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크랩] 인상파 아틀리에 /콘스탄틴 마코프스키

2019. 1. 22. 13:53美學 이야기

l 인상파 아틀리에 l

프레데리크 바지유 '콩다민 가에 있는 바지유의 아틀리에'

프레데릭 바지유 ‘콩다민 가에 있는 바지유의 아틀리에’, 1870년

98x128.5cm, 캔버스에 유채, 오르세 미술관

 

인상파의 씨앗들

오늘날 우리가 인상파라고 부르는 일군의 화가들이 존재할 수 있게 만든 인물들을 꼽아보라면 한둘이 아닐 것이다. 시인이자 미술비평가인 보들레르가 있고 마네가 있으며 또한 마네의 친구 드가가 있다. 그러나 잘 알려져 있는 화가는 아니지만 인상파를 이야기할 때 빼놓을 수 없는 인물이 바로 프레데리크 바지유(Frederic Bazille)이다. 인상파에 대해 잘 안다고 생각하는 사람들도 바지유라는 이름을 들으면 고개를 갸우뚱할 것 같다. 인상파라고 하면, 모네나 피사로, 더 나아가서 르누아르나 시슬리 정도를 생각하는 게 보통이기 때문이다.


마네나 드가는 인상파의 일원으로 간주되긴 했지만 자신들이 인상파와 엮이는 것을 그렇게 탐탁지 않게 생각했다. 세대로 보나 출신계급으로 보나 이들은 인상파의 ‘젊은 악동들’과 자신들을 무의식적으로 구분하고 있었던 것인지도 모른다. 오늘날 우리는 두루뭉술하게 이들을 인상파라고 부르지만, 냉정하게 말해서 아카데미적인 ‘살롱 화풍’과 다른 그림을 그렸다는 사실 이외에 뚜렷한 공통분모를 찾기는 어렵다. 여하튼 ‘같은’ 인상파 화가들이지만, 실은 서로 다른 생각을 하면서 한 배를 타고 있었던 셈이다.


화가의 꿈을 안고 파리에 모인 바지유, 모네, 르누아르

인상파의 탄생 과정을 정리하자면 이렇다. 1862년 모네는 군대에 지원했다가 지병으로 인해 복무를 그만두고 고향인 르아브르(Le Havre)로 돌아왔다. 그곳에서 모네는 여름 내내 요한 바르톨트 용킨트(Johan Barthold Jongkin)을 만나면서 지냈다. 용킨트는 네덜란드 출신 풍경화가인데 주당에 색골이어서 젊은 모네의 관심을 끌었다. 용킨트는 모네를 다시 파리로 보내서 화가 수업을 계속 받게 만든 장본인이기도 했다. 만약 용킨트가 없었다면 오늘날 우리가 생각하는 인상파는 존재하지 못했을지도 모른다. 모네는 용킨트의 권유로 다시 파리로 와서 미술 아카데미 회원이었던 샤를 글레이르의 문하생으로 들어간다. 물론 모네는 처음 파리로 상경해 수이세의 스튜디오에서 화가 수업을 받을 때 피사로를 만나 의기투합했는데 이번에도 예외가 아니었다.

 

모네는 글레이르의 스튜디오에서 르누아르와 바지유를 만나서 예전에 피사로와 그랬던 것처럼 새로운 그림에 대한 깊은 교감을 나눌 수 있었다. 영국 BBC에서 만든 <인상파 화가들>이라는 드라마를 보면 바지유와 모네, 그리고 르누아르가 카페에 들러서 이야기를 나누는 장면이 나온다. 극중에서 바지유는 가업을 이으라는 부모의 권유와 화가라는 자신의 꿈 사이에서 방황하는 진지한 청년으로 그려진다.


바지유는 몽펠리에에서 태어나서 부유하게 자랐다. 프로테스탄트였던 부모는 바지유에게 사업을 권했지만, 그는 화가에 뜻을 두고 있었다. 마네의 경우처럼, 자식 이기는 부모는 없다고, 바지유도 부모를 설득해서 화가 수업을 받기 위해 파리로 왔던 것이다. 파리에 모여든 이유나 과정은 달랐지만 이들은 새로운 그림을 그리고자 하는 패기와 열정으로 불타오르고 있었다. 이런 패기와 열정을 감안한다면, 이들 셋이야말로 인상파라는 거대한 나무를 자라나게 만든 씨앗이라고 말할 수 있다. 이들은 오스망의 도시개발로 웅성거리던 파리에 모여 새로운 예술을 꿈꾸었다. 이들이 바로 ‘풀밭 위의 점심’이 살롱 전시회에서 거부당하자 미술사 최초로 ‘개인전’이라는 새로운 전시 형식을 발명한 마네를 옹호하고 마네의 편에서 고리타분한 살롱의 미학을 질타한 젊은 화가들이었다. 바지유 ‘여름 풍경’ 1869


초기 인상파의 진실을 보여주는 ‘바지유의 아틀리에’ 풍경

바지유의 그림 ‘콩다민 가에 있는 바지유의 아틀리에’는 바로 이렇게 혈기 방장했던 초기 인상파의 진실을 보여주는 흥미로운 작품이다. 이 그림을 두고 여러 가지 의견이 설왕설래하지만, 정확하게 통일된 해석은 존재하지 않는다. 다만 명확한 것은 이 그림에서 초기 인상파를 지배했던 새 것에 대한 강렬한 열망을 느낄 수 있다는 사실이다. 이 그림은 평범한 아틀리에의 모습을 보여주지만, 여기에서 보이는 아틀리에의 분위기야말로 지금까지 존재하지 않던 ‘새로운 것’이라고 할 수 있다. 귀스타브 쿠르베의 ‘화가의 아틀리에’와 이 그림을 비교해보면 이 말의 뜻을 깨달을 수 있을 것이다.

 

쿠르베 ‘화가의 아틀리에’ 1855


쿠르베 역시 자신의 그림에 대한 다양한 지인들의 모습을 그려 넣었다. 예를 들어서 오른쪽에서 구부정한 자세로 책상 위에 무엇인가를 쓰고 있는 반쯤 벗겨진 대머리의 사나이가 시인 보들레르이다. 바지유의 그림도 자신의 지인들로 붐비는 모습을 보여준다. 바지유는 이젤 앞에 서서 팔레트와 붓을 들고 있는 자신의 모습을 마네에게 그려달라고 부탁했다. 마네에 대한 존경심을 그렇게 표현한 것이라고 볼 수 있겠다. 이 아틀리에는 가난해서 작업실을 임대할 수 없었던 르누아르와 함께 쓰기 위해 바지유가 빌린 것이다. 그림을 보면 바지유는 지금 이젤에 걸린 그림을 완성해서 지인들에게 그것을 보여주고 있다. 이 지인들은 누구일까? 역시 여러 가지 해석이 존재하지만, 대체로 당시 그들과 함께 지냈던 조각가 자카리 아스트뤽(Zacharie Astruc)과 모네인 것으로 추정하고 있다. 계단에서 이야기를 나누는 인물들도 궁금증을 자아내는데, 아마 르누아르나 시슬리일 것이라고 보는 해석이 지배적이다. 피아노를 치는 사람은 에드몽 메트로인데, 바그너의 음악에 홀딱 반한 바지유의 친구였다.

 

바지유 ‘화장’ 1869~1870(왼쪽)  르누아르 ‘고양이와 함께 있는 소년’(가운데)  바지유 ‘투망을 든 어부’ 1868(오른쪽)


바지유의 죽음으로 인상파의 꿈은 위기를 맞았다

바지유의 아틀리에를 가득 채우고 있는 그림들은 모네와 르누아르, 그리고 자신의 그림들이다. ‘화장’도 보이고, ‘투망을 든 어부’도 알아볼 수 있다. 바지유의 그림에서 르누아르와 유사한 분위기를 읽어내는 것은 그렇게 어렵지 않다. ‘투망을 든 어부’와 르누아르의 ‘고양이와 함께 있는 소년’이라는 그림을 비교해보라. 두 그림은 바지유의 아틀리에에서 르누아르와 함께 기거하면서 생활할 때 그림 작품이다. 이들은 식비를 아끼기 위해 삶은 콩으로 배를 채우며 그림을 그렸다. 그렇게 거칠 것이 없이 자라나던 인상파의 꿈은 1870년 돌연 위기를 맞이한다. 프로이센-프랑스 전쟁이 발발한 것이다. 그림 ‘콩타민 가의 아틀리에’를 완성한 그 해 바지유는 국민방위군에 자원했다가 전장에서 전사하고 만다. 향년 29세. 결과적으로 이 그림은 바지유의 유서로 남은 셈이다. 이런 사실에서 프로이센-프랑스 전쟁과 파리코뮌이 인상파에게 쉽게 잊히지 않는 상처를 남겼다는 것을 짐작할 수가 있다. 르누아르와 모네의 일상에서 바지유가 지녔던 삶의 무게를 생각해보면 말이다.

 

이택광(문화비평가, 경희대 영미문화과 교수) 부산에서 자랐다. 영문학을 공부하다가 문화연구에 흥미를 느끼고 영국으로 건너가 워릭 대학교에서 철학석사 학위를, 셰필드 대학교에서 문화이론을 전공해서 박사학위를 받았다. 1999년 영화주간지 <씨네21>에 글을 발표하면서 본격적으로 문화비평을 쓰기 시작했다. 시각예술과 대중문화에 대한 분석을 통해 정치사회 문제를 해명하는 작업에 많은 관심을 갖고 있다. 현재 경희대학교 영미문화 전공 교수로 재직하면서 문화비평가로 활동하고 있다.

 

  출처 : 네이버캐스트 오늘의 미술 2009.12.10

  http://navercast.naver.com/contents.nhn?contents_id=1618  


콘스탄틴 마코프스키

이동파의 변절자였을까요?

예전에 모 잡지와 인터뷰를 하면서 개인적으로 어떤 작품을 좋아하느냐는 질문을 받은 적이 있습니다. 화가의 이름을 말할까 하다가 러시아 화가들 작품이라고 대답을 했는데, 당시 한창 러시아 미술가들에게 빠진 이유도 있었지만 보고 나면 머리에 오래 남기 때문이었지요. 그동안 이곳을 통해서 소개한 러시아 화가가 제법 되는 것 같습니다. 창밖으로는 11월 하순인지 봄인지 구별이 안 될 만큼 안개가 자욱합니다. 잊고 있었던 콘스탄틴 마코프스키(Konstantin Makovsky, 1839-1915)에 대한 이야기를 해볼까 합니다.

  

귀족의 결혼축제 Boyar's Wedding Feast, 1883


보야르는 러시아의 중세 귀족을 말합니다. 귀족의 딸이 시집을 가는데 이 정도는 화려했겠지요. 혹시 하객들이 요즘처럼 “뽀뽀해!”라고 외쳤을까요? 신부는 부끄러운 듯 고개를 숙이고 있고, 그런 신부가 너무 사랑스러운 신랑은 신부의 얼굴을 향해 얼굴을 가져가는 듯합니다. 모든 사람들의 눈이 일제히 두 남녀에게 쏠렸습니다. 오늘의 주인공인데 당연하지요. 간혹 결혼식에서 신랑 신부가 뽀뽀하는 것을 보면 다들 소리를 지르고 발을 구르고 하는데 그런 모습을 볼 때마다 궁금한 것이 있습니다. 혹시 집에서 뽀뽀 안 하십니까?


모스크바에서 출생한 마코프스키는 화가가 될 수밖에 없는 환경이었던 것 같습니다. 그의 아버지 이고르 마코프스키는 아마추어 화가였는데, 화가로서 활동하는 정도가 아니라 나중에 상트페테르부르크 종합예술학교의 공동 설립자가 됩니다. 맏이로 태어난 마코프스키 밑으로 동생들이 여럿 있었는데 나중에 모두들 다 유명한 화가가 되었으니까 대단한 가족이죠. 이런 분위기 탓인지 훗날 마코프스키는 ‘아카데미나 교수가 아니라 오직 가족에게서 그림을 배웠다’고 회상하고 있습니다. 교수님들이 들었다면 기분이 나쁘셨겠지만, 생각해보면 그럴 수도 있겠다 싶습니다.

 

표도르 고두노프와 그의 어머니를 살해한 가짜 드미트리 왕자

False Dmitrys agents murdering Feodor Godunov and his mother, 1862


제목만큼이나 내용도 어렵습니다. 방금 한 사내가 바닥에 쓰러진 사람을 찌르고 체포되었습니다. 쓰러진 사람은 이미 목숨을 잃었습니다. 흥분한 주위 사람들이 암살자에 대해 주먹을 날릴 기세입니다. 죽은 사람은 당시 러시아의 차르였던 고두노프입니다. 고두노프는 이반 4세의 아들인 표도르가 어린 나이였기 때문에 섭정을 했던 사람입니다. 표도르와는 처남 매부 사이였지요. 황제의 자리에 대한 욕심이 생긴 고두노프는 표도르의 동생이자 후계자였던 드미트리를 암살합니다. 그리고 표도르가 죽자 황제의 자리에 오르죠. 그러나 민심은 그를 황제로 인정하지 않았습니다. 몇 년 뒤 죽었다는 드미트리가 군대를 이끌고 쳐들어오자 고두노프는 갑자기 사망합니다. 혹시 암살단이 그를 살해한 것은 아닐까요? 물론 나중에 등장한 드미트리는 가짜였습니다.


열두 살이 되던 해 마코프스키는 모스크바 예술학교에 입학하는데, 당시 젊은이들에게 열려 있는 유일한 학교였습니다. 그는 학교에서 최우수 학생이었습니다. 대부분의 상을 쓸어 담은 것은 어찌 보면 당연한 일이었지요. 스승의 지도로 그는 낭만주의 화풍을 익혔고 훗날 장식적인 것에 치중한 것도 이때 스승들에게 배운 것이었습니다.

 

천둥에서 도망치는 아이들 Children running from a thunderstorm, 1872


아직 비는 내리지 않지만 벌판 어디에선가 천둥 치는 소리가 들렸습니다. 놀란 언니는 동생을 등에 업고 서둘러 집으로 돌아가는 중입니다. 놀란 동생은 금방 울 것 같은 표정이고, 고개를 돌려 하늘을 올려다보는 언니의 표정도 불안합니다. 점차 밀려오는 천둥과 함께 바람이 풀들을 흔들고 있는 들판을 걸어온 소녀의 맨발이 애처롭습니다. 어렸을 때 가장 무서운 것은 천둥이었습니다. 하늘이 부서지는 것 같은 소리는 사람이 만들 수 없는 소리였지요. 할머니나 어머니에게 안겨 있으면 무서움이 덜했습니다. 요즘은 아이들이 저에게 매달립니다. 간혹 아내도 제 옆으로 옵니다. 별것 아니라고 큰소리를 치지만 저라고 안 무섭겠습니까? 무서운 것은 나이가 들어도 무섭습니다.


마코프스키는 모스크바 예술학교를 졸업하고 아버지가 세운 학교가 모태가 된 상트페테르부르크 종합예술학교로 진학합니다. 이 진학 코스는 러시아 화가들이면 반드시 거쳐야 하는 코스처럼 보입니다. 입학하고 난 2년 뒤부터는 아카데미에 작품을 전시하기 시작합니다. 그런 그에게 엄청난 일이 일어났습니다. 아카데미 대상에 참여할 동료 13명과 함께 ‘반란’을 일으킨 것이죠.

 

쉬고 있는 시골 아이들 Peasant Children at rest, 46x37.5cm


놀고 있는 아이들이 아니라 쉬고 있는 아이들이라는 제목에 고개를 갸우뚱했습니다. 아이들의 옷차림을 보니 남루하기 이를 데 없습니다. 입고 있는 옷은 커다란 천을 적당히 잘라 걸친 것 같습니다. 오른쪽 아이의 소매는 얼마나 심하게 입었는지 까맣게 되었습니다. 신발도 언뜻 보니 우리의 짚신처럼 보입니다. 설마 이 아이들이 방금 전까지 일을 한 것은 아니겠지요? 생활은 힘들겠지만 그나마 다행인 것은 표정에 아이들의 것이 그대로 보인다는 것입니다. 아이들에게 어른의 표정이 느껴진다면, 그것은 참 세상이 아닙니다. 여기 지금 세상은 어떤가요?


‘반란’의 시작은 제가 보기에 사소한 것이었습니다. 아카데미가 그림의 주제로 내건 것이 스칸디나비아의 신화였습니다. 아무래도 전통적인 작품을 그리기 위해서는 적절한 주제였지만 젊은 화가들은 이 결정에 반대하고 학교를 그만두었습니다. 폐쇄적인 아카데미의 규범과 주제로부터 자유로워지고 싶었던 것이지요. 당연히 조금만 더 있으면 받게 될 공식적인 학위도 포기한 것이 되었죠. 학교를 떠난 그들에게는 2급 화가의 호칭이 부여되었습니다.

 

여름 오후 Summer Afternoon


햇빛 맑은 오후입니다. 숲에서 나온 길 위에는 마차바퀴 자국이 선명합니다. 집 앞에 사람들이 모여 있습니다. 모두가 그림을 보는 저를 바라보는 듯합니다. 마치 배웅이라도 하는 모습인데, 그렇다면 길 위에 남겨진 마차바퀴 자국은 제가 탄 마차의 것이겠군요. 다시 돌아올게요. 손을 높이 흔들고 인사를 해야겠습니다.


학교를 떠난 마코프스키와 동료들은 크람스코이가 주도하던 예술가 조합의 멤버가 됩니다. 이 조합이 훗날 러시아 미술에 큰 전환점이 되는 이동파가 되죠. 이제까지 그렸던 주제들을 버리고 전형적인 러시아의 일상과 풍경을 그림에 담기 시작합니다. 그의 초기 작품을 두고 러시아적인 주제에 관한 한 ‘챔피언’이라는 평가가 있습니다. 마코프스키는 이동파 멤버들 중에서도 돋보이는 존재였습니다.

 

러시아 신부의 의상 The Russian Bride's Attire, 1889


결혼식을 앞둔 신부 치장이 한창입니다. 어린 동생은 곧 시집을 가면 한동안 못 볼 언니를 조금이라도 더 보고 싶었는지 무릎에 고개를 기댔습니다. 그런 동생이 안쓰러운지 언니는 손을 들어 동생을 쓰다듬고 있습니다. 두 사람을 제외하고는 모두가 즐겁고 호기심 많은 표정입니다. 옷차림도 화려합니다. 17세기 러시아의 좋았던 시절을 그림에 담았던 마코프스키가 마음껏 그 시대를 보여주는 것 같습니다. 그건 그렇고 세상에 예쁘지 않은 신부가 있던가요?


그러나 평생 이동파로 활동할 것 같았던 마코프스키는 또 다른 길을 걷기 시작합니다. 이동파 전시회에도 참여하고 아카데미에도 출품을 한 것이죠. 작품의 주제만 확실하다면 어디에다 출품하든 문제가 아니라는 생각이었을까요? 이동파의 창립 멤버가 되기 1년 전인 1869년 마코프스키는 아카데미의 교수가 됩니다. 아카데미의 폐쇄성이 싫어 아카데미를 떠났던 그가 교수로 돌아온 것이죠. 어떻게 이해해야 할까요?

 

타마라와 데몬 Tamara and Demon, 1889


타마라는 공주입니다. 이웃 나라 왕자와 약혼을 했는데 그 왕자가 결혼을 하기 위해 자기 나라로 돌아가다가 그만 강도를 만나 죽고 맙니다. 슬픔에 빠진 그녀를 위로한 것은 그녀를 지켜보던, 그녀를 정말로 사랑하고 있던 데몬입니다. 그녀와 함께라면 더 이상 ‘악마’가 아니어도 좋았지요. 그러나 둘이 사랑의 밤을 보내고 난 뒤 그녀는 신의 노여움으로 목숨을 잃게 됩니다. 악마는 사랑을 하면 안 되는 걸까요? 악마는 착할 수 없는 걸까요? 천사로 태어나 악마가 되는 사람도 있는데, 아무리 생각해도 신께서 좀 심했다 싶습니다. 슬픔 가득한 데몬의 눈빛이 안타깝습니다.


비평가들의 평가와는 달리 마코프스키의 작품은 대중들에게 많은 인기가 있었습니다. 그의 작품은 19세기 러시아 화가들의 사실주의가 어떻게 성장했는지를 알 수 있는 좋은 기준이 됩니다. 또한 러시아의 중요한 사건을 묘사한 역사화는 그의 또 다른 관심사였습니다. 그러나 1870년대 중반 이집트와 세르비아를 여행하고 난 후 작품에 변화가 옵니다. 그때까지 그의 주된 관심이었던 사회적이고 심리적인 문제가 색과 모양의 예술적인 문제로 옮겨간 것이죠.

 

쿠지마 미닌의 선언 Proclamation of Kuzima Minin, 1896


1610년 폴란드가 모스크바를 침략 점령합니다. 2년 뒤 모스크바를 다시 탈환하는데, 가장 공이 큰 사람이 바로 쿠지마 미닌이었습니다. 그림에서는 가운데 서 있는 사람이 쿠지마 미닌이 아닐까 싶습니다. 모든 사람들이 가지고 있는 것을 들고 그를 향해 모여 들고 있습니다. 아마 무기를 사고 군인을 무장하기 위한 자금을 위한 것이겠지요. 그림 속에는 해보겠다는 사람들의 의지가 높은 성곽과 그 위를 나는 새들까지 이어져 하늘에 닿는 느낌입니다. 자랑스러웠던 과거의 일을 그림에 담는 것이 19세기 러시아 화가들의 주요 주제였지요.


결국 1883년, 마코프스키는 이동파와 결별합니다. 이 일로 많은 민주적인 비평가들은 이동파의 이상을 변절시킨 사람으로 그를 폄하합니다. 그러나 또 한편에서는 그를 러시아 인상파의 선두주자라고 평가하기도 했지요. 한 사람에 대한 이런 극단적인 평가도 많지 않을 것 같은데, 그는 1891년 살롱을 지향하는 상트페테르부르크 미술협회의 멤버가 됩니다. 누가 뭐라고 해도 내가 하고 싶은 것을 하고 그리고 싶은 것을 그린다는 고집이 보입니다.

 

                   러시아 신부 Russian Bride


결혼을 하고 난 후 몇 년 동안 거실에 결혼사진을 걸어 놓았습니다. 이사를 다니면서 언제가 액자를 떼었고 그 뒤로는 걸지 않았습니다. 얼마 전 그 사진을 우연찮게 다시 찾았습니다. 20년이 훨씬 넘은 세월을 두고 저와 아내가 사진 속에 있었습니다. 아내를 보니 얼굴에 주름이 늘었고 얼굴이 통통해졌습니다. 머리카락 수가 조금 줄어든 것을 제외하면 그런 대로 모습을 간직하고 있더군요. 고마운 일이지요.


1880년대 초상화와 역사화의 선두주자가 된 마코프스키는 1889년 파리 만국박람회에 3점의 작품을 출품했는데 결과는 대상이었습니다. 당대에 가장 칭송을 받은 러시아 화가이자 작품 가격이 가장 비싼 화가가 된 것이죠. 쉰두 살이 되던 해, 그는 아카데미의 회원이 됩니다. 그가 이동파에서 다시 아카데미로 돌아온 것에 대한 자료를 구하지 못해 그의 마음을 알 수는 없지만, 화가로서만 그를 읽는다면 이해 못할 것도 아닙니다.

 

목욕을 준비하는 여인 Beauty preparing to bathe


초기의 마코프스키의 작품과는 많은 차이가 있습니다. 선과 색의 변화도 확실하게 구별됩니다. 힘들게 목욕을 준비하는 여인을 보다가 요즘 허리선이 나왔다고 운동에 더욱 힘을 쏟고 있는 아내를 불렀습니다. 아무리 노력해도 이 정도 몸매는 이제 불가능할 것 같지? 무슨 소리, 두고 봐, 곧 내가 저런 몸매 보여줄게. ‘곧’이라는 단어가 제 생애에는 불가능한 시간이라는 것을 아내는 모르는 모양입니다.


1915년 9월 17일, 상트페테르부르크에서 교통사고가 있었습니다. 전차가 마차를 들이받은 것이죠. 마차에 타고 있던 사람이 세상을 떠났는데 마코프스키였습니다. 일흔여섯의 나이였으니까 당시 사회를 생각하면 세상을 떠나기에 아주 억울한 나이는 아니었지만 급작스러운 사고가 아니었다면 좀 더 많은 그의 작품을 볼 수 있지는 않았을까요.

 

출처 : web속에 나를찾아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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