절이 왜 산으로 갔을까? 아니 왜 산에 있을까?
누구나 한 번쯤 가졌을 법한 의문이다. 으레 '산에 있으니까 있겠지' 라고 하면 글도 여기서 끝이다. 궁금하지 않은 사람은 안 읽어도 된다. 난 궁금해서 쓴다.
흔히 사람들은 조선시대 유교 이념에 밀려 고려시대 절정을 이뤘던 절들이 일제히 산으로 올라갔다고 말한다. 전혀 틀린 얘기는 아니지만 반도 안맞는 지적이다. 그럼 언제, 왜 산에 있게 됐나?
한반도에 불교가 들어온 건 삼국시대 초기인 3~4세기 경으로 추정하고 있다. 고구려, 백제, 신라, 삼국에 일제히 불교가 들어온다. 국가 설립 초기라 통치이념이 필요했던 지도자들은 불교의 의식을 통치이념으로 받아들였다. 들어오자 마자 바로 꽃을 피운 셈이다.
신라시대 창건된 수리산의 수리사다.
불교가 한반도에 들어올 당시엔 절이 산과 사람이 몰려 사는 곳 구분없이 자리잡았던 것 같다. 사실 지금 한반도는 근대와 현대 이후 그렇게 개발하고도 산지가 약 70% 가량 차지하고 있다. 전혀 개발되지 않았던 3~4세기 경엔 90% 가까이 산지였을 것으로 추정이 가능하다.
90%가 산이라도 사람이 다 살 수 있는 지역은 아니다. 강과 하천 등 사람이 살 수 없는 곳도 빼야 한다. 그러면 실제 사람이 살 수 있는 곳은 불과 1~2% 밖에 되지 않았을 것이다. 그 좁은 주거지역에 사실 산과 주거지역을 따로 구분하기란 쉽지 않다. 일찌감치 주거지역에 자리잡은 절은 계속 있었고, 나머지는 산으로 갈 수 밖에 없었을 것이다. 절이 산에 있을 수 밖에 없는 첫째 이유다.
다음으로 유명 사찰의 건립연도와 누가 건립했느냐를 보면 쉽게 알 수 있다. 통일신라 직전 자장율사의 사례를 보자. 자장 율사는 신라 불국토사상의 대표적 인물이다. 그는 불국토사상을 주장하면서 지금까지 명맥을 이어오는 절을 창건한다. 그가 만든 절은 한국의 대표적인 사찰들이다. 오대산 월정사, 태백산 정암사, 영취산 통도사, 소백산 부석사, 지리산 단속사 화엄사 실상사 쌍계사, 속리산 법주사, 모악산 금산사, 가야산 해인사, 비슬산 대건사, 금정산 범어사, 팔공산 동화사, 강릉 사굴산의 굴산사, 영월 백덕산의 흥녕사, 문경 희양산의 봉암사, 금강산의 유점사 등 지금도 전국에서 내로라하는 유명 사찰들은 자장율사에 의해 일찌감치 산에 터전을 잡았다. 조선시대 훨씬 전부터 산에 자리를 잡았다는 얘기다. 산에 절이 뿌리를 내리며 오히려 산길이 개발되는 영향까지 가져왔다. 절에 가기 위해 산길을 닦고, 주변에 사람이 들어서기 시작한 것이다.
조용한 산사에 터전을 잡은 절의 스님들은 수도생활에 더욱 정진하는 계기가 되기도 했다. 참선을 주로 하는 종파에서는 산사만한 수도처가 어디 또 있었겠나. 한때 '산에 간다'고 하면 머리 깎고 중이 되는 걸로 받아들인 적도 있었다. 지금은 원체 등산인구가 많아져 '산에 간다'고 하면 으레 등산가는 줄 알지만 불과 몇 십년 전까지만 하더라도 산에 간다는 말은 '중이 된다'는 의미와 일맥상통했다. 조용한 산사에서의 수도. 속세에 찌든 인간이 한번쯤은 생각해봄직한 그림이지 않을까 싶다. 여하튼 시끌벅쩍한 곳보다는 산에서 수도하는 것이 훨씬 좋다는 사실은 누구나 다 알 수 있다. 절이 산에 있을 수 밖에 없는 이유다.
물론 조선시대 유교에 밀려 산으로 간 절들도 일부 있을 수 있다. 그러나 원래 산에 절이 더 많았다는 이유를 시대적으로, 지리적으로, 종교적으로 알 수 있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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