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책과 삶]시서화에 능통했던 선인들… 서얼 화가 이인상은 왜 ‘검선도’를 그렸을까

2019. 1. 17. 17:36美學 이야기



[책과 삶]시서화에 능통했던 선인들… 서얼 화가 이인상은 왜 ‘검선도’를 그렸을까 

조운찬 문화에디터 sidol@kyunghyang.com

입력 : 2013.11.15 19:15:51 수정 : 2013.11.15 23:21:26


[책과 삶]시서화에 능통했던 선인들… 서얼 화가 이인상은 왜 ‘검선도’를 그렸을까











▲ 한국학, 그림을 그리다…고연희·김동준·정민 외 지음 | 태학사 | 552쪽 3만5000원

   공자의 어록인 <논어>의 진수는 공자의 독백이 아닌 제자들과의 대화이다. ‘팔일’편에 나오는 아래 글이 그 실례다. 

   자하가 공자에게 묻는다. “선생님, ‘살포시 웃으니 보조개가 예쁘고, 눈동자 선명한 눈이 아름답구나. 흰 비단으로 채색을 하는 것 같구나’라는 <시경>의 구절은 무엇을 말합니까.” 공자“흰 비단 바탕을 마련한 뒤 그 위에 그림을 그린다는 뜻이다”라고 대답했다. 그러나 자하가 스승의 말뜻을 알아차리고 곧바로 “예절보다는 인격을 먼저 갖추라는 얘기군요”라고 말했다. 그제사 공자는 빙그레 웃으며 “비로소 자하와 시를 얘기할 수 있겠구나”라고 말했다. 

   짧은 대화이지만, 그림 그리는 순서를 얘기하며 삶의 철학을 끄집어내고, 학문의 자세까지 거론하고 있다. 문학, 예술, 윤리학, 공부론이 망라돼 있다. 요즘 식으로 이야기하면 학문의 통섭, 융합, 지행합일의 문제가 다 들어있는 셈이다. 

이처럼 옛날의 공부는 구획되거나 분리돼 있지 않고 한 덩어리였다. 그래서 문·사·철을 꿰는 학자가 나오고, 시·서·화에 능통한 삼절이 탄생할 수 있었다. 소동파가 말한 ‘시 속에 그림이 있고 그림 속에 시가 있다(詩中有畵 畵中有詩)’는 말은 당나라 시인 왕유에게만 해당하지 않는다. 조선시대 화가들도 그림을 그리고 여백에 시나 문장을 쓰면서 시와 그림의 일체를 꾀했다. 겸재 정선의 그림과 사천 이병연의 글이 어우러진 <경교명승첩> ‘시화상간첩(詩畵相看帖)’이라고 부르는 것은 이런 이유에서다. 

   인문학자 32명이 쓴 <한국학, 그림을 그리다>는 과거 통합의 전통이 오늘날 학문 연구와 글쓰기에서 어떻게 구현, 계승되고 있는지를 잘 보여준다. 책은 우리 옛 그림 읽기의 글 모음집이다. 그렇다고 엄밀한 의미의 미술평론은 아니다. 필자 가운데 동양회화사나 한국미술사 전공자가 더러 있으나 역사, 한문학, 문헌학 연구자가 대부분이다. 그만큼 그림과 문화를 읽어내는 시각과 깊이가 남다르다. 

   맨 처음에 나오는 사도세자 ‘개 그림’에 대한 글을 보자. 필자(정병설 서울대 교수)는 국문학자이자 사도세자 연구의 권위자답게 그림에서 왕자의 아픔과 절규, 왕실의 애환 등을 읽어낸다. 필자는 “(그림 속의) 큰 개를 향해 반갑게 달려가는 작은 개와 무덤덤한 큰 개는 사도세자와 영조의 관계를 표현한 것처럼 보인다”고 말한다. 나아가 필자는 ‘동궐도’와 같은 그림이나 <승정원일기> 등의 문헌을 통해 궁궐에서 개나 고양이를 길렀으며 사도세자가 애완견을 데리고 있었을 가능성이 충분하다고 결론짓는다. 

   김홍도‘소림명월도’(보물 제782호)는 이파리가 져 성긴 나무숲에 보름달이 떠오르는 모습을 그린 작품이다. 그러나 경학 연구자인 필자(함영대 고려대 연구교수)에게 이 그림은 풍경화가 아니라 풍경에 의탁해 화가의 정취를 그린 ‘심화(心畵)’이다. 필자는 송나라 진덕수<심경>-명대 정민정<심경부주>-이황<성학십도>-이이<인심도심도>로 이어지는 유학자들의 마음 공부의 전통을 설명하며 김홍도 역시 마음을 ‘소림명월도’에 담아냈을 것이라고 말한다.

   조선 후기 이인상의 그림‘서얼화’의 맥락으로 읽어내는 것은 신분사를 통해 그림을 해석하는 경우다. 필자(장진성 서울대 교수)는 이인상의 ‘검선도’가 세상에 쓰이지 못한 서얼 화가의 비애를 그린 서얼화라고 말한다. 그러면서 필자는 혹한 속에서 눈을 뒤집어쓴 채 버티고 있는 노송을 그린 이인상의 또 다른 작품 ‘설송도’ 역시 서얼이 맞이하는 죽음을 빗댄 ‘서얼화’라고 풀이한다.


이인상의 ‘검선도’. 불의에 맞서려는 서얼 화가의 결연한 의지가 투영된 ‘서얼화’이다. | 국립중앙박물관 소장


이인상의 ‘검선도’. 불의에 맞서려는 서얼 화가의 결연한 의지가 투영된 ‘서얼화’이다.
 | 국립중앙박물관 소장 



  

    ‘화중유시’라고 하지만 그림과 시가 부조화를 이루는 경우가 종종 있다. ‘송시열 초상’(국보 제239호)에 보이는 송시열은 우람한 풍채에 당당하고 강인한 인상을 준다. 그러나 송시열은 정작 ‘초상을 보며 나 자신을 경계하다(書畵像自警)’라는 글에 “네 모습은 파리하게 여위고 네 학문은 공소하다”라고 적었다. 이에 대해 필자(김기완 연세대 강사)는 자신에게 엄격했던 선비들의 자의식의 발로라고 해석한다. “관직의 고하에 상관없이 수척한 외모, 즉 부귀영화와는 거리가 먼 청빈하고 초탈한 선비”를 선호했던 옛 문인들의 문학적 초상이라는 것이다. 

   책에서 옛 그림에 대한 새로운 지식을 얻는 재미도 쏠쏠하다. 정선, 김홍도, 유숙, 장승업은 모두 ‘꽃 너머 작은 수레(花外小車)’라는 화제로 그림을 그렸다. 한 노인이 작은 수레를 타고 꽃구경을 하는 이 그림들은 모두 송나라 시인·철학자인 소강절의 청빈한 삶을 형상화한 것이다. 또 청와대의 봉황 표장은 조선시대 군왕을 상징한 ‘일월오봉’이 일제강점기에 봉황 도안으로 대체된 데서 비롯됐다. 필자(김수진 서울대 강사)는 봉황이 1956년 이승만 대통령 취임식 때 엠블럼으로 쓰인 이후 대통령의 상징물으로 자리 잡았다며 봉황표장을 ‘만들어진 전통’의 하나로 해석했다.


   책은 옛 그림 속 풍경에 대한 인문학적 탐사이다. 공부 모임 ‘문헌과 해석’이 기획해 ‘네이버캐스트’에 연재했던 글을 모은 것이다. 


http://news.khan.co.kr/kh_news/khan_art_view.html?artid=201311151915515&code=960205#csidxb4de93a52f1f96c9db9502feb6e27fd