파계사 조실 고송스님 입적

2019. 11. 28. 19:12경전 이야기




파계사 조실 고송스님 입적

박정규 조회 : 3,374

파계사 조실 고송스님 입적

22일 새벽 파계사에서 입적



파계사 조실 고송스님이 22일 오전 0시40분 파계사에서 입적했다. 세납 97세 법납 83세.

1906년 경북 영천 출생인 고송스님은 1920년 팔공산 파계사에서 상운스님을 은사로 출가, 1923년 용성스님을 계사로 비구계를 받았으며, 조계종 감찰원장, 파계사 주지를 역임했으며 현재까지 파계사 조실을 맡아왔다.

최고령 조계종 명예원로의원인 스님은 19세에 통도사 선방에서 정진을 시작으로 25세가 되던 1930년부터 15년동안 금강산 마하연과 유점사, 신계사를 거쳐 묘향산 보현사에서 선지식들과 수행정진했다. 망월사 30년 결사에도 동참했으며 일제 강점기 때 불교잡지를 만들던 만해스님을 돕기도 했다.

고송스님의 영결식은 오는 24일 문중장으로 파계사에서 봉행된다.(053)984-1633

박인탁 기자

관련기사 - 1798호(2001년 1월 16일자)


우리스님-파계사 조실 고송스님

“찰라 인생, 지는게 이기는 거야”

정초부터 온나라에 수북하게 내린 흰눈이 팔공산까지 뒤덮었다. 눈에 반사된 햇볕이 고송(古松)스님이 거처하고 있는 요사채까지 찾아왔다. 소나무는 추울수록 푸른 기상을 더한다고 했다.

상처입은 중생들에게 수행의 맑은 향기가 훈습(熏習)된 어른스님들의 커다란 그늘은 더욱 그립기만 하다.
일광동조(日光東照). 파계사 조실이며 조계종 명예원로의원인 고송 큰스님이 주석하고 계신 요사채이다.

올해 세수 96세로 백수(白壽)를 눈앞에 둔 고송스님의 한 평생 삶을 대변하듯 소박한 현판과 단촐한 요사채에는 수행의 향기가 묻어 있다.

“올해 아흔여섯이니 오래도록 댕겼지…늙은이에게 뭐 들을게 있다고 왔어” 노구(老軀)를 일으켜 세운 스님의 일성(一聲)이다.

스님은 인생은 호흡지간(呼吸之間)이며 ‘바람속의 등불’임을 알고 정진하라고 당부했다. “인생은 잠깐이야. 찰라간이란 말이야. 눈깜빡하면 한 생이 지나가. 내 나이 아흔여섯인데, 어제같단 말이야”

중생들이 어떻게 살아야 바르게 사는 길인지를 여쭈었다. 고송스님은 요사채 밖에 쌓인 눈들이 물로 화(化)해 자연으로 되돌아가는 모습을 보며 말을 이었다.

“내마음에 부끄럽지 않으면 잘사는기라. 내마음이 알어. 일을 알고 저지르지 모르고 저지른다는 것은 거짓말이여, 죄짓는 것도 알고 짓지, 모르고 짓는다는 것은 절대 거짓말이여. 도둑놈도 아니까 밤에 가만이 가잖아. 좋은일 같으면 낮에 가지만…. 그러니까 익히길 바르게 익혀야 돼”

양심을 지키며 마음에 부끄럽지 않게 살아야 한다는 말씀이다. 하지만 미혹한 중생이 부처님 가르침을 올곧게 실천하며 사는게 어디 쉬운일인가. 무엇을 어떻게 익혀야 하는지, 그리고 바르게 익히는 것은 무엇인지 우문(愚問)을 드렸다. 스님의 할(喝)이다.

“양심에 안부끄러우면 돼는거야. 내마음이 알어. 알고도 저지르거든 나쁜줄 알면서도 하거든, 내(我) 라는 것. 참으로 잘 살려면 져야 돼. 옳은 것은 그사람도 다 알어. 그러니 이길려고 하지말어. 지는 게 이기는 거야.”

욕심으로 가득한 중생에게 스님은 부처님 가르침을 소중하게 간직해야 한다며 수행의 방법으로 하심(下心)과 인욕(忍辱)을 강조했다.

“지면 돼 인욕이 최고야. 때린 사람은 오그리고 자고, 맞은 사람은 발뻗고 잔다고 했거든. 그런데 사실은 그게 어려워”

마루문을 열어놓아 찬바람이 솔솔 들어왔지만, 고송스님은 개의치 않을 만큼 건강이 좋았다. 고송스님은 요즘도 새벽 3시 도량석을 도는 시간이 되면 어김없이 자리에서 일어난다. 한시도 부처님 가르침을 놓아 본적이 없다. 스님에게 부처님은 영원한 스승이다.

“부처님이 왕위를 버리고 유성출가 했거든. 설산에 들어가 육년을 고행했지. 까치가 어깨에 집을 짓고, 거미가 눈에 거미줄을 쳤어도, 털끝만치도 흔들리지 않고 용맹정진 했잖아. 이게 부처님의 역사야”

1954년부터 떠나지 않고 파계사에 주석하고 있는 고송스님은 법상(法床)에 오르는 것을 사양했다. 스님의 수행을 엿볼 수 있는 대목이다.

고송스님은 1905년 경북 영천에서 태어났다. 15세 어린나이에 팔공산 파계사에서 불문(佛門)에 들었다. 25세되던 1930년부터 15년 동안 금강산 마하연과 유점사, 신계사를 거쳐 묘향산 보현사에서 선지식들과 수행정진했다.

스님은 석우스님 상좌인 우봉스님과 함께 압록강을 건너 북경까지 만행을 다니며 세상사에 대한 견문(見聞)을 넓혔고, 이를 깨달음에 이르는 방편(方便)으로 삼았다.

고송스님은 북녘땅 금강산과 묘향산에서 정진하던 시절을 회고했다. “요새는 교통이 좋아. 옛날에는 모두 걸어 다녔어. 처음에 금강산 갈때는 포항서 배타고 장전항까지 가서 신계사로 갔지. 신계사에서 송림사라는 암자를 거쳐 유점사까지 걸어갔어”

묘향산에 대한 기억도 생생하다. “묘향산 법왕대 조사전에서 보면 신의주가 보였어. 어제 같기만 한데 말이야”

스님은 공부하는데 시간이 없다며 찰라같은 삶을 ‘제대로’ 살아야 한다고 강조했다. “한이 없는 거야. 시간이 없어. 가는 시간이 없고, 죽는 시간이 없어. 찰라간이라, 그러니 시간이 없어, 올 때 날 받아 오지 않은 것처럼 가는 시간도 없어. 잠깐이라”

미혹하고 어리석은 중생들에게 스님은 현재의 심경도 숨김없이 토로했다. “나는 오늘까지 90여년 살아도… 이젠 급하단 말이여, 시간이 어떻게 갔는지, 이제는 버릴 시간이거든, 단단히 버릴때는 고(苦)가 오거든, 거저 죽지는 않거든, 집이 무너질때는 야단이란 말이여”
노스님의 법문을 듣고 나선 요사채 앞에는 어느새 찬바람이 팔공산 골짜기를 파고 들어왔다.

군데군데 녹아있는 얼음과 저녁 햇살이 팔공산을 점차 물들이고 있었다. “밥먹고 가”라는 스님의 정겹고 다정한 목소리에 합장 반배하고 물러선 도량 한켠에는 그저께 눈오는날 누군가 만들어 놓은 ‘꼬마 눈사람’이 천진스런 미소를 짓고 있었다.

일광동조(日光東照). 해가 비추면 온 세상 구석 구석 밝음을 선사한다. 아무리 폭설이 산하를 덮어도, 해가 뜨면 녹는 법이다. 백수를 바라보는 노스님이 한평생 살아오면서 배어있는 수행 향기는 어리석고 욕심내며 사는 중생들의 업장을 모두 녹여줄 것이다.

팔공산을 걸어내려오는 내내 머리속에는 고송스님이 거듭 당부한 말씀이 맴돌았다. “인욕 안하면 공부 못해, 참아야 돼. 자기 마음대로 하면 공부가 안돼, 자기는 알거든, 그래서 부처님 이름이 인욕선인(忍辱善人)이야”

대구 파계사=글 李成洙기자
사진 金亨周기자


● 한암스님과 만해스님에 대한 기억

한암스님을 처음 만난 곳은 서울이다. 그때가 을축년이니까 70년이 넘었다. 한암 노장은 법상에 올라가는 법이 없었다. 그때 탄옹 스님이 상원사에 있었는데, 법문은 꼭 탄옹스님을 시켰다.

당신은 절대 법상에 올라가지 않았다. 한암스님은 ‘지인과(知因果) 명사리(明事理)’라며 인과를 알고 사리에 밝아야 한다고 했다. 스님의 가르침은 지금도 생생하다.

한번은 유점사, 건봉사, 월정사 학인들이 상원사서 머문적이 있다. 학인들이 반찬값을 다 내는데 선방과 똑같이 먹는다고 불만이 많았다. 하루는 건봉사 주지가 “우리는 반찬값을 다 내는데, 왜 큰방 대중과 똑같이 짠김치쪽 하나만 주느냐”고 불만을 터트렸다.

건봉사 주지와 학인들이 나에게 그같은 불만을 얘기해 달라고 부탁했다. 노장에게 그 말을 전달하자 한암스님은 “먹은죄는 있었도 안먹은 죄는 없다해라”고 말했다. 좋은 음식 나쁜 음식 가리지 말고 정진하라는 스님의 뜻이었다.

서울 선학원에 있을때는 만해스님과도 같이 살았다. 만해스님은 앉은키는 커도 선키는 얼마 안됐다. 앉은키는 크고 선 키는 작아 다른 스님들에게 ‘놀림’을 당했다. 그러면 만해스님은“내가 키 작아도 코 뱀한테 안 물린다.

키 큰 놈 먼저 문다”고 대꾸하던 모습이 눈에 선하다. 또 남전스님과 만해스님이 3년을 선학원에서 겸상을 했는데 서로 밥만 먹고 말을 안했다. 이를 본 경산스님의 말씀이 걸작 이었다. “여기 아주 괴물이 둘 있다”

한암스님과 만해스님 그리고 남전스님, 경산스님. 도반이었던 우봉스님과 함께 살던 시절이 엊그제 같다. 하지만 몸은 실체(實體)가 없으니 끄달릴 필요는 없다.

不讀金文不坐禪
無言相對是何宗
非風流處風流足
碧峰千年秀古松

경도 읽지 않고 좌선도 하지 않으며 / 말없이 상대하 니 이 무슨 종(宗)인고 / 풍류 아닌 곳에 풍류가 넘치니 / 푸른 묏부리에 천 년 묵은 고송이 빼어났네


무인년(1938년) 12월 27일 상원사 조실방에서 한암스님이 고송스님에 써준 게송이다.



2003-09-22 오후 12:08:59 수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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