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시대 목각탱화가 많이 남아있지 않은 이유는 그림만 그리는 탱화에 비해 제작이 더 까다로운 한편 훨씬 더 많은 공력이 들어 제작수량 자체가 적었기 때문일 것이다.
이번에 소개할 작품은 2011년 정영호 한국교원대 명예교수와 처음으로 實見한 개인소장의 木刻阿彌陀如來說法像(목각탱화)다. 1965년 보물 제421호로 지정된 남원 실상사 약수암의 목각탱화를 조사했던 정영호 명예교수는 “새로이 발견된 이 목각탱화의 도상이 실상사의 목각탱화와 거의 일치하며 조선시대 불교조각사의 한 부분을 채울 수 있는 중요한 보물급 문화재”라고 평가했다.
사찰 전각의 主尊佛 뒷면을 장식하는 그림을 후불탱화라고 하는데 아미타불 뒷면의 후불탱화는 極樂會上圖이며 석가모니불 뒷면의 후불탱화는 靈山會上圖라고 한다. 우리나라의 후불탱화는 대부분 비단이나 종이에 그려서 걸개그림으로 걸어 놓거나 붙이는 형식이다. 그런데 조선후기에 들어오면서 특별한 후불탱화가 등장하는데, 나무에 조각해 제작한 후불목각탱화다. 목각탱화는 현재까지 7점만 남아있으며 19세기에 제작된 완주 미륵사의 목각탱화를 제외하고 6점은 모두 문화재로 지정돼 있다(남장사목각탱화 보물 제922호, 제923호. 경국사목각탱화 보물 제748호. 실상사목각탱화 보물 제421호. 용문사목각탱화 보물 제989호. 대승사목각탱화 보물 제575호).
조선시대의 목각탱화가 많이 남아있지 않은 이유는 그림만 그리는 탱화에 비해 제작이 더 까다로운 한편 훨씬 더 많은 공력이 들어서 아예 제작한 수량 자체가 적었기 때문일 것이다. 그 製作工程은 일단 나무를 선정해 뒤틀리지 않게 처리하고 밑그림을 그려서 최고의 木刻僧이 정성들여 파내고 다듬은 후에 잘 건조시킨다. 옻칠(朱漆, 黑漆)을 하고 鍍金 후에 마지막으로 도금된 부조의 조각위에 畵工僧이 그림을 그린다. 화공승만 필요한 후불탱화에 비해 최소한 조각, 도금, 그림에 능숙한 세 분야의 장인이 필요하다. 조선후기 쇠퇴해가는 사찰에서 후불탱화를 천에 그린 그림이 아닌 목각탱화로 모신다는 것은 감히 생각 자체도 어려웠을 것이다.
조선시대 목각탱화에 얽힌 특별한 사연이 대승사의 목각탱화에 전해지고 있다. 원래 문경 대승사의 목각탱화(보물 제575호)는 영주 부석사의 것이었는데 1862년(철종 13년) 대승사 화재로 신축한 대승사 법당으로 옮겨 모셔졌다.
그 뒤 1869년과 1876년(고종 13년)에 부석사에서 반환을 요구하는 「等狀」 (여러 사람이 이름을 잇대어 써서 관청에 올려 하소연)을 제기해 반환을 요구한 지 7년 만에 부석사 祖師殿의 수리비를 대승사에서 지불하는 조건으로 합의를 보게 되는 「完議」에 이르게 된다. 당시의 문서인 「等狀」과 「完議」는 현재까지 보존돼 있으며 보물 제575호로 대승사 목각탱화와 함께 지정돼 있다. 목각탱화의 값으로 부석사 조사전의 수리비용을 감당한다는 것은 당시에도 목각탱화의 가치가 상당히 높았다는 것을 알 수 있는 대목이다.
새로 발견된 목각탱화는 아미타불을 중심으로 하는 극락회상도다. 主尊佛을 중심으로 여섯 보살과 두 존자를 조각했다. 주존불은 연화대좌위에 결가부좌한 좌상이며 배후에는 연꽃을 삼중으로 돌린 타원형의 擧身光背가 있고 그 위에는 피어오르는 앙련꽃 위에 좌상2구와 입상1구의 化佛을 수직으로 배치했다. 통견의 옷자락은 獅子가 있는 연화대좌까지 길게 흘러내리며 상단에는 석가의 제자인 아난과 가섭을 중심으로 오른쪽 월광보살과 지장보살을 왼쪽에는 일광보살과 미륵보살을 배치했다. 하단에는 아미타불을 중심으로 오른쪽에는 보현보살과 세지보살을 왼쪽에는 문수보살과 관음보살을 배치했다. 주존불과 보살상의 相互는 네모지고 친근하며 전형적인 18세기 도상으로 4장의 두꺼운 판재를 나비장 홈으로 끼워 맞춰 제작했다(사진1).
새롭게 발견된 목각탱화의 크기는 가로 150cm, 세로 153cm로 조선후기 最高의 木彫刻이며 도금상태도 양호하다. 기존의 목각탱화처럼 현대에 鍍金을 다시 하는 改金을 하지 않아 원래의 옛 모습을 볼 수 있어 더욱 다행스럽다. 현재까지 전해오는 목각탱화는 사찰에만 7점이 소장돼 있으며 국공립박물관이나 사립박물관에는 없다. 이제 이 목각탱화를 포함하면 우리나라의 목각탱화는 전 세계에 모두 8점만이 존재하게 된다. 잊힌 문화재의 發見은 새로운 문화재의 發掘만큼이나 값진 일이다.
김대환 문화재평론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