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9. 10. 3. 12:42ㆍ茶詩
제9장:한국의 차문화사
한국 차문화의 시작에 관해서는 자생설,인도전래설,당나라전래설이 있다.
가. 사국시대
1. 고구려 (BC 37~668)
고구려는 기원전 37년 주몽이 건국했다.일찍부터 선진문물을 접하였던 대방,현토 태수가 귀화하여 귀족관료 문화가 유입되었고 불교,유교,도교도 들어오게 되었다.불교와 차는 연관이 있고 후에 들어온 도교도 차와 밀접한 관계가 있다.
일본의 아오끼 마사루는 그의 저서에서 “고구려의 옛 무덤에서 출토된 무게 닷 푼 (1.8g) 가량의 지름 4cm 남짓한 전차를 표본으로 간직하고 있다.”고 했다.이는 고구려에서 차를 부장품으로 매장했다는 것인데 묘의 주인이 생전에 차를 좋아하였거나 불교나 도교의 영향이었을 것으로 생각할 수 있다.
『삼국사기』에 고구려의 지방 이름으로 ’구다국’이 있는 것으로 보아 당시에 고구려에서 차가 음용되었음을 추측할 수 있다.
안악 3호분의 전실 서측실 남벽의 벽화에는 잔을 탁에 받쳐 든 여인의 모습이 나와서 이 시기에 차생활이 이루어지고 있었음을 알 수 있다.
2. 백제(BC 18~663)
차문화의 원류는 불교와 연관하여 들어왔을 가능성이 가장 많은 것으로 보고 있다.
침류왕 원년 동진으로부터 인도의 승려 들어와 불교를 전했고 불회사를 건립하고 차밭을 조성하였다.
4세기 후반 불교의 전래에 의하여 궁정과 귀족,사찰에 음차풍속이 생겨났음을 알 수 있다. 화엄사에는 연기조사가 어머니에게 차를 올리고 있는 효대가 있어 차문화의 흔적을 알 수 있게 하는 귀중한 자료가 되어 있다.
『일본서기』에 백제 성왕의 명으로 담혜화성 등 13명의 승려가 불구와 차, 향, 꽃, 연등, 쌀, 과일의 육법공양물을 일본에 전했으며, 그들에게 차를 하사했다는 기록이 있다.
『속동문선』 66권 『남행월일기』에는 원효대사가 전북 부안의 원효방에서 수도하며 백제승려 사포와 차를 끓여 마셨다고 기록되어 있다.
초두도 백제의 왕릉을 비롯한 큰 무덤들에서 출토되어 있어 차문화와 관련을 지어 볼 수 있는 유물이다.
3. 신라(BC 57~676)
신라는 지리적으로 중원과는 멀리 떨어져 있어서 초기에는 사회문화적인 발전이 뒤떨어졌는데 527년 불교의 공인,532년 가야의 합병과 왕권이 강화되고 귀족사회가 안정되면서 신라의 문화는 비약적인 발전을 하게 되었다.
법흥왕 때 차문화를 유입되었고 그 시기에는 신라 차문화 발달의 중요한 계기이다.
중국의 당 태종시기에는 음차풍속이 성행했다.신라는 당나라와 외교적 교류가 활발한 가운데 차문화도 전래되었다.불교의 번창으로 당나라와 인도를 왕래하는 승려들도 귀국과 함께 차문화를 익혀서 오게 되었다.
문장가 최치원이 쌍계사의 ‘진감국사대공탑비’ 에는 진감선사가 당나라에서 유학하고 돌아와 ‘한명’ 을 마셨다고 기록되어 있다.
설총의 『화왕계』도 도리로 정치를 해야 한다는 충언으로 군자나 선비에게 있어서 차는 일상의 수양음료였음을 알 수 있다.
또한, ‘언정차영’이라는 회색토기가 출토되었는데 찻잔에 작은 글씨로’茶’ 자가 쓰여 있고 『성주사사적비편』의 ‘다향수’라는 문구가 발견되었으며, 경주 창림사지에서 ‘다연원’ 이라는 명문이 있다. 법주사의 대형 돌다기는 미륵부처에게 차를 올린 찻잔이었고, 석굴암 벽면의 문수보살상도 찻잔을 든 모습이 있다.
4. 가야(BC 42~490)
가야의 차문화는 이능화의 『조선불교통사』에서 기록했다.
가야의 지역으로 토지가 비옥하고 중국 남쪽과 교역이 성하였으며, 철기문화와 벼농사를 들여와 사회가 안정되고 경제, 사회, 문화전반이 발달하였다.근래 백월산에서 인도, 운남, 사천에서 생장하는 대엽종의 차나무가 발견되고 있다는 이야기도 있다.
일연의 『삼국유사』 중 차에 대한 기록도 있는데 이로 보아 왕의 제사에 차를 올렸을 만큼 가야에서 이미 차문화가 생활화 되고 있었음을 보여주는 증거라고 볼 수 있다.
나. 고려시대(918~1392)
고려왕조 500년은 ‘끽다왕국’ 이라 할 만큼 백성들까지 차를 즐겼고 화려한 차문화가 꽃을 피웠다.고려시대 초기에는 귀족중심의 차문화였으나, 무신의 난 이후 중엽부터는 선비중심의 차문화가 꽃을 피웠다.
고려시대에 차는 외국과의 교류에서 중요한 물품이었으며, 왕이 신하와 백성들에게 하사품으로 주었고, 부처에게 공양하는 귀한 예물로 사용되었다.차는 왕실에서나 사원, 그리고 귀족 문인들까지 마셨는데 이같은 차문화의 발전은 태조 왕건이 국교로 삼았던 불교의 융성과 깊은 연관이 있다.
불교 선종의 음차풍습은 왕공귀족으로 확대되고 국교가 불교로 확립되면서 나라의 중요한 행사인 상원의 연등회, 중동의 팔관회 등을 통해 신라의 헌차의식을 발전시킨 진차의식이 거행되었다.
왕이 공로가 있는 신하, 승려, 노약자에게 차를 하사했다.
고려의 문인들은 승려들과의 교유를 하면서 많은 글과 시를 남겼으며, 명전회를 만들어 차를 즐겼다.이처럼 고려에서는 궁중에서부터 일반인에 이르기까지 차를 마시는 문화가 광범위하게 자리 잡고 있다.
1. 왕실과 귀족들의 차문화
(1) 다방: 조정이나 궁중의 행사에서 차와 관련된 의례적인 일을 맡아 진행하는 관청이다.
(2) 다군사: 다군사 제도는 한국에서만 볼 수 있는 풍습이다.
(3) 사헌부의 다시: 관리의 비행을 조사하고 풍기를 바로 잡고 백성들의 억울한 누명들을 해결해주는 일을 맡은 기관인 사헌부에서 매일 한 번씩 모여 차를 마시는 시간을 갖고 공정한 판결을 기했다.
(4) 다원: 임금, 관원, 승려 등 귀족들이 먼 길을 가다가 도중에 쉬는 국영여관인 다원은 차를 마시기에 좋은 샘물과 정자가 있었다.
2. 일반 백성의 차문화——다점;다소
3. 고려시대의 차도구——청자(제 46 페이지)
다. 조선시대(1392~1910)
고려말 원나라부터 성리학이 들어오면서 유학자들을 중심으로 심신수양의 도구로 차가 사용되었다.초기 조선왕조의 차문화는 고려시대의 전통이 그대로 계승되어 궁정에서 국가적 의례에 차를 올리는 의식이 계속되었다. 조선의 숭유억불 정책은 사원을 중심으로 발전해 온 차문화의의 위기를 가져오게 되었지만 음차풍이 완전히 없어진 것은 아니었다.왕실과 귀족위주의 불교적 의례와 외형적이며 화려한 차문화는 조선시대에 들어와 선비들을 중심으로 안빈낙도의 소박한 차문화가 되어 맑은 다탕이 주류를 이루는.한국의 다성으로 추앙받는 초의선사는 강전에서 유배생활을 하던 정약용을 통해,또 추사 김정희 등과 교류하면서 차문화 부흥에 앞장섰다.
1. 왕실의 차문화
(1) 다방: 조선시대에서도 다방은 이조에 소속된 기관으로 왕실의 다례를 주관하거나 태평관에서 사신에게 다례를 베푸는 일을 주관하였다.
(2) 다시: 태종 때는 한양에 있는 모든 관청이 차 마시는 시간인 다시를 행하였다.
(3) 회강다례와 사신맞이 다례: 회강은 한 달에 두세 번씩 왕세자가 스승과 시강원의 정일품 관리 및 빈객과 함께 경서와 사기를 복습하며 강론하는 일로 이때에 다례를 행하였다.
(4) 기타 왕실의 다례: 조선시대에는 왕실의 제사나 상례 때 차를 올렸다. 왕과 왕후의 기제사 때나 묘 제사 혹은 주다례 때에 주로 다탕을 올렸다.
2. 선비들의 차문화
(1) 수양의 차
(2) 예술과 차
(3) 야다시 풍습
3. 조선의 다구
조선시대를 대표하는 도자기는 분청사기와 백자이다. 잎차와 떡차를 끓여 마시는 문화가 확산되면서 다구의 사용도 점차 확대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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