섬이 흐른다, 어디서 무엇이 되어 다시 만나랴 안좌도 / 오마이 뉴스 기사

2013. 8. 16. 21:57여행 이야기

 

 

 

 

여행

광주전라

힐링은 격리와 유폐가 아니다. 참된 힐링은 상처 있는 것들끼리의 위로와 공존이다. 1004개의 섬으로 이뤄진 전남 신안군에는 수려한 자연풍광과 노동하는 사람의 땀과 눈물이 잔파도처럼 함께 넘실대는 많은 섬길이 있다. <오마이뉴스>는 '천사의 섬, 신안군'에 보석처럼 나 있는 '힐링 섬길'을 독자 여러분께 소개해드리고자 한다. 오늘은 그 다섯 번째로 안좌도 힐링 섬길이다. [편집자말]
 
기사 관련 사진
▲ <어디서 무엇이 되어 다시 만나랴> 코튼에 유채, 232*172cm, 1970, 김환기
ⓒ 환기미술관

관련사진보기


푸른 바탕은 바다 빛깔을 닮았다. 그 위에 그려진 흰색 네모 점은 포말 같다. 그리고 흰 네모 점 안에 검푸른 점은 섬(島)이 되지 못한 여(礖)처럼 진하게 슬프다.

<어디서 무엇이 되어 다시 만나랴>는 한국 근현대 미술사에 지워지지 않는 족적을 남긴 김환기 화백의 대표적인 점화(點畵). 김환기는 친분이 두터웠던 시인 김광섭의 <저녁에>라는 시에서 이 작품의 모티브를 얻었다.

"저렇게 많은 별 중에서/별 하나가 나를 내려다본다/이렇게 많은 사람 중에서/그 별 하나를 쳐다본다//밤이 깊을수록/별은 밝음속에 사라지고/나는 어둠 속에 사라진다//이렇게 정다운/너 하나 나 하나는/어디서 무엇이 되어/다시 만나랴."

시인은 밤하늘을 노래했지만 화가는 바다를 그렸다. 김환기가 이 그림을 그린 해는 1970년, 미국 뉴욕에 산 지 7년째 되던 해였다. 하지만 그의 혈소판은 '섬놈' 원형 그대로였다. 섬놈의 유전자를 지니지 않았다면 결코 그릴 수 없는 명작이었다.

김환기의 섬 안좌도, 그의 생가는 쓸쓸했다

김환기는 안좌도에서 태어났다. 안좌도는 그에게 고향 그 이상의 의미다. 김환기의 전기 <김환기, 어디서 무엇이 되어 다시 만나랴>를 쓴 작가 이충렬은 그의 삶과 예술을 1기 일본 유학 시절(1927-1937), 2기 안좌도/서울 시절(1937-1956), 3기 파리 시절(1956-1959), 4기 서울/뉴욕 시절(1959-1974)로 구분할 정도다. 김환기의 안좌도 시기는 "섬의 정서와 조선의 정서를 추상과 함께 그리는 일"을 고민하며 조선의 아름다움을 찾아가는 과정이었다.

기사 관련 사진
 안좌도는 '김환기의 섬'이라 할만하다. 그의 작품을 모사해 부조작품을 만들어 거리를 치장하고 있다.
ⓒ 이주빈

관련사진보기


안좌도 읍동에 있는 김환기의 생가를 찾아간다. 파출소 옆 큰 담장엔 김환기 화백의 작품을 모사한 벽화가 그려져 있다. 섬마을 군데군데엔 그의 작품을 흉내 낸 부조품이 거리 장식물을 대신하고 있다. 가히 '안좌도는 김환기의 섬'이라 할 만하다.

안좌도는 안창도와 기좌도 두 섬이 1917년부터 시작한 간척사업으로 하나로 이어지면서 붙여진 이름이다. 김환기는 원래 기좌도 사람이다. 그의 아버지 김상현은 섬을 두 개나 소유하고 백두산에서 실어온 나무로 집을 지을 정도로 안좌도에서 내로라하는 지주였다.

너른 마당에 ㄱ자형으로 자리 잡은 기와집은 도도한 풍채 그대로다. 하지만 지나치게 정돈된 생가에 김환기의 작품 한 점 전시되지 않고 있다는 것은 아쉬운 일이다. 진품이야 그렇다손 치더라도 복사품 한 점 전시되지 않고 있는 한국이 자랑하는 화백의 생가.

생가엔 작품 대신 김환기의 연보를 알려주는 한글과 영문 액자 두 개가 방문객을 맞이한다. 액자 속 젊은 수화(樹話, 김환기의 호)는 아내이자 평생의 동료였던 김향안(본명은 변동림, 김환기와 결혼하면서 이름을 바꿨다)과 파리의 어느 거리를 꿈에 부풀어 걷고 있다. 기와집 마루에 휑하게 걸린 그의 연보 액자가 더욱 쓸쓸해 보이는 것은 왜일까.

기사 관련 사진
 안좌도 읍동에 있는 김환기 생가. 그의 부친이 백두산 나무를 실어다 지은 집이다.
ⓒ 이주빈

관련사진보기


기사 관련 사진
 김환기 생가엔 그의 작품은 복사품조차 없고 한글과 영문으로 소개된 그 연보 액자만 방문객을 맞이하고 있다.
ⓒ 이주빈

관련사진보기


비구와 비구니의 사랑, 무모해서 모질다

안좌도에서 박지도와 반월도를 잇는 '천사의 다리'를 건넌다. 나무다리 이름은 신안군이 1004개의 섬으로 이뤄진 것을 차용했다. 안좌도에서 박지도까지 547m, 박지도에서 반월도까지 915m 등 천사의 다리 길이는 총 1462m다.

천사의 다리 아래로 바다의 평야인 갯벌이 펼쳐져 있다. 노을 물드는 갯벌은 흡사 벼 익어가는 들처럼 황금빛으로 불탄다. 휴가를 온 자식들이 아버지의 배를 타고 낚시를 즐긴다. 행복한 탄호가 그치질 않는다.

박지도는 섬마을 형국이 박(바가지)을 닮아 바기섬, 배기섬, 박지라고 했다. 박씨가 처음 들어와 살았다 해서 '박지도(朴只島)'라는 설이 있지만 입담 좋은 사람이 지어낸 말에 불과하다. 아무튼 박지도를 드라마틱하게 만드는 것이 있으니 바로 '중 노두' 전설이다.

갯벌 위에 돌로 징검다리를 만들어 섬과 섬을 이동하는 길을 '노두'라 한다. 이웃 섬끼리 오가기 위해 만든 길인 만큼 사연도 많고 전설도 많다. 근데 대개의 노두는 '이루어질 수 없는 사랑'으로 스토리텔링을 하고 있다.

박지도 노두 역시 '이루어질 수 없는 사랑'의 범주를 벗어나지 못하고 있다. 하지만 그 주인공의 신분이 파격적이다. 남녀 승려(비구와 비구니)가 치명적으로 슬픈 사랑의 주인공으로 등장하고 있다는 것이다. 그래서 노두 이름이 '중 노두'다.

기사 관련 사진
 안좌도와 박지도, 반월도를 잇는 나무다리인 '천사의 다리'. 다리 아래로 갯벌이 펼쳐져 있다.
ⓒ 이주빈

관련사진보기


그 옛날, 박지도 암자에는 젊은 스님이, 반월도 암자에는 젊은 비구니가 살고 있었다. 두 사람은 멀리서 아른거리는 서로의 자태만을 보고 사모하게 된다. 그러나 두 사람은 만날 수가 없었다. 밀물 땐 바닷물이 차올라 바다를 건널 수 없고, 썰물 때면 허벅지까지 푹푹 빠지는 갯벌을 도저히 건널 수 없었던 것이다.

두 사람은 망태에 돌을 담아 노두를 만들어가기 시작했다. 그렇게 한 해 두 해가 가고…. 어느덧 중년이 되어버린 두 사람은 마침내 갯벌 한가운데서 만나게 된다. 모질고 모진 사랑, 서러운 눈물이 하염없이 흘렀다.

두 사람이 눈물의 상봉을 하는 동안 바닷물이 갑자기 불어나기 시작했다. 바다 한가운데서 고립돼버린 두 사람은 서로 꼭 부둥켜안은 채 바닷물 속에 잠기고 말았다. 썰물이 되어 언제 그랬냐는 듯 바닷물은 빠져나가고…. 두 사람의 흔적은 보이지 않고 두 사람이 쌓은 돌무더기 길, '중 노두'만 선명하드란다.

사랑은 무모해서 모질다. 평생 단 한 순간의 격렬한 해후를 위해 사랑은 모든 것을 건다. 그것이 생명일지라도, 그로 인해 내가 이 세상에서 완벽하게 소멸할지라도. 무모해서 모질고, 모질어서 아름다운, 그래서 더욱 슬픈 사랑이 섬이 되어 흐르고 있다. 그들은 또 어디서 무엇이 되어 다시 만나랴.

 

 

 

 

 

ⓒ 이주빈

관련사진보기


기사 관련 사진
 천사의 다리에서 바라보는 반월도의 일몰. 갯벌 사이로 바닷물이 강처럼 흐르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