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크랩] Re:모짜르트의 대관식미사에 대해...

2019. 1. 3. 10:05율려 이야기

모차르트의 교회 작품은 불과 몇 가지 곡을 제외하고는 일반에게는 아직 알려지지 않고 있지만, 수량에 있어서는 상당히 많은 작품을 남기고 있다. 20곡을 헤아리는 미사를 위시한 작품의 대부분은 모차르트의 비인 이주 이전, 출생지인 고향 잘츠부르크에서 작곡된 것들이다. 이것은 그가 잘츠부르크 대사교에 봉사하는 교회음악의 직무를 수행하고 있었던 것을 여실히 말해주고 있는데, 이것은 1768년부터 1777년까지 그가 쓴 10여곡의 미사곡을 통해서 이런 측면을 단적으로 보여주고 있다. 만하임 파리 여행을 끝내고 잘츠부르크에 귀착한 그의 손에서 태어난 C장조 K. 317의 통칭 <대관식 미사>는 이러한 모차르트의 미사곡중에서 특히 잘 알려진 곡이다.
이 작품이 <대관식 미사>로 불리게 된데는 현재 다음의 통설이 믿어져 왔다. 잘츠부르크 북쪽 교외 언덕에 건립된 마리아 프라인 순례교회의 주제단에 장식된 성모 마리아 대관상에는 다음과 같은 유래가 있다. 이 결코 크지 않은 성모자상은 전에 기적적으로 화재를 면해서 이 아담한 교회로 옮겨져 1744년에 잘츠부르크 사람들에 의해 대관된 것이었으나 1751년 성령 강림의 대 축일 후의 제 5일요일 (6월 4일)에 로마 교홍 베네딕투스 14세에 의해서 그 대관 의식이 다시금 거행되어 이후 매년 그날에 미사가 봉헌되는 관례로 되어 있었다.
모차르트는 1779년의 이 봉헌일(6월 27일)을 위해서 이 미사곡을 작곡했다고 하는데, 그래서 이 통칭으로 불리어 지게 된 것이라고 여겨 지고 있었다. 그러나 이 통설은 현재 부정되고 있는데 이 근거로 몇가지 이유가 있다. 모차르트는 이 곡을 1779년 3월 23일에 완성하고 있다. 그의 작곡 관례로 보아 6월 하순에나 연주될 곡을 3개월이나 미리 써 두었다는 것은 생각할 수 없는 일이다. 또한, 곡의 규모는 종래의 작품과 달리 상당히 큰 것이고 또 당당하고 힘차다. 악기 편성도 크고 비올라를 빼고 있는 점은 종래와 같지만 현 4부 외에 오보, 혼, 트럼펫 각2에 트롬본 3, 팀파니에 오르간 등, 이처럼 다양하여 마리아 프라인 순레교회의 작은 내부 공간에는 맞지 않는 점이 그 것이다.
이상과 같은 점에서 이 미사곡은 같은 1779년 4월 4일부터 5일에 걸친 부활절 식전을 목표로 씌어졌고 잘츠부르크 대성당에서 연주되었을 것이라고 정정되기에 이르렀다. 그러면 왜 <대관식 미사>로 불리게 되었는가? 모차르트는 다음 1780년에도 C장조의 <미사 솔렘니스> K. 337을 쓰고 있는데, 어떤 곡도 10년 정도 후의 1790년에 유럽 각지에서 거행된 레오폴트 2세의 대관식의 기념미사에 쓰여지고 있다. 이러한 사실에서 이 곡이 비인에서 먼저 <대관식 미사>라고 불리어 졌으리라 생각된다.
인간으로서 뿐만 아니라 예술가로서의 모차르트의 성숙에 커다란 뜻을 갖는 만하임 파리 여행을 끝내고 부터의 작품인 만큼 <대관식 미사>는 이미 말한 바와 같이 지금까지의 작품과는 달리 규모가 크고 또 힘찬 것이 되었지만 그래도 악기 편성 등에서는 잘츠부르크의 전통적인 틀에 꽤 충실히 따르고 있다. 이런 점에서 특히 현저한 특징은 당시의 잘츠부르크의 교회 음악에 비올라의 파트를 빼고 있었던 것으로 이 곡도 여행전의 모차르트가 보통으로 하고 있던 그러한 특징적인 편성을 그대로 답습하고 있다. 그리고 특히 이 작품의 <아뉴스 데이>의 소프라노 독창의 선율이 <피가로의 결혼>의 백작부인의 아리아(제 3막 19번)의 첫머리와 비슷한 것이나 곡 중 극히 기악적인 패시지가 자주 보이는 것 등으로 해서 이 작품이 세속적이며 기악적이고 한 걸음 나아가서 비 교회적이며 비 종교적이라고 하는 생각을 일반적으로 갖게 되었으나 이러한 양식은 당시 세속, 교회의 구별이 없이 취해지고 있었던 것으로, 이 곡이 특히 비 교회적이라고 하는 것은 분명 잘못일 것이다. 모차르트의 종교음악 창작 활동은 비인 이주를 기회로 해서 교회 음악가로서의 직무포기에 따라서 개인적 주관적인 신앙 체험의 표명이라는 형태를 취하여 작품 수도 두드러지게 줄어들 뿐 만 아니라 새로 접촉한 바로크 음악이 갖는 폴리포니 양식의 영향도 있어서 송두리째 양식을 일변하지만 특히 호모포닉한 성격을 갖는 <대관식 미사>는 1년 후에 잘츠부르크에서 작곡된 같은 C장조의 <미사 솔렘니스> K. 337과 더불어 순수하게 직업적인 교회 음악가로서의 그의 손에서 태어난 10여곡의 미사곡과 비인 시대의 두 개의 미완성 작품(c단조 K427(417a) , d단조 K. 626 <레퀴엠>) 사이에 낀 극히 중요한 작품이 되고 있다.


출처 : cbs conductor
글쓴이 : cbs지휘교실 원글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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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짜르트 생애| ―음악 이론과 정보 

심박 | 조회 457 |추천 0 | 2008.03.21. 08:37


 1756년 : 1월 27일 볼프강 아마데우스 모차르트 잘츠부르크에서 탄생. 음악가인 레오폴트 모차르트 안나 마리아(페르틀) 부부의 일곱 번째 막내 아들로 태어남 아버지는 궁정 바이올리니스트였고 1757년 궁정 작곡가 칭호를 얻었으며, 음악교육자인 동시에 [바이올린 교본]을 쓰기도 했다.

  • 1761년 : 최초의 작품 [미누에트](KV1) 작곡됨. 요한 에른스트 에벨를린[지기스문투스]에 처음으로 출연

  • 1762년 : 아버지와 5년 손위 누나인 난네를과 뮌헨, 빈 연주 여행함

  • 1763년 : 가족과 뮌헨, 아우크스부르크, 루드비히스브르크, 슈바이칭겐, 하이델베르크, 마인츠, 프랑크푸르트 암마인(이 곳에서 열네살이였던 괴테가 모차르트의 연주를 듣는다.), 코블렌츠, 쾰른, 아헨, 브뤼셀, 파리를 여행한다. 최초의 소나타로 [바이올린과 피아노를 위한 소나타] 가 나옴

  • 1764년 : 계속해서 런던 여행. 카를 프리드리히 아벨요한 크리스티안 바흐와 만남. [런던 음악 노트]

  • 1765년 : 계속해서 헤이그를 여행함. 3개의 첫 [교향곡]이 나오고 계속해서 [바이올린 소나타]가 씌어짐.

  • 1767년 : 종교 징슈필 [제1계의 의무](3월 12일, 잘츠부르크). 라틴어 학교 오페라 [아폴로와 히야신스](5월 13일, 잘츠부르크). 아버지, 난네를과 함께 을 여행. 프란츠 1세의 위촉으로 [가짜 아가씨]작곡. 잠시 올뮈츠에 체류하며 천연두를 앓음.

  • 1768년 : 징슈필 [바스티앙과 바스티엔] 작곡. 잘츠부르크로 귀향.

  • 1769년 : 오페라 부파 [가짜 아가씨](5월 1일, 잘츠부르크). 잘츠부르크 콘서트 마스터가 됨. 12월, 아버지와 제1차 이탈리아 여행.

  • 1770년 : 밀라노에 체류. 조반니 바티스타 삼마르티니와 만남. 볼로냐에서 파드레 마르티니와 만남. 계속해서 파두아로마 여행. 교황 클레멘스 14세에게 황금 박차 기사 훈장을 받음. 계속해서 나폴리에서 조반니 파이지엘로를 만남. 다시 로마, 볼로냐(필하머니 협회회원이 됨) 밀라노로 감. 오페라 세리아 [폰토 왕, 미트리다테](12월 26일, 밀라노). 로디에서 최초의 현악 4중주(KV80) 작곡.

  • 1771년 : 8월, 아버지와 제2차 이탈리아 여행 떠남. 요한 아돌프 하세와 만남. 오라토리오 [해방된 베툴리아] 작곡

  • 1772년 : 극적 세레나데 [시피오네의 꿈] 작곡 (콜로레도 백작의 잘츠부르크 대주교 취임식 축하곡). 유급 콘서트 마스터로 임명됨. 10월 아버지와 제3회 이탈리아 여행. 음악극 [루치오 실라]완성 (12월 26일, 밀라노).

  • 1773년 : 현악 4중주, 교향곡, 최초의 피아노 협주곡, 디베르티노멘, [세레나데]작곡 게블러의 연극 [이집트의 왕, 타모스] 무대음악 작곡.

  • 1775년 : 오페라 부파 [사랑의 꽃다발](1월 13일, 뮌헨). 음악극 [목자의 왕](4월 23일, 잘츠부르크). [기악 음악들][바이올린 협주곡] 작곡.

  • 1776년 : [피아노 협주곡], [세레나데](하프너 세레나데외 다수), 디베르티멘토, 교회 소나타, 미사곡 작곡.

  • 1777년 : 협주곡, 디베르티노멘토, 교회 음악 작곡. 잘츠부르크 궁정의 직위를 사직함. 알로이지아 베버와 사랑에 빠지며 후에 아내가 된 알로이지아의 동생 콘스탄체와도 만남.

  • 1779년 : 잘츠부르크의 대교구의 일을 다시 맡고 콘서트 마스터와 궁정 오르가니스트로 임명됨. 오케스트라 작품과 교회음악(대관식 미사 등)작곡. 미완 오페라 [차이데]작곡

  • 1780년 : [이도메네오] 작업 시작. 11월, 뮌헨 여행

  • 1781년 : 오페라 세리아 [이도메네오]완성(1월 29일, 뮌헨). 추기경의 명으로 을 여행함. 추기경과 사이가 벌어져 빈으로 감. 이후 몇 년간 빈에서 사적, 공적 연주생활을 함. 무치오 클레멘티와 피아노 경연. [후궁으로부터의 도피] 작곡 시작. 기악 음악들도 작곡.

  • 1782년 : 징슈필 [후궁으로부터의 도피](7월 16일, 빈). 기악 음악들(하프너 교향곡외 다수) 작곡. 콘스탄체 베버와 결혼(8월 4일)

  • 1783년 : 미사 c단조, 리츠 교향곡 작곡. 미완 오페라 [카이로의 거위], [속은 사랑] 작곡. 아들 라이문트 레오폴트의 탄생과 죽음.

  • 1784년 : 아들 카를 토마스의 탄생. 피아노 협주곡, 무곡들 작곡.

  • 1785년 : 오라토리오 [회개하는 다윗](3월 13일, 빈). [피가로의 결혼] 작곡 시작. 피아노 협주곡 , 피아노 음악, 현악 4중주, 프리메이슨 음악 작곡.

  • 1786년 : 음악 부수 희극 [무대 감독](2월 7일, 빈) 작곡. 오페라 부파 [피가로의 결혼](5월 1일, 빈). 프라하 교향곡 작곡. 아들 요한 레오폴트 탄생과 죽음.

  • 1787년 : 1월, 콘스탄체와 프라하 여행. 빈으로 돌아옴. [실내악](Eine Kleine Nachtmusik-작은 소야곡 등 작곡.) 아버지의 죽음(5월 28일). 궁정 작곡가로 임명됨. 딸 테레지아 탄생. 10월, 제2차 프라하 여행. 드라마 지오코소 [돈 조반니] 작곡(10월 29일, 프라하). 빈으로 돌아옴.

  • 1788년 : 딸 테레지아 사망. 최후의 세 교향곡 E b , g, c(주피터 교향곡) 작곡. 실내악 작곡.

  • 1789년 : [코지 판 투테] 작곡. 클라리넷 5중주, 헨델 편곡 작품 작곡. 딸 안나의 탄생과 사망.

  • 1790년 : 오페라 부파 [코지 판 투테](1월 26일, 빈). 프랑크푸르트 암 마인에서 레오포트 2세의 대관식에 참여.

  • 1791년 : 아들 요한 크사버 볼프강의 탄생. 최후의 피아노 협주곡 작곡. 오페라 세리아 [티토의 클레멘차](9월 6일, 프라하). 오페라 [마적](9월 30일, 빈). 모테트 [아베 베룸 코르푸스], [클라리넷 협주곡], [미완 레퀴엠]. 12월 5일 빈에서 사망함.




  • 모짜르트 생애


       모짜르트는 잘쯔부르크 사교의 궁정 음악가 레오폴트 모짜르트의 막내 아들로 태어났다.
    레오폴트는 뛰어난 바이올린 연주자로, 작곡도 하고 바이올린 주법에 관한 저작도 남겨 놓았을 정도의 인물이었다.
    잘 알려져 있는 바와 같이, 모짜르트는 일찍부터 신동의 재능을 발휘했다. 주위 사람들이 그의 예사롭지 않은 재능을 알차챈 것은 3세 경이었는데, 얼마 안 있어 레오폴트는 초보적인 음악 교육을 시작했고, 5세 때의 생일을 전후해서는 최초의 작품을 작곡했다.

       겨우 6세가 될 무렵인 1762년 초부터 10년 남짓 동안은, 소년 모짜르트가 유럽 각지로 여행을 다니며 보낸 시절이었다. 첫 여행지는 뭔헨이었는데, 여기서는 겨우 3주간을 머물렀다. 같은 해 가을부터 이듬해 초에 걸쳐서는 을 방문하여, 쇤브룬궁전에서 여황제 마리아 테레지아 앞에서 클라비어 연주를 했다. 다시 1763년 6월부터는 부모와 누나 마리아 안나(보통 나네를이라 부름)까지 합친 일가 4명이 대여행을 시작했다. 뭔헨, 아우그스부르크 등지를 거쳐 시베찡겐에서 처음으로 만하임 궁전악단의 연주를 들었다. 또한 프랑크푸르트에서는 14세의 괴테모짜르트의 연주를 들었다.

       그 후 본, 쾰른 등지를 방문한 모짜르트는, 벨기에를 거쳐 11월에 파리에 도착하였다. 여기서는 베르사이유 궁전에 초청되어 루이13세 앞에서 연주하고, 공개 연주의 기회까지 얻었으며, 쇼베르트 등 작곡가를 알게 되었다. 이어서 그는 런던으로 건너갔는데, 거기서 크리스티안 바하의 음악에 접한 것은 매우 중요한 일이다. 영국에 1년쯤 머문 모짜르트는 이어 네덜란드를 거쳐 다시 파리로 갔다. 그리하여 스위스나 독일을 거쳐 잘쯔부르크에 돌아온 것은, 떠난지 3년쯤 되는 1766년 11월이었다. 이렇게 하여 신동 모짜르트의 이름은 널리 알려졌는데, 그보다 더 큰 수확은 널리 각지의 음악에 접하고 그것들을 흡수한 일이었다. 여행중에도 작곡을 활발히 하여, <클라비어와 바이올린을 위한 소나타>KV6-15, KV26-31(1762-1766), <제1번 E플랫 장조>KV16(1764)으로 시작되는 초기의 교향곡 등이 작곡되었다.

       그 후 약 3년 동안, 모자르트는 잘쯔부르크에서 비교적 안정된 나날을 보냈다. 그는 다시 음악 이론을 배우기도 하고, 밀려들기 시작한 작곡 의뢰에 응하기도 하였다. 그 동안 1767년 가을부터 다음해 초에 걸쳐 빈을 방문했는데, 누나 난네를과 함께 마마에 걸리는 등 사건이 있기는 했지만, 글등의 음악에 자극을 받았다. 또한 가극 <바스티안과 바스티엔느>KV50이 작곡되고 초연되는 등 수확은 적지 않았다.

       1769년 11월, 13세의 모짜르트는 대사교 지기스문트 폰 슈라텐바하에 의하여 콘서트 마스터(무급)에 임명되었다. 그러나 레오폴트는 또 다시 아들의 여행을 계획하여, 12월에 첫 이탈리아 여행을 떠났다. 1771년 봄까지 계속된 이 첫 이탈리아 여행에서 모짜르트는 핏치니 등 많은 작곡가를 알게 되고, 볼로냐의 마르티니 신부 밑에서 대위법을 본격적으로 배웠다. 이 무렵에는 <제12번 장조>KV110(1771)을 비롯한 많은 교향곡과 가극 <폰토와 왕 미트리다테>KV87(1770) 등을 작곡하고, 각지에서 신작 오페라의 주문도 받았다.

       모짜르트는 다시 1771년 8월에 이탈리아로 가서, 극장 세레나타 <알바의 아스카니오>KV111을 초연하여 대성공을 거두었다. 다시 잘쯔부르크로 돌아온 12월에 지기스문트가 사망하고, 이듬해 1772년 3월에 히에로니무스 폰 콜로레도대사교로 취임했다. 그 무렵에 유명한 3곡의 디베르티멘토(KV136-138)를 작곡했다. 그 해 여름, 모짜르트는 심임 대사교에 의하여 유급의 콘서트 마스터로 승격되었으나, 그 직후에 3번째 마지막 이탈리아 여행을 떠났다. 밀라노에서 가극 <루치오 시라>KV135(1772)를 쓰고, 다시 몇 개의 교향곡과 현악 4중주곡을 쓴 다음, 이듬해 1773년 3월에 잘쯔부르크로 돌아왔다. 이 해 여름에는 으로 가서 하이든의 음악을 직접 접했다. 그 곳에서 쓴 <현악 4중주곡 제8-13번>KV168-173과 교향곡에는 하이든의 영향이 나타나 있다.

       여행 중심의 시대는 일단 여기서 끝나고, 그 후의 4년 동안 모짜르트는 대개 잘쯔부르크에 머물러 있었다. <제29번 A장조>KV201(1774)로 대표되는 작품들을 끝으로 그 무렵부터 교향곡의 작곡이 한때 중단되고, 화려한 작풍을 보여 주는 디베르티멘토와 협주곡을 많이 작곡하게 되었다. 5곡의 바이올린 협주곡(1775)과 <하프너 세레나데>KV250(1776), 가극 <가짜 여자 정원사>KV196(1775) 등이 작곡되었다.

       1777년 9월, 모짜르트는 보다 좋은 취직 자리를 물색하기 위하여 긴 여행을 떠났다. 어머니 안나 마리아가 동행하여, 두 사람은 만하임을 거쳐 파리까지 갔으나, 신동으로 인기가 있던 옛날과는 달리, 만족할 만한 일자리는 끝내 나타나지 않았다. 더구나 파리에서는 어머니가 병으로 세상을 떠난 데다가, 만하임에서 알게 된 알로이지아 베버(작곡가 베버의 사촌누나)에 실연을 당하는 등, 모짜르트에게 있어서 이번 여행은 엉망이었다. 그러나 창작면에서의 성과는 매우 커셔, 교향곡 제31번 <파리>KV297(1778), 피아노 소나타 <터키 행진곡>KV331(1778)을 비롯하여 수많은 명작이 이 여행중에 탄생했다.

       1779년 1월에 귀향한 모짜르트는 곧 궁정 오르가니스트로 임명되었지만, 일찍부터 그의 가슴 속에 자리잡고 있던 궁정음악가라는 처지에 대한 불만은 점점 더 높아져 갈 뿐이었다. 동시에 아버지와의 사이도 점점 멀어져 갔다. 그리하여 1780년 말 뮌헨에서 가극 <이도메네오>KV366을 상연한 후, 이듬해 봄 에서 끝내 히에로니무스와 충돌하고 말았다. 레오폴트의 만류를 뿌리치고 사임할 것을 결심하고, 그대로 잘쯔부르크에 돌아가지 않으려 했던 것이다.

       25세의 모짜르트는 , 당시로서는 이례적인 독립된 음악가로서 빈 생활을 시작했다. 예약 연주회와 음악 교사, 그리고 작품을 출판사에 파는 것 등에서 얻는 수입은 미미한 것이었다. 게다가 이듬해 1782년 8월에 알로이지아의 누이동생 콘스탄째와 결혼까지 하여, 생활은 점점 더 쪼들리는 형편이었다. 그러나 하이든 등과의 교우에도 자극을 받아, 창작은 더욱 활발해졌다. 예약 연주회를 위해 많은 피아노 협주곡을 작곡한 것 외에, 교향곡 제35번 <하프너>KV385(1782), 교향곡 제36번 <린쯔>KV425(1783)의 두 교향곡, 하이든에게 바쳐진 <현악 4중주곡 제14-19번>(1782-1785), 그리고 가극 <피가로의 결혼>KV492(1786) 등 불후의 걸작이 속속 태어났다. 그런데 모짜르트의 예술이 고고의 경지로 들어감에 따라서, 아이러니컬하게도 세상은 그의 음악에 등을 돌리기 시작했다. 예약 연주회에는 사람이 모이지 않게 되고, 이렇다 할 작곡 의뢰도 없었다. 더우기 부부가 다 같이 경제관념이 희박했기 때문에, 집안의 경제 사정은 나빠지기만 하여, 친구에게 종종 돈을 꾸러 가지 않을 수 없는 상태에까지 이르렀다.

       모짜르트는 말년에 있었던 좋은 일이라고 하면, 1787년에 2번이나 프라하를 방문하여 <피가로의 결혼>을 상연하여 대성공을 거둔 일고, 새로 가극 <돈 조반니>KV527의 작곡을 의뢰받아 상영한 것 정도였다. 1789과 1790년의 베를린 여행과 프랑크푸르트 여행도 기대한 만큼의 수확은 없었다. 그런 비참함 생활 속에서도 작곡은 더욱 더 충실해져, 이른바 3대 교향곡인 제39번(K543), 제40번 <주피터>(K551)를 1788년에 작곡했고, 가극 <코시 판 투테>KV588(1790), <현악 5중주곡 D장조>KV593(1790) 등이 작곡되었다.

       1791년에 들어와서는 모짜르트는 <피아노 협주곡 B장조>KV595를 필두로 하여, <현악 5중주곡 E플랫 장조>KV614, 가극 <마적>KV620, 가극 <황제 티투스의 자비>KV621 등을 작곡했다. 그러나 그 무렵에는 이미 병마가 급속히 그이 몸을 침식하기 시작했다. 그리하여 11월 20일, 그는 <레퀴엠>KV626의 완성을 보지 못하고 몸져누워 그대로 회복되지 못하고 세상을 떠났다. 


       사인에 대해서는 살리에리에 의한 독살설 등 여러 가지 설이 있으나 진상은 밝혀지지 않았다. 성마르크스 묘지에 매장되긴 했으나, 유해가 묻힌 정확한 장소는 아직 밝혀지지 않고 있다.또한 미작으로 남긴 레퀴엠은 그의 제자 쥐스마이어가 완성했으며, 사후 그의 아내 콘스탄째는 두 아들을 데리고 재혼을 하였다




                                                                           모짜르트 생애
    2008.03.2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