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9. 1. 9. 15:41ㆍ美學 이야기
옛 그림이 쉬워지는 미술책
산수화에도 유행과 취향이 있다!
동의어 산수화 읽는 법 다른 표기 언어
조선 시대 후기에 활동한 허련이란 화가가 있었다. 그의 그림 솜씨가 매우 뛰어나다는 소문을 듣고 헌종 임금이 직접 허련을 불러 그가 그림 그리는 것을 보고 상을 내리기까지 했다는 일화도 전해진다.
그가 그린 〈죽수계정도〉라는 그림을 보면 흔히 우리가 머릿속에 떠올리는 산수화와 비슷하다. '죽수계정'이란 대나무가 있는 물가의 정자라는 뜻인데 그림 속에는 멀리 야트막한 산이 보이고 강도 있다. 가운데에는 나무 몇 그루 사이에 정자가 그려져 있다.
〈조춘도〉와 한번 비교해 보면 두 그림은 누가 보아도 크게 다르다. 〈조춘도〉는 높고 웅장한 산이 그림 전체를 가득 메우고 있었고, 계곡과 강가에는 사람들도 그려져 있다. 한마디로 웅장하면서도 복잡하게 구성된 그림이다.
반면 〈죽수계정도〉는 보이는 그대로 아주 간결하다. 정자 안이나 물가에도 사람의 모습이 전혀 보이지 않는다. 어딘가 쓸쓸한 느낌이 드는 풍경이기도 하다. 언젠가 자신이 직접 가서 살아보고 싶은 생각이 드는 마음의 고향을 그리는 게 산수화라고 했는데, 어째서 이렇게 큰 차이가 있을까 의문이 든다.
이것은 두 그림 사이에 약 800년이란 세월의 격차가 있기 때문이다. 세월이 흐르면 많은 것이 변하는데 산수화도 마찬가지다. 시대에 따라 산수화를 그리고 감상하던 사람들이 품은 마음속 고향의 모습이 바뀐 것이다. 그러면서 유행하는 산수화도 달라진 것이다. 산수화는 눈에 보이는 것을 그대로 그리는 그림이 아니고, 보는 사람 또는 감상하는 사람의 느낌이나 생각에 따라 크게 달라지는 그림이다.
실제로 이런 일이 있기도 했다. 〈조춘도〉를 그린 곽희는 살아 있을 때에 최고의 궁중 화가 대접을 받았다. 그런데 그가 죽은 뒤 황제가 바뀌자 그의 그림은 궁중에서 모두 떼어져 버렸다. 심한 경우에는 그의 그림이 그려진 비단을 청소용으로 쓰기까지 했다. 유행이란 이렇게 냉정한 것이기도 하다.
곽희의 그림 이후에 유행한 그림은 어떤가? 곽희와 마찬가지로 중국의 궁중 화가였던 마원이란 화가가 그린 〈춘경산행도〉를 보면 알 수 있다. 이 그림의 제목은 봄날에 산길을 산책한다는 뜻이다. 그림을 보면 〈조춘도〉와 달리 비단의 반쪽에만 그림이 그려져 있고 나머지 반쪽은 휑하다. 나무와 도사 그리고 거문고를 들고 따라가는 소년이 왼쪽 면에만 그려진 것이다. 반대쪽엔 텅 빈 하늘을 나는 작은 새 한 마리만 있을 뿐이다. 이렇게 비어 있는 곳을 흔히 옛 그림에서 여백이라고 한다. 보는 사람이 스스로 상상하는 공간이다. 이런 그림이 그려지게 된 것은 여백이 있는 그림을 멋진 그림, 잘 그린 그림이라고 생각하는 유행이 시작됐기 때문이다.
하지만 이 그림 역시 유행이 지나면서 세월과 함께 흘러가 버렸다. 이어서 등장한 유행은 강한 인상을 주는 그림풍이다. 대표적인 그림 중에 하나로, 마원보다 300년쯤 뒤에 태어난 장로라는 화가가 그린 〈어부도〉가 있다.
장로가 그린 〈어부도〉를 보면 '오, 이 남자 박력 있는데?' 싶을 것이다. 인상을 찡그린 어부가 강물에 막 그물을 던지려는 순간을 그렸다. 뒤쪽에는 아들로 보이는 소년이 등나무 넝쿨이 어부의 머리에 걸리는 것을 장대로 막아 주고 있다. 오른쪽 절벽은 온통 먹으로 잔뜩 발라 놓았다. 또 앞쪽 바위도 새까맣다. 어망을 던지는 어부의 옷을 그린 윤곽은 거칠고 짙다. 장로는 그림을 팔아서 생계를 유지했던 직업 화가였기에 그림을 팔기 위해서는 남의 눈에 잘 띄게 그려야 했다. 그래서 먹을 짙게 써서 강한 인상을 풍기게 한 것이다.
당시는 사회가 발전해서 유식한 사람들뿐 아니라 일반 서민도 그림을 사서 많이 즐겼다. 서민에게는 부드럽고 은은한 것보다는 짙고 강한 것이 더 좋아 보이게 마련이었다. 그래서 당시의 점잖은 학자와 문인들, 특히 그림을 잘 그렸던 문인 화가들은 이렇게 남의 눈길만 끌려고 하는 그림을 매우 싫어했다. 자신들이 소중하게 여기는 '마음속의 이상'을 함부로 다룬다고 이러한 강한 그림을 못마땅하게 여겼다.
다음으로 볼 그림은 마원과 장로의 중간 시대쯤에 살았던 예찬이란 문인 화가의 〈용슬재도〉란 그림이다. 용슬재란, 서재 이름인데 무릎이 들어갈 만한 작은 방이란 뜻이다. 욕심 없이 살려는 마음을 드러내 보이려고 그림 제목을 그렇게 붙였다.
그런데 그림을 보면 처음 허련의 그림과 매우 닮았다는 것을 알 수 있다. 넓은 물을 사이에 두고 멀리는 야트막한 산이 이어지고, 강가 언덕에 정자가 한 채 있는 것까지 비슷하다. 그가 살았던 시대는 몽골이 중국을 지배하던 때다. 몽골 민족은 자신들이 정복한 중국 민족을 탄압했는데, 큰 부자였던 예찬은 몽골에게 많이 시달렸다고 한다.
그래서 그는 늙어서는 자신이 가지고 있던 재산을 주변 사람들에게 몽땅 나누어 주고 배를 타고 각지를 떠돌면서 생활했다고 전해진다. 그의 그림에 사람이 등장하지 않는 것은 어딜 가나 보이는 원나라 사람들이 미워서였다는 뒷이야기도 있다.
예찬이 그린 〈용슬재도〉는 장로의 시대에 〈어부도〉 같은 그림을 못마땅하게 여긴 당시 문인들이 더 수준 높다고 평가한 그림이었다. 장로 이전의 화풍을 더 높이 평가함으로써 다시 간결한 화풍이 유행하게 된 셈이다. 더욱이 이런 분위기의 그림은 그림 교과서인 화보집 속에 수록되면서 널리 퍼져 나갔다.
다시 맨 처음 허련의 그림으로 돌아가 보면 그의 산수화는 화보집에 담긴 예찬 그림의 영향을 받아 그려진 그림이라고 할 수 있다. 허련이 활동한 조선 시대 후기의 사람들은 이 그림을 보면서 많은 것을 동시에 떠올렸다. 즉, 장로의 그림에서부터 시작해 그것을 싫어한 당시의 문인 화가들, 또 예찬의 그림과 그 그림이 실린 화보집 등을 떠올리면서 허련의 그림을 감상했다. 옛 그림은 이처럼 그림의 역사적인 흐름이나 유행을 알고 나면 훨씬 더 재미있게 감상할 수 있다.
직업 화가의 그림 스타일
장로는 명나라 말기에 활동한 화가로 궁중 화가가 아닌 거리에서 그림을 팔아 생활한 직업 화가였다. 그가 활동한 무렵엔 그림에 대한 관심이 크게 늘어나 그림을 사려는 사람도 많았다. 팔기 위한 그림이라는 점에서 장로의 그림에는 몇 가지 특징이 있다. 우선은 짙은 먹을 사용해 그림을 그렸다. 장로의 〈어부도〉만 보아도 앞쪽의 바위와 절벽이 온통 먹색이다. 또 사람을 가까이에서 보듯이 크게 그렸다. 이러한 방식은 전에는 볼 수 없던 직업 화가들만의 새로운 스타일이었고, 감상자에게 강한 인상을 남겼다. 당시 이렇게 그림을 그리는 직업 화가들 중에는 절강성 출신이 많았다고 해서 그들의 그림 스타일을 '절파 화풍'이라고 불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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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
출처
옛 그림은 배경지식이 전혀 없으면 무엇을 그렸는지 알기 쉽지 않다. 그림이 왜 그려졌는지, 누가 그렸는지, 무엇을 그렸는지를 이야기하며 옛 그림을 감상하기 위한 안내 지도를 차근차근 그려 나가는, 청소년을 위한 한국 미술 입문서이다.접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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산수화에도 유행과 취향이 있다! (산수화 읽는 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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