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9. 11. 5. 20:05ㆍ우리 역사 바로알기
유·불·선 아우르는 포용정신, 걸출한 인물을 낳은 토양이었다.
풍류도는 화랑들의 바탕이 됐고, 화랑들은 산수 좋은 곳을 찾아다니며 심신을 연마했다. 위덕대 채종한 교수가 화랑들이 찾았던 곳으로 알려진 울산시 울주군 두동면 전천리의 국보 147호인 암각화 유적지에 대해 설명하고 있다.(사진 아래) 암각화에는 다양한 형태의 그림들과 함께 한자 문장이 새겨져 있다. 이채근 기자
신라불교는 풍류도를 존중한 화랑에도 많은 영향을 끼쳤다. 불교 공인을 이끌어낸 이차돈을 기리는 경주 백률사 자연암석에 새겨진 석탑 모습. 사진 이채근 기자
신라 풍류도는 훗날 조선 최제우의 동학으로 연결됐다고 한다. 경주 현곡면에 있는 그의 무덤에는 생전 갓 쓴 모습을 닮은 특이한 석상이 세워져 있다. 오른쪽 손에는 염주를, 왼손에는 책(경전)을 들고 있다. 사진'이채근 기자
주체(主體)인 만몽(滿蒙) 퉁구스족(族)과 그 다음의 한족(漢族), 여기에 약간의 인도족(印度族), 왜족(倭族), 반도토족(半島土族) 등 5, 6종(種)으로 이뤄진 한국민족.(김정설)
국조 단군(國祖檀君) 이래 5천년사를 이어간 민족적 저력은 무엇일까? 변방의 신라가 통일국가를 이뤄 천년 왕국의 신화를 만들어낸 그 저력은 무엇일까?
◆신라 풍류(風流)의 새 바람
지난해 영남대에서 신라 풍류도와 화랑 등을 연구한 경주 출신의 학자 범부(凡父) 김정설(金鼎卨'1897~1960)의 사상을 다룬 논문으로 박사학위를 받았던 범부연구회 선임연구원 정다운 박사. 그는 지난해 11월 학위논문을 바탕으로 풍류 관련 책을 낸 데 이어 지난달엔 경북도청 공무원들에게 풍류 이야기 강의도 했다. '풍류 전도사'가 된 그는 "신라 풍류도는 유교'불교'도교라는 삼교(三敎)의 단순한 뭉침이 아닌 그것을 넘어선 한국 고유 사상"이라고 해석했다. "최근 관심을 끄는 풍류도는 범부의 주장처럼 고조선에서 화랑, 동학에 이르기까지 우리 혈맥에 흐르는 것 같다"고 말했다. 2008년 9월 순수학술연구단체로 발족한 '범부연구회'(회장 최재목 영남대교수)도 신라 풍류도와 화랑, 동방학 연구에 업적을 남긴 김정설의 재조명 작업을 통한 풍류 연구에 나서고 있다.
범부의 풍류·화랑에 대한 관심에 대해 시인 김지하는 "김범부는 때를 잘못 만나서 그렇지 참 천재였다. 풍류도를 어떻게 해서든 현대화시켜 보려고 애를 썼던 사람"이라며 "어떻게 해서든 화랑도, 풍류도에서 국민윤리의 기본을 파악하려고 애를 썼던 사람, 동학에 대해서도 깊은 이해를 가졌던 사람, 고대 풍류도의 부활이라든가, 샤머니즘에 대한 재평가, 신선도에 대한 재평가에 아주 중요한 사람"이라 높이 평가했다.
지난달 22일 경주 동리목월문학관에서는 한국'일본 학자들이 참여해 신라 풍류 등을 다룬 '한국사상의 원류-동학과 동방학'이란 주제의 심포지엄이 열렸다. 이 문학관 장윤익 관장은 "옛 신라 풍류도를 재해석하고 그 의미를 접목해 다뤄보려는 시도들이 광범위하게 펼쳐지고 있다"고 했다. 그는 "풍류도는 불교와 유교, 도교 등 다양한 외래 사상, 종교를 받아들이는 것이어서 오늘날 여러 갈등 해결에 도움이 되는 정신이 아닌가 생각된다"면서 "풍류는 단군 때부터 있었던 우리 사상의 원류였다. 그러나 고려 불교, 조선 유학에 밀려 샤머니즘적이고 무당적인 것으로 흘렀는데 이제 그 원류를 되찾기 위한 움직임들이 일고 있다"고 했다.
이달 19일 영남대 천마아트센터에서 연주'특강을 갖는 임동창(56) 피아니스트. 자신을 '풍류 피아니스트'라 소개한 그는 "10년 넘게 음악'화랑도 등에 대해 고민했는데 그 답을 신라 풍류에서 찾았다"며 "소통하는 데는 풍류가 답"이라며 자신의 '풍류 음악' 세계를 설명했다. 그는 "신라 풍류가 모든 것을 받아들이고 수용했던 것처럼 풍류를 음악에 적용, 갈등대립을 해결하고 선(禪)과 명상으로 격조 높은 삶의 도를 추구하려 한다"고 말했다.
◆신라 풍류란?
신라 풍류는 신라 당대 최고 문장가인 고운(孤雲) 최치원(崔致遠'857년~?)이 남긴 화랑 난랑(鸞郞)에 대한 글인 '난랑비서문'(鸞郞碑序文)이 단초를 제공하고 있다.
"나라에 현묘한 도가 있으니 풍류라 한다(國有玄妙之道 曰風流). 가르침의 근원은 선사(仙史)에 자세히 갖추어져 있다. 실로 이는 세 가르침을 포함하고 백성들과 접하여 교화한다. 들어와서는 집안에서 효를 행하고 나가서는 나라에 충성함은 노나라 사구(중국 공자)의 가르침이다. 하지 않음에 머무르고 말 없는 가르침을 행하는 것은 주나라 주사(중국 노자)의 가르침이다. 모든 악을 짓지 않고 모든 착함을 받들어 행함은 축건태자(인도 석가모니)의 교화이다."
그는 풍류를 유교, 도교, 불교를 모두 포함하는, 한 차원 높은 것으로 인식했다. 또 쌍계사 진감선사비문에서 "우리나라 사람들은 불교도 하고 유교도 한다"고 기록했다. 진흥왕순수비 역시 나라의 정치를 도로 다스릴 것을 기록하는 등 신라인들은 일찍부터 유불도 3교를 받아들였고 이를 소화하는 고유한 풍류(도)가 존재했음을 후세에 전했다.
신라인들이 고유의 토속신앙, 샤머니즘과 같은 것 외에도 외래의 사상, 이념, 종교에 대해 개방적이고 수용적이었고 유불도를 자유롭게 넘나드는 데 익숙했음을 엿볼 수 있는 흔적들을 기록으로 남겼다. 삼국사기의 열전 김인문조에는 '유가의 책을 많이 읽고 장노(장자와 노자)와 불교의 이야기를 함께 섭렵하다'는 내용도 있다.
유불도를 넘나드는 자유로움과 외래 사상이나 이념의 수용에 대한 개방성, 진취성은 화랑과 승려 간의 신분 변화, 불교에서 유학으로의 변신에서도 나타났다. 향가 찬기파랑가를 지은 충담(忠談), 제망매가의 월명(月明), 혜성가의 융천(融天), 원가(怨歌)를 지은 신충(信忠) 등이 화랑 출신 승려였다.
김정설은 '화랑외사'(花郞外史), '풍류정신'의 저서에서 "풍류도는 화랑들에게서 구체화됐다"면서 "풍류도는 유불도의 요소 외 다른 어떤 것을 가진 '멋'"이라 표현했다. 화랑 사다함(斯多含)과 김유신(金庾信)을 사례로 들었다. 16세에 전쟁에서 전과를 올린 사다함은 노예로 주어진 포로 300명을 "패전했으면 그만이지 또 학대할 이유가 없다"며 모두 해방시켰고 받은 좋은 땅도 참전 부하 병사들에게 나눠줬다.
김정설은 사다함이 또 무관랑(武官郞)이란 친구가 병사(病死)하자 따라 죽은 사실을 이야기하며 "'멋'이라는 것은 다른 것이 아니고 바로 '사다함의 도'"라고 했다. 기녀 천관녀(天官女)와의 만남 뒤 자신의 말을 죽였던 김유신이 후일 삼국통일에 진력하고 후일 천관녀가 떠나고 없던 그 터에 천관사(天官寺)란 절을 지은 사연도 풍류도, 즉 '멋'으로 봤다.
◆우리 시대의 풍류정신은 무엇일까?
서울대 송기호 교수는 고구려와 백제, 신라, 일본의 문자생활 개시 시기를 파악하기 위해 유학승(留學僧)'교육기관'서적 수입'사서(史書) 편찬'율령(律令) 반포'역법(曆法) 채택 등 9가지의 최초 출현시기를 비교했다. 그 결과 문자생활 시기를 고구려 4세기, 백제는 4세기 후반~5세기 전반, 신라는 6세기, 일본은 5세기 중후반 즉 고구려-백제-일본-신라 순이었다고 분석했다. 대략 고구려-백제 사이는 85년, 백제-일본은 60년, 일본-신라는 90년, 백제-신라는 150년, 고구려-일본은 145년, 고구려-신라는 무려 235년의 차이였다. 불교의 공인도 고구려(372년), 백제(384년)에 이어 신라(527년)가 가장 늦고 여건도 불리했다.
그렇지만 통일의 주인공은 신라가 됐다. 신라인들이 저력을 발휘한 바탕에는 유교, 불교, 도교사상을 아우르는 풍류(도), 풍류정신으로 무장한 화랑이 큰 역할을 했다. 김춘추, 김유신과 같은 탁월한 지도자들의 노블레스 오블리주 정신과 함께 풍류 정신 및 세속오계로 무장한 화랑들은 통일의 원동력이 됐고, 유불도를 아우른 풍류는 뛰어난 인물을 배출하는 토양이었다.
'토황소격문'(討黃巢檄文)으로 중국에서 이름을 날린 최치원, 문장가로 위세를 날린 강수, 우리 문자사에서 세종 대왕에 버금간다는 설총, '인도의 부처님을 제외하고는 더 위대한 사람이 없다'는 평가를 받은 원효, 풍수에 밝았고 500사찰을 지었다는 승려 도선(道詵) 등 다양한 분야의 걸출한 인물 배출에 풍류가 바탕이 됐다면 지나친 해석일까.
풍류도는 고조선 이래 고구려, 백제에도 있었으나 신라에서 발전하고 세련되고 조직화되면서 찬란한 문화를 양출하고 걸출한 인재를 배양하면서 삼국통일의 기운을 촉진했다고 볼 수 있다. 또 풍류도는 훗날 수운(水雲) 최제우(崔濟愚)의 동학(東學)이 지향하는 시천주(侍天主)와 인내천(人乃天), 사인여천(事人如天) 정신으로 이어졌다.
우리 고유의 풍류를 바탕으로 한 신라인들의 자연스런 유불도 수용으로, 불교는 종교적 예술적 분야에서 정신문화의 토양이 됐고, 유교는 충효와 예의문화의 기반이 됐으며, 도교는 천문 지리 음양 의학 등 과학기술적 측면에서 공헌하게 됐다는 평가도 있다. 한국정신문화연구원 류승국 전 원장은 "유교, 불교, 도교사상은 동양철학 3대 사상"이라며 "도교는 정치적 측면이나 사회적 윤리적 측면보다 자연주의 철학으로 기능했고 과학적 영역에까지 영향을 미쳤다"고 평가했다.
일본의 교토포럼 공공철학공동연구소 김태창 소장과 야규 마코토 특임연구원은 지난달 경주 심포지엄에서 "풍류도는 불교 전성시대에는 불교 형태로 나타나고, 주자학이 들어오면 주자학적인 형태로 표현되고 그것들을 갖고서는 어찌할 수 없는 시대상황에서는 완전히 새로운 모습을 보여왔다"며 "한민족이 긴 역사를 통해 일관되게 공유하고 있는 민족적 무의식이 바로 풍류도"라고 해석했다.
정인열기자 oxen@msnet.co.kr
**사진설명-
1)풍류도는 화랑들의 바탕이 됐고, 화랑들은 산수 좋은 곳을 찾아다니며 심신을 연마했다. 위덕대 채종한 교수가 화랑들이 찾았던 곳으로 알려진 울산시 울주군 두동면 전천리의 국보 147호인 암각화 유적지에 대해 설명하고 있다. 암각화에는 다양한 형태의 그림들과 함께 한자 문장이 새겨져 있다. 이채근 기자
2)신라불교는 풍류도를 존중한 화랑에도 많은 영향을 끼쳤다. 불교 공인을 이끌어낸 이차돈을 기리는 경주 백률사 자연암석에 새겨진 석탑 모습. 사진 이채근 기자
3)신라 풍류도는 훗날 조선 최제우의 동학으로 연결됐다고 한다. 경주 현곡면에 있는 그의 무덤에는 생전 갓 쓴 모습을 닮은 특이한 석상이 세워져 있다. 오른쪽 손에는 염주를, 왼손에는 책(경전)을 들고 있다.
사진'이채근 기자
'우리 역사 바로알기' 카테고리의 다른 글
신라, 도로망 정비하고 우편역 설치 (0) | 2019.11.22 |
---|---|
사냥꾼 변장한 일본 측량대, 국내 첫 쇠다리 '한강철교'... (0) | 2019.11.15 |
드라마 선덕여왕으로 재조명되고 있는 화랑세기 (0) | 2019.09.30 |
만주 Manchuria , 滿洲 (0) | 2019.09.22 |
풍류도(風流道) 신라의 청년들을 찾아서 ⑨ 귀족에서 평민까지… 풍류도의 힘으로 신라 발전·통일 기여한 화랑들 (0) | 2019.09.15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