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9. 1. 17. 16:17ㆍ美學 이야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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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4.07
불교미술의 이해
불교미술에 담긴 역사문화
한국의 불교 전래는 삼국시대 고구려 소수림왕 2년(372)에 중국 전진에서 순도 스님이 불상과 경문을 가지고 들어와 전해진 것이 최초였고 소수림왕 4년에 아도스님이 들어옴에 초문사와 이불란사를 창건하여 주석하게 함으로써 불교 수용이 순조로웠다. 백제는 침류왕 원년(384)에 중국 진(晋)나라에서 인도의 승려 마라난타가 들어오면서 불교 전래가 시작되었다. 전래 후 서울인 한성에 절을 창건하고 10명의 백제 사람을 승려가 되게 하여 역시 불교 수용이 순조로웠던 것이다. 그러나 신라의 경우는 달랐다. 정치, 사상, 신앙 등 여러 가지 사정으로 인하여 삼국 중 가장 늦게 수용되었다. 눌지왕 때(417~457) 고구려에서 묵호자(아도라고도 함)가 낙동강 중류인 일선군(一善郡: 지금의 선산) 모례(毛禮)의 집에 와서 전도하였으나 일반의 박해를 받았으며, 이후 법흥왕 14년(527)에 이차돈의 순교 후 국가적으로 인정을 받았으니 두 나라와는 약 140년의 차이가 난다.
그러나 6세기 중반부터 세 나라의 불교는 급속도로 홍법되고 교세가 확장되었으며, 모든 면에서 많은 변화를 일으켰다.
첫째, 사상적으로 볼 때 불교의 인과응보(因果應報), 윤회전생(輪回轉生)의 사상과 고유한 신교사상(神敎思想)이 융화되어 안심입명(安心立命)의 국민성으로 선도(善導)되어 갔다. 그러므로 누구나 불교를 믿으면 마음이 착해지고 선행을 본분으로 알게 하는 선한 마음이 생활 강령이 되었던 것이다.
둘째, 문물 제도상으로는 당시 유학하는 스님들에 의하여 대륙의 문물제도를 살펴서 좋은 점을 많이 수용하게 된 내용을 알 수 있다.
셋째, 학문적으로 많은 발전을 기하였다. 학문을 연구하는 스님들의 중국 내왕으로 불경을 비롯한 많은 불교서적의 해독과 해석상 한문이 발달되고 따라서 한문학이 크게 성행 발전하게 되었다.
넷째, 미술문화의 큰 변화는 어느 분야에 비교해도 가장 크게 나타났다. 당시 승려들은 문화인의 선구자였으며, 특히 앞선 대륙의 불교미술과 접촉 수입함으로써 불교 교세의 확장에 따르는 조형미술을 크게 발달시키는 원동력이 되었다. 따라서 고대 한국 미술의 주류(主流)로서 불교미술의 확고한 기반을 마련하였던 것이다.
불교의 수용은 불교의 교주(敎主)이신 석가모니 부처님의 진신사리(眞身舍利)를 모시고 부처님의 진영(眞影)과 가르침의 불경(佛經)을 봉납하는 승려에 의하여 이루어지는 것이다. 그렇기에 이에 따르는 탑파(塔婆)·불상(佛像)·사원(寺院, 寺刹) 등 여러가지 종류의 불교미술이 이루어졌다.
불교 수용 이후 사상, 사회, 학문, 정치, 문화 등 많은 변혁을 가지고 왔으나 이 가운데서 가장 큰 변화는 문화적인 면에서 나타났다. 불교가 널리 홍법되면서 불교예술이 크게 발달한 것이다. 여기서「예술」이라고 했을 때 불교 문화의 포괄적인 표현으로도 볼 수 있으므로, 여기서는 불교적인 예술· 문화의 총칭으로 삼고자 한다.
삼국시대 후반 불교가 널리 퍼지면서 사원의 창건에 따르는 건축, 조각, 공예, 회화 등 불교적인 조형미술(造形美術)이 크게 발달하였다. 오늘날 남아 있는 불교적인 유물들을 분야별로 소개하여 세계적인 우수성을 살펴보도록 하겠다.
우선 건축미술은 그 종류와 수량으로 보아 가장 많으므로 수위(首位)에 두어야 하겠다. 건축미술에서는 건축의 재료상 목조건축과 석조건축으로 크게 나눌 수 있다. 오늘에까지 제 자리를 지켜 세계적으로 자랑할 수 있는 목조건축은 경상북도 영주시 부석사의 무량수전과 조사당, 안동시의 봉정사 극락전, 충청남도 예산군의 수덕사 대웅전이 고려시대 건물의 대표이며, 경상남도 합천군의 해인사 장경판고와 창녕군의 관룡사 약사전, 전라남도 강진군의 무위사 극락전, 영암군의 도갑사 해탈문, 순천시의 송광사 국사전과 송광사 하사당, 충청남도 청양군의 장곡사 상대웅전, 경상북도 영천시의 거조사 영산전 등은 조선 시대 초반의 대표적인 건축물이다.
이 목조건축물들은 당시의 특징을 잘 간직하고 있음과 동시에 휘황찬란한 단청(丹靑)은 그 문양과 색조에서 세계 어느 나라에서도 볼 수 없는 불교 목조건축물로써 모두 국보와 보물로 지정 보존되어 있다.
이밖에 조선시대 중·후반의 사원 목조건축이 많으며 대부분 국가문화재로 지정·보존되어 있는데 여기서는 지면 관계상 생략하고자 한다.
석조건축물로 탑파를 첫 번째로 손꼽아야 하겠다. 불교에서는 사찰을 건립하는 목적이 탑을 세우고 불상을 봉안하여 예배하기 위해서였다고 할 수 있다. 탑은 불교의 교주인 석가모니의 진신사리를 봉안하기 위해서 건립했고, 불상은 직접 예배를 올리는 대상이었기 때문이다. 따라서 탑파와 불상은 뛰어난 불교미술로서 한국의 고대미술을 대표한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며, 현재까지 조사된 전국의 탑은 1천여기 정도이다.
이 탑들은 건조 재료에 따라 목탑, 전탑, 모전석 탑, 석탑, 청동탑, 금동탑 등으로 구별할 수 있다. 그런데 목탑은 화재로 모두 소실되어 현재 충청북도 보은군 법주사의 5층 목탑인 팔상전 1동만이 남아 있다. 삼국시대부터 고구려의 청암리사지 목탑, 백제의 군수리사지 목탑, 신라의 황룡사 9층목탑을 비롯하여 통일신라시대와 고려시대를 거쳐 곳곳에 목탑이 건조되었으나 모두 소실되고 정유재란 이후에 세운 팔상전만 남아있는 것이다.
전탑과 모전석탑은 탑을 세우기 전에 전(벽돌)과 모전석(돌을 다듬어 벽돌 모양으로 다듬은 것)을 만들어야 하고, 그 탑재들을 운반하는 일이 진행되어야 하므로 건탑에 지장을 주었다. 따라서 현재 남은 탑이 10기에 불과하다. 청동탑과 금동탑은 공예탑으로 법당 내에 봉안하는 것이므로 크게 발달하지 못하였다.
그러나 한국은 방방곡곡에 가는 곳마다 석탑 건립의 재료인 화강암이 많기에, 화강암을 채석해 쌓아 올려 석탑을 세웠다. 이러한 한국의 여건으로 보아 석탑이 크게 발달할 수 있었으니 인도와 중국을 전탑의 나라, 모전석탑의 나라라 하고 일본을 목탑의 나라라고 할 때 한국은「석탑의 나라」라 일컫는 것이다.
2014.08
불교미술의 이해
삼국시대부터 시작한 석조건축미술과 불교 조각
석조건축미술 가운데 가장 많은 수가 남아있는 석탑건축미술은 삼국시대부터 이루어졌다. 백제의 석탑으로는 전라북도 익산시의 미륵사지 석탑과 충청남도 부여군의 정림사지 5층 석탑이 남아 있고, 신라의 석탑으로는 경주시의 분황사 모전석탑이 있다. 이 석탑들은 모두 7세기 전반기에 건립되어 당시의 석조 건축술의 일면을 잘 알게 한다.
통일신라시대 최초의 석탑은 경주 감은사지 동·서 3층 석탑이다. 이후 경주의 고선사지 3층 석탑, 나원리 5층 석탑, 황복사지 3층 석탑에 이어 불국사 3층 석탑(석가탑)과 경상북도 금릉군의 갈항사지 동·서3층 석탑(758년)에서 전형적인 신라석탑의 모습을 볼 수 있다. 이때의 신라석탑은 2층 기단 위에 탑신석과 옥개석, 정상에 상륜부의 장식이 정연한데, 이와 같은 형태가 곧 한국 석탑의 전형양식으로 성립된 것이다. 이후 9세기에 들면서 신라석탑은 부분적으로 생략화의 경향을 보이며 규모에 있어서도 작아지는 형식을 보인다.
미술의 현상이 절정기에 달했을 때 기발한 특수양식이 나오듯이 통일신라시대에도 8세기 중반 예술의 황금기에 특이한 형태의 석탑이 나타났다. 불국사의 다보탑, 화엄사의 4사자 3층 석탑을 대표로 들 수 있으며, 사자탑의 건조는 고려와 조선시대까지도 그 전통과 계보가 이어졌다.
고려시대의 석탑은 초기에 신라식을 본받더니 중반에는 둔중해지는 고려식의 석탑을 볼 수 있다. 경기도 개풍군의 남계원 7층 석탑, 전라북도 김제군의 금산사 5층 석탑, 강원도 춘천시의 7층 석탑을 대표로 들 수 있다.
조선시대는 비록 배불숭유하의 사회였으나 석탑의 건립이 상당수 이루어졌다. 강원도 양양군의 낙산사 7층 석탑, 경상남도 함양군의 벽송사 3층 석탑 등 일반형 이외에 서울의 원각사 석탑과 경기도 여주군의 신륵사 석탑 같은 특수형도 건조되었다
석조건축미술로 하나의 계보를 이루고 있는 조형물로는 석조부도와 부도비, 석등, 당간과 당간지주, 석교 등 실로 다양하다. 석조부도는 석재로 이루어진 스님의 무덤으로 통일신라 후반인 9세기 중엽에 당나라로부터 도의(道儀)국사가 선종(禪宗)을 들여와 전국에 9산선문의 법통이 이루어지자, 각 산문(山門)에 조사(祖師)스님을 모시기 위해 부도가 건조되었다. 구조가 8각 평면에 기단부, 탑신부, 상륜부가 차례로 놓인 8각 원당형으로, 이 형태가 하나의 기본 양식으로써 고려와 조선시대까지 이어졌다.
고려 말기부터 조선시대에는 건조에 간편한 석종형부도가 크게 유행하였다. 석조부도에는 건축 양식의 특징도 보이지만 각 부재의 조각의 그 내용이 더 주목을 끈다. 최근에 이르러 석조부도를 승탑이라 칭(稱)하는 혹자가 있으나 그것은 큰 잘못으로 「탑」이란 용어는 석가모니 부처님의 진신사리 봉안처의 st?pa가 어원임을 알아야 할 것이다.
석등은 백제시대의 부재들이 남아 있으나 크게 유행한 때는 통일신라시대이다. 법당 앞에 건조하여 실제 법등을 밝혔는데, 형태는 연꽃 문양의 하대석 위에 긴 간주가 세워지고 그 위에 연꽃 문양의 상대석이 놓이며 화사석과 상륜석이 차례로 장식되는 양식으로 평면 8각이 기본이다. 이후 고려와 조선시대에도 건조되나 부분적인 간략화를 볼 수 있다.
당간과 당간지주는 사찰에서 야외 법회를 열 때 기식(寺旗) 혹은 괘불을 걸 수 있도록 세운 것으로, 통일신라 이후 각 시대에 따라 간략화의 경향을 보인다. 석교는 통일신라시대 불국사의 청운교·백운교와 연화교·칠보교를 비롯하여 시대에 따른 사찰 주변에 이러한 홍예의 석교가 건조되어 있어 그 당시의 석조건축미술을 엿볼 수 있다.
불교 조각은 주로 불상을 중심한 주위 권속들과 관계 조각들을 말한다. 한국의 불상 조각은 1~2세기경에 멀리「간다라」지방에서 조상한 양식이 중국을 통하여 삼국시대에 들어왔다. 불상은 조성된 재료에 의하여 금제불, 금동불, 청동불, 철불, 석불, 마애불, 소조불, 토불, 지불 등으로 나누며 형태에 따라서는 입불, 좌불, 반가상, 반가사유상, 열반상 등으로 분류하는데 한국에는 이와 같은 모든 종류의 불상이 전해지고 있다.
처음 불상이 조성될 때는 소형(小形)으로 제작되었기 때문에, 삼국시 대 불상으로는 작은 형태의 금동불이 많으며 대체적으로 삼존불의 형식을 취하고 있다. 통일신라시대에 이르러서도 금동불이 많이 조성되었으나 그 양식의 시원은 삼국시대에 두고 있다.
석불은 백제시대의 마애불로 충청남도 태안군의 태안 마애삼존불(태 을암 마애삼존불)과 서산시의 서산 마애삼존불(인바우 마애삼존불) 이 유명하다. 석불은 원각불(圓刻佛)을 말함인데 통일신라시대에 이르러 많이 조성되었고, 그 절정은 경주 토함산의 석굴암(石窟庵) 본존 아미타여래좌상과 그 주위의 보살, 제자, 권속들 조각이라 하겠다. 이 밖에 경주의 남산을 살펴보면 골짜기의 바위마다 마애불상이 조각되고 조망이 좋은 자리에 석탑과 석불이 자리하고 있다. 이러한 점에서 경주 남산을 불교미술의 보고(寶庫)라 하여 「慶州南山의 佛蹟」이라는 책까지 간행하였다. 이밖에 각 지방에 원각불과 마애불상들이 조각되었는데 경상북도의 군위군 팔공산 삼존석굴 불·보살상, 봉화군 북지리 마애여래좌상 등을 손꼽을 수 있다.
금동불로는 불국사의 아미타 여래좌상과 비로자나불좌상, 경주의 백율사 약사여래입상 과 전(傳) 남산(南山) 삼불사 발견 금동반가사유상(국보 제 83호) 등이 대표적이다. 신라 하대에는 철불이 조성되었는데 전라남도 보림사 철불좌상, 전라북도 실상사 철불좌상, 강원도 도피안사 철불좌상 등이 유명하다.
이후 고려시대에는 통일신라 시대와 같이 불교를 크게 옹호하였으므로 각처에 불교적인 조각이 크게 이루어졌다. 충청남도 논산시의 개태사 삼존석불, 서울 북한산 승가사 마애불좌상, 경기도 하남시 하사창동 철조석가여래좌상 등은 널리 알려진 불상들이다. 이 시대의 성보로 조성된 불상 조각으로 불감(佛龕)이 제작되어 소형의 삼존 불상을 봉안하며 그 주위 벽면에 많은 불·보살상과 권속들을 배치 조각하였다. 이들은 고려 후반기가 시발인데 이후 조선시대까지의 실물들을 엿볼 수 있어 당시의 불교 조각상들로 귀중하다 하겠다.
조선시대에 이르러 불교가 위축되는 가운데서도 민간신앙으로 구복, 구명적인 차원에서 법등이 이어졌다. 특히 불교를 옹호한 군왕과 조정이 있어 사찰의 보수나 탑의 수리 등 불사가 진행되었으며 이에 따라 국왕·왕족들의 만수무강을 기원하는 불교 조각도 함께 이루어졌다. 원각사의 창건과 석탑·석비의 건립, 경기도 수종사 5층 석탑과 불상군의 안치, 전라북도 송광사 삼존상 조성, 충청남도 부여군 무량사 삼존상 조성, 경상북도 금릉군 청암사의 불사와 불상 등이 그 좋은 예이다. 조선시대에 토불, 소조불이 중형 혹은 대형으로 많이 조성되었는데, 이것은 당시의 정세 하에서 선대와 같은 불상의 조성 자료를 구하기 어려웠던 사정에서 유행하였던 것으로 생각된다.
2014. 09.
다양한 불교 공예와 불화
불교적인 공예기술은 삼국시대에 불교가 수용된 이후 각국에서 발달해 오늘날 많은 공예유물을 남기고 있다. 이 가운데 불교에서 가장 신성시하는 부처님의 사리(舍利)를 모시어 「탑파」 속의 사리공에 봉안할 때 사용한 용기들은 당시의 공예술로는 제일 뛰어난 솜씨였다. 유리병이나 금동사리병에 사리를 모시고 이에 따르는 내·외함과 봉납물 등 각종 사리장엄(舍利장치)을 「탑파」 안에 봉장함으로써 불가 제일의 신앙과 예배물로 탑파를 건조했기 때문이다. 전북 익산시 소재 미륵사지 석탑 내 봉안의 사리장엄은 백제의 대표적인 사리장엄으로 뛰어난 당시의 금속공예술을 엿볼 수 있다. 이와 더불어 경북 경주시 소재 분황사 석탑 내 발견 사리장엄과 황룡사 9층 목탑 심초석 내 발견 사리장엄구는 고신라와 통일신라의 대표적인 사리장엄으로 역시 당시의 뛰어난 공예술을 살필 수 있다.
통일신라시대에 이르러 불교는 더욱 번영해 사원의 창건이 번성하였으며 탑파의 건립 또한 서둘렀고 많은 사리장엄이 제작되었다. 경주시의 감은사 동·서3층 석탑 내의 사리장엄, 불국사 석가탑 내의 사리장엄, 경북 칠곡군 소재의 송림사 5층 전탑 내의 사리장엄들은 당시 최고 수준의 공예술로 높이 평가받고 있다.
이후 고려와 조선시대의 사리장엄들도 그때의 대표적인 귀중한 공예 유물들이기는 하나, 불교의 성쇠와 시대적인 여러 배경에 따라 다소 위축된 기법으로 여겨진다.
익산 미륵사지 석탑 사리장엄 금동제사리외호
사리장엄을 통해 우리는 당시 예배, 혹은 설법, 포교 등 각종 의식과 행사에 따르는 불구(佛具)들의 공예 기술 또한 엿볼 수 있다. 불구라 함은 불교와 관계된 모든 기구들을 종합적으로 일컫는 용어인데 그 내용은 실로 다양하다. 우선 사찰만의 성보인 「불구사물(佛具四物)」을 들자면 온 세상의 움직이는 모든 생명체들을 고해(苦海)에서 구하여 극락으로 이끌어주는 제도(濟度)의 역할로 네 가지 불구 유물을 들 수 있다.
즉 사람들을 제도하기 위하여 타종하는 「범종」, 네발 달린 짐승들을 제도하기 위하여 치는 「법고(북)」, 하늘의 새들을 제도하기 위하여 울리는 「운판」, 물속을 헤엄쳐 다니는 고기들을 제도하기 위하여 두드리는 「목어」의 네 가지 불구이다. 그러므로 어떠한 사찰이던 대체로 법당 가까운 앞쪽에 범종각을 건립하고 이곳에 사물(四物)을 안치하여 각종 의식에 따라 사물을 울리게 된다. 사물 중 한 가지라도 없으면 모두 갖추려고 노력하며 사찰의 어느 성보에도 못지 않는 귀중물로 보존하고 있다.
특히 범종은 통일신라이래 조선시대에 이르기까지 한국을 대표하는 전통적인 금속공예로 각 시대에 따라 특징적인 면을 보이고 있다. 신라의 성덕대왕신종은 표면의 비천상과 당좌 상·하대 문양 등 각종 아름다운 조각과 명문, 거대한 크기로 보아 세계 제일의 범종으로 평가되고 있다. 이후 고려와 조선시대에 주조한 범종에도 비천상과 보살상 등 각종 문양이 장식되고 대부분 조성연대와 소속 사원 등의 명문이 있으므로 연대를 알 수 있어 더욱 귀중한 자료라 하겠다.
부처님 앞에 나아가 예불을 드리거나 공양을 올리는 등 모든 의식·행사를 행할 때 반드시 향(香)을 피우는데 여기에 안치하는 향로(香爐)가 있다. 향로는 『삼국유사』의 기록으로 일찍부터 있었음을 알 수 있으나 현재는 고려시대의 은입사(銀入絲) 향로가 널리 알려져 있다. 즉 고구려의 고분 벽화를 비롯하여 여 러 가지 종류의 조각에서 삼국시대로부터 통일신라시대에 이르는 향로의 형태를 볼 수 있으나 「향로」로써는 충남 부여 능산리 출토 백제 대향로 이외에는 실물이 보이지 않는다는 것이다.
불가에서 금속공예의 기술을 보이고 있는 불구로 금고(金鼓, 禁口, 飯子)가 있다. 이 불구는 금속으로 제작한 「북」이라는 뜻이다. 금고는 사찰에서 걸어놓고 두들겨 소리를 내는 용도로 쓰이고 있는데 특히 식사 시간을 알리는 불구로 이 금고 소리가 절 내에 울리면 모든 스님은 공양간에 모이게 된다. 그래서 이 금고를 「반자」라고도 칭하는 것이다. 형태는 「바리」같이 원형의 평면인데 한쪽은 막히고 한쪽만 터져 있어서 막힌 쪽을 방망이로 치게 되어 있다. 터진 쪽 주변에는 넓은 전이 달려있고 측면 한쪽에 2~3개의 고리가 있어 매달 수 있다. 크기는 대체로 직경이 40cm 내·외이고 널찍한 표면에는 문양이 조각되었으며 사찰명, 기년, 축원, 중량 등의 명문이 각자되어 있기도 하다. 형식은 간소하나 때로는 우수하고 아름다운 장식 문양이 있는 금고도 보이며, 명문으로 연대를 알 수 있음과 동시에 금석문 자료로서도 주목된다.
금속제 탑으로 청동탑이나 금동탑 등이 있으나 대체로 높이 1m 미만의 소형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기단, 계단, 난간, 옥개 상면에 기와골, 처마에 풍탁 등 목탑 양식의 각부를 모방하고 있으므로 당시의 건축 연구에 귀중한 자료가 되고 있다.
불화(佛畵)는 불교 회화로 탱화, 불탱(幀畵, 佛幀)이라 칭하기도 한다. 불교가 비롯되면서 부처님의 용모를 그림으로 나타냈으며 이후 조각으로 조성하였을 것이라는 통설이 있음에 비추어 우리나라에도 불교 전래 후부터 불교적인 회화가 그려졌을 것으로 추측되나 삼국시대의 불화는 남아 있는 것이 없다. 다만 삼국시대 고분 벽화에서 스님의 모습, 연꽃 문양 등 불교적인 그림을 살필 수 있고, 통일신라시대의 불교 그림으로 「백지묵서대방광불화엄경(국보 제196호)」의 변상도가 유일하다. 이후 고려, 조선시대에 이르러는 상당수의 불화를 볼수 있으며 특히 고려시대의 「수월관음도」가 유명하다.
불화는 주제에 따라 분류할 수 있으니 일반적으로 다음과 같은 내용이다.
첫째, 영산회상도(靈山會相圖)를 비롯하여 팔상도, 아미타불화(탱), 비로자나불탱, 약사여래불탱, 오십삼불탱, 천불탱, 관음보살탱, 나한탱, 조사도(祖師圖), 신중탱, 칠성탱, 지장보살탱, 산신탱, 시왕탱(十王幀) 등 많은 종류가 있어 그 불화의 주인공을 중심한 주제에 따라 명칭을 붙이고 있다. 예컨대 석가모니불, 아미타불, 관음보살 등 각기 독존을 모신 불화는 석가탱, 아미타탱, 관음탱이라 일컬으며 삼존으로 모시는 경우에는 석가삼존탱, 아미타삼존탱이라 칭한다는 것이다.
불교 회화를 살펴보면 어느 불교미술보다도 다양하고 다채롭다고 하겠다. 그것은 반드시 색채를 칠하되 색의 종류가 많으며 색칠의 농도가 일정하지 않아 예술의 경지에 심취하는 모습을 불화 제작 현지에서 곧 알 수 있다.
오늘날 각 사찰을 방문해 법당에 들면 어떠한 곳이나 그 법당에 따른 대형 불화가 본존불의 후불탱을 비롯하여 주벽에 배치되어 있고 모두 하단부에 화기(畵記)를 묵기하였으므로 조성연대와 소속 사원, 화주, 시주, 화공들의 존재를 알 수 있어 회화사 연구에도 귀중한 자료가 되고 있다.
글˚정영호 (단국대학교 석좌교수) -
출처 :
한국문화재재단 - Korea Cultural Heritage Foundation월간문화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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