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9. 6. 29. 00:05ㆍ우리 이웃의 역사
일본사를 움직인 100인
메이지 일본의 건설자
요시다 쇼인
도라지로(寅次郞), 吉田松陰
출생 | 1830년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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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망 | 1859년 |
국적 | 일본 |
대표작 | 《유수록(幽囚錄)》 |
요시다 쇼인은 존왕파 사상가이자 교육자로 메이지 일본의 설계도를 그린 선각자로 꼽힌다. 그는 "천하는 천황이 지배하고, 그 아래 만민은 평등하다."라며 존왕양이 운동의 사상적 기반을 마련했다. 특히 정한론과 대동아공영론을 주장해 일본의 제국주의에 큰 영향을 끼쳤는데, 송하촌숙(松下村塾, 쇼카손주쿠)을 세워 초대 조선 통감 이토 히로부미, 초대 조선 총독 데라우치 마사타케 등 조선을 침탈한 주역들을 길러 냈다. 아베 신조 전 일본 총리는 취임식을 앞두고 자신이 가장 존경하는 인물로 쇼인을 꼽았는데, 한국인에게 그는 일본 우익 세력의 원조로 여겨지는 인물이기도 하다.
요시다 쇼인은 1830년 조슈 번(야마구치 현) 하급 무사 집안의 둘째 아들로 태어났다. 그는 다섯 살 때 군사학자(兵學子)이자 당주인 숙부의 양자로 입적되었다. 어린 시절 숙부에게 병법을 배웠고, 11세 때에는 번주에게 병법을 강의할 정도로 탁월한 재능을 보였다. 18세 때 숙부 아래에서 독립해 군사학자로 활동하기 시작했으며, 1850년 규슈에 가서 병법을 연구했고, 이듬해에는 에도에서 사쿠마 쇼잔에게 서양 학문과 군사학을 배웠다.
1853년 7월 에도 만 우라가 항에 미국 동인도 함대 소속 사령관 페리 제독이 이끄는 4척의 흑선(黑船, 구로후네)이 나타났다. 페리 제독은 일본에 개항을 요구하는 국서를 전달한 후 떠났고, 다음 해 다시 요코하마에 상륙했다. 그때까지 나무로 건조한 선박이나 유럽의 상선을 보아 왔던 일본인에게 초대형 대포를 장착한 어마어마한 크기의 증기선은 엄청난 충격을 안겨 주었다. 페리의 내항 이후 일본은 서양 문물이 급격히 유입되면서 근대 국가의 틀을 갖춰 나갔다.
이 사건은 쇼인에게도 큰 영향을 끼쳤다. 쇼인은 이미 규슈 등을 여행하면서 유럽 신문물을 접하고, 미토 번에 방문하여 미토학을 접하면서 식견을 넓힌 바 있었다. 이때의 경험으로 쇼인은 군사학자로서 정체되어 있는 막번체제 아래에서는 선진화된 구미 열강을 따라잡지 못할 것임을 깨달은 터였다. 페리의 내항은 이런 위기의식을 현실로 받아들이게 하는 계기가 되었다. 쇼인은 페리의 함선을 보고 친구에게 '배도 대포도 적수가 안 된다'라는 편지를 쓰기도 했다. 결국 쇼인은 서구의 신문물과 정치 체제를 직접 체험하지 못하면 구미 열강에 대항할 수 없다고 생각했다. 그리고 막부에 서양 군사학과 무기를 도입할 것과 그를 위해 인재들을 해외에 파견해야 한다는 요지의 정책을 제안했다.
그러나 이듬해 페리가 요코하마에 다시 찾아올 때까지 막부는 물론 각 번들조차 위기의식을 느끼지 못했다. 타성에 젖어 아무것도 하지 않는 막부에 개탄한 쇼인은 〈장급사언(將及私言)〉을 올려 다시 한 번 자신의 생각을 간언했으나 성과는 없었다. 결국 그는 1854년 페리 함대의 압박으로 미일 화친조약이 체결되자 시모다 항에 정박 중이던 미군 함선에 승선하여 밀항을 시도했다. 이 시도가 실패하여 쇼인은 국법을 어긴 죄로 노야마 감옥에 수감되었다.
14개월간 감옥에서 생활하면서 쇼인은 《유수록(幽囚錄)》을 집필했다. 이 책에는 그가 밀항하려던 이유와 그 배경이 된 사상이 담겨 있다. 특히 무력을 갖추어 주변국을 공략해야 한다는 쇼인의 주장은 훗날 정한론각주1) 과 대동아공영권각주2) 사상의 기반이 되었다. 그는 일본을 위기에서 구하려면 막번체제에 기대서는 안 되며, 민중이 단결하고, 조속히 무력 준비를 갖추어 에조치(홋카이도)를 개간하여 제후로 봉하고, 류큐(오키나와)를 다른 번과 동등하게 취급하며, 조선을 공격하여 인질과 공물을 바치게 한 후 만주와 대만, 루손 등까지 정복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러시아와 미국의 강화가 이루어진 상황에서 구미 열강과의 마찰을 피하고, 서구식 무기를 도입하여 그들과의 교역에서 입은 손실을 인근 만주나 조선 등을 침략해 되찾자는 것이었다.
쇼인은 감옥에서 나온 이후에도 고향 집에서 유폐 생활을 하게 되었다. 그러나 이런 상황 속에서도 학문을 닦고, 지인들과 편지를 주고받으며 정세에 관한 정보를 수집하고, 일본의 위기를 구할 방법을 궁구해 나갔다. 감옥에서도 죄수들을 모아 현재 일본의 위기와 자신의 사상을 전파했던 그는 출옥 후 고향집에 송하촌숙을 세워 젊은 개화 지도자를 길러 냈다.
그는 신분과 계급에 관계없이 제자들을 받아들여 자신의 사상을 전파했는데, 3년 정도의 짧은 기간이었지만 이곳에서 배출된 인물들은 메이지 신정부의 요직을 차지하고 일본 정계와 국제 관계에 큰 영향을 미치게 된다. 이들은 서양의 것을 배워 일본을 위기에서 구해야 한다는 쇼인의 가르침대로 서양의 직조술, 대포 제조술, 조선술, 육군 군제 등 모든 것을 받아들여 근대 일본의 모습을 형성하는 데 핵심 역할을 했다.
1858년 막부는 천황의 칙허 없이 미일 수호통상조약을 체결했다. 이에 각지에서 반막부 운동이 일어났다. 막부는 이들 세력을 대대적으로 탄압하는 안세이 대옥을 일으켜 100여 명 이상의 지사들을 감옥에 가두고 사형시켰는데, 이때 쇼인도 체포되었다. 쇼인은 서양 오랑캐에게 일본이 굴복한 것은 국체가 바로 서지 않았기 때문으로, 천황의 친정이 이루어지던 고대에는 국체가 온전하여 한반도를 굴복시켰으나(임나일본부설과 진구 황후의 한반도 정벌론을 일컬음) 무가 정권이 들어선 이후에는 명나라에 조공무역을 하는 등 국체가 파괴되었다고 주장했다. 이런 사상 때문에 쇼인의 송하촌숙은 존왕양이 운동의 거점이 되었고, 막부의 주목을 받게 된 것이었다.
쇼인은 에도로 압송되어 처형되었다. 29세의 젊은 나이였다. 그는 짧은 생을 살았지만 이토 히로부미, 다카스기 신사쿠, 구사카 겐즈이 등 그의 문하에서 세 명의 총리와 여섯 명의 장관이 배출되는 등 메이지 유신의 지도자들이 탄생하여 그의 사상을 실현시키는 데 총력을 기울였다. 특히 이토 히로부미는 1907년 정미7조약각주3) 을 체결한 후 쇼인의 무덤에 이를 고했으며, 2006년 아베 신조 총리는 가장 존경하는 인물로 쇼인을 꼽을 정도로 근대 이후 일본의 정치계에 그가 끼친 영향력은 그 누구보다 크다. 그의 위패는 현재 야스쿠니 신사에 신위 제1호로 모셔져 있다.
· 1854년 : 미일 화친조약 체결. 쇼인은 밀항을 시도했으나 실패하고 체포되다.
· 1858년 : 미일 수호통상조약 체결. 안세이 대옥으로 다시 체포되다.
· 1907년 : 쇼인의 송하촌숙에서 수학한 이토 히로부미가 정미7조약을 체결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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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신화의 시대부터 인간의 시대까지, 100인의 인물로 관통하는 일본사! 일본사에 한 획을 그은 100명의 인물을 중심으로 오늘날 일본과 일본인의 정신을 이룬 역사, 문화, 사상에 대해 살펴본다. 정치가, 사무라이, 군인, 사상가, 예술가 등 폭넓게 다루었으며 그들의 행적과 사고방식을 상세히 서술하여 일본의 역사를 쉽고 흥미롭게 읽을 수 있도록 구성하였다.접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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