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2차 세계대전후 미국의 일본점령정책

2019. 10. 1. 10:16우리 이웃의 역사



[펌]제2차 세계대전후 미국의 일본점령정책 게시판 

 

2007. 11. 11. 0: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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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      차


       서 론 ․․․․․․․․․․․․․ 2


       본 론

        1. 전후 미국의 아시아 정책 ․․.... 4

        2. 포츠담 선언과 일본의 항복 ․..... 5

        3. 점령 체제의 구조와 특질 ․․.... 7

        4. 민주화 정책 ․․․․․․․․ 9

        5. 강화조약과 안보조약 ․․․․.. 12

        6. 비무장화 정책 ․․․․․․․ 14

        7. 경제 개혁 ․․․․․․․․․ 15

        8. 점령의 재평가 ․․․․․․․ 17

        9. 주권 회복 ․․․․․․․․․ 19


       결 론 ․․․․․․․․․․․․․ 25


       참고문헌 ․․․․․․․․․․․  27



서       론


 1945년 9월부터  1952년 5월까지 계속된 약 7년간 행해진 연합국의 일본점령은 역사상 존재하였던 군사점령 가운데 매우 독특하다고 할 수 있다. 왜냐하면 역사가 Edwin Reishauer가 말하듯이, “한 선진국가가 또 다른 한 선진국가의 결점이라고 판단되는 것을 안으로부터 개혁하고자 한 적은 전에는 결코 없었다. 그리고 한 강대국에 의한 또 다른 강대국의 군사점령이 승자에게 그처럼 만족스러웠고 패자에게 그처럼 관대한 적도 없었다.”는 점 때문이다.1) 일본에 대한 미국의 정책은, 비록 처벌적인 양상이 있긴 하였으나, 처음부터 호의적이었고 건설적이었다. 오랜 역사상 외국군대에 패배한 적도 없었고 외국군대를 주둔시킨 적도 없었던 일본인들은 최악의 상황을 예상했다. 미국의 야만성에 대한 그들의 공포는 근거가 없는 것으로 입증되었을 뿐만 아니라 일본인의 완고한 보수주의에 근거한 지속적인 적대감을 두려워한 미국의 공포도 근거가 없는 것임이 입증되었다.

 일본인들의 적극적 지지를 확보하는데 더욱더 중요했던 것은 미국 내의 많은 사람들이 요구했듯이 일왕을 전범으로 처벌하지 않고 왕좌를 유지할 수 있게 해 준 미군당국의 결정이었다. 실제로 왜 일본인들이 미점령군에게 그처럼 온순하고 협조적이었는가 하는 이유는 일본인들이 관습에 따라 충성스럽게 복종을 바친 일왕이 그들에게 협조하도록 호소했다는 것이었다.

 일본이 패전하기 전에 이미 미국의 관리들은 군사점령 아래 실행된 개혁구상을 준비하고 있었다. 그 이름이 의미하듯 연합국의 일본점령은 공동사무였으나, 사실상 전쟁에서 큰 역할을 한 소련과 여타국가의 희망에도 불구하고 미국에 의해 주도되었다. 맥아더 총사령관이 연합국최고사령관으로 임명되었고, 그의 권한 아래 광범위한 개혁계획이 일본에 부과되었다. 일본정부는 폐지되지 않은 채 패전국 독일의 경우처럼 군사정부로 대치되었다. 또한 일본내각은 연합국 최고사령관의 개혁명령을 집행하는 기관으로 유지되었다. 그리고 독일의 경우와는 달리 일본은 별개의 다른 점령지로 분할되지 않았는데, 대체로 소련이 요구한 일본내 점령지를 미국이 거부했기 때문이다.

 미국이 통제한 점령계획의 중요한 목표는 탈군국주의화와 민주화였다. 탈군국주의화는 첫째로 중시되었고 신속하게 달성되었다. 일본의 육군과 해군은 폐지되었고, 군인은 해외에서 귀환되어 전역했으며, 전쟁시설은 해체되고, 전쟁무기는 파괴되었다. 약 300만의 일본군이 아시아와 미군함정에 의해 태평양지역으로부터 송환되었고, 거의 같은 수만큼의 일본 민간인이 송환되었다. 일본에서 군국주의를 제거하기 위한 조치로서 전쟁 중 일본의 지도자들이 도쿄에서 열린 국제군사재판에서 재판을 받았다. 뉘른베르크의 나치전범재판과 유사하게 진행된 재판에서, 일부 중요 인물은 “침략전쟁계획”과 “인류에 행한 범죄”로 피소되어 유죄가 인정되어 중형을 선고받았다. 그외에 수천 명의 일본인 장교들이 재판을 받아 전시중 행한 여러가지 가혹행위에 대해 유죄가 인정되었다. 또한 점령국의 개혁을 담당한 사람들은 일본에서 종종 국왕숭배로 언급되는 극단적인 일본의 민족주의 이데올로기를 제거하고자 하였다. 1946년 신년원단에 일본국왕은 국민들에게 행한 라디오 연설을 통해 제국의 신성성을 부인했다. 또한, “국신도”, 즉 일본제국의 통치자는 신의 후손이란 믿음을 조성하는 일본의 고유종교를 폐지하기 위한 조처가 취해졌다.

 일본의 민주화는 보다 복잡한 문제였고 또한 달성하기에는 오래 걸리는 문제였으나, 1947년의 새로운 일본헌법의 제정으로 그런 방향으로 가는 첫 조취가 취해졌다. 맥아더의 참모진에 의해 기초된 새 헌법은 근본적인 정치개혁을 마련했다. 그것은 영국과 유사하면서도 일본에 특유한 전쟁 전의 경험과 일치하는 의회제도를 일본에다 부여했다.

 경제개혁에는 전쟁 전 일본의 경제를 지배한 카르텔인 구재벌의 해체, 부유한 지주를 희생해서 가난한 농부에게 경작지를 분배한 토지개혁, 일본최초의 노동조합운동을 태동시킨 노동개혁이 포함되어 있었다. 또한 광범위한 사회, 교육개혁도 포함되어 있었는데, 그것 모두가 일본이 더욱 민주적인 사회가 되도록 하려는 것이었다. 이처럼 다양한 개혁은 일반적으로 매우 성공적이었다. 이러한 이유는 주로 그것이 일본에서 실재로 필요했고, 또한 일본인 스스로가 개혁을 희망했기 때문이었다.

 점령으로 인한 이례적인 것 가운데 하나는 민주주의가 맥아더 장군과 그의 참모들에 의해서 이식되었다는 점이다. 연합국 최고사령부의 운영방식은 군사적이었다. 연합국 최고사령부는 일본의 출판물 검열, 자유언론을 금지했으며, 민주적인 수단으로는 수행할 수 없는 명령을 일본정부에 집행하였다. 또한 파격적인 것은 개혁자인 맥아더 장군의 성격이었다. 그는 일본에서 초월적 존재로 기세등등했으며, 또한 전지전능했다. 패전한 일본인들에게 당당한 권위를 가진 인물이 필요했던 것으로 보여지는데, 맥아더가 바로 그런 역할을 할 운명을 지닌 인물인 것 같았다. 비록 그가 일본국민을 사랑한다고 주장하였고, 또 일본국민에 대한 그의 태도가 자못 겸손한 것이었으나, 그는 종종 일본문화에 대한 경멸감을 나타냈다. 그의 견해로 일본인들은 “봉건제로부터 민주주의 제도로 가는 길을 찾아야 하는 열두 살짜리 어린애일 뿐이었다.2) 그러나 맥아더의 거만함과 군사점령의 배역에도 불구하고, 그와 그의 참모들은 민주주의 이념과 제도가 일본에 성공적으로 뿌리내리게 하는 데 크게 기여한 순수한 개혁열망과 사명감을 갖고 있었다.

 이래서, 일본군국주의의 위협은 제거되어 군국주의는 민주주의로 대치되었으나, 미국은 동아시아에 크나큰 위협이 아련히 나타나는 것을, 즉 아시아에 공산주의가 확산되는 것을 인식하게 되었다. 1949년 중국의 내전에서의 공산주의자의 승리와 다음 해 한국에서의 공산주의자의 침략은 미국정부로 하여금 일본에서의 정책을 냉전의 절박한 상황 속에 몰아넣게 했다. 미국의 통제 아래 일본은 공산주의의 봉쇄란 미국의 정책 속에서 중요한 역할을 하도록 준비되었다.

 본론에서는 미국의 전후 아시아정책, 특히 일본의 점령정책을 고찰함으로써 일본의 군국주의해체과정과 이를 대신하는 민주주의의 발전과정을 살펴봄으로써 현대 일본의 민주주의를 더욱 쉽게 이해하고자 한다. 여기에 더하여 경제,사회등 각 분야의 점령정책을 자세히 살펴 미국의 아시아에 대한 인식과 정책방향을 알아보고 미국의 점령정책에 대한 일본인들의 반응을 살펴봄으로써 제2차 세계대전후의 미국의 일본점령정책에 대한 미국의 입장과 일본의 입장을 비교하고 그에 대한 결과와 평가를 나름대로 살피고자 한다. 이에 더하여 미국의 냉전체제속에서의 일본의 역할과 이에 대한 미국의 정책을 알아본다.




본       론


 1.전후 미국의 아시아 정책


 19세기 후반 이래로 일본과 중국에서 점점 더 집약적인 미국의 이익에도 불구하고 미국의 정치․군사적 엘리트들은 몇 가지의 현저한 경우를 제외하고는 유럽무대보다는 아시아 무대에 더 낯설었다. 특히 그들은 전후 세계로의 중국의 이행문제를 이해하거나 혹은 대처할 준비를 미처 못하였다.

 장개석 정부는 1945년 8월 소련과 우호조약을 체결하였다. 스탈린은 만주에 대한 중국의 주권을 공식적으로 인정하였다. 장개석 정부는 그 지역에 대한 소련의 팽창주의를 제한하고 모택동 세력에 대한 러시아의 원조를 저지하기 위해 얄타 협정의 극동조약을 받아들였다. 국가 지도자로서 장개석의 지위는 표면상 확고한 것처럼 보였다. 그의 지위는 승전국인 연합국들에 의해서 합법적인 정부로 인정되었다. 그의 위신은 적어도 일시적으로나마 일본군이 점령했던 중국의 모든 영토의 반환으로 강화되었다. 그러나 50만의 국민군을 내륙과 북부지역으로 이동시키는 것을 미국이 도와주었다는 사실에도 불구하고 장개석은 북쪽지역의 공산주의자들이 일본 사단들의 항복을 접수하는 것을 막을 수가 없었다. 그러는 동안 공산주의자는 국민당으로부터 생포한 미군 병력과 더불어 만주의 일본 병력을 접수하였다. 따라서 모택동 군대는 만주를 지배할 수 있게 되었고 소련은 이를 허용하였다. 더군다나 8년간의 국제전쟁과 내란으로 중국에는 전국 도처의 농업과 무역이 붕괴되었고, 연약한 생산능력과 운송체계의 파괴와 인플레이션이 만연해왔다. 군사전략으로서 뿐만 아니라 정치선전가로서도 장개석보다 한수 위인 모택동은 궁극적으로 종전 직전에 중국을 괴롭혔던 모든 경제적 혼란에 대한 비난을 용케도 국민당에게 덮어 씌었다.

 1945년 11월 뉴스속보(ticker-tape news stort)를 통해 트루먼 대통령은 헐리(Hurley)가 대사직을 사임하고 대통령이 자신의 행동을 정당화하고, 국무성이 자신의 노력을 타도한다고 비난하는 문서가 언론에 유출된 것을 알았다. 트루먼 대통령은 매우 분개하였다. 트루먼은 마샬 장군을 설득하여 헐리가 사임한 자리를 맡겼다. 1년 후 마샬은 국무장관이 되었다. 마샬은 다소 중립적이고 사려깊은 인물이었으나 헐리처럼 양자의 입장을 화해시키는 점점 더 해결하기 어려운 문제를 해결하지 못하였다. 1946년 이후로 그의 유일한 희망은 미국의 군사개입에 있었다. 그러나 때는 너무 늦었다. 미국이 전후 짧은 기간동안 아시아의 중국 공산주의보다 유럽의 소련 공산주의를 봉쇄하는 데 불가피하게 정책의 우선순위를 두었을때 장개석의 운명은 결정되었다.

 심지어 19세기 말 최초의 미제국주의가 태평양으로 밀려온 이래로 공화당원들은 민주당원들보다도 아시아에 더 깊은 관심을 보여왔다. 결과적으로 미국내에는, 특히 서부 해안가를 따라서 중요한 ‘아시아 제일주의(Asia First)' 유권자들이 있었다. 그들은 동부의 도시와 대학교에서 자라난 민주당원들은 유럽지역에 열중하여 아시아에 있어서 미국의 이익을 무시하는 경향이 있다고 생각하였다. 결국 트루먼과 마샬은 장개석 정부의 미몽에서 깨어나게 되었다. 그리고 국민군에 대한 미국의 원조는 쓸모없게 되었고 모택동의 뛰어난 전략을 무찌르기보다는 장개석 지지자들의 은행계좌만 더 부유하게 만드는 데 도움이 될 뿐이라고 결론지었다. 1948년이 저물어가는 시점에 모택동 군대는 대대적인 공격을 시작하여 그 이듬해 최후의 승리를 거두었다.

 “누가 중국을 상실하였나?”는 트루먼 행정부 적대자들의 야유적인 외침이 되었다.

 루스벨트-트루먼 행정부의 많은 정책결정자들이 그것을 정의했을 때 그문제는 제2차세계대전이나 그 이후 동안 동아시아에서 영국, 프랑스, 그리고 네덜란드 등의 대부분의 유럽 식민제국을 붕괴시킨 일본의 연속적인 군국주의, 침략 그리고 점령과 결합된 아시아 민족주의의 새로운 세력과 관련된 것이었다. 미국과 소련은 반식민주의적 전통을 공유하고 있다고 순진하게 믿은 루스벨트는 전전의 식민지 지배를 복구하도록 영국을 도와주는데 별 관심이 없었다. 미국의 군사령관들은 영국이 태평양 전쟁의 막바지 단계에서 중요한 역할을 맡는 것을 원치 않았다. 루스벨트는 영국, 프랑스 그리고 네덜란드가 동남아시아의 해방에서 중요한 역할을 하도록 하는 것보다는 대일전에서 소련을 참전하도록 설득하는 데 보다 더 열정적인 것처럼 보였다.

 미국은 1934년 타딩즈-맥더피 법안(Tydings-McDuffie Act)에 구체화된 약속을 이행하여 자국의 반식민적 양심에서 세기의 전환기 때의 필리핀에서의 “사악한 제국주의적 모험”을 일소하고자 노력하였다. 4년이 넘는 전쟁, 점령 그리고 전후 경제적 혼란에도 불구하고 예정대로 정확하게 1946년 7월 4일 필리핀의 독립을 인정하였다. 그러나 전쟁때문에 필리핀 국민들은 민주적 자치를 제대로 준비하지 못하였다. 독립초기의 기간 동안 15억 달러 상당량의 미국의 경제원조는 낭비적이거나 혹은 부정하게 쓰여졌다. 반면 학대받는 많은 필리핀 사람들은 후크발라합스(Hukbalahaps)로 알려진 공산주의 폭도들의 선전에 매료되었다.

 필리핀에서의 실망적인 경험에도 불구하고 미국은 1947년 인도와 파키스탄의 독립, 그리고 1948년 버마의 독립을 우호적으로 바라보았다.3) 미국의 반식민주의적 태도와 정책을 달가워하지 않았던 영국은 동남아시아, 인도양, 페르시안 걸프 지역, 그리고 나일강 유역에서 영국의 현존과 영향력을 완화하거나 가능하다면 대체하려는 미국을 의심하였다.


 2.포츠담선언과 일본의 항복


 4월 22일, 소련군은 독일의 수도 베를린에 진입, 이어 미․영군과의 연락에 성공했다. 마침내 히틀러는 자살하고 5월 7일, 독일은 무조건 항복했다. 이렇게 유럽의 전쟁은 끝나고 일본은 고립되었다. 이미 이 시기에는 일본과 전쟁상태에 있는 나라는 세계50개국에 이르고 있었다. 7월17일부터 베를린 교외의 포츠담에서 미․영․소의 3거두회담(미국 대통령 트루먼, 영국 수상 처칠, 도중 애틀리로 교체, 소련 수상 스탈린)이 열렸다. 7월 26일 이 회담의 결과로서 미․영․중 3국의 이름으로 포츠담선언이 발표되었다.(소련은 대일전에 참가하지 있지 않아서 서명하지 않았고 참전과 동시에 참가했다.)

 이 선언은 일본에 전쟁종결의 마지막 기회를 주기 위해 호소한 것으로서, 일본군의 무조건 항복을 요구하고 군국주의의 제거, 일본 본토의 점령, 이전에 침략해서 빼앗은 영토의 반환, 전쟁범죄자의 처벌, 일본 국내에서 언론, 종교, 사상의 자유와 기본적 인권의 존중 등을 연합국이 일본에 부과하겠다는 것이었다.4) 이 선언은 일본군국주의의 타도와 일본에서 민주주의의 부활을 지향하는 세계의 반파쇼세력 공통의 이념이 표명된 것이라고 할 수 있다. 그리고 이것을 수락하지 않으면 연합군에 의한 일본의 완전한 파괴가 있을 뿐이라고 결론을 짓고 있었다.

 포츠담선언을 알게 된 일본 정부는 여기에 담긴 연합국의 결의를 이해할 수 없었다. 스즈끼 수상은 군부의 요구에 굴복하여 “다만 묵살할 뿐이다. 우리들은 전쟁완수를 향해 매진한다.”는 담화를 발표했다. 일본이 포츠담선언을 묵살했다는 뉴스는 곧 세계를 향해 라디오로 방송되었다. 정부내에서 전쟁종결의 기회를 잡으려고 하고 있던 도고 시게노리 외무대신 조차 이 선언을 곧 수락하지 않고 아직 소련을 중개로 한 정치적 흥정에 의해 보다 유리한 조건을 잡으려고 했다.

 지배자들은 전후처리의 문제에 대해 표면화해 온 미소의 대립에 눈을 돌려 이 속에서 활로를 발견하려고 했다. 그래서 포츠담선언에 제시된 연합국의 단결과 그것을 지지한 제 국민의  반파쇼의 의지를 이해하지 못했다. 정부나 군부나 무조건항복의 결의는 없었고, 여전히 전쟁을 계속하면서 어쨌든 그들의 지위와 면목을 유지한 형태로 전쟁을 끝내려 하고 있었다.

 5개월 전의 얄타회담 때는 미국은 일본의 저항이 아직 상당히 계속될 것이라고 판단하고 소련의 참전을 구한 것이었다.5) 이때까지는 연합국의 협력관계는 유지되고 있었다. 그런데 4월 12일, 소련과의 협조에 노력해 온 루즈벨트 대통령이 급사하고 트루먼이 등장하면서, 미국은 전후세계의 지도권을 쥐려는 의도를 점점 노골화해 왔다. 독일의 항복에 이어 일본의 전력도 급속히 붕괴하여 전쟁의 종말이 분명히 내다보이게 되자 전후의 세계정책을 둘러싼 미국과 소련의 대립이 표면화되었다. 7월 16일 포츠담회담직전에 원자폭탄의 실험에 성공한 것은 미국의 자신을 굳혀 주었다.

 극동에서 미국이 노린 것은 일본제국주의의 유산을 그대로 계승하여 특히 중국의 지배를 독점적으로 확보하는 것이었다. 얄타협정에서 독일 항복 3개월 후에 소련은 참전을 약속했는데 그 기일이 다가옴에 따라 미국은 초조해졌다. 미국은 가능한 한 혼자힘으로 일본을 굴복시켜서 그 단일점령을 실현하여 전후의 극동정책에서 우위를 확립하려고 했다. 8월 6일 아침, B29에 의해 원자폭탄은 히로시마에 투하되었다. 이 한발의 원자폭탄은 대부분이 비전투원인 히로시마 시민 수십만명을 일순간에 살상했다.6)

 원폭투하에 이어 8월 8일의 심야, 소련은 연합국의 요구에 의해 전쟁의 종료를 촉진하기 위해서라는 이유로 대일선전을 포고하고 다음날 새벽부터 일제히 진입했다.

 소련의 참전은 그 중개에 최후의 희망을 걸고 있던 일본 정부에 큰 충격을 주었다. 그래서 포츠담선언의 수락을 결단케 하는 계기가 되었다. 8월 10일 “천황의 국가통치의 대권에 변경을 가하는 요구를 포함하고 있지 않다는 이해 하에” 포츠담선언을 수락한다는 일본의 제의가 라디오와 중립국을 통해서 알려졌다. 이에 대해 미국장관 번즈는 “항복할 때부터 천황및 일본 정부의 국가통치의 권한은 (중략) 연합국최고지휘관에게 종속하는 것으로 한다. 일본국의 최종의 통치형태는 국민이 자유롭게 표명하는 의지에 의해 결정되어야 할 것으로 한다.” 는 회답을 통고해 왔다.

 8월12일 이 회답을 접한 군부와 히라누마 추밀원 의장은 이것으로는 국체유지의 보장이 없다고 하고, 재조회와 만약 그래도 보장이 불가능할 때는 전쟁을 계속할 것을 주장했다. 대립이 다시 되풀이되고 천황은 동요했다. 그러나 이때 연합국의 회답에 담긴 미국의 참뜻은 은연중에 일본의 제의를 인정한 것이라는 미국의 신문정보가 들어 와 수락론이 다시 일어났다. 8월 14일, 다시 어전회의에서 천황의 결정으로 무조건항복이 정해졌다.

 항복의 경위는 국민에게는 전혀 숨겨져 있었다. 그래서 8월 15일 정오, 천황 자신의 라디오방송에 의해 돌연 항복을 알게 되었던 것이다. 이목을 모두 봉쇄당하고 전쟁완수에 마차마같이 휘말려 온 국민, 특히 군대를 항복이라는 새로운 사태에 순응시키는 것은 쉽지 않았다. 패전보다도 패전에 의해 일어날 혼란과 혁명을 두려워 한 지배계급은 국민과 군대가 일으킬 동요를 막기 위해 마지막 카드로서 천황의 권위를 내세운 것이었다. 군대의 해체, 항복은 8월 15일 근위 사단 일부의 폭동이 일어난 이외는 국내, 남방 모두 급속히 진행되었다. 일부의 광신적인 장교들을 제외하고는 전쟁 계속의 현실성은 이미 없는 것이 명백했고 군대 자체의 전력도 이미 궤멸상태에 있었기 때문이었다.

 전투의 중지가 늦은 곳은 만주와 화북이었다. 관동군은 소련군의 최초의 공격으로 궤란하고 지휘계통이 궤멸했기 때문에 각지에 분산한 소부대는 항복 결정 후 40일간에 걸쳐 혼전을 계속했다. 남김없이 동원된 개척이민단원들은 군의 명령으로 싸웠다. 그런데 관동군은 군인, 군속과 그 가족만을 후방으로 수송하는 데 열중하여 뒤에 남은 재류본국인은 패전의 혼란 속에서 많은 희생자를 냈다.

 일본의 정식항복은 9월 2일 도쿄만 연안의 미함 미주리호 선상에서 정부대표 시게미쓰, 대본영대표 우메즈 요시즈로와 맥아더 이하 연합국 8개국의 대표사이에 조인되었다.


 3.점령체제의 구조와 특질

 1945년 8월 15일 일본은 포츠담선언을 수락하고 연합국측에 무조건 항복하였다. 그 결과 일본은 연합국의 군사점령 하에 놓이게 됐다. 종래의 군사점령은 제국주의형 점령이라고 하여 전승국이 패전국에 제시한 항복조건- 예컨대 배상금 지불, 영토의 할애 등- 의 의무이행을 보장하기 위해 행해져 왔다. 그런데 제2차 세계대전의 군사점령에서는 이와 같은 종래의 한정적인 보장점령의 한계를 넘어서서 지난날의 적국이 앞으로는 다시금 세계의 평화와 안전을 위협하는 일이 없도록 하는 보장을 얻는 것을 목적으로 하고 있어, 이를 위한 적극적인 <전토보장점령>을, 그리고 그것도 비교적 장기간에 걸쳐 계속하는 방식이 취해졌다. 대일점령에 있어서도 이 새로운 방식이 취해졌다. 그 임무와 목적은 9월 22일에 공표된 「항복 후에 있어서의 미국의 초기대일방침」에 명시되어 있다. 이에 의하면 첫째로, 일본이 다시는 미국 및 세계의 평화와 안전의 위협이 되지 않도록 보장한다는 것, 그리고 둘째로는 다른 국가의 권리를 존중하고 유엔헌장의 이상과 원칙에 명시된 목적을 지지하는 평화적이고도 책임있는 정부를 곧이어 수립한다는 것이었다.

 그러면 어째서 이처럼 새로운 점령방식이 취해졌을까? 그 이유는 다음과 같은 두 가지로 요약할 수 있을 것이다. 첫째는, 제2차세계대전이 파시즘과 군국주의에 대하여 민주주의를 옹호하는 전쟁이라는 성격을 띠고 있었다는 것, 둘째는 전쟁형태가 총력전의 형태로 바뀌었다는 것, 말하자면 전쟁이 국내의 정치, 경제체제와 깊이 결부되어 있었다는 것이다. 연합국측의 전후 처리 방침과 무조건 항복의 요구는 점령방식을 전환시킨 이러한 요인과 관련시킬 때 비로소 이해할 수가 있다.

 대일점령에 있어서 당초에는 주요 4개국에 의한 연합점령이 구상되어 있었다. 그러나 미국은 대일전에 있어서의 주도적 역할을 하였다는 것도 있지만 전후 국제정치에 있어서의 대소전략을 생각하여 형태상으로는 연합점령이라고 하면서 압도적으로 많은 미군을 진주시켜, 공동관리 기관으로서의 극동위원회 7)와 대일이사회8)의 설치를 인정하면서도 전자에 있어서의 거부권을 유보함으로써 실질적으로는 단독점령을 실현하였다. 그리고 그것은 점령에 관하여 주요 연합국간에 의견이 갈라질 경우 미국의 정책에 따를 것을 <대일방침>에 명기함과 동시에 미국정부가 중간지령을 내리는 권한을 가지고 미국정부가 임명하는 연합국최고사령관이 점령정책을 실시하는 권한을 가짐으로써 더욱 보강되었다.

 점령통치는 당초 군정은 직접통치로 한다는 방침이었으나 일본정부는 이를 강력하게 반대하였다. 점령이 시작된 직후에 일부에서 군정이 실시된 것은 사실이다. 그러나 일본정부의 강력한 요청을 받아들여 갑자기 <간접통치>로 전환하였다. 이 점령통치를 독일의 그것과 비교해 보면 매우 대조적이다. 독일에서는 나치의 국가기구가 완전히 무너져버려, 새로운 정치권력과 그 기구를 만들어내지 않으면 안되는 상황에서 직접 통치가 행하여졌다. 이 점 일본의 경우에는 일본정부의 요청도 있었지만 구권력기구가 거의 다치지 않고 그대로 남아 있었다는 것이 방침전환을 가능케 했다고 말할 수 있다.

 점령군 당국의 점령통치에 관한 여러가지 지령은 일본정부를 통하여 하달되어 표면상 일본정부가 국민을 지배하는 형태를 취하였다. 그리고 점령행정은 일본의 여러 정부기관을 통하여 이를 이용하는 형식으로 추진되었다. 일본의 국가권력은 종국적으로는 점령권력이 지배하는 바가 되었다. 더우기 미국정부가 점령관리기구를 실질적으로 지배하는 위치에 있었던 관계로 점령권력은 궁극적으로 미국정부가 쥐고 있었다. 일본은 이와 같은 한도 내에서는 종속상태에 놓여 있었다고 할 수 있다. 그리하여 이러한 일로 인해서 점령통치 하의 일본의 국가권력의 구조, 성격을 둘러싸고 여러가지 권력론이 불꽃을 당겼다.

 이러한 이론문제도 중요하지만 간접통치하애서 일본의 국가권력이 전후의 통치체제의 확립과정에서 점령권력과 관계를 맺으면서 실제로 어떤 기능을 수행했는지를 구권력 기구의 해체․재편 속에서 사실에 입각하여 구체적으로 밝혀 나가는 것이 필요하다. 일본의 국가권력은 구조적으로는 어쨌든간에 기능적으로는 점령권력으로부터 상대적으로 독립하여 점령행정을 거의 전면적으로 대행하였으며 점령목적 실현에 적극적으로 관여하고 있었다.

 이 간접통치는 일본의 특수한 패전형태에 규정된 일본형 방식이라고 볼 수 있다. 이 특수성은 전후 일본의 정치과정도 규정하는 것이 되었다. 일본의 국가권력은 점령권력에 의존하면서 천황제권력의 실체를 이루고 있었던 관료기구가 이 간접통치 하에서 점령정책을 매개하는 특수한 기구로 전신하여 통치집단의 점령정책에 대한 저항적 매체로 기능하였다. 전전의 구세력은 간접통치와 그 통치하에서의 관료기구를 세력온존과 재생․부활의 발판으로 삼았던 것이다.


 4. 민주화정책


 미국의 초기 대일본 항복 후 정책(Initial Post-Surrender Policy for Japan)속에는 점령지침이 제시되었다. 국무성․육군성․해군성의 공동노력과 협력으로 작성된 이 정책 문서는 다음과 같은 궁극적인 목적들을 확정지었다. ①일본은 결코 미국 혹은 세계평화와 안전에 다시는 위협이 되지 않을 것을 확실히 할 것. ②국민이 자유로이 표명한 의사에 따라 평화적이고 책임있는 민주적 자치정부의 수립을 도울 것 등이었다. 이러한 목적들을 성취시키기 위한 주요한 수단들로서는, 네 개 본토 섬들에만 부여된 통치권 제한, 완전한 군비축소와 비무장, 개인적 자유에 대한 설득과 기본적 인권에 대한 존중, 그리고 경제의 발전 등이었다.

 기술적으로 일본에 대한 군사적 점령은 연합국의 일이었다. 1945년 12월, 모스크바에서 중국의 찬동으로 미국․영국․소련의 외상들이 일본에 대한 통제기구로서 극동위원회와 대일연합국이사회를 수립할 것에 동의하였다. 이론상 최고정책 결정기관인 이 위원회는 연합국 최고사령관(Supreme Commander for the Allied Powers, SCAP)인 맥아더 장군의 명령과 정책적 문제에 대한 그의 행동을 검토할 수 있었다.

 점령이 시작됨에 따라 SCAP가 당면한 임무는 일본내에 있는 일본군의 무장을 해체하여 부대를 해산하는 것이었으며, 국외에 있는 일본군과 거주민들을 본국으로 송환하는 일이었다. 동시에 점령당국은 군국주의와 침략의 결과는 물론 그 원천인 모든 제도들을 제거할 목적으로 일본의 민주화라는 기본적인 정책을 수행할 과업을 떠맡았다. 1945년 10월 14일, SCAP는 정치범의 석방과 정치적․시민적․종교적 자유에 대한 제한들의 제거를 지시하는 명령을 내렸다. 이 지시는 또한 오랫동안 권위주의적․독단적 권력을 행사하였던 일본 경찰조직의 철저한 대개혁을 가져왔다.

 게다가 개인의 권리와 자유를 더 잘 보호하기 위해 필요한 것들 중의 하나가 민주적인 헌법임을 믿고 있는 SCAP 당국은 메이지헌법을 개정하거나, 필요하다면 새로운 헌법을 제정하기로 하였다. 1946년 2월 1일 시데하라 키주로 내각은 SCAP에게 공식적인 초안을 제출하였지만, SCAP는 이것이 민주국가를 위한 기본적인 필요조건들을 충족시키기에는 미흡하다고 보았다. 그래서 SCAP의 행정부는 국민주권, 책임정부, 피치자의 동의, 3권분립, 시민자유의 보장, 전쟁 금지 등과 같은 원칙들을 구체화하는 새로운 헌법을 기초할 의무를 떠맡았다. 1946년 3월 6일에 새로운 헌법이 공표되었다. 이 기회에 맥아더 장군은 한 성명서에서 다음과 같이 선언하였다.


  본인이 대찬성한 새롭고 계몽화된 헌법을 일본 국민들에게 내놓기로 한 천황과 일본 정부의 결정을 오늘 발표할 수 있게 된 것에 깊은 만족감을 느끼는 바입니다. 이헌법은 일본행정부의 각료들과 본관의 지시를 따르는 사령부간에 수고를 아끼지 않는 연구와 수차례에 걸친 회의 후 기초되었습니다.9)


 1946년 11월 3일, 정식으로 반포된 신헌법은 1947년 5월 3일부터 효력이 발생되었다. 가장 중요한 변화 중의 하나는 제1조에서 명기된 바 천황에 대한 새로운 정체와 역할의 결정이었다. “ 천황은 국가와 국민 통일의 상징이 될 것이고, 그의 지위는 주권을 가진 국민의 의사로부터 나온다.” 그리하여 천황이 아닌 일본 국민이 국가의 주권을 행사하게 되었다. 또한 이것은 구헌법의 “ 천황은 신성불가침의 존재”라는 조항으로부터의 단호한 이탈이었다.

 신헌법의 독특하고 두드러진 특징은 전쟁 포기에 대한 제9조에서 찾아볼 수 있다.


        정의와 질서에 기반을 둔 국제평화를 갈망하는 일본국민은 국민주권으로써 일으키는 전쟁, 국제

       분쟁을 해결하기 위한 수단으로서 무력의 위협 내지는 사용을 영원히 단념한다.

        전술한 구절의 목적을 성취시키기 위해 육․해․공군은 물론 그 밖의 어떠한 전쟁의 잠재력도

       결코 유지되지 않을 것이다. 국가의 호전성에 대한 정당성은 인정되지 않을 것이다.


어떠한 주권국이 군사력을 유지하지 않겠다는 것과 전쟁포기를 국가정책으로 국내 헌법 속에 천명한 것은 처음 있는 일이었다.10) 그러나 그 후 국내와 국제무대에서 나타난 사태진전에서 볼 때, 제9조는 일방적이거나 집단적인 방위에 대한 일본의 주권을 부인하지 않는 것으로 해석되어지게 되었다.

 신헌법의 그 밖의 조항들 속에서 귀족의 작위는 폐지되었고, 의회가 ‘국가권력의 최고기관’으로 되었으며, 이에 속한 내각은 집단적으로 책임을 지게 되었다. 양원제 국회(참의원과 민의원)의 의원들은 국민이 직접 선출할 예정이었다. 투표권은 20세 이상의 모든 남녀에게 확대되었다. 사법부는 독립되었고, 법관에 대한 일반적인 재심리를 위한 규정을 갖고 있는 최고법원은 각종 법률․명령․규제, 혹은 공무원의 행동 등에 대한 합헌성을 결정할 권한을 가지는 대법원이 되었다. 또한 신헌법속에는 미국의 권리장전에서 찾아볼 수 있는 국민의 기본적 권리와 자유, 여기에 덧붙여 학문의 자유, 남편과 아내의 동등한 권리, 건전하고 문화적인 최소한의 생활수준을 유지할 권리, 교육의 권리, 노동의 권리, 단체교섭의 권리, 사유재산의 권리 등이 포함되었다. 게다가 이 헌법은 합법절차와, 법률의 공평한 보호에 대한 보증을 규정하였다.

 신헌법은 또한 지방정부가 지켜야 할 원칙들을 명시하였다. 그 결과로서 나타난 변화들은 점진적으로 도입되었고, 1947년 4월 지방 자치법에서 강화되었다. 이 변화들로 인해 전에는 중앙정부가 수행했던 많은 기능들이 선출직 현 지사와 시장이 이끄는 부현 및 시 행정 단체로 이전되었다. 지방의회는 보다 광범한 권한이 부여되었다.

 SCAP는 내무성이 개혁을 방해하고 있다고 보고 1947년 12월에 내무성을 폐지하였다. 또한 1947년 12월에는 경찰력이 분산되었고, 지방 및 중앙 레벨에서 경찰을 감독할 미국식 공안위원회가 창설되었다. 그러나 이들 정책의 일부를 실행하는 일은 재정상의 곤경에 부딪혔다. 지방정부는 충분한 조세 자원과 차용권한을 갖지 못했고, 여전히 중앙 정부에 상당히 의존하였다. 그리고 1949년에 이러한 문제와 관련문제에 관한 자문을 하기 위해 일본에 초청된 콜롬비아 대학의 칼 슈프(Carl Shoup)박사는 지방정부의 자립도를 높일 목적으로 지방 조세 협정과 중앙 정부의 보조금을 개정할 것을 권고했지만, 특정세목에 관한 이러한 제한은 국회 내에서, 그리고 관료들로부터 많은 반발을 샀기 때문에 거의 실행되지 못했다.

 또한 사법부를 행정부로부터 분리시키는 것도 미국의 예를 따랐다. 사법 제도에 대한 행정 감독은 법무성에서 독립하여 신설된 최고 재판소로 이전되었다. 최고 재판소는 (내각에 임명된 최고 재판관을 제외한) 판사들을 임명하고 법률의 합헌성 여부를 판결하는 업무를 위임받았다. 이것으로 최고 재판소는 헌법에 명시된 광범위한 인권 조항의 수호자, 최소한 여성에게 남성과 동등한 법적․정치적 평등을 부여하는 인권 조항의 수호자가 되었다.

 노동법 개정도 마찬가지로 중요했다. 1945년에 노동 조합법, 그리고 1946년에 노동관계법이 제정되면서 일본 노동자들은 단체 결성권과 파업권을 인정받았다. 또한 1947년에는 근로 기준법이 제정되어 의료 보험 계획과 상해 보상을 비롯해 근로 조건 개선을 보장받게 되었다. 일본 노동자들은 주어진 기회들을 재빨리 포착하였다. 1948년 말까지 약 3만 4,000개의 노동 조합이 결성되었고, (산업 노동력의 40%를 넘는) 거의 700만명의 조합원을 갖게 되었다.

 교육도 공적 태도의 형성에서 갖는 역할 때문에 개혁할 필요가 있다고 주장되었다. 첫 조치는 1945년 10월에 있었던 “군국주의 및 초국가주의적 이데올로기”의 금지였고, 곧이어 윤리 교과 과정이 폐지되었다. 그 대안으로서 교육기본법(1947년 3월)이 “심신이 건강하고, 진리와 정의를 사랑하는”11) 시민을 육성하기 위해 인격을 계발한다는 목표를 내세웠다. 교육 기본법 하에서 의무 교육은 자유화되었고, 기회 균등과 종교적 관용의 원칙이 표방되었다. 그리고 강요는 아니지만 남녀공학도 규정하였다. 의무 교육은 시민 양성을 위한 것으로 “어떠한 특정 정당에 찬성도 반대도” 하지 않도록 되었다.

 1946년 초 SCAP는 미국에서 파견된 교육 사절단의 조언을 듣는 기회를 가졌다. 그들이 권고한 것들 중에서 교수법을 바꿔 “암기․순종, 그리고 수직적 체계의 의무와 충성심” 대신에 “자주적 사고”12)를 가르치도록 촉구한 권고는 실행하기 가장 어려운 것으로 판명되었다. 이것은 40년 후에도 여전히 계속되는 문제였다. 이에 비한다면 교육제도를 바꾸는 것은 상대적으로 간단한 일이었다. 1947년의 학교 교육법은 9년간의 의무 교육(6년간의 소학교 교육, 3년간의 중학교 교육)을 규정하였고, 3년간의 고등 학교 교육과 4년간의 대학 교육은 선택적인 것이 되었다. 하교제도에 대한 통제는 분산되었다. 즉 부현과 시의 선출직 교육 위원회의 지도 아래 놓이게 되었다. 대학의 수는 - 최소한 각 부현에 한 개 정도로 - 증가했고, 문부성 관할하에 학문적․경제적 자유가 부여되었다. 대학은 또한 교과 과정을 확대하도록 권장되었다.

 또한 사회적 변화를 가져온 주요한 것으로 토지 개혁이 있었다. 토지개혁은 농업 불안이 극단적 형태의 민족주의를 초래했고, 일본의 침략을 유발했다는 신념에서 실시되었다. 토지개혁에 관해서는 일본 관리들이 초안을 마련하였고, 1945년 11월 시데하라 내각에 제출되었다. 그러나 이 초안은 국회에서 지주들의 이해 관계 때문에 폐기되었다. 그리고 나서 국회 수정안이 나왔으나 맥아더에 의해 거부되었다. 맥아더는 국회 수정안을 일본 주재 호주대사 맥마흔 볼(W. MacMahon Ball)이 제출한 안으로 대체시켰다. 이 토지 개혁안은 1946년 6월에 일본 정부에 송부되었고 주저하는 중의원을 밀어붙여 통과시켰으며, 10월에 법률로 성립하였다.  이 법률은 부재 지주가 소유하는 모든 토지를 강제로 매입할 것을 규정하였다. 자작농과 재지 지주들은 홋카이도에서는 12정보, 여타 지역에서는 3정보의 면적을 소유할 수 있게 되었다. 이것은 소작인들에게 임대된 토지의 3분의 1에 지나지 않았다. 이 한도를 초과한 모든 토지는 기존 소작인들에게 용이한 조건으로 제공할 수 있도록 정부에 매각해야만 했다―. 이 조건들은 결국에는 화폐 가치가  계속 하락하고 농민들이 암시장 가격으로 식품을 팔 수 있게 되면서 훨씬 용이해졌다.

 토지 개혁의 실행 범위에 대해서는 1950년 8월에 230만 명의 지주로부터 논 100만 정보 이상과 고지(高地) 80만 정보 미만을 매입하여 470만 명의 소작인에게 매각했다는 사실에서도 일부 알 수 있다. 소작지 임대 협정을 맺은 토지는 1946년 이전에는 전체 토지의 40%를 넘었는데, 겨우 10%로 떨어졌다. 물론 그래도 불평등은 있었다. 절대 다수였던 소규모 토지 소유자들은 토지의 적은 부분만을 처분해야만 했기 때문에, 소작농들이 이전의 부재 지주의 경우보다 토지를 획득할 가망성은 적었다. 또한 매각 분양지를 선택하는 문제도 조정의 여지가 많았다. 이 문제 때문에 토지 위원회는 많은 고민을 했다. 토지 위원회는 마을마다 그 운용을 감독하기 위해 설치되었고, 5명의 소작인, 3명의 지주, 그리고 2명의 자작농으로 구성되었다. 그렇지만 토지 개혁으로 일본은 실질적으로 농민이 토지를 소유하는 나라가 되었다. 농민들의 보수주의는 우익 정권이 계속해서 집권하는 데 주된 요인이 되었고, 한편 농민의 경제적 지위 향상은 공업 성장에 결정적 역할을 한 국내 시장의 확대에 도움이 되었다.


 5. 강화 조약과 안보 조약


 미국의 정책 결정자들이 일본 문제에 관해 의견이 일치된 적은 결코 없었다. 도쿄 맥아더 사령부의 일부 부서들은 개혁에 일차적인 관심이 있었고, 다른 부서들은 미국의 경제적․전략적 이익을 증진시키는 데 관심이 있었다. 워싱턴 당국에도 비슷하게 강조점의 차이가 있었다. 그러나 도쿄에 있어서나 워싱턴에 있어서나 개혁가들의 주장은 시간이 지나면서 약해졌다. 미국의 조세 자원을 요청하는 그들의 구상이 환영받지 못하였기 때문이기도 했고, 국제 환경이 변하면서 그 구상들이 적절치 않은 것으로 보였기 때문이기도 했다. 특히 미소 관계가 일단 냉전에 들어서게 되자, 일본이 갖는 기지로서의 가치는 사회적 실험 대상으로서의 이해 관계보다 중요해지기 시작했다. 이러한 태도는 1949년 마오쩌둥의 중국 내전 승리로 미국이 스스로 선택한 동아시아 동맹국을 상실하면서 더욱 명백해졌다. 이 태도는 1950년 6월 한반도에서 공산주의 북한과 반공산주의 남한 사이에 발생한 전쟁에 의해 가속화되었고, 미국은 한국 전쟁의 영향으로 점차 대안적 선택으로서 일본을 동반자로 보게 되었다. 달리 말하면, 이 시점에서 미국에게는 일본의 민주주의보다 일본의 국제적 장래가 더 중요했던 것이다.

 맥아더 원수의 보고서들은 ‘민주화’가 성공할 것으로 줄곧 낙관하였고, 그 성공은 일본에서의 자신의 임무가 종결되는 것을 의미하였다. 그리하여 강화 조약의 가능성에 대한 논의는 1947년에 이미 시작되었다. 그렇다고는 하나 1951년에 되어서야―한국에서 발생한 사건들의 배경에 대항해서―미일 협상이 시작되었다. 그 결과 1951년 9월에 태평양 전쟁 참전국들이 대부분 참가한 가운데 샌프란시스코 조약이 조인되었다. 이 조약에 의해 일본은 주권을 회복하였고, 1895년 이후 획득한 모든 영토를 상실한다는 점을 확실히 했으며, 장차 전쟁배상을 해결할 길이 열렸다. 소련은 인도와 중국과 더불어 조약을 인정치 않으려 했지만, 이들 세 나라는 미군의 일본 점령이 종료되는 것을 막을 만한 위치에 있지 못했다. 그리하여 1952년 4월에 강화조약이 비준되었다.

 해결해야 할 관련 문제들은 아직도 많이 남아 있었다. 하나는 ‘두 개의 중국’문제였다. 장개석은 중국 본토에서 패배한 후 대만으로 퇴각하였고, 일본은 미국으로부터 장개석을 대만의 정통 통치자로 승인하라는 압력을 받았다. 중국의 한국전 개입(1950년 12월)은 일본 및 일본의 미국 거점에 명백한 위협이 되었고, 영국이 그랬던 것처럼 요시다가 자기 마음대로 마오쩌둥을 승인할 수 있다는 건 생각조차 할 수 없었다. 그리하여 요시다는 1952년 1월에 대만과 화해하였고, 일본의 대중(對中)관계는 망각 상태에 놓여져 이후 20년 동안 지속되었다.

 소련은 훨씬 신중하게 취급해야만 했다. 왜냐하면 소련은 강경한 교섭을 추진하는 데 있어서 중국보다 유리한 입장에 있었기 때문이었다. 소련은 포츠담 협정에 따라 쿠릴 열도와 사할린 남부(카라후토)를 점령한 뒤 사할린 북부까지 지배하였고, 이전의 오호츠크 해 일본 어장(漁場)에 대한 모든 접근로를 통제하였다. 이것은 소련이 어떠한 협상에서도 협박이나 뇌물을 선택할 수 있다는 것을 뜻했다. 즉 소련은 일본의 어장을 폐쇄하거나 규제하겠다고 협박할 수 있었고, 만일 순종할 경우 홋카이도에 가장 근접한 하보마이(齒舞) 섬과 시코탄(色丹) 섬을 일본에 반환할 수도 있다는 희망을 제시할 수 있었다. 도쿄 정부는 이 섬들이 과거에 정복해서 획득한 것이 아니라, 일본 영토의 일부이며, 전승국에 의해 점령당한 것이라고 줄곧 주장하였다. 1955년 6월 일소 양국이 런던 주재 양국 대사를 통해 강화 회담을 열었으나 이 영토 문제는 교착 상태로 끝났다. 이듬해 8월 일본 외상 시게미쓰 마모루(重光葵)가 모스크바를 방문했을 때에도 아무런 진척을 보지 못했고, 시게미쓰 외상은 일본의 국제 연합 가입에 대해 거부권을 행사하겠다는 소련의 추가 압력에 직면했다. 그리하여 (요시다의 후임자인) 하토야마 이치로 수상이 1956년 10월에 직접 모스크바를 방문하였다. 그것에서 하토야마 수상은 적대 관계를 끝내고 외교 관계를 회복하는 협정에 서명하였다. 어로 협정에 관한 합의를 보았고 통상 조약을 체결하기로 약속하였다. 그러나 영토 문제는 완전한 평화조약이 체결될 수 있을 때까지 유보되었다. 이후 회담은 여러 차례 열렸지만 평화 조약은 아직도 체결되지 않았다.

 샌프란시스코 조약은 일본 점령을 종식시킬 수 있는 길을 열어 주었다. 미국은 그렇게 함으로써 일본에 대한 군사 개입을 줄일 수 있는 이득을 얻을 것으로 항상 기대되었다. 점령 종결은 일본이 국내 안보를 확보하기 위해 몇 종류의 일본 군사력을 보유해야만 하고, 미군이 대외 방위를 제공하기 위해 주둔해야만 한다는 의미가 있었다. 그러나 어떠한 제안도 일본 여론에 바로 받아들여지지 못했고, 요시다는 국내 여론 때문에 재무장에 관한 어떠한 제안도 경계하였다. 1950년에 한국 전쟁이 발발하면서 이 지역에서는 미군 병력이 새로이 요구되었고, 요시다는 자신의 반대를 누그러뜨려 7만 5,000명의 병력을 가진 준 군사적인 경찰 예비대(警察豫備隊)를 창설하였다. 그리고 강화 조약 협상을 계기로 요시다는 한 걸음 더 나아갔다. 그는 1951년 9월 미일 안보 조약에 서명하였다. 일본은 이 조약에서 미군의 병력, 항공기 및 함정이 이용할 기지를 계속 제공할 것을 약속했다. 1952년 미일 안보 조약이 발효되면서 경찰 예비대는 보안대(保安隊)로 변경되었다. 그리고 1954년 7월에 명칭이 다시 바뀌어 이후 자위대(自衛隊, 지에타이)로 불리게 되었다. 자위대는 각료급 지휘관 휘하의 방위청(防衛廳, 보에초)이 관할하였다.

 이러한 양보로 일본이 얻은 대가의 일부는 경제적인 것이었다. 일본 지도자들, 특히 요시다는 얼마간의 재무장을 위한 자원을 제공할 것을 설득당하자 국내 경제 회복이 방위에 실제로 참여할 필요 조건이라고 계속 주장하였다. 워싱턴 당국은 일본 경제가 미국의 폭넓은 아시아 구상―즉 경제 성장을 촉진시킴으로써 공산주의에 대항하는 장벽을 구축한다는 구상―에 기여할 것으로 기대하여 이 견해를 수용하는 쪽으로 기울었다. 그리하여 이 견해는 일본의 대외 무역, 특히 동남아 지역에 대한 무역을 확대시키는 역할을 하였다. 더군다나 한국 전쟁은 미국이 전쟁 물자 및 관련 제품을 구매하는 형태를 취하면서 일본에 다른 형태의 경제 원조 기회를 제공하였고, 일본의 산업에 중요한 자극제가 되었다. 1953년에 한국전 휴전 협정이 체결된 후조차도 똑같은 종류의 협정이 이번에는 미일 상호 방위 조약을 통해 지속되었다. 상호 방위 조약은 1954년 3월에 조인되었는데, 이 조약을 통해 미국은 일본에 1억 5,000만 달러에 상당하는 군사 장비를 제공하는 한편, 해외 물품 및 농산물 구입에 1억 달러를 추가 제공하였다.

 이러한 조약과 결정들의 기초가 되었던 것은 샌프란시스코 조약에서 확인되었듯이 일본의 자주가 미국과의 군사적․경제적 동맹의 조건이 된다라는 양국 정부의 인식이었다. 다만 일본의 자주는 이번에는 일본 헌법과 일본 경제 상황에 의해 부과된 제약에 따라야만 했다. 일본의 자주는 향후 10년 이상 동안 일본 정치의 가장 감정적인 쟁점이었음이 드러났다. 이유의 하나는 일본인들이 점차 회복해 가는 일본의 국가 자존심에 대한 암묵적 모욕으로 느꼈던 데 있었다. 또 다른 이유로서 일본인들이 방위 조약과 일본 보수 세력간의 연계를 인식하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6. 비무장화 정책


 비무장화(非武裝化) 정책은 주요한 비민주적인 특징인 일본 군국주의의 제거를 수반하였다. 그러므로 일본의 비무장화는 일본내에 군국주의의 부활을 막고, 아시아와 태평양의 미래 평화와 안전을 보장함을 그 본질로 하는 것으로 믿게 되었다.

 비무장화 정책의 수행은 많은 분야를 망라하여 여러 가지 형태를 취하였다. 일본군의 완전한 무장해제, 군사시설 및 장비의 파괴, 육군성 및 해군성의 폐지, 참모조직을 포함한 제국 최고본부의 제거, 준(準)군사적 조직의 해산 및 금지, 전범자들에 대한 재판 개시 등이었다.

 포츠담 선언의 부분적인 수행으로서, 전범(戰犯) 재판은 일본의 군국주의와 침략의 부활을 단념시키고, ‘반평화 및 반인도적인 범죄’에 책임이 있는 지도자들을 응징하기 위한 구상이었다. 이러한 목적을 위해 1946년 1월 SCAP은 극동 국제군사재판소(International Military Tribunal for the Far East)의 창설에 대한 특별성명서를 발표하였다. 11명으로 구성된 이 재판소는 5월에 심의를 시작하였다. 28명의 주요 전범자들이 체포․기소되었으며, ‘침략전쟁의 계획․준비․수행’의 죄목에 대해 심리가 열렸다. 이들 중에는 전(前) 수상들, 군국주의자들, 국수주의자(國粹主義者)들이 있었다. 천황은 소련의 주장에도 불구하고 전범자의 명단에 포함되지 않았다. 후에 맥아더 장군은, “본인이 믿기로는 만일 천황이 기소되어 전범으로서 교수형에 처해지게 된다면, 군정(軍政)은 일본 전역에 걸쳐 영향력을 행사해야 했을 것이고, 게릴라전도 일어났을 것”이라고 지적했다.13) 이 소송에 대한 구형의 발표는 9개월이 걸렸고, 선고는 마침내 1946년 11월에 언도되었다. 모든 피고들이 유죄를 선고받았다. 각 개인의 죄과에 따라 확정된 형량은 교수형으로부터 장․단기간에 걸친 투옥까지 광범위하였다.14)

 전범 재판은 일본 국민에게 어떤 영향을 미쳤는가? 그와 같은 재판으로 일본 군국주의의 재발을 방지하고자 한 공언된 목적들이 얼마나 효과적으로 성취되었는지 의심스러운 것이었다. 피정복민으로서의 일본인들은 패배와 항복 후 그들의 전시 지도자들에 대한 처벌을 포함하여 전승국의 어떠한 명령도 받아들일 준비가 되어 있었다. 이들은, 그들의 지도자들이 지은 범죄란 전쟁에 졌다거나 전쟁의 규칙을 위반한 데 있다기보다는 처음으로 승리할 수 없는 전쟁을 치렀다는 것과 수년간에 걸쳐 국민을 오도(誤導)한 데에 있다고 믿었다. 일본인들에게 있어 피고인에 대한 유죄 판결은 그들 자신들이 이 재판은 승전국의 재량에 달려 있다고 믿었기 때문에 처음부터 뻔한 결론이었다. ‘합법 절차’ 및 ‘피고인의 권리’라는 복잡한 법적인 전문 사항들을 거쳐 끌어온, 길고도 지루한 재판 절차는 일본인들에게 거의 이해되지 않았고, 그 진가(眞價)를 인정받지도 못했다. 요컨대 이들은 이러한 재판은 가장 진실한 의미로 형벌을 할당한다고 보기보다는 연합국의 복수(復讐)를 합법화하는 과정으로 간주하였다. 만약 이들이 전쟁에 승리했더라면, 이들이 연합국 지도자들에 대한 전범 재판을 했을지도 모르는 일이었다.


 7. 경제 改革


 일본의 민주화와 비무장화의 성공적인 수행은, 이에 필적하는 이 나라의 경제적 기초에 대한 개혁 없이는 성취될 수 없는 것으로 간주되었다. 이러한 이유 때문에 초기에 발표된 정책은 “일본의 군사력을 이룬 기존 경제기반은 파괴하여야 하고, 부흥을 허용해서는 안된다.”고 선언하였다.

 특히 SCAP은 군수품 공장 및 항공기 산업을 제거하고, 강철 생산 및 조선(造船)과 같은 주요 산업들을 축소 내지는 변형시키고자 하였다. 일본은 점령군이 요구하는 바에 적절하고 평화적인 수준, 즉 기근과 만연된 질병과 격심한 물질적 고통을 없애는 정도의 경제적 수준으로 회복하는 것이 허용되었다. 그러나 항복 후 일본 경제의 파탄상태는 그와 같은 정책의 즉각적인 수행을 필요로 하지 않았다. 물질적으로나 경제적으로 일본은 황폐해 있었다. 철거해야 할 군수품 공장도, 파괴해야 할 항공기 공장도, 문을 닫아야 할 강철 공장이나 조선소도 남아있지 않았다. 도시의 40% 이상이 파괴되었다. 산업 생산은 1930년의 3분의 1, 그리고 1937년 전체의 7분의 1에도 미치지 못하였다. 격심한 식량 부족은 집단적 기아 상태를 초래할 판이었다.

 이러한 상황하에서 SCAP의 초기 경제개혁은 불가피하게 일본 경제제도의 개념적․구조적․조직적인 면에 집중하게 되었다. 예를 들어 ‘민주적인 제력(諸力)’을 추진시키려는 개혁정책은 다음과 같은 내용을 시사(示唆)하였다.


      민주적 기반으로 조직된 노동․산업․농업에 있어서의 여러 조직의 발전을 장려할 것이다. 그리고

     소득의 광범한 분배 및 생산과 무역에 대한 수단의 광범한 분배를 허용하는 정책이 추구될 것이다.15)


 이러한 목적을 달성할 수 있는 방법 중의 하나는, “일본의 무역과 산업의 대부분을 장악해 왔던 대산업 및 금융의 연합을 해체시키고자 하는 계획안을 추진하는 것”이었다.

 재벌(財閥)로16) 알려진, 거대한 가문으로 이루어진 기업 합동의 해체를 장려하는 데에는 많은 이유가 있었다. 메이지유신(明治維新)으로부터 제2차 세계대전이 끝날 때까지의 기간 동안에 일본의 근대화․산업화 및 팽창의 역사를 통해 볼 때 재벌은 경제적 제국주의를 대표한 반면, 군국주의자들은 영토적 정복을 대변하였다. 재벌과 군부는 각자의 전략과 책략에 있어서는 때때로 경쟁자들이었지만, 궁극적인 국가 목표―아시아에서의 패권(覇權) 장악―앞에서는 단합하였다. 이러한 사실에 비추어 볼 때 재벌은 전쟁의 책임과 침략으로부터 피할 수 없었다. 더욱이 소수의 독재자들에게 경제적․산업적․금융적 세력을 계속하여 집중시킨 것은 민주화를 표방하는 경제적 목표에는 거스르는, 본질적으로 전체주의적인 특징이었다. 실제로 미국의 한 공식 보고서는 재벌을 일본의 가장 큰 전쟁의 잠재력으로서 기술하였다. 즉, 재벌이 일본의 모든 정복과 침략을 가능하게 하였다는 것이다.

 SCAP 당국자들이 재벌 해체를 착수하기 시작했을 때, 이들은 즉각 실제적이고 부수적인, 그리고 본래부터 가지고 있는 많은 어려움들에 직면하게 되었다. 그 중 하나는 재벌의 증권을 매입할 적당한 구매자들을 찾는 일이었다. 전후(戰後) 인플레이션, 높은 가격, 실업, 그 밖의 경제적 불안정의 요인들로 인해 단순히 일반인들이 이러한 증권을 살 여유는 없었다. 또다른 어려움은 재벌 회사의 대부분 중역(重役)들이 ‘경제적 숙청’에도 불구하고 계속하여 기업과 산업에 있어서 국수주의자들로 기울었던 재벌 가문의 개인적인 영향력과 지배력하에 남아 있다는 사실이었다. 재벌 가문내의 강력한 인적(人的)유대는 그 공식적인 연계가 단절된 후에도 계속하여 비공식적인 지배의 속박을 유지하였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재벌 해체 명령은 5대 재벌회사에게 내려졌고, 그 후 여러 기업 연합과 이들의 지점회사에까지도 확대․실시되었다. 한 특별한 지주회사가 이러한 회사들의 증권을 보유․처분하기 위해 조직되었다. 일본인들은 미국 당국이 일본인들의 가문으로 구성된 기업 연합의 전통적인 봉건적 성격을 무시한 채 재벌을 미국의 신탁회사(信託會社)나 주식회사(株式會社)와 같은 기업 제도로 간주한 데 대해 비난을 했다.

 재벌 해체는 그 방침을 바꾸기 이전까지 크게 효과를 거두지 못했다. 이러한 정책의 변화는 한편으로 본래의 계획안을 수행하는 데 있어 내재(內在)한 어려움들을 분명히 이해함으로써, 그리고 다른 한편으론 SCAP이 부당하고 비현실적인 가혹한 처사로서 해제 조치를 단행하고 있다는 미국의 금융 및 기업계의 신랄한 비판으로 인해 이루어졌다. 그러나 이러한 방침의 변화는 대체로 세계에서, 특히 중국에서 증대되고 있는 공산주의의 위협에 비추어 볼 때 미국의 세계정책의 구체화를 반영하였다. 중국을 강력하고 통일된 민주국가로 육성시키고자 했던 노력이 실패로 돌아가자 미국은 산업능력을 전쟁 이전의 수준으로 회복시켜 강력하고 통일된 민주적인 일본을 아시아에서 성장․발전하고 있는 공산주의에 대항할 미래의 요새지로 만들기로 결정하였다.17)

 경제 개혁에 있어서 또다른 부문은 일본내에 독자적인 노동조합운동을 촉진시키는 일이었다. SCAP은 일본 정부가 많은 노동법안들을 제정하라고 촉구하였는데, 이 중 1945년 12월에 제안된 노조법안은 노동자들의 조직, 단체 교섭 및 파업에 대한 권리를 보장하는 것이었다. 다음 해 국회는 노동쟁의(勞動爭議)의 해결을 위한 불평처리 절차들을 수립하는 입법안을 통과시켰다. 1947년에는 노동시간, 안전규제, 병휴가, 위생시설, 재해보상, 여성과 아동을 위한 휴가 및 노동규칙 등에 대한 최소한도의 기준을 마련한 법률이 제정되었다. 이러한 법률들에 의해 보장된 노동자들의 보호와 이들의 권한이 전쟁 이전의 정권하에서는 거부되었음이 지적되어야 할 것이다.

 경제 조치의 또다른 분야는 토지개혁(土地改革)이었다. 점령이 시작될 당시 일본에는 예외적인 거대(巨大) 지주는 비록 없었다 하더라도 농부들 중 약 70%가 소작인(小作人)들이었고, 경작지의 거의 반이 임차(賃借)된 것으로 추산되었다. 그러므로 토지개혁은 국가 부(富)의 더욱 공평한 분배를 가져오기 위해 경작자들이 경작지를 소유하도록 허용하는 구상이었다. SCAP의 지도하에 세부적인 개혁안이 대일연합국이사회에 의해 기초․연구되었다. 1946년 10월에 국회는 부재(不在) 지주들로 하여금 정부에 그들의 토지를 팔도록 하는 두 개의 토지개혁법안들을 통화시켰다. 따라서 정부가 구매한 토지는 낮은 이자로 30년간 분할 상환하는 조건으로 이전 소작농들에게 불하되었다. 자신의 토지에서 살고 있는 지주는 2.5에이커를 보유할 수 있었고, 실제 경작자들은 7.5에이커까지의 농지 소유가 허용되었다. 마지막으로 모든 지주들은 소작인들에게 차용 계약서를 주어야 했고, 지대(地代)는 수확의 25%를 초과할 수 없었다. 의심의 여지없이 토지개혁법안은 그 수행에 있어 얼마간의 장애물들과 어려움들을 갖고 있었지만, 나타난 결과로서는 SCAP이 수행한 가장 효과적이고 지속적인 전후 경제 개혁이었다.

 배상금 문제는 미국과 그 동맹국들의 기본적인 경제정책의 한 부분을 이루었다. 이들 국가들은 일본의 침략행위에 대한 배상금을 일본의 자본설비 및 산업시설의 변경을 통하여 강요할 작정이었다. 이러한 정책은 이중적인 목적을 가지고 있었다. ①일본의 경제적․산업적․군사적인 위축을 가져오기 위한 것과, ②일본의 침략으로 야기된 비용․손해․파괴를 연합국에게 보상하는 것 등이었다.

 첫 단계로서 미국은 잠정적인 배상금 변제(辨濟)방침을 수립하였지만, 극동위원회의 각국에 할당될 배상금 비율이나 일분으로부터 변제되어질 산업배상금의 총액에 대해서는 어떠한 협정도 체결되지 않았다. 이러한 문제를 초기에 해결하기 위한 노력의 일환으로 미국은 연합국간에 배상금위원회를 설치하여 배상금회의를 개최하자고 제안하였다. 그러나 일본의 외적 자산, 특히 소련군이 만주에서 탈취한 것들을 전리품으로서 소련에 수송했던 산업시설들에 대해 논의하려는 회담에 대해 소련이 거절하였기 때문에 아무런 결과도 얻지 못했다.

 1947년까지 냉전(冷戰)이 가속화되고 있는 점을 고려하여 미국 정부는 미해결의 배상금 문제가 일본의 경제회복을 방해하는 중요 요인 중의 하나라고 간주하였고, 일본 배상금 선불(先拂) 양도증서에 지시된 가협정(假協定)을 수행해야할 필요성을 느꼈다. SCAP은 중국․필리핀․네덜란드령 인도 제국(諸國)․버마․말레이지아 등에 대해 배상금을 선불하기 위해 일본의 잉여 산업시설 중 30%를 양도할 권한이 있었다. 미국과 소련은 이 명단에서 제외되었다. 이 계획안은 2년 동안 수행되었고, 그런 후 미국은 더 이상 일본에 어떠한 배상금도 요구하지 말아야 한다고 발표하였다.


 8. 점령의 再評價


 1948년 초까지 미국 지도자들은, 동아시아에 있어서 자국 이익에 가장 커다란 위협과 위험이 되고 있는 것은 일본으로부터 비롯되는 것이 아니라, 소련과 이 지역에서 우세해지고 있는 공산주의로부터 나오고 있다는 결론을 내렸다. 이러한 결론과 이에 부수되는 공산주의 봉쇄정책으로 미국은 점령정책을 재평가하지 않을 수 없었다. 왜냐하면 일본은 공산주의와 싸울 이러한 세계 전략과 무관한 것으로 간주될 수 없었기 때문이었다. 미국은 소련이 전시의 동지적 정신으로 전후 국제평화와 안전을 재건하는 데 서구 민주국가들과 협력하리라고 기대하였다. 그러나 제2차 세계대전의 종결은 상호 의심과 불신으로 가득 찬 냉전의 시작을 예고함이 분명해졌다. 미국은 소련의 말들과 행위를, 소련이 마르크스․레닌․스탈린 노선을 따라 세계 혁명을 지향(指向)하고 있다는 단 하나의 기준으로 평가하였다.

 이러한 견지에서 볼 때 소련의 정책 및 행동은 가장 분명한 용어로 교묘하게 변명된 것이었다. 소련은 자국이 점령한 나라에 공산주의 정부를 수립할 뿐만 아니라, 그 밖의 나라에서는 공산주의자들과 이들의 동조자들이 무장봉기․반란․전복 등으로 정권을 장악하도록 원조함으로써 자국의 목적을 달성시키고자 하였다.

 헝가리는 전후(戰後) 자유선거에서 국민투표의 20%도 안되는 지지표를 얻었던 공산당의 수중으로 떨어졌다. 폴란드에서는 많은 비공산주의 지도자들이 피할 수 없는 박해와 투옥(投獄)으로부터 벗어나기 위해 정치적 망명을 해야 했다. 그리스와 터키에서 공산주의 폭도들은 정권을 장악하기 위한 일환으로 대정부 게릴라전을 벌였다. 이 양국이 소련권으로 떨어질지도 모른다는 예상은 미국을 불안하게 하였다. 1947년 3월 12일, 트루먼(H. S. Truman) 대통령은 상하 양원 합동위원회에 나와 후에 트루먼주의로 알려진 다음과 같은 내용의 연설을 하였다.


      미국 외교 정책의 주요 목적 중 하나는 우리와 세계의 여러 다른 나라들이 억압받지 않는 생활방식을

     누릴 수 있는 상황을 조성하는 것이다. 그러나 우리는 자유 국민들에게 전체주의 정권을 강요하는 침략

     적인 움직임이 이들의 제도와 국가적 통합을 유지시키는 데 도움을 주지 않는 한 우리의 목적을 실현시킬

     수 없을 것이다. 이것은 자유 국민에게 강요된 전체주의 정권의 직접 혹은 간접적인 침략으로 국제평화의

     기반을 해치고, 미국의 안전 또한 해친다는 솔직한 시인에 불과한 것이다.18)


 제2차 세계대전 중 민주․공산동맹으로 공동작전을 펴던 동안에 정식으로 해체되었던 코민테른(제3인터내셔널)은 코민포름(Cominform)으로서 1947년에 부활되었다. 세계 공산주의 운동을 위한 강력한 무기로서 구상된 이 조직은 자본주의적인 서구 민주주의 국가들을 향한 선전기관으로서 그 역할을 하였다. 1948년 2월에 체코슬로바키아에서는 공산주의로 무장한 소수 세력이 소련군의 도움으로 국가 권력을 장악하였다. 그런 후 7월에 소련은 점령된 동독(東獨)의 소련 지대를 통해 베를린의 연합국 지대로 들어가는 연합국의 병력 충원 및 장비의 수송로를 봉쇄하였다.

 소련의 세계 정책과 관련시켜 볼 때 유럽에서의 이러한 사태진전은 똑같이 동아시아에서 나타난 소련의 전략적 강세와 정치적 영향력에 있어서의 무한한 증대로 필적되었다. 소련의 국경선은 사할린과 쿠릴 열도를 포함하기 위해 동진하여 확장되었을 뿐만 아니라, 몽고와 만주에서 소련의 출현은 이해할 수 있는 바와 같이 고조되고 있는 영향력과 지속적인 충격을 가져왔다. 한국에서 소련과 미국의 군대는 38도선을 사이에 두고 서로 대치하였다.

 이러한 상황하에서 미국은 동아시아에서 일고 있는 공산주의의 팽창위협에 대처할 요새지로서 충분히 견디어낼 만한 우호적이며 강력한 동맹국의 필요성을 더욱 절박하고 중요하게 인식하고 있으면서도 결코 갖고 있지 못했다. 일본이 패배하여 점령되었을 때 장개석하의 중국 국민당 정권이나 혹은 중국의 국공연립정부가 안정에 대한 이러한 부분을 떠맡을 것으로 기대하였지만, 중국 자체는 장개석 국민당 정부가 결국에는 붕괴하게 될 내전에 휩싸여 있었다.

 대일(對日)정책의 변화를 초래하였던 이러한 국제적 요인들 외에도 SCAP이 자신의 정책을 수정할 수밖에 없었던 것은 많은 일본 내적인 문제에 기인한 것이었다. 1947년 5월 가타야마(片山)가 수상이 되었을 당시 그는 만연하는 인플레이션과 암시장, 높은 물가와 노동쟁의 등과 같은 비참한 경제적 상황에 직면하게 되었다. 그러므로 그는 즉시 경제적 통제와 회복에 책임을 지고 있는 내각의 경제안정위원회를 강화시켰다. 이 위원회가 절박한 경제위기를 피하기 위해 단호한 조처를 시행하고 있는 동안 산업의 각 부문으로부터 불만과 경고의 소리가 들려왔다.

 노동조합들은 실질임금 인상에 대한 요구 사항들을 시끄럽게 주장하였고, 기업계는 보상금 지불의 경감을 요구하는 의사를 표명하였고, 산업주의자들은 ‘경제적 숙청’으로 구속되었던 사람들의 석방을 위해 로비 활동을 시작하였다. 이들은 일본의 튼튼하고 건강한 경제회복이야말로 기아상태의 공산주의로부터 일본을 구제하는 데 있어 필수적인 것이라고 주장하였다. 일본 산업의 잠재력 및 경제회복은 이제 냉전에서의 공산주의에 대항한 자유세계의 이념이라는 견지에서 바라보게 되었다.

 미국 정부․점령당국․일본 지도자들은 일본의 기본적인 경제문제를 해결하고, 이 나라를 아시아 공업단지의 지위로 회복시키기 위해서는 결정적인 조처를 취하는 점령 정책의 재검토가 이루어져야 한다는 결론에 도달하였다. 이 때문에 SCAP은 경제정책을 제정하기 시작하였다. 독점 체제의 집중화 및 재현을 막기 위해 1947년 4월과 12월에 각각 제정되었던 반독점법(Antitrust Law) 및 경제력 과대집중 방지법(Elimination Excessive Concentration of Economic Power Law)의 시행과 재벌 해체는 일본의 경제력과 발전을 필요 이상으로 약화․방해하였음을 깨닫게 되었다.


 9. 주권회복


 1950년 6월 25일 한국전쟁이 발발함에 따라 그 후 계속된 무기 생산 및 조달로 일본 경제는 현저하게 회복되었다. 회복률은 한국에서 전쟁이 일어나기 전에 수립된 최초의 복구계획안을 훨씬 초과하였다.

 바로 이때 일본 수상 요시다 시게루(吉田茂)는 미국과 평화조약을 체결할 수 있는 기회가 왔다고 믿었다. 일부 그의 정적(政敵)들은 미국 및 그 동맹국들과의 단독 평화조약이 불필요하게 소련과 그 밖의 공산주의 국가들을 적대(敵對)시킬지도 모른다고 우려하였지만, 요시다는 그와 같은 행동 방침이 “반드시 어떠한 신조나 철학이 아니며, 비굴한 관계도 유지할 필요가 없을 것이며, 단지 일본 국민의 번영을 촉진시키는 가장 빠르고 확실한 길”이라고 느꼈다.19) 이 점에서 그의 관점은, 일본을 위한 정당한 평화의 달성이 우리의 지도력을 주장할 수 있고, 아시아 사태의 와중에서 우리의 잃어버린 주도권을 되찾는 한가지 방법이라는 맥아더 장군의 견해와 일치하였다. 캐나다 외상은 한 성명서에서 조속히 일본과 해결을 보기 위해서는 어떠한 기회든 신속히 포착해야 한다면서 그와 같은 견해를 되풀이하였다.

 일본 군국주의의 부활은 아주 멀어졌고, 반면에 번영에 차고 민주적이며 독립된 자주적인 일본의 신생(新生)이 눈앞에 다가왔다는 사실은 더욱 분명해졌다. 따라서 일본과의 평화조약에 대한 열망은 미국 지도자들과, 직접적으로 관련된 여러 다른 나라들 사이에서 점점 더 눈에 띄게 되었다.

 일찍이 1948년 그와 같은 협정을 체결하려는 시도가 있었지만, 4개국(미․영․중․소)이 지배한 협상과 이들 사이의 규칙인 협정체결에 있어서의 만장일치에 대한 소련의 주장 때문에 실패하였다. 이러한 경험을 염두에 둔 미국은 1950년 9월에 이 주제에 대해 비공식적인 논의를 시작하였다. 트루먼 대통령은 초당파적 외교정책 정신으로 공화당원인 덜레스에게 필요한 협상을 수행하도록 임무를 부여하였다. 이 쟁점에 대한 덜레스의 기본적인 태도는 평화조약을 응징적인 아닌 융화적인 것으로 만드는 것이었고, 일본이 강압에 의해서가 아니라 일본 자체의 자유의지에 따라 자유세계의 일원이 될 수 있도록 하는 것이었다.

 1950년 10월 덜레스는 다음과 같은 7가지 원칙으로 자신의 접근을 더욱 구체화하였다. ①일본과 전쟁을 했던 모든 교전국들이 이 조약에 서명하도록 할 것. ②한국 독립에 대한 일본의 승인 및 중국내의 특권에 대한 일본의 포기. ③한국 독립에 대한 일본의 승인 및 중국내의 특권에 대한 일본의 포기. ④미․일간의 안전을 위한 방위 협력. ⑤일본이 최혜국 대우를 받도록 할 것. ⑥일본 본토로부터의 배상금은 철회할 것. ⑦모든 국제적 분쟁은 평화적 수단으로 해결하도록 할 것 등이었다.

 계속된 일련의 쌍무적인 협상은 물론 다변적인 협상이 진행되는 중에 미국은 많은 곤란한 문제들에 부딪쳤다. 류큐(流球) 섬에 대한 신탁통치와 일본을 포함한 태평양 열강들 사이에서의 다변적 안전보장협정의 성립에 대한 미국의 제안은 둘 다 거절되었다. 중국의 평화협정에 대한 대표 문제, 즉 북경 정부(중화인민공화국)인가, 아니면 대만 정권(중화민국정부)인가의 문제는 결코 해결되지 않았다. 필리핀과 오스트레일리아가 주도한 많은 동맹국들은 일본의 재무장 제한에 관한 조항이 없는 조약 초안에 대해 강력한 반대를 제기하였다.

 미국은 동맹국들 사이에서 나타난 상충하는 견해들과 정책의 차이점들을 해소시키고자 19512년 전반기 내내 노력하였다. 주요 장애물들은 평화조약의 본문 초안에 대한 소련의 논의 거절과 북경 정부의 대포성에 대한 영국의 고집이었다.

 마침내 1951년 6월 영․미 공동 초청은 중국을 포함한 55개국에까지 확대되어, 1951년 9월 4일 샌프란시스코에서 열릴 예정인 평화회담에 이들 국가들의 참여를 요청하였다. 3개국(인도․버마․유고슬라비아)을 제외한 모든 국가들이 초청을 수락하였다. 인도의 거절은 두 가지 이유, 즉 중화인민공화국은 대표성이 없다는 사실과 기존의 제안된 조약 초안은 일본을 지나치게 미국에 의존하도록 한다는 사실 등에 기반을 둔 것이었다. 미얀마는 이 조약이 일본에게 너무 관대하고, 배상금 조항은 불충분하다고 판단했다. 회담이 진행되는 동안 절차와 도약 초안에 대한 가장 강력한 공격은 소련으로부터 나왔다. 소련 대표 그로미코는 중화인민공화국의 초청을 요구하였고, 일본 군국주의의 부활에 대한 부적당한 안전장치를 개탄하였으며, 미국이 일본에 대한 지배를 영속시키고 있다고 비난하였다. 그는 이 조약이 소련과 중공의 영토권을 위반하는 것이라고 비난하였다.

 평화조역은 1951년 9월 8일에 일본과 그 밖의 이전 교전국들인 48개국에 의해 정식으로 체결되었다. 예상했던 대로 소련은 체코슬로바키아 및 폴란드와 함께 이 조약에 서명하기를 거부하였다. 이와 같은 날 미국과 일본은 외부의 침략과 외부 군대에 의한 지원을 받는 국내의 반란에 대해 공동방위를 규정하는 안전보장협정을 체결하였다. 이러한 목적으로 미군은 계속 일본에 주둔하였다. 이와 같은 일련의 조약들은 10월 일본 국회에 의해 비준되었으며, 1952년 4월 28일에 그 효력을 발휘함으로써 역사적인 미국 점령의 시기는 종지부를 찍었다.

 1952년 미국 점령의 종결로 일본은 많은 복잡한 문제들과 중요한 과업들, 특히 하나의 점령국으로부터 국가의 모든 권리와 책임을 갖는 하나의 주권국으로 이양하는 문제에 직면해 있었다. 가장 결정적인 과업 중의 하나는, 인구는 많지만 천연자원은 빈약한 한 나라의 안정되고 번영에 찬 경제를 유지하고 계속 촉진시키는 일이었다.

 전후 일분에서는 민주주의와 경제적 진보가 거의 동의어로 간주되었고, 초기의 어려움들이 일단 극복되자 일본 경제는 몇 년 사이에 놀라운 성장률을 나타내었다. 메이지 시대처럼 경제성장은 정부와 사기업의 연합으로 촉진되었다. 정부의 성공은 최고의 경제적 성장에 있고, 이것은 경제가 건전해야 안정감이 있다는 국민의 강한 신념에 달려 있었다. ‘정부의 사업은 사업’이라고 한 하딩의 언명은 일본에 적절한 것이었다. 바로 이러한 이유로 요시다 수상은 일본내 미군기지의 계속 주둔을 기꺼이 수락하며 자국을 미국의 핵우산 아래에 두려고 하였지만, 일본이 재무장해야 한다는 미국의 제안은 거절하였다., 요시다는 재래식 재무장은 핵전쟁의 상황에서는 쓸모없을 뿐만 아니라, 일본의 경제 번영도 위태롭게 할 것이라는 사실을 확실하게 인식하였다.

 경제회복과 성장은 태평양전쟁 동안에 가장 심하게 파괴되었던 기간 산업 및 공학 부문에서 가장 빠른 속도로 나타났다. 이러한 부문들은 1953년까지는 전전에 차지하였던 경제적 중요성을 다시 회복하였고, 1인당 생산고는 1930년대 중반 수준으로까지 접근하였다. 평균 일본인 봉급 생활자의 1인당 실질소득에 의한 1946년의 생산량은 1934년의 반이었고, 1953년의 생산량은 1934년의 생산량과 같았다. 전반적인 경제 성장률은 1950년으로부터 1965년에 이르기까지 매년 평균 10%에 달했고, 1963년에는 무려 12.1%라는 높은 비율을 보였고, 1965년에는 7.5%로 낮아졌다.20) 1953년까지 일본의 생산고를 대충 두 배로 올려 놓을 수 있었던 항복 후의 높은 성장률은 다음과 같은 요인들에 기인한 것이었다. ①정부 및 사기업이 받은 미국으로부터의 경제원조. ②한국전쟁으로 인한 벼락경기. ③높은 수준의 일본 기술. ④일본의 무역정책 등이었다.

 첫째, 미국으로부터 획득한 기술지식은 많은 회사들과의 계약을 실현하였고, 빠른 속도로 성장하고 있는 경제에 광범하게 기여하였다. 이와 결부된 것으로서는 은행 차관의 형태로 일본에 유입된 막대한 미국의 신용대부를 들 수 있지만, 일본 증권에 대한 투자는 더욱더 늘어났다. 둘째로, 한국전쟁이 발발할 당시 일본 경제는 안정되어 비교적 건전한 방법으로 기능을 다할 수 있었으며, 따라서 일분 산업은 한국군에 군수물자를 조달하려는 미국의 엄청난 주문이 밀려들어 이로부터 이득을 얻을 수 있었다. 미국의 지출은 직접적인 원조와 특별 조달로 인해 1952~1953년에 매년 대략 8억 달러에 달했고, 1957년까지 매년 5억 달러 이상 계속되었다. 이러한 지출은 일본 경제 발전에 강력한 자극제가 되었고, 일본으로 하여금 외환을 과잉 보유하도록 만들었다. 셋째로, 일본의 높은 수준의 기술은 일본인 공학자․기술자․산업경영인들의 자질․능력 및 경험으로 이루어졌다. 이들은 일본의 전통적인 노동윤리로 잘 훈련되고 단련되었다. 이들의 기술과 생산노력은 일본의 경제성장을 가속화시켰다. 더욱이 폭격으로 파괴되거나 황폐화된 공업의 기계장치는 쳬계적으로 가장 진보된 장비로 대체되었고, 이것은 일본에게 국제 경쟁력을 높여 주었다. 마지막으로 일본의 외국 무역은 계획 운영으로 팽창되었다. 일본 관리들은 특별한 산업들의 상황을 분석하였고, 시장조사를 실시하였으며, 바람직한 수출품목 및 그 장래성을 타진하였으며, 품질을 향상시켰다. 이들은 정말로 무엇을 생산하고, 어떻게 생산하며, 누구를 대상으로 생산할 것인가를 미리 정하고 생산에 참여하였던 것이다. 일본 은행은 신용 대부를 얻기 쉽게 만들었고, 정부는 조세감면 혜택 및 높은 감가상각비(減價償却費)를 허용하였다.

 최초의 산업 및 무역의 성공은, 1920년대와 1930년대에 정통했던 방직과 그 밖의 경공업에서 이룩되었다. 그런 후 광학 산업․자동차․조선․전기․강철 생산 같은 더욱 진보하고 복잡한 새로운 부문들에서도 차례로 성공을 거두었다. 이러한 성공은 선진 산업기술과 비교적 낮은 임금의 노동력을 결합시킴으로써 나타난 높은 생산성으로 가능하였다. 또한 이것은, 기술이 부족하고 국제시장에서 높은 생산성으로 가능하였다. 또한 이것은, 기술이 부족하고 구제시장에서 높은 임금을 지불했던 경쟁국들보다 일본이 유리했음을 의미하였다.

 제품을 생산하는 동안 일본은 과거 아시아 시장을 다시 장악하였을 뿐만 아니라, 미국과 전세계에서 새로운 시장들을 개발하였다. 일본은 이제 ‘경제적 기적’을 일으킨 나라로서, ‘아시아의 작업장’으로서, 그리고 ‘경제적 기적’을 일으킨 나라로서, ‘ 아시아의 작업장’으로서, 그리고 ‘경제 대국’으로서 묘사되기 시작하였다. 이것은 다음 장에서 더욱 자세히 논의될 것이다.

  일본은 평화조약을 체결한 후 자주적인 한 독립국으로서 일본 스스로가 해결해야 하는 국내외적인 많은 절박한 문제들에 직면하게 되었다. 국민적 관심을 끌었던 당년 쟁점들 중의 하나는 천황의 지위를 회복시키고, 전쟁 포기 조항을 개정하기 위한 헌법 개정에 관한 것이었다.

 일본의 국회 및 정부를 확고하게 장악하였던 보수주의자들은 천황의 신성과 통치권에 관한 전전의 원칙을 부활시키기 위하여 헌법 개정을 갈망하였다.  이와 동시에 이들은 또한 헌법 제9조를 개정하기를 원했다. 이들에게 있어서 국가방위 및 국가정책의 한 수단으로서 군대를 유지시킬 권한의 포기는 힘의 정치가 지배하는 세계 속에서 어리석은 것처럼 보였다,. 일본이 군사적인 자율권 없이 지나치게 미국의 보호하에 의존할 때, 이들에게 있어 일본의 독립이나 주권은 아무런 의미도 없었다.

 헌법 개정을 지지하는 보수주의자들은 좌파―주로 사회주의자들과 공산주의자들―로부터 격렬한 반대에 부딪쳤다. 헌법 개정을 위한 시도가 국회의원 선거에서의 압도적인 승리로 점령하에서 이루어졌던 개혁을 원상태로 돌리고, 전전(戰前)의 군사적인 전체주의로 일본을 되돌려 놓을지도 모른다는 사실을 우려한 좌파의 개정 반대자들은 현재의 헌법이 함부로 변경되어서는 안될 하나의 정상적인 문서라고 주장하였다. 이들은 강력하게 국회내의 보수주의자들에게 반대하였고, 자신들의 입장에 대한 범국민적인 지지를 이끌어 내기 위하여 가두시위를 벌였다. 그러나 1950년대 말에 이르면서 이 쟁점은 서서히 사라져갔다.

 한편 재무장 주창자들은 헌법 제9조를 개정하지 않고도 사실상의 군비를 통하여 그들이 바라던 목적을 거의 성취시켰다. 일본을 재무장하려는 첫 단계는 한국 전쟁이 발발한 직후에 취해졌다. 미점령군이 한국전장으로 파견된 후 이를 대체하기 위해 7만 5천 명으로 구성된 국민 치안예비대가 창설되었다. 그 후 평화조약이 효력을 발휘하게 된 직후인 1952년 8월에 요시다 수상은 소규모의 해군 부대를 포함한 국민 보안군을 창설하였다. 1954년 2월에 그는 한층 더 이러한 부대들을 확장시켰으며, 각 부대의 이름을 육군 자위부대․해군자위부대로 개칭하였고, 역시 소규모의 공군자위부대도 추가로 창설하였다. 이 세 부대 모두는 방위청하에 두었다. 이러한 모든 조처의 이면에 놓인 합리적인 근거는 헌법이 전쟁은 포기하지만, 자위에 대한 본연의 권리는 포기하지 않겠다는 데 있었다.

 평화조약 이후 일본의 외교관계는, ①자유 세계진영 참가, ②공산주의 블록과의 제휴, ③비동맹국으로 남는 것 등 세 가지 방침을 선택하였다. 셋째 방침으로부터 차례로 검토해 보면 다음과 같다.

 첫째, 중립화에 대한 주창자들은 주로 일본의 정파 중 중도파로부터 나왔다. 이들은 자유세계와 공산주의 세력 둘다 똑같이 우호적인 관계를 수립하는 것이 일본의 이익에 더 나은 것이라고 주장하였다. 이들은 일본을 위한 더 큰 안전은 대자본주의 미국이나 대공산주의 소련과의 군사적 동맹에 있기보다는 완전히 비무장한 중립화에 있다고 하였다. 이들은 미․소 전쟁이 벌어질 경우 당연히 소련의 군사적 목표가 될 일본내의 미국 군사기지에 대해 극도로 불안해하였다. 그러나 이러한 중립적인 방침은 분명히 유지될 수 없는 것이었다. 미국의 정치적 그늘로부터 간신히 부상한 일본 지도자들은 미국의 압력과 영향력을 완전히 벗어버릴 만한 위치에 있지 못했다. 이 당시 미국의 외교정책은 반공운동을 전개하는 데 전념하였으며, 따라서 중립주의 정책은 무신론적 국제 공산주의에 대항한 투쟁 속에서 미국에게는 부도덕하고 비우호적인 것으로 간주되었다.

 중립주의에도 불구하고 일분은 아시아 주변 국가들과 관계 정상화를 위한 협상을 시작하였다. 1952년 4월, 일본과 대만의 중화민국은 완전한 외교관계를 수립하는 평화조약을 체결하였다. 이것은 중화인민공화국의 북경 정권에 대한 미국의 불승인 정책을 일본이 따르고 있음을 분명히 시사하는 것이었다. 1954년에 필리핀은 배상금에 관한 일본과의 협정이 체결된 후 샌프란시스코 평화조약을 비준하였다. 이 해 말경에 일본은 마찬가지로 미얀마와도 평화 조약을 체결하였다. 이와 동시에 일본은 아시아 개발도상국에게 지급되는 국제적인 경제원조안에 기여하기 위한 콜롬보 계획에 합류하였다. 그 다음 해 일본은 또한 GATT의 회원국이 되었다.

 둘째의 대안을 취할 가능성에 대해서는, 일본은 주로 두 공산주의 대국―소련과 중공―과 관계를 맺어야 했다. 특히 일본의 소련과의 관계는 견제되었다. 일본내의 좌파측 친공산주의자들은 평화조약이 일본을 지나치게 미국에 종속시켰다고 비난하였다. 따라서 이들은 소련에 의해 주도된 공산주의 블록과의 우호정책, 혹은 필요하다면 제휴를 할 것을 요구하였다. 이들은 평화조약, 안전보장조약, 일본내의 미군기지, 미국의 지배 등에 대한 반대를 자장하며 수천 명 단위의 가두시위를 벌였다. 향후 수년 동안 이러한 ‘항의시위 정치’는 일본의 정치 생활에 친숙한 하나의 특징이 되었다.

 이러한 반미 감정의 이면에는 소련에 관한 호의적인 이미지가 있었다. 일본을 미국으로부터 꾀어내기 위한 노력의 일환으로, 소련과 중공은 일본과의 관계 정상화를 위한 준비를 다음과 같이 발표하였다.

     소련과 중공 정부가 일본에 대해 표방하는 정책은 각자의 사회체제에는 상관치 않는 평화공존원칙을

    따른 것인데, 이것은 모든 국민의 중요한 이익과 조화를 이룬다고 확신하는 바이다. 양국 정부는 상호

    유리한 조건으로 일본과 광범위한 무역관계의 발전 및 일본과의 밀접한 문화적 교류의 수립을 지지한다.

    양국 정부는 또한 일본과의 신속한 관계 정상화를 위한 조처를 취할 것을 표명하며, 일본이 소련 및 중공

    과의 정치적․경제적 관계를 수립하고자 하는 노력을 기울일 때 충분한 지원을 받을 것이며, 일본의 평화

    적이고 독자적인 발전을 위한 제조건을 마련하기 위한 어떠한 조처도 아낌없는 지원을 받을 것임을 선언

    하는 바이다.21)


 이에 반응하여 일본은 조심스럽게 협상을 시도하기 위해 소련에 접근하였지만, 소련은 이러한 협상 동안에 일본이 요청한 소련과 밀접한 수역(水域)에서의 어로권(漁撈權), 쿠릴 열도 최남단에 위치한 작은 섬들의 반환, 일본의 유엔 가입에 대한 소련의지지, 그리고 계속하여 소련에 억류되어 있는 일본군 포로들에 대한 본국 송환 등에 대해서는 어떠한 양보도 거절하였다.

 소련은 이러한 쟁점들에 대해 계속하여 완강히 버티다가 마침내 1956년 10월 일․소 평화조약을 체결하였다. 이 조약은 양국간의 외교 및 영사 관계 재수립을 규정하였고, 소련은 전술한 일본의 요구 사항 중 작은 섬들의 반환을 제외한 모든 것에 동의하였다. 이러한 점에서 이 조약은 관습적인 의미에서 볼 때 정확하게 공식적인 평화조약이 아니라 양국간의 친교 회복이었다. 진정한 평화조약은 이제 체결될 예정이었다.

 일본의 중공과의 관계는 정치의 복잡성보다는 통상 및 무역에 대한 필요성에 더 많이 좌우되었다. 정부와 기업내의 일본 지도자들은 일본의 경제적 장래에 대한 관심을 가지고서 중국과의 무역확대를 지지하였다. 이들은 대만의 국민당 정부에 대한 일본의 외교적 승인이 북경 정부와의 무역관계를 해치거나 위태롭게 하지 않기를 희망하였다. 이들은 “정치는 정치고, 무역은 무역”이라고 간주하고 싶어했다. 그러나 북경 지도자들은 그다지 협력적이지 않았다. 중공측의 입장에서는 일본의 무역에 대한 욕구를 조정하여 일본 정치에 대해 압력을 가함으로써 북경의 정치적 이득을 얻으려는 분명한 경향이 있었다. 이에 불만을 가진 많은 일본인들은, 북경의 이러한 비협조적인 태도는 일본이 스스로 동일시하였던 미국의 비타협적인 대중국정책으로부터 나온 결과라고 믿었다.

 마지막으로 일본이 선택할 수 있는 대안은 미국이 지도하는 자유세계와 동맹을 맺는 일이었다. 사실상 평화조약의 기초가 되는 선행조건 중의 하나는 일본을 미국에게 견고하게 묶어 두는 것이었다. 이전에 일본을 점령하여 통치했던 미국과 제휴하여 일본이 얻은 이득은 다른 두 가지 대안으로부터 얻을 수 있을지도 모를 이득보다는 훨씬 큰 것이었다. 일본은 재무장이라는 경제적 부담으로부터 자유로와졌고, 경제 회복 및 성장을 위한 유리한 정치적 분위기를 조성할 수 있었다. 미국은 일본의 공업 발전, 발전소 건설, 농업 개량, 해군 함대 건설 등에 대해 계속하여 원조를 해주었다.

 이러한 공식적인 우호와 동맹적인 입장에도 불고하고 미․일 관계는 자주 긴장되었다. 가장 눈에 띄는 불화의 원천은 일본내 미군의 계속 주둔이었다. 교통 사고로부터 일본인들에 대해 가해진 범죄에 이르기까지 다양한 미국 군인들의 해악으로 야기된 반미 감정의 재연은 끊임없었다. 가장 널리 알려진 사건 중의 하나는 소총 사격장에서 금속조각을 줍고 있던 한 일본인 여인을 쏘아 살해한 죄로 미국인 병사가 관련된 1956년의 사건이었다. 그 후 이 사건을 어느 당국―일본 혹은 미국―이 다룰 것인가 하는 사법적인 문제는 미국에서는 물론 일본에서도 하나의 감정적인 쟁점이 되었다.22)

 일본인들은 또한 태평양에서 미국이 행한 핵폭탄 실험에 극도로 민감한 관심을 가졌다. 이에 관련한 반미 감정을 부채질하였던 한 사건은, 1954년 비키니 섬에서 행한 미국의 핵실험 결과 떨어진 방사능 낙진에 의해 먼 거리에서 조업 중이던 많은 일본인 선원들이 사상(死傷)한 것이다. 일본 국민은 이 사건을 히로시마와 나가사키에 떨어진 원자폭탄과 결부시켜 격한 분노를 나타내었다.

 불화의 또다른 원천은 영토분쟁으로부터 나왔다. 과밀한 일본에게 있어서 효율적인 영토 사용의 문제는 커다란 국민적 관심사였다. 그러므로 미국이 기동훈련이나 폭격연습을 실시하거나 농지를 침범하면서 공군기지의 활주로 확장공사를 할 때마다 피해 당사자인 농부들과 이들의 지지자들은 미국 국민들과 싸웠다. 훨씬 광범한 여론 속에서 류큐 섬의 미군 기지는 똑같은 불화의 원천이 되었다. 1951년의 평화조약으로 미국은 류큐 섬의 입법부․행정부․사법부의 권한을 보유하였다. 해가 지남에 따라 오키나와의 미군 당국에 대해 더 많은 고유한 자율권에 대한 선동과 더 많은 토지에 대한 시위(더이상의 활주로 건설에 대한 반대)들이 행해졌다. 미국은 국제적 긴장이 동아시아에서 계속하여 존재하는 한 오키나와를 동아시아에서의 프런티어 전진기지로 보유하기로 결정한 반면에 이 섬에 대한 잔여 주권을 일본측이 보유하는 것을 인정하였다.

 이러한 갈등과 불화의 원천들이 여러 예에서 보듯 신랄한 바 있었지만, 기본적으로 우호적인 미․일 관계를 결코 위태롭게 하지는 않았음이 강조되어져야만 할 것이다.




결       론


 戰後 미국은 아시아 정책에 있어서 하나의 괄목할만한 성과를 거두었는데 그것은 바로 일본의 재건이었다. 전쟁이 끝난 지 불과 7년만에 미국은 신속하고 효과적으로 패전국 일본을 아시아에서 점증하는 공산주의세력에 대한 중요한 방파제로 바꾸어 놓았다. 미국은 처음에는 중국이 전후 아시아의 평화와 질서유지에 있어 일본을 대체하여 지도적인 위치를 차지할 것으로 기대했다. 그러나 미국은 중국에서 내란이 공산당쪽의 승리로 기울고 또한 전후 연합국간의 계속적인 협조와 통일체제에 대한 희망이 환상에 불과하다는 것을 깨닫게 되자 대일본정책을 근본적으로 수정하였다. 다시 말해서 처음에는 일본을 “개혁”하고자 했던 미국의 정책이 점차 냉전이 진행되어 가고 중국에서 공산당의 승리가 확실해지자 일본의 “復活”계획으로 전환되었던 것이다. 케넌은 일본과 독일은 “세계정치라는 장기판 위에 있는 미국의 가장 중요한 두 개의 말”이었다고 회고했다.

 미국은 독일의 경우와는 달리 일본에서는 그 정책수행에 있어서 소련과 비교하여 압도적으로 우월한 입장에 있었다. 미국은 일본을 단독으로 점령할 수 있게 됨에 따라 소련이 동부유럽에서 누릴 수 있던 우월한 위치를 일본에서 갖게 되었던 것이다. 맥아더 장군은 연합국 최고사령관으로서 오직 워싱턴으로부터의 지시에 따라 일본을 통치했다. 소련의 일본점령 동참요구는 미국에 의하여 거부되었고 미국의 일방적인 일본통치에 대한 소련의 불만은 유럽과 중국문제의 해결에 있어서 소련의 비협조적인 태도로 나타났다. 마침내 미국은 1945년 12월의 모스크바외상회담에서 약간의 양보를 했지만 그것은 내용에 관한 것이 아니라 형식에 관한 것이었다. 즉 이후 미국․영국․소련․중국 등 4강을 대표하는 일본에 대한 연합국회의가 도쿄에 설치되었지만 그것은 언합국최고사령관에게 조언하는 역할 그 이상의 기능을 발휘하지는 못했다. 또한 전쟁중 일본과 싸웠던 11개국을 대표하는 극동위원회가 워싱턴에 설치되어 이론상으로 일본의 점령정책을 立案하게 되었으나 실제에 있어서는 연합국최고사령관의 결정을 추후 승인하는 구실 밖에 하지 못했다.

 전후 초기의 개혁적인 재건정책 시기에 미국은 맥아더 장군을 통해서 혁명적인 방법으로 일본을 개혁했다. 일본의 영토는 네게의 주요도서 및 그 부속도서들로 줄어들었고 군부는 해체되었으며 군수산업도 정리되었다. 전범들이 처벌되고 전쟁에 책임이 있다고 여겨지던 사람들의 정치활동이 금지되었다. 또한 미국은 대재벌을 해체되고 토지개혁을 통하여 소작인에게 토지를 분배해 줌으로써 일본의 경제생활을 민주화하고자 했다. 끝으로 일본의 군국주의체제를 정치․경제적으로 민주화시키려던 미국의 점령정책은 1947년 5월 3일 발효된 일본의 신헌법 채택에서 가장 잘 나타나고 있다. 이 헌법은 영국과 미국의 정치제도에 그 바탕을 두고 있으며 일본의 정치적 전통은 거의 반영하고 있지 않다. 이 헌법에서 특히 주목할 만한 것은 헌법 제2절 9항의 일본은 “국가의 최고권리로서의 전쟁을 영원히 포기”하고 “육․해․공군 뿐만 아니라 다른 전쟁잠재력이 결코 유지되지 않을 것”에 동의한 전쟁포기 조항이다.

 그러나 미․소간의 냉전체제가 급속히 악화되고 특히 1950년 6월의 한국전쟁 발발은 극동에서의 공산주의의 확산에 대한 미국의 태도를 크게 硬化시켰다. 이러한 상황에서 1947년부터 1950년 사이에 미국의 일본점령정책이 크게 변화되어  배상계획이 재고되고 전쟁과 관련되어 있던 산업에서의 생산통제가 완화되고 공산주의자들은 정부기관과 대학에 축출되었으며 이전의 일본의 정치지도자들이 복권되기에 이르렀다.

 미국은 1950년 4월 소련의 반대와 국방성의 소극적인 태도를 누르고 소련의 참여없이 일본과 강화조약을 협상하였다. 이로써 일본은 독일이 유럽에서 공산주의에 대한 방파제로서 재건된 것처럼 아시아에서 공산주의에 대한 방파제로서 대두되기에 이르렀다. 덜레스 국무성 고문이 일본과 가능한 한 많은 국제 연합회원국들이 수락할 수 있는 조약을 체결하는 일에 착수했다. 소련도 조약안 작성과정에 참여하도록 초청받았으나 조약안 작성 그 자체에는 참여하지 못했다. 마침내 일본과 합의가 이루어진 후 미국은 다른 49개국과 함께 1951년 9월8일 샌프란시스코 강화회의에서 공산주의 국가들이 기권한 가운데 대일강화조약에 조인했다.

 이 강화조약에 의하여 일본은 주권을 회복하게 되었고, 자위권을 보유하게 되어 미국은 암암리에 일본의 재무장에 동의했다. 이 조약은 또한 미국이 오키나와와 보닌제도를 계속 점령할 수 있도록 했으며 배상문제는 일분과 전쟁으로 피해를 본 인근 국가들, 즉 필리핀, 미얀마, 인도네시아간의 협상에 맡기기로 하였다. 그리고 이 조약으로 일본은 자국이 승인한 중국정부와 자유로이 조약을 체결할 수 있도록 허용되었다. 그 결과 일본은 미국의 정책노선에 따라서 1952년 4월 28일 타이완의 국민당정부와 외교관계수립을 위한 조약을 체결했고 뻬이징의 공산당 정부와는 아무런 공식적인 관계를 맺지 않았다.

 이 강화조약과 함께 미․일 양국은 미군이 “극동에서의 국제평화와 안전의 유지, 그리고 일본의 안보에 이바지하도록”일본에 무기한 주둔하는 것을 허용하는 안보조약을 체결했다.1952년 2월 28일 양국은 미국이 방어적인 목적으로 일본에서 군사기지를 보유할 수 있도록 허용하는 협정을 체결했다. 1952년 3월 20일 상원은 압도적으로 강화조약과 안보조약을 비준했고 4월 28일 이들 조약이 효력을 발휘함으로써 태평양전쟁은 공식적으로 끝이 났고 일본은 주권을 회복했다. 미․일 안보조약의 후편으로 미․일 양국은 1954년 3월 8일 점진적인 일본의 재무장을 위하여 미국이 군사적, 경제적 원조를 제공하는 것을 목적으로 하는 미․일상호방위조약을 체결함으로써 일본은 전후 미국의 세력권에서 중추적인 역할을 맡게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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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출처: 원광대학교 사학과(http://mahan.wonkwang.ac.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