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론 - 차 이야기 / 한국차문사 by 반취다도교실

2019. 7. 9. 07:14차 이야기



한국차문화사

2002.02.02 03:45

서론 - 차 이야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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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차는 인도를 비롯한 동남아 일대와 중국 남부지방이 원산지로 알려지고 있다. 그러나 오늘의 세계에서 차를 상음하지 않는 민족은 없다. 일인당 소비량을 보면 영국을 으뜸으로 스웨덴·노르웨이·덴마크·프랑스 등, 유럽 사람들이 생산지에 사는 동남아 사람들보다 더 차를 즐기고 있다.

   시베리아 원주민이나 몽골·티베트인들은 겨울이 되면 추위가 극심하고 공기가 건조한 환경조건 때문에 몸의 수분이 결핍되기 일쑤여서 갈증을 해소하는 생존 수단으로 차를 마시고, 중국 중북부 지방은 자연수가 있다고 해도 수질이 나빠 그대로 마실 수 없기에 흐린 물을 맑게하는 효능의 차가 필수품이 되어 있다. 중국이 차를 공산품이 아닌 농산물로 정한 일이나, 중·일(中·日)전쟁 때 소련이 중국에 비행기를 원조하고 대신 차를 가져가는 식의 일화들은 그래서 생겨난다.

   차로 인해 일어난 전쟁 중 유명한 것은 미국의 독립전쟁과 영국·청나라 간 아편(阿片)전쟁을 꼽을 수 있다. 미국의 독립전쟁은 1773년, 당시국 수상이던 F·노스가 신대륙 식민지 상인들에 의한 차의 자유 거래를 금지시키고, 차에 높은 관세를 부과한 것이 원인이 되었다. 예전처럼 차를 마실 수 없게된 보스톤 시민들은 이에 항의하여, 마침 항구에 정박 중인 무역선을 습격, 배에 실려있던 차를 모두 바다에 던져버렸다. 그러자 노한 영국은 군대를 파견해 응징하려 했고, 여기 보스톤 시민들이 민병대를 조직해 맞선 것이 미국독립전쟁의 직접적인 발단이 된 것이다.

  또 아편전쟁(1840-1842)은 영국 국민들의 차 소비가 늘어나 수입이 급증하자, 기존의 은(銀)이나 모직물·향료 등으로는 무역적자를 감당할 수 없어 인도산(産)의 아편을 중국에 수출하기 시작한 데서 비롯되었다.  

   차로 인해 생겨난 이와같은 일화들은 차가 인간생활의 필수적인 기호(嗜好)음료로서 인류 문화(文化)에 끼친 영향이 적지않음을 시사한다. 오늘날 술·담배·커피 등과 함께 인류가 애용하는 기호품(嗜好品) 중 가장 오랜 역사를 갖고 있는 것이 차라는 사실에 주목할 필요가 있는 것이다.


   기록상으로 볼 때 우리나라의 차는 1천3백년여의 역사를 가지고 있다. 김부식(金富軾)삼국사기(三國史記) 신라(新羅) 흥덕왕(興德王) 조에 이르기를,

  " …흥덕왕 3년, 당(唐) 사신 대렴(大廉)이 돌아올 때 차 종자를 가지고 왔다. 흥덕왕은 이를 지리산(智異山)에 심게 했다. 차는 선덕왕 때부터 있어왔는데 이때로부터 더욱 성행하게 되었다…"고 했다.

   이에 근거하여 중국으로부터 차가 전래된 시기를 흥덕왕 3년인 서기 828년으로 보고 있지만, 그러나 차는 선덕왕 때부터 있어왔다고 했으니 선덕왕(善德王)은 신라 제27대왕으로 그 재위기간이 근 2백 년전인 632년부터 647년이다.      
(僧) 일연(一然) 삼국유사(三國遺事)에서 경덕왕(景德王)과 충담선사(忠談禪師)가 만나 차를 나누는 장면을 보다 구체적으로 전하고 있다.

   " …스님이 걸망을 푸니 차와 다구(茶具)가 나왔다. 정성껏 차를 달여 경덕왕께 드리니 왕은 그 맛의 은은함과 기이한 향기를 극찬했다. 충담은 주위의 신하들에게도 차를 나누어 주었다…"

   경덕왕은 신라 제35대 왕으로 그 재위기간이 742년부터 765년이니 세계 최초로 다경(茶經)을 썼다는 육우(陸羽)가 막 아기로 태어나 한참 자랄 무렵의 이야기다.
더 거슬러 올라가면 유사(遺事)의 가락국기(駕洛國記)에도 차 이야기는 있다. 김수로(金首露)왕허황후(許皇后)의 혼인설화에 이르기를, 아유타(印度의 옛이름)에서 시집올 때 가지고 온 예물 중에 차나무씨가 있어 김해(金海)에 심게 했다 하였다. 뿌리가 밑으로 곧게 뻗는 차나무는 한 번 심으면 옮겨서 살지 못하는 특성이 있으므로, 여자가 시집갈 때 차씨를 가져가 뒷뜰에 심는 풍습은 "나는 이제 이 집의 귀신이 된다"는 혼인 서약과 같은 뜻인 것이다.

   가락국에서는 또 선왕의 제단(祭壇)이나 국가적인 의식에도 차를 올렸는데 이는 불사이군(不事二君)의 충절(忠節)과 효(孝)의 자세를 가다듬는 행사였다. 이런 역사 풍속이 모두 가락국에서 시작되었다고 전한다.  

   식물학적(植物學的) 측면에서 접근하면 더욱 놀라운 사실이 발견된다.
일반적 시각에서는 차문화의 대륙 영향설을 부인하기 어려우나 식물학적으로 보면 차나무는 은행나무와 같이 고생대 지질(古生代 地質)에서나 자생(自生)하는 근원(根源)식물에 속한다. 직근성(直根性)이고 심근성(深根性)이어서 시생대(始生代) 지질이 아니면 자생(自生)은 어렵다는 말인데, 우리나라 지리산 일대가 이에 적합한 반면 인도나 스리랑카 중국에는 차나무가 자생할 만한 토양(土壤)이 없다는 것이다.

   이와같은 주변의 여러가지 사정은 차가 중국에서 전래된 것이냐 인도에서 온 것이냐 아니면 우리 토산(土産)이냐의 논쟁을 부를만한 충분한 과제가 된다. 그러나 우리 사가(史家)들은 토산차(土産茶) 설(說)에 신중한 연구도 없이, 그저 불교의 전래와 함께 중국에서 건너온 것으로 못박아 놓고 보기만 하고 있다. 사대주의(事大主義)와 식민사관(植民史觀)의 병폐라 아니할 수 없다.  


  신라(新羅)의 차문화(茶文化)는 고려(高麗)로 이어지면서 불교의 성행과 더불어 더욱 화려하게 피어났다. 특히 고려는 임금도 불타(佛陀)의 제자 임을 자처하던 시대라 손수 차를 달여 부처에게 공양하는 일이 흔했다. 사원에서는 음다(吟茶)의 명상을 통해 견성성불(見性成佛: 본연의 천성을 깨닫고 부처가 되는 것)하도록 이끌었고, 선비사회는 끽다(喫茶)로 안빈낙도(安貧樂道)하며 풍류(風流)를 즐겼다. 또한 황실에서는 모든 국가행사에 진다의식(進茶儀式)을 앞에 두어 예경(禮敬)의 표상(表象)으로 삼았다.

  그러나 조선조(朝鮮朝)에 와서는 억불숭유(抑佛崇儒)로 인한 불교의 쇠퇴와 함께 그 빛을 잃어갔다. 뿌리가 깊은 생활문화이기에 단절될 성질은 못 된다 하더라도, 적어도 표면에서는 사라지다시피 했다.

   보다 치명적인 것은 국토를 피폐하게 만든 임진왜란과 근세 35년 국토를 강점(强占)까지 했던 일본의 침략이었다. 우리 역사의 찬란하고 자랑스러운 부분에 대한 파괴 훼손을 일삼았고 국토 강점시기에는 역사왜곡과 비하·모략으로 아예 문화를 말살하려 했다.

   히데요시(豊臣秀吉) 시대 센리큐(千利休)에 의해 일찌기 차가 동양문화의 정수(精髓)임을 알게된 그들은, 이 과정에서 무엇보다 다도(茶道)를 오직 저희들의 것으로 세우고자 그 모태(母胎)격인 한국의 차문화를 흔적없이 지우려 했다. 원효와 설총의 가을 예찬(禮讚)이나 악성(樂聖) 우륵의 가야금 일화같은, 우리 민족의 정서를 대표하는 감동적인 이야기들이 하나씩 둘씩 식자들에 의해 교묘하게 일본화되었다.  

  우리는 정말 껍데기만 남은 상태에서 광복을 맞았고, 광복(光復) 후는 공산주의의 위협에서 우리를 지키는 일과 가난에서 벗어나는 일이 더 급했다. 이렇게 바쁘게 휘돌아 흐른 역사의 격랑 속에서 찬란했던 차문화는 어쩔 수 없이 망각되어 갔다. 기억에서 사라진 상태를 일컫는 망각(忘却)위에, 착각 환각 등 외계의 자극에 의해 "잘못 지각하는" 망각(妄覺)이 겹친 이중 망각이었다.  

   하지만 생활문화란 과학문명과는 달리, 그 터(大地)를 근원으로하는 삶에서 자연발생적으로 피어나는 것이다. 인위적으로 지운다 해서 없어지는 것이 아니요, 일시 지워졌다 해서 완전하게 사라지는 것도 아니다. 흔적조차 없어진듯 했지만 어느 골짜기엔가 차나무는 살아있었고, 그것이 차인지도 모르는 사람들의 고향감정을 건드려 우려 마시게 했다. 이 땅의 차 마시는 풍습은 그렇게 다시 살아나고 이어질 수 있는 토착 문화였다. 세상이 안정을 찾고 삶의 질이 나아지면 차는 문화생활의 중심수단이 되고, 예술적 상징이 되어 때로 역사의 전면에 나서기도 했다.


   1970년대 들어와 일기 시작한 "우리 것 찾기 운동"은, 그 시작이 차생활 부활운동이었다. 앞장 선 인사들은 영·호남에서 어렵지않게 그 맥을 찾아냈다. 영남에서는 효당(曉堂)선생, 호남에서는 의재(毅齋)선생이 일으켜놓은 다풍(茶風)을 대중에게 널리 알리는 역할만으로도 초기 차운동은 반향이 컸고 보람도 있었다.

   그러나 대중의 인식은, 일찌기 호암(湖巖) 문일평(文一平)이 지적하였듯이 차에 대해 너무 무식(無識)한 상태여서 차를 바르게 이해하고 생활하도록 인도하기까지는 쉽지 않았다. 웬만한 지식인들도 "차"라는 글자를 마시는 음료의 대명사(代名詞) 정도로 알고 있었다. 심지어 커피나 코코아, 쥬스까지도 차의 일종으로 여겼다. 차를 바르게 알려주려고 "다도(茶道)"를 이야기하면 대뜸 "일본 것을 왜 우리 문화에서 논하느냐"며 상대하지 않는 경우도 많았고, 성급한 사람들은 반일(反日)감정까지 담아 얼굴 붉히고 목청 높여 "얼빠진 짓"이라고 비난했다.

   어처구니없는 일은 이에서 끝나지 않고 주무부처인 당시의 보건사회부조차 차를 굳이 "녹차(綠茶)"로 분류하면서, 국산차(國産茶)의 일종이라 칭하는 우(愚)를 범하니 차문화 부활운동은 걸음마 단계에서부터 헤맬 수 밖에 없었다. 차선생(茶先生)들은 차(茶)라는 글자가 대명사가 아닌, 고유명사(固有名詞)라는 기초부터 힘들게 설명해야 했다.

   …커피나무가 따로 있듯이 차나무도 따로 있습니다. 커피는 열매를 얻어 가공하지만, 차는 잎을 따서 가공합니다. 커피나무 열매 가공한 것을 커피라 하고 그 열매 우린 것을 커피라고 하듯이, 차나무 잎 가공한 것을 차라 하고 그 우린 물을 또한 차라고 합니다. 커피와 차는 동양과 서양을 구분하듯 지구촌을 대표하는 양대 음료인데, 소비량으로 말하면 차가 커피의 수십배에 이릅니다…

   …세계 어느 곳을 가도 커피는 커피라고만 부릅니다. 아프리카에서도 커피이며 아라비아에서도, 태평양의 작은 섬에서도 커피입니다. 차 역시 세계인이 같이 발음하는 동의어(同義語)입니다. 우리나라가 고려시대부터 차(茶)를 "차"라고도 읽고 "다"라고도 했듯이, 중국에서도 광동 발음은 차(cha)이고 복건 발음은 테(te)였는데 이 복건성 발음이 유럽에 전해지면서 테 또는 티(tea)로 정착하게 되었을 뿐입니다. 차·다·테·티가 모두 같은 말인 것입니다…      

    …차와 커피는 그 성분과 효능이 거의 같습니다. 커피의 카페인을 동양의 언어로 번역하면 다정(茶精)이 됩니다. 물론 몸에 좋은 음료라는 점도 같습니다. 그럼에도 차를 마시자는 것은, 커피는 1백% 수입에 의존하지만 차는 우리 땅에서 생산되기 때문입니다. 강한 목소리로 커피 유해론을 펴는 것은 원두커피가 아닌 인스탄트 제품을 가르키는 말입니다. 인스탄트 화 하는 과정에서 본래의 좋은 성분들은 모두 파괴되거나 변질되기 때문입니다. 물론 원형(原形)에서는 차와 커피가 동격(同格)입니다. 자체에 맛과 영양을 풍부하게 간직하고 있어 아무런 첨가물을 필요로 하지 않는 것도 같습니다. 차는 아직 현대산업에 의해 인스탄트화 되지 않았습니다. 차정신을 존중한다면 영원히 그런 연구는 없어야 합니다. 어느 나라 어느 국민이거나 차를 마시면 애국·애족하게 되고 건강도 좋아져 일거양득이 되는 것입니다…  

   차문화 운동은 어린이를 설득하듯 그렇게 힘들게 해나가야 했다. 식민사관적 주장을 받아 옮긴다해도 1천3백년 이상 민족의 생활문화에 지대한 영향을 준 기호음료를, 마치 새로 소개하는 문화처럼 어렵게 동호인을 늘려가야 했다. 다행히 한 해 두 해 지나면서 인식은 조금씩 나아졌고 차를 배우려는 사람들도 늘어났다. 어쩌면 그것은, 경험에는 없지만 이 땅에서 태어난 사람들의 잠재의식에는 남아있는, 신토불이적인 문화이기 때문으로 보였다. 낯설면서도 낯설지않은, 고향감정을 자극하는 그 무엇인가가, 차에 있어 보였다.  

   차를 예찬하는 소리가 커지면서 생산과 소비도 점점 많아졌다. 어느 정도 과도기를 거치자 차 시장은 눈덩이처럼 커지기 시작했다. 하지만 차를 국산차의 일종으로 여기는 대중의 무식이나, 보사부가 입혀놓은 "녹차"라는 "이름 옷"은 그대로인 채였다.

   차생활 인구가 늘어나면서 그것은, 우리 생활문화의 바탕(基本)이자 정신생활의 중심수단이었던 차의 본질 회복을 어렵게 하는 장애로 작용하게 되었다. 차 생산과 소비는 늘어났지만, 여전히 우리 국민은 차가 무엇인지 정확하게 모르는 무식자 그대로였다. 국영방송이 황금 시간 뉴스에서 "한국인이 즐겨 마시는 차는 인삼차 녹차 율무차…" 하고 떠드는 식의 해프닝이 오늘까지도 계속되고 있는 것이다.    


   내나라 역사와 문화에 많은 의문을 품고 있는 것이 우리라면, 외국인들은 그 정도가 더 심할 것이다. 비교적 한국문화에 이해가 깊은 외국인들이 한결같이 궁금해 하는 것 중 하나는, 어째서 동양에서 한국의 차생활 풍습만 사라졌느냐 하는 점이다. 지금은 세계인의 음료가 되었지만 차생활의 시원(始原)은 동양이고, 따라서 예나 지금이나 동양인의 음차풍습은 어디를 가도 눈에 띨만큼 유난한데, 유독 한국에서만은 옛스럽게 차 마시는 분위기를 만나기 어려운 이유가 궁금하다는 것이다.  

   6·25 전화(戰禍)가 채 가시지 않은 때에 한국에 와서 20여 년간 선교활동을 펴며 유난히도 한국의 자연과 문화에 깊은 관심을 보였던 성공회의 리처드·러트(한국명 노대영)신부는 그의 수상집 "내가 본 한국 한국인"에서 의재(毅齋) 허백련(許百鍊)과의 만남을 이렇게 회상했다.

   " …또 한번 한국인의 아름다움을 발견한 것은 허백련 화백을 만났을 때였다. 내가 광주의 무등산을 찾아갔던 때는 비가 한창 오는 여름날이었다. 허 화백의 집은 깊은 산 속에 있었다. 그의 집으로 올라가는 길 계곡에는 나무와 바위가 엉켜 있었다. 비 속에서 이들 산천초목은 안개에 잠긴듯 뿌옇게 보였다. 집은 아주 작은 초가집이었다. 거무틱틱한 얼굴의 허 화백은 얇은 여름옷을 입고 창가에 앉아서 동양화를 그리고 있었다. 그의 옆에는 종이와 물접시와 붓이 가즈런했다. 방안의 가구는 조그만 책상과 몇 점의 찻잔이 있을 뿐이었다. 나는 차를 석 잔 대접 받았다. 차는 젊은 서생(書生)이 끓였다. 우물에서 길어온 물을 쇠주전자에 넣고 끓인 뒤 손잡이가 대나무로 된 차주전자에 붓고는 차를 만들었다. 찻잔은 요새 만든 값싼 것으로 보였지만 차맛은 썩 훌륭했다… "

   그는 다시 "풍류한국(風流韓國)"에서, 자신은 허 화백과의 만남 이후 한국의 지리산과 무등산 차의 깨끗한 향기와 맛을 즐기고 있다면서, 중국인이나 일본인들은 차를 일상적으로 마시고 있는데 그들과 비슷한 문화를 지닌 한국사람들은 왜 차를 마시지 않는지 모르겠다고 의문을 제기한다.

   "한국풍속지(韓國風俗誌)"의 저자 제임스 S 게일도 마찬가지 의문을 제기한다. 그러나 그는 한국에서 차생활 풍습이 사라진 시기를 18세기로 추정하면서, 이는 한국에 담배가 수입되기 시작한 때였음을 지적한다. "식후불연(食後不煙)이면 소화불량(消化不良)"이라는 새 유행어가 등장하면서상다반사(日常茶飯事)의 풍습을 몰아냈을지 모른다는 나름대로의 견해를 후미에 달고 있는 것이다. 광해군(光海君)때 들어온 담배는 짧은 시간에 널리 번지며 선비사회의 아낌을 받았는데, 이때 선비들이 담배를 연차(煙茶)라 불렀고 애연가를 끽연가(喫煙家)라 호칭했던 기록을 어디선가 보았던 모양이다. 어쨌든 이들에겐 세계적으로 이름난 고려차완(高麗茶碗)낳은 한국에서 차생활 습속을 볼 수 없는 것이 커다란 의문이었다.

   한국 내 야생차(野生茶) 분포현황을 일일이 조사하여 "조선의 차와 선(朝鮮の茶と禪)"을 공저(共著)로 펴낸 일본인 이에이리 가즈오(家入一雄)과 모로오까 다모쓰(諸岡 存)는 한국에서 차생활 습속이 사라진 이유로 세가지를 내세웠다.

   첫째는 한국의 차가 사원(寺院) 중심으로 전래되어 왔으므로 조선조 불교의 쇠퇴와 함께 차마시는 풍습도 쇠퇴했을 것이라는 추측이다. 그 근거로 그는 차나무가 사원 부근에 한정되어 자생하고 있는 점을 들고 있다. 

   둘째로 그는 한국은 유난히 수질이 좋아 구태어 차를 마실 필요가 없었음을 지적했다. 이능화(李能和)조선불교통사(朝鮮佛敎通史)에서 선인들이 차를 마시지 않은 것은 물이 좋기 때문이라고 한 것을 인용한 것이다.

 째 대목에서는 그 역시 담배(煙草)를 들고 있다. 그 시대 담배 소비량의 갑작스런 증가를 들어, 기호성이 더 강한 연초가 순식간에 차를 대신하게 되었을 것이라는 나름대로의 추리이다.

   모로오까의 견해 중 한국은 물이 좋아 차를 마실 필요를 느끼지 못했다는 부분은 설득력이 있어 보인다. 가까운 이웃인 중국인들이 음차를 생활화한 배경에는, 수질이 나빠 자연수를 그대로 마실 수 없는 불가피한 사유가 있었던 것이다. 그러나 과연 그렇다면 신라나 고려조의 찬란한 차문화는 어떻게 설명되어야 하는 것일까.

   담배가 차를 몰아냈을 것이라는 가정(假定)도 성분을 알고나면 설득력을 잃는다. 후에 과학적으로 밝혀진 일이지만, 차의 카페인과 담배의 니코틴은 몸안에서 서로 독성을 상쇄시키는 중화작용을 하는 것이다. 그렇다면 상식적으로도, 서로 보완의 성질을 가진 기호품 하나가 다른 하나를 몰아낼 이유는 없는 것이다. 또한 이 주장은 세계의 여러 다양한 민족이 담배와 더불어 차마시기를 생활화 하고 있는 사실에 비추어도 잘못된 가정임을 알 수 있다. 한국만이 유난스럽게 담배를 더 좋아해 차생활을 버렸을
것이라는 가정은 억지일 수 밖에 없는 것이다.

   조선 후기 차가 귀해지면서 끽다(喫茶)의 풍습을 이을 수 없게되자  대용음료로 인삼즙이니 쌍화탕 구기자 결명자 칙즙 숭늉까지 등장했던 사실을 보면 더더욱, 우리나라 사람들이 생수(生水)를 그대로 즐기는 성품은 아니었음이 입증된다. 이런 이유에서 러트 신부는 이렇게 반문한다.

   " …여러 사람들이 한국은 물이 맑아 차를 끓일 필요를 느끼지 못했을 것이라고 말들 하지만 나는 그렇게 생각하지 않는다. 좋은 물이 있으면 더욱 좋은 차를 끓일 수 있음을 알기 때문이다… "
      
   색향미(色香味) 훌륭한 차는 무엇보다 물이 좋아야 한다는 가르침은우(陸羽) 다경(茶經)에서 비롯된다. 온전한 물이 아니면 차의 신(神)이 나타나지 않는다면서 좋은 물을 더욱 정성스럽게 다루는 것이 차정신(茶精神; 茶道)이라고 다경은 설명하고 있는 것이다.

   육우 다경 제5장 "차 달이기(五之煮)"를 보면 좋은 물의 선택(品泉)에 대해 이렇게 적혀있다.

   " …산물은 위의 것, 강물은 가운데 것, 우물물은 아래 것을 쓴다. 산의 물은 유천(乳泉)이 으뜸이다. 석지(石池)의 물은 완만하게 흐르는 데서 위의 것을 취해야 한다. 폭포같이 용솟음치는 것과 양치질 소리를 내면서 흐르는 여울물은 먹지 말아야 한다. 그런 물을 먹으면 목병을 얻는다. 산의 물이라도 골짜기의 샘물은 오래도록 고여 흐르지 않는 것이 많다. 여름으로부터 상강(霜降) 이전이라면 잠룡(潛龍)이 독을 쌓아두었을지도 모른다. 이런 물을 먹어야 할 경우에는 먼저 물꼬를 터서 샘물이 졸졸 흐르게 한 다음 잔질하여 마셔야 한다. 강물은 인가에서 멀리 떨어진 것을 취해야 하며, 우물물은 많이 길어먹는 것이어야 한다… "

   육우가 으뜸이라고 적은 젖샘(乳泉)이란 종유석(鐘乳石)의 샘과도 같은 산골의 골수(骨髓)로 감로(甘露)와 같이 달고 향기로운 물이다. 보통은 맑지만 비중이 무거울 수록 흰빛을 띠기도 하는데, 이 젖샘이 가장 좋은 물이라고 예찬하는 점에서는 구양수(歐陽修)·전예형(田藝衡)·이규보(李奎報)가 모두 견해를 같이 한다. 주목할 것은 이 젖샘 이야기만 빼면 중국 땅은 물이 나빠 아무 것이나 함부로 마시면 목병을 얻으니 아무쪼록 조심스럽게 잘 선택해서 차를 달여야 한다는 이야기라는 점이다. 좋은 차맛을
얻기 위해서는 좋은 물이 있어야 하는데, 중국에서는 좀체 그런 물을 만나기 어려움을 탄식(?)하는 내용들인 것이다.      

   육우 다경의 이 구절을 그대로 받아들여 금수강산인 우리나라에서 더 좋은 물을 찾아 헤매는 것은 누가 보아도 해프닝이다. 계곡마다 맑은 물이 철철 넘치고 우물마다 정기가 넘쳐나는 한국에서 유독 차를 달이는 물의 선택에 있어서만은 목병을 얻을까봐 조심해야 한다는 것은 설득력이 없는 것이다. 조심하라 하기보다는 좋은 물이 있음으로 더욱 품위있는 차생활을 할 수 있는 조건이 애초에 갖춰져 있음을 깨닫게 하였을 것이다.

   좋은 물의 선택에 대한 중국과 한국의 차이점에 덧붙여 한마디 제언한다면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우리의 다경(茶經)이라는 점이다. 차에 대해 글을 쓰는 일이 육우로부터 비롯되었기에 육우 다경에 정도 이상의 의미와 가치를 부여하는 것을 이해할 수는 있지만, 그러나 우리 입장에서 그것"차생활의 중심교본(中心敎本)"으로 삼아 그대로 따르고 섬기는 풍조는  하루빨리 고쳐야 한다. 우린 우리에 맞는 다경을 찾아내거나, 없다면 지금이라도 쓰기를 시도해야 하는 것이다.

   이목(李穆)을 비롯한 여러 선비들이 차 노래(茶賦)를 남겼고 초의(艸衣)다신전(茶神傳)이 있지만, 그것들 역시 주요 부분은 중국 문헌에서 등초(騰抄)했거나 인용도가 높아 파고들수록 아쉬움이 커지는 어려움이 있다. 다만 하나 초의 동다송(東茶頌)에 몇 줄, 우리나라 차의 독특함과 우월함에 대해 기분좋게 언급한 부분이 있어 위안을 줄뿐인데, 이는 유구하고 찬란하다고 역설하는 차문화 역사에 비해 초라해도 너무 초라한 자료가 아닐 수 없다.  

    
   육우에 의해 다경이 쓰여진 8세기 중엽(762년)은, 신라인(新羅人)들의 차생활 역시 다경에 버금가는 다서(茶書)를 남기고도 남을만한 분위기였다. 차로 불공드렸고, 수도용으로 승려간에 애음되었으며, 나라에서 국로(國老)나 고덕(高德)한 선사(禪師)에게 하사(下賜)하는 녹봉(祿俸)·예폐(禮幣)에 차가 들어 있었다.

   불후의 고전 삼국지는 유비가 어머니 좋아하시는 차 한 줌을 사기 위해 멀고 위험한 길을 떠나는 것으로 시작된다. 신라의 문장가 고운 최치원시 중국(唐)에 있을 당시 인편이 있을 때마다 고향의 부모님께 차를 보내드리는 효심을 보였다. 유사(遺事)보천(寶川)과 효명(孝明) 두 왕자강릉 오대산(五臺山)에 들어가 암자를 짓고 수도할 때, 이공(二公)이 매일 이른아침 동중수(洞中水)를 길어다 차를 달여 문수불(文殊佛)에게 공양했다 했는데, 이것 역시 신라의 이야기요, 강릉 한송정반(寒松亭畔)에 남아있 석조(石竈) 석구(石臼)도 신라 화랑들의 차생활 흔적(遺蹟)이다.  

   그런데 하나, 영남과 쌍벽을 이루는 호남땅(百濟圈域)의 차생활은 전해지는 것이 없다. 신라가 무력을 통해 정복한(660년) 이후 백제문화가 의도적으로 왜곡·비하되어 역사 속에 묻혀버렸기 때문이라고 하는 사람들이 많은 데 그것이 전부는 아니다. 본문에서 살피겠지만 여기엔 또 다른 역사가 숨어 있다.  

   어쨌든 이때 신라인으로서 다서를 집필한 이가 있었다면 그는 물의 선택을 그렇게 어렵게 적지 않았을 것이다. 한강 우중수나 속리산 삼타수특히 좋다고는 했을지언정, 여기 물은 이렇게 조심스러우니 가려서 떠야 하고 저기 물은 목병이 생길지 모르니 먹지 말아야 한다는 따위 대목은 필요없을 것이기 때문이다.


   승려이자 시조시인인 성우(性愚)가 86년 발표한 자료 중에는 차가 중국에서 건너온 것이 아니라 오히려 우리에게서 중국으로 건너갔다는 기록도 있다. 중국에서 출간된 고서 사대명산지(四大名山誌)는 중국에서 제일 큰 산이자 불교의 성지 네 곳을 소개하고 있는데, 그 중 한 곳인 구화산(九華)에 있는 지장(地藏;705-803) 이야기가 그것이다. 지장은 신라 제33대 성덕왕(聖德王)의 장남으로 24세에 출가한 뒤 당나라로 건너가 구화산에서 성불(成佛)했다고 전해지는 스님이다.  

   보현보살이 강림한 아미산(阿彌山/四川省) 문수보살이 살았던 오대산(五臺山/山西省) 관음보살 보타산(菩陀山/浙江省) 지장보살이 성불한화산(九華山/安徽省) 등 사대 명산의 특색과 특산물을 자세히 소개하고 있는 이 책의 제8권 구화산 편에는, 차나무는 지장스님이 신라에서 가져왔다고 했다. 차만 가져온 것이 아니라 벼(黃粒稻)도 가져왔다고 했는데 추정연대가 서기 730년 내외이니, 당시의 신라에서는 충분히 가능했던 일로 보인다. 이는 육우가 태어날 무렵에 해당한다.

   이렇게 당시의 전후사정을 살펴보면, 일찍부터 선조들이 차생활을 즐겼음에도 불구하고 차의 책을 남기지 않은 이유가 더욱 궁금해진다. 역설적으로 생각하면, 정말 어디라 흠잡을데 없이 좋은 물이 철철 넘치는 땅이기 때문이었을지 모른다는 생각도 든다. 좋은 차도, 좋은 물도 풍부한 땅에서 자연스럽게 누린 차생활이었기에 구태어 글로 남길 필요를 느끼지 못했을지 모르는 것이다.

   그러나 그런 가정은 우리를 또다시 아프게 할 뿐이다. 설득력도 없는 것이 우리는 유난히 학문을 숭상하고 시를 즐기고 풍류를 논했던 민족기 때문이다. 어느 민족보다 역사나 생활문화에 대한 기록이 풍부해야 마땅한 것 아니겠는가. 기록만 있다면 금세 시비가 가려질 일을, 그것이 없음으로 해서 명쾌하게 연결되지 않는 역사의 빈공간들이 우리 가슴을 아프게 하는 것이다. 아무리 이웃나라들의 거듭된 침략을 감당하지 못해 빼앗기고 불태우고 잃어버렸다 해도 어쩌면 그렇게 구전(口傳) 조각같은 기록
밖에 없는 것일까?

   학자들에게는 미안한 말이 될지 모르지만, 혹 한자문화(漢文)의 단절이나 차에 대한 무식(無識)으로 인해 옆에 두고도 발견하지 못하는 것은 아닐까. 나라의 보물이 될만한 유물 전적들이 대학 도서관 지하창고에서 수십년 먼지에 덮혀 있다가 어느 날 우연히, 하급 관리나 청소담당자의 눈에 띠어 새로운 발견이 이루어지고, 신문지상에 대서 특필되는 것을 보면서 정치나 상업주의에만 온통 들떠있는 우리의 학문 사회, 학자 풍토에 의구심을 갖다보면, 차문화에 대한 기록도 어딘가에 아직 있을지 모른다는 기대가 생긴다. 잔뜩 먼지 쓴 상태일지라도 있다면 더없이 좋으련만.

  
   차생활은 우리 생활문화의 중심이었다. 따라서 차생활 복원운동은 우리 본래의 모습을 찾자는 운동이 된다. 침략당한 역사로 인해 헝클어진 부분을 바르게 풀어 정리하고, 상처받은 자존심을 회복하며, 학문과 예를 숭상해온 고결(高潔)한 민족으로서의 긍지(矜持)를 되살리자는 의기(義氣)가 담긴 국민운동이 된다.

   현대화 과정에서 점차 사라져가는 전통문화에 대한 가치관을 역사의 중심에서 바로잡음으로서 우리다운 모습이 더 이상 변질되지 않도록 하는 동시에, 나아가 문화의 우월함을 세계에 널리 알리는 운동인 것이다.

   우리 생활 속에 차가 어느만큼 깊히 숨쉬고 있는가는 일상용어 속에 들어있는 차(茶)자를 찾아보는 것으로서도 가늠할 수 있다. 돌아가신 조상에게 예를 갖추는 일에서부터 손님을 정중히 맞이하는 일까지를 "다례(茶禮)"라고 칭했다. 귀한 손님을 맞아 베푸는 연회를 다연(茶宴) 또는 다과회(茶菓會)라 하였으며, 손님을 대접할 때 사용하는 교자상을 다담상(茶啖床)이라 하였다. 또 지극히 상식적이면서 흔한 일을 일컬어 일상다반사(日常茶飯事)라 하였으며, 행인이 쉬어가는 길 가의 휴게소도 주막(酒幕)이라 일컫기 이전에 음차소(飮茶所) 또는 다점(茶店)이라 불렀었다. 혼자서 몰두할 수 있는 사색의 경지를 다도삼매경(茶道三昧境)이라 하였으며, 거칠어지는 심성을 순화시키면서 스스로 예절과 언행을 다듬는 교실을 다실(茶室)이라 하였고, 카페인(caffeine)의 우리말 번역이 곧 다정(茶精)이며, 응접세트의 가운데 놓이는 탁자나 티테이블 따위를 일컬어서는 다정(茶亭) 또는 다탁
(茶卓)이라 하였다. 일상의 대화를 다화(茶話)라 하였고  사람이 만나면 차는 의례적인 것이라하여 여럿이 모이는 모임을 다회(茶會)라 하였다.

   이런 배경에서 우리는 저도 모르게 하루에도 여러번 차를 말하면서 살고 있는데 그 대표적인 한 마디가 정다운 사람을 만났을 때 튀어나오는 "차 한 잔 하자"는 소리이다. 스스로에게 물어보자. 그 한 마디를 누구에게 배워 언제부터 말하게 되었는가를. 아마 아무도 가르쳐주지 않았을 것이다. 그러나 누구나 그 한마디에 익숙해 있지 않은가. 그 한마디엔 따뜻한 정까지 담겨있어 의례의 틀을 벗어나 마음까지 훈훈하게 해 준다. 그것이 우리의 문화요, 예절이라면 더 이상의 설명이 필요없는 것 아닐까.

   오신 손님 반가이 맞아 편히 머물게하고 정성껏 대접하고, 가는 사람 뒷모습이 안 보일 때까지 배웅하는 것이 한국인이 갖고 있는 일반적인 심성이라면 "차 한 잔 하자"는 인사 역시 만남을 소중히 여기는 인간존중 정신에서 생겨난 독특한 생활예절이 아닐 수 없다.

   "차 한 잔 하자"는 한마디를 좀 더 발전시켜 보자. 상대가 반가울 수록 본능적으로, 분위기 좋고 훌륭한 장소로 모시고 싶어진다. 기왕이면 귀한 그릇에 대접하고 싶고, 우아한 꽃이 있으면 더욱 좋으며, 감미로운 음악까지 갖춰지면 금상첨화가 된다.

   이러한 분위기에서 차를, 아랫사람 시키지 않고 직접 정성을 담아 낸다면 대접받는 기분이 어떠할까. 게다가 차를 내는 모습까지 아름답다면?… 상상만으로도 그 자리에 넘칠 감동은 짐작이 될 것이다. 전통사회는 여기에 서로 공손하게 절하고, 덕담(德談) 나누는 것까지를 붙여 차예절의 기본으로 삼았다. 이를 지키고 행하는 데 남녀의 구별이 없었으며 인간존중 정신도 차생활을 통해 더욱 함양되었다.

   차 한 잔의 자리는 처세나 대면적 의례(儀禮)에 그치는 것이 아니다.  
앞에 이미 나열한 것만 살펴도 다양한 문화 예술이 함께하는 것을 확인할 수 있다. 꽃이 있고 음악이 있으며 우아한 장소(建築)가 있다. 또 도자기 문화가 있으며 시가 있고 그림이 있을 수 있다. 향기로운 차를 마시며 나누는 훈훈한 덕담도 있다. 마음만 먹으면 일월청풍(日月淸風) 자연을 도반(徒伴)으로 인생과 우주를 노래할 수 있는 자리가 된다.

   이건 조금도 비약이 아니다. 스스로 반성해 보자. 세계가 격찬하는 고려청자나 조선백자의 아름다움에 과연 우리는 얼마만큼 깊이있게 공감하고 있는가. 감상법이나마 제대로 아는 이가 몇이나 있을까. 여기 견해를 같이 한다면 원인은 간단하다, 차를 모르기에 도자기를 논할 수 없게된 것이다.

   예술의 감상은 생각하는 생활에서만 가능하다. 가장 중요하게 여기는 "암시(暗示)의 가치"는 사유(思惟) 속에 숨쉰다. 작가는 오직 작품으로만  말해야 한다. 이것이 무엇이라고 말하지 않고 그냥 놓아둠으로서 보는 이로 하여금 생각으로 완성하게 하는 것. 이것이 진실로 예술을 애호하고 수용하는 바른 자세인데, 이것은 "생각하는 생활"이어야 갖춰지는 것이다.

   경계할 것은 행여라도 종교와 역사의 구속이 있어서는 안 된다는 점이다. 조선조 주자(朱子)의 신유교(新儒敎)가 숭상되면서 모든 불교적인 것을 멀리했지만, 차생활 습속(茶禮)만은 받아들여 가례(家禮)로 삼았던 이유도 차를 외면하고 민족의 문화나 예술·풍류를 논할 수 없었기 때문이다. 이는 그리스도교를 비롯 모든 종교에서도 마찬가지로 인식되어야 한다. 차생활의 중요성이 종교나 시대에 따라 달라지는 것은 아니기 때문이다.  


   종합하면 차는 처세(處世)의 벗이요 사유(思惟)의 벗이다. 안목(審美眼)을 키우고 예술을 수용하는 마음을 기르자는 것이 차생활이다. 지식이 없이 상대의 지식을 논할 수 없듯, 스스로 아름답지 못하면 상대의 아름다움을 발견할 수 없는 법이다. 아름다움에 접근하려면 스스로 먼저 아름다워져야 하는데, 차생활은 이런 목적에서 스스로 아름다움을 가꾸는 노력인 것이다. 그리고 나아가 아름답게 산 사람은 아름답게 죽을 권리가 있다는 데서 차는, 이상과 현실을 넉넉하게 넘나드는 형이상학적 존재가 되며, 현대인의 각박한 삶에 여유(餘裕)를 선사한다.

   차생활에 있어서 건강(健康)이라는 두 글자는 보너스와 같은 선물이다.
70%가 수분인 우리 몸은 물을 잘못 마시면 금세 병이 나게 되어있다. 차의 가장 큰 효능은 흐린 것을 맑게하는 것이다. 해독(解毒) 살균(殺菌)에 탁월한 효능은 물론, 나쁜 수질도 차로 만들어 마시면 정화(淨化)되어 건강한 음료가 된다.  

   차는 그렇게 타고난 성품으로, 약하다면 한없이 약한 인간을 정신적·육체적으로 돕는 음료이다. 섬세한 인격을 지니게 함은 물론, 쉽고 편하고 보기좋고 간단한 것만 추구하는 현대인의 거칠고 참을성 없는 심성을 순화시켜, 우리 사회를 인정과 의리와 우애가 꽃피는 예술적 낙원으로 만드는데 기여해 온 매개물(媒介物)이다. 따라서 우리는 잃어버린 차생활을 부활시키는 것 만으로도 삶의 질, 사회의 질을 한층 높일 수 있다. 질서를 회복할 수 있고 우리 본래의 모습을 찾아갈 수 있다. 차 이야기는 그런 뜻에서 문화국민이 꼭 알아야 하고, 심취(心醉)해 볼 가치가 있다.

   한국의 다성(茶聖) 초의(艸衣)는 동다송(東茶頌)에서 이르기를 "옛부터 성현이 모두 차를 사랑하였으니, 차는 군자와 같아 그 성품에 사기가 없음이라(古來聖賢俱愛茶 茶如君子性無邪)" 하였다. 차는 이와같은 성품을 지님으로서 단순한 음료 차원을 넘어 문화 예술 철학의 모든 영역에서 진실하고 확실한 지배와 풍요 - 즉 허(虛) - 를 구하는 현자(賢者)들의 벗으로 인류와 함께 그 역사를 같이 해 온 음료인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