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야기 러시아사 / 알렉산더 2세와 러시아 外

2019. 9. 12. 14:05우리 이웃의 역사



이야기 러시아사
 

알렉산더 2세와 러시아 

요약 테이블
시대 로마노프 시대

알렉산더 2세의 개혁

   알렉산더 2세37세의 나이로 아버지 니콜라이 1세의 뒤를 이어 러시아 왕위에 올랐다. 그는 나약하고 선량한 기질의 인물로서 정책에 관한 확고한 생각을 가지고 있지 못해 어떤 때는 아버지보다도 더 반동적일 때도 있었다. 그러나 니콜라이 1세의 군대식 통치와 크림 전쟁의 패배로 인해 형성된 여론은 알렉산더 2세에게 개혁의 칼을 들게 하였다. 때문에 농노 해방을 비롯한 그의 개혁은 '대개혁'이라는 칭송을 받으며 러시아 역사의 이정표가 되었다.


   알렉산더 2세는 타고난 개혁자는 아니었다. 하지만 시대의 흐름을 파악할 만큼 영리하였으며, 개혁 초기에는 자신의 감정을 억제하고 국가의 이익을 고려할 만큼 용기도 있었다. 그러나 개혁 후기에 들어갈수록 정책 결정에 대한 우유부단함으로 멋진 마무리는 하지 못했다. 이에 반해 여론은 극단주의적 경향이 강해졌다. 결국 정부와 진보 세력의 간격은 점점 벌어져 1865년에 이르자 개혁의 불꽃은 사그라지며 또 다른 반동의 분위기가 나타나게 되었다.


   알렉산더 2세 때 일어난 가장 중요한 사건은 1861년에 행해진 농노 제도의 폐지였다. 점진적으로 이루어진 사회개혁은 경제를 발전시켰으나, 농노 제도를 폐지하자는 여론은 농노들을 술렁거리게 했다. 정부는 이러한 동요가 대규모의 농민 반란으로 이어지지 않을까 우려하고 있었다. 처음에 그는 지주들이 솔선해서 이 문제를 해결해 주기를 바라며 기회가 있을 때마다 자신의 생각을 전했다. 하지만 귀족들은 이제까지 누려왔던 권리들을 빼앗길까 주저하는 기색이 역력했다. 귀족들의 이러한 모습은 여론을 더욱 자극했고, 마침내 알렉산더 2세는 결단을 내렸다.


   우선 귀족들에게 개혁에 관해 공개토론하도록 강요했으며, 해방된 농노에게 농토를 분배해 주어야 한다는 원칙을 선포했다. 결국 알렉산더 2세는 대다수 귀족의 반대를 무릅쓰고 몇몇 계몽 관료들과 자유주의적 여론의 지지를 받으며 농노제 폐지를 선포했다.

개혁의 가장 두드러진 특징은 법적인 측면에서 나타났다. 인간의 예속을 철폐하는 부분은 농노들에게 가장 반가운 소식이었다. 농노 해방으로 인해 4천만 명의 농노가 자유로운 몸이 되었으며, 이는 '인류 역사상 가장 위대한 법적 조처'라는 후대의 표현이 결코 과장이 아니었다.


   하지만 농노 해방이 완벽한 개혁이었다고 말할 수는 없었다. 경제적 측면에서 보면 지주들은 상실한 토지에 대해 국가로부터 보상을 받았지만, 토지를 분양 받은 농민들은 49년이라는 긴 기간 동안 토지 대금을 상환해야만 했다. 그리고 해방된 농노들에게 할당된 토지는 너무 적었으며, 상환 금액은 지나치게 부담스러웠다. 여기에 가장 치명적인 것은 토지가 개인에게 분양된 것이 아니라 농민 공동체 단위로 분양되었으며, 공동체에 속한 농민들에게 재분할되었다는 점이다. 이러한 조처는 농민들에게 납세 의무와 토지 상환금에 대해 연대책임을 지우기 위해서였다. 이러한 결정은 농민 공동체의 기능을 상쇄시켰을 뿐만 아니라 농업 발달을 저해하는 결과를 가져왔다. 하지만 농노 해방은 자체의 중대성뿐만 아니라 또 다른 개혁의 시발점이 되었다.

    • 1알렉산더 2세

      1859년에 주조된 루블화. 상트페테르부르크에서 붕괴된 알렉산더 2세의 아버지 니콜라이 1세의 동상 완공을 기념하기 위해 만들었다.


   농노 제도가 철폐됨에 따라 종래 지주가 농노에 대해 행사했던 독점적 재판권이나 치안유지에 대한 권한 등은 자동적으로 소멸되었고, 지주들이 누렸던 권위도 타격을 받았다. 그리고 지주들에게 일임되었던 지방행정1864년 젬스트보 기구가 조직되어 재편되었다. 젬스트보는 지주, 농민공동체, 도시민 세 계층이 대의원으로 모두 참여하였다.

젬스트보에서는 주민의 복지에 관한 사항만을 주로 다루었으며 일반 행정과 공공권력의 행사는 중앙에서 임명한 행정관들이 맡았다. 젬스트보에서는 기구의 기능을 발휘하기 위해 필요에 따라 세금을 부과할 수 있는 권한이 주어졌다. 젬스트보에서 이루어진 선거는 지주에게 유리하게 치러졌지만 자치의 원칙이 정식으로 인정되었고, 지방의 생활조건 향상을 위해 여러 사회계층이 협동할 수 있는 기회가 마련되었다. 젬스트보의 의석은 귀족과 관리들에게 42퍼센트, 상인과 기타 계층에게 20퍼센트, 농민에게 38퍼센트가 배정되었으며, 도로 건설, 의료, 식량, 교육 등과 같은 뒤쳐진 농촌의 환경을 개선하는데 크게 이바지했다.


   지방행정의 변혁 못지 않게 변화된 것이 법원의 개혁이었다. 구식 법원제도가 러시아의 커다란 문제점임을 감안한다면 법원제도의 개혁은 그 자체로 큰 의의임을 짐작할 수 있다. 계급 차별주의 원칙을 근거로 한 개혁 이전의 재판은 권력과 금력 앞에서 쩔쩔매는 무능력한 재판관들에 의해 수행되었다. 재판은 비공개로 행해졌으며 피고를 대변할 변호인도 없었다. 또한 재판 과정이 매우 느리고 시간도 많이 소요되었다.



농노 해방

그루지아에서 농노 해방령이 공포되고 있다. 농노 해방령의 내용이 농민의 기대에 미치지 못함을 알고 있었던 알렉산더 2세는 소동을 최소한으로 하기 위해서 해방령의 발표를 사순절까지 미루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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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864년 개혁에는 '만인에게 평등한 법'이라는 원칙이 선포되었고 계급차별도 없어졌다. 사법부는 행정부로부터 독립되고 재판관은 종신제로 임명되어 안정된 생활을 할 수 있게 되었다. 그리고 재판은 공개되었고 배심원제도가 수립되었다. 변호사협회도 수립되었다. 이로써 지방법원에서 고등법원에 이르는 전 부문이 완전히 바뀌었다. 이때부터 러시아의 법원조직은 어느 선진국과 비교해도 손색이 없을 정도가 되었다.


   주요 개혁 중 1874년에 행해진 군대의 개편 또한 거론하지 않을 수 없다. 이전까지는 징병에 대한 부담을 하층계급만이 지었으나 국민징병제가 실시되었다. 복무기한도 25년에서 6년으로 축소되었고 병사들에 대한 대우도 훨씬 나아졌다. 훈련도 인도적 원칙이 강조되었다. 특히 사병들에 대한 초등교육이 실시되었다. 이로써 새로 조직된 법원과 함께 개편된 군대는 러시아 근대화의 상징이 되었다.

개혁 이후의 변화

   알렉산더 2세의 개혁은 구체제가 세워놓았던 계급 간의 장벽을 무너뜨리는 혁신이었다. 즉 농노 제도의 폐지는 자유를 가진 자와 못 가진 자 사이의 근본적인 차별을 없앤 것이었다. 해방된 농노들은 젬스트보에서 그들의 옛 상전과 자리를 같이하였으며, 원칙적으로는 다른 계급의 대표들과 동등한 대접을 받았다. 새로 개편된 법원은 '만인에게 평등한 법'이라는 이상을 내걸었고 이를 실천하려고 노력하였다. 군대의 개혁도 국민 모두가 병역의 의무를 가진다는 민주적 원칙에 입각한 것이었다.


   하지만 농노 해방 이후에도 농민들에게 완전한 시민의 자격이 주어지지 않았다. 그들은 농민 공동체 소속으로 부동산을 자의로 처분할 수 없었으며 이주나 여행에도 제약을 받았다. 특히 다른 계급에는 없는 인두세가 계속 부과되어 그들이 요구하는 완전한 평등은 이루어지지 않았다. 바로 이 점이 지주나 농민 모두를 만족시키지 못하는 불만의 요인이 되었다. 지주 계급은 자신들의 토지를 빼앗겼다고 생각하였고, 토지의 무상분배와 신분상의 완전한 자유를 기대했던 농민들은 이러한 결과에 크게 실망했다. 이로 인해 농민들의 봉기는 끊이지 않았으며, 이를 지원하는 인텔리겐치아의 비판도 날로 과격해졌다. 그리고 경제가 발전함에 따라 점점 더 많은 기술자와 전문가가 필요하게 되었다. 교육과 계몽에 대한 사회적 요구에 따라 교사, 문인, 언론인의 수가 증가하였다. 이때부터 의사, 법률가, 대학교수, 기술자 등과 같은 계층이 영향력 있는 중산계급으로 자리 잡게 되었다.

중산계급의 참여가 두드러진 분야는 교육 부문이었다. 농노 해방은 러시아 사회 전반에 지적 분위기를 조성하였고, 젬스트보의 적극적인 참여로 인해 초등교육 분야가 새로 개척되었다. 또한 귀족층만이 누렸던 교육의 특권은 국민 각층에 부여되었으며 이제 대학이나 중등학교에서 귀족층은 소수가 되었다.


   모든 변화는 러시아 혁명의 주역이 될 인텔리겐치아에게 크게 영향을 미쳤다. 초기의 인텔리겐치아는 데카브리스트 난에서 나타나듯이 급진적 성향의 귀족 출신이었으나 이제는 전문직 종사자들과 중산층 출신들이 대거 참여하게 되었다. 이로써 교육과 진보의 길잡이는 더 이상 계몽된 귀족들만이 아니었다. 비록 귀족들보다 문화적으로는 덜 세련됐지만 사회·정치적 견해에 있어서는 급진적인 중류층 지식인들이 훨씬 앞섰다. 혁명의 중요한 세력으로 인텔리겐치아가 조직적인 반정부 세력으로 자리하게 된 것은 중산층 계급이 참여한 1860년대 이후부터였다.

새로운 혁명 운동의 출현

    인텔리겐치아 가운데에서 주류를 이루는 새로운 계급들은 새로운 사상을 가지고 있었다. 이전의 러시아 지식인 대부분이 독일에서 형이상학을 공부한 낭만주의적 이상주의자였다면 새로 나타난 지식인들의 특징은 현실의 모순을 타파하기 위해 행동하는 현실주의자들이었다. 이 때문에 허무주의가 1860년대 러시아 사회를 지배하게 되었다.


   허무주의는 무엇보다도 모든 전통적 권위에 대한 젊은이들의 반항이었다. 그 목표는 기존 관습으로부터 개인을 해방시키는 데 있었다. 즉 합리적 비판의 시험대를 통해 어긋나는 것은 어떤 것이든 간에 받아들일 수 없다는 입장이었다. 이런 허무주의 자체는 정치적 성격이 아니었지만 기존 권위에 대한 부정은 사회적 분위기를 혁명으로 몰아가고 있었다.


   진정한 혁명 운동1870년대에 소위 '인민주의'라는 이름으로 나타났다. 그들은 허무주의자들과는 달리 개인의 해방이 아닌 사회 문제에 대한 해결책을 찾는 데 관심이 있었다. 그들은 귀족을 비롯한 지식인 계급의 '도덕적 의무감'을 강조했다. 즉 수백 년 동안 러시아 지식층은 농민들의 고생을 밑거름으로 살아왔고 발전했기 때문에 이제는 그 빚을 갚을 때가 왔다는 것이다. 그들은 '인민 속으로(V. narod)'를 외치며 농촌으로 가서 문화적·사회적 진보의 길로 인민들을 인도해야 한다는 새로운 운동을 시도했다.

   급기야 1870년대 초기에는 남녀 지식층 수백 명이 농촌으로 내려가서 이러한 운동을 시작했다. 인민주의를 과학적으로 정립한 사람은 라브로프였지만 선동적인 혁명 구호를 만든 것은 바쿠닌이었다. 그는 농민공동체에서 생활한 러시아 농민들은 타고난 사회주의자이며 혁명가이기 때문에 이들에게 혁명 이념을 전파하여 혁명을 이루는 것은 매우 쉬운 일이라고 생각하였다. 그러나 그들은 준비가 너무나 부족하였다. 농민 반란을 선동할 능력이 있다고 자신한 젊은이들은 정작 농민들을 이해시키지 못하고 경찰의 주의만 끄는 결과를 가져왔다.


   20세도 채 안 된 미숙한 젊은이들로 구성된 인민주의 운동을 재미있는 각도에서 본다면 소박한 십자군 운동이었다고 말할 수 있다. 그들은 농민들에 대한 열정에도 경찰들의 감시와 그들이 우상처럼 여기던 농민들에 의해 고발되기까지 했다. 이러한 사실은 그들의 이론적 기반을 이루고 있던 인민주의라는 것이 순전히 개념의 산물일 뿐 농민들의 처지와 요구를 반영하지 못했음을 입증하는 것이었다. 1874년에 나타난 통계를 보면 농촌으로 달려갔던 젊은이들 중 770명이 체포되어 215명이 투옥되었다.


   상황이 이렇게 흐르자 젊은이들 가운데는 그들의 전략을 바꾸는 행동주의자들이 나오기 시작했다. 1876년에는 '토지와 자유'라는 이름의 비밀결사단이 조직되었다. 그들은 인민의 이상을 표명하는 민중 봉기를 꿈꾸었으나 농촌과 도시 어느 한 쪽에서도 성공을 거두지 못했다. 그해 가을, '토지와 자유'는 분열되어 극단적인 폭력주의를 지향하는 '인민의 의지'단플레하노프의 지도하에 토지의 균등한 분배를 목표로 하는 '평등한 재분배'단으로 나뉘어졌다.


   그 후 러시아에서는 암살, 폭발사건이 계속해서 일어났다. 그 신호가 된 것이 베라자술리치라는 여성 테러리스트가 페테르부르크의 총경인 트레포프를 저격한 사건이었다. 그리고 1878년 4월에는 솔로비요프 황제를 저격하려 했으나 미수에 그치는 사건이 발생했다. 1880년 2월에는 칼투린이라는 노동자가 동궁 식당에서 폭탄 테러를 일으켰다. 이러한 요인 암살사건에 대해서는 경찰도 속수무책이었으며 다만 충성스러운 국민들에게 신고만을 호소할 뿐이었다. 그러나 이러한 험악한 분위기 속에서도 지방 젬스트보를 비롯한 모든 여론이 더 다양하고 확실한 개혁을 바라는 쪽으로 모아지고 있었다.


   동궁 식당 폭파 사건 이후 정부는 긴장하지 않을 수 없었다. 그리하여 로리스-멜리코프가 주재하는 최고위원회가 설치되었고 로리스-멜리코프에게는 일종의 독재권이 주어졌다. 그의 계획은 자유주의자들의 요구를 어느 정도 들어주어 과격한 혁명주의자들을 고립시킨다는 것이었다. 그리고 악화된 여론을 향해 전국회의를 소집하는 등 상당한 개혁의 의지가 있음을 보여주었다. 실행만 된다면 로리스-멜리코프가 마련한 안은 헌법이 제정될 수 있는 길을 터놓은 것이 될 수 있었다. 하지만 사태는 엉뚱한 방향으로 전개되었다. 1881년 3월 13일, 로리스-멜리코프의 안에 서명하던 바로 그날 알렉산더 2세소피아 페로프스카야가 이끄는 혁명 폭도들에 의해 살해당하고 말았다.



테러리스트에 의한 열차 폭파 사건

1879년 11월 19일에 모스크바에서 테러리스트에 의해 열차가 폭파되었다. 그 사건은 알렉산더 2세를 노리고 벌어진 일이었으나 황제는 크레믈린에 있어 난을 피할 수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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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어느 시대보다도 알렉산더 2세 치하에서는 개혁의 움직임이 뚜렷하였다. 그럼에도 암살, 폭탄테러 등이 난무했던 이유는 어디서 찾아야 하는가.

당시 러시아 사회주의자들 대부분이 가졌던 특징 중의 하나는 의회민주주의에 대한 전반적인 불신이었다. 그것을 발전시키는 과정은 아무런 가치가 없다고 생각했다. 그들이 원했던 것은 즉각적인 사회혁명이었기 때문에 장기간에 걸친 점진적인 사회주의로의 접근은 참을 수 없었던 것이다. 이런 이유로 서구의 사회주의가 노동조합이나 노동당 같은 합법적인 기구를 통하여 대중 운동과 손을 잡는 방향으로 나아가기 시작할 때 러시아의 사회주의자들은 혁명적 음모라는 비밀결사와 같은 위태로운 길을 택할 수밖에 없었다.

더욱이 차르로 상징되는 전제 왕정은 차르만 암살되면 전제 체제가 무너질 것이라는 단순한 생각들을 부추기는 원인으로 작용하였다. 인텔리겐치아의 성향이 급진적 폭력주의로 나아가게 된 데에는 정부의 태도에도 많은 책임이 있었다.


   먼저 농노 제도의 폐지라는 어려운 숙제를 해결하면서 알렉산더 2세는 너무 많은 힘을 소모하였다. 또한 농노 제도의 철폐와 다른 개혁안들은 새로운 질서를 수용할 태도를 전혀 보이지 않았으며 귀족을 중심으로 하는 반동 세력의 거센 반발에 부딪혔다. 주관이 확실하지 못했던 황제는 자유주의 집단과 보수 귀족 집단 사이에서 끊임없이 방황할 수밖에 없었다. 특히 1863년 폴란드 반란이나 1866년 황제 암살 시도와 같은 사건이 계속해서 일어나자 개혁을 통한 회유책보다는 강경책만이 이를 막을 수 있다는 보수 귀족들의 입장을 강화시켜 주었다.


   그들은 급진주의와 대결하기 위해서는 이미 이행되고 있는 개혁마저도 중단해야 한다고 알렉산더 2세를 설득했다. 급기야 검열 제도가 다시 강화되었고, 교육의 자유도 잠시 제한되었다. 언론과 정치사범들은 배심원제 판결에서 제외되었다. 개혁의 상징인 젬스트보 또한 엄격한 정부의 규제를 받게 되었으며, 지방행정관들이 젬스트보 활동에 끊임없이 간섭하였다. 그러나 이런 보수반동주의자들의 행동은 개혁으로 발전하는 러시아를 불행한 상황으로 몰아버렸다. 즉 그들은 혁명가들의 급진적인 요구와 입헌주의자들의 온건한 요구를 구별하지 못함으로써 혁명을 좌절시킬 수 있는 현명한 정책을 휴지조각처럼 날려버리고 말았다.

성공적인 대외 정책

   당시 상황에서 알렉산더 2세는 훌륭한 대외 정책을 펼친 인물로 평가받고 있다. 크림 전쟁 이후 체결된 1856년의 파리 조약으로 인해 러시아는 터키 지배 하에 있는 기독교도에 대한 보호권을 유럽국가로 넘겨주게 되었다. 그리고 흑해의 러시아 함대는 철수하였고 그 일대는 다뉴브 강 유역의 공국들에게 맡겨졌다. 그러나 알렉산더 2세가 등극한 후 고르차코프 공작의 활약으로 1863년의 폴란드 봉기를 계기로 패권을 노리는 나폴레옹 3세의 야심을 무력화시켰다. 또한 독·프 전쟁을 틈타 러시아의 해군 병기청 건립을 금지한 파리 조약의 조항을 폐기하고, 1870년부터는 흑해에 함대를 주둔시켰다.



산 스테파노 조약

1878년 3월 3일, 상트스테파노에서 러시아와 터키 간에 종전 교섭이 이루어졌다. 이 조약에 따라 러시아는 발칸 반도 및 지중해까지 그 세력을 뻗칠 수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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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872년에는 독일, 오스트리아, 러시아의 황제들이 베를린에서 3제 동맹을 결성하여 비밀 군사 협정을 체결하였다. 1875년, 독일이 프랑스를 침공할 것이라는 근거 없는 소문이 나돌며 비스마르크를 당혹스럽게 했다. 이 틈을 이용하여 고르차코프는 프랑스와 유럽 평화의 수호자 역할을 자처하고 나서며 러시아의 위력을 보여주었다.

1876년에는 불가리아가 터키의 세력에서 벗어나기 위해 독립 운동을 일으켰다. 러시아는 열강들에게 공동보조를 취하자고 제의하였으나 영국의 디즈레일리 수상이 비밀리에 터키를 지원하고 있다는 사실이 알려지자 1877년 알렉산더 2세는 터키에 선전포고를 하였다. 이후 러시아 군대가 콘스탄티노플 성벽 근처까지 진격하자 산 스테파노에서 러시아와 불가리아에게 매우 유리한 조건의 조약을 체결함으로써 일단락되었다.

그러나 무엇보다도 알렉산더 2세의 대외적인 업적은 아시아에서 영토를 획득한 사실이다. 1864년이래 러시아의 장군들은 시베리아 변경 지대를 침략하는 키르키즈인과 투르크멘인에 대해 소탕전을 전개하였다. 이를 계기로 러시아는 히바 사막을 횡단하여 카스피 해까지 영토를 넓혔으며 아프가니스탄과 중국령인 투르케스탄에 이르렀다. 극동지방에서는 1858년에 맺어진 아이훈 조약에 따라 흑룡강에서 우수리 강을 따라 태평양 해안에 이르는 지역을 중국으로부터 획득하고 블라디보스토크에 해군 기지를 건설하였다. 1865년에는 쿠릴 열도 중 두 개의 섬을 일본에 양도하는 대신 사할린을 획득했다. 1867년에는 러시아가 아직까지도 최대의 실수라고 생각하는 알래스카를 미국에 양도하는 사건이 일어났는데 그 가격은 불과 720만 달러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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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경묵 집필자 소개

서울에서 태어나 건국대학교에서 사학을 공부하였고, 동대학원에서 서양사를 전공했다. 논문에는 <볼셰비키 집권 원인에 관한 고찰>, 저서로는 <이야기 러시아사> 등이 있다.

출처

이야기 러시아사
 이야기 러시아사 | 저자김경묵 | cp명청아출판사 도서 소개

러시아는 동양과 서양에 걸친 광활한 영토를 지배하고 있으며, 유럽과 아시아의 전통 문화를 동시에 흡수하여 특유의 정서와 사상, 전통과 문화를 발전시킨 나라이다. 고대로부터 러시아의 골격이 갖추어지는 키예프 시대, 혁명으로 인해 비참한 최후를 맞는 로마노프 왕조까지 사건을 중심으로 살펴보고, 혁명의 역동적인 현장, 현재까지 계속되는 권력의 암투에 대해 인물을 통해 접근해본다. 러시아 역사의 전반적인 흐름을 알아보자.접기






이야기 러시아사
 

니콜라이 1세의 치세 

요약 테이블
시대 로마노프 시대

결단력의 소유자 니콜라이 1세

개인으로서나 지배자로서도 니콜라이 1세는 그의 형 알렉산더 1세와는 전혀 달랐다. 알렉산더 1세가 복잡한 감정의 소유자로 우유부단했던 반면 니콜라이 1세는 결단력과 굳은 의지를 지닌 강한 성격의 소유자였다. 그러나 그가 즉위할 때 벌어진 데카브리스트 난은 그를 항상 불안에 떨게 했으며 이로 인해 강권과 억압정치를 펼치게 했다.

니콜라이 1세에 관한 기록을 살펴보면 건장한 체격과 수려한 용모에서 풍겨 나오는 귀족적인 위엄은 다른 사람을 항상 압도했다고 한다. 이를 뒷받침하듯 '유럽에서 가장 잘생긴 남자', '권위에 찬 엄숙한 사람' 등과 같은 전제군주의 분위기를 부각시켜 주는 수식어가 꼬리표처럼 붙어 다녔다. 이와 같은 그의 인상처럼 그는 군대의 훈련이나 병사들의 복장 상태까지 관심을 가졌다. 실제로 황제가 된 후 군인들의 제복을 정비해 줄 것을 명령했으며 심지어 단추의 수까지 지정해 주는 세심함을 보였다.

그의 또 다른 관심사는 토목건축이었다. 특히 방어벽 구축은 그가 평생 열정을 기울인 사업이었다. 그는 어려서부터 집짓는 놀이를 즐겼다. 그때마다 반드시 대문 앞에 포를 배치할 정도로 방어에 관심을 가졌다. 후에 그는 축성을 전공하여 공병대장이 되었고, 알렉산더 1세가 통치할 때에는 군사고문으로 활약했다. 이러한 과정으로 그는 황제가 되어서도 전 국토를 난공불락의 요새로 만드는 데 전력을 다하였다. 물론 이런 상황들은 그가 살았던 시대 배경을 살펴보면 쉽게 이해할 수 있다.

니콜라이 1세는 1796년에 태어났으며, 형인 알렉산더 1세보다 열아홉 살 아래였다. 알렉산더 1세가 성장했을 당시에는 후기 계몽주의의 영향으로 온화한 사회분위기가 형성되었으나 니콜라이 1세 때에는 나폴레옹과의 전쟁, 내란 등이 발생하여 불안했다. 게다가 즉위식 때 일어난 반란으로 인해 군주체제가 무너지지 않을까 하며 항상 노심초사했다. 이러한 본능적인 공포는 그를 공격적인 성향으로 바꾸어 놓았다. 심리학자들은 그 두려움의 외적 표현이 용기, 장중함, 위엄과 같은 모습으로 나타났다고 분석한다.

결국 과도한 강경책은 군부에 대한 의존으로 연결되었다. 특히 프로이센 공주와 결혼하면서 프로이센의 군국주의 영향을 많이 받았다. 그의 치세 말기에는 온통 군인들로 채워져 있었으며 민간인의 모습은 찾아볼 수가 없었다. 정치는 대부분 장군들로 구성된 특사에 의존했으며 그들은 군주의 뜻을 즉각 실행하는 특별임무를 수행하며 러시아 전 지역에 파견되었다. 니콜라이는 그들을 자신의 수족같이 생각했으나 시간이 흐를수록 행정적 공백으로 인한 부패와 혼란이 가중되었다.

니콜라이 1세의 치세 기간 동안 급격히 성장한 행정기구 중 대표적인 것이 황제원이다. 이 기구는 황제와 관련된 문제들을 효율적으로 처리하고, 황제의 명령을 집행·감독하기 위해 만들어졌다. 치세 말기까지 6개의 부서로 성장한 황제원의 모든 부서는 정식 채널을 무시하고 니콜라이 1세의 개인적 정책을 수행하는 주요 수단으로 황제에게 봉사했다.

특히 니콜라이 1세의 통치를 상징하는 황제원의 3부인 정치 경찰은 정부 전복과 혁명 방지를 위해 신하들을 통제하고 국민들의 사생활까지 감시하는 주요 기관으로 큰 신임을 받았다. 이로 인해 니콜라이 1세 치하의 러시아는 점점 더 어두워져만 갔다. 한 역사가는 이 시기를 일컬어 '검은 반동의 시대'라고 했다. 그리고 사회 구조의 근간이었던 농노 제도는 언제 터질지 모르는 시한폭탄처럼 위험한 모습으로 다가오고 있었다. 1842년 니콜라이 1세가 국무협의회에서 연설한 내용에는 이런 면이 잘 나타나 있다.

"현재의 농노제는 모든 사람에게 악이라는 점에서 의심의 여지가 없다. 그러나 지금 그 문제를 건드린다면 보다 커다란 재앙이 될 것이다."

니콜라이는 통치 기간 중에 발생할지도 모를 두 가지의 위험요소를 항상 걱정했다. 그 첫째는 농노제를 지속하다가는 커다란 인민봉기가 야기될 것이며, 둘째는 농노들을 해방시키면 귀족 계급은 헌법을 요구할 것이라는 두려움이었다. 결국 정부는 미미하나마 농노들을 위한 몇 가지 법률을 만들었으나 근본적인 개혁안을 마련할 수 없었다. 더욱이 절대군주를 부정하는 1848년 유럽혁명 이후 니콜라이 1세는 완전히 반동적 성격을 굳혔다. 특히 대내적 통제를 한층 강화하여 많은 지식인을 투옥하고 교육에 대한 탄압을 시작했다. '러시아정교, 전제 정치, 애국심'을 표방한 그의 교육방침은 황제의 절대권력을 굳히는 것에 목표를 두었다. 또한 자국민의 해외여행을 엄격히 통제함으로써 자유주의의 통로를 막아 버렸다. 이러한 일련의 조치는 교사와 학생들을 곤혹스럽게 만들었다.

의과대학을 제외한 모든 대학교의 정원은 각각 300명으로 축소되었으며 군사교육은 강화되었다. 헌법과 철학은 교과과목에서 제외되었으며, 논리학과 심리학은 신학교수들에 의해서만 강의가 허용되었다. 이와 함께 나날이 강화된 검열 제도는 검열관에 대한 검열을 위해서 새로운 기관이 설립되기까지 했다. 그리고 물리교과서에서 '자연의 힘'을 삭제하고, 수학책에 들어 있는 생략부호의 숨겨진 의미를 조사하였으며, 로마 황제들을 기술하는 내용에서 '죽임을 당했다'를 '사망했다'로 바꾸게 하는 등 전제주의의 황제와 관련된 부분에 과민한 반응을 보였다.

그는 국내 자유주의의 탄압뿐만 아니라 국외 혁명 운동 탄압에도 적극적으로 개입했다. 그리고 러시아의 전제 체제를 유지하는 것이 자신의 신성한 의무라고 여겼으며 유럽의 기존 질서를 유지하고 방어해야 한다고 굳게 믿었다. 이 때문에 니콜라이 1세는 '유럽의 헌병' 이라는 조롱도 받았다. 하지만 러시아의 영토를 넓히고 강대국으로서의 면모를 갖추는데 그의 외교 정책이 이바지했음은 인정하지 않을 수 없다.

크림 전쟁

크림 전쟁은 한마디로 유럽의 질서를 자기 손으로 지키려던 니콜라이 1세의 과도한 욕심이 유럽의 열강들과 맞부딪친 사건이었다. 니콜라이 1세는 자유가 어느 정도 보장된 유럽 세계에 대해 자신의 의지를 관철시키려고 했다. 1848년에 발표된 그의 선언문을 보면 '복종하라 신민이여, 신께서 짐과 함께 하시나니'라는 말로 끝을 맺고 있다. 그는 유럽을 지킬 사람은 오직 자신뿐이라고 착각하고 헝가리 민족이 오스트리아의 합스부르크 제국의 지배에서 벗어나기 위해 봉기하자 러시아 군대를 보내어 이를 진압했다. 또한 터키에 거주하는 기독교도들에 대한 보호권을 주장하였지만 유럽의 열강들은 그를 인정하지 않았다.

크림 전쟁

1855년 5월, 영·프 연합군이 크림 반도 동부의 케르치에 상륙하여, 세바스토폴리 요새로 향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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니콜라이 1세는 러시아에게 대적하는 세력이 프랑스와 영국뿐만 아니라 헝가리 봉기를 진압해 준 은혜를 잊어버린 오스트리아까지 포함되어 있다는 사실을 뒤늦게 알게 되었다. 하지만 주변국의 입장에서는 자유주의와 민족주의 운동을 사사건건 방해하는 러시아가 부담스웠다. 이런 분위기에서 서구의 자유주의자들은 크림 전쟁이 전제 왕정에 대항하여 자유와 문명을 지키는 성전과도 같은 의미를 갖게 되었다.

1853년 10월, 터키군이 다뉴브 강 유역에 주둔하고 있는 러시아 군대를 공격함으로써 이 전쟁은 시작되었다. 이어 11월 초에 러시아는 터키에 선전포고를 하였다. 다음 해에 영국과 프랑스가 터키와 손을 잡았고, 독일과 오스트리아는 외교적 압력을 가해왔다. 결국 니콜라이 1세는 유럽과 맞서 싸우는 꼴이 되었다.

이 전쟁은 유럽의 강대국들이 참전했음에도 전선은 좁게 형성되었다. 터키의 동맹국들은 바다를 장악하고 러시아 해안에서 소규모 공격을 감행하였다. 그리고 결정적인 일격을 가하기 위해 1854년 9월 크림 반도에 상륙했다. 동맹국들은 크림의 세바스토폴리 해군 기지를 장악함으로써 전쟁에 유리한 고지를 점령하려 했다. 크림을 제외하면 전투는 카프카즈에서만 계속 되었으며, 이곳에서는 러시아가 터키의 중요 거점인 카르스를 점령하기까지 했다.

11개월 반을 견뎌낸 러시아군의 세바스토폴리의 방어전은 역사에 기록될 만한 것이었다. 특히 수비대장인 코르닐로프 제독은 주민들과 병사들을 격려해 가며 무수히 쏟아지는 영·프 연합군의 포탄을 막아냈다. 기록에 의하면 요새 안으로 쏜 포탄이 6만3천 발에 달했다고 한다. 치열한 전투 중에 코르닐로프가 파편에 맞아 숨을 거두자 병사들로부터 추앙받던 나히모프가 수비대장이 되어 목숨을 건 방어전을 이어 나갔다. 나히모프는 게릴라전은 물론 적진 깊숙이 땅굴을 파고 들어가 러시아군을 괴롭혔던 대포를 일부 파괴했다.

그러나 날이 갈수록 전세는 러시아에 불리해졌고 열악한 도로 사정과 거친 날씨는 보급품 공급을 지연시켰다. 러시아군은 매일 2천 명이 넘는 병사를 잃는 악조건 속에서도 요새를 지켰다. 하지만 나히모프마저 죽게 되자 러시아는 함정과 요새들을 폭파시키고 후퇴했다. 이로써 영·프 연합군은 7만 명이 넘는 사상자를 내면서 폐허가 된 세바스토폴리를 점령할 수 있었다. 크림 전쟁의 참혹성과 러시아 국민의 용맹성, 애국심은 포병장교로 참전했던 톨스토이의 《세바스토폴리 이야기》에 자세히 묘사되어 있다.

이 전쟁은 실제 전투보다 발진티푸스와 기타 전염병에 의해서 많은 사상자가 발생했기 때문에 더욱 비극적이었다. 백의의 천사로 일컬어지는 나이팅게일이 새로운 형태의 야전병원을 설립하여 간호를 근대화시키려고 했던 곳도 바로 크림 전쟁터에서였다. 여하튼 이 전쟁은 자국 내에서 벌어진 전쟁이었음에도 러시아는 패배할 수밖에 없었다. 그 결과 러시아는 군사·정치적으로 큰 타격을 입게 되었으며, 니콜라이 1세는 더 이상 국민들에게 무조건적인 복종을 요구할 수 없게 되었다. 뿐만 아니라 유럽 열강에 비해 뒤진 러시아의 경제력과 국가 운영의 문제점은 국민들의 불만 대상이 되었다. 이러한 사회적 분위기가 계속 되자 니콜라이 1세는 그의 통치체제가 한계에 이르렀음을 느끼며 1855년 2월 페테르부르크에서 사망했다. 그동안 누적되어 온 복잡한 문제들은 그의 아들인 알렉산더 2세에게 넘겨졌다.

지식인들의 반항

니콜라이 1세의 숨막히는 정치가 계속되자 이에 반대하며 보다 나은 러시아를 건설하려는 지식인층이 나타나기 시작했다. 이른바 인텔리겐치아라고 불리는 지식 계급층은 무지한 러시아 국민을 계몽하고 국가를 개조하려는 민족적 사명감을 가지고 있었다.

모든 일에 비판적 사고를 가진 젊은 지식인들은 대학가, 특히 모스크바 대학을 중심으로 활동하기 시작했다. 이들은 정치가도 아니었으며, 영국이나 프랑스의 지식인처럼 자유주의자도 아니었다. 이들은 대부분 부유한 귀족의 자제들로서 자신들의 풍족함을 위해 많은 농노들이 피와 땀을 흘리고 있다는 사실에 괴로워했다. 그 결과 러시아 자체에서 개선 방향을 찾자는 슬라브주의와 유럽의 자유주의를 모방하자는 서구화주의로 갈라지게 되었다.

이들 가운데 짜리즘에 가장 충격적인 도전장을 낸 사람은 차다예프(1794~1856)였다. 그는 1836년 《망원경》이라는 잡지에 러시아의 전제 체제를 부정하는 〈역사철학에 관한 서한〉이라는 글을 실었지만 니콜라이 1세는 이를 용납하지 않았다. 그는 먼저 출판을 허용한 모스크바 대학의 총장을 해임하고, 《망원경》을 폐간했다. 그리고 차다예프를 정신병자로 몰아 매일 의사의 진단을 받게 했으며, 그 글에 대한 일체의 논평을 금지했다.

차다예프는 부유한 귀족의 아들로 태어나 1809년 모스크바대학에 입학하였으며, 1812년에는 기마 장교로 나폴레옹 전쟁에 참전했다. 이때 그는 유럽의 자유주의 사상에 영향을 받았으며, 그 후 유럽 전역을 여행하며 많은 사상을 접하게 되었다. 1826년 모스크바로 돌아와 은거하며 서간문 형식인 〈역사철학에 관한 서한〉을 당시 지식인과 귀족의 언어인 프랑스어로 1829년에 집필했다. 그해 '제 1서한'부터 '제 8서한'까지 집필을 마쳤으며 얼마 동안 원고 상태로 여러 사람들에게 읽혀졌다. 그러다가 1836년 '제 1서한'이 러시아어로 번역되었으나 이것이 그의 최초이자 마지막 출판물이 되었다.

차다예프는 다른 지식인들과 마찬가지로 러시아와 유럽 사이에는 근본적인 문화적 차이가 있음을 인정했다. 그러나 이런 차이는 니콜라이 1세를 비롯한 황실에서 주장하듯이 러시아의 독특한 우수성 때문이 아니라 오히려 낙후성 때문에 생긴 것이라고 보았다. 그리고 러시아의 비극적 상황은 가톨릭 교회에서 이탈된 러시아정교회 때문이라고 생각했다. 그에게 유럽이란 가톨릭 세계와 일치된 것이었으며, 유럽의 모든 문화적 유산이나 전통은 가톨릭에서 비롯된 것이었다. 따라서 가톨릭 세계인 유럽 사회에서는 인간의 논리적 사고 능력, 도덕적인 존재로서의 의무와 정의, 권리와 질서 등이 일상화되었지만, 러시아는 가톨릭 세계에서 벗어났기 때문에 후진성을 면치 못했다고 여겼다. 그가 이렇게 생각하는 가장 큰 이유는 유럽인들이 당연하게 여기는 개인의 존엄성이나 자유와 같은 개념들이 러시아에는 전혀 나타나지 않았기 때문이다.

"다른 민족들의 역사는 해방의 역사이다. 그러나 러시아의 역사는 농노제에 의한 전제 체제의 역사이다."

이처럼 차다예프가 러시아를 가혹하게 비판한 것은 현실에 대한 정확한 평가만이 올바른 미래를 만들 수 있다고 여겼기 때문이다.

개혁을 위한 지식인들의 논쟁

차다예프의 글은 지식인 사회에서 격렬한 논쟁을 불러 일으켰다. 우선 그들은 러시아가 유럽 열강에 비해 뒤떨어져 있음을 통감했다. 그러나 어디에서부터 무엇이 어떻게 잘못되었으며, 바로 잡을 방법이 무엇인가에 대해서는 주장이 서로 엇갈렸다. 즉 러시아의 문화와 전통은 유럽과 본질적으로 다르며 잠재적으로는 유럽보다 훨씬 우수하다고 주장하는 슬라브주의와 서구로부터의 이탈이 러시아를 후퇴시켰다는 서구화주의로 나눠지게 되었다.

서구화주의의 시작은 1831년 모스크바에서 조직된 한 철학모임으로 거슬러 올라간다. 독일 철학을 연구하기 위해 스탄케비치가 만든 이른바 '스탄케비치 서클'이 그것이다. 벨린스키, 바쿠닌, 헤르첸 등이 주축이 된 이 모임은 주로 쉘링, 피히테, 그리고 후에는 헤겔 철학에 많은 관심을 가졌다. 후에 헤르첸은 다른 모임을 만들어 독일의 관념론보다는 프랑스의 생 시몽 같은 사회주의자들에게 관심을 가졌다.

이 모임은 공통된 분야에 관심을 갖고 있던 사람들의 단순한 토론 집회에 지나지 않았다. 이후 1845년 비밀결사대와 같은 성격을 지닌 최초의 모임이 페트라셰프스키에 의해 조직되었다. 페트라셰프스키 서클은 관념적인 독일 철학보다는 구체적인 행동 강령에 대해 연구하기 시작했다. 도스토예프스키도 이 모임의 회원이었다.

서구화주의자들의 주장과 사상은 한마디로 규정하기는 어렵다. 하지만 이들이 서구의 모든 것을 숭배하거나 러시아적인 것을 무조건 배격한 것은 아니었다. 이들은 러시아가 유럽의 전통 속에서 성장했음에도 13세기 중엽부터 시작된 몽골, 타타르족의 지배로 인해 유럽과 차단되어 후진 사회가 된 것이라고 주장했다. 차다예프, 벨린스키, 헤르첸 등과 같은 모든 서구화주의자들은 표트르 대제의 서구화 정책이 후진 러시아를 다른 유럽국가 수준으로 끌어올리려는 시도였지만 당시 성숙되지 않은 사회적 분위기가 니콜라이 전제 정치를 낳게 했다며 개탄했다. 이들의 주장은 토론 수준에 머물러 있었으나 이들에 대한 정부의 야만적인 고문과 사건 조작이 알려지면서 니콜라이 체제에 대한 반감은 신념으로 굳어졌다. 이들의 생각은 점차 정치적인 행동과 혁명으로 바뀌기 시작했다.

이들 중 훗날 러시아 혁명에 커다란 영향을 끼쳤던 벨린스키, 헤르첸, 바쿠닌의 생애와 사상을 살펴보자.

벨린스키

벨린스키는 1811년 러시아의 영토였던 스비보르그 군항에서 해군 군의관의 아들로 태어났다. 그의 나이 5살 때 아버지가 퇴역하자 할아버지가 신부로 있던 모스크바 동남쪽 쳄바르라는 시골로 이사를 갔다. 이곳에서의 생활은 그에게는 매우 따분했으며 잦은 말썽으로 인하여 고등학교를 퇴학당하기도 했다. 그 후 1820년 모스크바 대학에 입학했으나 3년 뒤에 농노 제도를 비판한 희곡을 썼다는 이유로 쫓겨났다. 그는 1834년 본격적인 저널리즘에 뛰어들어 1849년 37세의 젊은 나이로 요절할 때까지 뛰어난 문예비평 활동을 했다. 이를 통해 그는 상당한 명성을 얻었지만 가난과 과로로 결핵을 얻어 죽었다. 벨린스키는 차르의 전제 체제와 농노제를 극도로 증오했다. 그는 이 체제가 깨지지 않는다면 인간성이 깨질 수밖에 없다고 주장했다. 짜리즘 타도를 공공연히 주장했는데 그 어조는 상당히 과격했다.

"사람들에게 행복을 가져다주기 위해 수백, 수천 명의 목숨을 내놓아도 좋다. 인간을 구제할 새로운 사회는 혁명에 의해서만 세워질 수 있다."

벨린스키

끊임없는 집필 활동으로 러시아 사상사와, 비평사에 기여했고, 도스토예프스키 등의 작가들에게도 영향을 미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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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는 정의 구현을 위해서라면 혁명가는 독재자가 되어도 좋다는 논리를 전개했다. 후에 역사가들은 이런 점에서 벨린스키가 볼셰비즘의 정신적 선구자 가운데 한 사람이라고 평가했다. 그에 따르면 혁명에 의해 세워진 새로운 사회는 돈 많은 사람과 가난한 사람 모두가 고르게 사는 공동체 사회, 즉 사회주의적인 성격의 사회였다. 이러한 공동체적인 사회주의 정신은 훗날 나로드니크 운동인 인민주의 운동의 기반이 되었다.

헤르첸

헤르첸은 1812년 모스크바의 세력가였던 아버지와 독일 출신의 하녀 사이에 태어났다. 헤르첸은 비록 서자였지만 아버지의 사랑은 지극했다. 그의 아버지는 그에게 훌륭한 교육을 받게 해주었으며, 일차 상속자로 지명했다. 하지만 그의 어머니와는 정식으로 결혼하지 않았다. 그 때문에 그는 '마음의 지식'이란 뜻의 '헤르첸'을 성으로 갖게 되었다.

가정 교사에게 교육을 받던 그는 17살이 되던 1829년에 모스크바대학 자연과학부에 입학했다. 그는 대학을 다녔던 5년간을 가장 행복한 시기라고 회상했다. 졸업과 동시에 그는 군대에 들어가 출세하기를 바라는 아버지의 뜻과는 달리 문학과 철학에 종사하기로 결심했다. 그리고 당시 청년들이 낭만주의 철학에 매달리고 있었던 것과는 달리 프랑스 사회주의와 정치문제에 큰 관심을 가졌다. 이러한 그의 관심은 당시 그의 집뿐만 아니라 러시아 전역에서 만연되었던 농노들에 대한 가혹행위가 직접적인 계기가 되었다고 그는 술회한다. 그 뒤 그가 속했던 철학모임은 경찰의 탄압에 의해 1834년 해체되고, 그는 5년간 유형의 길을 떠났다. 이때 그는 작은 아버지의 사생아였던 자카리나와 결혼했다.

유형이 풀리자 상트페테르부르크에서 벨린스키를 비롯한 진보적 사회주의자들과 접촉하여 평론가로 활동했다. 이 과정에서 감상주의적 생각들을 털어버리고 무신론과 사회주의로 무장하게 되었다. 이후 그는 가명으로 전제 체제를 비판하는 많은 비평문을 발표해 또다시 유배를 떠나게 되었다. 1846년 아버지가 막대한 유산을 남기고 죽자 자유로운 생활을 찾아 서구로 떠났으나 이것이 조국과의 영원한 이별이었다.

그는 서구의 여러 도시에서 혁명을 직접 목격하고 때론 참여하며 스위스에서 시민권을 얻었다. 제네바에서는 《피안으로부터》라는 책을 집필하며 러시아에 있는 동료들에게 혁명을 독려하였다. 이후 1852년에는 런던으로 자리를 옮겨 《종》이라는 잡지를 출판하여 러시아에 있는 혁명가나 반체제인사에게 보냈다. 알렉산더 2세의 개혁이 어느 정도 진전되던 1860년대에는 비판의 목소리를 낮추고 유럽을 여행하다가 1870년 1월 파리에서 숨을 거두었다.

헤르첸이 러시아의 진정한 사회주의자로 추앙받는 이유는 그가 단순한 서구주의자가 아니기 때문이다. 그는 서구로 망명한 후 유럽의 자유스런 분위기에 큰 충격을 받았다. 그러나 그것은 단순한 감동이 아니었다. 특히 1848년 프랑스혁명 당시 부르주아지의 야비함과 부패 못지 않게 노동자 계급들의 비열함을 보며 평소에 가지고 있던 서구에 대한 환상이 깨졌다. 헤르첸은 유럽인들이 러시아에 비해 더 큰 자유를 가지고 있다는 것을 인정했지만 그 자유의 바람이 러시아로 향할 것이라는 낭만적인 기대는 하지 않았다.

서구에 대한 실망은 자연히 조국인 러시아에 대한 희망으로 연결되었다. 그는 당시 러시아의 농민공동체인 미르mir에서 희망을 찾았다. 미르는 러시아 고유의 사회주의적 성격의 제도로 슬라브주의자들은 이미 이것을 높게 평가하고 있었다. 따라서 미르를 잘 발전시킨다면 러시아는 사회주의에 도달할 수 있을 것이라고 생각했다. 이러한 그의 사상은 서구화주의와 슬라브주의를 통합시키는 하나의 실마리가 되어 러시아 특유의 인민주의 운동의 모태가 되었다.

바쿠닌

러시아 최초의 직업 혁명가인 바쿠닌은 1814년 부유한 귀족의 11명의 자녀 가운데 장남으로 태어났다. 그의 아버지는 수준 높은 교양을 갖추고 있었으며, 1백여 명이 넘게 거처할 수 있는 저택은 지식인들의 사교 장소로 자주 이용되었다.

바쿠닌은 포병학교에 입학하여 19세 때 장교로 임관했다. 그러나 어렸을 때부터 지식인들과의 토론에 익숙한 그에게 군대는 생리에 맞지 않았다. 그의 관심은 오직 토론과 철학에만 있었다. 특히 임관한 2년 뒤 군대를 뛰쳐나와 모스크바로 피신하여 그곳의 지식인들과 어울렸다. 그는 지식인들과의 토론을 통해 사랑과 폭력, 사상에 대한 독특한 생각들을 하나씩 적립했다.

바쿠닌

벨린스키, 헤르첸 등과 교제하며 자유, 국가, 종교 등에 대한 사상을 정립하였다.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 프라하, 드레스덴의 봉기 등에 참여하며 무정부주의를 주장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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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40년, 헤르첸의 도움으로 베를린으로 건너간 바쿠닌은 좌파이론에 심취하여 철학은 세계를 해석하는 것이 아니라 세계를 변화시키는 것이라는 결론을 얻었다. 그로부터 얼마 뒤 마르크스와 역사적인 만남을 가졌으며, 1848년에는 마르크스의 민주연맹에 잠시 가담하기도 했다. 바쿠닌과 마르크스는 서로에게 영향을 주는 사이가 되었지만 중요한 문제에 대해서는 합의점에 도달하지 못했으며, 오히려 상대방의 전술이나 성격을 비난했다.

아무런 직업 없이 철학만을 좋아한 바쿠닌의 생활은 말이 아니었다. 헤르첸의 도움이 없었다면 위대한 혁명가 바쿠닌은 아마도 굶어 죽었을 것이다. 이러한 힘든 상황에서도 혁명이나 반란이 일어나는 곳이면 무조건 뛰어들었다. 그 때문에 오스트리아, 헝가리 등의 형무소와 시베리아 유형지에서 반생애를 보냈지만 인류의 해방을 위해 싸운다는 신념으로 생을 바쳤다. 결국 환갑이 다 되어 스위스로 돌아왔으나 악화된 건강으로 인해 베른에서 사망했다. 바쿠닌 역시 다른 서구주의자들과 마찬가지로 짜리즘을 공격했다.

그러나 다른 서구주의자들의 주장과는 달리 제정 러시아만을 악의 근원으로 본 것이 아니라 모든 국가를 악의 근원이라고 보았다. 그는 개인의 자유와 창의성을 방해하는 국가나 종교, 모든 조직에 대해 반대했으며, 사회가 완전히 재건되기 위해서는 모든 국가가 파괴되어야 한다고 주장했다. 여기서 유명한 무정부주의가 싹트게 되었다. 또한 국가를 파괴하기 위해서는 우선 종교를 없애야 한다고 주장해 무신론과 무정부주의를 발전시켰다. 때문에 바쿠닌은 종교와 국가의 파괴를 위해 모든 형태의 혁명, 즉 테러리즘과 민중 봉기를 찬양했다.

러시아의 전통을 사랑한 슬라브주의자들

러시아가 후진성을 벗어나기 위해서는 서구로부터 새로운 문물을 받아들이는 것이 최선이라고 생각한 서구화주의자들과는 달리 러시아 문명의 특성을 강조하는 지식인들이 같은 시대에 나타났다. 이들을 슬라브주의자라고 부르는데 차르 정부에 아부하는 몇몇 사람들을 제외하고는 서구화주의자들과 마찬가지로 니콜라이 체제에 비판적이었다. 슬라브주의자들은 러시아인의 우월성과 정교에 대한 믿음에 기초한 낭만주의적 지식인들이었다. 이 그룹의 지도자들 대부분은 폭넓은 교양을 갖춘 지주와 귀족 출신 학자들이었다. 대표적인 인물로는 신학, 세계사, 약품, 기계 발명 등 다방면에 두각을 나타낸 호마코프와 슬라브주의의 철학자로 불린 키리예프스키가 있다.

그들은 러시아가 아시아도 아니며 유럽도 아닌 오직 러시아일 뿐이라고 생각하였다. 그리고 러시아의 역사와 전통, 제도, 러시아인의 신앙인 정교를 면밀히 연구해야만 러시아의 현재 위치와 함께 미래를 찾을 수 있다고 믿었다. 유럽이 러시아보다 정치, 경제적으로 부강하다는 점은 인정하지만 도덕적으로는 러시아가 유럽보다 순수하고 덜 부패됐다고 주장했다. 유럽은 로마의 가톨릭과 프로테스탄트 때문에 진정한 신앙을 잃었으며, 정복과 폭력, 인민의 예속 위에 세워졌기 때문에 인격보다는 재산권이 우선되었다고 보았다.

이에 반해 러시아는 표트르 대제의 서구화 개혁이 있기 전까지 부패되지 않은 도덕성이 있는 사회였으며, 러시아의 정교와 농촌공동체인 미르가 정신적 지주 역할을 했다고 보았다. 그리고 하느님의 뜻에 부합되는 진정한 신앙은 정교이며, 미르는 공동의 이익을 추구하는 인민의 연합체로 보았다. 하지만 표트르 대제의 서구화 정책이 정교를 국가에 예속시켰고, 평화로운 '농촌 러시아'를 '국가 러시아'로 만들어 강압적인 관료체제로 만들었다고 주장했다.

이렇듯 서구화주의자들이 표트르 대제의 개혁을 새로운 러시아의 시작이라고 생각하는데 반해 슬라브주의자들은 표트르 대제의 개혁을 러시아 역사의 악의 근원으로 보았다. 그렇다고 해서 서구화주의자들이 비판한 니콜라이 정부를 슬라브주의자들이 옹호한 것은 아니었다. 슬라브주의자들은 서구의 헌법적 장치나 제도는 여전히 반대했으며 전제 체제에 대해서도 찬성하지 않았다. 그들은 전제 체제는 절대적인 것도 종교적으로도 정당화될 수 없으며 농노 해방과 함께 개혁을 주장했다. 특히 '정신생활의 자유'를 중시하여 언론·출판의 자유를 요구했다. 언뜻 보면 슬라브주의자들의 슬로건이 '정교, 전제주의, 국민성'을 표방한 니콜라이 1세의 강압통치를 지지하는 것처럼 보이나 오히려 탄압적인 니콜라이 정권 같은 현상도 그릇된 서구화 정책의 결과라고 보았다. 슬라브주의는 서구화주의와 함께 후에 일어날 러시아 혁명의 사상적 뿌리가 되었다.

19세기 초 러시아의 변화

러시아 사회를 유지하는 것은 차르에 의한 전제 체제와 농노 제도였지만 19세기에 접어들면서 그 체제는 서서히 위협받기 시작했다. 전제 체제는 지식인들의 타도의 대상이 되었고, 세계에서 가장 오래 존속된 농노 제도는 농민들의 잦은 반란과 흉작으로 위기를 맞고 있었다. 물론 농노 제도는 1861년에 행해진 농노 해방 이전까지만 해도 러시아 농업 경제의 핵심이었다.

지주 계급은 수확량을 늘리기 위해 농노들에게 부당한 부역을 요구하였다. 특히 남부 러시아에서는 이런 과정을 통해 얻어진 곡물을 수출하기까지 했다. 그러나 아무리 무식한 농노들일지라도 부당하게 부과되는 노동에 대해 열성적일 수는 없었다. 결국 일의 능률은 점차 떨어져 생산량은 감소하였고 소작농이 크게 늘어나기 시작했다.

이렇듯 19세기 전반기에 러시아 농업은 새로운 상황과 요구에 반응하며 조금씩 근대화를 이룩하고 있었다. 주식이었던 호밀과 밀은 대규모로 경작되었고 감자와 사탕무우, 그리고 상당한 지식과 기술을 요하는 포도주까지 생산되었다. 그러나 이런 생산량 증가는 지주 계급의 배만 불렸을 뿐 러시아 국민의 대다수를 차지하는 농민들의 생활 개선에는 전혀 기여하지 못했다. 이러한 상황은 농민 반란으로 이어지면서 커다란 사회 문제가 되었다. 특히 니콜라이 1세 때에는 즉위 4년 만에 무려 40회 이상의 농민 반란이 발생했고, 1830년대에는 크고 작은 반란이 약 40여 회나 일어났다.

이러한 농민 문제에 대한 대책을 강구하기 위해 니콜라이 1세는 비밀위원회를 조직했으나 돈과 시간만 낭비했을 뿐 별다른 성과를 거두지 못했다. 결국 1842년에 이르러 농민의 신분에 관한 새로운 법령을 마련함으로써 돌파구를 찾을 수 있었다. 그 법령은 농민과 지주 사이의 자발적인 협상에 의해 예속적인 농노제를 폐지하고 농민들에게 일정 정도의 토지 배당량과 의무량을 주는 것이었다.

이러한 정부 조치와 더불어 농민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노력한 인물로 키셀레프 백작이 있었다. 그는 국가의 수입 증대나 차르 체제의 유지보다는 진정으로 농민 문제를 개선하고자 노력한 인물이었다. 발트 해 연안으로부터 시작된 그의 개혁은 1847년 러시아 각 지방에까지 적용되었다. 그러나 이러한 일련의 개혁도 농노 제도라는 두터운 장벽으로 인해 한계를 드러내며 빛을 잃었다. 정부 또한 농민 문제를 비롯한 모든 문제들이 정부 주도하에 이루어져야 한다는 원칙을 내세워 대중들은 논의조차 할 수 없게 만들었다. 따라서 농민 문제는 별다른 해결책 없이 알렉산더 2세에게 넘겨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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