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선 鄭敾

2022. 8. 17. 13:56美學 이야기

한국사를 움직인 100

정선

원백, 鄭敾
 
출생사망
1676년
1759년

  조선 산수화의 독자적 특징을 살린 진경화를 즐겨 그렸으며 심사정, 조영석과 함께 삼재(三齋)로 불렸다.
강한 농담의 대조 위에 청색을 주조로 하여 암벽의 면과 질감을 나타낸 새로운 경지를 개척했다.
대표작으로는 〈입암도〉, 〈여산초당도〉, 〈여산폭포도〉, 〈노송영지〉 등이 있다.

붓으로 살려낸 만물의 조화

   진경산수화(眞景山水怜)는 조선 후기에 유행한 우리나라 산천을 실제 경치 그대로 그린 산수화를 말한다. 흔히 진경(眞境) 또는 동국진경(東國眞景)이라고도 하며, 일본에서는 신조선산수화(新朝鮮山水怜)라고도 한다. 화단에서 하나의 조류를 형성하며 성행했을 뿐만 아니라 높은 회화성과 함께 한국적인 화풍을 뚜렷하게 창출했다. 이 진경산수화라는 양식을 창안한 선구자가 바로 겸재 정선이다.

진경산수화가 유행할 수 있었던 데에는 우리의 산천을 주자학적 자연관과 접목시키고자 했던 문인 사대부들의 자연 친화적 풍류 의식과 주자학의 조선화(朝鮮化)에 따른 문화적 고유함에 대한 인식, 자주의식의 팽배 등이 컸다. 즉 실사구시의 실학적 분위기 속에에서 그전까지 지속된 화본(畵本)에 의한 관념산수화의 틀에서 벗어나 직접 눈으로 보고 발로 밟은 우리의 산천을 그리고자 하는 욕구가 커진 것이다. 이러한 조류는 당시 집권층이었던 노론 문인 사대부들과 남인 실학파들에 의해 주도되었으며 특히 금강산과 관동 지방, 서울 근교 일대의 경관이 가장 많이 다루어졌다.

〈여산폭포도〉

중국 장시 성의 여산은 주나라 때 광속이 숨어 살던 곳으로 조정에서 사람을 보내 찾았더니, 이미 신선이 되어 날아가고 빈집만 남았으므로 ‘여산’이라고 하였다 한다.

ⓒ 국립중앙박물관(중박201010-463) | 저작권자의 허가 없이 사용할 수 없습니다.

 

 

정선은 한성부 북부 순화방 유란동에서 정시익(鄭時翊)과 밀양 박씨 사이의 2남 1녀 중 맏이로 태어났다. 그의 집안은 선대가 관직 생활을 하기는 했으나 뛰어난 정치가나 학자는 없었으며, 더구나 예술가는 찾아볼 수 없었다. 게다가 집안은 매우 가난해 글공부에 전념하기는 힘들었다. 정선이 선비 집안에서 자라면서 화가가 되었던 것은 이 때문인 것으로 보인다.

강세황은 〈겸재화첩〉의 발문에서 그에 대해 “동국진경을 가장 잘 그렸다.”라고 평가하고 있다. 그는 특히 금강산과 서울 근교를 많이 그렸고 그 외에도 인물산수, 고목(古木), 노송(老松) 등을 잘 그렸다.

정선은 열세 살 때 아버지를 여의고 늙은 어머니를 모셨다. 그는 어려서부터 그림을 잘 그렸는데 김창집(金昌集)의 도움으로 관직 생활을 시작했다. 김조순의 문집에는 “겸재는 우리 선조의 이웃에 살았다. 어려서부터 그림을 잘 그렸으며, 집안 살림이 어렵고 부모가 늙어 나의 고조부인 충헌공(김창집)에게 벼슬자리를 부탁했다. 도화서에 들어갈 것을 권하자 벼슬길에 올랐으며, 관은 현감에 이르렀다. 여든 살까지 장수를 누리면서 교우하던 사람들은 모두 당시 명사(名士)들이었다.”라고 기록되어 있다.

세자를 보위하는 위수를 비롯해 1729년 한성부 주부를 지냈으며, 1734년 청하 현감을 지냈다. 청하 현감 시절 〈교남명승첩(嶠南名勝帖)〉을 그렸는데 이 화첩에는 안동 등 영남의 명승고적 58곳이 담겨 있다. 이때 그린 작품 중에는 〈금강전도(金剛全圖)〉도 있다. 〈금강전도〉는 전체적으로 원형 구도를 이루며 위에서 아래로 내려다본 모습으로 그려졌는데, 관념 산수의 틀을 벗고 우리나라의 산천을 소재로 하여 독창적이고 개성적인 표현 기법으로 그렸다는 점에서 한국 산수화의 신기원(新紀元)을 이룬 걸작이라 할 수 있다.

이러한 그림들을 보면 그가 고을 수령으로서의 책무보다는 그림을 그리는 데 더욱 몰두했음을 알 수 있다. 그는 하양 현감을 거쳐 1740년경 훈련도감 낭청, 1740년부터 5년간 양천 현령을 지냈다. 이때 그는 시인 이병연(李秉淵)과 함께 양천과 한강의 명승고적을 담은 〈경외명승첩(京外名勝帖)〉 등을 제작했다. 정선이 진경산수를 그렸다면, 이병연은 진경시를 지었다. 두 사람은 10대부터 대문장가 삼연(三淵) 김창흡(金昌翕) 아래에서 동문수학한 죽마고우였다. 두 친구는 함께 금강산을 여행하면서 시를 짓고 그림을 그렸다. 둘은 서로의 작품을 평하며 자극하고 격려했다. 금강산을 유람하면서 쓴 시와 그림을 함께 엮은 산수화첩은 당대에도 유명했다.

그 뒤 약 10년간의 활동은 잘 알려지지 않았다. 70대에 들어선 후에는 남성적인 필치가 두드러지는 그림을 많이 그렸는데, 대표작은 1751년 그린 〈인왕제색도(仁旺霽色圖)〉이다. 〈인왕제색도〉는 여름 소나기가 지나간 뒤 비에 젖은 인왕산 바위를 그린 작품으로 생략과 함축 그리고 절제가 돋보이는 걸작으로, 적묵법(積墨法)을 이용한 것이다. 적묵법은 옅은 색의 먹으로 먼저 그리고 나서 완전히 마르고 난 다음 좀 더 짙은 먹으로 덧칠하는 방법이다. 널찍한 붓으로 여러 번 짙은 먹을 칠해 바위를 그려 무게감을 잘 드러내고 있다.

수많은 작품들 중 최고 걸작이라는 평가를 받는 이 작품은 당시 병상에 있던 이병연의 쾌유를 기원하면서 그렸다고 한다. 이 때문에 그림 속 기와집은 이병연의 집으로 여겨진다. 이때부터 그의 그림에는 번잡함이 사라지고 담묵(淡墨)의 구사가 맑고 부드러워졌으며, 화면 구성은 광활해지고 중량감은 전보다 더 강해졌다.

〈사공도시품첩〉

당나라 시인 사공도가 쓴 〈시품〉을 소재로 정선이 그리고 이광사가 원문을 필사한 서화첩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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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754년에 궁중의 쌀과 장을 공급하는 사도시 첨정, 1755년에 첨지중추부사, 1756년에는 화가로서는 파격적인 가선대부 지중추부사라는 종2품직에 제수되기까지 했다. 화가로서 높은 벼슬을 얻자 주변에서는 따가운 눈총을 보냈다. 그러나 영조는 그를 매우 아꼈고, 한강을 오르내리며 강 주변의 승경(勝景)을 그리도록 배려하기도 했다. 그는 여든 살 무렵에도 “붓놀림이 신기에 가깝다.”라는 말을 들을 만큼 정력적으로 그림을 그렸다.

정선은 조선 시대의 어느 화가보다 많은 작품을 남겼다. 뿐만 아니라 선비나 직업 화가를 막론하고 크게 영향을 주어 19세기 초까지 겸재파 화법이라 할 수 있는 한국 진경산수화의 흐름을 이어 가게 했다. 진경산수화풍을 이어받은 이들로는 강희언, 김윤겸, 최북, 김응환, 김홍도, 정수영, 김석신 등을 꼽을 수 있다. 그러나 그의 두 아들 만교(萬僑)와 만수(萬遂)는 아버지를 잇지 못하고 손자인 황(榥)만이 할아버지의 화법을 이어받았다.

〈산수도〉

정선이 중년에 그린 것으로 전통 화풍에 그의 개인적인 필치가 더해져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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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나 진경산수화는 19세기 초부터 급속하게 쇠락했다. 진경산수화의 쇠락에 대해 강세황은 이렇게 지적했다. “정선은 평생 익힌 능숙한 필법으로 마음먹은 바를 유려하게 그려 냈는데 바위의 형태와 봉우리를 막론하고 거친 열마(裂麻) 준법으로 일관해 난사(亂寫)하였다. 그래서 사진(寫眞)의 부족함이 드러난다. 심사정의 것은 정선보다 나은 편이나 역시 폭넓고 고랑(高朗)한 시각이 결핍되어 있다.”

이후 산수화는 김홍도풍으로 바뀌는데 정선의 산수화가 서양의 인상파적 성향이 강했다면, 김홍도의 산수화는 정형산수로 치밀한 사생이 특징이다. 이러한 김홍도의 화풍은 겸재의 화풍을 압도하고 새로운 시대의 화풍이 되었다. 그러나 19세기 이후부터는 정선의 진경산수화나 김홍도의 풍속화도 쇠퇴하면서 청나라의 남종화풍이 본격적으로 유행하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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윤재운

고려대 사학과와 동대학원에서 문학박사 학위를 취득했다. 고려대학교 아세아문제연구소 한국사연구실, BK21한국학 교육연구단 국제화팀에서 연구원을 지냈으며, 민족문화연구원 한국사연구소에서 고대사에 관한 다양한 연구를 진행하고 있다. 현재 대구대학교 역사교육과에 있으며, 한국 고대사 연구에 힘쓰고 있다. 그 동안 쓴 책으로 『한국 고대무역사 연구』가 있고, 여러 선생님들과 함께 쓴 책으로 『천년을 여는 미래인 해상 장보고』『새롭게 본 발해사』『고구려 문명기행』『발해의 역사와 문화』등이 있다.접기

장희흥

동국대학교 대학원 사학과 졸업(문학박사), 현 대구대학교 역사교육과 교수. 조선 시대사, 정치사에 관심이 많으며 연구 논문으로 <조선시대 정치권력과 환관>, <소통과 교류의 땅 신의주>(공저) 등이 있다. 

 

 

 

 

옛 그림이 쉬워지는 미술책

겸재 정선

謙齋 鄭敾금강산을 사랑한 화가
 

   지금부터 볼 그림은 우리나라 국보로 매우 널리 알려진 〈금강전도〉다. 세상의 모든 것을 바위로 만들어 놓은 듯한 만물을 품은 경관과 기기묘묘한 바위 봉우리들이 늘어선 천하의 명승지, 금강산을 그린 그림이다. '전도(全圖)'라는 말은 전체를 그렸다는 의미다.

이 그림을 그린 사람은 정선이다. 그는 지금으로부터 300년쯤 전에 활동했던 화가인데, 84세까지 장수를 누리면서 수많은 그림을 그렸다. 오늘날 전해지는 옛 그림 가운데 정선의 그림이 가장 많을 정도다.

〈금강전도〉 정선, 1734년, 종이에 수묵, 94.5x130.8cm, 삼성미술관 리움

ⓒ 탐 | 저작권자의 허가 없이 사용할수 없습니다.

 

   그의 호는 겸재(謙齋)다. 예전에는 남의 이름을 함부로 부르는 것이 크게 예의에 어긋나는 일이라고 생각했다. 그래서 정선 같으면 '겸재' 하고 호를 이름 대신 불렀다. '겸재' 하면 떠오르는 것이 바로 금강산 그림이다. 그만큼 정선은 금강산 그림을 많이 그렸다. 왜 그렇게 금강산 그림을 많이 그렸는지 먼저 그 이유의 하나는 정선이 살던 당시에 금강산 여행 열풍이 불었기 때문이다. 금강산의 아름다운 경치는 그전부터 무척 유명했는데 고려 시대에 이미 중국까지 소문이 났다. 당시 중국 사람들은 다음 생애에 다시 태어난다면 '고려에 태어나서 금강산을 구경해 보는 게 소원'이라고 말했을 정도였다. 정선이 살던 18세기는 사회가 발전하고 경제가 넉넉해졌다. 그래서 많은 사람들이 이름나 있던 금강산으로 여행을 떠날 수 있게 된 것이다. 금강산에 다녀온 사람은 그것을 오래 기억하기 위해 금강산 그림을 찾곤 했다. 마치 우리가 해외 여행지에 가서 엽서를 사는 것처럼 말이다.

두 번째 이유는 정선이 그린 금강산 그림이 특히 인기가 높았기 때문이다. 솜씨도 솜씨려니와 무엇보다도 정선이 금강산을 그리는 새로운 기법을 찾아냈다는 게 중요하다. 그가 그린 금강산 그림을 보면 마치 실제 산의 전경이 눈앞에 펼쳐져 있는 듯한 느낌이 들 정도다.

〈단발령망금강산〉 정선, 1711년, 비단에 수묵, 36.1x37.6cm, 국립중앙박물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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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단발령망금강산〉이란 제목의 그림을 살펴보자. 이 그림은 금강산을 찾아갈 때 거쳐야 하는 단발령이라는 고개와 그 너머에 펼쳐져 있는 금강산을 그린 그림이다. 정선이 새로운 기법을 발휘해 그린 것으로 금강산을 그린 그림 중에서도 특히 유명하다.

금강산은 웅장한 규모를 자랑하는 수많은 바위로 이루어진 산이다. 그래서 아래쪽은 숲이 넓고 울창한데다 위로는 만 2,000봉의 바위로 된 봉우리들이 연속으로 솟아 있다. 정선은 금강산의 특징을 잘 드러내기 위해 바위산을 그리는 기법과 나무가 많은 흙산을 그리는 기법을 함께 썼다. 그 사이에는 구름과 안개를 깔아 자연스럽게 두 세계를 연결시켰다. 이러한 독특한 기법이 정선 그림이 가지는 의의라고 할 수 있다.

그뿐만이 아니다. 정선 그림에는 큰 것과 작은 것을 교묘하게 섞어 놓아서 보는 사람이 그림 세계로 빠져 들어가게 하는 신기한 힘이 있다. 이 그림을 봐도 그렇다. 나무가 많은 흙산의 고개 위에는 흰옷을 입은 사람들이 모여 서 있다. 자세히 보면 힘든 언덕길을 오른 뒤에 숨을 돌리고 있는 모습이란 걸 알 수 있다. 그림을 보고 있으면 마치 "휴~" 하는 숨소리와 함께 "정말 근사 하구나!"라는 감탄의 소리가 들리는 것 같다.

고갯길 중턱으로 시선을 돌리면 짐을 잔뜩 진 노새를 끌고 뒤처져서 올라가는 사람이 보인다. 이것을 보면 누구나 저절로 '아, 가파른 고개인가 보다' 생각하게 한다. 그러면서 힘든 고개를 다 올라온 사람들의 상황을 상상하게 된다. 또 갓을 쓴 사람의 손짓을 따라가 보면 구름 속의 금강산을 가리키고 있다. 이 손짓 하나로 그림을 보는 사람은 자기도 모르게 그림 속의 금강산 구경에 따라 나서게 된다.

이처럼 정선은 새로운 기법을 창안해 내고, 또 그림 속에 여러 아이디어를 심어 놓으면서 당대에 큰 인기를 끌었다. 물론 그가 금강산 그림을 처음 그린 사람은 아니었다. 그림은 남아 있지 않지만 기록을 보면 조선 시대 초기부터 금강산 그림이 그려졌다고 전해진다. 하지만 그 이전의 어떤 화가보다 훨씬 더 잘 그렸고, 또 새롭게 그렸다는 점에서 큰 인기를 누릴 수 있었다. 정말 금강산 그림의 대가라고 할 만하다.

대가는 다른 말로 거장이라고도 하는데, 그림에서 거장이란 강물에 비유하자면 흘러가는 물줄기의 방향을 바꿀 정도의 일을 한 사람이라고 할 수 있다. 정선이 금강산 그림을 그리는 화풍을 만들어 놓자 물줄기의 방향이 바뀌듯이 이후의 화가들은 대부분 그를 따라 했다.

정선에게 그림을 배웠던 심사정, 김홍도, 김희겸 등은 말할 것도 없고 그 외에 많은 화가들이 금강산 그림을 그릴 때면 겸재식 화풍을 따랐다. 거기에는 직업 화가나 문인 화가의 구분이 없었을 정도다. 금강산의 만 2,000봉을 그릴 때면 정선처럼 으레 희고 뾰족뾰족한 바위를 그렸고, 바위를 감싸고 있는 산기슭을 표현하기 위해 먹점을 무수히 많이 찍어 숲의 무성함을 나타냈다.

이름난 화가들만 그렇게 그린 게 아니었다. 지방에 있는 무명 화가들도 정선을 따랐다. 금강산 그림은 앞에서도 말한 것처럼 금강산 여행 열풍이 일면서 크게 유행했다. 그래서 지방에서도 금강산에 관심 있는 사람이 많았고, 이들 역시 금강산 그림을 원했다. 서울의 유명 화가가 그린 그림은 값이 비싸니까 지방에서는 이름나진 않았지만 손재주가 있는 화가들에게 금강산 그림을 그려 달라고 부탁하는 사람이 많았다. 지방의 무명 화가들은 이런 요청이 들어오면 당연한 듯이 정선의 그림을 놓고 베껴 그려 주었다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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윤철규

연세대학교 불어불문학과를 졸업하고 중앙일보에 들어가 한국미술을 소개하는 《한국의 미》 전집 출판을 담당했고, 이후 중앙경제신문, 중앙일보에서 미술 전문 기자로 활동했다. 1999년에 일본으로 유학, 교토 불교대학에서 석사과정을 마치고, 도쿄 학습원대학에서 박사 과정을 수료했다. 전공은 일본의 17, 18세기 회화사이다.접기

출처

옛 그림이 쉬워지는 미술책 | 윤철규 | 

옛 그림은 배경지식이 전혀 없으면 무엇을 그렸는지 알기 쉽지 않다. 그림이 왜 그려졌는지, 누가 그렸는지, 무엇을 그렸는지를 이야기하며 옛 그림을 감상하기 위한 안내 지도를 차근차근 그려 나가는, 청소년을 위한 한국 미술 입문서이다.접기

 

 

겸재 정선

지금부터 볼 그림은 우리나라 국보로 매우 널리 알려진 〈금강전도〉다. 세상의 모든 것을 바위로 만들어 놓은 듯한 만물을 품은 경관과 기기묘묘한 바위 봉우리들이 늘어선 천하의 명승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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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 고유의 화풍을 개척하다

정선

원백, 鄭歚
 
출생사망대표작시기
1676년 01월 03일
1759년 03월 24일
〈금강전도〉, 〈인왕제색도〉, 〈박연 폭포〉, 〈경교명승첩〉, 〈연강임술첩〉 등
조선 후기

  우리 고유의 화풍인 진경산수화를 개척하여 우리나라 회화사상 중대한 획을 그었다.

정선은 영조와 정조 시대에 활동한 화가로, 우리나라 회화사상 가장 중대한 획을 그은 인물이다. 정선이 살았던 시대는 임진왜란과 병자호란의 전란이 수습되고, 조선 고유의 문화가 꽃피던 때였다. 각 분야에서 조선의 민족적 자존심을 회복하기 위한 시도가 있었는데, 회화에서는 조선의 미를 담기 위한 노력이 활발했고, 학문에서는 주자학에 대한 회의에서 비롯된 실사구시의 학문인 실학이 탄생했으며, 한글 시가 문학의 등장, 조선 한문학, 석봉체 등이 탄생하면서 문화적 르네상스가 도래했다.

정선은 이런 시대 배경 속에서 종래 중국풍의 관념적인 산수화를 답습하던 데서 탈피해 우리 고유의 화풍인 진경산수화를 개척했다. 진경산수화는 단순히 산천을 현실적으로 보고 그린 것이 아닌(이를 따로 실경산수화라고 구별해 부르기도 한다) 조선의 독자적인 사상과 이념, 정취를 바탕으로 조선의 산수를 재창조했다고 평가받는다.

정선은 1676년(숙종 2) 1월 3일 한성부 북부에서 정시익과 밀양 박씨 사이에서 태어났다. 본관은 광주, 자는 원백(元伯), 호는 겸재(謙齋), 난곡(蘭谷)이다. 그가 태어났을 때 아버지는 39세, 어머니는 33세였는데, 당시로서는 매우 늦은 출산이었다. 명문이었으나 증조부 대부터 은거하여 관직 생활을 하지 않아 아버지 대에는 가문이 매우 쇠락한 상태였다. 게다가 정선이 14세 때 아버지가 죽고, 그해 기사환국1) 이 일어나면서 외가까지 타격을 받자 생활이 매우 어려워졌다.

어린 시절 안동 김씨 일문인 김창협, 김창흡, 김창업 문하에서 공부했고, 《중용》과 《대학》 등에 조예가 깊었다. 그러나 끼니를 잇지 못할 정도로 곤궁하여 화원이 되었다고 한다. 그는 양반이었기 때문에 생업에 종사할 수 없어 서른이 될 때까지 가난 속에 살았고, 서른 살 무렵 김창집의 추천으로 도화서에 들어갔다.

그는 중인 계급인 도화서 화원 사이에서 정치적 대립도, 긴밀한 교류도 하지 않고 거리를 유지하며 그림을 그리는 데 매진했다. 또한 사대부들과 교류가 잦았고, 영조의 총애를 받았으며, 김창집이 우의정에 오르면서 화원으로서 순조로운 생활을 했다.

정선의 이름이 널리 알려진 것은 1711년 금강산을 유람하고 그린 〈신묘년풍악도첩〉이다. 스승 김창협이 제자들을 데리고 떠난 금강산행에 동행한 뒤 그린 것으로, 〈금강산내총도〉, 〈단발령망금강〉, 〈장안사〉, 〈불정대〉, 〈벽하담〉, 〈백천동장〉, 〈옹천〉, 〈고성문암관일출〉, 〈해산정〉, 〈총석정〉, 〈삼일포〉, 〈시중대〉 등 산수 13면과 발문 1면으로 구성되어 있다. 비록 필법과 묵법이 서툴기는 하지만, 훗날 진경산수 기법의 기초가 엿보인다는 점에서 높이 평가되는 작품이다. 이듬해 금강산에 다시 다녀온 후 그린 〈해악전신첩〉은 현재 전하지 않으나 당시 많은 사람들이 찬탄했다고 한다. 이 시기부터 여행을 통해 다양한 화법을 구사한 정선은 60대 이후 진경화법을 더욱 성숙시켰다.

〈신묘년풍악도첩〉 중 〈장안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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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묘년풍악도첩〉 중 〈총석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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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721년, 정선은 경상도 하양 현감에 제수되었다. 한양에서는 신임사화2) 가 일어나 그의 후원자들 다수가 죽임당하거나 귀양을 갔다. 최고의 후원자였던 김창집도 정쟁에 휘말려 거제로 유배되었다 사사당했고, 그 충격 때문인지 얼마 후 김창업과 정선의 스승 김창협도 세상을 떠났다. 이에 따라 정선을 후원하고 그림을 주문하는 사람 역시 줄었다. 그러나 영조가 즉위한 후 상황이 반전되어 그림 주문이 잇달았다고 한다.

1726년, 하양 현감 임기를 마치고 한양으로 올라온 정선은 의금부 도사에 제수되었다. 그는 순화방 백악산 밑에 집을 마련하고, ‘인곡정사(仁谷精舍)’ 또는 ‘인곡유거(幽居)’라고 불렀다. ‘정사’란 심신을 연마하고 학문을 전수하는 곳, ‘유거’란 마을과 멀리 떨어진 외딴 집이라는 의미이다. 말년에 인곡정사에서의 생활을 그린 〈인곡유거도(仁谷幽居圖)〉는 정선이 스스로의 생활을 그린 그림이라 할 수 있다. 또한 그는 기록화도 즐겨 그렸는데, 의금부 요원들의 계모임에 참석했을 때는 화공을 시키지 않고 직접 〈의금부계회도〉를 그렸으며, 이광적의 회방연에 참석했을 때는 〈회방연도〉를, 이춘제가 청나라 옹정제의 황후가 죽은 데 대한 위문 사절로 떠날 때의 전별연 모습을 〈서교전의도〉로 남겼다.

1733년, 정선은 경상도 청하 현감에 제수되었다. 한적한 시골에서 홀로 사색하며 그림을 그리던 정선은 이때 화원으로서의 원숙미가 절정에 이르러, 이듬해 생애 최고의 걸작 중 하나로 꼽히는 〈금강전도〉를 완성했다.

현재 국보 제217호로 지정된 〈금강전도〉는 우리의 산수를 실경으로 그려 낸 작품이다. 항공 촬영을 하듯 하늘에서 부감하는 시점에서 그려진 이 작품에는 금강산 1만 2천 봉우리가 장대하게 펼쳐져 있다. 오른편의 날카롭게 수직으로 뻗은 골산(骨山, 바위가 많은 산)과 왼편의 부드러운 육산(肉山, 흙과 나무가 많은 산)이 강약으로 대비되며 조화를 이루고, 필선이 거침없이 힘차게 그어져 있음에도 세부 묘사가 매우 치밀하다.

1735년, 정선은 노모가 세상을 떠나자 한양으로 올라왔다. 그사이 둘째 손자가 태어났는데, 그가 바로 진경산수화풍을 계승하여 〈노적만취도〉, 〈양주송추도〉, 〈대구달성도〉 등을 남긴 손암(巽菴) 정황(鄭榥)이다.

환갑을 넘긴 정선은 이때부터 불후의 명작들을 쏟아 내기 시작했다. 65세부터 5년간 양천 현령을 지내면서 각지를 답사하거나 순시하여 그림으로 남겼는데, 한강 줄기를 따라 유람하며 그린 《경교명승첩》과 경기도 연천의 임진강변을 그린 《연강임술첩》이 대표적이다. 또한 선비가 툇마루에 나와 화분에 핀 모란을 감상하는 자화상적인 그림 〈독서여가〉처럼 일상을 소재로 다루기도 했다. 그림 주문도 쏟아졌는데, 그의 그림 한 점은 논 몇 마지기 가격을 주어도 구하기 힘들었다고 한다.

70세가 된 정선은 임기를 마치고 인곡정사로 돌아와 오랜 벗 사천 이병연, 관아재 조영석 등과 교류하며 시와 그림을 나누는 한적한 생활을 했다. 정선은 이병연에게 초상화와 그의 서재 노촉재를 그려 선물하기도 했다.

이 시기에 만년의 걸작 〈인왕제색도〉와 〈박연 폭포〉가 탄생했다. 국보 제216호로 지정된 〈인왕제색도〉는 비 온 후 인왕산의 경치를 그린 것으로, 조선 후기 진경산수화를 대표하는 작품이다. 인왕산의 바위가 원경 가득히 배치되어 있고, 그 아래는 짙은 안개에 감싸여 있는데, 산세와 수목들은 짙고 힘차게, 안개와 능선들은 옅게 표현되어 강렬한 대비를 이룬다. 대상을 충실히 묘사하면서도 박진감을 생생하게 살려 낸 걸작이다.

정선은 〈박연 폭포〉에서 폭포수가 떨어지는 광경을 강조하기 위해 대상을 과감히 변형시키는 기법을 사용했다. 폭포의 물줄기가 힘차게 쏟아지는 모습이 화면 전체를 압도하는 가운데, 폭포수가 떨어지며 일어나는 하얀 포말을 강조하기 위해 양옆의 절벽을 짙은 먹으로 겹쳐 그려 강약을 강하게 대비시켰다. 이로 인해 폭포가 굉음을 울리는 듯한 느낌과 함께 역동성이 부여되어 있다.

80세에 이르기까지 붓을 놓지 않고, 만년이 될수록 더욱 위대한 걸작들을 쏟아 낸 겸재 정선. 그는 독창적인 필치와 치밀한 관찰을 토대로 한 사실적인 묘사, 만년이 될수록 자연과 예술에 대한 원숙한 이해를 바탕으로 한국적 회화를 창시했다고 평가된다.

정선은 1759년 3월 24일 조용히 세상을 떠났다. 세상을 떠난 이후에도 그의 명성은 계속되었고, 강희언, 김윤겸, 정황 등이 진경산수화풍을 이어받아 진경산수화가 하나의 회화 장르로 정착되었다. 50∼60년 뒤에도 도성 안 집집마다 그의 그림이 걸려 있었다고 한다. 한 중국인이 조선을 방문해 직접 조선의 산천을 보고 난 후 “비로소 겸재의 그림이 신의 경지에 이르렀음을 깨달았다.”라고 감탄했다는 일화도 전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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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영은

대학에서 미술을 전공하고 대학원에서는 미술 이론을 공부했다. 미술관에서 연구원으로 근무했고, 많은 작품을 직접 만나기 위해 미술관, 박물관을 찾아다녔다. 해외 미술 서적들을 국내에 번역해 소개하기도 했으며, 현재는 대중이 보다 쉽고 재미있게 미술에 접근할 수 있도록 미술과 관련된 다양한 책들을 기획, 집필하고 있다.접기

출처

미술사를 움직인 100인 | 김영은 | 청아출판사

미술사에 큰 영향을 끼친 100인의 예술가를 소개한다. 회화, 판화, 조각 등 다양한 분야의 예술가들을 소개하며 그들의 삶과 작품을 통해 역사와 예술의 관계의 흐름을 읽을 수 있다. 우리에게 잘 알려진 예술가들을 재조명하고 , 잘 알려지지 않은 예술가들은 삶과 작품을 새롭게 공감할 수 있을 것이다.접기 

 

정선

우리 고유의 화풍인 진경산수화를 개척하여 우리나라 회화사상 중대한 획을 그었다. 정선은 영조와 정조 시대에 활동한 화가로, 우리나라 회화사상 가장 중대한 획을 그은 인물이다. 정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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천지만물의 이치를 화폭에 담다

강희안

강경우(姜景愚), 姜希顔
 
 
출생사망대표작시기
1417년
1464년
〈고사관수도〉, 〈교두연수도〉, 〈산수인물도〉, 〈고사도교도〉, 〈강호한거도〉 등
조선 전기

시, 글씨, 그림에 뛰어났으며 사대부 문인의 풍류가 담긴 독창적이고 색다른 화풍을 창시하여 조선 중기 화단에 큰 영향을 끼쳤다.

강희안은 조선 세종 시대부터 세조 시대까지 활동한 문인이자 서화가로, 시와 글씨, 그림 모두에 뛰어나 안견, 최경(崔涇)과 함께 삼절(三絶)로 이름을 날렸다. 전서(篆書), 예서(隸書)와 팔분(八分)에서 독보적인 경지를 이루었으며, 진나라의 왕희지, 원나라의 조맹부에 비견되곤 했다. 그림에 있어서도 산수, 인물 등에 뛰어났는데, 당시 유행하던 북송화풍에서 벗어나 사대부 문인의 풍류가 담긴 독창적이고 색다른 화풍을 창시하여 조선 중기 화단에 큰 영향을 미쳤다.

그는 자연을 사랑하는 것으로 유명하며 집을 각양각색의 꽃으로 가득 채우고, 《양화소록(養花小錄)》이라는 원예 책을 낼 정도였다. 이런 자연에 대한 애정과 관조적인 태도를 시와 그림을 통해 표현했다. 《양화소록》에서는 이렇게 말하고 있다.

비록 한 포기 풀이나 한 그루의 나무라 할지라도 마땅히 그것들이 지닌 이치를 생각하여 그 근원까지 파고 들어가서 그 앎을 두루 미치지 않음이 없고 그 마음을 꿰뚫어 통하지 않음이 없게 되면 나의 마음이 자연히 만물에 머물지 않고 만물의 밖에 뛰어넘어 있을 것이니 그 뜻이 어찌 엷음이 있으리오.

강희안은 1417년(태종 17) 지돈녕부사 강석덕의 아들로 태어났다. 어머니는 영의정 심온의 딸로, 세종이 그의 이모부가 된다. 당대 뛰어난 문장가이자 문인화가로 이름을 날린 좌천성 강희맹의 형이기도 하다. 자는 경우(景愚), 호는 인재(仁齎)이며, 본관은 진주이다.

두세 살 무렵부터 담장이나 벽에 손 가는 대로 붓을 휘둘러 글씨를 쓰거나 그림을 그릴 정도로 서화에 재능을 타고났다고 하며, 어린 시절부터 문장과 학문에도 뛰어났다. 1441년에 식년문과에 첫 도전해 한 번에 급제했고, 돈녕부주부에 올라 집안의 기대를 한몸에 받았다. 그러나 자연을 벗 삼아 사색하기를 즐기며 소박한 생활을 사랑하는 성품으로, 정치가로서의 포부는 크지 않았다. 이 때문인지 일찍부터 의정부에서 검상으로 추천했으나 번번이 사양하곤 했다.

1443년, 정인지 등과 함께 세종이 창제한 정음 28자에 주석을 붙였으며, 1445년에는 최항 등과 함께 〈용비어천가〉의 주석을 붙였다. 그는 관직 생활 초기부터 글씨를 잘 쓰기로 유명했는데, 1445년 조정의 추천으로 명나라에서 보낸 ‘체천목민영창후사(體天牧民永昌後嗣)’라는 8자를 옥새에 새겼으며, 세조 때 임신자(壬申字)를 녹여 새로 글자를 주조할 때도 그 글씨를 썼다. 이 글씨는 을해자(乙亥字)라고 한다. 그러나 안타깝게도 글씨 쓰기를 꺼려해, 을해자와 아버지의 묘비인 강지돈녕석덕묘표(姜知敦寧碩德墓表) 등에 새긴 정도만이 전할 뿐이다.

강희안은 무엇보다 신묘한 경지에 이르렀다는 평을 들을 만큼 그림에 천부적인 재능을 지니고 있었다. 그러나 그림에 대한 재능 역시 스스로 드러내기를 좋아하지 않았는데, 이는 사대부로 나고 자랐기 때문으로 짐작된다. 평소 그는 아들들에게 “글씨나 그림은 천한 기술이니 후세에 전하면 도리어 이름만 욕될 뿐이다.”라고 말했다. 때문에 그림 역시 전하는 작품이 적다. 명나라에 사신으로 갔을 때도 중국 선비들이 글씨와 그림을 다투어 청했으나 모두 거절했는데, 함께 사신으로 갔던 김종직이 까닭을 물으니 “사대부의 본분을 망각해서는 안 된다.”라고 말했다고 한다.

그러나 그 재주를 드러내 놓고 자랑하기를 꺼렸을 뿐 그림은 그에게 있어 사상을 갈고 닦는 매개체였다. 앞의 일화에서 김종직이 “그렇다면 왜 그림을 그리느냐?” 하고 묻자 그는 “그림은 내게 있어 천지만물의 이치를 깨닫는 도구다.”라고 대답했다고 한다.

1447년, 강희안은 이조정랑에 올랐고, 그해에 최항, 성삼문 등과 함께 《동국정운(東國正韻)》 편찬에 참여했다. 1450년 세종이 위독할 때는 미타관음(彌陀觀音) 등의 경문(經文)을 썼다. 단종 시기인 1454년에는 집현전 직제학에 올랐고, 같은 해 수양대군의 주도로 서울과 8도의 지도가 제작될 때 예조참판 정천 등과 함께 참여했다. 세조 1년인 1455년에는 원종공신 2등에 녹훈되었다.

강희안은 성삼문, 박팽년 등의 문신들과 친밀하게 지냈는데, 1456년 이들이 가담한 단종 복위 운동에 그도 관련되었다는 혐의를 받았다. 이 일로 성삼문, 박팽년, 하위지 등이 죽임당했으나 그만은 화를 모면하고 이후에도 호조참의, 황해도관찰사, 중추원부사 등 고위 관직을 지냈다. 당시 성삼문이 심문받을 때 강희안이 연루되었냐고 세조가 묻자 “선왕의 명신들을 다 죽여도 그만은 남겨 두고 쓰시오. 진실로 어진 사람이오.”라고 말하여 화를 면했다고 한다.

강희안은 곤욕을 치르기도 했으나 관직 생활에 있어 승승장구했다. 그럼에도 그는 현실 세계를 떠나 자연을 벗 삼아 은거하여 살고 싶어 했고, 정계 진출에 소극적이었다. 평생 부귀와 공명에 얽매이지 않고 화려한 것을 멀리한 청빈한 성품 탓이기도 했으나, 계유정난과 단종 복위 운동으로 친우들이 죽임당하는 일을 겪으면서 정치에 환멸을 느낀 것도 한 가지 원인이었다. 그는 점차 도가 사상에 심취했고, 자연과 하나 되는 삶, 도연명적인 삶을 꿈꾸었다. 그는 아우인 강희맹과 고승 일암을 벗 삼아 교유하며 현실 세계에서 벗어날 수 없는 자신의 처지와 일장춘몽에 불과한 인생에서 오는 공허함을 달랬다.

《양화소록》에서 그는 “한 세상에 나서 오직 명성과 이익에 골몰하여 늙도록 헤매고 지치다가 쓸쓸히 죽어 가니 이것이 과연 무엇을 하는 것인가.”라고 말했다. 또한 관직 생활을 하는 동안 귀가하여 달빛 향기에 취해 옷깃을 풀어 헤치고 연못가를 거닐며 노래를 읊조리면 마음만이라도 세상사에서 벗어나게 된다고 토로했다.

대표작인 〈고사관수도(高士觀水圖)〉는 이런 그의 심회가 잘 표현된 작품이다. 깎아지른 듯한 절벽을 배경으로 바위에 엎드려 물을 바라보며 사색하는 선비의 모습을 그린 이 작품은 세련미 넘치는 필치와 직업 화가들의 작품에서는 볼 수 없는 문인으로서의 풍류가 가득 담겨 있다. 인물을 산수의 일부로 작게 처리하고, 풍경은 먹을 듬뿍 적셔 거칠고 두텁게 표현하였으며, 인물과 옷 주름 등은 간결하면서도 분명하게 그렸다.

〈고사관수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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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당시에는 중국 북송화의 영향을 받은 안견을 중심으로 산수를 웅장하게 묘사하고 인물을 보일 듯 말 듯 미세하게 처리하는 화풍이 화단을 지배했는데, 강희안의 작품처럼 인물과 산수가 어우러진 구도를 비롯해 배경을 크고 두텁게 칠하는 표현 방식은 매우 독창적인 것이다. 거기에 선비로서의 생활 철학과 풍류가 담긴 간결하고 힘찬 구성은 중국 회화에서 볼 수 없는 조선만의 특징이었다. 이 같은 강희안의 표현 방식은 이후 조선 중기 화단에 영향을 주어 소경산수인물(小景山水人物, 경치보다 인물의 비중이 큰 산수인물화) 양식을 유행시켰다.

기록에 따르면 그는 묵으로만 표현한 작은 풍경화들을 즐겨 그렸고 영모화와 미인도에도 뛰어났다고 하나 현재 전하지 않는다. 지금까지 전하는 작품으로는 〈고사관수도〉, 〈교두연수도(橋頭烟樹圖)〉, 〈산수인물도〉, 〈고사도교도(高士渡橋圖)〉, 〈강호한거도(江湖閑居圖)〉 등이 있다.

1464년(세조 10) 겨울, 강희안은 등에 종기가 나서 48세의 나이로 죽었다. 죽기 전에 동생 강희맹에게 “꿈에 관부에 들어갔는데, 벼슬아치들이 앉은 자리에 한 자리가 비어 있어 까닭을 물으니 ‘여기 앉을 사람이 곧 돌아올 것이다’라고 말했다. 그 말을 듣고 보니 그 자리에 내 이름이 적힌 팻말이 붙어 있었다.”라고 말하며 자신의 죽음을 예견했다는 신비로운 이야기가 전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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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영은

대학에서 미술을 전공하고 대학원에서는 미술 이론을 공부했다. 미술관에서 연구원으로 근무했고, 많은 작품을 직접 만나기 위해 미술관, 박물관을 찾아다녔다. 해외 미술 서적들을 국내에 번역해 소개하기도 했으며, 현재는 대중이 보다 쉽고 재미있게 미술에 접근할 수 있도록 미술과 관련된 다양한 책들을 기획, 집필하고 있다.접기

출처

미술사를 움직인 100인 | 김영은 | 청아출판사

미술사에 큰 영향을 끼친 100인의 예술가를 소개한다. 회화, 판화, 조각 등 다양한 분야의 예술가들을 소개하며 그들의 삶과 작품을 통해 역사와 예술의 관계의 흐름을 읽을 수 있다. 우리에게 잘 알려진 예술가들을 재조명하고 , 잘 알려지지 않은 예술가들은 삶과 작품을 새롭게 공감할 수 있을 것이다.접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