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크랩] 조선후기의 가례도감의궤

2019. 1. 14. 12:17美學 이야기





조선후기의 가례도감의궤

 



 

국립중앙박물관 상설정시관 조선실에 전시중인 영조정순왕후가례도감의궤

 

 의궤란  조선시대 왕실과 국가의 중요 의식 과정을 기록한 책이다. 주요 의식으로는 국왕의 혼인을 비롯한 세자의 책봉, 왕실의 잔치와 장례, 궁궐의 건축 등이 있으며, 이러한 행사가 끝난 뒤 임시기구인 도감都監을 만들어 편찬하였다. 도감에서는 일방, 이방, 삼방 등이 담당한 업무 내용을 정리하였고 필요한 경우 도설과 반차도班次圖 같은 그림자료를 정리하였다. 정조 대 혜경궁 홍씨의 회갑연을 기록한 《원행을묘정리의궤園行乙卯整理儀軌》나 화성 건설에 관한 기록인 《화성성역의궤華城城役儀軌》등의 일부 의궤는 활자본으로 제작되었다.

 

 

 영조와 정순왕후의 혼례식 절차를 기록한 의궤

 

 




 

조선朝鮮, 영조 35년(1759) 정비인 정성왕후와 사별한 영조英祖(재위 1724~1776)가 삼년상을 마친 1759에 정순왕후貞純王后 김씨金氏(1745~1805)를 계비繼妃로 맞이하는 혼례식 과정을 기록한 의궤이다. 당시 66세였던 혼례식에서 사치를 금하도록 강조하였다. 이미 <국혼정례國婚定例>(1749)와 <상방정례尙房定>(1752)를 편찬하여 궁중 혼사에 있어서 사치와 나비를 막도록 한 것에 따라 교명敎命과 책보冊寶를 올리는 床을 수리해서 사용할 것, 연輦은 수리해서 쓸 것 등 영조가 거듭 사치 방지를 지시한 내용이 의궤를 구성하는 각종 문서에 나타나 있다.




 

 

 

 왕실의 혼례식, 가례

 

왕실의 혼인 과정 중에서 첫 번째로 시행해야 하는 것이 규수를 선택하는 간택(揀擇)이었다. 국가에서는 왕실의 결혼에 앞서 금혼령(禁婚令)을 내리고 결혼의 적령기에 있는 전국의 모든 처녀를 대상으로 ‘처녀 단자’를 올리게 했다. 그러나 실제 처녀 단자를 올리는 응모자는 25~30명 정도에 불과했다. 실제 규수가 내정된 경우가 대부분이었고 경제적, 정치적 부담 등이 따랐기 때문에 기피하는 경향이 컸다. 

 

 


 


왕실에서는 왕비를 간택할 때 세 차례의 심사 과정을 거치는데 대개 1차는 6~10명, 2차에 3명, 3차에서 최종 1명을 선택하였다. 삼간택에 뽑힌 규수는 비빈(妃嬪)의 대례복(大禮服)으로 왕비의 위용을 갖추고 별궁에 모셔졌다. 별궁은 예비 왕비가 미리 왕실의 법도를 배우는 공간이었으며 국왕이 친히 사가(私家)에 가는 부담을 덜어 주었다. 간택을 받아 별궁에서 왕실의 법도를 배운 규수는 왕실 혼인 의식의 기본이 되는 육례(六禮)에 따라 국왕과 혼례식을 치렀다. 
 
 

 혼례식의 절차


납채례(納采禮): 신부의 집에 청혼서 보내기. 간택된 규수에게 혼인의 징표인 교명문(敎命文)과 기러기를 보내고 신부가 이를 받아 들이는 의식 
납징례(納徵禮): 혼인 성립의 징표로 예물(폐물)을 보내는 의식
고기례(告期禮): 혼인 날짜를 알리는 의식 
책비례(冊妃禮): 왕비 또는 세자빈을 책봉하는 의식으로 별궁에서 행해졌다. 
친영례(親迎禮): 신부를 맞이해 오는 의식. 조선 후기에는 왕이 직접 별궁에 있는 왕비를 맞이하러 갔다. 
동뢰연(同牢宴): 혼인 후의 궁중 잔치. 신부를 대궐에 모셔와 함께 절하고 술을 주고 받는 의식 

 

 



 

 

영조는 어의동(현재 종로구 연지동)별궁으로 가서 왕비를 맞이하는 친영례를 치른 후 창경궁 통명전에서 술과 음식을 나누는 동례연을 끝으로 공식적인 가례를 마쳤다. 이 의궤에는 영조가 정순왕후를 데리고 궁으로 가는 친영반차도 50면이 실려 있는데 379필의 말과 1,299명의 인물이 등장한다. 

 

 

 

    참고문헌

     조선왕실 기록문화의 꽃, 의궤 - 김문식, 신병주 지음, 돌베개 

     145년만의 귀환, 외규장각의궤 전시 도록    

 


출처 : 국립중앙박물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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