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중 김충현

2020. 6. 4. 08:50글씨쓰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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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중 김충현

 

 

 

 

.나비추천 0조회 9919.01.24 11:58

 

소전 이후 가장 빛나는 서예가는 일중(一中) 김충현(金忠顯, 1921~2006)이라고 해야 할 것이다.

일중은 어떤 면에서는 소전과 쌍벽을 이룰만한 서예가라고 해도 과언이 아닐만큼 큰 영향력을 미쳤다.
그는 어릴 때부터 일본인과는 타협하지 않는 가문에서 태어났기 때문에 14세 될 때까지 학교를
들어가지 않았고 아버지의 지도 아래 한문과 서예 공부를 했다.
1938년 중동중학교 1학년 때(17세) 동아일보사 주최 전조선학생작품전에서 서예로 5개 부문을 통틀어
최고상을 수상하면서 세상에 알려졌고, 다음해 〈동아일보〉에 '궁체'에 관한 논문을 발표하기도 했다.
그러나 본격적인 데뷔는 1941년경으로 본다. 1942년 일제의 눈을 피해〈우리 글씨 쓰는 법>이란 저서를
냈고, 그후 〈중등 글씨체〉·〈중학 서예〉·〈고등 서예〉 등을 출간하면서 서예활동을 전개했다.
애초부터 한글로부터 서체(書體)를 시작한 그는 고체(古體)를 현체(現體)로 쓰는 법의 개발에 몰두했는데
이는 서예가 비록 한자문화권에서 나온 것이라 하더라도 그로부터 벗어나야한다는 생각에서였다.
1949년 제1회 대한민국미술전람회(약칭 국전)에 추천작가로 추대되었고, 1954년 화신화랑에서
첫 개인전을 가졌다. 1958년 동방연서회 이사장을 역임했고 국전의 운영위원과 심사위원,
문교부 검인정 교과서 편찬위원을 지냈다. 그는 반세기에 걸쳐 주로 교육계와 저서를 통해 서예 교육에
전념해왔다. 1981년 회갑을 맞아 비문 등 모두 200여 점이 수록된 서집을 출간했다.

일중은 한글 서예를 쓰게 된 연유를 이렇게 설명한 바 있다.
“내가 한글 글씨를 쓰게 된 것은 두 가지 연유가 있었다. 먼저 내 일은 내가 해야겠다는 것이고
그 다음엔 우리 집에 전해오는 궁체가 많았기 때문이다. 나는 항상 말하기를, 글씨에 있어서
우리는 힘이 갑절 든다는 것이다. 중국 사람이라면 그들의 한문만 잘 쓰면 되지만은 우리는 그 외에
자국문자가 있으니 이것도 잘 쓰려면 두 글씨를 다 잘 써야 구비하여 쓴다고 보겠다.
그래서 이른바 국한병진주의(國漢倂進主義)를 내세우려고 한다.
……쓰다 보니 어떠한 체계를 세워야 공부하기에 편리한 것을 깨닫게 되어 약관의 나이로 모든 것이
미숙하지만 책을 하나 엮었다.『우리 글씨 쓰는 법』이란 책이었다."(『藝에 살다』)

"중국 사람이라면 그들의 한문만 잘 쓰면 되지만은 우리는 그 외에 자국문자가 있으니
이것도 잘 쓰려면 두 글씨를 다 잘 써야 구비하여 쓴다고 보겠다.
그래서 이른바 국한병진주의(國漢倂進主義)를 내세우려고 한다."(『藝에 살다』)

"서예의 근원과 필법의 정통이 한자에 있느니 만큼 이 글씨를 배우지 않고 서예를 말할 수 없는 것이며
국문은 우리의 고유문자이니 이 글씨를 우리가 배워 익히지 아니할 수 없는 것이다."(『藝에 살다』)

이렇게 일중은 궁체 작품활동과 더불어 국내 유명기념물의 글씨를 많이 써서 남기는 등 국내외에
그의 한글 궁체의 금석문이 많이 있다. 또 한편 한자 예서체 느낌의 판본체를 최초로 창안하여
보급하여 초중등 교과서의 모범체로 선정되기도 했다.

아래에 예술의전당 서울서예박물관 학예사 이동국의 글을 인용한다.

"일중의 글씨는 한마디로 서예사에서 손꼽는 명서가들이 그래왔듯이 ‘옛 것에서 새로움을 만들어내는
’ 이른바 ‘법고창신(法古創新)’의 귀감이 된다고 할 수 있다. 가학(家學)을 바탕으로 현대 감각에 맞는
새로운 서체를 창안하고자 노력한 결과 안진경체로 필력을 얻고 장천비(張遷碑)와 예기비(禮器碑)
등의 한예(漢隸)를 조종으로 삼아 한글 고체의 필법인 전서체를 가미하여 소위 ‘일중체(一中體)’를
만들어 낸 것이 그 것이다.
이러한 일중의 예술은 그 형성 과정을 대체적으로 다음과 같이 다섯 시기로 구분하고 있다.

Ⅰ期 : 立志와 한글에의 관심(1934년 중동학교 입학 이후 1945년까지)
Ⅱ期 : 축적(蓄積)과 개발(開發)(1945년에서 1962년까지)
Ⅲ期 : 새로운 조형세계를 찾아서(1962년에서 1969년 일중묵연(一中墨緣) 설립까지)
Ⅳ期 : 예서(隸書)와 행초서(行草書)의 융합(融合)(1969년에서 1980년까지)
Ⅴ期 : 예술가로서 소요(逍遙)(1981년 이후 현재)

이 중에서 일중의 한글서예는 이미 Ⅰ기 때인 22세(1942년)부터 ‘우리 글씨 쓰는 법’을 저술한 것을
시작으로 일생을 두고 궁체 중심의 한글의 조형적 단조로움을 극복하기 위하여 훈민정음(訓民正音) ,
용비어천가(龍飛御天歌) , 월인석보(月印釋譜) 등 한글 고판본의 글씨체를 토대로 하고,
한자의 전예 필법을 융합하여 ‘한글고체’를 제시하였다는 데에서 그 위대성이 있다.
그 대표작으로는 <枾葉山房八詠(시엽산방팔영, 1978년작)>,
<月印千江之曲(월인천강지곡, 1988년작) 등을 들 수 있다.


그리고 일중의 한자 서예는 전술한 바와 같이 중국의 역대 비 , 첩을 동시에 소화하여
가장 고전적인 입장에서 전 , 예 , 해 , 행 , 초는 물론 국 , 한문 혼용 등의 각 체를 구사하였다는데
특장이 있다. 특히 전예의 획법이나 결구가 해 , 행 , 초에 구사되면서 이들의 필법과 조형이
융합된 파서체(破書體)는 일중 예술의 득의처(得意處)라 자리매김할 수 있는데,
새로운 조형세계를 찾아 나선 일중 예술의 Ⅲ기와 Ⅳ기에 해당하는 60년대 말기에 시작되어
7, 80년대에 꽃을 피웠다.
이러한 파서체는 <淸陰群玉所記(청음군옥소기, 1979년작)>,<守素明德開物成務(수소명덕개물성무,
1980년작)>, <寸陰是競(촌음시경, 1980년작), <弘慶寺碑詩(홍경사비시, 1980년작)>,
<歸舟(귀주, 1987년작)> 등에서 보는 바와 같이 일중 특유의 원만(圓滿)하고 둥글둥글한
원필(圓筆)을 중심으로 하면서도 방필(方筆)의 혼용으로 예법(隸法)을 가지고
행초(行草)를 구사하거나 결구(結構)를 만드는(또는 그 반대) 쪽으로 진행되었다. "

ㅡ2004. 11. (이동국 / 예술의전당 서울서예박물관 학예사)

 

 

출처: 인천 중구를 사랑하는 사람들 원문보기 글쓴이: .나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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