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9. 1. 14. 12:17ㆍ美學 이야기
창조신 복희와 여와
복희여와도
투르판 아스타나
마본채색, 높이 189cm 폭 79cm 7세기
투르판 아스타나(阿斯塔那)의 묘실 천정에 부착되어 있었던 복희여와도이다. 복희여와도는 이미 전한대(前漢代) 석실묘(石室墓)의 화상석(畵像石)에도 나타나는 매우 중국적인 모티프이지만, 이와 같이 독립된 화면에 복희여와도를 인물화로 구성한 예는 중국 내륙에서도 아직 출토된 예가 없다.
이는 천지창조의 설화를 표현한 것으로 오른쪽의 남신(男神) 복희는 왼손에 측량을 위한 자(曲尺)를 들고 있고 오른손으로는 묵통을 들고 있으며, 왼쪽의 여와는 오른손으로 컴퍼스 또는 가위를 들고 있다. 둘은 어깨를 껴안고 하나의 치마를 입고 있으며 하반신은 서로 몸을 꼬고 있는 뱀의 모습을 하고 있다. 창조신인 이들이 서로 몸을 꼬고 있는 모습은 이를 통하여 세상의 조화와 만물의 생성이 초래됨을 나타내고 있으며, 이는 궁극적으로 죽은 자의 재생과 풍요를 기원하는 내세관이 반영된 것으로 볼 수 있다. 이러한 모티프는 인도나 서아시아의 메소포타미아에서도 발견되고 있어, 복희여와라는 테마가 남방 문화에 의해 형성되었을 가능성이 크다. 인물의 얼굴이나 손 등을 음영법(陰影法)으로 묘사하여 입체적으로 표현하는 기법은 키질 석굴사원의 벽화를 연상케 하는 것으로, 중앙아시아 회화의 특징이 잘 나타나 있다.
상하의 일(日)·월(月) 내부가 부채살 모양으로 묘사되어 있는 점으로 보아 초기의 작품으로 여겨진다. 투르판이 당(唐)의 지배에 들어가는 서주(西州)시대에는 일월(日月)의 내부가 다리가 셋 달린 까마귀와 두꺼비 등으로 묘사된다.
일월의 내부를 부채살 모양으로 표현하고 그 주위를 연속된 구슬무늬와 같은 형태로 묘사하는 기법은 키질 석굴벽화에서도 흔히 나타나는 것으로, 얼굴 등의 입체표현 양식과 더불어 쿠차 지역과의 문화 교류 흔적을 엿볼 수 있다.
복희여와도를 묘실 천정에 부착해둔 것은 묘실 그 자체를 죽은 자가 맞이하는 내세의 영적 공간으로 여겼기 때문이다. 복희여와도에 묘사되어 있는 북두칠성 역시 영생을 바라는 칠성 신앙이 중앙아시아 지역에서 독특한 방식으로 지역적 변용을 이룬 예라고 볼 수 있다.
아스타나 출토의 복희여와도는 대개 비단에 그려져 있으나, 이 유물은 마(麻)에 그려져 있는 드문 예에 속한다. 시대의 흐름에 따라 복희여와도의 수요가 증가하면서 비단 이외의 재질에 그린 것도 나타난 것으로 추정된다. 검은색, 붉은색, 흰색 등 세 가지색을 이용하여 화면을 구성하고 있으며, 이 점은 같은 묘실 안에 시신 머리맡에 놓여 있는 명기(明器)의 채색 방법과 같다.
복희여와도는 신장(新疆) 위구르자치구박물관, 투르판박물관, 여순박물관, 브리티시박물관, 인도 뉴델리국립박물관, 일본의 류코쿠(龍谷)대학, 텐리(天理)대학 등에도 소장되어 있다. 이 복희여와도는 이제까지 발견된 그 어떤 것보다 색상 대비가 선명하고 세련된 묘사와 균형 잡힌 구성이라는 점에 있어 최고의 것이라고 할 만하다.
<투르판 아스타나> 7세기
98.2*225.5cm
투르판 아스타나에서 출토된 복희여와도(伏羲女?圖)이다. 비단 위에 채색한 것으로 2m가 넘는 대작이다. 원래는 일반적인 복희여와도와 마찬가지로, 위가 넓고 아래가 좁은 형태의 것이었으나, 복희 · 여와의 겨드랑이 밑에서 몸체 부분에 걸쳐 결실되었다. 중국풍 사모와 더불어 당(唐)의 영향이 강하게 미치고 있음을 확인할 수 있다. 얼굴은 안료층의 박락이 심하여 전체적으로 선명하지 않으나, 서역풍의 얼굴 윤곽선이 비교적 뚜렷하게 남아있어, 당의 지배과정에서 나타나는 과도기적 성격의 것임을 알 수 있다. 본관4027의 복희여와도보다는 당의 영향이 강하게 나타나는 후기의 것으로 추정된다.
<투르판 아스타나> 7세기
재질사직(絲織)-견(絹)
크기98.2×225.5cm
투르판 아스타나(阿斯塔那)에서 출토되었다. 국립중앙박물관에 소장되어 있는 세 작품 가운데 훼손 상태가 가장 심하다. 발굴 당시 이미 심하게 파손된 상태로 출토되었기 때문에, 이를 표구하는 과정에서 위치 지정이 잘못된 곳이 적지 않다. 특히 복희의 왼손에 해당하는 부위와 그 손목에서 흘러내리는 옷깃[領巾]의 위치가 잘못되어 있다.
얼굴, 목, 손, 팔, 동체, 치마 부분은 흰색을 바탕에 칠한 후 검은색으로 윤곽선 처리를 하였으며, 몸체의 경우 붉은색을 몇 차례에 걸쳐 덧칠한 흔적이 있어 안료층이 상당히 두텁게 되어 있다. 하체는 흰색, 노란색, 붉은색, 검은색 등 네 가지 색으로 묘사되어 있으며, 주위의 성신(星辰)을 잇는 선을 마지막으로 처리하였다. 상부의 일륜(日輪) 내부는 안료가 완전히 벗겨져 있다.
여와의 경우 눈과 코 부분이 떨어져나가서 전체적인 인상을 파악하기 어려우나, 아래 턱 부분이 발달해 있고 높은 머리를 한 점으로 보아, 중국적인 색채가 농후하다. 머리나 얼굴모양, 옷차림 형태로 보아 시대가 내려오는 것으로 여겨지며, 하부의 월륜에 아직 버드나무나 두꺼비가 묘사되어 있지 않은 점으로 보아, 완전한 중국계의 것은 아니지만 상당히 중국화가 진전된 과도기적 성격의 것이라고 할 수 있다.
'美學 이야기' 카테고리의 다른 글
[스크랩] 조선후기의 가례도감의궤 (0) | 2019.01.14 |
---|---|
[스크랩] 이탈리아 국립동양예술박물관에서 발견된 (0) | 2019.01.14 |
[스크랩] 토우 붙은 항아리 (0) | 2019.01.14 |
[스크랩] 태평성시도 (0) | 2019.01.14 |
[스크랩] 고려사회와 청자 (0) | 2019.01.14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