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새연재 옛문헌에 나오는 '한반도 명산'ㅣ<2> 고려사] 경상 지역 명산 빠지고 충청 이북 대거 지정

2019. 12. 18. 22:35산 이야기



[새연재 옛문헌에 나오는 '한반도 명산'ㅣ<2> 고려사] 경상 지역 명산 빠지고 충청 이북 대거 지정

    

입력 2019.11.18 21:24

왕건, 단군 후손 자처하며 산신숭배… 팔관회 통한 오악·명산대천 神氣 받아들여

   통일신라가 전국을 다스리기 위해 지정한 명산대천 대사·중사·소사 삼산오악제도 이후 한반도 명산을 규정하는 데 결정적으로 작용했다. 9월호 제목 그대로 ‘고대 명산이 지금도 명산’인 것이다. 고려시대와 조선시대까지 큰 틀에서는 별로 달라지지 않았다. 다만 기준은 조금 차이가 있었다.
신라가 왕도인 경주를 중심으로 후삼국을 효과적으로 다스리기 위한 다수의 명산을 조직적·체계적으로 배치함으로써 영토를 수호한다는 전략적 개념이 강했다. 대사 삼산은 경주를 호위하는 세 개의 산을 지정했고, 중사 오악은 후삼국의 주요 영역에 해당하는 산들을 통일 후 국가에서 지정관리 했다. 20여 개에 달하는 소사의 명산들은 지방호족을 관리하는 성격이 강했다. 통일신라는 대사·중사·소사로서 수도와 전국·지방으로 나눠 국가를 통치하는 기반을 마련하려고 했다. 반면 고려시대의 명산제의名山祭儀는 신라가 했던 지정학적이고 전략적 위치와 함께 산악신령과 관련한 산악숭배의식이 굉장히 강하게 나타난다. 동시에 자연재해를 해결하기 위한 상징적 수단으로도 활용했다는 점이 신라의 명산대천제와 조금 다르게 나타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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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려사> 태조편에 나오는 훈요십조와 관련된 내용.

산천 신의 도움으로 건국과 통일 위업
   고려의 명산대천 제사는 태조 초기부터 시작했다. 태조는 민심을 수습하고 국정을 운영하는 데 산천숭배를 중요하게 여겼다. 왕건은 후삼국 전쟁기에도 산천 신의 영험에 기대어 백성의 마음을 안정시키며 나라를 운영하고자 했다. 그는 훈요訓要에서도 ‘삼한산천의 음우로 대업을 이뤘다’ 기록을 남겼다. 또한 자신이 지극히 원하는 바는 연등과 팔관에 있다고 하여 ‘팔관은 천령天靈과 오악, 명산, 대천, 용신龍神을 섬기는 것이다’라고까지 했다. 태조는 팔관회를 통해 오악과 명산대천의 신기를 받아들였다. 이러한 산천 신의 도움으로 건국과 통일의 위업을 이뤘다고 믿었다.

   <고려사> 고려세계 편 ‘이름이 호경虎景이라는 사람이 있어 스스로 성골장군이라고 불렀다. 백두산에서부터 두루 돌아다니다가 부소산의 왼쪽 골짜기에 이르러 장가들고 살림을 차렸는데… (중략) 호경이 호랑이와 싸우려 했는데 갑자기 호랑이는 사라지고 아홉 명의 장군은 동굴을 빠져나오지 못했다. 호경이 평나군에 알리고, 돌아와 아홉 명의 장사를 지내려고 먼저 산신에게 제사를 올렸는데, 그 신이 말하기를 “나는 과부로서 이 산을 다스린다. 다행히 성골장군을 만나 부부가 되어 함께 신정神政을 다스리고자 하니 이 산의 대왕으로 봉하기를 청한다. 평나군의 백성들은 호경을 봉하여 대왕으로 삼고 사당을 세워 제사를 지냈으며, 아홉 장군이 함께 죽었다 하여 산 이름을 고쳐 구룡산이라 했다’ 나온다. 왕건 산신 단군의 후손이라는 점을 강조하고 있다고 역사학자들은 설명한다.

   같은 책 권2 태조편에 ‘왕이 훈요십조를 내리다’는 내용의 십조 중 여섯 번째에 ‘내가 지극히 바라는 것은 연등회와 팔관회에 있으니, 연등회는 부처를 섬기는 까닭이고, 팔관회는 하늘의 신령 및 오악五嶽·명산·대천·용신을 섬기는 까닭이다. 후세에 간신들이 이 행사를 더하거나 줄일 것을 건의하는 것을 결단코 마땅히 금지하라’고 기록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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변산은 삼국시대부터 등장하는 명산으로 고려시대에도 국가에서 산천제를 지내는 산으로 지정했다.

   태조 26년(943)에 내린 훈요십조는 고려왕조 내내 가장 큰 영향을 미친 내용이다. 산수와 직간접적으로 관련한 주요 내용만 세 개조 정도 된다. 두 번째 조 ‘여러 사원은 모두 도선이 산수의 순역을 미루어 점쳐서 개창한 것으로, 도선이 이르기를, “내가 점을 쳐 정한 곳 외에 함부로 덧붙여 창건하면 지덕地德이 줄어들고 엷어져 조업이 길지 못하리라”고 하였다. 신라 말에 다투어 사원浮屠을 짓다가 지덕이 쇠하고 손상되어 결국 망하는 데 이르렀으니 경계하지 않을 수 있겠는가?’라고 내렸다. 다섯 번째에도 ‘내가 삼한 산천의 음우陰佑에 힘입어 대업을 이루었다. 서경西京(지금의 평양)은 수덕이 순조로워서 우리나라 지맥의 뿌리가 되고 대업을 만대에 전할 땅이다. 마땅히 춘하추동 네 계절의 중간 달에 왕은 그곳에 가서 100일이 넘도록 체류함으로써 나라의 안녕에 이르도록 하라’기록하고 있다. 여덟 번째 ‘차현車峴 이남과 공주의 금강 바깥쪽은 산의 모양과 땅의 기세가 모두 배역으로 뻗어 있는데 사람들의 마음도 그러하다. 그 아래 주군州郡의 사람들이 조정에 참여하고 왕후나 외척과 혼인해 나라의 정사를 잡게 되면, 국가의 변란을 일으킬 수도 있고, 통합당한 원한을 품고 왕실을 침범해 난을 일으킬 수도 있다. 또 일찍이 관청에 예속된 노비와 진·역의 잡척이 권세가에게 투탁해 신분을 옮기거나 역을 면제받기도 할 것이며, 왕후나 궁원에 빌붙어 간교한 말로 권력을 희롱하고 정사를 어지럽게 하여 재앙에 이르게 하는 자가 반드시 있을 것이다. 비록 양민이라 하더라도 마땅히 그를 관직에 올려 일을 맡겨서는 안 된다’는 내용이 나온다.

   성종산천의 제사체계를 크게 정비했다. 나라의 제장을 정하고 제사의례를 통일했다. 현종 때는 영토의 동·남·서쪽 방면의 한계를 상징하는 해신의 제장을 정비해 국왕의 통치권이 미치는 영역을 확장했다. 왕은 명산대천에 제고사祭告使를 파견해 각지의 통치영역에 깃든 산천 신을 섬겼다. 산천제를 올려서 나라의 수호와 백성의 생활을 안정시키고자 했다. 나라의 산천제는 신명을 섬기어 나라의 안정과 질서를 이루기 위한 상징적 통치행위였다.
고려의 명산대천 제사는 신라의 제도를 계승하면서 동시에 일부는 폐지했다. 나라의 요충으로 지정한 명산대천 제사는 영험한 신령이 깃들어 지역과 나라를 수호할 것으로 여전히 믿는 지역은 계승했다. 반면 신라의 왕실 수호 신격이었던 삼산의 제사는 고려에서는 완전 폐지했다. 또한 고려에서 국가 제장을 개경 일대와 서해도의 산천제 신설했다. 각 방면을 대표하는 지방행정의 중심지에 위치한 산천도 국가 제장이 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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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흥 천관산은 고려시대부터 명산대접을 받기 시작했다.

왕건 고향 개성 지역 명산 떠올라
   이에 따라서 지정된 고려시대 명산은 전국적으로 고루 분포했다. 경기지역 개성 송악·용수산·진봉산, 우봉군에 구룡산, 정주의 백마산, 송림현의 오관산, 적성현의 감악, 남경의 삼각산, 강화현의 마니산과 전등산, 과주의 관악산, 양근현의 용문산, 가평군의 화악산·청평산. 충청지역청풍현의 월악(월형산), 진주의 태령산, 연기현의 원수산, 공주의 계룡산, 회덕 계족산, 이산현의 가야산, 신창현의 도고산. 경상도 지역일선현의 금오산, 경산부의 가야산, 흥주의 소백산. 전라 지역 남원부의 지리산, 진안의 마이산, 보안현의 변산, 무풍현의 상산, 나주목의 금성산, 장흥부의 천관산, 영암군의 월내악(월생산, 지금의 월출산), 해양현의 무진악, 탐라현의 한나산. 강원지역장양군의 풍악산, 동주의 보개산, 삼척현의 태백산 등이 국가나 관에서 제사를 지내는, 즉 관리하는 명산들이다.

   신라 삼산제도에서 지정된 명산들과 비교하면 조금 달라진 특징이 나타난다. 우선 경주 주변의 산들은 일제히 빠졌다. 9월호에서 삼국사기에 나온 한반도 명산 지도에서 나타났듯이 경주 주변은 지금 위치도 확인할 수 없는 산까지 대사나 소사로 지정한 사실을 알 수 있었다. 반면 고려에서는 경주뿐만 아니라 경상도의 산들이 대거 제외되고 불과 3개만 제사를 지내는 명산으로 지정됐다. 반면 전라도의 명산은 8개나 지정했다. 조금 의아한 내용이다. 태조 왕건이 훈요십조 여덟 번째 조에서 지적한 ‘차현(지금의 차령산맥) 이남은 산의 모양과 땅의 기세가 모두 배역背逆이라 관직에 올려서는 안 된다’고 해놓고선 경상도보다 훨씬 많은 명산을 지정했다. 다소 이율배반적인 모습이지만 이를 곰곰이 따져보면 이해되는 측면이 없지는 않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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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안 마이산은 그 독특한 모양과 기운으로 삼국시대부터 명산대접을 받았다.
   통일신라도 전국의 명산대천을 지정할 때 호국적 성격의 명산과 수도방위, 지방호족관리 등 다양한 측면과 연계된 사실을 알 수 있었다. 고려도 이러한 사실과 별로 다르지 않은 것 같다. 훈요십조에 지적한 차령 이남 지역의 호족들을 관리하고 동태를 파악하는 일환으로 전라도 지역에 명산을 8개나 지정한 것으로 짐작된다. 반면 경상도는 3개밖에 지정하지 않았지만 후삼국 시절 왕건이 전투에 패하면서 견훤에 쫓겨 다니면서도 큰 도움을 받은 사실을 상기하면 믿을 만한 땅이라고 판단한 것 아닌가 여겨진다.
고려시대의 명산은 현재의 명산과 별로 차이 나지 않지만 통일신라와는 조금 차이를 나타내며 충청 이북의 명산들이 대거 편입된 사실을 알 수 있다. 그나마 다행스런 일이 아닐 수 없다. 북방으로 진출하는 교두보를 마련했다는 점에서 긍정적 측면으로 지적된다. 조선시대의 명산은 고려시대와는 조금 다른 차이를 느낄 수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