쓰시마 해전

2019. 8. 4. 19:48우리 이웃의 역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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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쓰시마 해전

최근 수정 시각:


日本海海戦 (にほんかいかいせん)、対馬海戦 (つしまかいせん)
Цусмское сражение, Цусмское морское сржение

쓰시마 해전
날짜
쓰시마 해협
교전국1
교전국2
교전국
지휘관
도고 헤이하치로
가미무라 히코노조
가토 도모사부로
아키야마 사네유
지노비 로제스트벤스키
니콜라이 네보가토프
전력
전함 4척
순양함 27척
구축함21척
어뢰정 및 기타 함선 37척
총 89척
전함 8척
순양함 8척
구축함 9척
기타전함 3척
총 37척
피해 규모
117명 전사
583명 부상
어뢰정 3척 침몰
4380명 전사
5917명 부상
21척 침몰
포로 6106명
13척 나포
결과
일본제국의 승리, 러시아 해군의 전력이 와해됨


1. 개요2. 배경
2.1. 참가 군함2.2. 일본 제국 해군2.3. 러시아 제국 해군
3. 발트 함대의 출격
3.1. 준비3.2. 이동
4. 일본의 준비5. 블라디보스토크로 가는 머나먼 길6. 전투 개시7. 전투 결과
7.1. 일본군의 노획함선 편입
8. 해전 이후9. 기타10. 관련항목

1. 개요[편집]

   러일전쟁을 사실상 끝낸, 당시로선 세계 최대규모의 해전.(세계 최대규모의 해전 타이틀은 약 10년 후에 유틀란트 해전에게 뺏긴다. 일본의 함대가 쓰시마 즈음에서 러시아의 발트 함대를 격멸시켰으며, 이 결과로 포츠머스 조약이 체결되어 대한제국이 일본에게 지배당하는 결과를 낳고 일본의 국제적 위상이 약진하게 된다.

   한국에서는 대한해협 해전으로 부르는 이들도 있으나 실제로는 한반도와 큐슈 사이를 포괄하는 광역의 개념이라고 볼 수 있는 대한해협 중에서 쓰시마 섬과 일본 본토 사이의 해역인 동부 해협에서 벌어졌으니 정확히 표현하자면 쓰시마 해전이 맞다. 게다가 이후 한국 전쟁때 일어난 대한해협 해전이 있기때문에 거의 쓰이지 않는다. 한편 일본에서는 도주한 러시아 군함들을 추적하여 동해상 곳곳에서 소탕한 것까지 포함하여 일본해 해전이란 명칭이 공식적으로 사용된다. 한국내 일부에서 사용된 동해 해전은 사실 일본해 해전을 그냥 말만 바꾼 것.

2. 배경[편집]

   러일전쟁 발발과 동시에 러시아의 주요 군항 뤼순이 기습받아 태평양 함대는 큰 타격을 받아 사실상 항구에 봉쇄된 상태였다. 이와 같은 상황을 보고받은 러시아 정부는 태평양 함대의 봉쇄를 타파하고 제해권을 완벽히 장악하기 위한 획기적인 대책을 강구했다.

그것은 바로 본국으로부터의 증원함대였다. 러시아는 당시 태평양 함대 외에 흑해발트 해에 함대를 두고 있었는데, 흑해 함대는 오스만 제국에 대처해야 하는데다, 다르다넬스-보스포루스 해협의 군함 통과를 다른 열강이 용납하지 않아서 투입이 불가능했다.

결국 러시아는 최후의 카드인 발틱함대를 꺼내들게 되었다.

표트르 1세에 의해 창설되어, 지난 수백년간 러시아의 가장 막강한 해상전력으로 군림해온 히든 카드의 투입이었다.

2.1. 참가 군함[편집]

2.2. 일본 제국 해군[편집]

연합함대 사령장관 : 도고 헤이하치로 대장
참모장 : 가토 도모사부로 소장
선임참모 : 아키야마 사네유키 중좌
참모 : 이이다 히사츠네 소좌, 키요카와 주이치 대위
부관 : 나가타 야스지로 소좌
기관장 : 야마모토 야스지로 기관총감
군의장 : 스즈키시게미치 군의총감
총무장 : 카와치 야사쿠 주임

제1함대
제1함대는 연합함대 사령부가 직접 지휘했다.

제1전대(사령관 미스 사타로 소장, 참모 마츠이 켄키치 중좌, 토스 타마키 대위)
일등전함 : 미카사 (기함), 시키시마, 후지, 아사히
장갑순양함 : 가스가, 닛신
통보함 : 타쓰타
제3전대(사령관 : 데와 시게토 중장, 참모 야마지 카즈요시 중좌, 마루야마 스미타로 대위)
순양함 : 가사기, 치토세, 오토와, 니이타카
제1구축함대
구축함 : 하루사메, 후부키, 아리아케, 아라레, 야마비코, 아카츠키
제2구축함대 : 오보로, 덴, 카미나리, 아케보노
제3구축함대 : 시노노메, 우스구모, 카스미, 사자나미쿠모
제14정대 : 치토세, 슈, 마나즈루, 카사사기

제2함대 가미무라 히코노조 중장, 후지이 고이치 대좌, 사토 데쓰타로

제2전대

장갑순양함 : 이즈모 (기함), 아즈마, 도키와, 야쿠모, 아사마, 이와테
통보함 : 치하야
제4전대
순양함 : 나니와 (기함), 다카치호, 아카시, 쓰시마
제4구축함대
구축함 : 아사기리, 무라사메, 하쿠운, 아사시오
제5구축함대
구축함 : 시라누이 (기함), 고오쿠모, 유우기리, 카게로오
제9정대
어뢰정 : 아오타카 (기함), 간, 엔, 도바토
제19정대
어뢰정 : 카모메 (기함), 오오토리, 키지

제5전대
순양함 : 이쓰쿠시마 (기함), 마쓰시마, 아시다테
2등전함 : 진원
통보함 : 아에야마
제6전대
순양함 : 스마 (기함), 이즈미, 치요다, 아키쓰시마
제7전대
2등전함 : 후소 (기함)
해방함 : 다카오
포함 : 지쿠, 초카이, 마야, 우지
제1정대
어뢰정 : 제67호, 제68호, 제69호(기함), 제70호
제10정대
어뢰정 : 제9호, 제40호, 제41호, 제43호 (기함)
제11정대
어뢰정 : 제72호, 제73호, 제74호, 제75호
제15정대
어뢰정 : 히바리 (기함), 사기, 하이타카, 우즈라
제20정대
어뢰정 : 제62호, 제63호, 제64호, 제65호
특무함대
특무함대는 사령관 오구라 뵤이치로 소장과 참모 히라오카 테이치 중좌, 부관 오쿠타 테키치가 지휘하는 지원 부대로 주로 징용된 상선으로 구성된 전투에 직접 참가하지 않는 지원 부대였다.

가장순양함 : 아메리카마루, 사도마루, 시나노마루, 만슈우마루, 하치만마루, 타이난마루
특무함 : 쿠마노마루(熊野丸), 카스가마루(春日丸)

2.3. 러시아 제국 해군[편집]


사령관 : 지노비 로제스트벤스키 중장, 참모장 : 쿠라삐에 드 코론구 대령

제1 전함 부대 ※ 제 2 태평양 함대 사령부 직접 통솔
전함 : 크냐지 스보로프 (함대 / 부대 기함), 임페라토르 알렉산드르 3세, 보로디노, 오룔
제2 전함 부대 (사령관 : 폴케르삼 소장)
전함 : 오슬랴뱌 (부대 기함) 시소이 벨리키, 나바린
일등함 : 아드미랄 나키모프
제3 전함 부대 (사령관 : 니콜라이 네보가토프 소장)
전함 : 임페라토르 니콜라이 1세 (부대 기함)
해방 전함 : 게네랄 아드미랄 아프라크신, 아드미랄 세니아빈, 아드미랄 우샤코프
제1 순양함대 (사령관 : 엔크위스토 소장)
일등함 : 오레크 (부대 기함) 아브로라, 드미트리 돈스코이, 블라디미르 모노마프
제2 순양함대
이등 순양함 : 스베틀라나 (부대 기함) 알마즈, 젬추크, 이즘루트
제1 구축함 함대 (1907년까지 러시아 구축함에 해당하는 말이 없었고 어뢰정으로 분류하고 있었지만, 일본 측에서 구축함으로 분류했다.)
구축함 : 부이누이, 베도부이, 부이스쯔루이, 부라부이
제2 구축함 함대
구축함 : 그로즈누이, 그로무키, 보도루이, 브레스차아쉬, 베즈루표치누이
수반 함선
가장 순양함 : 우랄
공작선 : 캄차카
수송선 : 아나디리, 이루쯔이시, 코레야, 루시, 스뷔리
병원선 : 오룔, 코스토로마

3. 발트 함대의 출격[편집]

3.1. 준비[편집]

   러시아는 해군 중장 지노비 페트로비치 로제스트벤스키 제독을 총사령관으로 하고, 발트 함대를 제2태평양 함대로 개칭했다. 당연히 기존의 태평양 함대는 제1태평양 함대로 개칭되었다. 로제스트벤스키 제독은 1877~78년에 있었던 오스만 제국과의 전쟁에서 크고 작은 공훈을 세웠으며, 세계 최강의 해군을 가진 영국에 해군무관으로 파견되어 신식 해군에 대한 이해도도 높은 편이었다. 이후 차르의 눈에 들어 주요 해군 관련 행사에는 늘 참여하여 성공적으로 함포사격 시범이나 해상기동을 선보인 인물이었다. 거기에 개인적으로도 부패와 거리가 멀었고, 부하들을 아껴 곤궁한 부하들에게 자기 봉급을 일부 떼어줄 정도이니 수병들의 존경심도 높았다. 즉, 인선 자체는 상당히 괜찮은 인물이였다.

   기본 전략은 간단했다. 투입 가능한 배는 머나먼 극동으로 모조리 보내 블라디보스토크에 도착한 뒤, 잔존한 제1태평양 함대 전력과 합세한다. 이후 압도적인 해상전력을 바탕으로 일본군 함대를 격파 내지는 못해도 공세적 작전은 못하게끔 하여 제해권을 되찾는 것이었다. 그러면 본토에서 주 전장인 만주까지 해상을 통한 보급로에 의존해야 하는 일본군은 보급로가 마비될 것이고, 일본의 해운도 붕괴되어 알아서 GG칠 것이 분명했다.

3.2. 이동[편집]

파일:external/upload.wikimedia.org/Battle_of_Japan_Sea_%28Route_of_Baltic_Fleet%29_NT.png


미카사 기념관에서 제공하는 발트 함대의 여정 영상.


   1904년 10월 14일에 상트페테르부르크 인근의 리바우 항에서 출발한 제2태평양 함대가 마침내 10월 15일, 크론 슈타트 해군기지를 떠나 일본으로 향하기 시작했다. 차르는 로제스트벤스키에게 노후함들을 수리하여 제3태평양 함대를 편성해 증원시킬 것을 약속했고, 이후 이 함대가 합류했을 때 제2태평양 함대의 총 전력은 전함 7척, 순양함 7척, 보조순양함 5척, 구축함 9척 등 총 38척의 전투함과 26척의 수송함 그리고 승무원 14,000명으로, 당대의 대함대였다.

   하지만 출발한 지 얼마 지나지도 않아서 대형 사고를 치는데, 11월에 도거 뱅크 해역에서 발트 함대가 엄한 어선단에 포격질(…)을 하는 불상사가 발생한다. 당시 러시아 첩보기구에는 일본군 어뢰정이 유럽에 도착해서 함대의 주요 행선지에 매복하고 있다가 기습할 것이라는 첩보가 들어온 상태였다. 일본 해군의 어뢰정에게는 단독으론 유럽까지 갈 능력이 없었으니 당연히 헛소리였으나 그 사실을 알 리 없는 러시아 함대는 극히 조심스러워했고, 결국 북해에서 물고기 잡고 있던 영국 어선들에게 쾅! 거기다 사건이 벌어진 당시에는 야간이어서 함정식별이 어두웠고, 하필이면 어선의 기동이 영락없이 어뢰정에 의한 전함 측면 뇌격 시도와 흡사했기 때문에 오해할만 했다. 이 때문에 외교문제가 발생하였으나, 그 외에는 별 일 없이 항해했다. 이후 스페인의 비고에서 함대가 나뉘어진다.

   이후 이동은 나름 순조로워 함대는 11월 6일 탕헤르를 통과, 11월 12일 프랑스령 다카르(1960년 독립한 세네갈의 수도)에 도착하여 보급을 마친 후 계속 항해하여 12월 1일 리브르빌, 12월 초중순에 그레이트피시만과 뤼데리츠를 거쳐 12월 29일 마다가스카르 인근의 생트마리에 도착했다. 그리고 1905년 3월 16일, 함대는 생트마리 인근노지베 섬에서 출발한다. 즉, 한시가 급한 상황에서 고작 엎어지면 코 닿을 거리까지 무려 두달 반이나 걸렸단 소린데, 배후에는 뒷사정이 있었다. 사실 노지베에 도착한 것은 1월 초순이였으며, 함대는 이곳에서 뤼순 요새가 함락되었다는 비보를 들었고, 블라디보스토크로 향하라는 새로운 명령을 받았다. 그러나 발트 함대는 이곳에서 2개월 동안 발목을 잡히게 되는데, 그 원인은 연료 보급 문제였다. 제2태평양 함대는 독일의 함부르크-아메리카 석탄선(하팍로이드)과 전속 계약을 맺고 있었는데, 공교롭게도 계약이 노지베 섬에서 만료되었다. 그러나 독일이 계약 연장에 비협조적인 태도로 나옴으로써, 함대는 계약이 체결될 2개월 동안 꼼짝없이 발이 묶이고 만 것이다. 열대의 더위와 익숙하지 않은 음식, 그리고 풍토병과 맞서 싸우던 함대의 장병들에게는 어처구니없는 일이였다.

   우여곡절 끝에 노지베를 출발한 함대는 뒤이어 분견대와 합류하여 4월 8일에 말라카 해협에 도달했고, 4월 14일에는 프랑스령 인도차이나(베트남)의 캄란항에 도착해 다시 석탄 등을 보급받았다. 5월 9일에는 제3태평양 함대와 합류하여 총 38척으로 늘어났으며, 캄란항에서 98km 북쪽에 있는 반 퐁항에 다시 기항하였다.

이 때까지만 해도 태평양을 건너 대서양을 건너 인도양을 건너서 지구를 반바퀴 돌아올 때까지 탈락한 함선이 하나도 없었다는 이유로 로제스트벤스키에 대한 인정은 세계적으로 매우 높았다고 한다.

참고로 당시 러시아 발트 함대는 영국이 수에즈 운하 통행을 거부함에 따라 아프리카를 돌아 아시아로 가는 수개월의 여정을 해야 했고 결국 진이 빠져 쓰시마 해전에서 참패하고 말았다 카더라라는 오해가 있다.

그러나 정확히 말하면 러시아 해군이 보유한 전함의 실제 흘수선수에즈 운하의 당시 통항 제한 수심보다 깊었기 때문에 통과를 하지 못한 것이다. 출처. 나중에 추가로 파견된 러시아 군함들은 규모가 작아서 수에즈 운하를 잘 통과했다.

또한 일본 해군 역시도 보유한 전함이 대부분 영국제였는데 역시 선체 규격이 수에즈 운하의 규격보다 커서 일본으로 회항할 때는 희망봉을 통과해야 했다. 출처.

4. 일본의 준비[편집]

  일본 연합함대사령관 도고 헤이하치로(東鄕平八郞) 제독발트 함대가 무사히 블라디보스토크에 도착하면 전쟁에서 절대 못 이긴다는 사실을 알고 있었다. 지금까지 일본 제국이 전쟁 주도권을 쥐고 있는 것은, 초반 기습에 의한 절대적인 제해권 확보에 있었다. 만약 발트 함대가 온전히 블라디보스토크에 도착한다면 그 절대적 제해권은 단번에 무너지며, 일본 함대로는 승리를 보장할 수 없었다.

   다행히 발트 함대가 마다가스카르에 머무르고 있던 1905년 1월 뤼순 공방전의 결과로 뤼순이 함락되고 태평양 함대의 잔존 세력이 모두 무너지면서 도고는 한숨을 돌릴 수 있었다. 우선 태평양 함대와 발트 함대의 합류를 막아내어 상대해야 하는 전력을 줄일 수 있었다. 그리고 발트 함대가 오는 동안 일본 함대는 대대적인 정비와 수리를 통해 최후의 일전을 시도할 수 있었다.

   도고는 발트 함대가 블라디보스토크에 들어가기 전에 격파해야 승산이 있다고 봤다. 지구 반 바퀴를 돌아온 함대가 정상적일 리는 없다. 보급에도 문제가 있고, 선박들도 어느 정도 정비가 필요하지만 그런 문제는 블라디보스토크 입항 이전에는 해결될 수 없다. 즉, 입항 이전에 러시아 함대와 조우하면 러시아 함대는 악조건 속에서 싸울 수 밖에 없었다. 반면 일본 함대는 최상의 조건에서 교전이 가능했다.

5. 블라디보스토크로 가는 머나먼 길[편집]

   제2·3태평양 함대의 총괄 지휘권을 쥔 로제스트벤스키반퐁항을 출발하기 전에, 블라디보스토크로 가기 위한 항로를 두고 고민에 빠지게 된다. 그리고 기함 '수보로프'호에 주요 사령관과 함장을 불러모아 작전 회의를 열었다.

결국 모든 것은 블라디보스토크에 입항하느냐 이를 막느냐에 달려 있었다. 그런데 이 점에서는 도고가 불리한 상황에 있었다. 로제스트벤스키에게는 3개의 선택지가 있었고, 도고는 방어하는 입장으로서 그 3개 중 하나를 고르고 천운에 맡겨야 했다.

   그 3개는 각각 한국과 일본 사이에 있는 대한해협쓰시마 해협, 혼슈홋카이도 사이의 쓰가루 해협, 홋카이도와 사할린 사이에 있는 소야(宗谷)해협이었다. 이 3개를 모두 틀어막기에는 일본 함대의 전력이 부족했다. 함대를 분산했다가는 각개격파만 당하고 러시아 함대는 그대로 블라디보스토크에 입항할 것이 분명했다.

   소야 해협으로 들어서자는 의견과 큐슈, 시코쿠, 혼슈 연안을 공격하면서 쓰가루 해협을 통과하자는 의견도 나왔으나, 대부분의 참모진의 의견은 일거에 대한 해협 - 쓰시마 해협을 통과하는 것이였으며, 이미 함대가 지구 반바퀴 수준인 2만 8천8백km을 항해해 와서 모두가 지쳐있어 전투력이 크게 떨어져 있던 걸 알고 있던 로제스트벤스키 사령의 선택 또한 대한 해협 - 쓰시마 해협이었다. 나머지 2개의 대안에 비하면 거리가 가장 짧아 블라디보스토크에 가장 빨리 도착할 수 있었다. 캄란 출항 이후 더 이상 보급받을 수 없는 석탄 문제도 무시할 수 없었다. 당시는 증기선 시대였고, 러시아의 해외 식민지가 전무한 상태에서 석탄 보급은 함대의 운명이 걸린 문제였다. 지구 반 바퀴 도는 동안에는 동맹국인 프랑스 항구에서 석탄을 보급받았지만, 이마저도 프랑스의 다른 동맹국인 영국의 압력으로 여의치 않았다. 영국이 방해를 한 이유는 영일동맹을 맺었기 때문이기도 하지만 앞서의 어선 포격 사건의 보복 겸 해서 방해를 한 것이다. 물론 러시아도 자체적인 석탄 보급선을 운용하기는 했지만 이 역시 석탄을 지속적으로 공급받아야 했다. 대신 로제스트벤스키는 일부 함선을 다른 곳으로 보내어 상선단속 활동을 벌여 일본측의 주의를 다른 곳으로 돌리는 기만전술을 썼다.

   이로 인해 소야 해협과 대한 해협을 놓고 고심 중이던 일본 진영 참모진들은 대부분 발트 함대의 항선지를 소야 해협을 예상하고 거기를 지키기로 결정하였으나, 도고 헤이하치로 제독의 생각은 달랐고, 또한 확고했다. 그는 참모진의 결정을 뒤엎고 대한 해협(정확히는 대한제국진해)에 함대[1]를 배치하였다. 그러나 러시아 함대가 출현하지 않자, 자신이 틀렸다고 생각하고 대본영에 쓰가루 해협으로 이동하고자 한다며 허가를 요청했다. 그러나 대본영은 좀 더 기다려보자며 도고를 달랬고, 그 직후 러시아 함대의 석탄보급선이 상하이에 입항했다는 정보가 입수되었다.

   석탄보급선이 함대에서 떨어져 나왔다는 것은, 러시아 함대가 최단루트를 선택했다는 것을 의미했다. 도고 제독은 전 함대를 진해만에 집결시키고 일전을 기다렸다. 한편 5월 17일에 반퐁항을 출발하여 대한해협으로 향하던 제2태평양 함대는 전투를 피하기로 결정하고 5월 25일경엔 속력도 늦추고 무전도 끊었으며, 마침 대한 - 쓰가루 해협에 짙게 낀 안개와 야음을 틈타 모든 함정의 탐조등도 끈 채 대한 해협 통과를 시도하게 된다.

그리고 이 결정이 당시 해전 역사상 가장 큰 패배를 불러오게 되었다.

6. 전투 개시[편집]

  • 극동에 제 2 태평양 함대가 적시에 도착했을 때 함대 세력 구성[2]
함형
러시아
일본
제 1 태평양 함대[3]
제 2 태평양 함대[4]
연합함대
전함
7
8
15
8
장갑순양함
4
1
5
8
연안 방어 장갑함
-
3
3
-
장갑함 계
11
12
23
16
순양함
7
8
15
15
구축함 및 어뢰정
37
9
46
63

   5월 27일 새벽 2시 45분경, 발트 함대의 병원선인 '오룔호'[5]를 짙은 안개 속에서 밝게 켠 등불을 경순양함 시나노마루(信濃丸)[6]가 발견했다. 이를 은밀히 관측하던 시나노마루는 4시경, 대규모 러시아 함대를 확인하고 급히 본대에 타전했다.

   러시아 함대 발견 소식을 들은 도고는 즉시 전 함대 출격명령을 내렸다. 조심스레 러시아 함대를 추적하던 일본 해군 연합함대는 러시아 함대가 해협의 병목지역에 다다를 때까지 기다리다가 그 앞을 가로막았다.

오후 1시 55분, 도고는 기함 미카사에 전투개시를 알리며, Z기를 게양했다. [7]
"황국의 흥폐, 이 전투에 달려 있다. 각 대원은 한층 분발 노력하라."


해전 승리를 기념하는 군가 일본해해전(日本海海戦). 소개된 음원의 1분 47초에서 1분 56초 사이에 당시 기함 미카사의 전투개시 신호의 내용이 가사로 활용되어 있다.

파일:external/livedoor.blogimg.jp/74d96d3c.jpg
(쓰시마 해전 당시 T자 진형의 모습. 가로 방향으로 기동하는 일본 연합함대는 대부분의 군함들이 측면 방향으로, 집중적인 함포 사격을 퍼부을 수 있었지만, 세로 방향으로 기동하는 러시아 발트함대는 선두의 소수 군함들만이 함포를 쏠 수 있는 불리한 조건에서 싸워야 했음을 볼 수 있다. 요컨대 화력의 집중력, 규모 측면에서 일본 연합함대가 월등히 우세한 조건을 차지했던 것.)

   원래 도고는 어뢰정을 중심으로 하는 전법을 쓰려 했으나 해협의 거센 풍랑으로 소형함인 어뢰정의 작전이 어려웠다. 대신 도고는 그 유명한 T자 전술을 들고 나왔다. 일본 함대가 T자 진형을 취하는 동안 러시아 함대는 선제공격을 개시했으나, 러시아 함대는 주로 거리 문제로 명중탄을 얼마 내지 못했다. 더군다나 새벽 이후 일본 함대와의 꼬리잡기와 기동전 와중에 함대 진형이 3열로 바뀌면서 일본 함대가 진형 정비를 마치는 시간동안 충분한 화력집중을 하지 못했다.[8] [9] 게다가 일본 함대는 14노트로 기동하고 있었지만 러시아 함대는 11노트의 속도로 움직이고 있었고[10], 일본 함대가 6,000~7,300미터까지 측정이 가능한 최신형 영국제 측거의를 장비하고 있었던 반면 러시아 함대의 측거의는 유효 측정거리 4,000미터 정도에 불과한 구형이라 그만큼 사격능력에서 차이가 났던 것도 큰 요인이 되었다.

그리고 이는 결과적으로 러시아 함대에 지옥이 되어 돌아왔다.

   5분만에 진형정비를 마친 일본 함대의 집중포화[11]가 러시아 함대를 강타했다. 사실상 그 이후로는 일방적인 학살이었다. 기함 수브로프가 제일 심한 집중포화를 받았다.[12] 도고는 함대 지휘부부터 무력화시킨다는 계획으로 모든 화력을 기함 수바로프와 고위급 제독들이 탄 함선에 퍼부었다. 사령관 로제스트벤스키가 중상을 입고 의식을 잃었으며, 부하들이 사령관을 어뢰정으로 옮긴 이후에 기함 수브로프는 침몰했다. 동일 오후 7시 40분, 러시아 함대의 잔존함들이 도망치고 어둠이 깔린 이후에야 전투가 종결되었다.

그리고 러시아의 전함들이 의외로 쉽사리 격침당했는데, 그 이유는 일본은 일반적인 함선의 형태인 영국식 선체를 사용한 전함을 쓴 반면, 러시아는 프랑스식 텀블홈 형식의 선체를 사용한 전함을 사용했기 때문이다.[13][14]

   텀블홈 방식은 흘수선이 가장 넓고, 그 위로 갈수록 피라미드 형상으로 선체가 좁아지는 형태이며, 자연스럽게 경사장갑을 가지는 장점이 있지만, 갑판이 좁아져서 상부구조물을 높은 곳에 올려야 하므로 무게중심이 올라가며, 조금만 침수되거나 배가 흔들리면 부력을 빠르게 상실해서 침몰을 가속화하는 부작용이 있었다. 덤으로 러시아의 전함들은 장갑을 강화했기 때문에 일반적인 상비배수량에서도 설계흘수선을 1m 이상 초과하는과적상태였던데다가, 심지어 해전 직전에는 원래 용적량보다 훨씬 많은 대량의 석탄을 적재하고 있었기 때문에 흘수선이 추가로 2m 가까이 더욱 깊어지면서 현측 주장갑대는 해수면 아래로 완전히 잠기다시피 하였다. 그로 인하여 해전 당시의 러시아 전함들은 피탄시 침수가 발생하면 더 빠르게 가라앉는 비극을 맞이한 것이다. 이는 비슷한 수준으로 포탄을 집중적으로 얻어맞은 일본 해군의 기함 미카사가 전투능력을 상실하지 않고 전투 종료 후에도 자력항해가 가능했던 것을 봐도 충분히 알 수 있다.[15] 쉽게 말하자면 이 전투에서 일본 군함은 이런 모양이었던 것에 비해 러시아 군함은 이런 모양이었다. 당연히 러시아 군함이 전복되기 쉬운 구조였다.

   다음 날인 5월 28일부터 추격전이 시작되었다. 로제스트벤스키가 중상을 입은 다음 지휘권을 이양받은 네보가토프 제독은 무조건적으로 항복했고, 도고는 포로들을 정당히 잘 대우해줄 것임을 약속하며 패장을 다독였다. 이때는 진짜 포로대우를 잘했다. 치료부터 식사 제공, 우편서신, 개인소지품 소유 등등. 진짜다! 그런데 왜 40년 뒤에는… 같은 날 오후, 로제스트벤스키가 타고 있던 고속정 부이니호가 일본 함대에 발각, 정장이 항복하면서 최고사령관마저 포로가 되었다.

   그 와중에 개별적으로 추격을 뿌리치고 블라디보스토크에 간신히 도착하는데 성공한 함정은 겨우 순양함 1척과 어뢰정 2척뿐이었다.[16] 순양함 3척은 항로를 아예 반대편으로 돌려 중립국이던 미국필리핀마닐라항에 입항하였다.[17] 또한 기타 보조선박들이 중국의 상하이 등지로 도주했는데, 도망치는데 성공한 배 중 특히 유명한 것은 석탄 수송선이였던 아나디르인데, 이 배는 쓰시마 해협에서 함대 보급용으로 실어 둔 석탄을 써가며 무려 남아프리카에 위치한 프랑스마다가스카르까지 도망친 이후에 본국에 보고했다(...) 다시 말해 지구 반 바퀴를 항해해서 왔다가 또다시 지구 반 바퀴 가량을 돌아가는 불굴의 의지를 보여줬단 소리(...)

7. 전투 결과[편집]

   러시아 최강 함대로 일컬어지던 발트 함대는 총 37척(전투 직전에 빠진 석탄 보급선 제외) 가운데 전함 6척, 순양함 3척을 합해 19척(절반)이 격침되었고, 주력 전함 2척을 포함한 7척이 항복, 나포되었으며 앞서 언급했듯이 후방에 있던 순양함 3척과 기타 선박들이 도주하였다. 블라디보스토크까지 운좋게 도착한 함정은 앞서 언급한 3척뿐으로 사실상 함대 전멸의 괴멸적 피해를 입었다.[18] 기존의 태평양 함대가 입은 피해까지 생각하면 러시아 해군은 사실상 소멸한 것이다. 이제 러시아에 해군이라고 할만한 것은 흑해 함대가 유일했다. 인명피해도 커서 장교,사병을 합쳐 전사자도 4,380명에 달하고 중상자도 많았으며, 포로도 약 6천여명에 달했다.

   반면 일본은 달랑 어뢰정 3척을 잃고 117명이 전사하는 경미한 피해를 입었다. 그야말로 압승이었다. 이 전투로 인해 러일전쟁의 승기가 일본으로 완전히 넘어갔고, 일본 전역은 전승 분위기에 휩싸였다.

7.1. 일본군의 노획함선 편입[편집]

   일본군은 쓰시마 해전에서 나포한 함선들을 수리하고 영국식으로 개수하는 과정을 거쳐서 1907년경부터 자국군 선적에 편입시켰다. 전노급 전함이나 해방전함에 불과했지만 아직 일본 해군이 미국이나 영국의 수준을 따라가기 부족한 상황에서 러시아측 전함은 일본군에게 숫적으로 매우 귀중한 전력들이었다.
   1907년 전함 이와미로 재취역, 1912년 2급 해방함으로 재분류되어 제1차 세계대전 발발 직후 중국 내 독일 조차지인 칭다오 포위전에 참전하였고 전후에도 살아남아 일본군의 시베리아 출병에도 참전하여 적군을 상대로 화력을 투사했다. 1921년 1급 해방함으로 분류되어 사실상 훈련함으로 쓰이다가 워싱턴 해군 군축조약으로 인하여 1922년 퇴역하고, 1924년 표적함으로 격침되었다.
   파손정도가 덜하여 1905년에 바로 재취역하며 일본군에 편입되었다. 1910년 1급 해방함으로 분류되어 훈련함으로 전용되었고 1915년 공고와 히에이의 어뢰표적함으로 사용되며 격침되었다.
   전투 직후인 1905년 6월에 바로 재취역했다. 이와미와 함께 칭다오 포위전에 참전하였고, 그라프 쉬페 제독이 이끄는 독일 동양함대 추격전애도 잠시 참여했었다. 1921년 잠수함 지원함으로 용도변경되었다 곧 퇴역하고 기념함이 되어 후쿠오카에 정박하여 쓰시마 해전의 승전을 상징하다가 1939년 스크랩 처분되었다.
  • 애드미럴 우샤코프급 해방전함 애드미럴 세냐빈 - 미시마
   오키노시마와 함께 취역, 전후 야마구치 현의 방어를 담당하다 1차대전시 이와미, 오키노시마와 함께 칭다오 포위전에 참전했다. 오키노시마와 마찬가지로 잠수함 지원함으로 용도변경되었고 1935년 퇴역, 1936년 미야자키 앞바다에서 표적함으로 격침되었다.

이상 4척은 쓰시마 해전에서 노획된 함정들이고 뤼순 등에서 노획된 함정들도 다수 편입되었다.

8. 해전 이후[편집]

   러시아는 그토록 자부하던 최강의 발틱함대가 괴멸에 이르자 사실상 전역의 전투수행능력은 상실한 것이었고, 그 니콜라이 2세조차 사할린이 점령당하기 직전 종전을 맺으라고 각 관료들에게 재촉할 정도였으니 이를 보더라도 얼마나 피해가 막심했는지 점추어진다. 더군다나, 러시아는 프랑스와 독일에게 차관받은 재원도 전비로 모조리 소모하였음과 더불어 사실상 만주는 일본의 소유권으로 넘어갔고 기존의 주요 전략인 시베리아 철도로 물자를 수송하려는 계획은 일본의 간헐적인 게릴라로 인해 수포로 돌아간지 오래였다. 더군다나, 패색이 짙어지자 러시아엔 민중소요가 일어나 내부통제조차 안 되던 상황이었으며 러시아의 내로라하는 해군 명장들은 죽거나 포로로 사로잡혔으니 그야말로 완벽한 총체적 난국. 즉슨, 육-해 전역의 연전연패로 인해 제정러시아의 만기를 친재하는 니콜라이 2세는 전쟁을 이어나갈 의욕을 상실함과 더불어 사실상 패배를 시인하였다.

   일본 역시 전쟁을 더 지속하는 것은 원치 않았다. 신흥국으로서 무리한 전쟁 준비를 하여 일본의 경제는 파산 직전이었기 때문에 전투에서 압승을 거뒀음에도 일본은 전쟁을 계속할 여력이 없었다. 쓰시마 해전의 승리로 수송로는 지킬 수 있었지만 그 이전에 병력이 죄다 소모된 상태였으며, 만약 일본이 이 해전에서 졌다면 파국을 맞았을 것이다.

   그러나 일본이 쓰시마 해전에서 승리했던 것은 분명한 우위였고, 휴전을 유리한 위치에서 협상할 수 있다는 판단 하에 시어도어 루스벨트와 미국에게 중재를 요청한다. 그리고 러시아는 이를 받아들여 휴전 조약인 포츠머스 조약이 타결되었다. 러시아는 전쟁의 배상금 등을 무는 상황은 피했지만, 동북아시아에서의 이권을 상당부분 일본에게 양보해야 했으며 일본이 대한제국을 지배하려는 것 역시 묵인하게 된다.

   장기적 국면으로 봐서도 러시아에게는 이 해전의 결과가 쓰라린 상처가 되었으며 일본에게는 상당한 득이 되었다. 발트 함대를 잃어버린 러시아는 제1차 세계대전에서 자국의 앞마당인 발트해를 독일 해군에게 철저하게 봉쇄당해야 했다. 이는 러시아를 승계한 소련도 마찬가지여서 제2차 세계대전 당시 그 허약한 독일 해군에게 소련 함대는 제대로 된 교전을 시도해보지 못하고 잠수함에 의지해야 했다. 그리고 수상함대 전력은 1950년대쯤이나 가서야 회복되었다. 반면 일본은 동북아에서 세력을 확대했으며 국제적인 위상 역시 일신하게 된다. 전쟁 이전까지는 저평가 받던 위치였으나 전쟁 이후에는 서구 열강에 맞먹는 군사력을 지닌 신흥 열강으로 대접받기 시작하며 국제적인 발언력 역시 강해진다. 일본은 해군력의 중요성을 실감했으며 이후 제 1차 세계대전 터져 유럽이 주춤하는 동안 일본은 해군력 증강에 노력하여 상당한 성과를 본다.이후 유럽 열강은 1921년부터 맺어진 워싱턴 해군 군축조약일본을 포함시켜 일본의 해군력도 견제해야 할 필요성을 느끼는 상황까지 펼쳐지게 된다.

   한편 영국 해군의 제1 해군경[19] 존 피셔는 쓰시마 해전의 승리 요인을 전투함의 빠른 속도와 거포의 화력과 사거리에 있다고 보았고, 이것에 주안점을 둔 새로운 함정을 요구한다. 영국 해군은 1905년부터 HMS Dreadnought을 건조하여 1906년에 취역시켰으며 이는 드레드노트급이라는 새로운 형태의 전함들을 탄생시켜 기존의 전함들을 도태시키고 건함 경쟁을 새로운 국면으로 끌고 가게 된다.

9. 기타[편집]

   승자인 일본에서는 미디어로 여러 번 만들어졌다. 제국 시절 부터 시작해서, 2차 대전 이후에도 단골. 그 중 가장 유명한 것은 1969년작 일본해 대해전. 그러나 일본이 이기는 영화라서 한국에 소개된 건 없다(…). 가장 최근에 미디어된 것은 시바 료타로의 소설을 원작으로 한 NHK 대하드라마 언덕 위의 구름이다.

그 유명한 야마모토 이소로쿠 제독은 이 해전에 참전하였다가 손가락을 잃었다. 다만 전투로 인해 입은 것은 아니고 일반적인 사고였다.

국제신호기 Z(줄루) 깃발이 일본에서 승리를 기원하는 상징처럼 된 것도 이 해전의 영향이다. 해군은 물론, 민간에서도 각종 경쟁에 앞서 승리를 각오하는 의미로 사용하게 되었으며 2차대전 패전 후에도 스포츠 경기나 중요한 경쟁, 대학시험등에서 Z기를 모토로 하는 부적이나 상품이 판매되는 등 승리의 상징처럼 쓰이게 되었다.

   일본 후쿠오카현 무나가타(宗像)시에 있는 무나카타 타이샤(宗像大社)에서는 쓰시마 해협에 있는 오키노시마(沖ノ島)라는, 올림픽 공원보다 작은 섬[20]에 10일 간격으로 신관 한 명을 파견한다. 오키노시마일본서기에도 등장하는, 타고리히메(田心姬) 여신[21][22]의 신체(御神体)라고 하기 때문에 늘 이렇게 신관을 보내는데, 쓰시마 해전 당시에 오키노시마에 파견와있던 신관이 해전을 실시간으로 목격하였다. 이후 무나카타 타이샤에서는 일본이 이 해전에서 승리함이 타고리히메 여신이 가호한 덕이라고 생각했는지, 쓰시마 해전이 일어난 5월 27일에 일반인 200명이 이 섬에 찾아가 작은 축제를 거행한다. 평상시에는 이 섬 자체가 신체이며 또한 천연기념물이기 때문에, 신관과 항만 관리자를 제외하고는 보통은 섬에 발을 디딜 수 없다.
세계 4대 해전 떡밥에 늘 들어가는 단골 후보 중의 하나이기도 하다.

   이때 울릉도 연안에서 자침한 블라디미르 모노마프급 장갑순양함 드미트리 돈스코이함에 러시아군의 군자금인 금화가 잔뜩 실려 있었다는 떡밥이 있다.
2018년 7월 모 투자회사가 침몰한 돈스코이함의 선체를 해저에서 발견했다며 대규모 투자 사기를 쳤다. 증거자료나 화면은 모두 타이타닉같은 영화의 장면을 교모히 짜집기 한 것에 불과했다. 결국 아직까지 식지 않은 떡밥으로 남게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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키로프 비행선?!

   보드게임 레비아탄즈에서 일본 연합함대가 전멸한다. 왜냐고? 러시아 함대는 폴란드의 한 천재 과학자가 만든 공중전함 레비아탄으로 이루어졌기 때문에 힘 한번 써보지 못하고 전멸. 이 해전으로 조선은 러시아에게 먹히고 유럽의 열강들은 공중전함 만드는 데 광분한다.

10. 관련항목[편집]

[1] 주력 전함 4척, 순양함 8척.[2] 출처: '국가의 해양력' 제 2장 '해군의 역사 - 19세기 말과 20세기 초의 전쟁과 함대' 179p, 책세상, 세르게이 고르시코프 저, 임인수 옮김[3] 뤼순, 블라디보스토크[4] 발트 함대[5]같은 이름을 가진 전함과 구별하기 위해 '흰독수리'라는 별명이 붙여졌다. 또한 전대의 여성 간호사들이 모두 이 배에 타고 있었으며 이들의 총책임자인 간호 장교 나탈리아 시베르스는 로제스트벤스키의 3번째 여인이었다.
 파일:external/upload.wikimedia.org/Russian_hospital_ship_Orel_1890_In_later_KusuhoMaru.jpg [6] 야마토급 전함 3번함이자 항공모함이 된 시나노와 한자가 같다.[7] 참고로 국제 해사 신호기링크에서 Z기는 "예인 바람" 또는 "투망중이다"를 알리는 깃발이다!!![8] 러시아측 사료에 기초한 러일전쟁사에서는 구체적인 통계를 들어 러시아 함대의 명중율이 높은 편이라고 주장한다. 일본측 사료를 토대로 작성된 언덕위의 구름에서는 실제 참전자의 증언을 토대로 자이로스코프가 탑재되지 않은 당시의 함선으로는 알파 선회라고 알려져 있는 180도 회전중의 함선에 명중탄을 집중시키는 것은 매우 어려운 일이었기 때문에 러시아 함대의 최대 기회라 할 교전 초기에 명중탄을 내지 못한 것이라고 보고 있다.[9] T 진형이라고는 하지만 양측이 이동중이므로 앞을 가로막는 형태는 무리고, 러시아 함대가 취하는 2열 종진의 앞부분만을 일방적으로 포격거리에 두는 기동을 최초의 알파 선회 덕에 꾸준히 유지하면서 뒷부분의 러시아 함대는 사거리 밖에 놓은 상태가 되었기에 전체적으로 명중탄을 내지 못한 것이 훈련부족보다 더 큰 문제라고 보는 것이 옳다고 보인다. [10] 이 속도의 차이가 러시아 함대가 일본 함대의 화력집중을 허용하게 된 결정타가 되었다. [11] 십자포화가 되려면 반포위진형을 구축해야 하는데 이런 장면은 전체 해전 중 일본 제3전대를 1전대가 따라잡은 후반에만 잠깐 있다.[12] 가장 먼저 침몰한 것은 2전대의 전함 오슬라비야.[13] 당시는 철갑선의 기술이 발달한데 반해 함포의 철갑탄은 발달이 뒤쳐져서 하베이 강을 중요부위에 두른 전함은 실질적으로 침몰시킬 수 없다고 보았다. 바로 전년도의 황해 해전에서도 뤼순 주둔 함대는 격렬한 포격전을 치르고도 침몰한 전함은 없었다. 상부구조가 무력화되기는 했지만 기관부 자체는 무사해서 웨이하이까지 도주하는 것도 가능했으므로 러시아군 입장에서는 어떻게든 전함이 블라디보스토크까지 도망칠 수만 있다면 된다고 생각했고 이 부분이 당연히 어려우리라 생각한 해전에서 믿는 구석이었다. 하지만 선체의 문제와 함께 어뢰정을 사용하기 힘들게 만든 높은 파도가 하베이 강이 둘러지지 않은 수선하부까지 드러나는 결과를 낳아 침몰로 이어졌다고도 할 수 있다. 텀블홀 방식의 문제는 방어력 자체보다 메타센터 높이가 높아지는 결과를 낳아 선체의 복원력을 낮추는 결과를 낳았다는 점이다.[14] 엄격히 이야기한다면 이 시기까지의 영국제 군함들도 당시 선박 건조 기술의 한계로 인해 상갑판이 흘수선보다 좁았다. 다만, 그 격차가 미미했을 뿐이고 주의해서 쳐다보아야만 선체측면이 경사져 있음을 알 정도이다. 프랑스식 텀블홈은 대놓고 흘수선이 상갑판보다 훨씬 넓은 데다가 상갑판에서 흘수선으로 이르는 측면은 곡면으로 되어 있었다. 예전에는 측면이 곡선을 그리는 프랑스식 텀블홈 선체만을 텀블홈으로 인정했으나, 상갑판이 흘수선보다 대폭 좁아지는 스텔스 설계가 도입된 현대 군함들이 등장하면서 텀블홈의 개념도 변하고 있다.[15] 프랑스에서 건조하여 러시아 해군의 태평양 함대에 편입된 체자레비치도 전형적인 텀블홈 선체이지만 전해에 벌어진 황해 해전에서 발트 함대의 전함들이 입은 것과 비슷한 피격을 받았음에도 칭다오로 도피하는데 성공한 사례가 있으므로 텀블홈 설계가 약점만을 가진 설계는 아님을 짐작할 수 있다. 발트 함대의 사례는 완전히 검증되지 않은 최신기술에 사용자의 과다한 요구와 미숙한 건조역량이 결합할 경우 벌어지는 부작용에 가깝다.[16] 순양함 한 척이 더 무사히 탈출해 블라디보스토크 앞까지 도착했으나, 좌초하여 입항하지 못 했다. 그래도 황제 니콜라이 2세는 이 순양함도 귀환 함정에 포함시키고 승조원들을 치하했다.[17] 이렇게 살아남은 함정 가운데 순양함 아브로라 호는 1917년 러시아 혁명의 신호탄을 쏘아올린다. 그 공로로 상트페테르부르크에 기념함으로 보존되고 있다.[18] 당시는 라사 해전, 미서전쟁, 청일전쟁을 포함해서 주요 해전을 통해 함대가 이 정도로 침몰당한 예가 없을 정도로 함선의 방어력이 공격력을 웃돌던 시대였다. 트라팔가르 해전에서도 이 정도로 일방적인 몰살이 되지는 않았으므로 충격이 더 컸을 것이다. 이것이 함대결전사상의 강화와 드레드노트급의 등장으로 이어지는 해전의 새로운 패러다임으로 이어지는 결과를 낳았다.[19] 육군경, 해군경이란 용어는 영국의 영어로 된 관직명을 일본인이 번역하며 만든 것으로, 서구를 따라하던 일본에 있던 관직명이기도 하다. 한자로 씌어 있지만 엄연히 일본어다. 그것이 과거에 그랬고 요즘도 생각없이 잘 하듯, 그냥 한국어 한자발음대로 읽어 국어처럼 적는 바람에 한국어 문서에도 돌아다니게 되었다.[20] 무타카타시 해안으로부터 약 60 km쯤 떨어져 있다. 면적은 약 97 헥타르로 올림픽 공원의 2/3 정도밖에 되지 않는다. 위경도 좌표는 북위 34.244도, 동경 130.105도. 수많은 제사 관련 유물이 발굴되어 고고학적으로도 중요하고, 환경적으로도 중요해서 이미 1926년에 일본 천연기념물로 지정받았다.[21] 일본서기 본문에 따르면, 스사노오가 죽은 자기 어머니를 보려고 저승에 가려다가, 그 전에 자기 누나인 아마테라스를 만나고자 천상계 타카마가하라까지 올라갔다. 하지만 아마테라스는 스사노오가 천상계의 군주 자리를 빼앗으려 하지 않나 의심하여 남장을 하고 무장을 갖춘 채로 강가에서 스사노오를 맞았다. 스사노오는 누나가 자기를 믿지 못함을 알고는 내기를 통해 자기 진심을 보여주겠다면서 서로가 상대방의 물건을 씹어서 뱉어보되, 자기(스사노오)가 결백하다면 남신이 나오고 흑심이 있다면 여신이 나오리라고 하였다. 아마테라스가 스사노오의 칼을 받아 씹어서 뱉었더니 여신 셋이 나왔고, 스사노오가 아마테라스의 곡옥을 받아 씹어서 뱉었더니 남신 다섯이 나왔다. 이에 아마테라스는 스사노오의 말을 인정하고 타카마가하라에 들어올 수 있도록 허락하였다고 전한다. 하지만 일본서기의 일서에서는 본문과는 세부적인 사항이 미묘하게 다른 기록들이 여럿 실렸다.[22] 타고리히메 여신은 이때 스사노오의 검에서 나온 여신 셋 중 하나라고 전하며, 무나카타 타이샤는 이때 나온 여신 셋을 받든다. 일본서기 일서에 따르면 아마테라스가 이때 나온 세 여신에게 명하여 무나카타로 내려가 해로(海路)를 지키라 명했다고 한다. 부산-대마도-오키노시마-무나카타시가 거의 일직선상에 있기 때문에 오키노시마와 무나카타시가 해상교통의 중요한 지점이었던 역사가 반영된 이야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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러일전쟁 - 경과와 한반도에 미친 영향| 근대사 게시판

이준영 (130) | 조회 39 |추천 0 | 2005.09.10. 00:14

러일전쟁  


    1904∼05년에 만주,한국,동해에서 싸운 러시아와 일본 간의 전쟁.

1904년 2월 8일에 일본함대가 뤼순군항[旅順軍港]기습공격함으로써 시작되어, 1905년 9월 5 일에 강화를 하게 된 러시아와 일본 간의 전쟁이다. 한국과 만주(중국 동북지방)의 분할을 둘러싸고 싸운 것이지만, 그 배후에는 영일동맹(英日同盟)과 러시아-프랑스 동맹이 있었고, 제1차 세계대전의 전초전이었다. 러시아는 패배의 결과로 혁명운동이 진행되었고, 일본은 전승으로 한국의 지배권을 확립하고, 만주 진출이 확정되었으 나 미국과의 대립이 시작되었다

[배경]
   일본은 19세기 말부터 20세기 초에 걸쳐서 세계적인 규모의 제국주의 단계로 들어섰으나, 그 당시 극동의 국제적 대립관계는 중국 분할경쟁을 둘러싸고 전개되었 다. 독일과 프랑스를 끌어들여 ‘삼국간섭(三國干涉)’에 의하여 일본의 만주 진출을 저지한 러시아는, 1895년 프랑스와 공동으로 4억 프랑에 달하는 대청차관(對淸借款)을 강요하고, 96년에는 러청밀약을 맺고 일본이 중국,한국, 극동 러시아령을 침략할 경우 상호원조할 것을 약속, 만주 북부를 관통하여 블라디보스토크에 이르는 동청철도 (東淸鐵道)부설권을 획득하였다. 98년 다시 러시아는 관둥저우[關東州]의 조차권(租借權)을 획득, 같은 해 독일이  자오저우만[膠州灣]을, 영국이 주룽반도[九龍半島]와 웨이하이웨이[威海衛]를, 다음해 프랑스가 광저우만 [廣州灣]을 조차하기에 이르렀다.


   뒤늦게 미국도 99년에 문호개방선언을 발표하고 중국 분할에 가담하였다. 이러한 과정에서 극동에서는 영국 미국 대 러시아 프랑스 독일이라는 열강의 대항관계가 형성되어가고 있었 다. 그러는 동안 3국 간섭 이래 국제적 고립에 고심하고 있던 일본은 1900년 청나라의 의화단사건(義和團事件) 진압에 참가하게 되면서 드디어 열강의 대열에 끼어들었다. 그러나 일본은 아모이[厦門] 출병에 실패하고, 중국 본토에 대한 이권 획득을 달성하지 못하였다. 이러한 사태에 대처하기 위한 일본의 외교책으로서 러시아와의 타협을 모색하려는 러일협상론과 영국과 제휴하여 러시아 견제를 노리는 영일동맹론이 대립되었으나, 결국 1902 년 1월 영˙일동맹이 성립되어 러시아와의 대립이 명확해졌다. 이 때문에 그 해 10월 러시아는 의화단사건 이후 의 만주 주둔군의 제1기 철병(撤兵)을 수행하였으나, 이듬해 4월의 제2기 철병은 보류한 채 만주의 독점적 지배 는 물론, 압록강 연안에 진출하여 남하정책을 노골적으로 드러내었다. 

[원인]

   러시아의 강경한 태도에 위협을 느낀 일본 국내에서는 주전론과 반전론으로 국내 여론이 양분되는 듯하였으나, 세론의 대세는 차차 주전론으로 기울어져가고 있었다. 1903년 6월 23일 정부의 주요 각료 원로들의 어전회의(御前會議)는 한국에 대한 일본의 우선권과 만주에 대한 러시아의 우선권을 각각 인정하는 만,한교환론(滿韓交換論:사실은 한국 을 일본의 지배하에 두고, 만주에서는 러시아의 지배력 약화를 노렸음)에 의한 대(對)러시아 교섭을 결정하였다. 러시아는 이에 대해 8월 극동총독부를 설치하여 일본에 대응하였고, 그 후 여러 차례에 걸친 양국의 교섭은 성과를 거두지 못한 채 해를 넘겼다. 그 동안 일본에서는 육군을 중심으로 전쟁준비가 진척되었으나, 그것은 일본의 경제력에 비추어 군사행동을 남만주에 한정한다는 전제에 입각한 계획이었다. 

[경과]
   1904년 2월 4일 일본은 대(對)러시아 개전(開戰), 국교단절을 결정하고, 8일에는 육군 선발대가 한국의 인천에 상륙하여 서울로 향하고, 한편 뤼순의 러시아 함대를 공격함으로써 전쟁이 시작되어 10일 러일 양국으로부터 선전 포고되었다. 서전에서 일본군은 한국을 제압하고, 한국에 한일의정서(韓日議定書)를 강요해 유리한 전략체제를 확립하였다.

4월 하순 한국에 상륙, 북상한 일본 제1군은 5월 초 압록강 연안에서 러시아군과 충돌하여 격파했고, 같은 달 랴오둥반도[遼東半島]에 상륙한 제2군은 난산[南山],다롄[大連]을 점령하고 뤼순을 고립시켰다. 다시 6월에는 만주군 일본총사령부를 설치하고 15개 사단을 동원하였다. 8월 랴오양[遼陽] 부근에서 양국군이 첫번째 대규모적인 접전을 벌였고, 10월의 사허후이전투[沙河會戰鬪], 1905년 1월의 헤이거우 타이전[黑溝臺戰] 등의 전투에서 일본군은 고전 끝에 모두 승리하였다. 한편 뤼순의 러시아 함대는 블라디보스토크로 탈출을 꾀하였으나, 8월 황해에서 일본 해군의 총공격을 받고 항구 안에 봉쇄당하였다. 뤼순 공략을 맡은 노기 마레스케[乃木希典]의 제3군은 여러 차례에 걸친 203고지 공격으로 많은 손실을 보았지만 1905년 1월 드디어 공략에 성공하였다. 유럽으로부터 지원군을 얻은 크로파트킹 지휘하의 러시아군 32만과 오야마 이와오 [大山嚴]가 이끄는 일본군 25만은 3월에 펑톈[奉天:현 瀋陽]에서 회전(會戰), 러시아군이 패퇴하였으나 일본군 도 사상자가 7만에 이르는 큰 손실을 보았다. 한편 러시아는 육전(陸戰)에서의 패배를 해전에서 만회하려고 로제스트벤스키 지휘하의 발트함대를 회항시켜 5월 27,28일 대한해협에서 대해전을 전개하였으나, 도고 헤이하치로 [東鄕平八郞]가 이끄는 일본 연합함대에 격파되어 전멸하였다. 

[결과]

   펑톈회전 전후부터 러일 양국의 전쟁 수행능력은 한계에 이르렀다. 특히 러시아는 계속되는 패전으로 사기가 침체되고 그 해 1월 ‘피의 일요일’로 비롯된 군대의 반란과 농민폭동(제1차 혁명)이 일어나 혁명 진압이 급선무였다. 약 20억 엔[円] 의 전비(戰費) 가운데 12억 엔의 공채 모집에 응함으로써 일본을 지원하였던 영국 미국도 일본의 승리가 만주의 단독 점령으로 발전할 것을 두려워하였다. 그리하여 미국 프랑스는 3,4월경 러일 양국에 강화할 것을 종용하였 \고, 동해해전(東海海戰) 후 일본의 요청을 받아들인 미국 대통령 T.루스벨트의 알선으로 8월 포츠머스 강화회의가 열렸다. 일본의 전권(全權) 고무라 주타로[小村壽太郞] 외상, 러시아의 전권 비테 전 재무장관이 참가하여, 남 사할린섬의 할양(割讓)을 내용으로 한 조약이 9월 5일 조인되고, 16일 휴전이 성립되었다. 그 결과 일본은 한국지배권의 확립과 남만주 진출이 결정되고, 이것이 동시에 대륙의 권익을 꾀하는 미국과의 대립을 가져왔다. 

[한국에 미친 영향]

   러일전쟁의 결과는 포츠머스 강화회담 을사조약으로 이어져 한국은 주권을 일본에 거의 빼앗기고 망국의 운명을 맞게 되었다. 한국정부는 러일 간의 급박한 사태를 감안, 1904년 1 월 23일 ‘국외중립(局外中立)’을 선언하였으나, 일본은 이를 무시한 채 군대를 서울에 투입하고 2월 9일에는 인천 앞바다에서 러시아 함정 2척을 격파하였다. 또한, 2월 23일에는 한국정부를 강압하여 공수동맹(攻守同盟)을 전제로 한 ‘한일의정서’를 체결하였다. 일본은 이 의정서에 따라 광대한 토지를 군용지로 점령하고 통신망을 접수하였으며, 경부,경의선의 부설권, 연해의 어업권, 전국의 개간권까지 획득하였다. 한국정부는 전쟁이 일본의 승세로 기울자 같은 해 5월 18일자로 러시아와 체결하였던 일체의 조약 협정의 폐기를 선언하였다. 이에 일본은 8월 22일 ‘외국인용빙협정(外國人傭聘協定)’을 한국과 체결, 한국의 외교권을 거의 박탈하는 ‘고문정치(顧問政治)’를 성립시켰다. 전승국이 된 일본은 1905년 7월과 8월 미국과 영국으로부터 각각 한국에 대한 독점적 지배권을 확인받았다. 이어 9월의 포츠머스조약에 따라 러시아로부터 한국의 독점적 지배를 확인받음으로써 한국의 일본 식민지화는 사실로 굳어졌다. 

http://211.46.254.1/2003student/sbg/7_1.htm에서 옮김 



                                               러일전쟁 - 경과와 한반도에 미친 영향

2005.09.10                

cafe.daum.net/joucheol/587L/234    주철민의 역사공부방






러일전쟁(日俄開戰)| 조선왕조실록용어사전2

樂民(장달수) | 조회 11 |추천 0 | 2018.09.22. 00:39

정의

1904년 러시아일본대한제국에 대한 주도권과 만주의 이권을 놓고 한반도 인근에서 벌인 전쟁.
    개설
    1896년(고종 33) 고종이 러시아공사관으로 파천한 것을 전후하여 러시아일본대한제국만주에 대한 이권 및 주도권 장악을 놓고 각축을 벌였다. 양국은 청일전쟁 이후 삼국간섭, 명성황후 시해에 따른 을미사변 및 아관파천 등의 사건 때마다 대립·갈등하였다. 1897년 대한제국의 성립 직후 러시아의 여순항 점거, 1900년 6월 의화단 사건에 따른 러시아만주 점령 등은 러시아일본이 동북아시아의 패권을 놓고 전쟁을 통해 갈등을 해결할 수밖에 없음을 보여주는 배경이 되었다.
    1902년에 일본은 영일동맹을 성립시킴으로써 러시아를 외교적으로 고립시키고 전쟁으로 러시아를 동북아시아에서 제압하려는 구상을 하게 되었다. 러시아도 1903년 황제 니콜라이 2세가 극동총독부를 신설하면서 대외정책을 주도하던 재상인 비테를 비롯한 관료들을 해임하고 황제파를 전면에 내세웠다. 또한 러시아는 1900년 이후 만주에 주둔하던 군대를 철수한다는 만주환부조약(滿州還付條約)를 무시하고 1903년 병력을 증강하여 군사적 긴장을 증대시켰다. 결국 양국은 외교적 조정과 해결을 찾는 실마리를 모두 봉쇄하고 전쟁으로 향하였다.
    이런 동북아시아 국제정세의 변화에도 대한제국은 내부적으로 친러·친일파의 각축이 벌어져 능동적으로 대처할 수 없었다. 특히 전쟁터의 주요 당사국이면서도 러시아일본의 일방적인 요구를 수용할 수밖에 없는 국력의 한계를 보여주었다. 반면 일본은 러일전쟁에서 일방적인 승리를 거두었으며, 뒤이어 대한제국의 외교권을 강탈하고 내정을 간섭하는 통감부를 신설하여 대한제국을 식민화하려는 의도를 전면적으로 드러내었다.
      역사적 배경
      일본은 청일전쟁에서 승리하였으나 러시아의 외교적 간섭으로 요동반도를 반환하고 대한제국을 독점하려던 계획이 저지되었다. 대한제국 정부에서는 고종명성황후가 친러적 경향을 보이다가 명성황후일본 제국주의자들에게 살해되는 을미사변이 발생하여 반일 정서가 강해졌다. 특히 1896년 2월 친러파에 의해 고종의 아관파천이 거행되자 한반도 내에서 일본러시아와 첨예한 이권 쟁탈에 돌입하게 되었다. 예를 들어 경의선 철도와 압록강 및 울릉도 연안의 삼림 개발, 마산포월미도 조차 등은 양국의 정치·군사·경제적 이권이 충돌하는 사안이었다. 양국은 만주와 한반도의 경영 및 영토 확보를 위해 만한교환론(滿韓交換論) 등의 외교적 대안을 논의했으나 일본영국 등의 국제적 지원을 배경으로 개전으로 나아가 결국 1904년(광무 8) 2월 러시아를 선제공격하면서 전쟁이 개시되었다.
        발단
        러시아는 1903년(광무 7) 4월 압록강 하류 용암포를 점령하고 군사기지를 설치하여 조차를 요구했다. 이에 일본은 만한교환의 원칙을 내세우며 수차례 교섭을 시도했으나, 더 이상 협상 가능성이 없다고 판단하여 전쟁을 결의했다.
        일본은 1903년 6월 23일 어전회의에 러시아와의 전쟁을 상정하여 대한제국의 어느 부분도 러시아에 양보할 수 없다는 결의를 다졌다. 이후 국제적으로 러시아가 개전의 책임이 있다는 여론을 조성하면서 러시아를 고립시키는 외교를 진행했다. 결국 1904년 2월 4일 원로회의에서 개전을 결정하였으며, 동시에 2월 8일 만주 여순항의 러시아함대를 기습 공격하였고 10일에 선전포고를 했다[『고종실록』 41년 2월 23일].
          경과
          대한제국 정부는 1904년 1월 21일 국외중립을 선언하고 이를 대외적으로 통고했다[『고종실록』 40년 11월 23일]. 그러나 일본은 2월 9일 인천을 통해 다수의 병력을 한양에 진주시켰고, 2월 23일 강압적으로 한일의정서를 체결하게 하여 한반도 내에서의 군사작전에 필요한 병참과 거점 확보를 합법화하였다[『고종실록』 41년 2월 23일]. 그리고 대한제국러시아와 체결했던 조약과 러시아인에게 주었던 모든 이권을 폐기해 한반도 내에서의 러시아 세력을 일소시켰다. 또한 러시아에 주재하던 이범진 등의 외교관들에게 봉급과 경비를 지급하기 어렵다는 이유로 소환하는 조치를 취하였다[『고종실록』 41년 5월 4일]. 뒤이어 5월 18일에는 공식적으로 이범진을 소환하고 공사관을 폐쇄하도록 지시했다[『고종실록』 41년 5월 18일]. 이때의 지시로 대한제국러시아의 외교는 공식적으로 단절되었다[『고종실록』 41년 5월 18일].
          일본군은 2월 8일 여순항을 기습한 이후 인천항에 정박 중이던 러시아 전함 바리야크와 카레이츠를 격침하면서 초전의 승세를 장악했다. 일본 해군제독 도고 헤이하치로[東鄕平八郞]는 여순항을 봉쇄한 뒤 5월 5일 요동반도에 군대를 상륙시켜 인천에서 북상한 일본군 1진과 합류하도록 했다. 일본군 1진은 5월 초 압록강을 건너 구련성(九連城)과 봉황성을 함락했으며, 6월에 일본군은 15개 사단의 병력을 신설된 만주군총사령부에 소속시키고 이어 9월에 요양(遼陽)을 함락했다. 일본군은 1905년 1월에는 노기 마레스케[乃木希典]가 지휘하던 제3부대가 여순항을 함락했으며, 3월에는 봉천 전투를 승리로 이끌어 사실상 만주에서의 육상전을 종식시켰다. 당시 대한제국 정부에서는 일본군의 승전을 관전하기 위해 원수부의 장령들을 파견하였다[『고종실록』 41년 7월 7일]. 5월에는 제2태평양함대로 불리던 발틱함대 30여 척이 동해에서 도고함대의 공격을 받아 5,000여 명이 죽고 겨우 3척만이 블라디보스토크로 돌아감으로써 해전에서도 일본군이 승리하게 되었다. 대마도(對馬島) 아일해전(俄日海戰)이라고도 불리는 이 전투에서 일본이 승리함으로써 전세는 거의 일본 쪽으로 기울었다. 그러나 당시 러시아는 국내에서 혁명이 발발한 상황이어서 일본군을 전면적으로 공격하기 어려운 상황이었으며, 일본도 10억 엔이 넘는 막대한 전비를 조달하는 문제와 10여 만 이상이 죽은 군 병력의 손실로 인해 전쟁을 수행하기에는 한계에 도달해 있었다. 결국 양국은 미국의 중재로 1905년 9월 5일 뉴햄프셔의 포츠머스(Portsmouth) 해군조선소에서 강화회담을 열게 되었다. 이때 러시아일본이 한국에서 정치상, 군사상, 경제상의 특별한 이권을 가지는 것을 승인하고 일본 정부가 한국에서 필요하다고 인정하는 지도(指導), 보호(保護) 및 감리(監理)의 조치를 취하는 것에 대하여 저해하거나 간섭하지 않을 것을 약속하였다[『고종실록』 42년 9월 5일]. 결국 일본은 러일전쟁을 통해 대한제국을 식민지로 삼는 토대를 구축한 것이다.
          참고문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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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주한일본공사관기록(駐韓日本公使館記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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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국사편찬위원회, 『고종시대사』, 196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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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러시아대장성, 김병린 역, 『구한말의 사회와 경제: 열강과의 조약』, 유풍, 1983.
          • 와다 하루키, 이경희 역, 『러일전쟁과 대한제국』, 제이앤씨, 2011.
          • A. 말로제모프, 석화정 역, 『러시아의 동아시아정책』, 지식산업사, 2002.
          • 배항섭, 「朝露 수교(1884) 전후 조선인의 러시아관」, 『역사학보』194, 2007.
                                                                    러일전쟁(日俄開戰)

          2018.09.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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