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크랩] 선비, 휴休를 말하다 - 누각과 정자에서 읊은 시세계

2019. 1. 3. 15:04집짓기

 




누정의 기능과 현실

흘러가는 세월 속에서 그 건물은 풍우에 시달려 자연 붕괴되거나 아니면 병화兵火나 수재水災, 화재火災 등의 수난을 당하여 소중한 문화재가 유실遺失되어 창건 당시의 원형 건물은 만나기 어렵게 되었다. 그러나 다행히도 지금은 중수 또는 재건되었으니 문화재에 대한 보존 정신을 높이 평가할 수 있다. 이렇게 건물에 대한 애정은 두터우나 처마 밑에 걸어 놓은 선비들의 시문이 실종된 사실에 대해서는 상대적으로 복원하려는 노력이 부족하다. 비록 좁은 공간에서 창출創出된 작품이지만 그 속에는 세계와 인생을 달관한 철학이 내재되어 있다는 사실에 주목한다면 건물과 함께 시문 쪽에도 같은 애정을 보여야 할 것이다.



함양은 자연환경이 수려하다. 이와 같은 현실 속에서 누정에 대한 애호 정신이 각별하여 잘 보존된 지역으로 영남의 함양과 호남의 담양을 지목할 수 있다. 이 두 지역에는 누각과 정자가 현재 수적으로 많을 뿐더러 가장 잘 보전되어 모범적인 지역이다.

함양은 담양보다 수적으로 누정이 많다. 그렇다면 함양에 누정이 많은 이유는 무엇일까? 지역적으로 함양은 병풍처럼 둘러싸인 높은 산에서 흘러나오는 물이 맑아 산천이 매우 아름답고 수려하다. 북동 방향으로 흐르는 푸른 남계천은 위천, 임청강 등과 합류하여 경호강 물줄기를 만들어 사천 쪽으로 흘러간다. 이렇게 산자수명한 자연과 동화되어 곳곳에 서원과 누각이 있고, 계곡을 바라보는 경치 좋은 곳에는 어김없이 누정이 앉아 있다.



자연 친화의 정신과 함께 선조들의 유산을 소중하게 여기고 보존 발전 시켜야 된다는 사명감이 강하게 작용한 고장이 바로 함양이다. 최치원이 음영吟詠하던 학사루學士樓는 함양군을 대표하는 상징물이며 진주의 촉석루, 밀양의 영남루, 안동의 영호루와 함께 영남 굴지의 누각으로 명성이 높다. 최치원은 신라 말엽 이곳 태수로 부임하여 우천의 홍수를 막기 위해 치수 관개사업으로 인공 둑을 쌓고, 작은 길을 만들어 120개 종류의 나무를 제방을 따라 심었다고 한다. 이 누각의 창건 연대는 알 수 없으나 대개 통일신라 때로 짐작하고 있다. 최치원이 이 누각에 자주 올라 시를 짓고 읊으며 자연을 완상한 곳이라 하여 이름을 학사루라고 부르게 되었다고 한다.



김종직이 함양군수로 부임하여 학사루에 걸린 유자광의 시판詩板을 철거하면서 두 사람의 개인적 감정이 고조되어 연산군 때 무오사화戊午士禍의 기폭제가 되었다. 김종직의‘조의제문弔義帝文’을 문제 삼아 그의 무덤을 파헤치고 시체를 칼질하는 형벌을 가하였고 문집은 일부 소각되는 화를 입었다. 이 누각은 임진왜란 때 소실된 것을 1692년에 중건하였다. 본래 함양초등학교 뒤뜰에 있던 것을 1979년에 지금의 위치인 군청 앞으로 옮겨 세웠다. 누각은 산천이 수려한 곳에 자리 잡는 것이 본령本領인데 도심지 소음 속에서 지금은 외롭게 서 있다. 이 건물 구조는 정면 5칸, 측면 2칸의 팔각 2층 목조 기와집이며, 둥근 기둥을 받치는 초석을 원형으로 가공하였으며 댓돌을 길게 쌓아 기단을 만들었다. 2층 누각의 기둥에는 주련柱聯이 걸려 있다.



작자미상인 이 칠언율시七言律詩는 현재 누각 2층 기둥에 걸려 있다. 누각 위에서 맞이한 계절은 쓸쓸한 가을이다. 쳐다 보니 긴 숲 위에는 높은 성이 머리를 내밀고, 굽어보니 숲 사이로 두 물줄기가 흘러가는 아름다운 정경이다.

누 위에서 바라보는 주위의 환경에 화자는 깊은 감명을 받는다. 시 후반에서 화자는 이 누각에 올라 음유하던 신라 말엽의 학자 최치원을 회상한다. 그는 황학을 타고 하늘에 올라 이미 신선이 되어 다시 돌아오지 않으니 인생무상을 가슴 속 깊이 새기고 있다. 후반의 이 시는 중국 당나라 시인 최호崔顥의 황학루 전반의 영향을 받았다.



이 시는 당대當代 최고의 시인 이백의 극찬을 받을 정도로 유명한 시이며 당나라 때 칠언율시 중에서 제1이라는 평을 받았다. 따라서 우리나라에서도 이 시에 대한 찬사가 끊이지 않았으며 이 시풍의 영향은 매우 컸다고 한다.



 풍경이 으뜸인 농월정弄月亭

농월정은 함양의 여덟  정자 중에서 당연 풍치가 으뜸이라고 한다. 계곡 물에 떨어진 고고한 달빛을 바람이 일렁이며 희롱한다. 그래서 농월이란 이름이 붙여졌다고 한다. 이 정자는 관찰사와 예조참판을 지내고 임진왜란 때 의병을 일으킨 지족당知足堂 박명부가 노닐던 곳으로 1721년에 그의 후손들이 세웠다. 물줄기가 크게 돌고 한 아름씩 되는 구멍이 뚫린 바위가 발아래 펼쳐있어 절경을 이룬다. 누각에서 오른쪽을 바라보면 ‘지족당이 지팡이 짚고 신을 끌던 곳’이라는 힘 있게 바위 위에 새긴 지족당의 글씨가 지금도 선명하게 남아있다. 정자의 구조는 정면 3칸, 측면 2칸의 팔각지붕으로 추녀의 네 귀에는 활주를 세웠다. 3면에 계자 난간을 둘렀고, 뒤쪽 가운데 한 칸은 바람막이 작은 방을 두었다.

화자는 정자 주변의 자연환경을 별천지로 규정한다. 그윽한 곳에 사방은 산이 둘러 있고, 흐르는 물은 머물다가 흘러가고, 섬돌의 그림자가 비친 물은 넉넉하고 맑고, 창가에 찾아든 기운은 걷혔다가 다시 뜨기 시작한다. 이 모든 현상이 화자가 느낀 별천지이다.

후반에서는 화자의 가난한 실상을 그렸다. 죽으로 끼니를 대신하면서도 불평이 없고, 찾아온 손님들이 초막 처마에 부딪쳐도 싫어하지 않는다. 문자 그대로 청빈낙도의 경지에서 살아가는 생활을 형상화 하였다. 20세기 일제 강점기부터 누각과 정자에 대한 창건은 매우 적었다. 휴식과 풍류를 즐길 수 있는 여건이 못 되어 그랬고, 해방 후에는 전통과는 관계없는 건물이 건립되었으나 휴식과 풍류와는 거리가 있었다. 쉬거나 경치를 바라보는 건물에 불과하였다. 이러한 현실에서 함양의 유지들은 시대의 흐름과는 관계없이 오직 선조들의 전통을 답습하여 많은 건물을 창건하였다. 문화유산을 사랑하고 보존하는 정신이 어느 지역보다 강하게 작용한 결과라고 볼 수 있다.  



글·이창룡 전 건국대학교 문과대학 교수
사진·문화재청, 함양군청, 안동시청, 진주시청
출처 : 월간문화재사랑

출처 : 나무과자
글쓴이 : 순돌이 원글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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