초서 草書

2022. 12. 6. 03:05글씨쓰기

요약 넓은 의미로는 자체를 간략하고 빠르게 쓴 초체를 가리키지만 좁은 의미의 초서는 장초·금초·광초 등을 가리킨다. 장초는 예서 필획의 글자가 모두 독립되고 결체가 모나고 납작하며 파책이 남아 있고, 필획이 서로 이어지지 않으며 점획을 생략했다.
후한말의 서체인 금초는 오늘날 흔히 사용되는 초서로 왕희지·왕헌지 부자가 완성했다. 광초는 당나라 장욱이 시작한 것으로 전통적인 초서 필법에서 벗어나 극도로 자유분방하게 쓴 것이다. 문자가 실용적 성격에서 예술영역에 도달하는 데 교량역할을 한 것으로 서예사적 의의가 크다.
우리나라는 중국에서처럼 크게 유행하지 않았고 자체도 대개 진대 전통적 초서 중심으로 쓰여졌다.

초서(草書)

ⓒ Sun Guoting/wikipedia | Public Domain

넓은 의미로는 자체(字體)를 간략하고 빠르게 쓴 초체(草體)를 가리킨다. 초체는 문자를 빠르게 서사(書寫)한 것으로 전서의 경우는 전초(篆草), 예서의 경우는 예초(隸草)라 하며 중국 창사[長沙]의 묘에서 출토된 죽간(竹簡)과 서북지방 출토의 목간 등에서 대전 및 한례(漢隷)의 초서가 보인다.

이러한 초체가 계속 변화·발전하여 일종의 고정된 서체를 형성하게 되는데 이것은 좁은 의미의 초서로 장초(章草)·금초·광초 등이 있다. 아직 형식이 정비되지 않은 한대(BC 206~AD 220) 초기의 것은 고초(古草)라 하며, 전한(前漢) 후반기에는 파책(波)을 수반하며 후한대에 글자체가 완성되는데 이것을 장초라 한다. 장초는 예초·급취(急就)라고도 하는데, 예서 필획의 글자가 모두 독립되고 결체가 모나고 납작하며 파책이 남아 있고, 필획이 서로 이어지지 않으며 점획을 생략했다. 장초의 초기 형태는 한대의 목간에서 찾아볼 수 있으며 장초의 법첩인 사유(史游)의 〈급취장 急就章〉과 〈순화각첩 淳化閣帖〉에 있는 장지(張芝)·황상(皇象)·삭정(索靖) 등의 장초가 대표적이다. 후한말 새로 나타난 서체인 금초는 오늘날 흔히 사용되는 초서로 후한의 장지가 장초에서 파책을 제거하고 글자 상하의 혈맥을 이어 창안했다고 하며, 동진의 왕희지(王羲之)·왕헌지(王獻之) 부자가 완성했다. 금초에는 한 글자씩 쓰는 독초체(獨草體)와 붙여서 쓰는 연면체(連綿體)가 있다. 금초는 〈순화각첩〉에 실린 왕희지·왕헌지 부자와 장지의 글씨, 왕희지의 〈십칠첩 十七帖〉·〈상란첩 喪亂帖〉, 왕헌지의 〈지황탕첩 地黃湯帖〉 등에서 볼 수 있다. 광초는 당나라 장욱(張旭)이 시작한 것으로 전통적인 초서 필법에서 벗어난 것이며 술과 자연현상 등으로부터 얻은 정취나 영감에 의해 극도로 자유분방하게 쓴 것이다. 대표적인 예로는 장욱의 〈자언첩 自言帖〉, 회소의 〈자서첩 自敍帖〉 등이 있다. 초서는 쓰는 사람의 개성을 발휘하기가 용이하며, 문자가 실용적 성격에서 유희적 성격을 띤 예술영역에 도달하는 데 교량역할을 한 것으로 서예사적 의의가 크다.

우리나라는 고려시대까지 초서의 발달과정을 살펴볼 만한 유구가 남아 있지 않다. 조선 전기·중기의 것으로 최흥효·이용·김구·이황·황기로·양사언·한호 등의 초서체 서책이 남아 있고, 후기에는 윤순(尹淳)·신위(申緯) 등의 초서가 유명하다. 그러나 중국에서처럼 크게 유행하지 않았고 자체도 대개 진대(晉代)의 전통적인 초서가 중심을 이루었다.→ 서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