北漢山 西部지역 고려불상의 연구|

2019. 1. 10. 21:15美學 이야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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北漢山 西部지역 고려불상의 연구| 한국미술 관련 논문 

樂民(장달수)|조회 111|추천 0|2018.11.19. 18:55


北漢山 西部지역 고려불상의 연구



첨부파일 북한산 서부지역 고려불상의 연구.pdf



鄭智禧1)*


Ⅰ. 머리말
Ⅱ. 북한산과 불교문화
Ⅲ. 북한산 서부지역 고려불상의 현상과 양식적 특징
Ⅳ. 맺음말 - 북한산 서부지역 고려불상의 조각사적 의의



Ⅰ. 머리말

   현재 서울에는 선사시대로부터 조선시대에 이르기까지 많은 유물과 유적이 전하고 있다. 그 대표적인 예는 신석기시대빗살무늬토기가 많이 출토된 암사동선사주거지류와 온조가 개국한 한성백제유적인 풍납토성, 500여년 동안 수도였던 조선시대의 궁궐과 건축물 등이다. 그러나 정작 우리 문화와 역사의 황금기였던 통일신라와 고려의 유적과 유물에 대해서는 그 수가 극히 적은 탓인지 그리 많이 알려지지도 않았고 이에 대한 관심도 부족하였다. 이러한 상황은 두 시대의 문화의 중심지인 수도가 경주와 개성이었던 이유가 가장 크게 작용하였을 것으로 생각된다.

   그런데 최근 시행된 지표조사과정에서 말려초로 시대를 올려볼 수 있는 은평구 진관내동 석조보살입상이 알려지면서필자는 아직까지 제대로 알려지지 않은 서울지역 불교 조각에 대한 강한 의구심에 휩싸이게 되었다.이러한 점에 착안하여자료가 충분하지 않아 무리가 있을 수도 있으나, 서울지역 불교조각 연구의 시작으로써 북한산 서부지역에 위치한 은평구진관내동 석조보살입상과 진관외동 삼천사지마애불입상을 중심으로 체계적인 검토의 기회를 마련하고자 한다.1) 또한 이를 바탕으로 앞으로 진행될 서울지역 통일신라와 고려시대 불교조각 연구의 발판으로 삼고자 한다. 그러므로 본고에서는북한산의 불교문화에 대해 살펴본 후 각상에 대한 각론으로 들어가 현상과 양식분석, 그리고 이 불상들이 갖는 조각사적의의를 정리해보고자 한다.


* 서울역사박물관 학예연구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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Ⅱ. 북한산과 불교문화

   북한산2)  예나 지금이나 서울의 주산이다. 백제의 시조인 溫祚는 지금의 북한산인 漢山 負兒嶽에 올라 건국하기 전 地勢를 살폈고,3) 한반도의 허리부분에 위치하여 중국의 선진문물을 받아들이는 대외창구로 삼국의 각축장이된 한강유역에 위치하여 군사적으로도 매우 중요한 지정학적 위치에 자리잡고 있다. 신라 진흥왕이 한강유역을 차지한 후 민심을 수습하고 영유권을 과시하기 위해 碑峯北漢山新羅眞興王巡狩碑4)  세운 것도로 이와같은 이유 때문일 것이다.


1) 북한산의 서남부에 위치한 승가사 마애불좌상승가대사상은 이 글에서는 제외하기로 한다.
2) 북한산은 서울특별시와 경기도 고양시 경계에 위치한 산으로 三角山과 負兒嶽 또는 華山 등의 별칭으로 불리기도 한다. 그러나 高麗史 , 高麗史節要 , 世宗實錄地理志 , 朝鮮王朝實錄 , 北漢誌 , 新增東國輿地勝覽 , 增補文獻備考 등의 기록을 토대로 살펴본 결과 북한산이라는 명칭보다는 삼각산이라는 명칭이 더 널리 사용된 것으로 생각된다. 구체적으로 언급하면 고려사에 보이는 삼각산은 32회이며, 북한산은 단지 1회에 불과하다. 高宗實錄 과 純宗實錄 을 포함한 조선왕조실록 의 경우 삼각산은 260회, 북한산은 89회 사용되었다. 그런데 북한산이라는 명칭은 주로 북한산성 축조 등의 군사적인 내용이나 행정구역과 관련된 내용에 주로 많이 나타나는 경향이 있다. 그러므로 북한산보다는 삼각산이라는 명칭이 대표적인 산의 이름으로 사용된 것임을 알 수 있다.
북한산의 명칭에 관한 필자의 견해와 같은 글이 있어 소개한다. 김윤우는 현재 북한산은 원 ‘한강 이북의 한산(漢山)지역’이란 의미의 용어에서 비롯된 것으로 북한산이란 산명은 본래 산 이름이 아니라 지역명이라고 파악하고 있다. 또한 민경길은 지금은 북한산이라는 명
칭이 자연스럽게 사용되고 있지만 비교적 최근까지 삼각산이라는 명칭이 주로 사용되었음을 지적하고 있다; 김윤우, 북한산 역사지리 (범우사, 1995), 17쪽 및 27~29쪽; 민경길, 북한산1(집문당, 2004), 6~7쪽.
3) 부아악은 산의 형상이 아이를 등에 업은 모습과 같다하여 생긴 이름이다. 부아악 또는 부아산라는 명칭이 보이는 기록은 다음과 같다.
三國史記 百濟本紀 溫祚王
三國史記 卷32, 祭祀志
高麗史 世家 顯宗 7年
高麗史 世家 顯宗 9年

4) 현재 국립중앙박물관에 소장되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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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삼국통일 후에도 한강유역에 대한 군사적 중요성은 계속 인식되었고 국가제사 중 하나인 小祀가 삼각산에서 행해졌으며,5) 고려시대와 조선시대에는 명실상부한 국가의 鎭山으로서 국가적 의례가 빈번히 행해지던 곳이다.6)


   이러한 역사적 배경 위에서 북한산과 불교는 밀접한 관계를 맺으며 발전하였다. 북한산과 불교와의 관계는 백제 침류왕원년(384) 불교공인 이후부터 시작되었다고 볼 수 있다. 구체적인 지역명과 사찰명이 언급되지는 않았지만, 백제의 불교공인 이듬해인 385년 漢山州사찰을 짓고 10명의 승려를 배출하였다는 기록으로 보아7) 북한산에도 사찰이 지어졌을 가능성이 크다.그러므로 북한산에서 불교문화가 시작된 것은 4세기 후반 부터라고 보아도 무리가 없을 것으로 생각된다.

   북한산의 불교문화를 알려주는 금석문으로 앞서 언급한 진흥왕순수비가 있다. 이 비의 비문에 ‘道人이 石窟에 살고 있다’는 구절이 있어8)  6세기 후반에 북한산에서 수행을 하는 승려들이 존재하고 있었음을 알 수 있다. 실제로 북한산에 석굴 또는 窟寺의 기능을 할 수 있는 곳이 여러 곳 있어 이러한 사실을 뒷받침해주고 있다.승가사의 승가굴과9) 문수사 석굴10) 등이 대표적인 예이다.11)  이 석굴들은 북한산에 대한 많은 정보를 제공해 주는 北漢誌李德懋(1741~1793)「記遊北漢」12) 등의 詩文에 많이 등장하고 있어 좋은 자료가 된다.


5) 신라시대에는 전국의 산천을 나누어 국가제사를 지냈는데 이 때 삼각산북한산주(北漢山州) 부아악(負兒岳)으로 언급되어 소사(小祀)를 지낸 곳으로 기록되어 있다; 三國史記 卷32, 祭祀志
6) 기우제와 같은 국가적 행사가 행해졌던 사실은 고려사 나 조선왕조실록 과 같은 기록에서 많이 발견된다.
7) 三國遺事 第三卷 興法 難陁闢濟.
8) 韓國古代社會硏究所, 「北漢山新羅眞興王巡狩碑」, 譯註韓國古代金石文 2(1992), 68~74쪽; 정병삼, 「북한산의 불교문화사적 의의」, 北漢山의 佛敎遺蹟 (대한불교조계종총무원 ․ 불교문화재발굴조사단, 1999), 32쪽; 정재훈, 「북한산성의 사원 및 사지의 보존과 복원에 대하여」, 北漢山의 佛敎遺蹟 (대한불교조계종총무원 ․ 불교문화재발굴조사단, 1999), 71쪽.
9) 李䫨의 「僧伽窟重修記」 중에 ‘최치원의 문집을 보면 옛날 신라시대의 狼跡寺 僧 秀台가 삼각산 남쪽에 굴을 만들고 승가대사상을 만들었다는 글이 있다’라는 내용이 있다; 新增東國輿地勝覽 第三卷 佛宇條; 東文選 卷64.
10) 이덕무의 「記遊北漢」 중 文殊寺의 내용을 보면 큰 석굴 안에 문수와 지장, 관음보살상 그리고 오백나한상이 있었음을 알 수 있다. 문수사를 주제로 한 시문은 다음을 참고할 수 있다; 李臟用, 「文殊寺」, 北漢誌 ; 南孝溫, 「題文殊寺」, 秋江集 卷三; 金富賢, 「文殊寺」, 召代風謠 卷一; 민경길 편역, 북한산 3(집문당, 2004), 110~120쪽.
11) 이 밖에 소림굴과 지장굴, 덕암사 석굴 등이 있다. 소림굴은 현재 서울 종로구 홍지동에 위치한 소림사로 조선 태조가 즉위하기 전에 이 굴 속에서 기도를 하였으며, 태조 5년(1396) ‘少林窟 ’이라는 편액을 내렸다고 한다. 현재 대웅전 뒤편의 굴은 약사전(藥師殿)으로 사용되고 있다.
   이덕무의 「記遊北漢」에는 小林菴으로 표기되었으며 石室 안에 3개의 석불이 봉안되어 있다고 설명하고 있다. 또한 이덕무가 '어렸을 때는 굴만 있었는데 지금은 지붕을 덮어 감실을 만들었다'고 적고 있다. 지장굴은 鏞齋 成俔의 「遊三角山地藏窟」과 같은 제목의 孤潭 李純仁의 시문 등이 한다. 덕암사에는 현재 2개의 자연암굴이 있는데 대웅전과 약사전으로 사용되고 있다; 李純仁, 「遊三角山地藏窟」, 孤潭逸稿 ; 사찰문화연구원, 전통사찰총서 4 서울 (사찰문화연구원, 1994), 389~392쪽; 민경길 편역, 북한산 3(집문당, 2004), 118~120쪽; 김윤우, 앞 책, 118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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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또한 7세기 후반 북한산에는 莊義寺安養寺 그리고 靑潭寺라는 사찰이 있었음을 확인할 수 있다.장의사태종무열왕長春郞罷郞의 명복을 빌기 위해 659년 북한산주에 세운 사찰로 현재 세검정초등학교 자리이다.13) 장의사는 고려 초기 元宗 대사 燦幽(869~958)와 法印국사 坦文(900~975)이 具足戒를 받는 등 戒檀이 설치된 중요한 사찰 중 하나였고14), 고려후기에는 법상종 慈靜 국존子安(1240~1327)이 주석했던 사찰이다.15) 조선시대 世宗代에는 先王의 기일에 장의사에서 재를 올리게하는 등16) 왕실과의 관계를 맺으며 법등을 이어갔다. 그러나 燕山君이 장의사의 불상과 승려들을 내보내 비우게 하면서17) 법맥이 끊어 져오늘에 이른 것으로 생각된다.


   안양사청담사에 대한 기록은 아주 단편적인 사실만 전한다.안양사신라 무열왕8년(661)城主 冬陀川이 고구려장군 惱音信과 말갈의 장군 生偕가 북한산성을 공격해 왔을 때 안양사 창고를 헐어 그 재목으로 무너진 望樓를 보수한 기록이 있어북한산성내에 안양사가 위치하고 있었음을 알려준다.18)  청담사義湘華嚴宗을 전파하기 위해 지은 화엄십찰 중 하나로漢州 負兒山에 세워졌다는 기록으로 역시 북한산에있던 사찰임을 알 수 있다.19)  그러나 아쉽게도 이 두 사찰의 정확한 위치가 어디였었는지는 알 수가 없다.보현봉으로 올라가는 길목에 청담샘이라는 샘이 있고 그 주변에 석축들이 흩어져 있는 청담사지가 있으나, 이 사지가 의상이 세운 청담사인지는 확실하지 않다.


12) 李德懋, 「記遊北漢」, 靑莊館全書
13) 三國史記 第五卷 新羅本紀 太宗武烈王 ; 三國遺事 奇異第一 長春郞 罷郞 一作羆
14) 한국역사연구회 편, 「고달원 원종대사 혜진탑비」, 譯註羅末麗初金石文(下) (혜안, 1996), 378쪽; 한국역사연구회 편, 「보원사 법인국사 혜진탑비」, 譯註羅末麗初金石文(下) (혜안, 1996), 402~403쪽.
15) 정병삼, 앞 논문, 34~35쪽; 정병삼 교수는 장의사를 고려 초기는 화엄종 사찰로 파악하고, 고려 후기는 법상종 사찰로 파악하고 있다.
16) 世宗實錄 卷11 3年 正月 壬午
17) 朝鮮王朝實錄 燕山 10年 7月 17日 乙巳; 朝鮮王朝實錄 燕山 10年 7月 29日 丁巳
18) 三國史記 第5卷 新羅本紀; 林相先, 「新羅時代의 서울지역 經營」, 鄕土서울 61(서울특별시사편찬위원회, 2001), 57~58쪽.

19) 최치원, 「法藏和尙傳」, “ … 漢州 負兒山 靑潭寺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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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최근 북한산 지역의 불적을 지표조사하면서 많은 사지가 알려졌는데,20) 기록상에만 존재하는 사찰까지 감안한다면 북한산에는 현재 우리가 알고 있는 것 보다 훨씬 더 많은 사찰이 있었다는 사실을 알 수 있다.


   고려시대에 들어오면서 북한산의 사찰들은 왕실과의 긴밀한 관계 속에서 더욱 발전했다. 진관사穆宗 태후의 원찰로삼았고,21)  香林寺는 거란의 침입을 피해 太祖의 棺을 두번이나 옮긴 곳이며,22)  승가굴문수굴은 비를 빌거나 왕실과 종친들을 위해 시주를 하던 곳이다.23) 또한 神穴寺는 후에 顯宗이 된 大良院君의 목숨을 구해준 사찰이다.24)
뿐만아니라 여러 왕과 왕비들이 북한산을 순행하면서 승가굴과 장의사,仁壽寺 등의 사찰에 들른 기록이 전해지고 있다.25)  이처럼 북한산의 사찰들은 왕실의 비호 아래에서 성장하였다는 것을 알 수 있다.

   당시 북한산의 사찰들은 경제적으로도 매우 풍족하였음을 알 수 있다. 현종18년의 기록을 살펴보면 楊洲의 장의, 삼천, 靑淵 등 사찰의 승려들이 나라의 금령을 위반하고 3백60여석의 쌀로 술을 빚은 사실이 있는데26) 이는 북한산지역 사찰의 풍족한 경제력을 단적으로 보여주는 예라 할 수 있다. 또한 삼천사는 고려시대에 승려 삼천명이 거주하여 삼천사가 위치한 계곡을 三千僧洞이라 부른 사실로도 풍족한 경제력과 寺勢를 다시 한번 확인할 수 있다.27) 삼천사의 종파는 법상종 사찰이었던 것으로 생각된다. 현재 삼천사지大智國師碑의 귀부가 남아 있는데, 대지국사 法鏡은 고려전기의 고승으로 현종9년(1018) 삼천사 주지로 있다가 개성 왕실원찰玄化寺의 초대주지가 되고 현종11년(1020)에는 王師,덕종원년(1032)에는 國師가 되었다. 현화사는 고려 전기 법상종의 대표적 사찰이므로 대지국사가 주지로 있던 삼천사 역시 법상종 사찰일 가능성이 크다.


20) 대한불교조계종 총무원 ․ 불교문화재 발굴조사단, 北漢山의 佛敎遺蹟 (1999); 서울역사박물관, 서울특별시 문화유적 지표조사 종합보고서 Ⅰ~Ⅳ(2005)
21) 高麗史 世家 卷第三 穆宗 二年 己亥.

22) 高麗史 世家 卷第四 顯宗 七年 壬辰.  
高麗史 世家 卷第四 顯宗 九年 戊午.
23) 高麗史 世家 卷第十一 肅宗 四年 戊寅.
高麗史 世家 卷第十三 睿宗 五四 庚寅.
24) 高麗史 世家 卷第四 顯宗 元年.
25) 高麗史 世家 卷第七 文宗 午年 辛卯.
高麗史 世家 卷第十 宣宗 七年 庚午.
高麗史 世家 卷第十二 肅宗 九年 甲申.
高麗史 世家 卷第十二 睿宗 三年 戊子.
高麗史 世家 卷第十四 睿宗 十二年 丁酉.
高麗史 世家 卷第十五 仁宗 四年 丙午.
高麗史 世家 卷第十八 毅宗 二十一年 丁亥.
26) 高麗史 世家 卷第四 顯宗 十八年 丁卯.
27) 李德懋, 「記遊北漢」 중 圓覺寺; 김윤우, 앞 책, 121쪽 및 296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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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조선시대에는 숭유억불정책으로 사찰의 수와 규모가 축소되긴 하였지만 고려시대에 이어 조선시대에도 왕실과 북한산 소재 사찰들의 관계가 계속 유지되었음을 알 수 있다. 앞서 언급한 바와 같이 장의사 왕실의 재를 올리는 사찰이었고 진관사경의 觀音窟 함께 수륙재도량이었다.승가사선종의 중심사찰이었고,28)  道成菴처럼 왕족들의 원찰이 되기도 하였다.29)
   조선후기에는 임진왜란과 병자호란을 겪으면서 僧軍의 활발한 활동으로 인해 사찰과 승려들이 도성이나 산성의 수비를 담당하기도 하였다.이와같은 상황에서 사찰의 규모도 커졌다.그 대표적인 예가 바로 중흥사이다. 숙종37년(1711) 북한산성을 축조할 당시 중흥사는 30여칸에 불과했었는데 축성 후 숙종41년(1715)에는 136칸으로중 건되었고 나중에는149칸의 큰사찰로 발전하였다.30) 그러나 1915년 화재로 소실되어 현재는 터만 남아 있다.31)


   또 한 가지 우리가 주목해야 할 것은 북한산의 봉우리 이름에 유난히 불교와 관련된 이름이 많다는 사실이다. 이러한 사실은 그 만큼 북한산에 불교의 영향이 지대하였음을 시사한다.32) 북한산 봉우리는주로 부처나 보살이나 승려의 이름과 관련된다. 부처명으로는 석가봉이 있고 보살명으로는 문수봉과 보현봉, 미륵봉 등이 있으며,승려와 관련된 것으로는 나한봉, 승가봉, 의상봉, 원효봉 등이 있다.이밖에 袈裟峯이란 봉우리도 그 범주에 포함된다. 그러므로 북한산은 우리나라에 불교가 전래된 이후 현재까지 끊임없이 역사적․ 지리적 중요성과 함께 불교의 중심지 중의 하나로 성장했다고 볼 수 있다.


28) 世宗實錄 卷十六 四年 五月 乙酉.
世宗實錄 卷十六 四年 六月 己亥.
世宗實錄 卷一 卽位年 二月 甲辰.
世宗實錄 卷十一 三年 正月 壬午.
世宗實錄 卷二十四 六年 四月 庚戌.
정병삼, 앞 논문, 37~38쪽.
29) 도성암貞懿公主의 원찰이다.
30) 서울특별시사편찬위원회, 東國與地備考 (1956), 74쪽; 정재훈, 앞 논문, 65~66쪽.
31) 화재 전 중흥사의 모습은 1902년 촬영된 조선고적도보의 사진을 참고할 수 있다. 현존하는 중흥사의 유물로는 호암미술관 소장의 金鼓와 동국대학교박물관 소장 중흥사 향로, 국립청주박물관소장의 중흥사 약사회상도와 아미타회상도 등이 있다; 조선총독부, 조선고적도보 12(1932), 도판 5361~5366 참조.
32) 정병삼 교수는 북한산 봉우리 이름에 불교와 관련된 이름이 많은 것은 북한산에 불교적 의미를 담고자 했던 당대인들의 의지가 표현된 것으로 해석하고 있다; 정병삼, 앞 논문, 43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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Ⅲ. 북한산 서부지역 고려불상의 현상과 양식적 특징

1. 은평구 진관내동 석조보살입상33)
   이보살입상(도1)은서울지역에서는보기드문나말려초양식의석조보살입상으로매
우주목되는상이다.34) 현재이보살입상은서울특별시은평구진관내동興昌寺남쪽개인
소유의慈氏閣(도2)이라는작은전각안에봉안되어있다.자씨는미륵보살을의미하나도
상학적으로이보살입상의 존명을뚜렷하게밝힐만한근거는부족하다. 근처에흥창사라
는사찰이있고그주변에서토기와청자, 기와등의유물들이수습되고있는것으로보아


33) 이하 진관내동 보살입상이라 간단히 부르기로 한다. 또한 지금까지 불교조각사 논문은 논의의 대상이 되는 불상의 현상과 양식설명을 분리하여 논지를 전개하는 경향이 많았다. 그러나 이 글에서는 불필요한 내용의 중복을 줄이고, 보다 효율적인 설명을 위하여 현상과 양식설명을 같이 하면서 논지를 전개하기로 한다.


<도 1> 진관내동 석조보살입상, 나말려초, 160m, 石造, 서울시 은평구 진관내동(개인 소장)
<도 2> 자씨각 전경, 현대, 木造, 서울시 은평구 진관내동(개인 소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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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마도이주변이사지일가능성이크다.35) 또한자씨
각앞에는석탑부재와파손된석불좌상(도3)이있으
며 이일대를 주민들이 탑동이라고부르는 점 등으로
보아 이곳이 사지였을 가능성을 뒷받침해준다. 그러
나 이보살입상이 개인 소유이다 보니 체계적으로 관
리되지못하고있는실정이다.현재이보살상이위치
한곳이뉴타운사업개발지역으로예정되어있어보살
입상의 보호와 보존을 위해서 앞으로 세심한 배려가
필요하다. 이보살입상은한국전쟁이전부터현재위
치에 있었다고 전해지고 있으며 마을이 한창 어려울
때 땅 속에서 솟아났다는 이야기가 전해지고 있어36)
한때매몰되어있었던것으로생각된다.37)
이러한 정황을 종합해본다면 이 보살입상은 과
거어느시기에매몰되었던것을한국전쟁즈음다시
발견되어현재에이르고있는것으로판단된다. 혹다른곳으로부터옮겨왔다하더라도그
리멀지않은곳으로생각되며인근에불교문화가융성했던북한산이자리잡고있는점을
고려할때북한산에서옮겨왔을가능성도배제하기어렵다. 따라서이보살입상은서울지
역에서보기드문나말려초불교조각의예로써주목되는상이다.38)


34) 이 석조보살입상은 간략하게 소개된 바 있다; 정지희 외 2인, 「서울지역의 불교미술」, 서울특
별시 문화유적 지표조사 종합보고서 Ⅰ(서울역사박물관, 2005), 210쪽; 상명대학교박물관 ․ 서울
특별시 도시개발공사, 은평지구 뉴타운 도시개발사업 문화재 지표조사 보고서 (2003), 136~
137쪽.
35) 상명대학교박물관 ․ 서울특별시 도시개발공사, 앞 책(2003), 136쪽.
36) 이는 흥창사 주지스님과 자씨각의 관리를 맡고 있는 우덕원씨와 장석준씨의 증언에 따른 것이
다.
37) 이와 같은 사례는 다른 고려시대나 조선시대 석불에서도 많이 나타나고 있다. 전라북도 부안군
용화사 석불입상 등을 대표적인 예로 들 수 있다; 국립전주박물관, 全羅北道의 佛敎遺蹟-불상
․ 탑 ․ 석조물 편- (2001), 190쪽; 윤덕향․정병삼․최인선․최선주, 호남의 불교문화와 불교유적
(백산서당, 1998), 375~376쪽.
38) 현재까지 알려진 서울지역 출토의 불교조각은 뚝섬 출토 금동불좌상과 강북구 삼양동 출토 금
동관음보살입상, 성동구 흥국사 금동불입상, 서울의 서북쪽 벽제에서 출토된 舊 남궁련 소장 금
동불좌상 등 4구가 알려져 있다. 이 불상들은 같은 서울지역에서 출토되었음에도 불구하고 다양
한 모습을 하고 있어 삼국의 각축장이었던 서울지역의 복잡하고 다양한 역사적 ․ 지리적 ․ 문화
적 특징을 보여주고 있다고 해석될 수 있다.
이 외의 서울 소재 불교조각은 고려와 조선시대 마애불이 주를 이루는데 많이 알려진 상들로는
<도 3> 자씨각 앞 석탑부재와 석불
좌상, 나말려초, 26cm(現高), 石造,
서울시 은평구 진관내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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상호(도4)는둥근장방형이며얼굴세부표현은상당히마모가진행되었다. 머리와
이마의경계는일직선으로구획되었으며이마는좁게표현되었다. 이마중앙에는황색의
구슬로백호를만들었는데이는 후보된것이다. 눈은가늘고길게조각되었고 코는 폭이
좁고길이가다소짧은특징을보인다. 약간두드러진인중아래로작은입을조각하였다.
전체적으로 여성적인 인상을 풍기면서도 양감은 넘치나 팽팽한 긴장감은 줄어든 얼굴로
주로한천사철불좌상(도5)과같은통일신라말불상과비교된다. 목은사다리꼴형태로
파손되었던 것을현재시멘트로보수하였다.
머리는빗어올려보계와의중간지점에띠형의보관을쓰고있다. 높게솟은보계는
그폭이머리의폭과거의같게조각되었다. 나말려초불상의육계표현의특징인머리와


삼천사 마애불입상과 승가사 마애불좌상, 봉천동 마애미륵불좌상, 학도암 마애관음보살좌상, 보
타사와 옥천암 마애관음보살좌상 등이 있으며, 단독상으로는 승가사 승가대사상 등이 있다. 그
러나 아직 서울지역 불교조각에 대한 인식이 부족하고, 본격적인 연구가 진행되지 않았음을 감
안할 때 앞으로의 연구 성과가 기대된다. 지금까지 발표된 서울지역 불교조각에 대한 논고는 다
음과 같다.
김원룡, 「纛島 出土 金銅佛坐像」, 歷史敎育 5(歷史敎育硏究會, 1961), 150~154쪽; 강우방 ․ 곽
동석 ․ 민병찬, 불교조각 Ⅰ(솔 출판사, 2003), 222쪽; 정지희 외 2인, 앞 논문, 209~222쪽;
남동신, 「북한산 승가대사상(僧伽大師像)과 승가신앙」, 서울학연구 14(서울학연구소, 2004),
5~48쪽; 이경화, 「서울 학도암 마애관음보살좌상 연구」, 미술사연구 16(미술사연구회, 2002),
157~176쪽.
<도 4> 진관내동 석조보살입상 상
호, 나말려초, 石造, 서울시 은평구
진관내동(개인소장)
<도 5> 한천사 철불좌상, 통일신라,
147cm, 鐵造, 경북 예천군 감천면 증거리
184
200 • 강좌미술사 26호


거의 구별되지 않는점과일면상통하는바가있다. 머리와 보계와의비율이 거의 1:1로
비슷하고머리와얼굴의비율도거의1:1인점이흥미롭다. 보관은두개의굵은띠에세
개의 장식이 달린 형태로 정면 중앙에 커다란 꾸밈장식을 두고 양 옆으로 정면의 것보다
작은꾸밈장식을두었다. 각각의장식에는꽃모양으로보이는조각이새겨져있다(도6).
고려시대에 들어오면서부터보살상의보관은 원통형또는면류관 형태의高冠形이 유행
하게되는데이보살상은아직통일신라시대에많이보이는전통적인보관을착용하고있
어보수적인측면이간취된다. 그러나보관에화불이나타나있지않아그존명은정확하
게밝히기는 어렵다.
머리카락의 표현은 세로 곡선으로 간격의 변화를 주며 조각되었다. 보발은 눈썹이
있는 곳으로부터 턱선까지늘어진양쪽귀를 돌아 어깨에 맞닿아 있는데, 대부분의 보살
상의 보발이 어깨를 지나 길게 밑으로 내려뜨려지는 모습과는 달리 어깨 안쪽에서 그 끝
이둥글게마무리되고있는점이이색적이다. 보발의세부표현을살펴볼때형식화가상
당히 진행되었음을 알수있다.
보관의 표현에서 발견되는 전통성과 보수성은 신체의 표현에서도 발견된다.(도 7)
이보살입상은전체적으로양감과볼륨감이넘치는당당한신체를지니고있다. 어깨에도
적당히 살이 올라 있어 둥근 형태미를 나타낸다. 그러나 어깨의 경사도가 통일신라시대
불상에비해서는다소급해진경향이있다. 상체는비교적양감과굴곡감이잘나타난다.
<도 6> 진관내동 석조보살입상 두부,
나말려초, 43cm, 石造, 서울시 은평구
진관내동(개인 소장)
<도 7> 진관내동 석조보살입상 신
체, 나말려초, 石造, 서울시 은평구
진관내동(개인 소장)
北漢山 西部지역 고려불상의 연구 / 鄭智禧 • 201
그러나 중대신라 불교조각에서 찾아지는 긴장감과 탄력감은 사라지고 매너리즘에 빠진
중당이후만당기양식을보인다. 양쪽팔의양감도신체에비해비대할정도로풍부하다.
천의는고려시대부터나타나기시작한대의형천의로통견이다. 통견의천의는얇으
면서도신체에밀착되어있어신체의굴곡선이과감하게드러난다. 당당하고양감넘치는
신체를 지니고 있으면서도 천의의 표현에서 대의형 천의로 변화된 모습은 이 보살입상의
편년을정하는데도움이된다. 목깃은깊게파여그아래로등간격의U형옷주름이반복
된다. 팔을 감싸고바닥까지늘어진 소맷자락은밑으로 내려갈수록양 옆으로 벌어져삼
각형또는지느러미형의옷자락을형성하고있다. 전체적으로옷주름은거의같은간격을
유지하면서 형식적으로조각되었다.
배부분에물결무늬옷주름이조각되어있어눈길을끈다. 이물결무늬옷주름은V형
에가까운형태이다. 물결무늬옷주름은대략9세기경부터나타나기시작하여고려전기
마애불이나석불에많이나타나고있다.39) 진관내동보살입상의물결무늬옷주름은주로
배부분에집중되어있어충남홍성신경리마애불입상(도8)과비교된다. 이후물결무늬
39) 정지희, 「淸州 龍華寺 石佛像群의 연구 -思惱寺址 石佛像群과의 관련성-」(동국대대학원 석사
학위논문, 1999), 68~71쪽; 「淸州 龍華寺 石佛像群의 연구」, 美術史學硏究 238․239(한국미술
사학회, 2003), 92~93쪽.
<도 8> 홍성 신경리 마애불입상, 통일신라,
400cm, 石造, 충남 홍성군 신경리
<도 9> 충주 창동 마애불입상, 고려,
400cm, 石造, 충북 충주시 가금면 창동
202 • 강좌미술사 26호
옷주름을 가진 불교조각이 전국적으로 등장하는데 경
사가급한V형의형태에서경사가완만해져점차U형
으로바뀌고그숫자도줄어드는경향이있다.충주창
동 마애불입상(도 9)이나 이천 소고리 마애불좌상의
예에서 보듯이 물결무늬가 도식화되거나 경사가 완만
해지는과정을거치게된다. 따라서이보살입상의물
결무늬옷주름은비교적이른시기의형태에해당된다.
이 보살입상에서 또한 주목되는 점은 높은 허리
선의 위치이다. 허리선이 높게 조각된 대표적인 예는
청주 용화사 석불상군의 좌석불입상(도 10)이 있
다.40) 불교조각상에서 허리선이 높아지기 시작하는
것은 중국에서는중당이후, 한국에서는신라하대이후
라 볼 수 있는데41) 신라하대 불교조각으로는 경북 청
도백곡동석불좌상과전남광주약사암석불좌상, 경
북상주증촌리석불좌상, 전북남원실상사철조아미
타불좌상등으로대략9세기에조성된상이주를이루
고,고려시대불교조각으로는충북청주용화사좌석불
입상외에남원만복사지석불입상과경북영주선원동철불좌상,전북임실중기사철불좌
상42) 등으로고려전기에조성된석불과철불에많이나타난다.그러나진관내동보살입상
은높은허리선을가지고있지만조각선이힘이빠지고굴곡의정도가완화되었다. 또한높
은허리조각선은대부분장신형의불상을만들어내기마련이나이보살입상은두부의크
기가커져전체적으로고려초기에많이보이는약4등신의신체비례감을나타낸다.
40) 정지희, 「청주 용화사 석불상군의 연구」, 미술사학연구 238․239(한국미술사학회, 2003), 102
쪽. 용화사 좌석불입상은 통일신라시대의 당당한 면모를 가지고 있으면서도 고려적인 佛顔과 다
소 경직된 표정, 형식화된 옷주름 등 고려적인 양식을 보이고 있어 고려전기에 조성된 것으로
밝혀졌다. 이 불상은 압도적인 크기뿐만 아니라 마치 회화작품을 보는 듯한 물결무늬 옷주름과
높은 허리선의 위치가 특징인 고려시대 불교조각의 秀作 중 하나이다.
41) 구노미키 지음․최성은 옮김, 중국의 불교미술 -후한시대에서 원시대까지- (시공사, 2001),
112쪽. 中唐 무렵 중국에서 제작되어 일본으로 전해져 현재 교토 도지(東寺)에 있는 두발비사
문천입상을 설명하면서 가슴 바로 아래부터 잘록해지면서 다리를 길게 표현한 장신의 상임을
지적하고 있다.
42) 임실군․전북대학교박물관, 용암리사지 발굴조사보고서 (1994), 3쪽; 최인선, 「韓國 鐵佛 硏究」
(한국교원대학교대학원박사학위논문, 1998), 136~139쪽 및 사진 81~84 참조.
<도 10> 청주 용화사석불상군좌석
불입상, 고려, 588cm, 石造, 충북 청주
시 흥덕구 사직동 용화사
北漢山 西部지역 고려불상의 연구 / 鄭智禧 • 203
하체의 양감은 상체의 양감에 비하여 상대적으로 줄어들었다. 풍성한 둔부를 지나
양쪽다리는곧게뻗었는데천의가얇아다리의윤곽선이두드러져있다. 다리의옷주름
은U형의 옷주름이연속적으로 나타나는우드야나(Udyana)식이다.43) 대표적인 예로는
통일신라 조각인 경주박물관 사암제 석불입상과 감산사 아미타불입상 등을 들 수 있다.
우드야나식 옷주름이 조각된 통일신라의 상들은 대부분 불상인데 반해 진관내동 보살입
상의경우는보살상인점이주목된다. 이는고려시대로넘어오면서보살상의천의가佛이
착용하는대의형 천의로변화한 사실과도관련이있는것으로생각된다. 양쪽 다리 사이
는좁은간격의세로 주름선이조각되어있다. 발목이하는땅에묻혀있어 그세부를파
악하기어렵다.
수인은 오른손은엄지와검지를구부려맞대고있고 중지와 약지는 구부려 손바닥에
대고있으며, 새끼손가락은쭉펴서뒤로젖힌모습이다(도11).오른쪽수인과유사한수
인을가진예로경기강화하점면석불입상(도12)과경북금릉광덕동석조보살입상등
을44) 들수있다. 특히강화하점면의석불입상은오른손이아닌왼손이라는점을제외하
면, 엄지와검지를맞대고셋째와넷째손가락을자연스럽게구부리고있으며새끼손가락
을위로펼치고있어 서울진관내동 보살입상의수인과거의일치하고있다.
이에반해왼손은손목을거의직각으로꺾어손목아래로늘어진옷자락을잡고있다
(도13). 엄지는앞으로배치하고나머지손가락은뒤로하였는데서로일정한간격을유
지하면서벌리고있다. 이와같은수인은영주석조보살입상과45) 거창양평동석불입상,
43) 우드야나식 옷주름은 憂塡王式 옷주름으로 불리기도 하고 인도 굽타기 사실주의 양식의 반영
으로 해석되고 있다; 문명대, 「慶州博物館 砂岩製如來立像考」, 考古美術 123․124(고고미술동
인회, 1974), 41~43쪽; 문명대, 한국조각사 (열화당, 1980), 193~195쪽.
44) 이 불상에 대한 논고로는 다음을 참고할 수 있다; 윤현희, 「江華 河岾面 石佛立像 硏究」, 仁
川文化硏究 2(인천광역시립박물관, 2004), 231~245쪽. 윤현희는 강화 하점면 석불입상에 대
해 논의하면서 양식사적으로는 주로 통일신라나 고려전기 불상들과 비교하고, 하점면 석불입상
과 같은 산에 위치한 봉은사와 관련된 河陰 奉氏 설화를 근거로 고려 후기인 14세기 전반 불
상으로 설명하고 있다. 그러나 하점면 석불입상이 봉은사에 봉안되었던 불상이었는지는 확실하
지 않다. 또한 현재 고려 후기로 알려진 불교조각은 대부분 금동불이어서 비교대상으로서의 석
불조각이 마땅하지 않은 연구상의 취약점도 고려되어야 한다.
45) 이 보살입상은 ‘영주석불입상’이란 명칭으로 보물 제60호로 지정되었으나 머리에 보관을 착용
하고 있어 보살상으로 보는 것이 합리적이다. 따라서 정식명칭도 ‘영주석조보살입상’으로 명명
하는 것이 옳다. 또한 이 보살입상의 조성연대를 통일신라 초기인 7세기 말로 보는 경향이 있
는데, 이에 대해서는 한 번 더 생각해 볼 여지가 있다. 왜냐하면 얼굴과 신체의 형태와 양감
표현에서 비슷한 시기에 조성된 군위 삼존불입상이나 영주 가흥동 마애삼존불상과 차이가 나기
때문이다. 또한 주로 고려시대 보살상에 많이 나타나는 통견의 대의형 천의를 입고 있는 점도
상당히 주목되는 점이다. 앞으로 면밀한 검토를 해보아야 하겠지만 만약 이 보살입상이 통일신
라 후기에 조성된 것이라고 본다면 대의형 천의를 착용한 고려시대 보살입상에 선행하는 예로
204 • 강좌미술사 26호
안성봉업사지석불입상, 아산관음사석불입상등다수의예가남아있다. 진관내동석조
보살입상의 수인 표현의 특징은 손목이나 손가락의 꺾임을 상당히 과장되게 표현한 것이
라고 할수있다.
진관내동 보살입상은 현재까지 서울에서 발견된 얼마 안 되는 불교조각상으로 팽만
한양감과 볼륨감의표현, 통일신라시대보살상에 많이 보이는 보관을 착용하고있는점
등은통일신라시대조각양식을계승하고있으나, 한층위로올라간보관의위치나두부가
커지면서 신체의 비례가약4등신에불과한점, 보발의길이가 어깨와 간신히맞닿을정
도로짧아진점, 균일한간격으로형성된옷주름선의형식화, 고려시대에들어오면서나
타나기시작하는대의형천의를걸치고있는점등은통일신라불상양식에서고려시대불
상양식으로의이행을충분히보여주고있다.
그러므로 이 보살입상은 보기 드문 서울지역의 나말려초 불상으로서 중요한 위치를
차지한다고할수있다. 또한이제까지서울에서발견된불상의예들은주로삼국시대불
상으로 크기가 작은 금동불상인데 반해 한국 불교조각사상 통일신라 이후 중세로 접어드
는 시기의 관문에 위치한 새로운 불교조각의 예라는 점에서 더욱 중요하다.46) 뿐만 아니
써 중요한 의미를 가지기 때문이다. 이후 고려시대로 오면서 단독 보살상의 조성과 함께 대의
형 천의를 걸친 보살상이 대대적으로 조성되었다.
46) 서울지역에 위치한 불상 중 통일신라시대로 올려 볼 수 있는 예로는 현재 청와대 경내에 있는
<도 11> 진관내동 석조보살입상
수인(오른손), 나말려초, 石造, 서
울시은평구진관내동(개인소장)
<도 12> 강화 하점면 석불
입상, 고려, 326cm, 石造,
인천광역시 강화군 하점면
<도13> 진관내동 석조보살입상
수인(왼손), 나말려초, 石造, 서울
시은평구진관내동(개인소장)
北漢山 西部지역 고려불상의 연구 / 鄭智禧 • 205
라기존의 충청지역중심의편향된고려조각 연구의 풍
토에서 벗어나 한층 확대된 시야로써 고려조각의 진정
한조각사의위치정립에도움이될만한새로운자료로
써매우주목되는상이다.47)
2. 삼천사지 마애불입상
서울특별시은평구진관외동에위치한삼천사지에
남아있는고려시대마애불입상이다.48)(도14)현재삼
천사는1960년새로지은사찰으로49) 원래삼천사지는
도보로약30분쯤떨어진곳에위치하고있다.50) 삼천
사지마애불입상은현재삼천사에서약30미터떨어진
일명‘병풍바위’에새겨진마애불로삼천사지로올라가
는길목에위치하고있다. 이불상은진관내동보살입상과함께북한산서부지역고려불
상중하나로주목되는상이다. 이마애불입상은두광과신광, 불신을돋을새김한상으로
군데군데붉은칠을했던흔적과금분을칠한흔적이남아있다. 이마애불입상좌우에는
사각형의가구공이 남아있어목조건축물이있었을것으로추정된다.
항마촉지인 석불좌상이 있다. 이 불상은 傳 有德寺 석불좌상이라고 언급되기도 하나 1917년
경주에서 옮겨온 것으로 확실하지 않다; 일연, 三國遺事 第三券 塔像編, 有德寺; 서울시사편
찬위원회, 서울의 문화재 3(2004), 84~85쪽; 조선총독부, 朝鮮古蹟圖譜 五冊, 大正六年
(1917), 582쪽.
47) 최근 들어 고려조각의 연구 범위가 충청지역에서 벗어나 중부지역이라는 지역설정으로 경기․
강원지역까지 확대되는 경향은 매우 고무적인 일이라 생각한다. 그러나 이러한 지역설정은 아
직까지 확립되지 않은 고려조각 연구의 중간과정임을 염두에 두어야 할 것이다; 최성은, 「羅末
麗初 中部地域 鐵佛의 樣式系譜」, 講座美術史 8(韓國佛敎美術史學會, 1996), 21~35쪽; 최성
은, 「高麗前期 中部地域의 石佛彫刻」, 美術資料 69(國立中央博物館, 2003), 23~45쪽.
48) 삼천사지 마애불입상에 대한 글로는 다음을 참고하기 바란다.
鄭明鎬, 「三川寺址 入口 磨崖如來像」, 考古美術 2-5(考古美術同人會, 1961), 5쪽.
49) 사찰문화연구원, 전통사찰총서4 서울 (1994), 251~259쪽.
50) 최근 들어 북한산의 불교유적을 조사하는 과정에서 삼천사지에 대한 조사결과가 나온 바 있으
며, 현재 原 삼천사지 사역에 대한 발굴이 서울역사박물관에 의해 2005년부터 진행 중이며, 발
굴보고서는 2006년 말 간행될 예정이다; 대한불교조계종 총무원ㆍ불교문화재발굴조사단, 북한
산의 불교유적 (1999), 102~113쪽.
<도 14> 삼천사지 마애불입상,
고려, 302cm, 石造, 서울시 은평
구 진관외동 삼천사
206 • 강좌미술사 26호
상호는 둥근 형으로 원만한 형상이
다.이마는좁은편이고이마와머리의경
계선은 거의 일직선으로 마무리되었다.
미간에는백호공이남아있다. 눈과눈썹
은 얼굴의 윤곽선까지닿을정도로 긴 활
형으로 조각되었는데 이처럼 긴 눈과 눈
썹은고려시대불교조각에많이나타나는
특징중하나이다.51) 반개한눈은길이에
비해폭이매우좁아져마치눈을감은것
처럼 보인다. 북한산 승가사 마애불좌상
의폭이좁은눈매보다훨씬그정도가진
전된 모습이다. 눈썹의 안쪽에서부터 이
어져 내려오는 코는 콧등이 편평하고 납
작한 형태이다. 인중은 두드러져있으며,
작은 입에희미한미소를짓고있다.
전체적으로둥글고원만한인상이나
양 쪽 볼의 약간의 볼륨감과 양감 표현을
제외하고는 평면적이다. 마애불이라 하
더라도 대부분의 경우 얼굴을 포함한 두
부는 高浮彫로 조각하고 하체는 低浮彫
는조각하는경우가많은데, 삼천사지마
애불입상은 두부와 하체 조각의 고저에
차이를두지않은것이특징이다. 이러한조각기법상특징은하남시교산동太平2년명마
애약사불좌상(도15)과강화하점면석불입상과유사하다.52)
평면적이면서도 밝은 표정을 짓고 있는 얼굴 형태는 충남 연산 개태사 삼존불입상
(도16)과당진안국사지석조삼존불상이나충주미륵리사지석불입상등과비교할수있
다. 이불상들은방형에가까운얼굴형태와얼굴윤곽선과거의맞닿은눈, 평면적이면서
51) 최성은, 「溟洲地方의 高麗時代 石造菩薩像에 대한 硏究」, 佛敎美術 5(동국대박물관, 1980),
75쪽.
52) 최성은은 삼천사지 마애불입상의 저부조 기법을 하남시 교산동 태평2년명 마애약사불좌상 등
의 10세기 저부조 전통을 계승하고 있다고 보고 있다; 최성은, 「삼천사지 마애불입상」, 석불
돌에 새긴 정토의 꿈 (한길아트, 2003), 279쪽.
<도 15> 태평2년명 마애약사불좌상, 고려,
93cm, 石造, 경기도 하남시 교산동 선법사
<도 16> 개태사 삼존불입상, 고려, 415cm(본존
상), 石造, 충남 논산시 연산면 천호리 개태사
北漢山 西部지역 고려불상의 연구 / 鄭智禧 • 207
도평판적인코와볼처리등에서삼천사지마애불입상과친연성을보인다. 또한경북예
천 청룡사 석조비로자나불좌상처럼 풍부한 양감을 간직하고 있으나 일직선으로 처리된
눈의형태와방형에가깝게변화된얼굴형, 작고낮은코와입등세부표현에서공통점을
보이는불상도있어참고할만하다. 이와같은상호는강원도강릉한송사지 석조보살입
상과 같은長卵形의오밀조밀한얼굴과함께고려 불상상호의큰맥을 형성하는것으로
생각된다.
머리는 소발로 머리와 육계를 굳이구분하지 않고전체윤곽선만으로간략하게조각
하였다. 비슷한 시기에 조성된전북남원신계리 마애불좌상이나전남 영암 월출산 마애
불좌상, 서울승가사마애불좌상에서보듯이소발임에도불구하고머리와육계를분명하
게구별하고있는것과는대조적이다. 귀는목의중간까지길게늘어져있는데양쪽의길
이가달라서조각가의미숙함이드러난다. 삼도는밑으로쳐져쇄골보다아래까지내려와
있다. 삼도의표현이신체의일부분으로흡수되면서과장되어 나타나고있음을알 수있
다. 이렇듯과장된삼도의 표현은경남함안방어산 약사마애불입상(801)으로부터 경기
광주 철불좌상과53) 비교할수있다. 머리를감싸고 있는 두광은2개의 원형으로간단하
게조각되었다.
한개의융기선으로조각된신광이감싸고있는신체는비교적당당하고장신형에속
한다. 장신의신체는한천사철불좌상과같은통일신라후기불상에서도발견되며고려전
기로추정되는불상중에서는충남아산평촌리석조약사불입상(도17)과충북제천청풍
석불입상등을들수있다. 어깨는경사가완만한둥근형태이며손과발이크게조각되었
다. 오른손은아래로길게내려불의자락을잡고있다.왼손은손바닥을위로하여마치물
건을잡은것처럼손가락을굽히고있다.한손으로불의를잡고있는것은진관내동보살입
상과공통적으로나타난다.그러나진관내동보살상은손을뒤로꺾어손가락을벌리고있
는데반해삼천사지마애불입상은팔을자연스럽게아래로내려옷자락을잡고있어차이
가난다. 손의세부표현에서도엄지를제외한나머지손가락을구별하지않고한덩이로
처리하여단순화되고생략적인조각기법을사용한것을 알수있다.
불의는 통견으로벌어진가슴 사이로비스듬한 승각기가 보인다. 승각기 매듭은 리
본형인데매듭의끈이무릎까지길게늘어뜨려져있는것이특징이다.이렇게불의밖으로
길게늘어진승각기매듭은파주용미리석불입상(도18)에서도볼수있다. 소매는손목
까지 완전히 덮고 있고, 길게 늘어진소맷자락은 바람에 나부끼듯 조각하였다. 옷주름은
53) 이 철불좌상은 경기도 광주 춘궁리 철불좌상 또는 하사창리 철불좌상이라 불리었으나 요즘에는
광주철불좌상이라 간단히 부르고 있어 이를 따르기로 한다.
208 • 강좌미술사 26호
도식적이고형식적으로표현되어거의간격을유지하면서조각되어있다.양쪽어깨에10
세기경부터 나타나는삼각형으로 접힌옷자락표현이있다.
불의의표현에서주목되는점은옷자락의일부가안쪽으로들어가는모습이다. 이러
한옷자락표현은주로고창선운사금동지장보살좌상(도19)이나충남청양장곡사금동
불좌상등의 고려후기금동불상이나 보살상에많이 나타나는데, 고려 전기에 조성된것
으로 생각되는 삼천사지 마애불입상에서도 나타난다는 사실은 우리의 주의를 환기시킨
다. 실제로이옷자락표현에대해좀더세밀히살펴보면이미통일신라시대불상에등장
한다는것을알수있다. 실상사철조아미타불좌상과철원도피안사철조비로자나불좌상,
창원불곡사석조비로자나불좌상, 예천청룡사석불좌상등의예에서보는것처럼소맷자
락과 연결되어안쪽으로들어가는옷자락을확인할 수있다. 고려전기의불상으로는선
원사철불좌상을예로들수있는데Y자형여밈으로바뀐불의안쪽으로들어가는옷자락
이표현되어있다. 이러한옷자락표현은이후경북영천은해사운부암금동보살좌상등
의조선전기불상은물론남원실상사약수암목각탱(1782) 등의조선후기의불상에서도
여전히나타나고있다. 그러므로이옷자락표현은불교조각이종교조각으로서갖는보수
적인 전통의 일면을 보여준다고할 수있다.
하의는크고작은U형의옷주름이형성된모습으로발등을덮고있다.거칠고투박한
<도 17> 아산 평촌리 석조약불입상, 고려,
545cm, 石造, 충남 아산시 송악면 평촌리
<도 18> 파주 용미리 석불입상, 고려,
1740cm, 石造, 경기도 파주시 광탄면 용미리
北漢山 西部지역 고려불상의 연구 / 鄭智禧 • 209
발은각각약45도각도로벌려複辦仰蓮의연화대좌위에서있다.발사이에는방사선형
의蓮心이부분적으로모습을드러내고있다. 하나의꽃잎은3중으로되어있다. 3중의꽃
잎구성은서울승가사마애불좌상(도20)과충북제천덕주사마애불입상의대좌와비교
할수있다.승가사마애불좌상의대좌는사실적이고정교한조각기법을사용한만개한앙
련과복련으로이루어진연화대좌로하나의꽃잎안에3중의조각선을두었다. 덕주사마
애불입상의경우도식적으로변모하였으나하나의꽃잎에3중의조각선을둔것이공통적
으로나타난다. 따라서3중의꽃잎표현은고려시대마애불상의대좌에많이나타나는형
식으로생각된다.
따라서 삼천사지 마애불입상은 통일신라 후기나 고려전기의 여러 불상들과 공통점
을보이면서도양식적진전을보이는불상으로조성시기는고려전기인11세기로생각된
다. 즉개태사삼존불입상처럼단구의신체비례감을보이는일련의고려전기석불들과는
달리 장신의 비례감을가지고 있다. 그러나 양감과 입체적인신체표현 등에서 고저의차
이가줄어들고신체굴곡선이드러나지않는등한층경직되고소극적으로변화했다.이와
유사한불상들은단구형의불상들과함께고려전기라는시대를공유하고있다.54) 더나아
54) 고려시대 불교조각 특징 중 하나는 다양성에 있다. 최근 들어 이에 대해 구체적으로 논의된 바
<도 19> 고창 선운사 금동지장보살좌상,
고려, 96.9cm, 金銅, 전라북도 고창군 아산
면 삼인리 선운사
<도 20> 승가사 마애불좌상, 고려,
594cm, 石造, 서울시 종로구 구기동 승가

210 • 강좌미술사 26호
가이러한장신형의불상들은특히원각상인경우충북충주미륵리사지석불입상과충남
예산삽교석조보살입상과같은고려시대장신의석주형불상의본격적등장과관련이있
을것으로생각된다.
Ⅳ. 맺음말-북한산서부지역고려불상의조각사적의의
지금까지 진관내동 석조보살입상과 삼천사지 마애불입상을 중심으로 서울 북한산
서부지역의고려불상에대해살펴보았다. 그결과두불상모두통일신라시대불상양식의
전통을 계승하면서도 형식과 세부표현에서 양식적 진전이 이루어지고 있는 의미 있는 불
상임을알수있었다. 서울북한산서부지역고려불상의조각사적의의를정리하면다음
과같다.
첫째, 서울지역에 현재 남아 있는고려불상은 매우 드문데 진관내동 석조보살입상
과삼천사지마애불입상은나말려초내지고려불상으로아직까지부족하기만한서울지역
의불상연구에새로운자료가된다.
둘째,불교전래이후북한산지역은불교문화가매우융성했던곳이다.이러한사실은
기록뿐만아니라최근이루어진조사에서도밝혀졌다. 그러므로북한산서부지역의불상
들은 융성했던북한산불교문화의 일면을 보여주는실례이다.
셋째, 진관내동보살입상은나말려초에조성된보살상으로 양감과볼륨감이 넘치는
통일신라양식을계승하고있으면서도대의형천의를착용하고있는점, 두부가커지면서
단구의 신체 비례감을 가지고 있는 점 등 고려불상 양식으로의 진전을 잘 보여주고 있다.
이러한 사실로 미루어 보아 통일신라시대 변방에 속하는 한산주에서도 이른바 경주양식
이라 부르는 중앙양식의 영향을 받고 있음을 알 수 있다. 그러나 이는 단지 경주 양식의
이식이라고 이해하기보다는시대양식으로해석하는것이보다 합리적이라고 생각된다.
넷째, 고려시대에들어오면서북한산은왕실과밀접한관계를맺으면서남경의설치
와함께더욱발전하였다. 그과정에서개성의불상양식도자연스럽게반영되었을것으로
있다; 정지희, 앞 논문(한국미술사학회, 2003), 106쪽; 진정환, 「高麗時代 全北地域 石佛에 대한
高察」, 東岳美術史學 4(동악미술사학회, 2003), 55~56쪽; 정우택, 「미술사연구 현황과 과제」,
歷史學報 187(역사학회, 2005), 372쪽.
北漢山 西部지역 고려불상의 연구 / 鄭智禧 • 211
생각된다. 그러므로 개성양식을 제대로 파악할 수 없는 현 시점에서 북한산 서부지역의
고려불상은 그실마리를제공해준다는점에서중요하다.
다섯째, 삼천사지마애불입상은 현재진행되고있는 삼천사지발굴조사에기초자료
로서중요하다. 삼천사는고려시대북한산의대표적인사찰중하나로삼천사지마애불입
상은앞으로밝혀질삼천사의면모를살피는데도움을준다.또한삼천사가법상종사찰로
추정되고있어고려전기법상종조각의한 예로서도중요한의미를지닌다.
여섯째, 삼천사지마애불입상은신체의굴곡이없는장신형의불상인데이러한양식
은강화하점면석불입상과아산평촌리석불입상등과비교되어고려시대장신형불상의
본격적인등장과 관련이있는것으로 생각된다. 또한이 불상은 충주 미륵리사지석불입
상, 예산 삽교석조보살입상 등의예에서보듯이 석주형 불상의 장신화와도 관련되는것
으로 생각되어주목된다.
이와 같이 서울지역에 남아있는 고려 불상의 예가 매우 적고 연구가 제대로 되지 못
한 점을 감안한다면 이 두 불상은 고려불상 연구뿐만 아니라 최근 관심이 고조되고 있는
북한산불상연구에좋은자료가된다. 그러나융성했던북한산의불교문화의극히일부분
만을논의의대상으로삼아아쉬움이남는다.현재진행되고있는삼천사지발굴조사결과
에기대를해본다.
주제어(Key Words)
북한산(Mt.Bukhan), 고려(Goryeo), 불상(Buddhist image), 진관내동 석조보살입
상(standing Bodhisattva image in Jingwannaedong), 삼천사지 마애불입상
(standing image carved on rock surface in Samcheon temple-site)
212 • 강좌미술사 26호
[Abstract]
Study on Goryeo Buddhist Sculptures
in the Western Bukhan Mountain in Seoul
Jeong Ji Hui
Although there are many historical sites and relics in Seoul from the prehistoric age to
Joseon period, Buddhist relics have been lacked of interests because they are rare. By the
way, concerns about Buddhist images in Bukhan Mountain where Buddhist culture
flourished in history are on the increase as a standing Bodhisattva image in late Unified Silla
or early Goryeo period has been known in a field survey carried out lately. I would like to
investigate Goryeo Buddhist images in western Bukhan Mountain - focus on the standing
Bodhisattva image in Jingwannaedong(津寬內洞石造菩薩立像) and the standing image
carved on a rock surface in Samcheonsa temple site(三千寺址 磨崖佛立像) as the
beginning of a study on Buddhist sculptures in seoul. These images are important materials
of the study on Buddhist sculptures in seoul that still are not enough.
The standing Bodhisattva image in Jingwannaedong succeeds to the sytle of Unified
Silla which is massive and voluminous. While it represents a development into the sytle of
Goryeo at the same time in that it wears a Buddhist garment instead of a veil robe and has
a short body ratio and so on.
The standing image carved on rock surface in Samcheonsa temple site is tall and flat.
These features of style are thought to be related to regular appearance of tall and flat
images in Goryeo period. Also this image is very valuable as an example of Beopsang sect
(法相宗) images in early Goryeo period because Samcheon temple is supposed to be one
of Beopsang sect temple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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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8.11.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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