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예의 효능과 가치 -도야성령 (陶冶性靈) ..인격수양(人格修養).

2019. 11. 26. 01:52글씨쓰기


p369-375 서예의 효능과 가치 -도야성령 (陶冶性靈) ..인격수양(人格修養)..|서예통론

하전 | 조회 133 |추천 0 |2016.04.01. 19:20 http://cafe.daum.net/bbhy0003/S1GN/68 



p369-375


인격수양(人格修養)


인격수양은 유가(儒家)의 전통적인 덕목이다.

수양을 통해서 인격을 쌓은 사람을 군자(君子)라 하고

그렇지 못한 사람을 소인(小人)이라고 한다.

인격은 선천적인 본성과 후천적 학습으로 이루어진다.

‘격(格)’이란 글자는

『설문해자』에는 나무가 자라는 모양이라고 하였다.

그 이후 바로 잡는다, 궁구한다는 뜻도 더해졌다.

또 격자창(格子窓)이나 격자지(格子紙) 같은

격자(格子)인 ‘한계의 틀’의 뜻을 갖게 되었다.

인간과 금수를 분별하는 격자(格子)는

바로 도덕(道德). 윤리(倫理)이다.

『대학(大學)』에서 말하는

정심(正心). 수신(修). 제가(齊家). 치국(治國).

평천하(平天下)는 모두 도덕(道德)의 행위(行爲)이다.

특히 수신(修身)을 하기 위해서는

정심(正心). 성의(誠意). 치지(致知)해야 하며

마침내는 물아(物我)의 이치를 연구하여

후천적으로 지식을 확실히 하는

격물치지(格物致知)가 되어야 한다.

글씨의 연구과정은 격물(格物)의 과정이며

글씨의 성취는 치지(致知)의 경지라고 할 수 있다.

옛날부터 글씨는 학문과 더불어 인격완성으로 가는

가장 질 높은 도야(陶冶)의 방편으로 여겨져 왔다.

‘인서구로(人書俱老)’와 ‘서여기인(書如其人)’의

속뜻을 이해하면 그 의미는 더욱 확실해 진다.

사람과 학문, 학문과 도덕, 도덕과 인품, 인품과 글씨는

서로 유기적인 관계를 가지고 오랜 세월을 같이 했기 때문이다.

그러나 인품이 뛰어나면

무조건 글씨를 잘 쓸 수 있다는 것은 아니며, 그렇다고

글씨를 잘 쓴다고 해서 인품이 좋은 것은 더욱 아니다.

그러므로 인품과 서품(書品)이 다 훌륭하기를 갈구한 것이다.

또 양자를 상보상성(相輔相成)하는 덕목으로 보아왔다.

그리고 ‘일인품이서품(一人品二書品)’이란 관념 하에

글씨를 통하여 인격을 수양하고 성령을

도야(陶冶)함으로써

‘우선은 인간’이라는 심의(深意)를 견지하여 왔다.

글씨를 예술보다는 이러한 차원의 각도에서

더욱 귀히 여겨왔던 것이 서예의 묘미이기도하다.

글씨는 공부하는 과정이

정서나 정신의 수양과 함양(涵養)에 어떠한 도움이 되며

자신의 학문과 수양이 글씨에 어떻게 작용하는 지에 대하여

살펴보고자 한다. 


 

유가(儒家) ; 공자의 학설과 학풍 따위를 신봉하고 연구하는 학자나 학파

군자(君子) ; 유교에서 도덕적으로 완성된 인격자를 일컫는 말

                   大學(대학)에서는 정치가를 이름 ?

소인(小人) ; 도량이 좁고 간사한 사람.

                   大學(대학)에서는 일반 백성을 이름 ?

정심(正心) ; 바른 마음

성의(誠意) ; 정성스러운 뜻

치지(致知) ; 사물의 도리를 깨닫는 경지에 이름

물아(物我) ; 外物(외물)과 自我(자아)를 아울러 이르는 말

격물치지(格物致知) ; 실제의 사물의 이치를 연구하여 지식을 완전하게 함






첫째로 먹을 가는 일을 들 수 있다.


  “고요히 옛 먹을 갈며 성령을 도야한다.

[靜硏古墨,陶冶性靈]”이란 말이 있는 것처럼

먹을 가는 일은 의미가 심장하다.

정갈한 물과 벼루의 관리

그리고 먹을 가는 자세를 바르게 하는 것은 가장 기본이다.

그 다음 벼루에 먹을 가는 자체를

마음을 갈고 닦는 것으로 여겼다.

지금은 찾아보기가 어렵지만 전에

스승에게 글씨를 배우고자 제자로 들어가면

잡일은 물론 우선 먹 가는 일을 삼 년 정도 시켰다고 한다.

물론 그 사이에 글씨는 전혀 가르치지 않았으며,

삼 년이 지나도 사람의 됨됨이나 공부하고자 하는 의욕,

또는 참을성 등에 있어서 아직도 부족하다 여겨지면

그 이후로도 계속 먹만 갈게 하였다는 이야기를

구전을 통하여 들어온 바이다.

벼루는 인간의 심성과 영혼이나

영감(靈感)을 잠재우고 포용하는 대지(大地)와 같고,

감성과 지성을 환발(煥發)하게 하는

넘실대는 바다와도 같다.

또 이 세상의 색을 모두 합치면 현색(玄色),

곧 묵색(墨色)이 되듯이 먹을 갈면서 그 농도를 깨달으면

그 속에 천자만홍(天紫萬紅)의 꽃도 피고

추월춘풍(秋月春風)이 교차된다. 더 나아가

청산무변(靑山無變), 강산무진(江山無盡)의 장구(長久)함과

시공을 초월한 명상의 나래를 펼 수 있는

밤하늘 은하계(銀河界)와도 같은 것이다.

시적이며 감상적인 표현이라 할 수도 있겠지만

먹을 오래 갈아본 사람은 누구나 공감 할 것이다.

실로 먹을 꾸준히 갈면서

먹 가는 진정한 의미를 깨닫는 것은

수양하고자 하는 심신(心身)의 조율(調律)이 아니면

절대로 안 되는 일이다.



환발(煥發) ; 밝게 드러남 ?

천자만홍(紫萬紅) ; 울긋불긋한 여러 가지 빛깔이라는 뜻으로

                                색색의 꽃이 피어 있는 상태





둘째는 간가(間架)와 운필을 터득하는 일이다.


  간가는 결구. 결자(結字). 분포 등이 다 포함된다.

전. 예. 해에는 나름대로 독특한 전형(典型)의

간가법칙(間架法則)이 있다.

행, 초의 전형은 다소 전. 예. 해보다는 자유스럽지만

나름대로의 본령(本領)이 있다.

이러한 율(律)이나 법칙 중에서도

가장 어렵고 고차원적인 것이 간(間)을 맞추는 것이다.

간(間)이란 말은 음식에서 간(間)이 맞지 않으면

아무 맛도 없는 것 같은 그러한 간(間)이다.

인간. 시간. 공간이란 단어에서 시사하는 것같이

마치 만유인력(萬有引力)이 작용하는 가장 알맞은 질량과

평방의 정. 반비례를 통한 조화와도 같은 것이다.

글씨에 있어서 간(間)은

점획의 ‘각득기소(各得其所)’,

‘각안기소(各安其所)’의 의미로서

이것은 비단 수평. 수직. 사선에서의

간격에 대한 문제뿐만이 아니다.

사방팔면에 있어서 힘의 안배가 중화(中和)에 이르는 것이다.

중화를 이루기 위해서는 획이 멈추어야 될 때 그쳐야 되고,

더 나아가야 할 때 나가야 되고,

떼어야 될 때 떼어야 되고 붙여야 될 땐 붙여야 되고

굵게 해야 될 땐 굵게 해야 되고,

가늘게 해야 될 땐 가늘게 해야 되는 등

지나치지도 모자라지도 않는

중(中)의 경지에 도달해야 된다.

그렇게 하는 가운데

자신의 방자한 마음과 오만한 태도와

방종한 자세를 제어하게 되는 것이다.

그러므로 난폭한 어린이가 글씨에 입문하고 나서

얼마안가 점잖아졌다든지,

자기밖에 모르는 이기적인 사람이

매우 합리적인 사람으로 변했다든지

또는 성격이 급한 사람이 유(柔)하게 되었다는 등의

사례는 주위에서 얼마든지 접할 수 있는 것이다.

운필은 북위나 당해의 영자팔법을

정확히 터득하는 것으로부터

전(篆)의 전(轉)이나 예(隸)의 절(折) 등

고전을 통하여 그 공통분모적인

운필의 핵심을 파악하는 것이다.

간가(間架)에서의 설명에서처럼

자신을 제어하는 통제심이 없으면 획은 터득되지 않는다.

수행하는 마음으로 접근해야 만이

앞의 운필조(運筆條)에서 예시했던 것처럼

서법이론상 매우 다양한 운필이 구사뿐만 아니라

그 획의 한 형태를 터득할 수 있을 것이다.

‘한일자도 못 쓴다’는 표현이 있다고 했거니와,

통제심이 없이 조급한 마음으로 비약을 꿈꾸다가

글씨를 망쳐버리는 것은 자연스러운 귀결이다.

글씨도 망치고 인간도 실패하는 것이다,

조달(早達)을 꿈꾸고 단계를 넘어선

비약(飛躍)을 바라는 것은

어리석음의 소치라고 아니할 수 없다.

수양은커녕 몸과 마음을 상할 수도 있는 것이다.



각득기소(各得其所) ; 모든 것이 그 있어야 할 곳에 있게 됨.

                                원래 사람들이 자기분수에 맞게 하고 싶은

                                일을 해도 후에는 각자의 능력과 적성에 맞게

                                적절한 배치를 받게 되는 것을 말함

각안기소(各安其所) ; 각자 자신이 있어야 할 곳에 편안하게 자리하고 있음 ?

조달(早達) ; 젊은 나이로 벌써 높은 지위에 이름.

                   나이에 비하여 올됨

비약(飛躍) ; 나는 듯이 높이 뛰어오름

                  지위나 수준이 갑자기

                  빠른 속도로 높아지거나 향상됨





셋째는 행초의 율동을 깨닫는 것이다.


흔히 행. 초에서 리듬을 타는 경지를 열어야 된다고 한다.

리듬은 템포와 하모니와 더불어 음악의 삼요소이다.

행초의 율동(律動). 절주(節奏). 화해(和諧)는

음악의 삼요소와 통하는 것이다.

중국에서도 고대에 문화를 이야기 할 때 늘

예(禮). 악(樂)을 병칭하였다.

공자는

“시(詩)”에서 일어나고,

예(禮)로서 서며,

음악으로 완성한다

[興於詩, 立於禮. 成於樂]“라고 하였다.

이는 음악에 대한 최고 예술적 가치의 자각이었다.

이 말은 악(樂)이

개인의 인격완성의 경지임을 표현한 것이며,

또한 공자 입교(立敎)의 종지(宗旨)이기도 하다.

그러므로 선비는 거문고를 가까이 하여

음악의 경지에 접근하고자 하였고

명창(名唱)과 고수(鼓手)를 옆에 두고

늘 음악과 가까이 하려고 하였다.

문인이 음악을 가까이 한 것은

전적으로 공자가 음악을 매우 중요시 한 까닭이다.

공자가 음악에 대하여 요구하는 바는 미(美)와 인(仁)의

통일이며, 음악을 특별히 중시한 이유는

인(仁) 속에 음악이 있고

음악 속에 인(仁)이 있다는 사상을 가지고 있기 때문이다.

글씨 잘 쓰는 사람이 쓴 행초를 보고 있노라면

어깨춤이 절로 추어지는 것을 느낄 수 있다.

또 글씨의 고유성에서 말하는

율동성이나 유동미(流動美)를 스스로 느낄 수 있다.

이것은 글씨에 이미 음을 타고 있기 때문이다.

음악이 인격완성의 묘채라는 점을 감안하면

글씨 속에 음악을 받아들이고,

또 음악 안에서 글씨를 느끼고 하는 과정이

인격수양의 일면이라는 것은 자명한 사실이다.

이 밖에도 한시(漢詩)나 우리의 시조(時調)가락도

이런 점에서 매우 유익하다고 할 수 있다.

한시는 발음상에 이미 높낮이가 있기 때문에

소리 내어 읽으면 그대로 음악이며

시조가락은 우리 정서이기 때문에

글씨에 적응하면 그 가락이나 성조(聲調)가

곧 우리의 심성이 되어 버린다.

이것이 곧 정서 순화와 인품고양의 한 몫인 것이다.




넷째, 글씨는 학문을 부른다.


글씨는 학문으로부터 우러나오는 것이다.

그래야만 지고(至高)한 것이기 때문에

글씨를 온전하게 영위하기 위해서는

학문과 가까이 하지 않을 수 없다.

그 학문의 주류는 동양의 문학. 사학. 철학이다.

그 속에는 유가. 불가. 도가를 비롯하여

제자백가(諸子百家), 그 밖의 시(詩). 문(文). 잠언(箴言).

좌우명(座右銘). 훈계류(訓戒類) 등

수양(修養)과 접할 수 있는 내용이 무궁무진하다.

글씨의 연마와 학문과 수양은

자연발생적으로 교감되어진다.

처음에 멋모르고 시작해서 어느 정도 경지에 이르면

여지없이 난관에 봉착하게 마련이다.

그 난관은 다름 아닌 한문 실력이다.

‘늦었다고 할 때가 가장 이른 때이다’라는 속담이 있다.

중년 노년 할 것 없이 책과 더불어 사는 인생은 의미가 있다.

지금이라도 촌음을 다투어 학문에 매진하면 장래가 있을 것이다.

젊은 층은 지금부터라도 학문에 큰 뜻을 둔다면

우리 서단에 밝은 미래가 있을 것이다.

그 이유는 학문을 통하여

지혜와 안목이 열림으로써

글씨의 발전은 물론 저마다의 인격완성의

큰 길이 열릴 것이기 때문이다


참고문헌 ; <<서예통론>>, 선주선저, 원광출판국, 인터넷 사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