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의 차문화/ 차나무 전설과 기원 & 다도는 선의 발전된 의식 外 / 반취다도교실

2019. 7. 10. 23:53차 이야기




한국차문화사

2002.02.02 03:46
 

한국의 차문화/ 차나무 전설과 기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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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차의 원료는 오직 차나무 이파리이다. 아무 이파리나 다 차가 되는 것이 아니고 봄을 맞아 가지 끝에 새로 돋아난 작은 이파리만을 취해 차로 한다. 긴 동면에서 깨어나 막 세상에 나온 연록색의 여린 이파리가 그것인데, 모양의 부드럽고 예쁘기가 참새의 혀(舌)와 같다하여 선조들은 여기 작설(雀舌)이란 이름을 붙였고, 크기에 따라 세작(細雀) 준세작(準細雀) 중작(中雀) 대작(大雀)이라 구분하는 등 참새 작(雀)자를 단위로 삼아 품질을 구별했다. 미소를 짓게 하는 조크(Joke)도 생겼다.

…차 이름이 참새(雀)의 혀(舌)라, 스님이 마실지 의심스럽네.

   우리나라 기후에서는 4월 20일 경인 곡우(穀雨)를 전후해 진품(珍品)을 얻을 수 있는데 곡우 전 것을 우전(雨前)이라하여 극상품으로 쳤고, 곡우 이후의 것은 세작(細雀)으로 분류했다. 5월 초순에 상품(上品)인 준세작(準細雀)을 얻고, 중순에 딴 것으로는 중품(中品)을 삼았다. 하순에 얻는 것은 하품(下品)으로 일상적 음료인 엽차(葉茶)가 그것이다. 5월이 지나면 차를 만들지 않았다. 진주농림전문대학의 김기원(金基元) 교수함양 마천에서 채집한 민요에 차 따기가 있다.      

초엽 따서 상전 주고, 중엽 따서 부모 주고
말엽 따서 남편 주고, 늙은 잎은 차약 찧어
봉지 봉지 담아 두고, 우리 아이 배 아플 때
차약 먹여 병 고치고, 무럭 무럭 자라나서
경상 감사 되어 주소

   차나무의 종류는 잎의 크기를 기준, 소엽종(小葉種)과 중엽종(中葉種)·대엽종(大葉種)으로 나눌 수 있고 원재배지 기준으로는 중국종·버마종(샨종)·인도종(아샘종)으로 분류한다. 본디 중엽종이란 말은 없고 중국 것에 소엽종과 대엽종이 있는데, 중국 대엽종이 인도 대엽종에 비하면 중간 크기에 불과하기에 편의상 그렇게 나눠본다. 버마종은 중국 대엽종과 비슷하여 함께 중엽종으로 분류한다.  

   소엽종(小葉種) 녹차(綠茶)용이다. "차"하면 녹차를 일컫듯이 차나무 하면 일단 소엽종을 일컫는다. 중엽종(中國大葉種)으로는 반발효차(半醱酵茶)를 만든다. 중국과 대만의 오룡차(烏龍茶)가 반발효차를 대표하지만도 버마 파키스탄 등에서도 적지않은 양이 생산되고 있다. 홍차(紅茶)차잎을 완전 발효(醱酵)시킨 것인데 잎의 크고 작음에 관계없이 어떤 종류로도 가능하다. 인도(印度) 스리랑카 등 아열대 지방의 차나무 잎에 타닌 함량이 많아 홍차(紅茶)용으로 인기가 높다. 지구촌에서 가장 많이 소비되는 차가 이 지역에서 생산되는 홍차이다. 개량종을 대표하는 것으로는 본의 야브기타종(種)을 들 수 있다. 녹차용인데, 이것이 우리나라에 수입되보성, 장성 강진 해남 등 호남의 일부와 제주도에 대단위 다원으로 조성되어 있다.  

   우리나라 야생(野生) 차나무는, 분류상으로는 소엽종에 해당된다. 그러나 자세히 비교하면 중국 것보다 훨씬 작음을 알 수 있다. 본디 우리 토종은 작고 향기가 짙으며 육질이 치밀한 특징을 가지고 있다. 아고베(사과)·머루(포도)·산밤(밤)·고염(감)·돌배(배) 등을 보아도 모두 그렇다. 산삼이나 은행도 마찬가지이다. 크기는 작으면서 성분과 효능은 세계인이 군침을 삼킬 정도로 뛰어난 것이다. 이 책의 차 이야기, 차나무 이야기는 이러한 우리 야생차 중심인데 어쩌면 야생(野生)보다 자생(自生)이 옳은 표현인지 모른다.

   식물학적 측면으로 접근하면 차나무고생대 식물로 아종도 없는 단과 단일종이며, 인도와 중국 남부에는 자생지라 할만한 토양이 없다. 천산산맥 일부와 흥한령 우랄산맥 일부가 고생대 산맥일뿐이다. 반면 우리나라는 제주도와 울릉도를 빼고는 모두 고생대 지층에 속한다.

   차나무 자생의 북방한계선을 34도 정도로 보는 것도 근거가 없다. 일본 아오모리현(40도), 소련 그라스노빌(42도), 우라지보스톡(40도)에서도 차나무는 재배되고 있다. 북방의 차나무일수록 색향미가 남방보다 월등하다. 추위에 약한 것은 일본의 개량종 야브기타인데, 이는 야생 차나무와 근본부터가 다른 것이다.  

   동서 교류가 시작되면서 서양의 학자들은 동양의 모든 것에 서양식의 이름을 붙이고, 새롭게 분류하는 작업을 했다. 학명(學名)이 그것이다. 차나무(tea plant)에는 1753년 데아 시넨시스(Thea sinensis)라는 학명이 붙여졌다. 스웨덴 식물학자 C.V.린네가 붙인 것으로 산차과(山茶科)의 상록활엽관목(常綠闊葉灌木)임을 뜻한다. 이후 다른 학자에 의해멜리아 시넨시스,동백과로 재분류되었다가 다시 산차과로 되돌려졌다.

   밑둥에서 가지가 퍼져 올라와 옆으로 벌어지며 자라는데 키는 60-90cm 정도이며, 잎은 갸름하고 윤기가 있는 것이 전체적인 모양은 어린 동백나무와 비슷하다. 연평균 기온이 13도C 이상, 강우량 1천5백미리미터 이상의 지역이면 비탈진 땅에서도 얼마든지 생육이 가능하고 안개가 자주끼는 곳이면 더욱 적지(適地)이다. 우리나라에서는 지리산 남향의 산간지를 중심으로, 영호남 일대가 차나무 자생이나 재배에 좋은 땅이 된다. 이러한 전제에서 학자들은 차나무가 자랄 수 있는 북방한계를 대개 충청남도까지로 보고 있다. 그러나 조선 중기 기록에는 한강변인 서울 남산의 양지 쪽에 차나무가 무성한데 이타방(지금의 이태원) 사는 지나인(支那人)들이 그것으로 차 양식을 삼았다는 기술도 있다.

   중국 학자들은 이러한 차나무가 양자강 상류, 즉 티베트 고원에 인접한 중국 남부지방에서 제일 먼저 발견되었다고 주장하고 있다.


   발견(發見)은 그렇다 해도 기원(起源)에는 여러 전설(傳說)이 있다. 차나무 기원에 관한 여러 전설 중 가장 오랜 것은 염제신농(炎帝神農)씨 발견설이다. 다소 신비적인 예언서인 한(漢)의 위서(緯書)에 의하면 신농씨는 기원전 2,700년대 중국 삼황(三皇)의 한분으로, 몸은 사람이나 머리는 소 또는 용의 모습이었으며, 백성들에게 농업과 양잠 의약을 가르쳤고, 불의 사용법을 알려주었고, 또 오현금(五絃琴)도 발명했다고 한다.

   신농씨와 관련이 있을법 하지만 저자나 제작연대가 확인되지 않고 원본도 없는 상태에서 전해지고 있는 신농본초경(神農本草經)에는 365종의 약물이 상품 중품 하품의 3품으로 나뉘어 기술되어 있는데, 상품 120종은 불로장생의 약물로 차나무를 비롯하여 단사(丹砂:朱砂) 인삼 감초 구기자나무 사향 등을 포함하고 있고, 중품 120종은 보약으로 석고(石膏) 갈근 마황 모란 녹용 등을, 하품 125종은 치료약으로 대황(大黃) 부자(附子) 파두(巴豆) 도라지 거머리 등 인체의 생리작용을 촉진하는 것들이 포함되어 있다. 또 서문에는 약의 성질과 용법 등이 정확하게 기술되어 있어 한방의 기초가 한(漢)나라 때이거나 그 이전에 이미 완성되었음을 알려주고 있다.

   전설에 의하면 신농씨는 야생의 풀을 일일어 씹어서, 그렇게 자세하게 성질과 용법을 기술했다고 하는데, 하루는 독초(毒草)를 씹어 독이 온몸에 번져 죽음 직전에 이르게 되었다. 이때 눈 앞에 나무도 풀도 아닌 가지 하나가 손짓하듯 너울 거리므로 그 잎을 따 씹으니 순식간에 해독이 되고 살아날 수 있었다는 것이다. 이에 신농은 그 나무를 차(茶)나무라 이름하고, 해독(解毒)을 제일의 효능으로 전하게 되었다. 풀 초(艸)와 나무 목(木) 사이에 사람 인(人)이 있는 차(茶)라는 글자는, 이때 신농씨를 죽음에서 살려낸 데 기인(基因)하여 만들어진 것이라 전한다.
    
   다음은 전국시대(戰國時代) 명의(名醫)였던 편작(扁鵲)에 얽힌 일화다.
편작은 여관 종업원들을 감독하며 평범하게 살던 중 장상군(長桑君)이라는 의술에 능한 도인을 만나게 되고, 그에게서 금방(禁方)의 구전(口傳)과 의서(醫書)를 물려받아 의술을 터득한 뒤, 이웃나라의 다 죽어가는 태자를 살려내어 천하명의가 되었다.

   편작은 모두 8만4천가지 병에 대한 약방문(處方)을 알고 있었는데, 절반도 채 안되는 4만 가지 약방문 정도를 제자들에게 전수했을 때, 너무 유명한 것이 화근이 되어 경쟁자의 흉계에 의해 암살되고 말았다. 이에 제자들이 선생의 무덤가에서 백 일을 슬퍼하니 편작의 무덤에서 한 나무가 솟아 올랐다. 그것이 차나무였는데 하도 신기하여 제자들이 그 나무를 이리저리 관찰하고 연구해보니, 그 잎에 담긴 여러 성분들이 신비한 효능을 보여 나머지 4만4천의 약방문을 얻게 하더라는 것이다. 차가 만병통치의 불로초처럼 회자되는 것은 이들에 의해서라고 한다.  
  
   또 하나의 설은 달마(達磨) 이야기다. 달마는 6세기 초 서역(西域)에서 당나라로 건너와 낙양(洛陽)을 중심으로 활동하였는데, 참선 중 자꾸만 졸음이 오자 "눈시울이 있어 잠을 불러 들인다"며 양 눈의 눈시울을 뚝 뚝 떼어내 뒷뜰에 버렸다. 이튿날 그 자리에 한 나무가 솟았는데 잎을 씹으니 금세 머리가 맑아지고 잠은 멀리 달아나더라는 것이다. 차를 수도용 음료로 삼는 것은 달마에서 시작되었다고 한다.

   위에 소개한 세 가지 기원설의 공통점은 모두 차의 뛰어난 효능을 이야기하는 데 있다. 또 관련 인물이 하나같이 생몰(生沒) 연대가 확인되지 않는, 전설적인 인물들이라는 점도 같다. 놀라운 것은 그들이 전하는 차의 그 어떤 효능도 결코 과장(誇張)이 아니었다는 사실이다. 화학 식물학 약학 임상학 식품영양학 등 과학화된 현대 학문에 의해서 밝혀진 성분과 효능은 전설이 전하는 내용보다 더 신비성이 풍부한 것으로 발표되고 있다. 여기 힘입어 차는 더욱 지구상에 비교할 것 없는 유익한 음료의 지위를 튼튼히 해 가고 있다. 


   세 가지 기원설 중에서 신농씨 발견설과 편작에 얽힌 전설은 내용도 그럴듯 할뿐더러 "차는 처음에 약용(藥用)이었다가 나중에 음료가 되었다"주장을 훌륭하게 뒷받침한다. 차도비서(茶道秘書) "차는 약초라고 하지만 병을 치료하지는 못한다. 다만 예방이나 식독을 없애는 효능은 뛰어나다. 그 성분이 완만하기 때문인데, 그래서 매일 마셔도 부작용은 없다"한 것을 보아도 약용에서 음료가 된 차의 변천은 자연스러운 것임을 읽을 수 있다.

   숙제는 달마(達磨) 설이다. 우리는 물론 기인(奇人) 괴승(怪僧)으로 알려진 달마대사를 이야기하고 있지만 차의 기원에 관련된 달마는 인물(人物)이 아닐 수도 있다는 의문이다.  

   달마의 또다른 해석은 인간생활에 질서를 주는 법이랄까, 관념이다. 스크리트어(梵語)에서의 달마(dharma) "자신은 그대로 있으면서 다른 모든 존재를 활동하게 하는 질서의 근거"를 나타내는 용어이다. 처음에 이 용어를 번역한 지나(支那/中國의 옛이름)의 학자들은 음(音)을 따서는 달마(達磨)로 적고, 법(法)이라고 옮겼다. 따라서 베다 시대(BC 1200년경)의 달마는 "하늘의 질서로서 나타나는 리타 브라다"와 함께 형이상학적(形而上學的)인 용어로 이해되었었다.

   브라마나시대(BC 800년경)로 넘어오면서 달마 신적(神的) 의지로서의 리타 브라다에 비해, 보다 인간적인 쪽으로 독립하게 되었고, 이윽고 신(神)의 위에 - 인간에게는 더 가까운 곳에 - 올려졌다. 아무리 약자라도 달마를 지니면 강자를 누를 수 있게된다는 식의 "최고의 존재"인 동시에, 만물이 그 힘의 정도에 구애없이 공존할 수 있는 질서의 진리가 또한 달마였던 것이다.  

   때문에 불과 백년전만 해도 달마 이야기는 그 존재가 불분명한 전승설화로 취급되었었다. 그러나 20세기 들어와 돈황(敦煌)에서 발견된 어록서 뜻밖에도 달마의 행적 기록이 발굴되었다. 독자적인 선법(禪法)이나, 제자들과 나눈 문답 내용을 보면 그는 분명하게 실존했던 인물이었다. 그가 소림사(小林寺)에 있을 때, 후일 소림의 제2조(祖)가 되는 혜가(慧可)가 찾아와 답을 구하는 대화도 그 안에서 나왔다.

혜가: 마음이 불안합니다. 제발 제 마음을 가라앉혀 주십시오.
달마: 그럼 그대의 불안한 마음을 내게 한번 보여 주게나. 그래야 가라앉혀줄 수 있지 않는가.
혜가: 어떻게 보여 드리나요. 어디를 찾아봐도 발견이 안됩니다.
달마: 그러면 되었네. 나는 이미 그대의 마음을 가라앉혀 준 것이네.

   불교가 번거로운 철학체계로 기울어진 그 시대에 달마는, 벽이 그 무엇도 접근시키지 않듯이, 본래의 청정한 자성(自性)에 눈 뜨면 바로 성불(成佛)할 수 있다는 선법(禪法)을 평이한 구어로 전파한 종교운동가였다. 우리가 자주 접하는 직지인심 현성성불(直指人心 見性成佛; 자기를 바로 봄으로서 본래 부처였음을 깨닫는 것)이, 곧 당시 달마의 교의(敎意)를 집약한 한마디였다.    

   참선(參禪)을 수행(修行)의 으뜸으로 여긴 달마가 수마(睡魔)와 싸우는 처절한 모습을 상상해 보는 것은 그리 어렵지않다. 전하는 이야기대로 눈시울을 떼어낼 수 있고, 그렇게 함으로서 몰려오는 졸음을 물리칠 수만 있다면 얼마든지 떼고 또 떼어 버렸을 것이다. 그러나 과연 그럴 수 있을까?
   눈시울 버린 자리에서 차나무가 솟아올랐고 그 잎을 먹으니 머리가 맑아지고 잠이 달아나더라는 대목도 돌려서 생각하면 가슴에 와 닿을만큼, 간절하기 이를 데 없는 소망으로 들린다. 기원(起源)이 아니라 기원(祈願)이라 하는게 더 잘 이해될 것 같다.

   시기로 보아도 이 때는 차생활이 한참 번져있는 상태여서 기원(起源)이란 단어를 사용하기 어렵다. 그의 활동시기가 6세기 초라면 지나(支那)는 진(晉)에서 수(隋)로 이어지는 남북조(南北朝)로서, 분열과 병합이 거듭되며 정변과 살륙이 휘몰아치던 때였다. 그 혼란의 가운데에서 차나무가 기원했다는 것은 아무리 전설이라 해도 수긍하기 어렵다.  

   6세기 초 기원설을 받아들인다면 후한말을 배경으로 시작되는 삼국지(三國志)가 우스워진다. 수호전(水滸傳) 서유기(西遊記) 금병매(金甁梅)함께 중국 사대기서(四大奇書)의 하나로 꼽히는 삼국지연의(三國志演義)유비가 어머니께 드릴 한줌의 차(茶)를 구하러 멀고 위험한 여행을 떠나는 것으로 시작되는데, 년대를 추정해보면 달마대사 시대에서 적어도 3백년 이상 거슬러 올라간다. 그렇다면 차의 기원설에 나오는 달마(達磨)는 인물이 아니라는 확신이 생긴다. 달마는 질서의 근거이자 사람들이 구하는 새 불교의 이상이었다.

   그것은 참으로 절묘한 조화였다. 신농씨(神農氏)와 편작(扁鵲)의 약초(藥草)설 위에, 질서의 근거이자 새 불교의 이상(理想)인 달마설을 첨가하면서 차는, 기원(起源)에서부터 인류사회(人類社會)에 없어서는 안될 반려(伴侶)로서의 기초(基礎)를 훌륭하게 다지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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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2.02.02 03:47

한국의 차문화/ 다도는 선의 발전된 의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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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달마(達磨)를 질서의 근거(根據)로 풀이하면, 다소 막연했던 다도(茶道)의 내면 세계를 엿볼 수 있다. 다도에서 구하는 절대의 경지(境地)는 놀랍게도 "만능(萬能)이라는 이름의 허(虛)"이다. 노자의 무위자연(無爲自然)과 같은 것이다.

   한국이나 중국 일본 모두, 차를 언제부터 마셨는지는 아무도 모른다. 
씨가 식경(食經) "차를 오래 마시면 힘이 솟고, 마음이 즐거워진다"적은 이래 차 이야기는 어디든 끼게 되었다. 수나라 문제는 꿈에 귀신이 머리골을 바꿔 몹시 아팠는데 문득 만난 스님이 차 있는 곳을 가르쳐주며, 차를 달여 마시라 하여 병을 고칠 수 있었다. 천하는 이때 차 마시기를 알게 되었다고 진인석(陳仁錫)잠확거류서(潛確居類書)에 적었다.

   당나라 풍속사를 쓴 봉연(封演) 봉씨견문기육우다도의 창시자로 세우고 있다.  

   …초나라 사람 육홍점이 다론(茶論)을 짓고, 차의 효능과 차 달이기, 차 굽는 법을 말하고, 다구 24종을 만들어 이를 모듬바구니에 담으니, 멀고 가까운 곳에서 마음 기울여 사모하고, 호사가는 한 벌을 집에 간직하였다. 백웅(常伯熊)이라는 사람이 있었는데 거듭하여 홍점의 이론을 널리 윤색함으로 말미암아 이에 다도가 크게 성행되어 신분이 고귀한 사람과 조정의 벼슬아치로서 차를 마시지 않는 사람이 없었다…

   구양수(歐陽修)신당서(新唐書) 육우전"육우는 차를 즐겨서 다경(茶經) 3편을 짓고, 차의 근원, 차의 법도, 차의 도구를 다 갖추어 서술하니 천하에서 차 마시기를 널리 알게 되었다"고 했다. 당(唐)의 다도(茶道)는 차의 세계를 벗어나지 않는 것이었다.

  다도 도교에서 말하는 선(禪)의 발전된 의식으로 보면 차의 세계는 무한 넓어진다. 이와함께 달마(達磨)질서의 근원(根源)으로 풀이하면 소 막연한 다도의 내면 세계에 접근이 가능해 진다. 다도에서 구하는 절대의 경지는 놀랍게도 "만능(萬能)이라는 이름의 허(虛)"이다. 노자(老子)의 무위자연(無爲自然)과 같은 것이다.      

   남송(南宋)의 사상가 주자(朱子;1130-1200)주돈이(周敦이) 정호(程顥) 정이(程이) 계통의 우주론과, 명분을 중요시한 구양수(歐陽修) 계열의 춘추역사학을 합성하여 완성한 주자학(朱子學)에서, 우주와 인간세상의 근본원리를 도(道)라고 정의한 것도 같은 맥락에서 이해될 수 있다. 도(道)는 곧 순리(順理)로서 순리를 알면 허(虛)에 이를 수 있는 것이다.  

   주자(朱子:朱熹)는 차의 본향(本鄕)이라는 복건성(福建省)에서 태어나 생의 대부분을 북부지방에서 보냈다. 신라의 지장이 7세기 중국에 차를 전하고, 그곳에서 수행하여 성불하였다는 구화산(九華山)에서 그리 멀지않은 곳이다.

   중원(中原)의 문화로부터 멀리 떨어진 외딴 시골(福建省 尤溪)에서 출생한 그가 14세때 아버지를 잃고 건안(建安)의 세 선생에게 사사하며 면학에 힘쓸때 노장(老莊)사상과 불교에 흥미를 가졌음은 널리 알려진 사실이다. 19세에 과거에 급제하고 24세에 임관하여 동안현(同安縣)의 주부(主簿)로 근무할 당시 이정(二程)의 학통을 이은 이동(李동)을 만나 사사하면서 차츰 유교로 기울어지다 급기야 신유학(新儒學)의 정수(精髓)를 계시받기에 이르는데, 그의 이기철학(理氣哲學) 곳곳에 다도(茶道)가 배어있다.

   그의 학문 수양법 인간이 본래 지니고 있는 것을 회복한다는 형식취하고 있다. 우선 형이하학적인 기(氣)에 대해서 형이상학적인 이(理)를 세워 양자의 보완적 관계를 명확하게 한 뒤, 이기(理氣)에 의하여 일관되게 생성론(生成論) 존재론(存在論) 심성론(心性論) 수양론(修養論)을 완하고 있는 것이다.

   이를 위해 주자는 거경궁리(居敬窮理)를 공부의 지표로 삼도록 했다.
거경(居敬)은 마음이 정욕에 사로잡혀 망녕된 생각이나 행동을 하는 일이 없도록 하는 것이고, 궁리(窮理)는 모든 사물에 내재하는 이치를 규명하는 것이다. 즉 격물치지(格物致知)로, 나아가 삼라만상(森羅萬象)의 질서의 근원이 되는 하나를 이치적으로 깨닫는데 최종의 목표를 두고 있다. 이는 도(道)이자 순리(順理)이다. 결국 달마와 한 뜻이다. 모든 불교적인 것을 멀리한 주자의 신유학(新儒學)이 차만은 받아들여 가례의 중요한 일속(一俗)으로 삼았던 일이 우연한 일은 아니었던 것이다.


 어렵게 설명하지 않아도 다도(茶道)가 선(禪)의 발전된 의식(儀式)이라는 것은 일반에 잘 알려진 사실이다. 차가 약용(藥用)에서 우아한 놀이의 음료가 되고, 예술의 영역(領域)에 들어간 것 역시 도교(道敎)의 영향임을 부인할 수 없다.

   풍속과 습관의 기원을 다루고 있는 중국 학교의 교과서는, 손님에게 차를 대접하는 예의관윤(關尹:노자의 제자)에게서 비롯되었다고 가르치고 있다. 그는 함곡관(函谷關)에서 철인(哲人:老子)을 맞을 때 언제나 한 잔의 불로장수약을 먼저 드렸다.

   도교의 수행자들이 어떻게, 얼마나 차를 생활화 했는지는 잘 짐작되지 않지만, 그러나 도교에서 가르치는 인생관과 예술관이 다도에서 말하는 그것과 많이 일치하는 것으로 보아, 다도로써 진리(眞理)에 접근하려했던 것만은 분명한 것 같다. 그러면 "도(道)"는 어떻게 해석이 되어야 하나.

   자전(字典)에 의하면 도(道)의 훈(訓)은, 길 도(路), 이치 도(理), 순할 도(順), 도 도(仁義忠孝之德義), 말할 도(言), 말미암을 도(由), 쫒을 도(從), 행정구역 이름 도(行政區域) 등으로 나타난다. 행정구역 이름에 도(道)를 붙인 것`은 백성을 다스리는 올바른 길을 찾으라는 암시가 담겨있다.  

    한국방송공사이규임(李揆任) 박사(政治學)는 다담(茶談)에 기고한 글에서 도(道)의 자리를 다음과 같이 명쾌하게 매김했다. 

   …옛 성현들은 우리가 살고 있는 사회를 움직여 나가는 무형의 위계질서(位階秩序)를 기(技) 정(政) 의(義) 덕(德) 도(道) 무위자연(無爲自然)이라 했다. 기(技)란 기술이나 지식이다. 이것만 있으면 살아가는데 어려움은 없다. 그러나 기(技)는 아무리 뛰어나다 해도 정(政)의 지배를 받는다. 정은 관리(管理), 즉 정치(政治)를 말한다. 정은 다시 의(義)의 지배를 받는다.
정치는 바르고 의로워야 한다는 뜻이다. 의(義)를 지배하는 것은 덕(德)이다. 아무리 바르고 의롭다 해도 덕(德)이 없으면 천운도, 민심도 따르지 않는다. 아랫사람의 잘못으로 웃사람이 물러날 때 "덕이 없어서"라고 하는 것은 그래서 나오는 말이다. 덕 위에 도(道)가 있다. 도는 질서(秩序)이자 순리(順理)이다. 그 모든 것을 이룸에 있어 순리를 따라야지, 억지를 부리면 안된다는 말이다. 법(法)으로 여길 수도 있다. 법을 존중하는 것 역시 순리를 따르는 것이다. 도(道)는 절대의 자리요 완전한 자리이지만 마음을 비우는 것으로 쉽게 이를 수 있는 자리도 되는 셈이다. 이 도가 자라서 다음 단계의 무위자연(無爲自然)에 이르는 것이 인간사회 질서이다…

여기 무위자연에 대해서는 노자도덕경이 설명한다.  

   …무위(無爲)는 "도는 언제나 무위이지만 하지않는 일이 없다(道常無爲而無不爲)"의 무위이고, 자연은 "하늘은 도를 본받고 도는 자연을 본받는다(天法道都法自然)"의 자연을 의미한다…
      
   도덕경의 사상 모든 거짓됨과 인위적인 것에서 벗어나는 것이다.
 도교가 언어(言語)에 대해서 강한 부정을 보이는 것은 언어가 상대적 개념의 집합체라는데 있다. 좋다 나쁘다 크다 작다 높다 낮다 등의 판단은 인간들이 인위적으로 만들어낸 상대적 개념이며 이런 개념들로는 도에 이를 수도 없고, 도를 밝혀낼 수도 없다고 했다.

   이는 다도에서 이야기하는 암시의 가치, 중복의 금지와 같은 것이다.것이 무엇인가를 말하지 않은 채 그냥 놓아둠으로서 보는 사람으로 하여금 생각으로 완성하게 하는 게 암시의 가치이다.  

   "우리가 인식하려고만 한다면 완전은 어디든지 있다"

   위대한 걸작품들은 그것이 무엇이라고 이야기하지 않고도 관객을 끌어들여 매혹시키고, 나아가 관객을 그 작품의 부분이 되게 한다. 예술가들의 언어는 작품이어야 하는 것이지 해설이나 평론이 되어서는 안 되는 것이다.
다도가 "불완전"을 숭배하는 종교(?)로 발전하고 다실(茶室)에서 중복이나 비교를 금기로 삼는 것도 모두 도교의 가르침에서 비롯된다. 일본인으로 미국 보스톤박물관의 동양학부장을 지낸 오가꾸라 덴싱(岡倉天心)1900년에 발표한 "북 오브 티(The Book of Tea)"에서 그 부분을 다음과 같이 묘사하고 있다.

   …다실에는 중복이 있어서는 안된다. 장식을 위한 대상물은 빛깔이나 의장에서 비교되지 않도록 선택되어야 한다. 살아있는 꽃이 있다면 그림의 꽃은 허용되지 않는다. 탕관이 둥글다면 물주전자는 모난 것이어야 한다. 향로나 꽃병을 도꼬노마(床  間:聖壇)에 놓는데 있어서도 그 공간을 2등분하면 안되니까 한복판에 놓지 말아야 한다. 실내가 단조롭다는 느낌을 주지않게 하기 위해서 도꼬노마의 기둥은 다른 종류의 나무를 써야한다. 서양의 응접실에는 우리가 생각하기에 소용없는 중복이 많다. 옆에서 혹은 맞은 편에서 낯선 전신상(全身像)이 뚫어지게 보고있는 가운데 누군가와 이야기를 나눈다는 것은 참 견디기 어려운 일이다. 조각이나 그림의 인물과 살아있는 인물 중 어느쪽이 진짜인지, 때론 말없는 쪽이 진짜로 보이기도 한다. 나는 성찬(盛饌)의 식탁에 앉았음에도 벽에 걸린 물고기나 과일의 정교한 그림 때문에 남몰래 소화장애를 일으킨 적이 여러번 있었다. 이런 마음의 교란이 무엇때문에 필요한 것일까. 다실은 이런 비속적(卑俗的)인 중복의 두려움에서 벗어나 모든 것을 포용할 수 있는 빈(虛)자리이어야 한다…  

   "암시의 공간"이란 도교에서 말하는 무(無), 즉 빈공간(虛)이다. 현혹(眩惑)이 아니다. 조금만 생각하면 누구라도, 정말로 필요한 것은 허(虛)에 있음을 알 수 있다.

   …방의 본질은, 빈 공간이지 벽이나 지붕이 아니다. 주전자의 효용성은 물을 담을 수 있는 공간이지 모양이나 만듦새에 있는 것이 아니다. 허는 모든 것을 포함하기에 만능이며, 모든 것은 허일 때만이 운동이 가능해 진다. 자기를 허하게 하여 다른 사람을 자유롭게 들어올 수 있게 한다면 그는 지배자일 수 있다. 전체는 언제나 부분을 능가하기 때문이다…

   다도(茶道)가 마음을 비우는 작업이기에 차(茶)와 선(禪)과 자연(自然)과 허(虛)는 같은 의미로 우리에게 다가온다. 곧 모든 질서의 근원인 달마(dharma)이며, 최종 깨달음의 단계인 도(道)이고 순리(順理)이다. 이는 생각하는 생활을 통해서 민중에게 "불완전한 삶을 사랑하게 하는 가르침"로 숨쉬게 된다. 근세 중국의 사상가 임어당(林語堂)이 말이다.

   …차는 음미하는 음료이다. 사람을 고요하게 만들고 사색(思索)의 숲으로 인도하는 마력이 있다…

   사색(思索), 즉 사유(思惟)는 도(道)의 세계로 진입하는 통로이다. 차는 사유의 반려가 됨으로써 지성인의 이상(理想)이 되는 것이다. 이는 혼자 차를 마실 때 가능하다. 초의(艸衣)다신전(茶神傳) 음다(飮茶) 절에서 차를 마실 때는 사람 수에 따라 마음가짐을 달리하도록 했다.  

   …차를 마실 때는 사람 수가 적어야 분위기까지 잘 어울린다. 혼자 마시는 것은 신기(神氣)요, 둘이면 승(勝)이다. 서넛이면 취미(趣味)가 되고  오륙이면 그저 범범(泛泛)할 뿐이다. 칠팔 이상이면 시(施)일 뿐이다…

   도(茶道)존재(存在)에서 제공되는 것이 아니라 성품(性品)에서 출발한다. 어쩌면 그것은 기 잠재되어 있는 회귀성(回歸性)에 의해 무위(無爲)에 합일하려는, 자연스런 심성의 발현(發顯)같은 것인지도 모른다. 무엇인가 깨닫기를 희망하는 사람들의 수단이거나, 보다 아름다워지기를 원하는 사람들은 염원을 담고있기 때문이다. 덴싱"차의 책"에서 다음 구절을 음미해 보자.

   …종교에서는 미래가 우리들의 배후에 있다고 하지만, 예술에서는 현재가 곧 영원이다. 참다운 예술의 감상은 오직 그 예술로부터 살아있는 힘을 만들어내는 사람들에게만 가능한 것이다. 다인(茶人)은 다실(茶室)에서 얻은 높고 순화된 규범으로 일상생활을 조절해야 하고, 어떤 상황에서든 마음의 평정을 유지해야 하며, 대화는 주위와의 조화를 망쳐놓지 않도록 진행할 수 있어야 한다. 옷의 모양과 빛깔, 바른 자세와 행동, 심지어 걸음걸이까지도 인품을 나타내는 것이어야 한다. 스스로 아름답지 않으면 아름다움에 접근할 수 없기 때문이다. 다인(茶人)은 그렇게 스스로를 가꾸고 다듬으며 무엇인가 예술가 이상의 것, 아니 예술 자체가 되어야 한다. 완전은 어디에도 없지만 노력 속에는 있다. 결국 다도가 지향하는 심미주의(審美主義)의 선(禪)이란, 늘 부족하기만한 인생에서 그 부족한 것을 사랑하고, 나아가 그안에서 아름다움을 찾아내는 노력과 같은 것이다…

   다도에서 정리하고 있지만 사실 이것은 새로울 것 없는 동양사상의 핵심 이론이다. 그렇다면 다도는 어느 특정 국가나 민족의 것이 아닌 "동양의 것"일 수도 있다. 형식이나 과정에 차이는 있겠으나 "시작과 나중"은 동양적이어야 한다. 아름다움의 추구와 함께 "마음에 빈공간(虛)을 가지려는 사람들이 택하는 수단"이기 때문이다.  

   고려 충렬왕 산중재상으로 불리던 원감국사의 노래 한 줄을 음미해 보는 것도 매우 의미가 클 것이다.

…차마시는 것도 선(禪)이니, 선에 있어 격식은 초월하는 법…

   그는 계절에 구애없이, 경치가 아름다울 때면 서둘러 물을 끓이고 친구들을 불러모았다. 자료는 빈곤하지만 그것이 우리의 풍류(風流)이다. 우리의 다도가 이웃 나라들과 어떤 차이가 있는지를 가늠케 하는 정겨운 대목이 아닐 수 없다.




한국차문화사

2002.02.02 03:48

한국의 차문화/ 가야 신라인의 차생활과 토산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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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차를 중심으로 역사를 다시 정리해 보는 것은 매우 흥미롭다. 지금 우리가 배워서 알고 있는 것과는 많은 부분 다르게 전개되기 때문이다. 문명의 발상지를 바이칼호(湖) 주변으로 보는 사관(史觀)에서라면 민족의 위상은 더욱 힘차고 멋지게 정리된다.

   원시나 상고시대, 집단을 이루며 사는 정주민(定住民)들에게 가장 절실한 것은 무엇이었을까. 두 말 할 것 없이 그것은 물이며, 따라서 가장 강한 민족이 가장 좋은 물이 있는 땅을 차지하게 된다. 이 가설을 토대로 한다면 한반도를 택한 민족은 결코 약한 민족이 아니다. 동아시아에서 가장 좋은 물이 철철 넘치는 땅이 한반도이기 때문이다.

   공자(孔子)가 늘 와서 살고 싶어한 군자국(君子國)이 우리나라 아닌가. 그리고 차는 좋은 물을 더욱 고급스럽게 마시는 방법이다. 멋을 아는 민족만이 택할 수 있는 지혜(智慧)의 산물(産物)이다. 복잡하게 생각할 것 없다. 이 두 가지 추정만으로도 한민족의 위상은 금세 당당해질 수 있다.

   그러면 한반도에 차나무는 어느 때 생겨났고 차생활은 언제 시작되었을까. 일반적인 견해가 어떠하든 우리의 차 이야기는 가락국(駕洛國) 건국신화(建國神話)와 함께 시작한다. 이능화(李能和/1869-1943)조선불교통사에 다음과 같은 귀한 기록을 남겼다.

   …김해 백월산(白月山)에 죽로차가 있다. 세상에서는 수로왕비 허씨가 인도에서 종자를 가져온 것이라고 한다. 장백산(長白山)에도 차가 있는데 백산차(白山茶)라 한다…

   인도로부터 차 전래설은 긍정할 수 밖에 없다. 김수로왕(金首露王)황옥(許黃玉)이 엄염한 실존인물이기 때문이다. 삼국유사 가락국기에 적힌 그대로를 사실로 받아 들이자. 수로왕은 하늘에서 내려와, 하늘의 뜻대로 지상을 다스린 첫 군왕(君王)이다. 그리고 허황옥은 아유타국(阿踰陀國)의 공주로 태어났는 데 꿈의 계시로 수로왕에게 시집왔다.

   허 공주서기 48년 음력 5월, 리만 해류를 타고 고국을 떠나 7월 27 김해 별진포상륙하였다. 수행원 20여 명과 함께 타고 온 그녀의 배에는 비단·금·은 패물 등이 가득했는데 이 속에 차나무 씨도 있었다.

   차나무는 심은 자리에서만 살도록 천명(天命)을 받은 나무이다. 허황옥이 차나무씨를 가져온 것은 "나는 이제 옮겨가선 살 수 없는 가락국 사람"이란 뜻이었다. 수로왕은 이 차씨를 김해에 심도록 했다. 여자가 시집갈 때 차나무 씨를 가져가 뒷뜰에 심는 풍습은 이로부터 생겨났다.  

   허 공주가 꿈의 계시에 따라 가락국 김수로왕에게 시집와서 생애를 마쳤다는 것은 가락국기(駕洛國記) 외에 유사(遺事)금관성 비사석탑, 김해시 구산동에 있는 수로왕비릉(陵), 그리고 김해 허씨 후손에 의해서도 고된다. 또 수로왕릉 중수기념비의 머리에 새겨진 여덟마리 뱀 무늬 양왕조를 상징하는 아유타국의 깃발 문양과 같고, 마주보는 신어상(神魚像), 두 개의 활무늬 역시 아유타에 뿌리를 둔 것들이다.

   이 때에 차가 있었다는 사실은 수로왕의 뒤를 이어 즉위한 거등왕위년인 199년에 제정한 세시풍속(歲時風俗) 떡·밥·차·과일 등을 갖추어 다례(茶禮)를 지내도록 한 것에서 확인할 수 있다.

   신라 김유신이 수로왕의 12대 손이다. 문무왕에게는 김수로 왕가가 외가 쪽 조상이 된다. 이렇게 혈통이 이어진 관계로 김수로 왕은, 가락국이 신라에 병합된 뒤에도 오랜동안 가야의 시조(始)로 봉사(奉祀)되었고 다례 풍습도 이어졌다. 이는 대렴(大廉)이 당나라에서 차씨를 가져오기 3백 년 내지 6백 년 전의 이야기다.

   차문화의 학문적 연구에 반생을 바친 김명배(金明培·숭의여전) 교수허황옥과 죽로차의 전설을 쫒던 중 비밀스런 역사에 접근하게 된다.  

   허 왕후는 모두 10남 2녀를 낳았는데 태자거등왕이 되었고 거칠군이라는 왕자는 진례성주(進禮城主)가 되었다. 그리고 일곱명의 왕자는 외숙인 장유화상(長遊和尙)과 함께 지리산에 들어가 성불(成佛)했다. 지금의 칠불사(七佛寺)가 그곳으로 약 1800년전 이들 일곱왕자가 성불한 이후 칠불암(七佛庵)이라 이지어졌다. 그리고 두 공주 중 한명은 신라 탈해왕의 태자비가 되었다.

   기록은 그것 뿐이다. 9남 1녀에 대해서는 이렇게 상세히 전하고 있는데 한 명의 왕자와 한 명의 공주 행방은 없는 것이다. 김교수는 이들 남매의 흔적을 "김씨왕세계"에서 찾아냈다.  

…거등왕 즉위년에 왕자 선견(仙見:神功)은 신녀(神女)를 따라 구름을 타고 떠났다. 거등왕이 도읍의 언덕 돌섬에 올라 선견을 불렀지만 돌아오지 않았다…

   거등왕 즉위년은 서기 199년이다. 신녀공주로 본다면 진수(陳壽)삼국지(三國志)왜인전(倭人傳)에 들어있는 일본 고대국가 야마도(邪馬臺)히미꼬(卑彌呼) 여왕그의 남동생 이야기와 맞아 떨어진다. 왜인전의 기록을 보자.

   …모두 함께 한 여자를 내세워 왕으로 삼았는데 이름을 히미꼬라 하였다. 귀신의 도를 섬겨 능히 무리를 감동시켰다. 나이가 찼지만 남편이 없었는데 후에 남동생이 나타나 나라 다스리는 일을 도왔다….

   여왕은 183년에 옹립되어 247년 붕어하였다 했다. 왕이 된 후 신녀(神女)로 불리웠을 그녀가 199년, 고국에 들러 국사를 보필할 남동생을 데리고 갔을 것이라는 추측이 가능한 것이다.      

   이 가설은 일본 사학자들도 부정하지 않는다. 저명한 사학자 이노우에(井上光貞)는 그의 저서 "일본국가의 기원(日本國家の起源)"에서, 히미꼬는 한반도와 관계있는 여성으로 보인다고 했고, 진구우(神功) 역시 한반도에서 왔다고 기술하고 있다. 여왕의 위폐를 모신 묘오겐궁(妙見宮)에서 볼 수 있는 신어상(神魚像)김해 수로왕릉의 것과 같은 이유는 이 때문이다.

   히미꼬 여왕김수로 왕의 딸이라면 차나무도 이때 전파되었을 것이다. 그렇다면 "히미꼬 여왕시대부터 차나무가 있었다"는 일본 고고학계의 주장이 맞는 것이 된다.  

   이 히미꼬 이야기는 뒤에 소개되는 김성호(金聖昊) "비류백제(沸流百濟)와 일본의 국가기원(國家起源)"에서  더 발전된다. 가야의 유민 중 신라사에 이름을 남긴 사람은 김유신 외에 우륵(于勒)·강수(强首) 정도이다. 또 가야가 쇠퇴하여 신라에 완전 합병된 시기는 6세기 중엽이다.  
  


   신라인의 차생활을 엿보게 하는 일화로는 시승(詩僧) 충담(忠談)선사 이야기가 가장 유명하다. 충담 이야기는 찬기파랑가로 시작된다.

   경덕왕 시절 국선 화랑 중에 기파랑(耆婆郞)이란 낭도가 있어 백성들의 존경을 한 몸에 받았다. 성품이 고결하고 인품이 넉넉하여 남들이 감히 따를 수가 없었다. 충담은 그를 찬(讚)하는 노래를 지었다.

헤치고 나타난 달
흰구름 따라 흐르니
새파란 시내에
기파랑 모습 잠기네

일오천(逸烏川) 조약돌에서
랑(郞)의 지니신 마음 읽으니
아아, 드높은 잣나무 가지
서리 모를 씩씩함이여

   충담이 지은 기파랑가(歌)는 장안의 유행가가 되었다. 임금도 신하도 뭇백성들도 즐겨 불렀다.        
경덕왕 치세 20년이 지나면서, 오악(五岳) 삼산신(三山神)이 궁전 뜰에 불쑥 현신하는 등 나라 안팎에 심상치 않은 불길한 일들이 연이어 일어났다. 23년(765년) 봄 경덕왕은 착잡한 마음으로 경주 귀정문(歸正門)에 올랐다. 신하를 대동하고 문루에 오른 경덕왕은 "근자의 괴변을 막고 나라를 잘 다스릴 방법이 없을까?…"를 골똘히 생각했다.

   궁리 끝에 경덕왕은 훌륭한 스님을 한 분 모셔오라고 했다. 이에 신하들이 장안 제일의 원로스님을 모시고 왔다. 그런데 왕은 몇 마디 나누지 않고 이 분은 내가 찾는 스님이 아니라며 돌려보냈다.

   문루 끝에 서서 남산을 바라보던 경덕왕의 눈에 멀리 걸어오는 한 스님이 보였다. 낡은 납의(衲衣)에다 등에는 걸망을 짊어지고 있었지만 기품이 있어 보였다. 왕은 스님을 루상(樓上)으로 모시도록 했다.

"스님은 누구신가요?"
경덕왕이 묻자 스님은 충담이라고 자신을 밝혔다.
"기파랑가를 지으신 스님입니까?"
경덕왕은 크게 기뻐하며 예를 갖추고 다시 물었다.
"어디에서 오시는 길입니까"
"남산 삼화령에서 오는 길입니다. 소승은 삼월삼짇날과 구월 구일이 되  면 언제나 삼화령의 미륵세존께 차 공양을 드렸습니다. 오늘이 삼월삼짇날이어서 다녀오는 길입니다"      
"어떤 차입니까? 나에게도 그 차를 나누어 줄 수 있습니까?"
"원하신다면 그렇게 하겠습니다"

   스님은 등에 진 걸망을 풀었다. 걸망 속에는 차와 다구가 들어있었다.  
정성껏 차를 달여 경덕왕께 드리니 왕은 그 맛의 훌륭함과 기이한 향기를 극찬했다. 충담은 주위의 신하들에게도 고루 차를 나누어 주었다. 뜻밖의 다회가 벌어진 것이다. 경덕왕은 또 말했다.

   "스님이 지으신 사뇌가(詞腦歌:찬기파랑가)는 그 뜻이 매우 고상하여 온 백성이 즐겨 부르고 있습니다. 나라를 위하여 안민가(安民歌)를 하나 지어주실 수  없겠습니까?"  

   그러자 스님은 즉석에서 안민가를 지어 올렸다.

임금(君)은 아버지요, 신(臣)은 인자한 어머니  
백성은 어리석은 아이와 같으니
아이가 어찌 부모의 크신 은혜 다 알리요.
꾸물거리며 사는 중생 먹여 살리시니
그 은혜로 나라가 유지되네  
왕이 왕다웁고 신이 신다웁고 백성이 백성답게 할지면
나라는 태평하리라

   경덕왕은 크게 기뻐하며 충담을 왕사(王師)로 봉하고자 하였다. 그러나 충담은 거듭 사양하며 끝내 받지 않았다.    

   이는 대렴이 당(唐)에서 차 종자를 가져왔다는 흥덕왕 3년에서 보면 63년전의 일이다. 문운의 황금시대였던 경덕왕 시절이 아니더라도 이때에 이미 차가 불공에 쓰이고 궁정에서 예폐물로 다루었던 사실은 드러난 것되었다. 이는 삼국사기 신라본기 흥덕왕 조에 적힌 내용을 훌륭하게 뒷받침한다.

   …흥덕왕 3년(828년) 당(唐) 사신 대렴(大廉)이 차 종자(種子)를 가지고 왔다. 왕은 그것을 지리산에 심게 했다. 차는 선덕왕 때부터 있는 것인데 이때에 와서 아주 성해졌다…

   여기서도 분명해지는 것은 중국으로부터 차 종자가 들어오기 이전 우리에게 차가 있었다는 사실이다. 귀족 문화였을지는 몰라도 이미 차생활이 있었기에 중국을 다녀오는 사신도 차를 가져올 수 있었던 것이다.

   이 기록을 근거로 흥덕왕 3년에 "중국의 차 종자"가 전래되었다고 말하는 것은 얼마든지 좋다. 그러나 한국의 차생활 역사가 이때, 즉 828년에 시작하는 것으로 표현하는 일은 앞으로는 없어져야 한다.

   신라인들이 마시던 차를 유사(遺事)에서는 전차(煎茶)라 전한다. 그러나 이규보 남행월일록(南行月日錄)에는 점차(點茶)로 적혀있다. 전차란 잎을 우려 마시는 엽차(葉茶)요, 점차는 잎을 연(碾)에 갈아 가루로 만든 뒤 뜨거운 물에 풀어마시는 말차(抹茶)를 일컫는데 사학계(史學界) 견해는 두 가지 형식이 함께 있었다는 쪽이다. 다만 엽차보다 말차 음다법이 더 성행하였을 것이라는데 의견을 모은다. 이때의 분위기는 신라말기 국사를 지낸 고승 혜소(慧昭774-850)의 비문에서 엿볼 수 있다.  
  
   …누가 한명(漢茗/茶의 異名)을 보내오면 그(眞鑑國師)는 그것을 돌로 만든 가마에 넣고 나무를 때서 삶았다. 가루로 만들지 않고 달였다. 그리고 말하기를 "나는 이것이 무슨 맛인지 모른다. 그저 배가 느긋할 뿐이다"라고 했다. 국사(國師)가 정진(正眞)을 지켜 세속(世俗)을 미워함이 다 이와 같았다…

   혜소, 즉 진감국사 비문을 쓴 이는 고운(孤雲) 최치원이다. 그는 이 비문에서 신라말기 우리 사회의 사대주의를 비판하고 있다. 당시 일반에 널리 음용되고 있던 것은 말차였는데, 누가 중국차를 보내오면 일부러 신라의 방식으로 가루내어 마시지 않았다는 이야기다.

   신라인의 차생활원효(元曉617-686)를 통해서도 엿볼 수 있다. 그가인적 드문 변산의 한 산마루 외딴 암자에서 선(禪)에 정진할 때의 일이다. 시중들던 사포가 차를 달여 드리고자 하였으나 물이 없었다. 간절히 물을 원하니 홀연 바위틈에서 젖과 같이 달콤한 물이 솟아나기 시작했다. 그래서 사포는 원효께 차를 달여 드릴 수 있었다. 후일 이곳을 찾은 고려의 시이규보는 다음과 같은 시를 남겼다.

좁고 험한 산길 지나 백 길은 됨직한 산 위
일찌기 지어진 효성(曉聖)의 암자
신령스런 자취는 어디에 있는가. 영정만 종이 폭에 남았구나      
다천(茶泉)에 고인 옥빛 샘물 마셔보니 천하일품
예전에는 물 없어 불승(佛僧) 머무르기 어려웠는데  
원효대사 머물 때에 솟아난 샘이라네          
우리 스님 높은 뜻 이어받고자 누더기 걸치고 이곳에 들어
시중드는 자 없이 홀로 앉아 세월 보내네
문득이라도 소성(小性/원효의 이명) 올라 오시면
얼른 일어나 허리굽혀 절할 것이로세

   29세에 출가한 원효는 34세 때에 의상(義湘)과 함께 불법을 닦고자 당나라로 향한다. 요동(遼東)을 지나던 중 공동묘지에서 하룻밤을 지내는데 잠결에 목이 말라 물을 한그릇 마셨다. 이튿날 깨어보니 그 물은 해골 속의 더러운 물이었다. 안간힘을 다해 토해내려고 하던 중 원효는 깨달음을 얻었다.

   "마음이 살아야 모든 사물과 법이 생기를 얻는다. 마음이 죽으면 해골이나 다름없구나(心生則種種法生 心滅則壻?不二). 삼계(三界)가 마음에서 지어진다 하신 것을 어찌 잊었더냐(一切唯心造)"

   깨달음을 얻은 원효는 발길을 돌려 경주로 돌아와 분황사(芬皇寺)에서 불경연구에 몰두하는 한편 좌선입정(坐禪入定)하여 계율을 철처히 지키는 수도생활을 계속했다. 그는 당시의 불교가 형식에 치우쳤던 것에 과감히 맞서 불교의 대중화를 시도했는데 그 일련의 과정들이 차생활을 통해 다져졌을 것은 굳이 설명하지 않아도 될 듯 싶다.

   내성적이면서 동시에 호탕한 일면도 가지고 있던 원효는 어느 날 이런 노래를 지었다.

   …도끼에 자루를 끼게할 자는 없는가. 내가 하늘 받칠 기둥을 깍아야겠구나…

   사람들은 그 노래가 무슨 뜻인지 몰랐다. 원효는 아무 소리도 덧붙이지 않았다. 그런데 이를 전해들은 무열왕(武烈王) "대사가 부인을 얻어 현자(賢者)를 낳고자 하는 것이다"고 해석하며 홀로 있는 요석공주를 생각했다.
이윽고 원효는 요석공주를 만나게 된다. 춘원 이광수 "원효대사"에서 원효와 요석이 만나는 대목을 다음같이 묘사하고 있다.

  …원효는 시녀가 이끄는대로 여러 복도를 지나서 한 방으로 들어갔다.
거기엔 쌍학을 수놓은 이불과 쌍봉, 쌍란, 쌍원앙을 수놓은 긴 베개가 있고 요석공주가 혼자 촛불 밑에 앉아 있었다. 원효는 방에 들어가 우두커니 서 있었다. 공주는 원효를 보고 일어나서 읍하고 섰다. 백작약 일곱송이를 꽂아놓은 것으로 보아서 원효는 이 뜻이 무엇인지를 알았다.

   공주는 자기를 구리선녀로 자처하고 원효선에 선인으로 비겨서 세세생생에 부부되기를 청하는 것이었다. 두 사람은 한참동안 말없이 서 있었다. 촛불이 춤을 추고 창밖에서는 벌레소리가 울려왔다. 이윽고 공주가 고개를 들어 "앉으시오. 오늘은 법사로 여쭌 것이 아니요, 백의로 오시게 한 것입니다. 이 몸의 십년 소원을 이뤄 주십시오"하고 눈물을 떨구었다.

   아무리 십 년 동안 먹은 마음이라 하더라도 입을 열어 말하기가 힘들기도 하려니와 또 무섭기도 하였다. 원효도 제 몸에 입은 옷이 중의 옷이 아니요 속인의 옷인 것을 다시 보고 공주가 권하는 자리에 앉았다. 공주도 한 무릎 세우고 앉았다. 공주는 다로(茶爐)에 끓는 다부(茶釜)에서 대극으로 물을 떠서 차를 만들어 원효에게 권하고 다시 입을 열었다. "새벽 쇠북 스무여덟 소리가 다 끝나도록 원효사마께서 아니오시면 이 칼로 이 몸의 목숨을 끊기로 마음먹고 있었오"하고 공주는 금장식한 몸칼을 몸에서 꺼낸다. 고구려 도장이 만든 칼이었다…

   이것은 대충 서기 655년 전후의 이야기이다. 여기서 요석공주가 원효에게 만들어 대접한 것은 의심의 여지없는 점다(點茶), 즉 말차이다. 삼국사 흥덕왕 조에 대렴을 논하면서 차는 선덕왕(632∼647) 때부터 있어왔는데… 한 대목을 훌륭하게 뒷받침하고 있는 것이다. 원효는 요석 공주와의 사이에서 설총을 얻었다.

   신라의 다인으로 빼놓을 수 없는 또 한 분은 고운(孤雲) 최치원(崔致遠857∼)이다. 어린 나이에 당나라 유학을 가서 천재적인 문장으로 온 중화국(中華國)을 뒤흔들었던 고운은, 귀국 후 나라가 어지러워지자 부귀영화를 한낱 뜬구름처럼 여기고 지팡이를 벗삼아 방랑하며 곳곳에 많은 詩와 일화를 남겼다.

   그는 중국에 있을 당시 인편이 있을 때마다 고향의 어머니께 차를 보내드리곤 했는데 이는 삼국지의 유비현덕이 어머니가 좋아하시는 차를 구해드리기 위해 멀고 위험한 여행을 떠났던 사실을 연상하게 한다. 어쩌다 인편이 없어 차를 보내드리지 못할 때면 몹시 마음 조렸던 일들이 그의 시문집(詩文集·桂苑筆耕)을 보면 간간 들어있다.  

  
   통일신라 이전의 차는 불전 공향과 승려들의 수도용으로 사찰 안에 없어서는 안 될 필수품이었다. 특히 수도자에게 있어 차는 잠을 쫓아주고 소화를 돕고, 정신을 맑게하는 효능으로 좌선(坐禪)의 유적현묘(幽寂玄妙)함을 도와주어 선승(禪僧)들에게 아낌을 받았다.

   사람들은 막연하게 차가 불교의 전래와 함께 들어와 승려들 간에 성행하였다고 하지만, 그러나, 차와 불교의 만남은 신라통일 무렵에나 이루어 졌다. 이미 독자들도, 앞에서 살펴본 사실만으로 불교를 따라 전래했다는 증거는 희박하다는데 동감할 것이다.

   당에서 차 종자를 가져온 것도 승려가 아닌 당 사신 대렴(大廉)이었고 이를 지리산에 심게한 이도 흥덕왕이었다. 또 차는 그때 막 시작된 게 아니라 이미 있었는데 이 때에 와서 더욱 성행하게 되었다고 했다. 화랑들이 차생활로 심신을 수련하였으며 이것이 발전하여 후일 삼국을 통일시키는데 매우 큰 영향을 끼쳤다. 차는 불교와 관계없이 번진 것이다.    

   신라인들이 차를 마시는 데 있어 어떤 통일된 형식이나 예법을 가졌다는 기록은 없다. 다만 차는 군자의 기질과 덕을 지니고 있어, 맑고 곧은 예지와 함께 관용의 미덕이 있어야 한다고 하였고, 맑은 인격과 고매한 학덕과 예(藝)를 고루 갖춘 지성을 "다인(茶人)"이라 하는 풍습이 - 그리고 그 부름이 선비들에게 가장 이상적인 관칭대명사로 인식되어 명정(銘旌)에 기록되는 것을 최상의 영예로 여기는 풍습이 - 있었다고 한다.
  
   그런데 같은 시대 고구려·백제의 차생활을 전해주는 기록은 없다. 고구려는 북쪽에 위치하여 차의 재배 생산이 어려웠다손 치더라도 호남의 따뜻한 지방을 영토로 했던 백제에 차 마시는 습속이 없었다고 볼 수는 없다. 지리산을 중심으로 볼 때도 신라 쪽인 경상도 지역보다 백제 영역이었던 전라도 방면의 기후나 토양이 차나무 재배에 더 적합하고, 따라서 차 산출 역시 몇십 배나 많을 수 있다는 가정(假定)에서 백제인들의 음차생활 진위는 유난히 궁금해 진다.

   그렇다면 이쯤에서 김성호(金聖昊) "비류백제(沸流百濟)와 일본(日本)의 국가기원(國家起源)"을 인용해 볼 필요가 있다. 백제의 역사가 명확하게 정리되지 않는데 짙은 의문을 품었던 그는 15년간에 걸친 집요한 답사와 연구를 거쳐 백제는 하나가 아닌, 2개의 국가였음을 밝히고 있다.  

   …우리 역사 연구가 일본인들에게 강점되었던 시대에 일본사학자들은 근 3∼4백 년간에 걸친 "삼국사기"의 초기 기록을 불신했고, 이러한 풍조는 우리 사학자들에게 고스란히 계승되어 왔다. 지금까지 우리가 배워 온 국사는 바로 이러한 불신론이 전제된 역사였다…<중략>…백제의 시조였던 온조측의 기록(삼국사기 백제본기)을 보면 온조의 형이던 비류는 미추홀에서 자살했다고 한다. 그런데 여기에 삽입되어 있는 이설의 단편기록에는, 비류도 시조가 되어 "동이강국(東夷强國)"을 세운 것으로 되어 있다. 더욱이 온조측의 초기기록은, 자기의 도읍지가 경기(京畿) 광주(廣州)임에도 불구하고, 건국 초부터 3백리 이상이나 떨어져 있는 충남(忠南) 공주(公州)의 기사가 함께 나타남에 의심을 품고, 공주 쪽의 기록을 분리해 본 결과, 역시 비류는 자살한 것이 아니라 미추홀(지금의 아산 인주면)에서 40여 km가량 떨어진 공주로 옮겨 가서 별개의 나라를 세웠음이 밝혀졌다. 이것이 바로 古代三國(신라·고구려·백제)과 구별되어야 할 또 하나의 국가로서, 고대 초기에 있어서 "백제"는 하나가 아니라 두 개였다…  
    
   이어 그는, 이러한 백제 초기기록의 복원 결과는 광개토대왕 비문에서도 확인됨을 설명한 뒤 이 나라가 멸망한 이야기까지 적고 있다.

   …공주를 근거지로 크게 번성했던 국가 비류백제는 경기만을 남하해 내려온 광개토왕의 수군(海軍)으로부터 공격을 받고 396년 멸망하였다…

   BC 18에 건국한 비류백제개토왕에게 토멸된 AD396까지 무려 413년간을 존속한 고대 초기의 왕국이었다. 한중일 3국 문헌에서 공주 쪽의 백제 관계 기록을 연대순으로 정리하면, 4백여 년 간에 걸친 역사의 맥락이 정연하게 재구성된다.

   중국 송서양서 "백제전(百濟傳)"에서는 "백제는 막강한 수군력을 바탕으로 점점 강하고 커져서 여러나라를 병합하였다. 백제는 요동의 동쪽을  모두 차지해 백제군이라 이름했다" 했다.

   사학계 일설백제의 영역중국 동부 황하문명의 심장부까지라고 하면서 요수 아래 하북성, 하남성 전체가 백제군이었다는 것인데, 이의 진위시비는 뒤에 두더라도, 어쨌든 막강한 수군으로 황해(黃海:西海) 연변의 백가제해(百家濟海)를 이룩했던 강인한 나라는 비류(沸流)의 백제였다. 때문에 광개토대왕은 수군(水軍)을 앞세워 비류를 먼저 굴복시켰던 것이다.

   이 나라(沸流百濟)의 역사가 지금까지 망각되어 온 데에는 하나의 기묘한 이유가 있었다. 즉, 비류백제가 멸망하고 80년이 지나서 온조백제도 고구려의 침공을 받고 공주로 남천(南遷)했다. 그 이후 온조백제는 비류의 옛도읍(舊都)이던 공주를 마치 처음부터 자기의 영토인 것처럼 역사를 개서(改書)함으로 인해서 비류계의 역사는 말살되지 않을 수 없었던 것이다.

   앞에서 언급했듯 온조측의 기록이 건국 초부터 광주와 공주로 2중화된 것도 바로 비류계의 역사가 온조측에 흡수되었기 때문이다. 지금까지 사학계에서 백제 초기기록을 올바로 해석하지 못했던 것도 실은 이러한 초기기록의 지역적 이중성이 파악되지 못했기 때문이라고 말할 수 있다…

   김성호 씨는 이 비류백제의 멸망이 곧 일본의 국가기원(國家起源)으로 이어졌다고 했다.

   …일본 천황국가의 기원은 비류백제의 멸망에서 밝혀진다. 396년 광개토왕이 비류백제를 토멸했을 때, 공주성을 탈출한 비류계의 왕족 일단은 일본열도로 쫒겨가서 망명정권을 세웠다. 이것이 지금까지 신비의 베일에 싸여왔던 천황국가의 탄생이었다…

   천황국가 일본의 제1대 천황은 신무(神武)이다. 이때 무엇을 뜻하는지 모르는 "즉위전사 7년(卽位前史 七年"이란 글과 함께 자주 겹치는 이름이 있는데 응신(應神)이다. 응신은 390년에 즉위한 비류백제 마지막 왕이었다.

   …일본 사학계에서 "가장 확실한 최고(最古)의 천황"은 응신천황(應神天皇)으로 즉위 원년은 390년이다. 응신과 동일 인물로 지목되어 온 제1대 신무천황(神武天皇) "卽位前史 七年"을 더하면, 비류백제가 멸망한 다음 해(397년)가 된다. 이러한 사실은 응신이 처음부터 일본의 천황이었던 것이 아니라, 비류백제의 마지막(15대) 왕으로서 390년 즉위한 후, 396년에 광개토왕의 공격을 받고 일본으로 망명하여, 그 다음 해인 397년, 즉 즉위 7년째에 최초의 일본천황이 되었음을 뜻한다.

   일본의 많은 사학자들은 제1대 신무(神武)와, 제15대 응신(應神)이 동일 인물일 것으로 여겨 오면서도 신무의 "즉위전사 7년"이 무엇을 뜻하는지는 알지 못해 왔다. 이 "前史 7年"이야말로 응신(神武)이 비류백제의 마지막 왕으로 즉위해서부터 최초의 천황이 되기까지의 7년에 해당한다. 이는국사기일본서기 양쪽에서 명백히 증명된다.

   응신 조(朝)한민족(비류백제)의 망명정권이었기 때문에 응신 이후의 천황 성(性)은 비류계 왕성(王性)인 진(眞)씨로 되었던 것이며, 이 이후의 후기 고분으로부터는 전기에 없었던 백제계의 마제(馬制) 유물이 대량으로 출토되었던 것이다. 한반도의 변진(弁辰)민족이 일본열도를 정복하여 천황가(天皇家)를 세웠다는 소위 "기마민족 정복설"도 이 전기와 후기 고분에서 출토되는 유물들이 급격하게 돌변하는 데에 근거된 것이었다…

   김성호 씨는 또, 비류백제가 망명정부를 세우기 훨씬 이전인 서기 100년 경 기다큐슈(北九州)에 야마도(邪馬臺國)를 개설한 숭신(崇神) 역시 류백제 왕실의 종친이었다고 하면서, 일본서기야마도 "담로(淡路)"칭했는 데, 이는 비류백제의 군·현(君·縣)을 가리키던 담로(擔魯)와 일치한다고 하였다.

    다시말하면 비류백제가 일본에 처음 진출한 것은 서기 100년 전후였고, 왕실의 자제종친으로 "담로주"를 임명했는데 첫 담로주가 숭신(崇神)이었다는 것이며, 이로부터 296년이 지난 뒤 광개토왕에게 밀린 비류백제 마지막 왕 응신(應神)이 이를 근거로 이곳에 망명정부를 세우게 되었다는 것이다. 처음에는 물론 전력을 가다듬어 실지를 회복하려는 꿈을 가졌으나 차차 뒤로 미루게 되었고, 이윽고는 일본 천황가의 개조(開祖) 즉 신무(神武) 1세로서 다시 출발했던 것이다.    

   이와같은 김성호 씨의 주장과, 가락국 김수로 왕의 딸이 일본으로 건너가 여왕이 되었다김명배 교수의 주장 180년 전후 히미꼬(卑彌呼)에 이르러 엇갈리는 부분이 생긴다. 김성호 씨의 글을 보자.

  비류백제 세력에 의해 야마도가 개설되어 70년 가량이 지나서 모계원주왜인(母系原住倭人)에 세력기반을 갖고있던 신공(神功)황후 히미꼬네 번째의 담로주이던 중애(仲哀)를 죽이고 여왕(女王) 지배체제를 확립하였다. 그러나 신공(神功)이 죽은 후 다시 양쪽의 충돌이 야기되어, 야마도의 역사는 269년 종말을 고했다. 일본 사학계에서는 신공과 히미꼬를 별개의 여인으로 보아왔으나, 실은 사망년도까지 일치하는 동일인이다…

   그러나 김명배 교수 김수로 왕의 두 딸중 하나가 일본으로 건너가 183년 여왕이 되었으며, 199년 거등왕 즉위년에 잠시 귀국하였다가 돌아갈 남동생(仙見)을 데려가 야마도를 다스린 것으로 밝히고 있다. 여왕이 곧 히미꼬(卑彌呼)이며 남동생이 신공(神功)이라는 것이다.  

   누구의 주장이 옳든 간에 이러한 한·일 고대사는 여러분야에 심심찮은 파문을 던진다. 백제가 일본천황가의 전신(前身)처럼 되어버림에 따라, 백제의 옛 땅(故地)은 일본 천황가의 영지(領地)가 되지 않을 수 없고, 여기 근거하면 고대 천황가가 남한지역을 지배했다는 "남한경영설(任那經營說)"도 어쨌든 성립된다. 또 일본의 교육이념을 주도해 온 전통적인 역사관이 한반도 강점을 침략으로 보지않고 고대 천황의 영지를 회복한 것처럼 여겨온 것 역시, 이러한 역사적 배경에서 보면 납득되고 만다.  

   차문화 측면에서도 풀리지않는 의문의 실마리를 제공한다. 히미꼬라고 차 씨를 안 가져 갔을리 없다. 차나무는 이때 전해졌을 것이다. 또 가락국(駕洛國)의 차 이야기는 신라로 이어지는 반면, 백제인의 다풍은 전혀 전해지지 않는 이유도 어렴풋이 밝혀진다. 그것은 정복자 신라에 의해 말살된 역사가 아니었다. 그들이 가지고 이 땅을 떠난 역사였다.    

   부여 공주 이남이 비류백제의 영토였다고 보면 고대 차문화는 비류백제를 중심으로 피어났을 것이 당연하다. 그곳이 우리나라 최적(最適)의 차 산지(産地)이기 때문이다. 경기 광주의 온조백제 영토에까지 차가 있었다고 보여지진 않지만, 비슷한 시기 영남에 있던 차나무가 호남에는 없었다고 볼 수 없다. 따라서 비류백제의 기록이 깡그리 없어졌기에, 백제인의 차생활 흔적도 찾을 수 없게 사라져 버린 것이었다.

그렇다면, 독자들은 이미 짐작이 갈 것이다. 일본 차문화의 뿌리가 곧 백제인의 차생활이요 그 자체였던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