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장병욱의 쪽빛보다 푸르게] <24> 대금 산조 명인 이생강씨와 가족들

2019. 2. 24. 20:33율려 이야기



한국일보

[장병욱의 쪽빛보다 푸르게] <24> 대금 산조 명인 이생강씨와 가족들

장병욱선임기자 입력 2014.02.23. 20:53 수정 2014.02.23. 20:53  

민속악의 무한한 변주, 마침표는 없다

● "민속악은 곧 내 자신"이생강씨, 부산 피난 시절에 각 지역 음악 달인 19명 만나 유일하게 그 진수 전수받아

● "산조, 끝없는 변주 가능"거장의 경험이 집적된 선율 세시간 짜리로 거듭날 준비"크로스오버의 창시자" 소리도

● 민속가무악 대학의 꿈"사재론 턱도 없는 일이지만 서양 음악화된 시스템 접고 실기 위주의 교육 하고 싶어"

 

   전통 음악 중 갈채와 환성이 따르는 것은 민속 음악이다. 깊고 고요하게 흐르는 강 같은 정악은 내면적 수련의 예술이다. 그들은 우리 국악의 두 축이다.


   중요인간문화재 제 45호 대금 산조 보유자 이생강(77)씨의 생체 시계는 하루 네 시간이라는 수면 시간에 오랫동안 길들여져 있다. 삶의 시간 중 절대 부분을 이씨는 자기의 분신이나 다름없는 악기들과 함께 한다. 그는 자신을 가리켜 "나는 민속 음악을 악가무라는 종합적 실체로 아는 사람"이라 확신에 찬 어조로 일컫는다. 무용이든, 판소리든, 민요든 가리지 않고 민속악 장르라면 그 무엇이든 필요 불가결한 악기 선율로 받쳐 준 세월은 그 같은 자신감을 증명한다. 그런데 하루 네 시간이라는 인색한 수면은 혹 "서양 음악에 맞추다 보니 트랜스젠더 같은 음악이 돼버린 국악"의 몰골 때문은 아닐까


   지방 공연을 막 다녀온 뒤지만 음악적 동료이기도 한 친지들, 자신의 분신 같은 자손들을 보니 주름이 펴진다. 피리와 장고 주자 이호웅(62), 대금ㆍ피리ㆍ태평소를 연주하는 이병금(55), 준(準)문화재이자 아쟁도 연주하는 아들 광훈(49), 피리와 대금 주자인 이성준(37), 가야금을 연주하는 외손녀 윤혜영(25ㆍ중앙대 국악과3), 대금과 단소의 이범영(10ㆍ사계초등3), 단소의 이정윤(8ㆍ사계초등1), 쌍피리의 이태영(8ㆍ당산초등1) 등 아쟁 주자인 둘째 아들 관웅(39)씨를 빼고 다 모였다. 타악을 주종으로 상모 돌리기 등 기예에도 능했던 동생 성진은 세상을 떴다


   대금 퉁소 단소 소금 태평소 피리 쌍피리 등 늘 휴대하는 악기 가방 속의 악기 7개는 이씨에게는 모두가 똑 같다. 하다 못해 나무 이파리 하나를 따서 불어도 피리 같은 소리가 난다. 그러나 그의 진정한 예외성은 진기 명기나 다름없는 연주력에 있지 않다. 그는 남도 음악이 주종이지만 8도 음악을 다 떡 주무르듯 한다. "나는 민속악 하는 사람들 중 유일하게 원형을 갖고 있다." 전승된 부분의 정통을 보유하고 있다는 자신감은 그가 가진 최대의 자산이다.


   일곱 개 악기를 다 연주했던 부친 이수덕(1974년 67세로 사망)씨는 그의 적통에 대한 보증서다. 울산 출신으로 4대 독자인 그는 16세에 일본으로 건너가 운수사업으로 생계를 꾸려나갔지만 손수 악기까지 제조할 만큼 조예가 있었다. 그 문화적 DNA를 고스란히 이어받은 이씨는 민속악 특유의 포용성이 민속악의 최대 강점이라고 확신한다. "산조가 규격화된 음악이라면 시나위는 재즈죠." 이씨를 만나 산조에서도 무한한 발전의 길을 본다.


   "산조는 무한적 변주가 가능하다. 아직 발견되지 않은 가지와 줄기가 한정 없다." 실제로 그는 갖가지 유파의 산조를 정리해 가다 가지 치기의 가능성을 발견했다. 유사 선율의 반복 없이 180분이나 연주가 가능한 선율로 발전시키기도 했다. 거기에 조 옮김까지 합치면 실제 그 변화의 가능성은 무한정한 셈이다. 2007년 먼저 두 시간 짜리로 정리해 신나라 레코드에서 낸 음반 '적류(笛流)'(피리의 흐름이란 뜻)는 첫 집대성이었을 뿐더러 그의 작업을 둘러싸고 심심찮게 제기돼 온 일체의 잡음을 걷어낸 작품이었다. 낯익은 변주 방식이 아니었다.


   다채로운 선율이 덧씌워지고 발전해 나가는 양상은 거장적 경험이 집적돼 있었다. 이생강류 산조는 지금 세 시간 짜리로 거듭날 준비를 하고 있다. 이 대목에서 광훈씨는 "산조는 내가 죽을 때까지 배워야 할 음악"이라며  "이생강 산조의 학문적ㆍ이론적 정립을 이뤄 학술적 뒷받침 하는 것이 나의 임무"라고 말했다.


   현재 가야금 산조 중 최옥삼류를 공부 중인 외손녀 윤혜영씨에게 할아버지는 거의 경이의 대상이다. "경지에 오르셨으면서도 꾸준히 연습하는 모습은 놀랍다. 틈 날 때마다 부신다." 그는 "어릴 적 할아버지로부터 들어온 민속악은 곧 나 자신"이라며 "대학원에 진학해서 끝까지 민속악을 공부할 것"이라 다짐했다. 어려서부터 들어온 할아버지 가락의 영향으로 초등학교부터 가야금을 배워 국악예술중을 거친 그는 친구들이 즐겨 하는 퓨전보다 전통 음악을 고집한다. 쉽지 않은 작업인 줄 알지만 이생강류의 산조를 자신의 악기로 해보고 싶다는 꿈을 이루기 위해서는 반드시 거쳐야 할 경로다.


   이생강씨는 민속악의 산 역사가 될 운명이었는지도 모른다. 부산 피난 시절은 절호의 기회였다. 일본에서 9살에 입국, 11살부터 부채춤, 검무, 승무 등을 반주하던 소년이었다. "각 지역 음악의 달인 19명을 만나 그 진수를 전수 받았다." 하루에 7명까지 만나 공부할 때도 있었다. 스스로를 가리켜 " '전통의 정통'으로 유일한 사람"이라 자부하는 이유다. " '아리랑'도 아이춤, 할매춤 등에 따라 반주가 달라요."


   대금산조 이생강류, 강백천류, 한범수류, 서용석류, 원장현류, 박종기류, 한주환류, 김동진류 모두 8개. 그 중 인간문화재로 지정 받은 것은 이생강류와 강백천류다. 이생강류는 천변만화하는 음색과 선율로 황홀하기까지 하다. "대금은 미분음을 포함해 음역이 무한대예요. 사실 연주자의 기량에 따라 모든 음을 담을 수 있죠." E플렛음을 으뜸음(황종음)으로 삼는 정악과 달리 그런 개념조차 없는 민속음악을 만난 것은 필연이었던 셈이다. "5세에 시작했는데, 70년 넘게 불어도 새로운 악기에요."

현재 그는 32분까지 온 이생강 산조를 두 시간 길이로 늘이고 있다. 말마따나 대나무가 할 수 있는 최대의 시간이다. 그는 "판소리가 아니라 즉흥의 음악인 시나위를 악기화 한 것이므로 내 산조는 무한대"라고 말했다. 인간의 육성에 가장 가까운 음악을 지향하기 때문이다. "올해 늦가을께 음반으로 증명할 작정이다."


   그는 국악적 변용의 가능성을 최대치로 입증해 왔다. 그러나 통념의 저항은 만만찮았다. "1996년 문화재 지정 당시 딴따라라고 해서 말 많았죠." 국악의 5음으로 양악의 7음계를 내고, 가요와 재즈를 자유자재로 드나들어 정통성 시비가 일었다. 국립국악원 자료 등을 뒤져 한주완 등의 고음반을 발견했다. 현장조사를 통해 19세기 중반 한숙구로부터 한주환을 거쳐 이생강에 이르는 계보를 밝혀 냈다.

전흔이 뚜렷하던 1950년대 문화사절단 활동을 그는 떠올렸다. "당시 속악을 천대하고 폄하했던 것은 (민족 정신을 말살하려 든)일제의 간계였어요." 미군 부대 가서 반주해 주다 연주의 아쉬움을 느끼고, 5음계 내에서의 새 시도로 눈을 돌렸다. 명창 박동진은 그 사실을 두고 "크로스오버의 창시자는 이생강"이라 했다. 사실 밥 벌기 위해, 살기 위해 한 것인데 결국 듣는 이들을 위한 공감의 음악이 된 우리 크로스오버의 전사(前史)다.


   그 무렵 이생강씨김소희 박귀희 한영숙 등 명창ㆍ명무들과 함께 한 무대는 국악이란 이름으로 가능한 최고의 무대로 기억된다. "소름 끼친다"고들 했다. 산조의 시옷 자도 모르는 외국 사람들이 보내준 기립 박수와 환희는 그가 "먹고 사는 환상"이다. 국악을 둘러싼 현실이 냉혹할수록 그리워지는 환상이다. 아버지와 아들은 현실을 말했다.

"사람들이 이제 그런 음악을 당연한 것처럼 하고 있지 않느냐. 아이러니까지 느낀다"는 아들의 말에 "장르의 구분 없이 모든 음악을 다 하는 게 진정한 자기화"라는 아버지. 자신의 전공을 이어 받아 잘 하고 있는 아들에게 늘 자신을 능가하라며 채찍질이다.


   예성국악원 대표이기도 한 광훈씨의 생활은 교육과 공연이다. 금융실명제 전에는 바이어 접대를 위한 공연 등 여기저기서 부르는 곳이 많았다. 이생강씨는 한창 때, 한 달에 40여회 무대를 가졌으나 지금은 5~6회 정도다. 1년으로 치면 최대 70~80회라는 게 국악인 중 가장 비싼 공연료를 받는 그의 활동 내역이다. 지금 국가적ㆍ제도적 지원이 없다면, 민초의 음악은 고사할지 모른다는 게 이들의 진단이다.

   열악한 상황이지만 이들은 말하자면 '공격형 경영'을 고집한다. 국악 관련 온오프 회사 예성 국악엔터테인먼트(대표는 광훈씨의 아내 한송류)는 아버지가 사비를 들여 만든 책, 영상물, 악기, 음반 등 음악 파생품 218가지를 세상에 알리는 거점이다. 온오프 라인의 자회사 '단소랜드'에서는 특허 출원한 PVC 단소는 물론 대금 피리 소금 퉁소 태평소 쌍피리 등을 제작ㆍ판매 중이다. 이생강씨는 모두 7권에 달하는 '민속악 대금 교본''민속 음악 단소 교본'의 저자이기도 하다. "표준어(궁중 음악)만을 하는 국립국악원에 비기자면 나는 8도 방언을 집성한 셈이죠."


   아직도 그의 대금 버전 '대니 보이'나 '서머 타임'은 청중의 넋을 빼놓는다. 더러는'칠갑산'으로 화려한 명성을 이어가기도 한다. "이 시대에 맞는 좋은 음악"에 대한 고민과 전략의 산물이다. 그 모든 시도는 완전히 서양 음악화된 교육 시스템을 접고 실기를 위한 콘서바토리인 '민속가무악 대학'의 꿈에서 만개할 것이다. "사재로는 턱도 없는 일인지라 대기업 회장을 설득해 지원 약속을 받았으나 당사자가 세상을 뜨고 나니 물거품이네요…."

그는 전주 무형유산원이 5년을 목표로 수립한 '시나위ㆍ산조 원형 복원 작업'에도 참여하고 있다. 그에게는 두둑한 배포가 있다. "대금이 나 때문에 대중화됐잖아요?" 그 말에 토를 달 한국인은 없을 것이다. "중국의 영향으로 완전 서양화돼버린 북한의 국악은 기초부터 가르쳐 서서히 동화되도록 해야죠."


장병욱선임기자 aje@hk.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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