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울에 있는 동천(洞天) 바위글씨의 분포와 성격

2022. 8. 22. 02:40산 이야기

서울에 있는 동천(洞天) 바위글씨의 분포와 성격*1) 2)

허경진**

 

【국문초록】

  글자가 없던 시대에 인류는 자신들에게 의미있는 사건이나 이야기를 바위에 그 림으로 그리거나 새겨서 남겼다. 글자가 그림을 대신하면서 바위글씨의 내용이 다 양해졌는데, 이미 일어난 사건보다는 앞으로 이뤄지기를 바라는 이상향(理想鄕), 또는 자신의 인생관을 표현하는 글자들이 많다. 바위에 많은 글자를 새기기 힘들 었으므로 주로 서너 글자를 새겼는데, 그 가운데 많은 글자가 바로 동천(洞天)이 다. ‘동천(洞天)’ 앞에는 자신의 호(號)나 지명, 또는 주변 경관의 특성을 함축하 는 두 글자를 많이 새겼다.

   필자는 현재까지 서울시에서 130 개의 바위글씨를 조사했는데, 이 가운데 14군 데 40여 개의 바위글씨가 동천을 표방하였다. 전체 바위글씨의 삼분의 일이나 되는 셈이다. 이 가운데 자하동천은 관악산, 벽운동천은 수락산, 제일동천은 도봉산에 새겼으니 글자 그대로 신선세계 동천(洞天)이라고 생각하여 새길 만하지만, 나머지 바위글씨들은 대부분 사대문 안팎에 걸쳐 있어서 동천이라고 붙이기에는 적합하지 않은 곳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곳에 주거지를 소유한 사대부들은 자신의 주거지 주변 바위에 동천이라고 새겼다. 여러 가지 사정으로 귀거래(歸去來)하지 못하는 사대부들이 동천이라는 바위글씨에 자신의 이루지 못하는 꿈을 담은 것이다.

   서울시의 바위글씨를 집중적으로 조사하면 바위글씨의 숫자도 더 늘어나고, 동천도 더 찾아낼 가능성이 있다. 서울시의 바위글씨를 집대성하여 조선시대 사대부들의 염원을 분석하고, 자연경관과 역사문화유산 복원의 자료로 삼으며, 바위글씨 둘레길 지도를 시민들에게 소개할 필요가 있다.

 

* 이 논문은 2016년 8월 4일 연세대학교에서 개최된 제12회 한국언어문학문화국제학술 대회에서 서울의 바위글씨에 나타난 도교신앙이라는 제목으로 발표되었다가, 토론자의 의견을 반영하여 제목과 내용을 수정 보완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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핵심어 : 서울, 바위글씨, 동천, 역사문화유산, 표석, 자연경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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차례

1. 머리말: 바위글씨 목록의 필요성

2. 서울 바위글씨의 목록

3. 서울 바위글씨의 특성

4. 주거지 속의 동천(洞天)

5. 도교적 기능을 표방한 기천석(祈天石)과 연단굴(鍊丹窟)

6. 맺음말

 

1. 머리말: 바위글씨 목록의 필요성

   글자가 없던 시대의 인류는 자신들에게 의미있는 사건을 바위에 그림으 로 그려 남겼다. 바위그림[巖刻畵]은 풍요(豊饒)와 다산(多産)을 기원하는 것으로 시작하여, 전투와 사냥의 기록으로 발전하였다. 국보로 지정된 울 산 천전리ㆍ대곡리의 암각화가 이러한 내용을 담고 있는데, 문자를 사용하 는 시대에는 같은 자리에 바위글씨를 새겼다. 신라시대 화랑들의 이름도 새겨져 있으며, 조선시대 선비들이 바위의 모습을 보고 ‘반구(盤龜)’라고 글자를 새겨 반구대로 알려지게 되었다.

   바위에 새긴 그림과 글씨는 이 일대에 살았던 사람들의 삶의 흔적인데, 종이에 쓰는 글씨와 달리 바위에는 많은 글씨를 새기기 힘들기 때문에 몇 글자에다 함축적인 의미를 담아야 했다. 자신의 염원을 담거나 주변의 아름 다운 경치를 함축적으로 표현하면서 바위글씨는 하나의 문학작품이 되었다. 삼청동문(三淸洞門) 바위글씨는 현판 대자의 전형을 보여주는 뛰어난 글씨로 서울특별시 문화재자료 제58호로 지정되었고, 백호정(白虎亭) 바위글씨는 명필로 알려진 엄한붕(嚴漢朋)의 글씨라는 이유로 서울특별시 문화재자 료 제59호로 지정되었으며, 월암동(月巖洞) 바위글씨는 역사적 명소라는 이유로 서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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특별시 문화재자료 제60호로 지정되었다. 1) 부암동 백사실 일대가 명승 제36호로 지정된 것도 아름다운 경치 뿐만 아니라 백석동천(白石洞 天)․월암(月巖)의 바위글씨가 갖춰져 그 유래를 입증할 수 있었기 때문이다.

   서울에 수많은 바위글씨가 남아 있어 그 가운데 일부는 문화재로 지정되고 시민들의 사랑을 받고 있지만, 아직 바위글씨의 목록도 만들어지지 않았고, 본격적인 조사도 이뤄지지 않았다.

   서울의 바위글씨는 서울역사박물관의 바위글씨전(2004년 11월 26일2005년 1월 9일)을 통하여 여러 지역의 바위글씨 80 개가 일반인들에게 소개되었으며, 그 이후에 학계에서도 다양한 연구기 시작되었다.

   서울지역 바위글씨에 관한 연구는 주로 전통 조경 분야에서 이루어졌다. 조병상은 서울시 북악산 일원 암각문화 연구에서 청운동, 삼청동, 가회 동, 와룡동, 성북동, 부암동으로 항목을 나누어 바위글씨를 소개했다.2) 이상희는 북촌지역 바위글씨에서 나타난 생태문화적 의미 연구에서 구간 별 특성을 삼청동천, 옥호동천, 운룡동천, 월암동천, 청린동천으로 나누어 소개했는데, ‘바위글씨’라는 용어를 쓰게 된 이유는 길게 설명했지만 왜 ‘동천’이라는 용어로 바위글씨 지역을 분류했는지는 설명하지 않아 아쉽다.3)  문헌적인 근거가 없는 운룡동천, 월암동천 등의 명칭을 아무런 설명도 없이 사용했기 때문이다. 이 두 편의 논문은 같은 대학원 같은 전공에서 나온 석사논문이므로, 앞으로도 이 분야에 계속 연구가 이어질 가능성이 있다. 학술지 논문으로는 김해경․최기수가 조선시대 인왕산 바위글씨의 특성에 관한 연구에서 인왕산 바위글씨의 물리적 

1) 서울시보, 삼청동문․백호정․월암동 서울특별시 문화재자료 지정 고시 , 2015년 6월 26일.

2) 조병상, 서울시 북악산 일원 암각문화 연구 , 상명대학교 대학원 환경조경학전공 석사논문, 2014.

3) 이상희, 북촌지역 바위글씨에서 나타난 생태 문화적 의미 연구 , 상명대학교 대학원 환경조경학전공 석사논문, 20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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특성, 내용적 의미, 바위글 씨 장소에서 행해지는 행태를 분석하였고,4) 김홍곤․김용모가 서울 북악 산 도화동 원림유적에 대한 고찰 에서 도화동 원림유적을 답사하여 바위 글씨를 소개하였다. 도화동 원림의 바위글씨는 이미 알려진 내용들이지만, 일반인들에게 출입이 통제된 군부대 안을 직접 조사하여 김영상의 첫 소개5) 이후 50년 뒤의 현상을 소개했다는 점에서 의의가 있다.

   문학 분야에서는 주로 문화공간 차원에서 연구가 이루어졌는데, 바위글 씨 중심의 연구는 아니지만 이종묵,6) 김재남7)의 저서에서 몇 지역의 바위 글씨가 다루어졌다.

   바위글씨는 도시계획과 도시재생사업에도 중요한 변수가 된다. 필자는 종로구 옥인동의 인곡정사터(군인아파트)와 옥인제1재개발구역에 대한 서울시 용역을 수행하면서 이 지역의 주요 역사문화자산으로 겸재 정선의 인곡정사 터와 추사 김정희의 ‘송석원(松石園)’ 바위글씨를 활용하라고 제안했으며,8) 서울시에서 이 보고서를 바탕으로 하여 2017년에는 옥인1 보 전․관리를 위한 주거환경관리정비계획을 수립하여 전문가의 자문이 진행되고 있다. 필자는 2015년 서울시가 동부엔지니어링에 발주한 홍제천 상류 자연성 회복 및 경관복원 타당성조사용역에 MP로 참여하여 이요동(二樂洞) 바위글씨를 발견하고, 이 바위글씨가 담고 있는 ‘요산요수(樂山樂水)’의 가치관, 즉 ‘세검정계곡이 산 좋고 물 좋은 곳’이었다는 의견을 서울

4) 김해경․최기수, 조선시대 인왕산 바위글씨의 특성에 관한 연구 , 한국전통조경학 회지 25권 제2호, 2007.

5) 김영상, 서울 六百年, 한국일보사, 1989.

6) 이종묵, 조선의 문화공간 1-4, 휴머니스트, 2006.

7) 김재남, 한국의 문화공간과 예술, 보고사, 2016.

8) 허경진, 인곡정사 등 서촌 주요 역사문화자산 보전계획 , 서울특별시, 20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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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에 제출하여 2017년의 1단계 시범사업을 이끌어냈다. 이요동(二樂洞) 바위글씨를 중심으로 평창천 연결부부터 서울예고까지 300m 구간의 자연 경관을 복원 하는 ‘이요동(二樂洞) 계류길’ 시범사업에도 MP로 참여하게 되었다.

   이러한 보전계획이나 경관복원계획을 수행하면서, 서울의 다양한 문화 공간을 복원하려면 바위글씨 목록부터 정리하여 발표하는 것이 필요하다고 생각하게 되었다. 바위글씨가 있는 곳이 조선시대의 문화공간이었으며, 바위글씨가 바로 문화공간의 표석(表石) 역할을 하기 때문이다.

 

2. 서울 바위글씨의 목록

   필자는 지금까지 서울 지역에서 130여 개의 바위글씨를 조사하여 사진 을 찍고, 역사적인 배경을 확인하여 목록을 만들었다. 금강산이라든가 설 악산같이 도시로부터 거리가 먼 명승지의 바위글씨는 대개 유람객들이 자 신의 이름을 남기기 위해 새겼지만, 서울의 바위글씨는 대개 그곳에 살던 주인이 자신의 주거지임을 나타내기 위해 새겼다.

   지금까지 조사한 서울 바위글씨의 목록을 가나다 순의 구별(區別)로 소개하면 아래와 같다. 실물이 확인되지 않더라도 사진이 있는 경우에는 일단 목록에 넣었다. 자연경관을 복원하는 과정에서 찾아낼 가능성이 있기 때문이다. 일단 주소(지명)순으로 정리하였지만, 지형순으로 하면 순서가 달라질 수도 있다. 물가에 많이 남아있는 바위글씨의 특성상, 골짜기에 따 라 주인이 같을 수도 있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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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표 1> 구명(區名) 동명(洞名) 유적명(遺蹟名) 바위글씨 비고

강북구 번동 산23 수경대(水磬臺) 수경대(水磬臺)

우이동 산68-1 우이구곡(牛耳九曲) 미륵폭동유(彌勒瀑同遊) 趙顯命 丙寅仲夏

관악구 관악산 자하동천(紫霞洞天) 자하동문(紫霞洞門) 단하시경(丹霞詩境) 자하동천(紫霞洞天) 백운산인(白雲山人) 자하동천(紫霞洞天) 자하진원(紫霞眞源)

노원구 상계동 1241 벽운동천(碧雲洞天) 벽운동천(碧雲洞天) 벽운계곡 국봉(菊峰) 운원대(雲源臺) 소국(小菊)

상계동 산145-8 금천동(錦川洞) 금천동(錦川洞)

도봉구 도봉동 408번지 도봉서원(道峰書院) 도봉동문(道峰洞門) 도봉계곡 입구

도봉동 산67번지 제일동천(第一洞天) 제일동천(第一洞天) 洞中卽仙境 洞口是桃源 연하롱처동문개 (烟霞籠處洞門開) 丁丑九月 道峰樵叟 용주담(舂珠潭) 만석대(萬石臺) 연단굴(鍊丹窟) 필동암(必東岩)

도봉동 515-1번지 도봉서원(道峰書院) 무우대(舞雩臺) 寒水翁 제월광풍갱별전 2구 (霽月光風更別傳) 華陽老夫書 염락정파(濂洛正派) 수사진원(洙泗眞源) 春翁書 광풍제월(光風霽月) 泉翁書 고산앙지(高山仰止) 庚辰七月金壽增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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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봉동 산29-1 도봉계곡 문사동(問師洞)

도봉동 512번지 복호동천(伏虎洞天) 복호동천(伏虎洞天) 도봉계곡

도봉동 산29-1 서광폭(西光瀑) 화락정(和樂亭)

도봉동 546번지 원통사(圓通寺) 상공암(相公岩)

방학동 산60-1 시루봉계곡 귀록계산(歸鹿溪山) 趙顯命 와운폭(臥雲瀑)

방학동 산69-1 천주교 묘지 연월암삼폭(延月巖三瀑) 와폭(臥瀑) 계수석(谿水石)

방학동 594번지 시루봉계곡 명월동문(明月洞門)

수유동 구천은폭(九天銀瀑) 부석금표(浮石禁標) 1788년 8월 20일

서대문구 홍은동 201-1번지 백련동천(白蓮洞天) 백련동천(白蓮洞天) 戊辰 八月 旣望 松石 寫

서초구 서초동 1705번지 정곡(鄭谷) 정곡(鄭谷) 정곡빌딩

신원동 산43번지 김병일묘 일대 분성백세(汾城百世)

성북구 성북동 2-22번지 쌍류동천(雙流洞天) 성락원(城樂園) 쌍류동천(雙流洞天) 城樂園 청산일조(靑山壹條) 장빙가(檣氷家) 阮堂 송석(松石) 영벽지(影碧池) 한시

은평구 불광동 산1-1번지 향림동(香林洞) 향림동(香林洞) 한국기독교 수양관 경내

종로구 가회동 1-5번지 청린동천(靑麟洞天) 청린동천(靑麟洞天) 경남빌라 민영익 동벽산정고(洞僻山情古) 천청석기신(泉淸石氣新)

궁정동 1-1번지 칠궁 냉천(冷泉) 한시 1727년 御墨雲翰 자연(紫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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누상동 산1-3번지 일세암(一洗巖) 일세암(一洗巖)

누상동 166-87 백호정(白虎亭) 백호정(白虎亭)

누상동 청와동(靑瓦洞)

누하동257 기암동천(奇巖洞天) 기암동천(奇巖洞天) 한옥호텔 산정석경(山亭石逕)

명륜동1가 5-99번지 증주벽립(曾朱壁立) 증주벽립(曾朱壁立) 尤庵 宋時烈

부암동 산10번지 백석동천(白石洞天) 백석동천(白石洞天)

부암동 산12번지 월암(月巖)

부암동 322-6번지 청계동천(靑溪洞天) 청계동천(靑溪洞天)

부암동 산16-1 석파정(石坡亭) 삼계동(三溪洞) 서울미술관 소수운렴암(巢水雲簾菴)

부암동 319-4번지 무계동(武溪洞) 무계동(武溪洞)

사직동 산1-1번지 황학정(黃鶴亭) 등과정(登科亭) 황학정 경내 황학정팔경(黃鶴亭八景) 戊辰菊月

삼청동 산2-27 만세동방(萬世東方) 성수남극(聖壽南極)

삼청동 산2-27 옥호동천(玉壺洞天) 옥호간(玉壺磵) 김조순 별서 옥호동천 바위글씨 삼청동 찾을 수 없음 산5-14 일관석(日觀石)

세종로 1번지 청와대 천하제일복지 (天下第一福地) 청와대 경내

삼청동 3-2번지 기천석(祈天石) 기천석(祈天石) 康月菴徐月堂 咸豊三年 癸丑仲春書 기천석(祈天石) 장희영(張喜榮) 辛酉生本仁同同治 元年壬戌仲春 고암회(高巖回) ○암향(○巖向)

삼청동 1-11번지 운룡대(雲龍臺) 운룡천(雲龍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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삼청동 산2-1 운룡정(雲龍亭) 활터

삼청동 산2-53 운룡대(雲龍臺)

삼청동길 92-2 삼청동문(三淸洞門) 삼청동문(三淸洞門)

삼청동 106-11 총리공관(總理公館) 사병(似屛) 안득불애(安得不愛) 총리공관 경내 강청대(康淸臺)

삼청동 133-5번지 옥호정(玉壺亭) 일관석(日觀石) 玉壺亭圖

삼청동 산3-1 영월암(影月巖) 영월암(影月巖) 월암동(月巖洞) 월암동(月巖洞)

송월길 48-1 월암동(月巖洞) 월암동(月巖洞) 월암근린공원

신교동 1-4번지 선희궁 터 후천(后泉) 감류천(甘流泉)

새문안길 50 경희궁 영렬천(靈冽泉) 경희궁 경내

신영동 168-6 세검정 우국 시가 정재용

옥인동47 송석원(松石園) 송석원(松石園) 땅속에 묻혀 있음 벽수산장(碧樹山莊)

옥인동 옥류동(玉流洞) 사진만 남음 인왕천(仁王/旺泉) 미륵존(彌勒尊) 석굴암

와룡동 1번지 창덕궁 옥류천(玉流川) 인종 어필 옥류천 암각시 庚午二月癸未

필운동 산1-2번지 필운대(弼雲臺) 필운대(弼雲臺) 배화여고 경내 계유감동(癸酉監董) 1873년 백사선생 필운대 한시 (白沙先生弼雲臺)

창신동 7번지 자지동천(紫芝洞泉) 자지동천(紫芝洞泉)

창신동 615번지 한양도성 좌룡정(左龍亭) 성곽 성벽으로 사용되고 있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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청운동 6번지 백운동천(白雲洞天) 백운동천(白雲洞天) 金嘉鎭

청운동 52-58번지 청풍계(靑楓溪) 백세청풍(百世淸風) 朱子, 金尙容

청운동 54번지 청운산장 청운산장(淸雲山莊) 丁丑春日

청운동 55-15번지 양산동천(陽山洞天) 양산동천(陽山洞天) 남거유거(南渠幽居) 장호진

청운동 89-3번지 청송당유지 (聽松堂遺址) 경기상업고등학교

청운동 89-9번지 운강대(雲江臺) 경복고등학교

청운동 산1-1번지 도화동천(桃花洞天) 무릉폭(武陵瀑) 대은암(大隱巖) 도화동천(桃花洞天) 쌍계동(雙溪洞) 산광여수고(山光如邃古) 석기가장년(石氣可長年) 사진만 남음 악록(岳麓) 명옥천(鳴玉泉) 한(韓) 성암(醒巖)

청운동 산1-1번지 암자터 보리밀타미륵보살불 (菩提密陀彌勒菩薩佛) 시주자 명단 백일당(百一堂) 산신당(山神堂) 천간당(天干堂)

평창동 산10번지 세검정계곡 이요동(二樂洞) 樂山樂水

평창동 북한산 동령폭포(東嶺瀑布)

혜화동 1번지 금고일반(今古一般) 금고일반(今古一般) 서울과학고교 영반(咏磐)

홍파동 2-32 문성묘 터 성동인우 애지산학 (性同鱗羽 愛止山壑) 구세군 영천영문

중구 소파길 청룡정 청룡정(靑龍亭) 활터

필동 26번지 동악선생시단 (東岳先生詩壇) 동악선생시단 (東岳先生詩壇) 동국대학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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필동5길 16 귀록정(歸鹿亭) 조씨노기(趙氏老基) 푸른빌라

필동5길 22 유묵록선기제석 (遊墨麓先基題石) 조현명 시

필동 용재 이행 집터 청학동이상국(靑鶴洞李相國) 용재서사유지(容齋書舍遺址) 사진만 남음

 

   서울시의 바위글씨를 조사하는 과정에서 150여 개의 목록을 작성하였지만, 한자시대(漢字時代)라고 생각되는 1945년을 하한선으로 정하여 위의 목록을 다시 만들었다. 이 시기의 주인들은 대부분 1910년 전후에 태어나 조선시대 문인들처럼 한문을 배웠고, 한자를 중요하게 생각하는 사고를 하였다. 1945년 이후의 주인들은 신학문을 하였기 때문에, 한국어 또는 일본어를 배웠으며 사고도 달라졌다. 1945년 이후부터 서울의 주거형태가 급속하게 달라져 바위글씨를 새길만한 공간도 줄어들었고, 주거 공간에 바위글씨를 새기려는 시도 자체도 거의 없어졌다. 신라호텔 경내 큰 바위에 박정희 전 대통령의 글씨로 ‘민족중흥(民族中興)’ 네 글자가 크게 새겨져 있지 만, 이와 같은 이유에서 목록에 포함시키지 않았다.

   종로구 화동 2번지 정독도서관 구내 우물에 평재(平齋)가 1900년에 크게 새긴 글씨가 있는데, 이곳이 바로 평재 박제순의 집터이다. 그러나 원래 그 자리에 있던 바위에 새긴 글씨가 아니라 우물을 만들기 위해 옮겨다 놓은 돌에 새겼으므로, 이런 경우에는 목록에 포함하지 않았다. 이토 히로부미 통감이 1909년에 쓴 한국은행 머릿돌 ‘정초(定礎)’ 글씨, 사이토 마코토 총독이 서울역을 공사하면서 1923년에 쓴 ‘정초(定礎)’ 머릿돌 글씨도 같은 이유로 포함시키지 않았다.

   단순히 사람의 이름만 새긴 글씨도 목록에 포함시키지 않았다. 시대를 확인하기 어려운데다가 의미도 없기 때문이다.

   마애비(磨崖碑) 경우에도 목록에 넣지 않았다. 원래 그 자리에 서 있던 바위에 글자를 새겼으니 바위글씨에 해당되지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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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릉동 이원우 불망비 처럼 큰 바위 한가운데에 비(碑)의 모양을 갈아서 비문을 새겼기 때문에 비석으로 분류하는 것이 타당하게 생각되었다.

   총독부 관리들이 조선 문인들과 어울렸던 시사(詩社)의 바위글씨나 총독의 바위글씨 사진도 목록에 넣지 않았다. 조선 문인들의 사유를 담은 글 씨가 아니기 때문이다.

 

3. 서울 바위글씨의 특성

   이 목록을 바탕으로 서울의 바위글씨가 지닌 특성을 정리하면 다음과 같다.

  1) 주소에 ‘산’이 많다. 바위글씨는 글자 그대로 바위가 있어야 새길 수 있으므로 산에 많이 남아 있다.

  2) 사대부들의 주거지였던 종로구 일대에 절반이 넘게 남아 있다. 조선시 대의 서울이 사대문 안이었으므로 종로구에 많이 남아 있는 것이 당연 하게 보이지만, 같은 사대문 안이면서도 중구에는 종로구의 10분의 1도 남아 있지 않다. 9) 조선시대 사대부들이 남촌보다는 북촌을 이상적인 주거지로 인식했음을 알 수 있다.

  3) 도성(都城)인 사대문 안쪽과 성저십리(城底十里)를 비롯한 바깥쪽에 골고루 남아 있는데, 안쪽은 대부분 북악과 인왕산 자락의 주거지이고, 먼 바깥쪽은 관악산, 도봉산, 북한산, 수락산 등의 명승지이다.

9) 일제시대 중구 남산에는 청룡정, 삼료동(三了洞) 복료태일(福了太一), 복천암(福泉岩), 동악선생시단 등의 바위글씨가 남아 있었는데, 지금은 청룡정과 동악선생시단 바위글씨만 확인된다. 국역 경성부사 제2권, 서울특별시 시사편찬위원회, 2013, 486-487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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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4) 유교적인 내용이 많으리라는 예상과 달리, ‘동천(洞天)’이라는 글자에서 볼 수 있듯이 도교적인 내용이 더 많다. 불교적인 내용은 많지 않았다.

  5) 관악산, 도봉산, 북한산, 수락산 경우에는 골짜기를 따라서 바위글씨들이 새겨져 있는데, 몇 개의 글씨가 ‘동천(洞天)’이라는 구역으로 묶어져 있다.

  6) 대부분의 ‘동천(洞天)’이 사대문 안에 있어, 사대부들의 주거지인 성시원림(城市園林)에서 신선세계를 꿈꾸었음을 알 수 있다.

  7) 백호정(白虎亭)․등과정(登科亭)․운룡정(雲龍亭)․좌룡정(左龍亭)․ 청룡정(靑龍亭) 등의 사정(射亭) 바위글씨가 많이 남아 있어, 사정 건물은 헐려졌어도 활터의 위치를 알 수 있다. 바위글씨가 서울 역사문 화유산의 표석(表石)임을 확인해 준다.

 

4. 주거지 속의 동천(洞天)

   이 목록에서 가장 많이 보이는 이름은 동천(洞天)인데, 동천은 동천복지 (洞天福地)의 준말이다. 동천복지는 신선들이 거주하는 별세계인데, 도교 에서는 동천복지가 명승지 깊은 곳에 있다고 믿었다.

   당나라 천사(天師) 사마승정(司馬承禎, 647-735)이 천지궁부도(天地宮 府圖)에서 10대동천(十大洞天)과 36소동천(三十六小洞天), 72복지(七十二福地)를 소개하며, 그 서문에서 “유질(幽質)이 그윽히 엉기어 명산(名山) 에 동부(洞府)가 열린다”10)고 하였다. 그는 “10대동천은 명산의 사이에 있는 데, 상천(上天)에서 군선(群仙)을 파견하여 통치하는 곳”11)이라고 했으며,

10) 司馬承禎, 洞天福地天地宮府圖(雲笈七籤 卷27, 正統道藏 第37冊, 太玄 部), 臺灣, 新文豊出版社, 1987. 幽質潛凝, 開洞府於名山.

11) 같은 곳, 十大洞天者, 處大地名山之間, 是上天遣群仙統治之所.

 

서울에 있는 동천(洞天) 바위글씨의 분포와 성격 179

 

“그 다음 36소동천도 여러 명산 가운데 있는데, 또한 상선(上仙)이 통치하는 곳”12)이라고 하였다. 우리나라에서는 고려시대 문인 이규보(李奎報)가 좌주 (座主) 박정규(朴廷揆)의 치정(致政)을 위로하는 자리에서 사(詞)를 지으며 “기쁨에 넘친 이 잔치자리를 동천의 신선 집에 자리잡았네[多喜開筵別占洞 天仙宅]”라고 하여 동천이 신선의 주거지임을 처음 소개하였다.13) 

   선계(仙界)는 추상적인 명칭이어서 지도에 표시할 수 없지만, 동천은 구체적인 명칭이어서 지도에 표시할 수 있다. 정성스런 뜻으로 부지런히 도를 닦아야 신선도 감응하여 영접할 수 있고, 수련을 이루게 되면 용과 학을 타고 올라가 하늘나라에 이를 수 있다고 했다. 그러나 조선시대 선비들 가 운데 도를 닦고 수련한 사람은 많지 않다. 도교에 관심이 깊었던 허균(許 筠, 1569-1618)이 남궁선생전(南宮先生傳) 에서 남궁두(南宮斗)가 수련 하는 과정을 자세히 묘사했는데, 그는 온갖 어려움을 극복하고 내단 수련 에 들어가 큰 깨달음을 얻었지만 마지막 단계에서 욕념이 끓어올라 니환 (泥丸)이 타오르는 바람에 끝내 신태(神胎)를 이루지 못하고 지선(地仙)의 경지에 머물고 만다.

   남궁두같이 전념하여 수련한 사람도 끝내 신태(神胎)를 이루지 못하고 지선(地仙)의 경지에 머물고 말았다는 결말은 조선시대에 신선이 된 사람은 없었다는 뜻이기도 하다. 신선이 되고 싶은 사람은 결국 문학적 상상력을 통해 신선이 될 수 밖에 없었다. 선계시(仙界詩)를 지어 자신이 선계(仙界)에 들어가거나, 자신의 거처를 동천(洞天)으로 설정하여 상상 속에 신 선이 되었다.

   조선시대에 우리나라의 동천을 체계적으로 정리해보려고 한 문인은 허균(許筠, 1569-1618)이다. 그는 정치적으로 

12) 같은 곳, 其次三十六小洞天, 在諸名山之中, 亦上仙所統治之處也.

13) 李奎報, 東國李相國集 後集 卷10, 丙申年 門生及第等設宴 慰宗工朴尙書 予於筵上作詞一首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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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침(浮沈)할 때마다 귀거래(歸去 來)를 꿈꾸었으며, 현실적으로 귀거래할 수 없는 상황에서 선계시(仙界詩) 를 지었다. 그가 동천을 체계적으로 정리하여 저술한 이유도 정치적인 목적 때문이었다. 정민은 장서각 소장 와유록(臥遊錄)에 실린 동국명산동천 주해기서(東國名山洞天註解記序) 와 제명산동천주해후(諸名山洞天註解後) 라는 서발문에 관심을 가지고 동국명산동천주해기(東國名山洞天註 解記)를 추적하여 허균의 저술이라고 밝혀냈는데, 14) 이 책의 실물은 전하지 않지만 “우리나라 각 지역에 산재한, 도교에서 말하는 신선들의 거주처인 洞天福地에 대해 자세히 소개하고, 각 동천복지의 속명과 위치, 각처를 관장하는 眞人仙官들의 이름을 정리해 놓은 것”15)이라고 설명하였다.

   남궁선생전을 지을 정도로 도교에 관심과 지식이 많았던 허균이 각지 에 흩어져 있는 동천을 소개한 것은 당연하다고 할 수 있는데, 지형(地形) 으로 본다면 숲으로 둘러싸여 들어오는 길과 나가는 길이 보이지 않고 하 늘만 둥그렇게 보이는 공간을 문인들이 동천이라고 표현하였다. 세상과 단절되어 자기만이 머무는 공간을 동천이라고 불렀던 것이다.

   조선시대 사대부가 원림(園林)을 경영하던 당시의 자연 경관을 가장 비 슷하게 느낄 수 있는 곳이 종로구 부암동의 백석동천인데, 지금도 이곳에 들어서면 사방이 숲으로 둘러싸여 바깥 세상으로 나가는 길이 보이지 않 고, 위로는 조그만 하늘이 올려다보이며, 시냇물만 바깥 세상으로 흘러 나 간다. 자하문 밖 시냇물 상류에 복숭아나무가 많았으니, 봄이면 복사꽃잎 이 떠내려와 “도화유수묘연거(桃花流水杳然去) 별유천지비인간(別有天 地非人間)”의 시가 저절로 읊어졌을 것이다.

14) 정민, 許筠의 東國名山洞天註解記와 도교문화사적 의미 , 도교문화연구 14집, 2000. 15) 같은 글, 38면.

 

서울에 있는 동천(洞天) 바위글씨의 분포와 성격 181

 

   현재까지 바위글씨를 통해 확인된 서울의 동천과 이 동천을 경영한 주인의 이름은 다음과 같다.

* 관악구: 자하동천(紫霞洞天, 신위)

* 노원구: 벽운동천(碧雲洞天, 홍봉한․이병직)

* 도봉구: 제일동천(第一洞天), 복호동천(伏虎洞天),

* 서대문구: 백련동천(白蓮洞天, 박문규)

* 성북구: 쌍류동천(雙流洞天, 심상응․이강)

* 종로구: 청린동천(靑麟洞天, 민영익), 기암동천(奇巖洞天, 구본웅), 백석동천(白石洞天, 김정희), 청계동천(靑溪洞天), 옥호동천(玉壺洞天, 김조순), 백운동천(白雲洞天, 김가진), 양산동천(陽山洞天, 장호진), 도화동천(桃花洞天, 김창흡․김조순).

   이 가운데 부암동 윤웅렬 별서(서울시 민속문화재 제12호)와 무계동(武 溪洞) 바위글씨 사이의 작은 시냇가 바위에 새겨진 청계동천(靑溪洞天)의 주인을 소개하는 문헌이나 설화가 아직 확인되지 않았지만, 산수(山水)가 아름다운데다 시냇가 커다란 바위에 새겼으므로 당시에 누군가 원림(園林)을 경영하였을 가능성이 있다. 무계동(武溪洞)과 거리는 가깝지만, 다 른 원림인 듯하다. 도봉구의 제일동천(第一洞天)과 복호동천(伏虎洞天)은 조선후기 유학자들이 노닐던 곳이었지만 원림의 흔적이 따로 확인되지는 않았다. 도봉서원(道峰書院)을 설립하고 운영하던 노론 계열의 유학자들이 수양하던 공간으로서 의미가 있다.

 

182 洌上古典硏究 제58집 (2017. 8)

 

<그림 1>

   위에 소개한 동천 14군데를 서울 지도에 표시한 <그림 1>을 보면 1번 자하동천이 서울 남쪽 끝에, 2번 벽운동천, 3번 제일동천, 4번 복호동천이 서울 북쪽 끝에 걸쳐 있고, 나머지는 모두 사대문 안에 있다. 이 네 개의 동천은 사대부의 일상적인 주거지가 아니라 수양과 풍류, 유람으로서의 공간인 명승지였다. 이 네 개의 동천을 제외한 나머지 동천 10군데를 표시한 지도 <그림 2>를 보면 서대문구에 있는 5번 백련동천과 성북구에 있는 6번 쌍류동천을 제외한 나머지 전체가 종로구에 있다. 사대부 문인들이 같은 사대문 안에서도 남촌보다는 북촌을 주거 공간으로서 선호했음을 알 수 있다.

 

서울에 있는 동천(洞天) 바위글씨의 분포와 성격 183

 

<그림 2>

   이 동천 가운데 규모가 큰 곳은 골짜기를 따라 몇 개의 바위글씨들이 새겨져 있는데, 도화동천(桃花洞天)에는 무릉폭(武陵瀑)이라는 바위글씨 까지 새겨져 있어 도잠(陶潛)의 귀거래사(歸去來辭) 에 나오는 무릉도원 (武陵桃源)을 연상케 한다. 도화동천(桃花洞天)은 남곤(南袞, 1471-1527) 의 대은암(大隱巖) 일대인데, 옛부터 복사꽃이 많이 피어 도화동(桃花洞) 이라고 불렸으므로 집 주인이 지형에 따라 도화동천(桃花洞天)ㆍ무릉폭 (武陵瀑)ㆍ쌍계동(雙溪洞)을 새겼다. 기암동천(奇巖洞天)은 가장 낮은 언덕에 새겨졌는데, 지금은 복잡한 동네 한가운데 한옥 마당에 남아 있다.

   바위글씨는 동천의 규모에 따라 크고 작게 새겼는데, 백석동천(白石洞 天)은 경계가 넓어서 한 글자가 50×55cm, 네 글자를 합하면 215×67cm이 다. 이에 비해 기암동천(奇巖洞天)은 20세기 초에 필운동ㆍ누하동에 도시형한옥이 세워지면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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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은 바위에 24×6cm 크기로 새긴 것이다. 그 옆 화단에 산정석경(山亭石逕)이라는 바위글씨도 새겼는데, 글자 그대로 돌비 탈길은 아니다. 이 집은 화가 구본웅(具本雄, 1906-1953)이 살던 집인데, 서울이 근대화하는 시기에 큰 필지를 작게 나눠서 분양하자 이 집 주인이 작은 바위에 기암동천(奇巖洞天) 네 글자를 새기고 자신의 호를 서산(西山)이라고 지어 상상 속에서 안식(安息)을 찾았을 것이다.

   도교의 신선세계는 오색(五色)으로 묘사되는데, 이 동천들의 이름 가운 데 자하동천(紫霞洞天)ㆍ벽운동천(碧雲洞天)ㆍ백련동천(白蓮洞天)ㆍ청 린동천(靑麟洞天)ㆍ백석동천(白石洞天)ㆍ청계동천(靑溪洞天)ㆍ백운동 천(白雲洞天) 등의 명칭에서 선계의 색채를 느껴볼 수 있다.16)

   이들 동천 가운데 여러 군데에서 거주지 흔적이 확인되는데, 백석동천 (白石洞天)에는 안채ㆍ사랑채ㆍ정자 등의 건물터와 주춧돌, 석축들이 남아 있어, 큰 규모의 별서(別墅)였음을 알 수 있다. 서울시 동명연혁고(洞 名沿革考)에 1830년대에 지어진 600여 평의 별장이었으며 1967년까지 내려오고 있다고 하였다. 그 이후에 무너져 집터만 남은 것이다. 박규수(朴 珪壽, 1807-1876)의 시 석경루잡절(石瓊樓雜絶) 20수․6 에

惆悵白石亭 슬프다 백석정이여

眞人讀書處 진인이 독사하던 곳일세.

唯有一道溪 오직 하나의 도계가 있어

長何人間去 길이 인간 세계로 흘러가누나.

16) 백련동천(白蓮洞天)은 백련산과 홍제천, 즉 배산임수(背山臨水)의 위치에 있는데, 백(白)은 서쪽, 연(蓮)은 불교이니, 서울(한양) 서쪽에 있는 백련산(白蓮山)ㆍ백련 사(白蓮寺)와 연관하여 불교적인 색채도 찾아볼 수 있다. 그렇지만 백련산이 불교적 인 명칭일 뿐, 백련동천까지 불교적인 명칭이라고 할 수는 없다.

 

서울에 있는 동천(洞天) 바위글씨의 분포와 성격 185

 

라 하고 아래와 같이 주를 달았다. “석경루 북쪽은 수석이 매우 기이한데, 그 위에 백석정 옛터가 있다. 세상에 전하기를 허진인(許眞人)이 머물던 곳인데, 어느 때 도사인지는 알 수 없다. 아마도 도연명이나 환공의 무리일 것이다[石瓊樓北泉石甚奇 上有白石亭舊址 世傳許眞人所居 眞人不知 何代人 葢陶桓流也.]”17)라고 하였다. “허도사가 단약을 만들던 곳이라고 전한다[相傳爲許道士煉丹處]”라고 했으니, 동천에서 도교 수련을 했음이 확인된다. 그러나 나머지 대부분의 동천들은 실제로 수련하던 곳이 아니라, 선계에 갈 수 없는 선비들이 상상 속에서 선계를 즐긴 곳이다.

   동천이 상상 속의 이상향이어서 조선후기의 문인 유만주(兪晩柱, 1755- 1788)나 홍길주(洪吉周, 1786-1841) 등이 자신의 주거지를 상상 속에 동천 으로 설계하였다. 유만주는 동대문 밖에 영동별서(潁東別墅)를 경영하였는 데, 앵화촌(櫻花村)․춘몽지(春夢池)․대제지(大堤池)․뇌공서(礧空嶼)․ 하원(霞園)․무릉정(武陵亭) 등을 둘러보며 천상암(川上巖)을 거쳐 동천에 들어서면 높다란 바위에 ‘인지동천(仁智洞天)’ 네 글자가 촉석루(矗石樓) 편액 만큼이나 큰 글씨로 새겨져 있다고 인지동천기(仁智洞天記)에 소개하였다. 홍길주는 삼광동천(三光洞天)에 도교 사원[道觀]까지 설계하였다. 그러나 유만주가 새겼다는 ‘인지동천(仁智洞天)’ 바위글씨나 홍길주 가 숙수념(孰遂念)에서 소개한 삼광동천(三光洞天)의 바위글씨가 아직도 확인되지 않아, 이러한 동천은 이들이 상상 속에서 꿈꾸었을 뿐, 끝내 이루지 못한 꿈이었음을 알 수 있다.

17) 朴珪壽, 瓛齋先生集 卷一, <石瓊樓雜絶 二十首․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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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 도교적 기능을 표방한 기천석(祈天石)과 연단굴(鍊丹窟)

   조선후기 사대부들의 생활 이념은 당연히 유학(儒學)이었지만, 서울에서 유학을 표방한 바위글씨는 뜻밖에 적다. 도봉서원 주변의 바위글씨들은 한 시대 유학자들이 도봉서원을 운영하면서 의도적으로 써서 새긴 것이어서 예외적인 상황이고, 자신의 주거지에 새긴 것은 거의 없다. 선원(仙源) 김상용(金尙容, 1561-1637)의 청풍계에 남아 있는 백세청풍(百世淸風)과 우암 송시열의 명륜동 집터에 남아 있는 증주벽립(曾朱壁立) 정도이다. 유교보다는 오히려 도교를 표방한 바위글씨가 많다.

   동천(洞天) 다음으로 도교 신앙을 나타낸 대표적인 바위글씨는 ‘삼청동문(三淸洞門)’과 ‘기천석(祈天石)’이다.

   이 바위글씨들은 모두 삼청동(三淸洞)에 있는데, 유본예(柳本藝)가 지은 한경지략(漢京識略)에 “산이 맑고, 물이 맑고, 사람이 맑아서 삼청동이라 하였다[山淸, 水淸, 人淸, 爲三淸也.]”고도 했지만, “예전에 삼청도관 (三淸道觀)이 이곳에 있어서 삼청동이라 하였다[舊時三淸道觀, 在此故.]” 고도 하였으니, 이 바위글씨들을 통하여 소격서(昭格署)가 폐지된 조선후 기에도 삼청동(三淸洞)이 하늘에 기도하던 공간이었음을 알 수 있다.

   관악구의 자하동천(紫霞洞天)과 자하동문(紫霞洞門)의 관계에서도 알 수 있듯이 동문(洞門)은 동천(洞天)의 입구이다. 지금 삼청동천(三淸洞天) 바위글씨는 찾아볼 수 없지만, ‘삼청동문(三淸洞門)’도 삼청동천의 입구라 는 뜻이다. 삼청동천, 즉 삼청동 골짜기에도 시냇물이 두세 군데 흐르는데, 삼청동 3-2번지에 있는 기천석(祈天石) 두 개는 숲으로 둘러싸인 다른 동 천(洞天)과 달리 산 위에 툭 트여서 전망이 활짝 열려 있는 곳에 있다. 글 자 그대로 하늘에 기도하던 바위인데, 서로 다른 시기에 두 부부가 하늘에 기도했다. 기도한 내용까지 새기지는 않았지만, 국가나 사회를 위해서 기도했다기보다는 자기

 

서울에 있는 동천(洞天) 바위글씨의 분포와 성격 187

 

집안과 부부, 구체적으로는 자식을 낳게 해달라거나 부부가 건강하게 해달라고 기도한 듯하다. 천자(天子)만 하늘에 제사할 수 있기에 조선왕조도 대한제국이 개국된 뒤에야 환구단(圜丘壇)을 쌓고 하늘에 제사하였는데, 민간에서는 그 전부터 기천석 바위글씨를 새기고 그 앞에서 하늘에 개인적인 소원을 기도하였던 것이다.

   도봉산 제일동천에도 ‘연단굴(鍊丹窟)’ 바위글씨가 있지만, 이에 관한 문헌상의 기록을 확인할 수 없다. 도봉서원과 관련된 학자들의 글씨는 아닌 듯한데, 이름이 알려지지 않은 도사가 개인적으로 수양하던 공간을 표시해 놓았던 듯하다.

   서울의 바위글씨에 ‘동천(洞天)’을 비롯한 도교적인 성격이 일부 보이지 만, 지극히 개인적인 경우였다. 사대부들이 복잡한 도시생활과 정치공간에 서 아름다운 경치를 즐기며 휴식 삼아 잠시나마 신선을 꿈꾸었을 뿐, 이들 이 적극적으로 도교 수련에 힘쓴 것은 아니다.

 

6. 맺음말

   서울 각지에 흩어져 있는 바위글씨 130개의 목록을 작성하여 검토한 결과, 귀거래를 실현하지 못한 문인 사대부들은 한양 도성 안에 살면서 자신의 주거지를 동천(洞天)으로 상상하며 바위글씨를 새겼음이 확인되었다. 동천(洞 天)이라는 용어 자체는 도교적인 성격이 강하지만, 이들 주인 가운데 실제로 도교 수련을 힘쓴 문인은 백석동천 외에 확인할 수 없다. 백석동천도 주인이 곧바로 도사에서 사대부 문인으로 바뀌었다. 벼슬하지 않는 도사가 도성 안에서 동천을 경영할 만큼 넓은 주거지를 소유하기가 힘들었기 때문이다.

   동천의 주인은 골짜기를 따라 원림(園林)을 경영하면서 여러 개의 바위글씨를 새겼는데, 이러한 바위글씨들은 처음에 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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학적인 표상이었지만 성시원림(城市園林)으로 향유하다가 현대에 와서는 역사문화유산의 표석(表石)이 되었다. 서울 곳곳에 설치되었던 사정(射亭) 건물들이 대부분 헐려지고 없어져 이제는 바위글씨로만 그 존재를 확인할 수 있다. 안평대군․ 이항복․김상용․김창흡․김조순․김정희․송시열 등의 주거지 건물도 남아있지 않아 역시 바위글씨로만 그 흔적을 찾아볼 수 있다. 따라서 역사 문화도시 서울의 참모습을 복원하기 위한 기본과제 가운데 하나가 바위글 씨의 완전한 목록이다.

   서울의 역사문화지도를 정확하게 제작하기 위해, 1차적인 과제로 서울 의 바위글씨지도를 제작할 필요가 있다. 역사문화유산의 경관 복원을 위해 서 바위글씨지도는 필수적인 과제이다. 바위글씨지도를 따라 걷는 길은 또 하나의 둘레길이며, 역사문화유산의 탐방길이다.

   관악산이나 북한산같이 큰 산의 경우에는 서울시와 고양시, 또는 과천시가 함께 관할하기 때문에 하나의 바위글씨군이 두 개의 행정구역으로 나뉘어 질 수가 있다. 이러한 경우에는 골짜기를 따라 경계선 너머의 바위글씨들도 서울의 바위글씨에 포함시켜, 또는 두 도시가 함께 연구하고 관리하는 것도 효율적인 방안이다. 이렇게 되면 20여 개의 바위글씨가 목록에 추가된다.

   뜻있는 시민들이 바위글씨박물관 준비사무실(종로구 옥인동 47-253)을 개설하고 오랫 동안 박물관 개설을 준비해왔는데, 이 목록을 바탕으로 하여 디지털 바위글씨박물관을 설치하면 역사문화유산을 실내에서도 마음껏 감상할 수가 있다.

   서울의 바위글씨는 14군데 동천의 바위글씨 43개가 중심을 이루지만, 나 머지 90개 가까운 바위글씨들도 한양 지식인의 삶의 흔적이다. 나머지 바 위글씨들도 성격에 따라 분류하여 특성을 정리하면 서울 바위글씨의 총체 적인 특성이 드러날 것이다.

 

서울에 있는 동천(洞天) 바위글씨의 분포와 성격 189

 

 

참고문헌

<원전>

朴珪壽, 瓛齋先生集 卷一, <石瓊樓雜絶 二十首․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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논문투고일: 2017. 07. 10. 심사완료일: 2017. 08. 11. 게재확정일: 2017. 08. 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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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bstract>

The Distribution and Nature of Dongch’ŏn Carved Rock Writings in Seoul 18)

Hur, Kyoung-jin*

   In an age without written characters, humankind painted or carved pictures of significant events on rocks. When pictures were replaced by written characters, their content diversified, with many more of them expressing ideals of future utopias or individual life values rather than events in the past. As primarily three or four characters were carved into rock as it difficult to carve more, one frequently written set of characters was dongch’ŏn (洞天), literally “grotto-heaven,” or also “scenic view.” One’s courtesy name, the place name of the location, or two characters describing the nearby landscape were also frequently written in front of dongch’ŏn.

   The author has surveyed over one hundred carved rock writings in Seoul, and forty such writings claiming to be dongch’ŏn were found in fourteen locations, close to half of all the writings. Among these, Chaha dongch’ŏn is carved on Kwan’aksan Mountain, P’yŏkun dongch’ŏn on Suraksan Mountain, and Cheil dongch’ŏn on Topongsan Mountain, and although these may be interpreted as grotto-heavens as written, it is difficult to read the other carved rock writings as such because they are written outside the four gates of Seoul.

   Despite this however, noblemen who owned villas carved the characters dongch’ŏn onto the nearby rocks. For such noblemen who could not return home for various reasons, the dongch’ŏn rock carvings represented their unfulfilled dreams.

   If Seoul’s carved rock writings are surveyed intensively, there is a possibility of finding more dongch’ŏn. There is a need to compile these writings, analyze the wishes of their noblemen writers, and introduce them to citizens in the form of a map with carved rock writing trails.

* key words

dongch’ŏn, carved rock writing, Seoul, future utopia, individual life value *

Yonsei Univ

 

열상고전연구58집(최종)_허경진선생님.pdf