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국의 차문화 - 다도구를 중심으로

2019. 12. 26. 01:07차 이야기



[스크랩] 중국의 차문화| 中國茶 

효성|조회 60|추천 0|2011.12.29. 13:06

중국 차문화

- 다도구를 중심으로

 

 

 

   6500년 전부터 선을 보인 음용기는 2000년 전 차문화를 만남으로써 약용음료. 정신음료. 예술과 기호음료를 위한 다양한 다구 도자기로 발달하였다. 즉 도자기와 차문화는 서로 밀접한 관계를 맺고 변화하였다. 따라서 각 시대별 도자기에는 그 당시의 차문화가 잘 담겨져 있다 하겠다.

신석기 시대의 일상생활에서 사용되었던 음용기(飮用器)들로부터 시작하여 한(漢), 삼국시대, 남북조시대의 초기에는 청자 찻잔들이 주류를 이루었다. <다경>이 저술된 당대에는 암갈색 찻물에 어울리는 월주요, 장사요의 청자다호와 다완들이 유행했다. 예술적 차문화를 추구했던 송대(960-1279)에는 연고차를 사용하여 흰색 거품을 일구는 점다법의 유행에 따라 건요, 길주요의 흑유 천목다완들이 다양하게 제작되었다. 차의 본질을 살려서 녹차 문화의 시대를 연, 명대(1368-1644)에는 푸른 찻물에 어울리는 청화백자 다호, 자사호들이 널리 보급되었다. 그리고 차의 색, 향, 미를 추구하던 청대(1644-1911)에는 보이차 등 여러 차가 개발되었으며 이에 걸맞는 분채차호와 찻잔들, 새롭고 다양한 찻그릇들이 대거 개발되었다. 아울러 서양에 수출되었던 홍차용 다기들도 대량 생산되었다.

 

 

1. 최초의 음용기들(BC4500 - AD420)과 약제로서의 차

 

(1) 차와 음용기들

 

 

 

 

 

   신석기시대에서 청동기시대까지 아직 차문화가 태동하지는 않았지만, 토기로 만든 여러 종류의 음용기들이 사용되었다. 이러한 유물들은 오늘날 도자기의 기형들과 크게 다르지 않으며, 현대 도자기 기형의 모티브가 되었다.

청동기시대부터 음용기의 문화는 더욱더 발달하였다. 특히 춘추전국시대-221)에 토기를 만드는 과정에서 가마 안에 내려앉은 재로 인하여 우연하게 얻어낸 자연유약으로부터 영감을 얻어 원시적인 청자를 만들게 되었는데, 이때부터 유약을 입힌 도자기가 본격적으로 제작되었다. 유약이 입혀진 도자기는 흡수성을 막아 청결함은 물론 견고함과 아름다움까지 얻을 수 있었다.


   차(茶)는 2천년 전(漢代) 최초의 의약학서인 신농본초경(神農本草經)에 약제로서 처음으로 등장하는데, 여기에서 인류와 차의 만남이 시작된다. 인간과 차가 만나게 된 가장 근본적인 이유는 차가 지닌 기운으로 상기된 기운으로 말미암은 두통을 치료하기 위해서였다. 이 당시에 차의 기운이 사람의 상체부분까지 올라간 기운을 내리게 함으로써 두통이 해소되고 정신이 맑아지는 사실을 터득하였다. 그 후 400년 여년 동안 차를 약제로 사용해오면서 임상적 경험을 통하여 두통이 없는 평상시에 차를 마시면 머리가 맑아진다는 사실을 감지하게 되었다. 이 무렵 중국에 도래한 선종불교의 선승들은 이러한 원리를 선 수행에 이용하게 되었다.

 

(2) 다사

신농씨의 <식경> :

‘차를 오래 마시면 힘이 솟고 마음이 즐거워진다.’

②송의 왕관국 <학림> :

<주례>에 도장(筡掌)은 차를 모아서 성례에 제공하는 일을 맡아본다.’

③송의 구양수 <잡고록> :

‘차는 전대의 역사에 보이는데, 대저 위나라와 진나라 때부터 있었다.’

④전한 선재(BC74-49) 때 왕포<동약> :

‘炰鼈烹茶(자라 지지기와 차 달이는 일’

‘武陽買茶(무양땅에서 차 사오는 업무)

 

 

2. 남북조시대의 다기들(AD420-581)과 정신음료로서의 선차

 

 

 

(1) 차와 다구들

   남북조 시대란 한족(漢族)이 선비족에 쫓기어 양자강 이남으로 내려와 세운 왕조와 선비족이 양자강 이북에 세운 왕조가 대립하던 시대를 일컫는다.

이 시기는 전란으로 인해 암울했으며, 선종불교가 중국에 유입되었던 시기로 도처에서 많은 사람들이 선종에 입문하여 선(禪)수행을 하였다. 경전, 계율, 형상에 의존하지 않고 곧장 부처의 마음을 깨닫는 선(禪)수행을 위해서 사람의 정신을 맑게 격상시켜주는 차의 기운은 매우 효율적인 방편이었다. 이러한 요구에 부응하여 선차(禪茶)에 알맞은 제다(製茶)와 차도구가 개발되었다.

이러한 풍조는 학문을 탐구하는 학자들과 선비 계층까지 파급되어 음다(飮茶)는 보편화되어 갔으며, 차는 정신 음료로서의 위상을 갖게 되었다. 이 시기의 음다는 오늘날 사람들이 추구하는 색(色), 향(香), 미(味)의 감각에 바탕을 둔 기호나 예술로서의 차가 아닌, 차가 지닌 청정한 기운을 얻어 자신의 마음을 일깨우려는 선차로 활용하였다.

이 시기에 찻잔에 받침 접시가 있는 잔탁(盞托)이 처음으로 등장하는데, 이때 찻잔에 받침대를 시설한다는 의미는 부처를 숭상하거나 남을 대접하는 의미가 아닌, 선(禪:일깨움)의 종지에 부합되도록 가장 고귀한 존재인 자신에 고귀한 차를 바치는 용도로 사용되었다. 오늘날 다인들은 이처럼 일깨움을 중시하며 자신을 부처를 이룰 수 있는 존귀한 존재로 여겨서 스스로에게 차를 바치는 이 시대의 선차에서 이상적이고 본질적인 다도의 본래 의미를 찾을 필요가 있겠다.

 

(2) 다사

양현지<낙양가람기>

북위의 양원신이 양나라 사신 진경지에게 한 말

‘茗飮爲漿(차마시기를 장으로 간주한다.)’

즉, 남조에서의 차 마시기는 북조에서의 낙장 마시기와 같다

비연<남해기>

‘서평에서 나는 ‘고로’는 차싹의 별칭인데, 남녘 사람들이 음료로 사용한다.‘

<형주토지기>

‘무릉의 일곱 고을에서는 두루 나는 차를 가장 즐긴다.’

온정균<채다록>

‘진나라 왕몽은 방문객에게 차를 대접하므로 사대부들은 문안하면서 ‘물의 재앙’ 이라고 풍자했다.‘

* 여러 기록으로 보아, 이 시대에는 상당한 수준의 제다 음다법 갖추었을 것

  


3. 당대의 다기들(618-907)과 과시적인 차문화

 

 

 

 

 

(1) 차와 다구들

   동양 차문화의 연원을 당대의 육우(陸羽)가 지은 <다경(茶經)>에 절대적으로 의존하는 경향이 있다. <다경>이 현재까지 전해진 전해오는 차 관련 문헌 중 가장 오래된 것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다경>이 저술된 시기는 동양에서 차문화가 정신음료로 시작된 시점보다 훨씬 뒤이며, 내용 또한 차의 근본적인 시원(始原)에 바탕을 둔 저술은 아니다. 차가 실질적인 정신 음료로서 태동했던 시기로부터 무려 200년 이상이 지나서 귀족 중심의 과시적인 차문화로 변질된 시대의 기록일 뿐이다. 물론 <다경>은 당시 차문화에 대해 구체적으로 기술되어 있지만, 그 시대에 일반 서민들 사이에는 차문화가 존재하지 않았으며, <다경>은 다분히 당시 유행했던 상류 사회의 격식 넘치는 과시적 차문화를 기술한 다서이다. 그렇기 때문에 <다경>은 1200의 역사를 지닌 가장 오래된 다서이지만 <다경>을 중심으로 정립시켜놓은 현재의 차문화는 차 문화에 대한 오류를 가지고 있으며 다도 본래의 정신이 결여되어 있다.


   중국을 통일한 당나라의 국력은 급속도로 부강하게 되어 귀족층은 넓게 확대되었으며 관료와 부호들이 속속 등장했으며, 비단길이 열리면서 무역 경제가 활발해짐에 따라 중국은 역사 이래 최대의 긴 기간의 태평성세를 누리게 되었다. 따라서 이 시대의 다구들은 남북조 시대에 비해 과시를 위한 사치스런 양상으로 전개되었다.

당나라 시기의 음다법에는 가루차를 솥에 긴 시간동안 다려서 마시는 자다법(煮茶法)과 쓴 찻가루에 계피, 산수유 등을 섞어서 뜨거운 물과 함께 차호에 넣고 흔들어 찻잔에 마시던 암다법(唵茶法)이 있었다. 그렇기 때문에 당나라 차호의 대부분은 암다법을 운용하기에 적합한 차호들이 많았다. 그리고 당나라의 다기는 다분히 권세가들과 부호 등 상류 사회 층에서 자신의 신분과 권위적 위상을 부와 격식을 통해 과시하기 다기들이 주종을 이루었다.

 

(2) 제다법 : 떡차

(차따기 - 찻잎찌기 - 찻잎 찧기 - 쇠틀에 넣어 찍기 - 건조 - 구멍뚫기 - 꿰 기 - 불쬐기 - 대나무나 닥나무로 만든 꿰미로 꿰기


(3) 음다법

①자다법

차굽기 - 나무연으로 가루내기 - 비단체로 쳐내기 - 물끓이기 - 솥바닥에 물고기 눈 같은 기포 생기고 어슴프레하게 끓는 소리에 소금넣기 - 샘물처럼 솟구쳐 용솟음치고 구슬 같은 기포가 생길 때 끓는 물을 바리에 담아서 물 식히기 - 물 한 홉에 가루차 한 구기(307그램)의 비율로 끓는 물의 중심에 차넣기 - 물결이 뛰어 오르고 북소리가 나는 세 번째 끓음에 바리에 식힌 물을 부어서 물의 세력을 가라앉히면, 차가 삼층을 형성함(발餑 : 말沫 : 꽃花) - 표주박으로 말과 꽃 부분을 떠내기 - 청자 주발에 붓고 뜨거울 때 잇달아 세 잔을 마신다.

*차의 삼묘 : (담황색 빛깔)

(향기는 지극하고 아름다움)

(뛰어난 맛)

* 차에 야채나 과일을 섞어서 끓이는 방법

차만을 달여서 소금으로 간을 맞추는 방법


②암다법 -

 

(4) 국가적으로 시행한 다법

①공다(貢茶) - 백성들이 조정에 차를 바침

②세다(稅茶) - 호부시랑 조찬의 의견을 받아들여서 토공의로서의 차를 조세로서의 차로 바꿈

③차의 교역


*다상

*백거이(772-846)의 시, ‘소금장사의 아내’

나이를 먹어 장사꾼의 아내로 시집을 갔는데

장사꾼이란 이익만 중히 여기고 이별을 가볍게 여기어

지난 달 부량에 차 사러 떠나

줄곧 강의 어귀에서 빈 배만 지킨다네

  

*비전(飛錢) : 차의 유통 거리가 멀어서 만든 어음제도

 

*다마무역

  중국 서북방의 티벳과 몽고민족은 유목으로 생활하기 때문에 식품은 동물성에 편중하고, 신선한 야채가 부족하여 괴혈병에 걸리기 쉽다. 괴혈병을 막기 위해서는 비타민C를 제공하는 차가 필요했다. 그리하여 중국의 차와 북방의 말을 서로 바꾸는 다마무역이 당나라 때부터 시작되었다.

 

(5) 다사 : 다도의 성립

봉연<봉씨문견기>

   남녘 사람들은 차를 즐겨 마셨으나 북녘 사람들은 처음에 많이 마시지 않았다. 개원 연간에 태산의 노암사에는 강마사(降魔師)가 있었는데, 선교를 크게 일으켜 자지 않고 저녁밥을 먹지 않는데 힘쓰고, 모두 차 마시기를 즐겨하였다. 사람들은 몸소 품속에 끼고서 가는 곳마다 달여서 마셨다. 이후 따르고 본받아 옮아서 흉내내기는 마침내 풍속을 이루었다. 추. 제. 창. 체로부터 점점 서울에 이르는 성벽이 있는 도시에서는 흔히 점포를 열고 차를 달여서 판다. 도인이나 속인을 불문하고 돈을 주고서 마신다. 그 차는 강회운하로부터 오는데, 배나 수레가 서로 이어져서 산더미처럼 쌓이고 종류와 수량도 많다.


육우<다경>(760)

육우는 <다경>에서 다도 정신으로 ‘중용검덕(中庸儉德)’을 주장했는데, 이 정신은 후세까지 전해지고 있다.

 

 

4. 송대의 다기들(960-1279)과 연고차와 예술적 차문화

 

 

 

 

 

 

(1) 차와 다구들

   혼란했던 오대시기(五代時期)를 봉합하며 다시금 중국을 통일한 송나라는 이전 당나라에서 이룩한 한족 문화를 계승하고 더욱 발전시켜 또 다시 송나라만의 새롭고 독특한 문화를 재창출했다.

송나라 차문화의 가장 큰 특성은 연고차에서 찾을 수 있다. 연고차(硏膏茶)란 찻잎을 시루에 찐 뒤 절구에 찻잎을 찧고 천에 싸서 압착기를 이용하여 찻잎 속의 액을 여러 번 짜낸 뒤에 용이나 봉황 문양의 틀에 찍어 말려서 보관한 것을 말한다. 그리하여 차를 마실 때는 숯불에 구운 차를 맷돌(茶硯)에 갈아서 가루차로 만들어서 각종 음다법을 이용하여 마시는 방법을 택하였다.

이처럼 찻잎 속의 성분이 포함된 액즙을 짜내면서까지 연고차를 제조한 이유는 카페인과 카데킨의 쓰고 떫은 맛을 피하기 위함이었고, 차를 오랜 시간 동안 달이는 번거러움을 피하기 위해서였다. 또 가루차를 점다할 때 일구어진 흰색 거품을 미학적으로 즐기기 위한 연유도 있었다. 그런데 이러한 음다법은 차의 효능을 염두에 두지 않고, 또 정신 음료로서의 가치를 망각한 허례허식의 차문화의 일면을 보여주고 있다.


   송나라 때부터 차를 통해서 점다의 흰 거품과 흑유다완의 문양이 어우러진 미감을 즐기는 예술적 차원을 추구하였다. 사람들은 자신만의 독특한 차의 예술세계를 구사하며 다름 사람들이 가지지 않은 다기들은 구하려 했다. 그리하여 각종 화려한 다기들과 노련한 행다의 기교를 활용한 찻자리에서 발현되는 아름다움을 과시했다. 따라서 자신만의 찻자리 미학을 뽐내고 그 기량을 다른 사람들과 겨루는 투차(鬪茶) 대회가 크게 유행하였다. 이때 여러 종류의 흑유 천목 다완들이 투차에 사용되었는데 차의 흰색 거품과 찻잔의 검은 색과 천목다완 특유의 별빛 문양이 어우러지는 아름다움을 노렸기 때문이었다. 요컨대 송대 차문화를 흑유다완의 문화라고 부를 만큼 천목다완은 크게 유행했다. 그리고 이러한 송나라의 예술적 차문화는 고려와 일본으로 전파되어 정착되기도 하였다.

이때 음다법은 찻가루를 다완에 넣고 거품을 내어 마시는 점다법과 찻가루와 뜨거운 물을 차호에 넣어 흔들어 찻잔에 따라 마시는 암다법이 주류를 이루었다.

즉, 당나라 때를 떡차(병차餠茶) 중심의 시대였다고 한다면, 송나라 때는 오대(五代, 907-957)에 개발된 연고차 중심의 시대였다.

 

(2) 제다법과 음다법

①차만들기

차따기 - 차씻기 - 찻잎 찌기 - 압착기로 짜내기 - 대형 압착기로 건조될 때까지 여러번 짜기 - 절구공이로 찻잎 갈기 - 평미래질하며 비비기 - 찍어내기 - 틀에 박아낸 차를 불에 말리기 - 광택내기 - 보관

 

②차 달이기

차굽기 - 방망이로 분쇄 - 비단체로 곱게 쳐내기 - 용천연주 때까지 물끓이기(4단계 : 게눈. 물고기 눈. 용천연주. 등파고랑) - 점다법(격불)

③차의 삼묘

차 빛깔 - 순백색

향기 - 순한 본연의 향기

맛 - 달고 미끄러움

 

(3) 국가의 다법

①통상법 - 장사꾼들이 돈이나 황금, 비단으로 차를 불하받는 것

②관죽법 - 백성들이 마실 차를 식다무라는 판매소에서 파는 각다(전매)제도

③금나라 사람과는 거래를 금함

④다상군 - 차 장사꾼을 널리 불러 모아서 군적에 편입한 군인이지만, 관군이 아닌 의용군이었다. 이들은 금나라가 쳐들어 오면 차 장사에 의협을 받기 때문에 관군과 협력하여 용감하게 싸웠다.

⑤다마무역

 

 

5. 요. 금. 원의 다기들(907-1368)과 차문화

 

 

(1) 차와 다구들

   선비지상주의를 표방하며 문인을 우선시하고 무인을 경시했던 풍조는 결국 국방력의 약화로 이어져 북방 민족의 침략을 불러들이게 되었다. 양자강 이북에는 거란족의 요(遼), 여진족의 금(金), 몽고족의 원(元)이 번갈아가면서 차지하여 지배해나갔다.

수렵과 유목을 위주로 북방의 척박한 지역에 살아왔던 이들 이민족들은 한족의 영향권에 있었던 땅을 지배하면서도 송나라의 문화에 매료되었다. 200여 년의 비교적 긴 통치를 했던 요의 거란족은 양자강 이북의 광활한 지역을 차지했었고 정치제도는 물론 문화적인 부분도 송나라를 여과없이 그대로 받아들이면서 한족 문화에 동화되었다. 차문화 또한 초기에는 당나라 차문화를 따랐고 뒤이어 송나라 연고차 문화를 그대로 답습하며 차문화가 크게 유행했다. 도자기는 물론 금은기로 만든 화려한 다구는 격식적인 면에서 북송의 차문화에 크게 뒤지지 않을 만큼 번창하였다.


   금 왕조는 1세기 동안의 짧았던 치세 기간만큼이나 한족 문화에 충분하게 젖어들지 못했으며 차문화를 즐겼다는 흔적조차 매우 드물다.


   몽고족이 세운 원나라는 지상 최대의 제국을 형성했고 중국은 물론 발달된 서유럽까지 정복하면서 높은 문명을 접했으므로 그들에게 중국은 그다지 대수롭지는 않았다. 그러나 중국의 남부까지 지배하면서 유명한 경덕진(景德鎭) 백자와 용천요(龍泉窯) 청자 그리고 건요(建窯)의 흑유 다완 산지 등 대규모 도자기 산지들을 직접 관장하여 원대 도자기의 생산이 크게 증대되었다. 특히 페르시아의 코발트를 중국의 자기 기술에 응용하여 청화백자를 창출하기도 했다. 원대의 차문화는 송대에 비해 현저하게 위축되었지만 그 명맥은 이어졌다.

 

(2) 원나라의 다법(세다제도)

①연고차를 즐겨 마심

②송나라 세다제도 채택

③각다제도 채택(1268-1270)

④차를 다루는 관청

⑤찻세를 바친 사람에게 차의 판매권을 주는 허가증인 다인과 다유 제도

 

 

6. 명대의 다기들(1368-1644)과 녹차문화

 

 

 

 

(1) 차와 다구들

   몽고족에게 1세기 이상의 잔혹한 통치를 받았던 한족들의 위상을 가난한 빈민가 출신이었던 주원장(朱元長)에 의해 회복하게 된다. 그는 홍건적이라는 농민반란군을 이끌고 거병하여 몽고족의 원을 멸망시키고 다시금 한족 왕조인 명(明)을 건국하였다. 건국 초기 황폐한 국가를 재건시키기 위해 농업구조 개선의 정책을 단행하였다.

따라서 홍무제는 연고차를 만드는데 소요되는 농민들의 노동력 손실을 막기 위해서 차농업 부문의 개혁을 단행했다. 이로 인하여 오랫동안 즐겨왔던 연고차의 가루차는 사라지고 차 만들기가 쉬운 녹차시대가 열리게 되었다. 명대 녹차문화로의 전환은 남북조 시대에 이어 동양 차문화의 본질에 입각한 두 번째 황금시대로 평가된다.


   녹차란 차를 만들 때 찻잎이 지닌 기운의 손상을 최대한 억제시키고 보존할 수 있도록 만들기 때문에 엄격한 조건이 따르는데, 우선 좋은 소엽종의 차나무를 훌륭한 재배조건하에 자생시켜 적절한 시기에 채엽한 찻잎을 가볍게 살청하여 재가 덮힌 숯불 위에 홍배법(烘焙法)으로 건조만시키면 완성된다. 따라서 차를 만들 때 잎을 비비는 유념이나 고온의 열에 굽거나 발효시키고 산화시키거나 볶아서 만드는 차와 분명히 다르다. 이런 점에서 이 시대의 녹차는 차를 우려 마실 때 찻잎 성분이 우러나오도록 하는 것이 아니며, 찻잎 속에 스며 있는 차의 기운이 피어 나오도록 하여 그 기운을 얻어 정신을 맑게 하려는 데에 있었다.

따라서 녹차를 마실 때 사용하는 다구는 당연히 이러한 녹차의 원리를 염두에 두고 제작되어야 한다. 명대의 다기 유물은 이러한 사실을 잘 말해주고 있다. 초기의 녹차 다기는 질박한 도기질의 자주요(磁州窯) 다기들이 사용되었으며 이것을 토대로 명 후기에 개발된 자사는 이러한 녹차의 원리를 충실하게 따라 만들어진 녹차전용 차호이다. 그리고 녹차의 푸른 빛깔에 어울리도록 백색의 다기들이 사용되었다.

 

(2) 홍무 24년(1391) 9월에 백성의 수고를 중히 여겨 용단차 만들기를 금하고 오직 찻싹을 딴 채로 진상케 하였다.

 

(3) 차 따기에 대한 기록

장원<다록> - 곡우날 닷새 앞

전춘년<제다신보> - 곡우 전후

허차서<다소> - 곡우 전후

도융<다전> - 곡우 전후

 

(4) 차 만들기

장원 <다록> : 세게 단 솥에 찻잎을 덖기

이 외에 여러 기록이 전함

허차서<다소>

정용빈<다록>

나름<다해>

풍가빈 <개다전>

 

(5) 물끓이기

유원장<다사>

   ‘당.송 시대의 차는 맷돌과 체를 거쳐서 나는 가루가 되어 끓이는 물에 들어가니 차의 신령스러움이 뜨기 쉽다. 그러므로 끓인 물은 어린 것을 취하고 쇤 것은 쓰지 않는다. 명. 청 시대의 차는 잎차를 쓰고 가루차가 아니기 때문에 끓인 물의 상태가 모자랄 때는 차의 신령스러움이 극도에 도달하지 않는다. 이것이 다섯 번 끓여서 완전히 익은(오비순숙탕) 물을 취하는 까닭이다.’

 

(6) 중투법을 주로 사용

 

(7) 차마시기

서위<전다칠류>

‘차가 입에 들어가면 참 맛을 얻을 수 있고, 다른 과일과 섞으면 향기와 맛을 모두 빼앗긴다.’

 

(8) 국가의 다법

①차 생산의 증대

차를 재배하는 가구의 요역을 면제

주인 없는 차밭은 군대를 이용하여 재배하고 수확

②녹차 위주 생산

③각다법, 통상법 시행

④정부가 보유하는 세차는 관청의 경비, 관리, 군인의 봉급으로 지출되기도 하고 다마무역에도 지출되었다.

⑤다마무역 *한 해에 차의 수출량은 1백만근, 말의 수입은 1만 2 - 3천 필 안팎이었다.

 

 

7. 청대의 다기들(1644-1911)과 기호음료로서의 다도

 

 

 

 

 

(1) 차와 다구들

   중국 동북의 만주 지방에 거주하던 소수민족이었던 여진족들은 명나라 말기 혼란을 틈타 전쟁을 치루지 않고서도 손쉽게 명조의 거대한 영토를 차지해버린다. 따라서 청 왕조는 전쟁으로 인한 국력 소모도 없었으며 이미 한족의 명나라가 이루어 놓은 번영과 문화를 곧바로 자신들의 문화로 활용하면서 청조 지배하의 중국은 최대의 번영된 왕조로 발전한다. 강희, 옹정, 건륭의 세 황제의 치세 기간은 최고조의 번영을 이루었으며 지금도 한족들은 역사 속에 이 세 명의 황제를 최고의 성군으로 주저 없이 꼽는다. 청조 황제들의 황금기를 누린 이 시기를 기점으로 모든 분야의 문화는 눈부신 발전을 거듭한다.


   차문화 또한 각지에서 녹차 외에도 색. 향. 미를 위시한 각종 발효차가 속속 개발되었으며 각종 차에 적합한 용도와 재질의 아름다운 도자기가 다양한 형태로 출현했다. 명대 다기에 비해 채색된 도자 다기가 월등하게 많은데 그것은 향기나 차의 색감과 잘 어울리도록 새로운 다기의 기형들이 등장한다. 청대 차문화의 특성은 색. 향. 미를 잘 살리는 차와 다기들을 활용한 차마심을 통해 아름다움을 추구했던 시기라 할 수 있다.

 

(2) 청대에는 홍차, 녹차, 전차(벽돌차), 다말(茶末)을 이용하였다.

(3) 국가의 다법

①찻세

②다법 - 상인이 차를 사려면 관청에 수량을 기재, 서류 제출, 은을 납부하고 다인을 지급받은 뒤에 국외로 반출함

③다마무역

④영국, 미국, 러시아에 차를 수출함

 

 

*고려시대의 다기들(918-1395)과 예술적 차문화

   고려시대일본의 가마쿠라 시대 사람들이 바라볼 때 송나라는 절대적 문화의 선진국이었다.

   일본의 많은 유학승들은 송나라에서 생활하면서 자연스럽게 송나라의 차문화를 습득하였고 선원에서 배운 차문화를 그대로 일본으로 옮겨갔는데, 연고차를 이용한 멋과 격식을 갖춘 송나라의 차문화가 일본에서 서원차(書院茶)로 뿌리를 내려 오늘날까지 이어져 오고 있다. 일본은 송나라에서 다구들을 만드는 도자 기술은 가져가지 못했으므로 대부분 송나라의 다구를 수입하여 사용했고, 연고차를 만드는 방법과 음다법 그리고 찻자리의 격식들을 송나라의 차문화 그대로 받아들였다.


   고려는 일본과 마찬가지로 송나라의 연고차 문화를 그대로 받아들였고 귀족층에서는 송나라에서 만들어진 고급 도자 다구와 연고차를 수입하여 사용했다. 나중에 점차적으로 수입다구를 고려 청자로 대체하여 사용했다. 고려에는 960년 경을 전후하여 월주요의 도공들이 고려에 들어와 청자 기술을 전해 놓았고 이렇게 하여 청자를 만드는 기술을 축적하였으며 다구를 만들어 사용하는 것이 가능했다. 이후 고려 청자로 만들어진 다기들은 고려 청자만의 독특한 색깔과 공예 기법이 구사되어 미감에서 송나라의 청자를 앞지를 만큼 매우 우수했다.

차문화의 발달로 송나라 도자산업이 크게 융성했던 것처럼 고려 청자가 그토록 발달할 수 있었던 배경에는 고려 귀족층에서 크게 유행한 기품이 담긴 예술적 차문화에 기인한다.

 

 

 

*조선시대 초기의 다기들(1392-1898)과 녹차문화

   송나라 차문화를 그대로 답습해왔던 고려시대를 마감하면서 조선시대에 우리 차문화는 또 다시 중국 명나라의 차문화를 따라간다.

몽고족의 원나라에게 오랫동안 침탈당했던 후유증으로 피페해진 땅 위에 조선을 개국한 조선 왕조에서는 명나라와 마찬가지로 국가 재건에 가장 시급한 것은 모든 분야에 대한 모순의 개선과 실용적 구조였다.


   차문화 또한 이러한 실용노선에 따라 고려말까지 널리 마셔오던 연고차의 가루차문화는 일거에 사라지고 명나라의 녹차문화가 들어오면서 녹차의 시대가 열리게 되었다. 가루차를 마셨던 다완이나 암다법으로 사용해오던 차호는 일거에 사라지고 녹차를 마시는 차호로 바뀌었다. 이러한 차호들도 명나라의 녹차용차호의 기형을 그대로 모방하여 만들었다.

녹차의 제조 경험이 없었기에 녹차는 대부분 명나라에서 수입되어 상류층에서만 즐길 수 있었지만 실용 정치를 내세운 조선 왕실의 정책상 사치품에 해당되었던 녹차의 수입이 끊기면서 반세기 이상을 이어가지 못하고 조선의 차문화는 성종 이후 막을 내린다.


   남아있는 조선의 녹차용 다기들을 보면 그 시대가 조선 초기에 국한되며 기형이 단조롭고 숫자적으로 매우 많은데 그만큼 녹차의 음용이 크게 유행했음을 짐작할 수 있다. 그 시기는 세종 - 성종(1418-1494)까지 제작된 것으로 보이며 그 이후 차를 다루었던 조선의 찻그릇은 전혀 보이지 않는다. 즉 이 시기부터 조선 말기까지 민간은 물론 문화를 주도했던 사대부 가문에서 전래되거나 출토된 도자기는 다양하고 수량도 많지만 다기의 흔적은 보이지 않는다.

다만 왕실에서 의례나 그리고 차문화권의 국가에서 오는 사신을 맞이할 때 예법으로 차를 접대하는 특수한 경우와 그리고 사찰 주변이나 야산에 이전 시기부터 조성된 차나무에서 찻잎을 따서 사찰에서 부분적으로 음용했을 정도로 차문화는 쇠퇴했다. 또 민간에서 약용으로 차를 사용한 흔적도 있지만 이것은 보편적 차문화로 말할 수는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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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1.12.29
                                                           중국의 차문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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