피아노에 비하여 쳄발로는 건반을 누름에 따라 줄을 퉁겨서 소리를 냈는데 음량을 조절하기 어려운 단점이 있었으며, 클라비코드는 접촉쇠가 장착된 줄을 직접쳐서 소리 내는 악기인데 음량이 작아서 다양한 감정
을 표출하기 어려웠다.


Hammerflügel Wolfgang Amadeus Mozarts von Anton Walter, um 1780

▲ 모차르트가 쓰던 콘서트용 피아노포르테



[5] 고전주의 시대의 실내악


실내악은 실내에서 연주할 정도의 소규모 편성 음악을 말하는데, 엄밀하게는 두 개 이상의 악기가 연주하는 것을 의미한다.


2중주의 대표적인 것은 바이올린 소나타인데 베토벤은‘봄(Op. 24, 1801)’과‘크로이처(Op. 47, 1803)’에서 두 악기가 대등한 관계로 연주되도록 하였다. 고전주의 시대에는 첼로의 중요성이 커졌는데, 보케리니와 뒤포르(Jean Louis Duport; 1749~1819)는 첼로 주법을 연구하여 이에 크게 기여하였다. 베토벤은 바이올린 소나타에 필적할 만한 첼로 소나타(Op. 5, 69,102)를 작곡하였으며 이는 당시 중요해진 첼로의 위상을 말해 준다.


현악 4중주는 보통 제1바이올린, 제2바이올린, 비올라, 첼로로 편성되는데, 하이든은 현악 4중주를 정착시킨 작곡가라 할 수 있다. 그는 70곡에 가까운 현악 4중주곡 등으로 고전파 기악곡의 전형이 되었다.


베토벤의 후기 현악 4중주에서는 기존의 형식적 틀이 자주 무시되며 정신적 내용을 함께 담아내려는 시도가 보인다. 1820년대에 작곡된 다섯 개의 4중주(Op. 127, 130, 131, 132, 135)와‘큰 푸가 4중주(Op. 133)’에서 고전
시대의 음악 이상을 벗어나 낭만적인 성향이 엿보인다.


18세기 중엽에 오케스트라에 관악기가 포함되면서 실내악에도 관악기가 사용되었다. 이런 실내악 작품을 비교적 많이 남긴 작곡가는 모차르트인데 그는 기악 모음곡인 디베르티멘토를 다수 작곡하였고, 나아가 현악 앙상블에 관악기가 혼합된 편성으로 완성도 높은 음악을 선보였다.


  고전주의 시대의 실내악으로 대표적인 것은 현악기 중심의 3중주(Trio), 4중주(Quartet), 5중주(Quintet), 피아노 반주를 곁들인 현악기와 관악기가 섞인 6중주(Sextet), 7중주(Septet), 8중주(Octet), 9중주(Nonet)가 있으며, 간단한 편성의 악기 반주의 독창이나 중창도 넓은 의미에서 실내악으로 포함하기도 한다.


  베토벤의 후기 작품의 시기는 낭만파 초기의 대표자들인 베버나 슈베르트의 활동과도 겹치고 있는 점이 주목된다.



[6]고전주의 오케스트라 음악


고전주의 시대의 오케스트라 음악은 교향곡과 협주곡으로 나뉜다.


1) 교향곡


교향곡(Symphony)의 전통은 나폴리 오페라에서 서곡으로 쓰인 신포니아(Sinfonia)에서 찾을 수 있으며, 삼마르티니(Giovanni Battista Sammartini; 1701~1775)는 70곡이 넘는 신포니아를 작곡함으로써 교향곡을 독립적인 장르로 인식하게 하였다. 18세기 중엽의 만하임 궁중의 오케스트라는 교향곡 음향이 크고 세밀해지는 데 기여했는데 슈타미츠(Johann Stamitz; 1717~1757), 리히터(Franz Xaver Richter; 1709~1789)는 각각 60~70곡에 이르는 교향곡을 남겼다.


교향곡 형식을 높은 수준으로 끌어올리고 정착시킨 작곡가는 하이든(Franz Joseph Haydn; 1732~1809)이었는데 그는 100곡 이상의 교향곡을 작곡하였으며, 특히 1악장에서 소나타 형식을 완성하였고 표준적인 4악장 형식의 교향곡을 정착시켰다.


하이든의 초기 교향곡은 당시 유행한 감정 과다 양식에 영향을 받은 만하임풍의 작품이었으나, 1780년대 이후부터는 주제와 동기를 집중적으로 발전시키는 빈 스타일의 소나타 작법으로 작곡하였다.

에스테르하지 집안의 악장으로 봉사하던 그는 1791년에 오케스트라가 해체함에 따라 영국으로 가게 되었는데, 영국에서의 생활은 음악적으로 큰 발전을 이루는 계기가 되어 ‘런던 교향곡들(93번~104번)’ 과 같은 하이든 교향곡의 최대 수작을 남겼다.


특히 런던에서 열린 하이든 교향곡 연주회는 일반 대중들을 대상으로 한 유료 오케스트라 음악회였다는 점에서 큰 의미가 있다. 하이든은 교향곡 99번에서 클라리넷을 오케스트라 편성에 넣었으며, 군대 교향곡으로 불리는 100번에서는 트럼펫과 팀파니도 도입하여 관현악의 색채를 다채롭게 하였다. 또한 당시로서는 터키 악기로 여겨지던 트라이앵글, 심벌즈, 큰북 등의 타악기 음향을 도입하였다.


모차르트(Wolfgang Amadeus Mozart; 1756~1791)의 작곡 활동에 커다란 영향을 미친 것은 서유럽 여행(1763~1766)이었다. 모차르트는 파리에서 알게된 J. 쇼베르트, 런던에서 알게 된 J. C. 바흐 등의 작곡가들로부터 많은 영향을 받았다. 그리하여 파리에서는 바이올린 소나타를, 런던에서는 최초의 교향곡(제1번 Eb장조) 등을 작곡하였는데, 이때가 8세 때였다.


빈 시대의 후반에 접어들자 모차르트의 작품 세계는 한층 무르익었지만, 반면 빈 청중들의 기호로부터는 차차 멀어져서 생활은 어려워지고 빚도 많아 졌다.

1788년에는 심해지는 경제적인 궁핍 속에서 이른바 3대 교향곡 ‘제39번 E장조’, ‘제40번 g단조’, ‘제41번 C장조(주피터 교향곡)’을 작곡했는데 첫 번째 작품은 ‘백조의 노래’ 라는 부제로 불리기도 한다.

둘째 작품은 다른 교향곡(K. 183)에 비하여 규모가 커서‘대 g단조 교향곡’이라 불린다. 셋째 작품은‘주피터 교향곡’이라고 불린다. 이 세 작품은 모차르트 교향곡의 절정이라 할 정도로 음악적으로 높은 응집력을 보여 준다.


베토벤(Ludwig van Beethoven; 1770~1827)은 교향곡의 표현력을 극단적으로 확대하였다. 베토벤의 생애에는 전쟁과 혁명이 끊이지 않았다. 19세기 서구 역사의 대전환기를 맞아 자유 혁명과 독재 권력의 갈등 속에서 그의 작품은 고독한 서구 인류의 정신 문화사적 운명의 갈등을 보여 준다.
베토벤은 만하임악파의 영향 아래 습작들을 썼으며, 특히 하이든의 모델을 따르며 1800년에는 ‘제1교향곡’ 을 발표했는데, 이 무렵부터 귓병이 점차 악화되었다. 절망한 베토벤은 1802년 ‘하일리겐슈타트의 유서’ 를 쓰고 연주자로서의 활동을 포기하고 작곡에만 전념했으며 외부와의 접촉을 피했다. 그런 생활 속에서‘제2교향곡(1802)’을 발표하고, 1804년에는‘제3교향곡(영웅 교향곡)’에서 나폴레옹이라는 새로운 영웅을 창조하였다.


‘영웅 교향곡’첫 악장에 등장한 절대 권력의 군주는 제2악장에서 사라지고, 제3악장에서 새로운 시대의 지도자가 민중들의 대열 속에서 나타나, 제4악장의 자유로운 공화 시대를 알리는 팡파레와 함께 역사의 영웅으로 추대된다. 3번 교향곡부터는 하이든이나 모차르트의 영향에서 완전히 벗어나 개성적인 양식을 확립하였다.

특히 ‘제5교향곡(운명 교향곡, 1808)’에서는 주제-동기 가공 작업의 극단적 예를 보여 주었으며, ‘제6교향곡(전원 교향곡,1808)’에서는 표제적 내용을 나타내었다. ‘제9교향곡(합창, 1824)’은 온 인류의 역사적 승리를 예언하는 일대의 서사시로서 마지막 악장에서 쉴러(Friedrich von Schiller; 1759~1805)의 ‘환희의 송가’ 를 노래하는 중창과 합창이 등장하는 새롭고도 거대한 교향곡이다.


※ 신포니아(Sinfonia)
신포니아는 함께(sin) 울림(fonia)이라는 의미이다.


초기의 교향곡은 현악기로만 구성하였으나 점차 관악기를 포함하게 되었다.


하이든이 정착시킨 4악장 형식은 소나타 형식의 1악장, 느린 2악장, 미뉴에트 3악장, 빠른 소나타 형식의 4악장이다.


하이든은 궁중 밖과 다른 나라에서도 큰 인정을 받은 작곡가였지만, 생의 대부분을 귀족을 위해 봉사하는
음악가로 살았다.


※ J. C. 바흐
런던 바흐로 알려져 있던 J. C. 바흐(요한 크리스천 바흐)는 J. S. 바흐의 막내 아들이다.


  베토벤의 작품은 동적(動的)인 힘이 특징이며, 곡마다 독자적인 스타일로 하나의 정신적인 세계를 이루고
있다.


  1815년 이후의 12년간은 베토벤의 창작기 중에서 후기에 속한다. 이 무렵에는 귓병의 악화로 완전히 소리
를 들을 수 없게 되어 필담(筆談)을 통해서만 의사를 소통할 수 있었다. 베토벤 자신의 연주회 횟수도 줄어들었고, 보다 가벼운 음악을 애호하기 시작하면서 그의 일련의 창작 활동은 저조해졌다. 그러나 다시 힘찬 작곡 활동을 계속하여 뛰어난 대작을 작곡하였으며, 합창을 포함한 ‘제9교향곡’ 에서 그 정점을 이룬다.


Beethoven's funeral as depicted by Franz Xaver Stöber (1795–1858)

▲ 베토벤의 장례식 행렬
1827년 3월 29일에 치러진 장례식에는 2만여 명의 사람들이 모여들어 그의 죽음을 애도하였다.



2) 협주곡


고전주의 시대의 협주곡은 하나의 악기가 오케스트라와 대비를 이루는 독주 협주곡이 주류를 이루었으며, 피아노 또는 바이올린 협주곡이 많았으나 이외의 다른 악기를 위한 협주곡도 작곡되었다. 이외에 여러 악기가 독주 악기로 참여하는 협주적 교향곡도 있다. 협주곡의 악장은 비발디의 전통대로 ‘빠른 1악장-느린 2악장-빠른 3악장’의 세 악장 구조이며 1악장은 고전주의 특유의 소나타 형식으로 구성되었다.

재현부 앞의 카덴차(cadenza)는 연주자가 즉흥으로 연주하는 부분인데, 이것은 마치 바로크 시대의 오페라 아리아의 즉흥성을 보는 듯하다. 하이든의 협주곡 중 높은 완성도를 보여 주는 것은 중기에 작곡된 두 곡의 첼로 협주곡과 후기에 작곡된 트럼펫 협주곡(Eb장조)이다.


모차르트는 전 생애에 걸쳐 협주곡에 관심을 가졌고 많은 위대한 협주곡을 남겼다. 그는 당시 많이 작곡되던 피아노, 바이올린, 플루트, 클라리넷뿐만 아니라 오보에와 바순을 위한 작품을 포함한 협주곡을 40여 곡이나 작곡하였다. 그중에서 모차르트의 중반기에 해당하는 1780년대 전반기 빈 시절의 작품만 하더라도 피아노 협주곡 17개가 있는데, 이들 작품에서는 모차르트의 음악적 성숙미를 느낄 수 있다. 그러나 무엇보다도 모차르트의 천재성과 탁월성을 드러내는 작품은 1784년 이후의 작품들인데, 이것들은 그가 유료 음악회를 위하여 작곡한 곡들이었다. 21번(C장조) 피아노 협주곡(K. 467), 24번(c단조)피아노 협주곡, 26번 피아노 협주곡(K. 537; 대관식 협주곡)은 깨끗하고 효과적인 악기 사용이 빛나는 작품들이다.


베토벤은 많지 않은 협주곡을 남겼으나 자기 모방 없이 각 작품의 성격이 강한 기념비적인 작품을 남겼다. 다섯 개의 피아노 협주곡, 바이올린 협주곡(Op. 61), 피아노와 바이올린 및 첼로를 위한 3중 협주곡이 대표적인 작품이다. 피아노 협주곡 4번에서는 음량의 변화와 페달의 활용이 두드러지며, ‘황제 피아노 협주곡’이라 불리는 협주곡 5번은 베토벤의 중후함을 보여 주는 교향곡적 협주곡이다. 하이든과 모차르트가 확립한 고전파 형식과 양식은 베토벤에 의하여 더 개성적으로 다듬어졌으며, 이를 통해 낭만파로의 이행을 준비할 수 있었다.


고전주의 시대의 협주곡
첼로 협주곡의 작곡가로는 보케리니(11곡)와 뒤포르(6곡)가 유명하며, 롤라(Ale ssandro Rolla; 1715~1841)는 10곡 이상의 비올라 협주곡을, 슈페르거(18곡)와 드라고네티가 다수의 콘트라베이스 협주곡을 남겼다. 하이든은 빈의 뛰어난 트럼펫 연주자 바이딩거(A. Weidinger)를 위해 트럼펫 협주곡을 작곡했다.


▲ 베토벤이 말년을 보낸 수도원의 방


  베토벤의 작품은 빈을 비롯하여 유럽 각지의 출판사들이 앞다투어 간행하였다. 그는 출판사의 작곡료와 귀족들의 지원 덕분에 모차르트와는 달리 안정된 생활을 할 수 있었다.











출처 : 마음의 정원
글쓴이 : 마음의 정원 원글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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