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크랩] 보물 796호~800호

2019. 1. 14. 12:13美學 이야기

탑신의 꽃무늬

운주사 구층석탑 보물796호

소 재 지; 전남 화순군 도암면 대초리 22

운주사로 들어가는 남쪽 골짜기의 첫 입구에 세워져 있는 탑으로, 커다란 바윗돌로 바닥돌과 아래층 기단을 삼고 그 위로 윗층 기단을 쌓은 후 9층에 이르는 탑신(塔身)을 세운 모습이다. 윗층 기단의 가운데돌은 4장의 널돌로 짜였으며, 네 모서리마다 기둥모양을 새긴 후 다시 면 가운데에 기둥모양을 굵게 새겨 면을 둘로 나누어 놓았다. 또한 기단의 맨윗돌은 탑신의 1층 지붕돌로 대신하고 있는 점이 특이한데, 운주사의 모든 탑이 이러하여 고려시대로 오면서 나타난 특징으로 보인다. 탑신의 각 몸돌에는 면마다 2중으로 마름모꼴을 새기고, 그 안에 꽃무늬를 두었는데, 이러한 수법은 운주사의 석탑에서만 볼 수 있다. 각 지붕돌은 밑면이 약간 치켜올려져 있고, 여러 겹의 빗살무늬가 조각되어 있다. 꼭대기에는 원기둥모양으로 다듬은 돌과 보륜(寶輪:바퀴모양의 장식)이 올려져 머리장식을 이루고 있다. 탑의 면이 사각형인 것은 고려시대의 일반적인 탑들과 같으나, 지붕돌 밑면에 받침을 생략한 모습이나 각 면에 새긴 장식이 일반형에서 벗어난 모습들은 보기 드문 예이다. 이는 지방적인 색채가 뚜렷했던 고려시대의 특징을 잘 나타낸 것으로 보인다.

 

운주사 석조불감 보물797호

소 재 지; 전남 화순군 도암면 대초리 22

불감이란 불상을 모시기 위해 만든 집이나 방을 뜻하는 것으로, 일반적인 건축물보다는 그 규모가 작다. 다탑봉(多塔峰) 골짜기에 자리한 운주사 석조불감은 건물 밖에 만들어진 감실의 대표적 예이다. 그 이름에서도 알 수 있듯이 산의 정상에 이르는 동안 여러 기의 석탑과 불상을 볼 수 있다. 감실은 직사각형 모양으로, 양쪽 벽을 판돌로 막아두고 앞뒤를 통하게 하였다. 그 위는 목조 건축의 모양을 본떠 옆에서 보아 여덟팔(八)자모양인 팔작지붕처럼 다듬은 돌을 얹어놓았다. 감실 안에는 2구의 불상이 모셔져 있는데, 특이하게도 등이 서로 맞붙은 모습으로 흔히 볼 수 없는 예이다. 불상을 새긴 수법은 그리 정교하지 않지만, 고려시대에 들어 나타난 지방적인 특징이 잘 묻어나온다. 이처럼 거대한 석조불감을 만든 유례를 우리나라에서는 찾아볼 수 없고, 등을 서로 맞댄 감실 안의 두 불상 역시 특이한 형식으로 매우 귀중한 자료적 가치를 지니고 있다.

 

운주사 원형다층석탑 보물798호

소 재 지; 전남 화순군 도암면 대초리 22

운주사에는 통일신라 후기의 승려 도선국사가 우리나라의 지형을 배로 보아배 한복판에 해당하는 호남 땅이 영남 땅보다 산이 적어 배가 한쪽으로 기울 것을 염려하여 1000개의 불상과 1000개의 탑을 하루낮 하루밤 사이에 도력으로 만들었다는 전설이 내려오고 있다. 현재 절에는 탑 18기, 불상 70구가 남아 있는데, 석조불감(보물 제797호) 앞에 자리잡은 이 탑도 그 가운데 하나이다. 탑의 구성이나 전체적인 형태에서 일반적인 석탑의 형태를 따르지 않은 특이한 모양의 석탑으로 고려 석탑의 특징을 잘 나타내고 있다.
기단(基壇)은 2단의 둥근 바닥돌에 높직한 10각의 돌을 짜올리고 그 위로 16장의 연꽃잎을 장식한 돌을 올려 마무리하였다. 탑신(塔身)은 몸돌과 지붕돌이 모두 원형이고, 층마다 몸돌 측면에 2줄의 선이 돌려져 있다. 현재 남아 있는 것은 6층 뿐이나 원래는 더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탑의 구성이나 전체적인 조형면에 있어 우리나라에서는 그 예가 드문 모습으로, 고려시대에 이르러 각 지방에서 나타난 특이한 양식이라 하겠다. 기단의 맨윗돌이 윗면이 편평하고 옆면이 둥근데 비해, 탑신의 지붕돌은 정반대로 아래가 편평하고 윗면이 둥글다. 이는 상하의 조화와 안정감을 꾀하려 한 의도로 추측된다.

 

탑신 부조불

마곡사 오층석탑 보물799호

소 재 지; 충남 공주시 사곡면 운암리 567 마곡사

마곡사는 통일신라시대에 창건되었으며, 구한말에는 독립운동가 김구와도 인연이 깊었던 사찰이다. 김구는 명성황후 시해에 가담했던 일본인 장교를 죽인 후 인천형무소에서 옥살이를 하다가 탈옥하여 이 절에 숨어서 승려로 지냈는데, 지금도 대광보전 앞쪽에는 김구가 심었다는 향나무가 자라고 있다. 절마당에 우뚝 서 있는 이 탑은 탑 전체의 무게를 받쳐주는 기단(基壇)을 2단으로 쌓고, 그 위로 5층의 탑신(塔身)을 올린 후 머리장식을 올린 모습이다. 탑신의 몸돌에는 부처, 보살 등을 조각해 놓았고, 지붕돌은 네 귀퉁이마다 풍경을 달았던 흔적이 보이는데, 현재는 5층 지붕돌에만 1개의 풍경이 남아 있다. 청동으로 만들어진 꼭대기의 머리장식은 이 탑에서 가장 눈에 띄는 부분으로, 중국 원나라의 라마탑과 그 모습이 비슷하다. 길쭉한 감이 있어 안정감은 적으나 당당한 풍채로 버티고 서있다. 만들어진 시기는 머리장식의 독특한 모습으로 보아 원나라의 영향을 받았던 고려 후기 즈음으로 여겨진다. 즉 고려 후기 당시 원나라와의 문화 교류가 활발히 이루어지면서 라마교 계통의 문화도 고려에 들어오게 되는데 이 탑은 그 문화의 한 예라고 할 수 있다. 임진왜란을 겪으면서 탑 안의 보물들을 거의 도난당하였으나, 1972년 해체하여 수리하는 과정에서 동으로 만든 향로와 문고리가 발견되었다.

 

마곡사 영산전 보물800호

소 재 지; 충남 공주시 사곡면 운암리 567 마곡사

마곡사는 신라 선덕여왕 9년(640) 자장율사가 세웠다는 설과 신라의 승려 무선이 당나라에서 돌아와 세웠다는 두 가지 설이 전한다. 신라말부터 고려 전기까지 폐사되었던 절로 고려 명종 2년(1172) 보조국사가 절을 다시 세웠으나 임진왜란 뒤 60년 동안 다시 폐사되었다. 훗날 조선 효종 2년(1651)에 각순대사가 대웅전·영산전·대적광전 등을 고쳐 지었다고 한다. 영산전은 석가모니불과 일대기를 담은 팔상도를 모신 법당을 가리키는데 이 건물은 천불(千佛)을 모시고 있어 천불전이라고도 부른다. 조선시대 각순대사가 절을 다시 일으키면서(1651) 고쳐 지은 것으로 마곡사에서 가장 오래된 건물이며 해탈문 서쪽에 자리잡고 있다. 규모는 앞면 5칸·옆면 3칸이고 지붕은 옆면에서 볼 때 사람 인(人)자 모양을 한 맞배지붕이다. 지붕 처마를 받치기 위해 기둥 위부분에 장식하여 짜은 구조가 기둥 위에만 있는 주심포 양식이다. 건물 앞쪽에 걸린 현판은 세조의 글씨라고 하며 안쪽은 천장 속을 가리고 있는 우물 정(井)자 모양의 천장으로 꾸몄다.

출처 : 전촌42회
글쓴이 : CJD111 원글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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