심사정 작품

2022. 8. 17. 03:03美學 이야기

본관은 청송. 자는 이숙(頣叔), 호는 현재(玄齋)·묵선(墨禪). 아버지는 문인화가 정주(廷胄)이다. 증조부 지원(之源)이 영의정을 지낸 이름난 가문에서 태어났으나 할아버지인 익창(益昌)이 과거부정사건을 저지른 데 이어 왕세자(나중에 영조) 시해 음모에 연루되어 극형을 당하게 됨으로써 집안은 몰락하고 평생 동안 벼슬길에 나갈 수 없게 되었다. 1748년(영조 24) 어진모사중수도감(御眞摸寫重修都監)의 감동(監董)으로 추천되었으나 대역죄인의 자손이라는 이유 때문에 파출(罷出)되었다. 어려서부터 그림에 천부적 자질을 지녀 스스로 물상을 그리고 현상을 만들 줄 알았으며, 20세 전후하여 정선의 문하에서 본격적으로 그림을 배웠다. 소론계(少論系)의 김광수(金光遂)·이광사(李匡師)·김광국(金光國)과 남인계(南人系)의 강세황(姜世晃) 등과 교유하며 남종화풍의 조선화(朝鮮化)에 크게 기여했다. 영모·화훼·초충(草蟲)·운룡(雲龍) 등 각 분야에 능숙했으며, 특히 산수를 잘 그려 정선과 함께 겸현양재(謙玄兩齋)로 손꼽혔다. 초기에는 정선의 화풍에 토대를 두고 황공망(黃公望)과 심주(沈周)를 비롯한 원말사대가와 오파(吳派)의 남종화풍을 두루 섭렵하면서 이 화풍에 대한 이해를 넓히고 그 진수를 터득하는 데 힘을 기울였다. 이러한 연마를 통하여 요체를 체득한 다음 50대에 이르러 강하고 거친 묵법(墨法)을 특징으로 하는 조선 중기의 절파(浙派) 화풍을 융합시켜 중국과는 구별되는 특유의 한국적 화풍을 이룩했다. 만년에 이르러서는 진경산수를 다루면서 눈에 보이는 실제의 경관을 초월하여 내재된 자연의 본질과 자신의 내면세계를 융합시켜 새롭게 이상화된 산수화를 묘출함으로써 우리 산천의 이념화를 구현했다. 이밖에 영모·초충 등에서도 명대(明代)의 화법을 토대로 자신의 화풍을 이룩했다. 정선과 함께 영조연간 최고의 대가로 손꼽혔던 그의 이러한 화풍은 최북(崔北)·김유성(金有聲)·이인문(李寅文)·이방운(李昉運) 등에게 적지 않은 영향을 미쳤다. 대표작으로 국립중앙박물관 소장의 〈강상야박도 江上夜泊圖〉(1747)·〈파교심매도 奢芋荒巳踪μ(1766), 개인 소장의 〈경구팔경도 京口八景圖〉(1768) 등이 있다.

 

 

 

 

 

 

 

 

 

 

 

 

 

 

 

 

 

 

 

 

 

 

 

 

 

 

 

 

 

 

 

 

 

 

 

 

 

 

 

 

 

 

 

 

 

 

 

 

 

 

 

 

 

 

 

 

  • 소나무 아래서 차를 마시다 - 심사정 <송하음다>     

심사정(沈師正, 1707-1769) <송하음다松下飮茶 소나무 아래서 차를 마시다> 종이에 엷은 색, 28.0x38.5cm, 리움

초여름, 한여름마냥 더워진 날씨에도 뜨거운 커피를 찾는 사람들은 또 여전합니다.

2014년 경기도박물관의 <차, 즐거움을 마시다>전에는 차를 주제로 한 다양한 그림들이 전시되었었는데, 그중 심사정의 그림 한 점을 들여다봅니다.


계곡 물 옆, 소나무 그늘 아래 두 선비가 자리를 잡고 있습니다. 한 사람은 팔을 들어 찻잔을 입에 대었고, 다른 이는 이 장면을 느긋하게 보고 있습니다. 인물과 차를 준비하는 다동 모두 머리와 복색이 중국풍이지만 분위기는 우리 산천, 우리 사람들 같습니다.

낮게 펼쳐진 원경의 산, 시원한 개울, 나지막한 언덕 위의 소나무 등이 조화롭고 안정적으로 그려져 있습니다. 따뜻한 차를 천천히 마시며 담소를 나누다보면 나무 그늘에 불어오는 바람과 개울에서 들리는 물소리가 땀을 천천히 식혀줄 듯합니다.

두 사람만의 고즈넉한 자리가 차로 인해 더 향기로운 것 같습니다.


우측에 지두법(指頭法)이라고 써서, 이 그림이 손가락이나 손톱 등으로 완성한 작품임을 나타냈습니다. “심사정인” 인장은 다소 크고 조금 어색해 보입니다.

소나무 아래서 차를 마시다 - 심사정 <송하음다>

 

소나무 아래서 차를 마시다 - 심사정 <송하음다>

 

koreanart21.com

 

 

 

심사정의 전이모사 1

 

심사정(1707 ~ 1769)은 겸재 정선(1676 ~ 1759)보다 약 30년 뒤의 화가다. 그가 활동하던 때 조선에서는 정선에 의해 주도된 소위 진경산수화가 한창 각광받던 시절이었다. 하지만 심사정은 그런 시류와는 상관없이 중국의 전통 화법을 연구하는데 전념했다. 조선의 산수화는 전통적으로 중국의 정형화된 산수화 기법을 이해하고 모방하는 것으로부터 출발하고 유지되었기 때문에 어쩌면 심사정의 선택은 당연한 순서였는지도 모른다.

 

6세기경 중국 육조시대 남제(南齊)의 화가이자 화론가였던 사혁(謝赫)은 ≪고화품록(古畫品錄)≫에서 회화에서 중요시되어야 하는 육법(六法)을 제시한 바가 있다. 그 육법의 하나인 ‘전이모사(轉移模寫)’는 앞선 화가들의 그림을 모방하여 그리면서 그 기법을 체득하는 것을 말한다.

그림에 나타난 옛사람의 정신과 형태를 그대로 따라서 그리는 것은 동양 회화의 특수한 전통 중의 하나이다. 조선의 화가들도 거의 대부분 중국화풍을 모방하면서 그림을 배웠다. 심사정 역시 그런 전통을 따라 그림을 배운 것이다.

심사정이 활동하던 시기에는 원대와 명대 그리고 청대까지의 남종화가 널리 유행했다. 심사정도 중국 역대의 대표적 남종화가들의 화풍을 널리 섭렵했다.

표암 강세황은 『현재화첩(玄齋畵帖)』발문에서 “현재는 처음에 심주(沈周)를 공부하여 초년에는 피마준(披麻皴)이나 혹은 미점법(米點法)을 사용했으며 중년에는 대부벽(大斧劈)을 시작했다.”고 기술했다.

 

심주(沈周)는 명나라 때의 대표적인 남종문인화가로 피마준법(披麻皴法)을 구사하였고, 미점법(米點法)은 북송(北宋)의 문인화가인 미불(米芾)의 대혼점(大混點)을 가리킨다. 대부벽준(大斧劈皴)은 중국 북송 후기에서 남송 초기의 화원 화가였던 이당(李唐)의 법이라고도 불리는데 주로 절파(浙派) 등의 북종화에서 쓰이던 준법이다.

 

심사정은 그림에 입문하면서부터 40대 초반까지는 남종화법을 이해하고 체득했으며, 이후 10년간은 북종화법 중 하나인 절파화풍을 남종화법과 결합시키는 시도를 했고, 말년에 이르러서는 자신만의 화법을 이룩해냈다고 한다.

심사정은 이런 과정 속에서 중국 화가들의 화풍이나 화의를 따라 수도 없는 그림을 그렸을 것이다. 심사정은 중국의 여러 화가들을 ‘방(倣)’한 작품들을 많이 남겼다. ‘방(倣)’한다는 것은 옛 대가의 화의(畵意)를 후대의 화가가 어느 정도 자기 나름대로 해석하고 자유롭게 표현하는 것을 뜻한다. 따라서 그림의 주제나 구도, 화법 등이 원작 그대로인 것은 아니다. 현대적 관점에서는 표절로 간주될 수도 있지만 전통적 동양 회화에서는 이 또한 하나의 창작활동이었던 것이다.

 

[심사정 <방심석전산수도(倣沈石田山水圖)>, 1758, 지본담채, 129.4 x 61.2cm, 국립중앙박물관] 

 

심석전(沈石田)은 명나라 때의 화가로 이름은 주(周)이고 석전(石田)은 호(號)이다. 원말사대가 이후 저조했던 남종화를 부흥하고 오파(吳派) 계통의 문인화를 정립시킴과 동시에 묵희(墨戯)로서의 문인의 화훼잡화(花卉雜畫) 양식을 부흥시킨 인물로 꼽힌다. 명나라 사대가(四大家)의 하나이다.

 

그림은 초옥에서 글을 읽고 있는 선비가 있는 전경과 바위 절벽의 중경, 그리고 뒤쪽의 주산 등 세 부분의 경물로 이루어져 있다. 집 뒤의 나뭇가지와 절벽 위의 소나무 가지를 통하여 시선을 자연스럽게 근경에서 중경을 거쳐 원경으로 유도함으로써 화면 속 경물들이 서로 연결되어 통일감을 갖게 한다는 평을 받는다.

‘무인(戊寅)’이라는 관지를 통하여 1758년의 작품으로 추정할 수 있다. 심사정이 52세 때이다. 그러나 이 그림은 심사정 자신이 ‘방심석전법(倣沈石田法)’이라고 적었음에도 불구하고 심주(沈周)의 화풍과는 별로 연관성이 없다는 지적을 받고 있다. 원경의 산과 근경의 언덕묘사, 수지법(樹枝法) 등에서 남종화법을 썼으나 왼편 중경의 절벽 표현에서는 부벽준이 구사되어 남종화법과 북종화법이 함께 혼합된 심사정 특유의 절충적 화풍을 나타내고 있다는 평이다.

 

[심주 <고은도(高隱圖), 지본수묵, 111 x 58cm]

 

[심주 <추산도(秋山圖), 지본담채, 131 x 61cm]

 

명나라대의 문인화에 큰 영향을 끼친 화가로 예찬(倪瓚, 1301 ~ 1374)은 심주보다 앞선 원나라 말기의 화가이다. 심사정이 예찬을 방(倣)한 작품은 비교적 많은 편이다.

 

[심사정 <방운림(倣雲林)산수>, 지본담채, 30.8 x 42.1cm 선문대박물관]

 

[심사정 <방예운림법(倣雲林法)산수>, 25.6 x 34cm]

 

[심사정 <방운림필의(倣雲林筆意)> 또는 <송죽모정(松竹茅亭)>, 지본담채, 29.9 x 21.2cm, 간송미술관]

 

예찬은 오진(吳鎭) ·황공망(黃公望) ·왕몽(王蒙) 등과 함께 원말 4대가로 꼽히는 화가이다. 여러 가지 호를 사용하였지만 운림(雲林)이란 호가 가장 널리 알려져 있다.

위의 세 그림은 모두 근경에 나무들을 배치하였는데 이는 예찬 그림의 특징이다. 그의 대표적 작품인 <육군자도(六君子圖)>와 <용슬재도(容膝齋圖)>뿐만 아니라 <우산임학도(虞山林壑圖)>, <어장추제도(渔庄秋霽图)> 등에서도 쉽게 확인된다.

 

[예찬 <용슬재도>, 1372년, 지본수묵, 74.7 x  35.5cm  타이페이국립고궁박물원]

 

[예찬 <우산임학도(虞山林壑圖)> 1372년 94.6 x 35.9cm, 미국 메트로폴리탄미술관]

 

예찬의 그림들은 물기 적은 갈필(渴筆)에 연한 먹을 묻혀 간결하게 그리고 근경과 원경을 똑같은 농담(濃淡)으로 그리는 특징을 나타낸다. 그렇게 그린 그의 그림들은 소략하여 적막하고 담백하다 못해 쓸쓸함이 넘쳐 난다.

심사정이 방한 그림에도 그런 분위기가 흐른다. 특히 <송죽모정>은 근경의 빈 정자와 강을 사이에 두고 먼 산을 포치(布置)한 것이 전형적인 예찬식 구도에다, 차갑고도 담백한 의경(意境)과 쓸쓸하면서 적적한 그림의 품격이 속되지 않다는 평을 받는다.

산수화에 짚이나 억새로 지붕을 이은 정자인 모정(茅亭)을 그리기 시작한 것은 예찬이 처음이라는 주장도 있다.

 

심사정의 전이모사 1

 

심사정의 전이모사 1

심사정(1707 ~ 1769)은 겸재 정선(1676 ~ 1759)보다 약 30년 뒤의 화가다. 그가 활동하던 때 조선에서는 정선에 의해 주도된 소위 진경산수화가 한창 각광받던 시절이었다. 하지만 심사정은 그런 시류와

blog.daum.net

 

 

 

심사정의 '소나무 아래서 폭포를 바라보는 선비(송하관폭도)

 

울산박물관이 개관 11주년 기념일(6월 22일)을 맞아 6월 21일부터 9월 12일까지 박물관 2층 역사실 내 '테마전시실'에서 특별한 볼거리를 제공한다고 밝혔다.

먼저 올해 제2차 주제전시로 다양한 여름나기 모습을 살펴보는 '여름 대(vs) 여름'을 개최한다.

이번 전시는 일과 쉼, 기우제와 장마, 뜨거운 음식과 차가운 음식, 모시와 삼베 등과 같이 상반되는 주제를 통해 여름의 모습을 살펴본다.

사진은 심사정의 '소나무 아래서 폭포를 바라보는 선비(송하관폭도·松下觀瀑圖)'. 2022.6.21

위의 사진은 심사정의 '소나무 아래서 폭포를 바라보는 선비(송하관폭도·松下觀瀑圖)'. 2022.6.21

 

심사정의 '소나무 아래서 폭포를 바라보는 선비(송하관폭도)

 

심사정의 '소나무 아래서 폭포를 바라보는 선비(송하관폭도)

심사정의 '소나무 아래서 폭포를 바라보는 선비(송하관폭도) 울산박물관이 개관 11주년 기념일(6월 22일)을 맞아 6월 21일부터 9월 12일까지 박물관 2층 역사실 내 '테마전시실'에서 특별한 볼거리

cm8832.tistory.com

 

 

 

(75)심사정, 남산에서 북한산을 보다

 

최열

 

옆으로는 남산을 끼고 앞으로는 관악산이 보이니     傍對南山煎冠岳 

짙은 신록과 연한 분홍 빛이 아름다움을 다투네     濃靑淡赭紛爭姸

작은 섬에 드리운 버들 사립문에 비쳐          小嶼垂楊映柴門

다시금 강가에다 전원을 만들었네            還從水國開園田

 

- 강세황, <소동파의 연강첩장도(烟江疊嶂圖)에 차운하여 쓴 창랑정(滄浪亭)>, 『표암유고(豹菴遺稿)』

 

<경구팔경(京口八景) -1 남산에서>, 1768, 종이, 13.5 × 24 cm, 개인소장.

 

내가 좋아해 마지않는 미술사학자 이동주는 『우리나라의 옛 그림』이란 책에서 심사정(沈師正, 1707-69)이 그린 <경구팔경(京口八景)> 여덟 폭을 가리켜 “도대체 서울 근교의 어디인지 알 길도 없거니와 과연 이것이 서울 근교일까 의심나는 화면이 하나둘이 아니다.”라고 설명하고 있다. 그런데 심사정의 벗인 강세황(姜世晃, 1713-91)은 이 그림 옆에 붙인 글에서 “깎은 절벽, 높은 산마루는 구름 하늘을 높이 받치고 큰 소나무는 안개 낀 마을을 가리어 어른거리는데, 여기에 하늘 밖 기이한 봉우리 우뚝 서서 푸른 병풍 치듯 하였으니 물론 화품을 떠나 이런 풍경이 어찌 왕성 근처에 있는 것일까”라고 썼다. 강세황은 벗의 그림을 보고 아주 감동했던 모양이다. 정말 우리가 사는 이곳 도성에 어떻게 이런 풍경이 있느냐[王城近地耶]고 탄식을 금치 못하니 말이다.

 

그러나 이 그림은 상상력으로 만든 게 아니라 사진을 찍은 것처럼 과장됨 하나 없는 실경이다. 남산에는 소나무가 참으로 많았다. 그 소나무 아래서 벗들 몇이 모이고 보니 그 바로 옆 절벽인데 실로 남산의 서쪽 기슭은 가파르게 깎아지른 절벽 지대였다. 화폭 상단에는 멀리 북한산 봉우리가 북쪽 하늘을 찌를 듯 치솟아 오른다. 이쪽 석벽과 저쪽 석봉이 서로 마주 응대하는 모습이라 그 사이를 수놓는 공간감이 아득하다.

 

북한산 바로 아래로는 경복궁의 배경을 이루는 백악산이 마치 용이나 되는 것처럼 등 줄기를 길게 늘이고 있는데 밑으로 흐르는 안개 구름이 신비롭다. 화폭 중앙에는 깨알 같은 집들이 즐비하게 늘어섰다. 청계천을 경계 삼아 위로는 북촌이요 아래로는 남촌이다. 20세기 들어 이리저리 파헤침에 따라 아예 풍경이 바뀌어 버린 오늘날에도 남산 서쪽 기슭에 서서 보면 이 그림이 보여주는 풍경은 사실 그대로다.

 

그런데도 이동주는 앞서 말한 강세황도 “실경의 소재에 대해서는 오직 한숨만 짓는다”고 썼다. 이것은 심사정이 “실경을 그린다고 하는 경우라도 중국산수의 전통을 따르려 하였다”는 이동주 자신의 견해를 강조하다 보니 강세황의 감탄사를 그렇게 풀어버린 것이다. 나아가 “화선지 바탕의 중국첩책(中國帖冊)으로 그렸다”고 덧붙였는데 심사정이야말로 중국냄새가 나는 화가임을 강조하려는 이동주의 의도가 엿보이는 문장인 셈이다. 물론, 이동주는 <경구팔경> 가운데 “아취(雅趣)가 넘쳐 흐르고 섬세한 선의 흐름이 굽이치며 나가는 묘품(妙品)도 있다”면서 이 작품을 '가작(佳作)'이라고 평가하는 것을 잊지 않았다.

 

그렇다. 그림의 품격이야 어떡하건 정선은 조선풍, 심사정은 중국풍이라고 구별하다 보니 심사정이란 화가는 자주성없이 대국을 추종하는 아류로 보였던 것이다. 하지만 그런 판단은 오늘의 기준을 어제에 들이대는 오류일 뿐이다. 정선, 심사정, 강세황이 활동하던 시대는 중국을 중심으로 삼는 유가 문명권에 편입되어 있었고 따라서 중국 옛 시인, 화가를 따르는 일은 소중화(小中華) 관념을 바탕에깔고 살아가는 지식인들의 상고주의(尙古主義) 태도일 뿐이다. 강세황이 소동파의 <연강첩장도(烟江疊嶂圖)>에 차운하여 읊은 시편 <창랑정(滄浪亭)>도 남산 기슭에서 남쪽 관악산을 보며 읊은 시인데 두 사람이 남산 기슭에 모여서 강세황은 남쪽 관악산을 노래하고 심사정은 북쪽 북한산을 그렸을지도 모르겠다.

 

(75)심사정, 남산에서 북한산을 보다

 

김달진 미술연구소

옆으로는 남산을 끼고 앞으로는 관악산이 보이니     傍對南山煎冠岳  짙은 신록과 연한 분홍 빛이 아름다움을 다투네     濃靑淡赭紛爭姸 작은 섬에 드리운 버들 사립

www.daljin.com

 

 

 

[한국화]촉잔도권-심사정

 

심사정 필 촉잔도권(蜀棧圖卷)​ , 1768년, 58.0×818.0cm,​ 보물 제 1986호, ​

간송미술문화재단 소장

심사정 (玄齋 沈師正 1707~69)​, 마지막 작품​(죽기 1년 전 1768.8)

이백(李白)의 시 「촉도난(蜀道難)」을 주제로 하여 촉(蜀)으로 가는 험난한 여정을 그린

대규모 산수화

심사정 필 촉잔도권(우)& 이인문 필 강산무진도(좌)

심사정의 친척 심래영(沈來永, 1759~1826)의 발문이 별지에 쓰여 있는데, 여기에 <촉잔도권>이 심래영의 부친 심유진(沈有鎭, 1723~1787)과 숙부 심이진(沈以鎭, 1723~1768)의 요청으로 제작되어 집안에 소장하게 되었던 경위가 소상하게 서술되어 있다.

심내영 맏사위 조민영 소유, 후손 조원구 소유, 간송 전형필(1906 ~1962)이 구입

심사정이 평생에 걸쳐 이룩한 자신의 모든 화법을 총망라하여 8m에 이르는 긴 횡권(橫卷)에 완성한 역작으로, 한국 뿐 아니라 동아시아 전통산수의 높은 경지를 보여주는 작품으로 의의가 있다.

기이한 절벽과 험준한 바위가 촉도(蜀道)의 험난한 여정을 시사하는 듯 변화무쌍한 자연의 아름다움을 다양한 색감과 치밀한 구성으로 생동감 있게 표현하였다.

 

우주는 하나의 커다란 웃음이다 : 네이버 블로그

1.남을 보고 웃는다. 2.나를 보고 웃는다. 3.우주를 보고 웃는다. 진실을 말하려거든 반드시 유머를 섞어라. 그렇지 않았다간 죽임을 당할 수도 있다. -빌리 와일더(영화 감독,제작자)

blog.naver.com

 

 

 

미술사를 움직인 100인

005 심사정_ 남종문인화풍을 뿌리내리다

 

1707년~1768년, 조선후기

대표작 <강상야박도〉, 〈파교심매도〉, 〈촉잔도〉

중국의 화풍을 본받아 필법을 연구하여 자신만의 것으로 재탄생시켰다. 담묵과 농묵, 세필, 수묵과 담채 등 다양한 기법을 능숙하게 구사하였다.

자는 이숙(頤叔), 호는 현재(玄齋)이며, 청송인(靑松人)이다. 할아버지인 심익창이 역모에 가담했던 관계로 출세 길이 막혀 일생 그림만을 그리며 살았다. 어려서 정선(鄭敾)에 사사(師事)했으나 스승과는 전혀 다른 화풍을 구사했다.

조선 후기의 대표적인 화가로 3원(園) 3재(齎)가 꼽히는데, 3원이란 단원 김홍도, 혜원 신윤복, 오원 장승업, 3재는 겸재 정선, 관아재 조영석, 현재 심사정을 일컫는다. 18세기에 유행한 화풍은 크게 진경산수화풍과 풍속화, 남종화풍인데, 그중 진경산수화풍은 정선에 의해 확립되었으며, 풍속화는 조영석에 의해 틀이 갖추어졌고, 본래 중국화풍이던 남종문인화풍은 심사정에 의해 토착화되어 조선 화단에 뿌리내렸다.

문인화는 장르적 특성으로 진경산수화나 풍속화보다 독창성이 덜 부각되기 때문인지 오늘날 다소 박한 평가를 받고 있으나 조선 시대에는 그의 명망이 정선 못지 않았다.

그의 작품들은 졸작이나 범작이라 할 만한 것이 거의 없었으니, 빈틈없이 손질하고 성실한 태도로 그림에 임했기 때문이다. 또한 다양한 소재를 다루었는데, 무엇 하나 부족한 것이 없다.

〈딱따구리〉, 〈황취박토도〉, 〈노안도〉 등과 같은 영모, 〈연지쌍압도〉 등과 같은 화조, 〈파초와 잠자리〉 등과 같은 초충도, 〈갈대 탄 달마〉, 〈하마선인도〉 같은 도석인물화(道釋人物畵) 등 수많은 화재를 그렸는데, 그가 가장 노력을 기울인 것은 산수화이다. 대표적인 작품으로 꼽히는 것이 〈강상야박도(江上夜泊圖)〉, 〈파교심매도(灞橋尋梅圖)〉, 〈촉잔도(蜀棧圖)〉 등이다.

심사정 <강상야박도(江上夜泊圖)>, 1747년, 지본담채, 153.5 × 61cm, 국립중앙박물관

화면 전체에 애잔함과 적막함이 물씬 배어나오는데, 이런 정서 작용은 조선의 산수화에서 찾아보기 힘든 것이다. 미불과 예찬의 화풍을 따르고 있으나, 남종화풍을 바탕으로 개성적, 독자적인 작품 세계를 이룩한 걸작으로 평가된다.

심사정,〈파교심매도(灞橋尋梅圖)〉, 비단에 엷은 채색, 1766년, 115×50.5cm, , 국립중앙박물관 소장.

화가가 만년에 들어서 이룩할 수 있는 절정의 기교와 예술성이 한데 담겨 있다. 중국 시인 맹호연의 고사에서 소재를 취한 것으로, 맹호연은 평생 유랑과 은둔 생활을 하며 자연의 한적한 정취를 읊은 인물이다. 아직 눈이 쌓인 이른 봄, 맹호연이 봄소식을 기다리며 매화를 찾아 나귀를 타고 눈 덮인 산으로 길을 떠났다는 고사를 묘사했다.

부분

1768년에 그린 〈촉잔도〉는 심사정의 마지막 작품이다. 촉잔도란 산수화의 화재 중 서촉(西蜀)으로 가는 험난한 풍경을 다룬 것을 말한다. 8미터 18센티미터의 장폭 두루마기에 그린 대작으로, 이 한 폭 속에 심사정의 모든 필치가 담겨 있어 ‘심사정의 회화 이력서’라고 일컬어진다. 연달아 이어지는 기암절벽과 깊은 계곡들이 장대하고 웅장하게 펼쳐진 한편, 우수가 깃든 서정을 은은하게 뿜어낸다.

 

우주는 하나의 커다란 웃음이다 : 네이버 블로그

1.남을 보고 웃는다. 2.나를 보고 웃는다. 3.우주를 보고 웃는다. 진실을 말하려거든 반드시 유머를 섞어라. 그렇지 않았다간 죽임을 당할 수도 있다. -빌리 와일더(영화 감독,제작자)

blog.naver.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