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 초기 공납백자- 백자공안부명접시편
우리박물관에서는 매년 주제를 정하여 유적을 탐사하고 있다. 이러한 학술조사를 통해서 수집된 자료는 우리 박물관만의 독보적인 학술적 자산이 되기도 한다. 이런 자료중 하나가 이번에 소개할 ‘백자 공안부명(恭安府銘) 접시편’이다.
강원도 양구지역 도요지를 탐사하게 된 이유는 이곳이 조선 초기부터 백자생산지이면서 또한 조선시대 전반에 걸쳐 경기도 광주 관요에 백토를 공급하던 곳이기 때문이었다. 그러나 더욱 중요한 이유는 국립춘천박물관 소장품인 ‘이성계발원사리구’ 중 백자발에 새겨진 “신미년(1391년) 4월 방산(方山) 사기장(砂器匠) 심룡(沈龍)…”이란 명문의 방산이 양구군 방산면으로 추정되기 때문이다. 즉 양구군 방산면에 있는 백자가마터에서 이와 유사한 유물이 있는지를 알아보는 것이 궁극적인 탐사의 목표였다.
수년간 겨울마다 이곳을 계속 탐사하였고, 그 정성의 보답인지 양구군 방산면 송현리의 가마터에서 명문이 새겨진 이 접시편을 수습하게 되었다. 보통 가마터 조사에서는 요도구와 그릇조각을 종류별로 최소량만 채집하는 것이 원칙이다. 이런 원칙에 따라 채집품을 정리하여 다음 장소로 이동하려는데, 예쁜 막내연구원이 땅에 얼어붙은 접시편 하나와 씨름하고 있었다. 그냥 떠나자는 선배들의 재촉에도 고집스레 그 접시편을 떼어내 채집품에 포함시켰다. 그런데 숙소에 돌아와 그날의 수습유물을 세척해보니, 그 마지막 채집품에 '공안부'란 명문이 새겨져 있는 것이 아닌가!
이 백자접시편은 치밀한 백색 태토에 청백색 반투명유약을 시유하였으며 부분적으로 유약이 뭉쳐 있다. 굽 부위는 시유하지 않았으며, 외면 굽 주위로 공ㆍ안ㆍ부라 한자씩 찍어 새겼다.
공안부는 조선 태종이 상왕으로 물러난 정종을 위해 1400년 설치한 임시 관청으로 1420년 인녕부(仁寧府)에 병합되며 폐지된다. 현재 ‘공안부’ 또는 ‘공안’이란 명문이 새겨져 있는 도자유물 5점이 학계에 보고되었는데 모두 분청자이다. 이 유물들은 1417~1420년경 공안부에 공납용으로 제작된 것이어서 조선시대 도자기 편년의 표준자 역할을 해 왔다. 그런데 우리박물관에서 최초로 분청자가 아닌 공안부명 백자 유물을 찾은 것이다. 양구군 방산에서 이 도자기편이 발견되면서 조선 초기 공납백자의 제작지 하나가 확인되었다.
그럼 그릇에 새겨진 글자는 왜 중요할까? 그릇에 관청 명칭을 새기게 된 것은 품질보장 및 그 관청의 전용물건임을 증명하기 위한 표시였다. <조선왕조실록>의 기록을 통해 1417년부터 각 관청에 공납하는 그릇에 그 관청의 이름을 새기게 했음을 알 수 있다. 이런 관청 명칭이 붙은 유물은 우리들에게 그 제작시기와 소비처를 알려준다. 특히 공안부와 같이 존속기간이 짧은 경우는 편년의 범위를 정확하게 한정 짓는 효과가 있다.
이 유물의 성분을 분석한 결과, 고려백자와 같이 나뭇재를 이용한 유약을 사용했음이 확인되었다. 이는 동시기 광주지역 백자들이 광물질 성분의 유약을 사용한 것과 대비된다. 또한 고려백자의 제작기법이 1420년경까지 양구의 방산가마에 계속되었다는 것을 의미한다. 따라서 고려말(1391년) 경질백자인 금강산 월출봉 출토 ‘이성계 발원사리구’중 백자발에 새겨진 방산이 현재 양구군의 방산면일 가능성이 더욱 높아졌다.
비록 볼품없는 파편이지만 이 유물은 여말선초 백자생산과 관련한 많은 이야기를 담고 있는 귀중자료로 도자연구를 수행하는 다른 기관에서 부러워하는 유물이다.
필자: 명지대학교 박물관 학예팀
백자공안부명접시편, 양구 방산면 송현리 요지 수습
최홍 g2430@naver.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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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즘 금값 상승이 연일 화제이다. 금뿐만이 아니라 은이나 구리도 마찬가지다. 경제가 불안하면 공급이 한정된 광물자원이 아무래도 힘을 가지게 되는가 보다. 이러한 현상은 과거에도 마찬가지였다. 조선의 건국이 고려 말의 정치적ㆍ경제적 불안 상황을 일거에 해결할 수 없었던 것처럼 보인다.
조선시대 초기의 기록을 보면 금이나 은ㆍ구리 등의 생산에 대한 통제와 관련된 내용이 많이 나온다. 명나라의 조공요구를 무마하기 위한 것일 수도 있으나 생산량에 비해 수요가 많아서 생긴 품귀현상으로 기록되어 있다. 때문에 본래는 금속으로 제작해야 할 것을 다른 재료로 만들라는 지시도 있었다. 이는 유교를 표방했던 조선에서 공공제례에 사용하는 제기를 금속이 아닌 자기로 하라는 국가의 지시에서 잘 나타난다.
이러한 배경에서 제작되었던 도자 제기는 최근 발굴조사나 전세된 유물로 확인되고 있다. 그 중 용인 양지에서 출토된 도자제기 일괄품이 우리대학 박물관에 소장되어 있어 학계의 주목대상이 되고 있다.
이에 그 도자제기 중 하나인 ‘백자철화삼산문산뢰’를 소개한다. 산뢰는 공공제례에서 술을 담는 그릇으로 사계절 모두 사용하며, 찬실도(饌實圖)에서 현주(玄酒 맑은 물)와 청주(淸酒 제례 때 올리는 가장 맑은술)를 담는 그릇으로 나온다.
산뢰(山罍)라는 명칭에 대해 <세종실록> 「오례」 ‘제기도설’에서는 “<예서禮書>에 이르기를, 산뢰는 산준(山尊)이다. 준(尊)에 그림을 그리고 새겨 산에 구름이 있는 형상을 만든다. 뇌(罍)라 부르는 것은, 구름과 우레가 넓게 퍼지는 것이 마치 임금이 아래로 신하에게 은혜를 베푸는 것과 같다는 뜻을 취한 것이다”라고 설명한다. 중요한 공공의식에 사용되는 그릇인 만큼 생김새 하나하나에 의미를 담았던 것이다.
이 유물의 형태에 대해 살펴보면 전체적으로 어깨가 강조된 긴 항아리 모양이며, 산뢰의 특징인 산 모양을 철화로 그려내고 있다. 즉 동체의 어깨부분과 하부에 철화안료로 가로선을 한줄 그리고, 그 위에 크고 거칠게 산 모양을 그렸다. 실록이나 국조오례의 등의 도설에 나온 삼산문을 간략화하여 상징적으로 그려냈다. 또한 어깨부분 양편에 요철이 있는 손잡이를 붙였으며, 그 고리는 철화안료로 그려서 대신하였다.
산뢰의 유약은 회백색으로 전면에 걸쳐 고르게 시유했으며, 구연은 안쪽으로 기울었고, 저부는 살짝 벌어지다가 끝단을 모줄임하였다. 번조받침으로 모래를 사용한 흔적이 남아있다.
좀 더 앞선 시기에 제작된 것으로 추정되는 삼성미술관 소장 ‘백자청화철화삼산문산뢰’가 제기도설의 내용을 충실히 표현한 것에 비하면, 우리박물관 소장의 백자산뢰는 형태가 간략화되고 문양도 단순하면서 거칠다. 아무래도 지방에서 제작되어 사용된 탓에 국가차원의 공공제례용에 비해 제작 수준이 떨어지는 까닭이라 추정된다.
이 유물의 또 다른 특징은 동체 중간에 지름 3㎝ 정도의 원형 타격흔이 있는 점이다. 같은 장소에서 함께 수습된 다른 제기 유물에서도 모두 유사한 타격흔이 발견되었다. 이는 공공제례에 사용된 제기를 사용기한이 다 되었거나, 혹은 낡아 다시 제작할 때 기존 것을 그냥 버리면 다른 용도로 재사용할 수 있기 때문에 일부러 깨뜨려 버린 것이다.
비록 용도를 다해 무참하게 깨진 것을 복원한 백자산뢰지만, 오늘처럼 맑은 가을날, 차가운 현주 한잔을 생각나게 하는 유물이다.
백자철화삼산문산뢰, 높이 39.5㎝ 입지름 13.2㎝ 바닥지름 12.0㎝
필자: 명지대학교 박물관 학예팀
최홍 g2430@naver.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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