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크랩] 자연 속 소요하는 `쉼`의 경지, 누정에서 노닐다

2019. 1. 3. 15:03집짓기




쉬어 가는 그곳
누정樓亭에 드러눕다

텅 비었다는 것은 누정樓亭이 살림을 위한 공간이 아니라는 뜻이다. 쉬고, 놀고, 시를 짓고, 술을 마시고, 풍경과 사람의 품격에 취하는 곳이라는 뜻이다. 일에서 놓여나 마음에 번잡한 아무것도 없이 마음을 비워 바람과 달도 쉬어가게 만든 공간이라는 뜻이다. 높다랗다는 것은 강가나 산언덕이나 원림의 한 단 더 높은 곳에 지어 그 높이를 포함한 정신적 경지에서 노니는 공간이라는 뜻이다. 풍경을 조망하며 반본反本하여 자신을 둘러보는 정신적 경지가 다다른 곳이라는 뜻이다.

쉬어 가는 곳 누정. 담양과 무등산 원효계곡 인근 주변 정자는 현존하는 것만 무려 38개소, 기록만 남아 있는 것으로 37개소. 정치의 변동이나 사화에 의해 은둔 생활을 목적으로 건립된 임진왜란 이전 누정으로 독수정(1390년 전후), 소쇄원(1530년), 환벽당(1545년), 식영정(1560년) 등이 즐비하고, 임진왜란 이후 세상 풍파를 피해 낙향한 은둔한 선비들에 의한 누정으로 풍암정(1602년), 조선 말기 및 일제 때 가문의 고인故人의 유지遺志 및 종회소로서 건축된 것으로 취가정(1890년) 등 다양한 건립 목적과 기능을 간직한 누정 설립사 5백 년 세월이 그득하다. 이곳에 많은 누정이 집중되어 국문학상 걸출한 인물들이 모여 정자와 원림을 조성한 것이 특별한 사례이다. 이 누정을 중심으로 호남사림의 ‘호남 가단’이 만들어져 ‘조선 중기 문예 부흥’이 한 세월을 풍미한 것이다. 이곳은 가히 누정 휴식처의 성지라고 할 수 있다.




속도와 일에서 놓여나라-남극루와 관가정

담양군 창평면 들녘 한 가운데 남극루가 있다. 뒤돌아보면 인물의 고장 담양 창평면昌平面이 고즈넉하게 자리 잡았고 정면으로는 월봉산 기슭에 창평을 인물의 고장이게 만든 상월정上月亭이 자리하고 있다. 상월정은 창평 지역 정자의 효시. 고려 경종 1년(976) 창건된 대자암 절터로 그후 세조 3년에 추제 김자수가 벼슬을 사임하고 고향인 이곳에 돌아와 대자암 터에 상월정을 조성했다. 손자사위인 덕봉 이경에게 양도하고 다시 이경은 사위인 학봉 고인후(高因厚, 1561~1592)에게 물려주었다. 정자로 활용되던 이곳을 춘강 고정주(高鼎柱, 1863~1933)가 대한제국 시기 규장각의 사료들을 관리하던 직각의 벼슬을 하다 고향에 내려와 1906년 창평 ‘영의숙英義塾’의 탯자리로 삼는다.

차남인 광준과 사위 인촌에게 영어를 가르치기 위해 서울에서 교사를 초빙하여 예비 영어 학교를 개설한 것이다. 이것이 ‘창평의숙’으로 교명이 변경된 근대 교육기관이다. 이곳에서 가인 김병로(金炳魯, 1891~1955), 고하 송진우(宋鎭寓, 1889~1945), 인촌 김성수(金性洙, 1891~1955) 등 근대 쟁쟁하던 인물들이 배출됐다. 창평을 교육의 고장이 되도록 만든 기반에는 임진왜란 의병장으로 순절했던 제봉 고경명(高敬命, 1533~1592), 제봉의 첫째아들 고종후(高從厚, 1554~1593), 둘째아들이었던 학봉 고인후의 의절이 있었다. 이들 중 학봉의 후예들이 자작일촌을 형성하고 살아오면서 창평은 선비의 고을이 되었다.



지금의 고서면 고읍리에 있던 창평현의 치소인 현청을 1793년 당시 현령 조광준趙光存이 삼지천리에 옮겼다. 1914년 담양군과 창평군이 통합함에 따라 현이 폐지되면서 현청 앞에 있던 남극루도 1919년 현재의 자리로 옮겨지게 되었다. 남극루는 창평 고씨 일문인 고광준 등 30여 명이 1830년대에 현청의 앞에 설치하여 아침저녁으로 통행시간을 알려주던 종루. 2층 누대에 팔작지붕의 정면 3칸 측면 2칸의 구조로 창평 들녘에 장중하게 서 있다. 남극성은 노인성이라고도 부르는데 노인성은 사람의 수명을 관장하는 별이다. 이 별을 바라보면 장수한다고 하는데 이 때문에 이곳 사람들은 이 남극루를 양로정養老亭이라고 부르기도 한다. 이웃한 고서면 분향리의 관가정觀稼亭과 함께 우리 누정사에도 드문 찰농, 영농의 성격을 가지고 있다. 수많은 인물들을 키워내고 이제는 세상을 관조하는 나이가 된 어르신들이 편안한 여생을 지내시라는 의미가 곁들여진 누정이다. 고된 농사일도, 애면글면하던 자식 농사도, 마을 대소사도 이제 다 챙겼다. 노곤한 일을 쉬고 누대에 올라 노인들이 서로의 주름진 얼굴을 평온하게 바라본다. 세월에서 내려선 사람들의 평안한 휴식처이다.



이 정자에서 내려다보이는 창평면 삼지천 마을은 고재욱, 고광표, 고정주, 고재선 가옥 등 백 년을 헤아리는 고가가 낮은 돌담으로 어깨를 겯고 나란히 고즈넉한 곳. 지난 2007년 12월 아시아 최초로 ‘느림의 철학’이 존중되는 웰빙의 인간 미학 도시인 ‘슬로 시티’로 지정되었다. 느림과 휴식이 공존하는 풍요로운 미덕이 그득한 곳이다. 속도에서 내려선 ‘쉼’이다.


명예와 욕심에서 벗어라 - 식영정

그림자도 쉬어 가는 곳 식영정息影亭은 별뫼, 한자로는 성산星山에 있다. 무등산 자락 북서쪽 광주호를 굽어보는 이곳이 조선 가사문학의 송강 정철(鄭澈, 1536~1593)이 쓴 「성산별곡星山別曲」의 무대이다. 식영정은 1560년(조선 명종 15) 서하당 김성원(棲霞堂 金成遠, 1525-1597)이 스승이며 장인인 석천 임억령(石川 林億齡, 1496~1568)을 위해 지었다. 석천 임억령은 담양 부사(1559~1561)를 그만두고 이곳에 은거하면서 김성원, 고경명, 정철 등과 교유했다. 그리하여 이들 네 사람 즉 임억령, 김성원, 고경명, 정철을 식영정 사선息影亭 四仙이라고 했으며, 식영정을 사선정四仙亭이라고도 달리 부른다. 석천은 눌재訥齋 박상朴祥에게서 글을 배웠으며 1516년에 진사가 되고 1525년에 식년문과에 병과로 급제해 벼슬길에 올랐다. 1545년(명종 1년) 을사사화가 일어나 그의 아우 백령百齡이 소윤에 가담하여 대윤파의 많은 선비를 추방하자 억령이 글을 보내 경계했으나 듣지 않으므로 벼슬을 버리고 고향에 돌아왔다. 그러나 다시 기용되어 금산군수로 있었는데 백령이 원종공신의 녹권祿券을 보내오자 산골짜기에 들어가 제문을 지어 고사를 지내고 녹권을 불살라 버렸으며 군수직을 사임하고 해남으로 돌아왔다. 1552년 동부승지, 병조참의 등을 역임하고 강원도 관찰사를 거쳐 1557년 담양부사가 되었으며 1560년에는 김성원이 식영정을 짓고 초청하자 식영정에 머물면서 도학을 강론했다.



쉬면되는 거지 성낼 무엇이 있겠는가

석천이 쓴 「식영정기」에 나오는 글이다.“옛날에 자신의 그림자를 두려워하는 사람이 있었다. 그는 자신의 그림자가 두려워 햇빛 아래에서 달리며 이를 뿌리치고자 했으나, 빨리 달릴수록 그림자도 쉬지 않고 재빨리 따라 왔다. 그러다가 나무 그늘에 이르러서야 비로소 보이지 않았다. 무릇 그림자는 언제나 사람의 형체를 그대로 따르는 것으로 그늘 아래서나 밤에는 없어지고 빛 속에서나 낮에는 나타난다. (…) 이와 마찬가지로 사람도 자연법칙의 인과응보의 원리에서 벗어나지 않는 것이다. 그러는 처지에 기뻐할 것이 무엇이 있으며 슬퍼하고 성내고 할 것이 무엇이 있겠느냐. 내가 이 외진 두메로 들어온 것은 꼭 한갓 그림자를 없애려고만 한 것이 아니라 시원하게 바람 타고 조화옹과 함께 어울리어 끝없는 거친 들에서 노니는 것이다. 그러니 식영정이라 이름 짓는 것이 좋지 아니하냐.”

임억령은 성산의 아름다운 풍경을 주제로 식영정 이십영息影亭二十詠과 서하당 팔영八詠을 비롯하여 수백 수의 절창 한시漢詩를 지어냈다. 면앙정 송순(宋純, 1493~1583)은 화답시를 지었으며 고경명, 김성원, 정철은 차운시를 남겼다. 송강松江은 이것을 밑바탕으로 하여 가사문학의 절정인 「성산별곡」을 창작하고 가사문학의 신선이 되었다. 우리는 지금 『장자』의 잡편에 나오는 ‘그림자를 두려워하는 사람’형국이다. 마음의 본체는 변하지 않는 것인데 살아가면서 남기게 되는 자취에 끄달려 스스로 그 자취의 그림자에 쫓긴다. 괴롭다. 햇빛을 피해 그늘로 들어가 마음을 쉬면 되는 것을 그 사이의 여유 한 치의 공간도 시간도 욕심도 버리지 못한다. 꽃과 나무가 있으면 있는 곳에 그대로 놓아두고 거기에 가장 어울리는 자리에 소박한 누정을 짓고 마음을 쉬었던 선비들과 처사들의 한국인들의 미의식을 조금도 이해하지 못한다.



쉬면 삶이 풍요로워지고 새롭게 살아갈 힘을 얻지 않겠는가? 어찌 그렇지 않겠는가? 적어도 마음을 쉴 줄 아는 처사處士의 마음을 얻지 못한 사람이라면 조선 원림 문화의 백미 소쇄옹 양산보(梁山甫, 1503~1557)가 조영한 소쇄원瀟灑園으로 절대 오지 마라.‘깨끗하고 시원하다’라는 뜻의 이 조선 누정문화의 정신적 성역 안이 더럽혀질까 두렵다.   


글·백승현 <대동문화> 편집장   
사진·라규채 사진작가

출처 : 월간문화재사랑

출처 : 나무과자
글쓴이 : 순돌이 원글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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