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9. 7. 6. 04:23ㆍ우리 이웃의 역사
이야기 미국사
인디언 문화의 절정, 아즈텍 문명
마야 문명이 암흑기로 빠져들면서 혼란의 시대가 찾아왔다. 신관의 지배하에 비교적 평화롭게 살던 여러 도시에는 방벽이 세워졌고, 온건했던 종교의 성격도 점차 거칠어졌다.
대변화의 원인은 치치멕이라고 불리는 호전적인 북방 민족이었다. 그들은 깃털과 물감으로 몸을 꾸미고 평화로운 도시들을 마구 공격했다.
"이곳의 모든 것들은 내 것이다!"
그들은 닥치는 대로 가축을 죽이고 약탈을 자행했으며, 아름다운 여자를 보면 노예로 삼았다. 그들이 나타나는 곳에는 공포가 소용돌이쳤고 도시는 아수라장이 되었다. 하지만 그들이 포악스럽게 공격을 해왔다고 해서 모든 도시들이 단번에 정복되거나 완전히 짓밟힌 것은 아니었다.
멕시코 분지의 도시들 중에는 치치멕을 지배자로 맞아들여 보호를 받는 곳도 있었고, 상당 기간 저항한 도시들도 있었다. 멕시코 분지 밖에 있었던 몇몇 도시들은 고도로 발달한 자신들의 문화를 완고하게 지키며 후대 사람들에게 강한 영향을 미쳤다.
이러한 호전적인 도시 중 치치멕의 피를 이어받은 톨텍족의 도시 툴라는 이루 말할 수 없이 잔악했다. 툴라는 신관에 의해 지배되고 있던 멕시코의 다른 도시들과는 달리 전사들의 도시였다. 군사 지도자는 도시를 약탈하기 전에 위엄 있는 목소리로 병사들에게 소리쳤다.
"피에 굶주린 신들을 숭배하라! 그리고 너희들은 가능한 한 많이 약탈하여 그 물건들을 너희들 생활에 쓰도록 하라!"
툴라를 중심으로 한 툴텍족의 사회는 군대 조직을 근간으로 일사불란하게 움직였고 그 분위기는 잔학할 정도였다.
톨텍족의 문명은 1100년경 멸망하기까지 유카탄 반도일대는 물론 북아메리카의 미시시피 강 유역까지 영향을 끼쳤다. 특히 야만스런 유랑민 집단인 아즈텍족에게 그 전반적인 생활이 전해져 아즈텍족이 멕시코의 패자로 성장하는 기틀을 마련해 주었다. 톨텍족에 관한 전설도 전해진다.
톨텍족의 믹스코아틀 왕에게는 토필진이라는 아들이 있었다. 왕은 어린 토필진에게 이렇게 말했다.
"너는 장차 왕이 될 사람이니 공부하는 것을 게을리하지 말아라."
토필진은 청년 시절에 신관이 되기 위해 학문에 매진한 끝에 학문과 기예의 신인 케찰코아틀을 모시는 대신관이 되었다. 그 후 아버지의 뒤를 이어 왕위에 올랐다. 그리고 이름을 고치겠노라고 선포했다.
"자, 오늘부터 짐을 케찰코아틀이라고 하라!"
그것은 신관에 모셔진 신의 이름을 왕의 이름으로 부르던 당시 관습에 의한 것이다.
950년경, 그는 톨텍족의 수도를 멕시코 분지의 북단으로부터 툴라까지 확장시켰고, 온갖 문명의 이기를 전파했다. 그러던 어느 날 그는 신하를 불러 명령했다.
"이제 싸움의 신인 테스카틀리포카보다 온화하고 자비로우신 케찰코아틀을 주된 신으로 섬기도록 하라."
그러자 분노를 참지 못한 테스카틀리포카가 소리쳤다.
"무엇이라고? 그런 무엄한 말을 입 밖에 내다니 용서할 수 없다! 너에게 벌을 내리고야 말겠노라."
어느 날 밤, 테스카틀리포카는 신통력을 써 노인으로 둔갑한 뒤 토필진을 찾아갔다.
"자, 그대 토필진이여 마음껏 취하라. 그리고 흥분하라!"
토필진은 만취했다. 그러자 테스카틀리포카는 토필진의 누이동생 케찰페틀라틀을 토필진과 한방에 두고 떠나버렸다.
다음날 아침 토필진은 동정을 잃고 돌이킬 수 없는 부끄러운 짓을 했음을 깨달았다. 토필진에게는 하늘이 무너지는 순간이었다. 그는 신하들을 불러 말했다.
"그대들이여! 그동안 충정에 감사하오. 이제 나는 더 이상 왕위에 앉을 자격이 없소!"
그는 권좌를 내놓고 충실한 신하 몇 명과 유랑을 떠났다.
전설 전반부는 종교 분쟁을 통한 툴라의 분열을 의미한다. 후반부에는 인간 케찰코아틀과 신 케찰코아틀이 혼연일체가 된다. 그리고 툴라를 떠난 토필진은 문화와 종교의 중심지로 유명했던 촐룰라에 20년간 체류하다가 뱀을 서로 얽히게 해서 만든 뗏목을 타고 망망대해로 사라져 버렸다.
"나는 해가 돋는 방향에서 반드시 돌아올 것이다."
한편 톨텍족의 뒤를 이은 아즈텍족은 그들의 선조가 멕시코 북동부의 '아스틀란'이란 동굴에서 발견되었기 때문에 그렇게 불려졌다. 그들은 험난한 생활 속에서도 늘 소중하게 간직하고 있는 것이 있었다. 그것은 무서운 모습의 나무 조각상으로 4명의 신관에 의해 지켜지고 있었다. 부족이 이동할 때면, 마치 옛날 헤브라이인이 모세의 십계판을 담은 상자를 들고 시나이 들판을 헤맨 것과 같이 반드시 나무 조각상도 함께 운반되었다. 그 나무 조각상이 바로 아즈텍족의 신이었다.
전설에 따르면 이 신의 어머니는 과부로서 딸 하나와 수백 명의 아들이 있었다. 어느 날, 거룩한 장소를 정성들여 청소하던 그녀는 불가사의한 힘을 가진 작은 깃털 공을 주워 그것을 가슴에 품었다. 그러자 이상하게도 배가 점점 불러왔다.
"엄마가 이상하다. 저것은 신의 뜻이 절대 아니야! 우리는 너무 수치스러워서 고개를 들고 살 수 없게 되었어!"
"그래! 맞아. 이 수치는 죽음으로써만 보상될 거야!"
자식들이 모두 이렇게 결의하고 한꺼번에 그녀를 죽이려고 다가갔다. 그때 갑자기 그녀의 몸 안에서 불뱀을 손에 든 아이가 튀어나왔다.
"무서워하지 말라."
그리고 그 아이는 무기를 사용하여 덤벼들던 그녀의 자식들을 모조리 죽여버렸다. 이렇게 해서 아즈텍족의 광폭한 싸움의 신인 우이칠로포치틀리가 탄생했다. 문자 그대로 '왼손잡이 벌새'라는 뜻이다. 이름만 볼 때는 전혀 광폭한 느낌이 들지 않지만, 사실은 멕시코의 모든 신들 중에서 이 '왼손잡이 벌새'만큼 인간의 피를 탐한 신은 없었다. 그리하여 아즈텍족은 매년 수백, 수천의 인신제물을 제단에 올려놓을 수밖에 없었다. 그들은 제물을 얻기 위해 타부족들과 전쟁을 자주 치렀다.
"자, 올 7월에는 30명의 부녀자들을 제단에 올려야 합니다. 그러려면 이번 싸움에서 반드시 승리해야 합니다. 그래야 재앙이 없게 됩니다."
아즈텍족이 수도 테노치티틀란에 정착한 것은 1325년경이었다. 초기에는 물고기, 오리, 개구리 등을 옥수수나 콩, 그리고 건축 재료인 석재 등과 물물교환하면서 살았다. 그러나 전쟁이 일어나면 마치 성난 맹수처럼 용맹스럽게 싸웠다. 그들은 다른 여러 지방들로부터 도망자, 반역자, 모험가 등 갖가지 유형의 사람들을 받아들여 인구를 증가시켰다. 이를 기반으로 주위의 여러 부족들을 정복하고 정복민들을 포로로 삼았다.
그들의 정치 조직은 형제나 모계에서 가장 가까운 사람이 왕위를 계승하였다. 최고 통수권자인 왕의 명령이면 제국 전체의 힘이 한곳으로 집중될 수 있을 정도로 왕의 힘은 막강했다.
한편 토지는 기본적으로 부족 단위의 공동 소유였으며, 부족 평의회가 하급의 각 씨족에게 다시 분배했다. 이 과정에서 땅이 없는 자들도 많았다. 그들은 세습된 사유지나 반사유지의 고용노동자가 되기도 했고, 빚으로 인해 노예가 되는 경우도 있었다.
아즈텍족의 여러 도시에서는 상품을 교환하는 장이 자주 열렸다. 큰 장이 서면 식물, 의복, 흑요석 제품 등 갖가지 상품들이 거래되었고, 금이나 옥돌, 새의 깃털 등으로 만든 장식품들도 선을 보였다.
그들은 천문학과 수학에서도 마야인 못지않은 빼어난 소질을 가졌었다. 1년을 365일로 잡고 윤년에는 윤일을 두는 정확한 달력을 사용했고, 20진법에 입각한 실용적인 기수법을 사용하였다.
이러한 아즈텍 문명이 15세기 초에 밀어닥친 외부의 물결에 그렇게 쉽게 무너진 이유는 무엇일까? 그것은 우선, 그들 사회가 피정복민을 기반으로 이루어졌다는 점이다. 그리고 종교와 관습이 사실상 무너지기 쉬운 약점들을 갖고 있었으며, 무기 역시 유럽인들과는 상당한 수준 차이가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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코르테스의 아즈텍제국 정복
시대 | 1521년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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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가/대륙 | 아메리카 |
에스파냐의 군인 에르난 코르테스가 600명의 부하를 이끌고 지금의 멕시코 일대에서 번영하던 아즈텍제국각주1) 을 정복했다. 수백만의 인구를 자랑하던 아즈텍이 소규모의 유럽 군대에 맥없이 무너진 것은 유럽인들이 들여온 천연두가 인구의 대부분을 죽이면서 사회가 큰 혼란에 빠졌기 때문이다. 정복 후 아즈텍 수도 테노치티틀란은 이교도의 야만적인 도시로 간주돼 무참하게 파괴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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참조
- ・ 시대 구분은 한국사의 흐름에 맞추었다.
- ・ 서기 1년 이전의 시대는 교과서에서 쓰이는 '기원전' 대신 '서기의 앞 시기' 라는 뜻에서 '서기전'으로 표기했다.
- ・ 한국사의 연대는 1895년까지는 음력, 태양력을 도입한 1896년 이후는 양력으로 표기했다. 세계사의 연대 표기는 중등 교과서에 따랐다.
- ・ 한글 맞춤법과 외래어 표기는 중등 교과서와 국립국어원에 준하되 편집의 필요에 따라 부분적으로 변화를 줬다.
출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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