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크랩] 북송의 시인 소동파의 생애

2019. 2. 15. 21:33

 

                                                                                         중국 성도 <삼소사>에 있는 소동파 상(사진 촬영: 김성철)

 

  소동파(蘇東波, 1036~1101)는 이름을 식(軾)이라 하고 자(字)를 자첨(子瞻) 또는 화중(和仲)이라 하였고, 46세 이 후에 스스로 호를 동파(東波)라 하였다. 사천성(四川省) 미산현(眉山縣) 출신으로 아버지 순(洵), 동생 철(轍)과 함께 ‘삼소(三蘇)’라 불리기도 한다. 또한 당나라의 한유(韓愈)․유종원(柳宗元), 송나라의 구양수(歐陽修)․증공(曾鞏)․왕안석(王安石) 등과 함께 당송팔대가(唐宋八大家)에 속하기도 한다.

 

  한유와 유종원은 육조 이후 글의 내용이 공소(空疎)하고 화려한 사륙변려체(四六變麗體)의 문장이었지만, 진한(秦漢) 이전의 고문(古文)으로 돌아가, 유교적 정신을 바탕으로 간결하며 뜻의 전달을 지향하는 새로운 산문운동을 전개하였다. 이것이 이른바 고문운동(古文運動)이다. 이 운동은 획기적인 성과를 거두었지만 두 사람이 죽은 후에는 점차 기세가 약해졌다. 그것은 새로운 표현과 착상의 연구가 뜻의 전달성을 희박하게 하였고, 또한 도덕 지향의 면이 지나치게 강조되어 도학(道學) 냄새가 짙었기 때문이었다.

 

  그 반동으로 당나라 말기에서 5대에 걸쳐 육조식(六朝式) 탐미적 산문이 부활하였고, 북송(北宋)의 천성기(天聖期)가 되자 구양수가 한유의 문집을 규범으로 하여, 알기 쉽고 유창한 산문을 만드는 혁신운동에 앞장서, 이 운동으로부터 소순․소식․소철․증공․왕안석 등 우수한 문학자가 배출되었다. 당송팔대가라는 병칭(竝稱)은 송나라의 진서산(眞西山)이 처음으로 주창하였고, 뒤이어 당순지(唐順之)가 당․송의 우수한 작가를 이 8명으로 묶어 산문선집 문편(文編)에 수록하였으며, 다시 명나라의 모곤(茅坤)이 당송팔대가문초(唐宋八大家文)(160권)를 편집하여 보급하였다.

 

  소동파는 정치적으로는 보수주의자였으나, 사람됨이 밝고 도량이 넓었다. 왕안석이 변법(變法)을 제창할 때 소동파는 반대를 했으나 왕안석이 죽고 난 후에는 오히려 왕안석의 청묘법(靑苗法)이 발효된 후에 백성들이 살기가 좋아졌다고 생각하여 재상 사마광(司馬光)의 면전에서 왕안석을 변호하였다. 송은 문치주의를 근본 방침으로 삼아 과거제도를 개혁하고 문신을 우대하였으며 절도사의 권한을 빼앗았다. 그러나 이러한 문치주의는 국방력의 약화를 하져와 수많은 북방민족의 침입에 시달리게 하였다. 그것을 스스로 지킬 힘이 없던 송나라는 재물을 바쳐 비위를 맞추는 식으로 외적의 침입을 피해야 했다. 게다가 방대한 관리조직을 유지하기 위해서는 많은 돈이 필요했으므로 백성들은 무거운 세금에 허덕이는 생활을 해야 했다.

 

  (왕안석의 변법은 대상인과 지주를 누르고 상공인과 소농민을 보호하여 생산력을 증가시킴으로써 국가 재정과 국방력을 강화시키려는 것이었다. 그러나 사마광을 비롯한 대지주, 고리 대금업자, 대상인을 대표한 세력들의 반대로 인해 중지되고 말았다.)

 

  예술가로서 소동파는 모든 재능을 갖추고 있었다. 산문에서 뛰어난 면모를 보였던 것처럼, 그는 서도(書道)에서도 북송사대가(北宋四大家)에 포함되었다. 그리고 시(詩)와 사(詞)의 작가로서도 시대를 초월하여 으뜸이라 할 만하다. 그러나 관리로서의 길은 평탄하지 못하여, 자주 관직을 깎이기도 하고, 귀양을 가기도 했다. 그는 두 차례나 항주에서 관리로 있었다. 처음은 희령(熙寧) 4년인 1071년 11월에 통판으로 임명되었다가 희령 7년 7월에 3년간의 임기를 마치고 떠났다. 첫 번째 항주행은 왕안석의 변법을 반대하다가 배척을 당했던 것이다. 그는 항주에 있으면서도, 시를 통하여 줄기차게 변법을 반대하다가 마침내 체포되어 투옥되었다가 황주(黃州)의 단련부사(團練副使)로 좌천되었다. 나중에 다시 서울로 돌아가 한림학사가 되었으나, 오래 있지 못하고 다시 원우(元祐) 4년인 1089년 7월, 두 번째로 항주지주의 신분으로 항주에 왔다가, 2년 후인 원우 6년인 1091년 6월에 서울로 돌아가 한림학사승지(翰林學士承旨), 지제조(知制調) 등의 관직에 임명되었다. 그러나 다시 조정을 비난했다는 죄명으로 해남도로 좌천되었다가 원부 3년인 1100년, 겨우 사면되어 그 이듬해, 돌아가는 길에 상주(常州)에서 병사하였다.

 

  소동파가 처음 항주에 왔을 때 나이는 30세로 젊고 힘이 넘칠 때였으나, 두 번째 왔을 때는 이미 50세를 넘겼다. 그는 일찍이 이런 말을 하였다. “항주에 있었던 5년 동안, 나는 본래 항주인이었다는 생각을 하였다.” 이 말은 소동파와 항주의 관계를 잘 나타낸다. 지방장관으로서 그는 항주 사람들을 위하여 적잖은 일을 하였고, 시인으로서 호수와 산을 짝으로 삼아 서호에 대한 인구에 회자되는 유명한 시를 많이 남겼다. 그의 작품 중에서 서호에 관한 시(詩)와 사(詞)는 수백 편이 남아 있다. 그의 아우 소철(蘇轍)은 그가 항주에 있을 때 “360사(寺) 곳곳에서 아름다운 시를 지었다”는 것이 과장이 아니라고 하였다. 소동파는 물 맑고 산 좋은 항주의 지방관으로 부임하여 시흥(詩興)을 높일 수가 있었고, 항주와 서호는 소동파의 뛰어난 문재(文才)로 인하여 더욱 유명해질 수 있었다.

 

  소동파의 일생은 비록 험난하였으나 시종일관 정직하고 선량한 성품을 가졌다. 그는 항주에 있으면서 인재를 선발하여 추천하기를 게을리 하지 않았다. 항주통판이 된지 이듬해, 과거를 열어 선비를 얻으려고 하자 조정은 그를 감시(監試)에 임명하였다. 그는 많은 관리들이 ‘군대지친(裙帶之親)’ 즉, 처가 덕에 관리가 되었거나, ‘순권귀지도(循權貴之道)’ 즉, 권세가나 귀족들이 돌아가며 관직에 오르는 것을 보고, 이들이 모두 쓸모없는 무리들이라고 생각하였다. 그는 과거시험를 통하여 관직에 선발되는 것이야말로 정말 실력 있는 학자들이라는 인식을 깊이 가졌다. 그는 인재는 하늘이 내는 것이 아니라 스스로 근면하게 배우고 꾸준히 독서를 하는 것이라고 생각하였다. 그는 “항주는 우리나라 동남지방에서 빼어난 인재가 많이 나는 곳”이라 하고 시험관들로 하여금 응시자 중에서 ‘보옥(寶玉)’을 골라내라고 당부하였고, 선발된 인재는 출신성분을 가리지 않았다. 그의 주재 아래 선발된 인재들이 나중에 유명한 ‘전당(錢塘)의 선비로 예부(禮部)의 9인’이 된 사례도 있다. 이들은 모두 소동파로부터 시를 배웠고 훌륭한 관리가 되어 백성들의 칭찬을 들었다.

 

  항주의 민간에는 지금도 ‘화선단안(畵扇斷案)’이라는 말이 전해진다. 그 말의 유래는 이렇다. 어느 날 소동파가 집안에서 정좌를 하고 글을 쓰고 있는데 능견(綾絹)을 만들어서 판매하는 오소일(吳小一)이라는 소상인이 부채를 매매하는 장소이(張小二)라는 사람을 고소하면서 능견을 외상으로 사가서 반년 동안이나 갚지 않았다고 하였다. 장소이는 비가 많이 오고 기온이 서늘하여 부채를 팔 수 없었고, 입에 풀칠하기도 힘들다고 하였다. 소동파는 그 말을 듣고, 장소이가 충직하고 선량한 사람이라 생각하여 동정하는 마음이 생겼다. 소동파는 장소이에게 부채를 가져오게 하고 손수 붓을 잡고 흰 부채에 노송이나 대나무, 바위 등을 그리고 ‘소동파(蘇東波)’라는 낙관(落款)까지 찍어서 장소이에게 가져가서 팔게 하였다. 부채가 모두 팔렸다는 소식을 들은 소동파는 장소이를 불러서 오소일에게 진 빚을 모두 갚도록 하였다. 장소이의 부채집은 유명해졌다고 한다.

 

  소동파는 평복을 입고 자주 민정을 시찰하였고 거리나 마을에서 가난한 집을 찾아가 어려운 점을 묻고 그것을 해결하는 정책을 고민하였다. 그는 당대의 이필(李泌)이 만든 육정(六井)이 상당 부분 파괴되고 메워진 것을 살펴보고, 보수공사를 진행하여 백성들의 식수난을 해결하였다.

 

  북송의 원우(元祐) 4년인 1089년 7월, 소동파는 ‘강산고국(江山故國) 소지여귀(所至如歸)’라는 심정으로 두 번째 항주의 지방관이 되었다. 마침 큰 한해(旱害)를 입어서 곳곳에서 굶주림과 질병으로 고생하는 백성들을 본 시인의 마음은 쓰라리기 짝이 없었다. 그는 구제할 수 있는 모든 대책을 강구하고, 대담하게 상소를 올려 항주의 공미(供米)의 1/3을 경감해 달라고 하였다. 또한 승첩(僧牒) 백 장을 다시 내려주어 거기에서 생긴 쌀로 배고픈 백성들을 구해 주었다. 가을이 지난 후에는 다시 큰비가 내려 전당강과 서호의 물이 넘쳐 항주 부근이 침수되어 농촌이 큰 피해를 입었다. 농민들은 언덕이나 묘에서 기거하였고 배를 타고 다녀야 할 만큼 수마는 항주 일대를 괴롭혔다. 소동파는 다시 상소문을 올려 공미의 절반을 경감해 달라고 하고, 정부 보관미 40만석을 풀어 굶주린 사람들을 먹이는 한편, 대대적으로 의연금을 모금하여 의료시설을 설립했다. 그는 관리와 의사들을 파견하여 질병치료에 전념하게 하여 많은 환자들을 구해냈으며, 각처에서 약제를 거두어들였다. 소동파의 이러한 노력으로 항주인들은 두 차례의 재해를 극복할 수 있었다. 소동파는 항주 사람들의 마음을 얻었으며, 사랑을 받았다. 그것은 그가 지방관으로서 공정했고 백성들의 고통에 관심이 많았던 덕분이었다. 소동파는 나중에 영주(穎州)에 있으면서 서호의 공사를 생각하며 다음과 같은 시를 지었다.

 

  내가 전당호를 개척하여 다시 푸르게 하였더니

  큰 제방에서 남녀가 다투어 노래를 하더라.

  가로지른 육교 위에는 하늘에서 내려 온 사람들이

  북산에서 남병산에 이르기까지 걷고 있었네.

  갑자기 이십오만 장의 제방이 생기니

  오래 된 봉초가 연기가 되어 창공으로 흩어졌구나.

 

  소동파는 또 한 커다란 우환이었던 염교하(鹽橋河)와 모산하(茅山河)에 대한 준설공사에 주력하였다. 염교하는 호숫물을 받아들이게 하고 모산하는 강물을 받아들이게 하여 수문을 만들고 호숫물을 모으고 뺄 수 있도록 하여 물이 시가지로 들어오지 않도록 하였다. 소동파는 서호를 대단히 사랑하여 항주를 제2의 고향이라 생각하였다. 그는 항주에 살았던 5년 동안, 서호 주변의 모든 산에 족적을 남겼다. 그는 늘 두 명의 노병을 데리고 용금문 아래의 호수에서 놀았고, 가끔은 호수가로 나와 영은사(靈隱寺)와 천축사(天竺寺) 부근을 돌아다니며 산과 호수를 구경하는 것을 즐겼다. 날이 저물면, 말을 타고 전당문(錢塘門)을 지나서 성안으로 돌아왔다.

 

  소동파는 서호의 아름다운 경치를 노래한 시를 많이 지었다. 자칭 항주에 있을 때 1,000수가 넘었다고 하니 서호에 대한 그의 사랑을 알 수가 있다. 그 중에 “밤중에 서호에 배를 타고”라는 다음과 같은 시도 있다.

 

  줄창포는 가없이 물 위에 가득하고

  밤에 피는 연꽃은 바람결에 향기를 흩날리네.

  깜박이는 등물은 멀리 절에서 비치고

  다시 달빛이 흐려지기를 기다렸다가 호수 빛을 바라보네.

 

  비 내리는 서호를 보며 지은 “6월 27일 누각에 앉아서 술 한잔 먹고 쓰다”라는 다음과 같은 절묘한 시도 있다.

 

  검은 구름이 먹빛으로 바뀌었지만 산을 모두 가리지는 못하고

  흰 빗방울은 구슬처럼 흐트러져 어지럽게 배 안으로 들어온다

  땅을 휘감고 불어오는 바람이 갑자기 흩어지니

  누각에서 바라보는 호수는 파란 하늘과 같구나

 

  그는 계절마다 맑고 아름답게 변하는 서호를 그림처럼 묘사하였다. 천변만화(千變萬化)하는 서호를 노래한 “최준랑(崔準郞)과 함께 서호에서 놀면서”라는 다음의 시는 그것이 잘 묘사되어 있다.

 

  여름 장마에 호수가 깊어져 다시 그윽해지고

  서풍에 낙엽 지니 부용꽃에도 가을이 왔구나

  갑자기 몰려온 구름이 하늘을 어둡게 하더니 눈발이 휘날리고

  새로 난 창포는 물 위로 떠오르고 버드나무는 모래섬에 뒤덮였구나

 

  소동파의 서호에 대한 시는 대자연의 아름다운 변화를 잘 표현하고 있으며, 풍부한 상상력과 자유분방한 감성으로 세밀하게 관찰하여, 짧은 순간에 절묘한 자연의 모습을 포착하여 시에 담았다.

 

  소동파는 만년에 이런 말을 하였다. “나아가서는 백낙천과 비교하기 어렵고, 선현과 비교하기에는 너무도 초라하다.” 소동파와 백거이는 200년의 격차가 있지만, 공통점이 너무도 많다. 그들은 백성들의 고통을 잘 이해하였고, 특히 항주 사람들에게 선정(善政)을 베풀었다. 정치적으로 타격과 박해를 받았으며, 공교롭게도 둘 다 항주로 좌천되어 서호의 준설공사를 하였다. 항주를 떠날 때, 백거이는 “천축산(天竺山)에 가서 돌 두 개만이라도 가지고 싶다”고 하였고, 소동파는 “천축산 봉우리에 올라가서 구름의 뿌리를 잡고 이르는 곳에 심고 싶다”고 말했다. 그들은 모두 청렴했고, 항주인을 사랑하였다. 소동파가 항주에 있을 때, 항주 사람들은 그의 초상화를 집에 걸어 두고, 음식을 먹을 때는 반드시 소동파를 위해 기도를 하였다고 한다. 소동파가 항주를 떠난 후, 사람들은 그를 기리는 ‘소동파사(蘇東波祠)’를 세우고, 그가 수축한 긴 제방을 ‘소제(蘇堤)’라고 불렀다.

 

  넘실거리는 호수 위에서 반짝이는 맑은 햇빛이 좋아라.

  가랑비 오던 산색은 비가 내리니 더욱 신기하구나.

  가만히 서호를 바라보니 서시(西施)의 모습이 떠오르네.

  때로는 은은하게 때로는 짙게 치장한 모습이 서로 잘 어울리는구나.

 

  북송의 대시인 소동파(蘇東波)가 항주통판(杭州通判)으로 재임할 무렵에 쓴, 「음호상초청후우(飮湖上初晴後雨)」라는 시다. 이 시는 중국의 고대 미인 서시(西施)와 서호(西湖)를 비교한 것으로, 오랫동안 인구에 회자(膾炙)되었으며, 서호를 노래한 시 중에서 가장 뛰어난 것으로 여겨진다.

 

 

  소순, 소식, 소철을 기념하여 만든 삼소사의 3부자 상.

출처 : 이승하 : 화가 뭉크와 함께 이후
글쓴이 : 이승하 원글보기
메모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