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국에도 없는 독특한 冠飾의 비밀, 태양 향해 비상하는 솔개 상징

2022. 8. 17. 18:10우리 역사 바로알기

문화사상   중국에도 없는 독특한 冠飾의 비밀, 태양 향해 비상하는 솔개 상징
14.11.20 04:10댓글 0
 











折風은 고구려의 독특한 冠飾이다. 그러나 절풍의 유래와 기원을 비롯해 절풍이 뜻하는 語意와 상징성에 대한 문제는 아직 시원하게 해소된 바가 없어 논자마다 구구하다. 고대 冠飾은 고대사회의 사상과 문화의 원형을 탐색할 수 있는 중요한 정보를 제공해주기 때문에 그 상징성에 대한 해석은 매우 중요하다. 冠은 신체의 가장 높은 위치인 머리에 쓰는 모자이므로, 冠飾은 그 시대의 사상과 철학이 투영된 양식으로 고대에는 사용자의 사회적 신분과 祭政的 권위가 압축돼 있다. 그래서 冠은 전통적 상징과 지배자들의 기호를 좇아 끊임없이 변천해왔지만, 항상 고대문화의 대표적 상징물일 수밖에 없었다.

 
이번 호는 고구려 관모의 대표적 형식인 折風에 대해서, 절풍이란 도대체 무슨 뜻이며 그 기원과 상징성은 어떤 내용인가? 라는 문제를 탐색해 고구려 冠帽문화의 원류를 밝혀보려 한다. 절풍의 기원을 고대 새 숭배사상의 원류에서 찾는 것은 상식이다. 그런데 절풍은 삼국, 특히 고구려의 고분벽화에서 많이 발견된 반면, 새 숭배사상이 널리 분포된 동시대의 中原이나 요동의 북방지역에선 볼 수가 없다. 중국에선 절풍을 異風으로 여겨 그것을 착용한 使臣들을 희롱한 예가 史書에 기록돼 있는 걸 볼 때, 중원에선 이미 사라진 관모의 古俗이었음을 알 수 있다. “고구려 사신이 국도에 있을 때 中書郞 王融이 희롱하기를 ‘입은 것이 적합하지 않은 것은 몸의 재앙이란 말이 있는데, 머리 위에 얹혀 있는 것은 무엇인가?’라고 하니, ‘이것은 바로 옛날 고깔[弁]의 잔영이다’라고 대답했다.” (『南齊書』 권58, 「東夷·高麗國傳」) “신라가 일찍이 사신을 보내 조공했다. 李雄이 朝堂에 이르러 신라사와 말을 나누면서, 신라사가 쓰고 있는 관의 유래를 물었다. 신라사가 말하기를, ‘皮弁의 遺像인데 어찌 대국 군자가 피변을 모르는가’라고 응답했다. 이에 李雄이 ‘중국에서 禮가 없어지면 四夷에서 구해야 하겠다’고 말했다. 신라사가 ‘중국에 온 이래로 이 말 외에는 무례함을 보지 못했다’고 응수했다. 憲司가 李雄이 실언한 것을 탄핵하니, 마침내 이웅이 면직됐다.” (『北史』 권74「李雄傳」)

중국에선 사라졌지만 고구려 등에선 有存







이와 같은 史書의 기록은 절풍이 중국에선 이미 사라졌지만 고구려와 신라, 백제에서는 유존된 풍습이란 걸 보여준다. ‘중국에서 禮가 없어지면 四夷에서 구해야 하겠다’ 라는 말은 『論語』 「子罕篇」에 나오는 공자의 말이다. 이는 문화가 발상지에선 이미 소멸됐지만 주변으로 퍼져나간 변두리 문화권에선 그 古形을 구할 수 있다는 말이다. 이는 고전적 문화전파론의 견해라 할 수 있겠는데, 좋은 예로 대륙으로부터 문화를 유입한 일본은 더 이상 빠져나갈 데가 없는 섬의 지정학적 특징 때문에 변형되지 않은 古俗의 원형이 아직 많이 잔존돼 있는 사례와 같다. 특히 일본 황실문화의 祭禮가 그러하다.
 
또한 북미와 남미 인디오들의 鳥羽頭飾도 그러하다. 인류문화 중 婚俗, 葬俗, 食俗 세 가지 풍속은 잘 변하지 않거나, 변하더라도 가장 늦게 천천히 변하는 특징을 갖고 있다. 고구려의 절풍도 고구려 고유의 자생적 풍속이라기보다 새 숭배사상이 투영된 고대의 보편적 동이문화의 하나였을 터이지만, 다른 지역에선 일찍 사라진 반면, 한반도엔 비교적 그 잔영이 오래도록 남은 遺像이라고 생각된다.
그런데 중국 사람들이 이상한 풍습이라고 비웃은 鳥羽揷冠의 절풍 연원을 찾아 그 배경과 상징세계를 해석하는 것은 冠飾의 古俗을 통해 고대사상의 뿌리를 캘 수 있는 단서가 발견되기 때문이다. 고구려 관식이 삼국 관식의 선행사례이므로, 절풍의 상징을 해석하는 것은 삼국시대의 사유세계를 분석할 수 있는 중요한 정보를 얻는 길이 된다. 절풍을 일반적으로 머리 양옆에 새의 깃을 꽂은 고깔모습이라고 설명함으로써, 마치 절풍이 고깔이요, 고깔이 절풍인 것처럼 동일한 관식으로 이해했다. 그런 설명 때문에 절풍과 고깔[弁]을 서로 구분하지 않고 동일한 관모처럼 인식하는 혼란과 모순을 야기했다. 그러나 양자는 엄연히 다르다는 것이 필자의 주장이다.
 






[그림2-1(중)]의 半坡遺址 彩陶人面紋에선 고깔의 원형을 찾아 볼 수 있다면, [그림3]의 운남성 창원 암화의 태양신 巫祝圖에선 절풍의 원시고형을 확인할 수 있을 것이다. 결국 절풍은 巫와 깊이 연계된 세계지만, 새의 깃을 꽂음으로써 飛翔하는 솔개의 이미지를 상징하고 있다는 점이 弁과의 차이점이다. 한반도에서 절풍의 연원으로 생각되는 자료로 제일 먼저 거론될 수 있는 유물은 傳 대전출토 농경문 청동기이다.[그림3-2] 이 靑銅器文의 상징적 특징은 ①농경의 제일조건인 태양숭배사상과(동기의 테두리 전체를 빙 돌아가면서 태양의 광망인 이른바 鋸齒文을 剝地수법으로 시문했음), ②절풍차림으로 대변되는 새 숭배사상, ③裸身인 男根으로 표징되는 생식 심볼 사상 등 중요한 고대 삼대사상을 압축해 놓은 점이다. 태양과 새(솔개)와 남근, 이 세 가지 상징은 서로 밀접하게 연관된 고대사상의 핵심세계라는 점을 앞의 연재에서 이미 살펴본 바 있다.

折風과 고깔[弁]의 차이


고깔을 한자로 弁이라고 한다. 弁은 ‘양손을 서로 합해 손뼉 칠 때의 모양과 같다(如兩手相合抃時也)’ 라고 『爾雅』 「釋名·釋首飾」에선 말했다. 즉 두 손을 모았을 때 위는 뾰족하고 아래는 넓은 모양이 되는 것처럼 두 손바닥을 마주 합한 형상(上銳小 下廣大, 像人兩手相合狀)이 弁의 모양이다. 두 손바닥을 합하면 삼각형 모양의 고깔이 된다. 또 ‘弁’의 ‘厶’는 관모의 삼각형을, ‘廾’은 관모의 끈을 나타낸다는 설도 있으나, 지나친 破字 풀이라고 생각된다. 弁에 鳥를 合文한 ‘鴘’자는 ‘묵이매 鴘’자다. 묵이매는 두 살짜리 매를 말하므로 어떻던 ‘弁’은 매나 솔개 등 새와 관계되는 관식으로 추정된다. 弁은 爵弁(면류관 비슷하나 인끈이 없고 빛깔이 붉은색의 변, 雀弁이라고도 함), 皮弁(鹿皮로 만든 변), 韋弁(꼭두서니 뿌리로 염색한 붉은 다룸가죽으로 만든 변)으로 나눈다. 작변은 귀인들이 쓰고 피변은 거친 베옷 입은 庶人들이 썼으므로 자연적으로 귀천이 구분됐다. 周代에 이르러 冕冠은 높이고 弁冠을 그 다음으로 해서 나눴다.



『三國志』 「魏書·東夷傳·高句麗」條에 “大加와 主簿는 머리에 幘 (책)을 쓰는데 중국의 책과 흡사하지만, 뒤로 늘어뜨리는 부분이 없다. 小加는 절풍을 쓰는데, 그 모양이 고깔과 같다(大加主簿 頭著幘, 如幘而無餘, 其小加著折風 形如弁)”라고 한 기록 때문에 그동안 절풍과 고깔은 동일한 관모인 것으로 보고 두 가지를 명확하게 구분 짓지 않았었다. 『北史』 「열전·동이전·고구려」 조에 “사람들이 모두 절풍을 착용하는데 그 모양이 변과 같다. 士人들은 새 깃을 두 개씩 꽂는데, 귀인의 관을 가로되 蘇骨이라 한다(人皆頭著折風 形如弁 士人加揷二鳥羽 貴者冠曰蘇骨)”라고 했다. ‘절풍의 형태가 변과 같다’했으나, 사실은 절풍과 弁은 다르다고 봐야할 것이다. 즉 꿩의 깃털 같은 鳥羽를 揷加한 자체가 절풍이고, 고깔은 매나 솔개와 같은 맹금류를 정면에서 도안한 쓰개를 두고 말하는 것이라 생각한다.








여기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고깔 형태의 상징성이 무엇이냐 하는 문제다. 나는 그것을 매나 솔개를 정면에서 바라본 모습을 디자인한 형태라고 해석한다. 그 형태가 弁이므로 貴者들의 爵弁을 ‘蘇骨’이라 하는 것은, ‘솔개’의 漢字 音寫가 ‘蘇骨’이기 때문이라고 나는 해석한다. 『周書』 「異域傳」에는 『北史』의 ‘소골’을 ‘골소’로 표기한 것은 ‘소골’을 도치한 誤記라고 생각한다. 근본적으로 고깔을 사용하는 족단은 태양을 신으로 숭배하며 태양을 意符한 솔개나 매를 씨족의 심볼인 족표로 삼는 경향이 많다. 고대인들은 그들이 숭배하는 대상을 族標로 디자인하고 그것을 族徽로 삼아 冠飾을 비롯한 服飾, 巫具, 武具, 馬具 등에 標識함으로써 씨족의 결속과 통치력을 강화했다. 그 중에서 가장 고귀한 神權과 王權의 상징을 솔개로 조형화해 冠飾化한 것이 바로 弁과 折風이라는 게 필자의 주장이다. 그러므로 절풍은 신라 조익형 관식으로 형태상 진화하기 때문에 신라 조익형 관식은 전부 솔개의 飛翼形이라는 결론에 이른다.


[그림4]에서 고깔의 여러 가지 형태를 보자. 그 중에서 부여 능산리 36호분에서 출토된 철제관테[그림4-1]를 보면(『百濟의 冠』, 2013, 국립공주박물관, 124쪽), 고깔 디자인의 원형이 솔개에서 기원된 것임을 분명하게 느낄 수 있다. 『백제의 관』 도록은 지금까지 출토된 12점의 철제관테(부여 능산리 점, 부여 왕흥사지 1점, 부여 염창리 2점, 나주 복암리 4점, 서천 추동리 1점, 청양 장승리 1점)를 수록해 놓았다. 비단이나 여타 직물흔이 붙은 채 출토됐다고 보고된 철제관테는 폭이 작은 것은 12.5cm에서 큰 것은 22.5cm에 이르고, 17~18cm가 가장 많다. 철제관테는 상단이 삼각형처럼 뾰족한 고깔외형을 반듯하게 만들어 허물어지지 않도록 유지시켜주는 역할을 한 유물일 것으로 추정된다. 그래야 솔개의 형상을 뚜렷이 나타낼 수 있기 때문이다. 또한 연천의 고구려 호로고루성에서 발굴(2011년)된 土製 고깔[그림4-4]과 백제 능산리 寺址출토 瓦片인물상의 고깔[그림4-2], 금령총출토 신라 기마인물상의 고깔[그림4-5]과 천마총출토 금관모의 모습[그림4-3]은 ‘兩手相合之狀’이라는 고깔의 형태에 그대로 부합된다. 이들 유물들은 근현대 고깔인 삽도[그림4-6]와 그 모습이 크게 다르지 않음도 주목할 만한 일이다.







위의 조선시대 檀園 金弘道(1745~? )가 그린 「평양관찰사부임 부벽루 연회도」 [그림5]를 보면 놀랍게도 集安에서 출토된 고구려 羽飾形 금동관과 형태가 똑같은 羽飾形 冠을 쓴 武官 2인을 확인할 수 있다. 이 그림으로 유추해본다면, 단원이 고구려 羽飾形冠을 보았을 리는 만무한데 이런 관식의 武冠을 그릴 수 있었던 것은, 그 당시까지만 해도 평양지역에 이런 고구려 관식의 유풍이 잔존돼 왔음을 증명한다 하겠다. 우식형의 테두리는 새의 깃털을 형상하기 위해 금동판을 썰어서 꼬았고, 내부의 촘촘한 불꽃문양 속엔 簡化한 디자인의 솔개가 낱낱이 박혀 있다. 총체적으로 솔개의 이미지를 집중적으로 상징한 금동관이다. “折風의 語源은 晨風(새매, 솔개)다” 고구려 멸망 후 30년 뒤인 701년 출생한 李白은 「樂府 高句麗」에서 다음과 같이 고구려 民風을 노래했다.

金花折風帽 금화장식 절풍모 쓰고
白舃小遲回 흰 신 신고 천천히 돌아가네
翩翩舞廣袖 너울너울 춤추는 넓은 소매
似鳥海東來 새처럼 해동에서 날아오네
(李白 集 校註 권6)

절풍을 쓰고 해동청 보라매처럼 춤추는 무희의 모습을 묘사한 멋진 시다. 절풍이 詩語로 등장한 유일한 생동미 넘치는 시다. 첫 구절은 금화로 장식한 모자 즉 고깔[弁]에 鳥羽揷加의 절풍 차림과 둘째 구절 흰 가죽신 백석(白舃)의 시어는 머리와 발의 대비란 점에서 과연 천재다운 면모다. 이백이 이런 시를 남길 정도로 절풍은 당시의 고구려 풍속으로선 흔히 있는 일이었으나, 대시인의 눈엔 중국에선 볼 수 없는 해동의 독특한 시적 매력 넘치는 소재로 눈을 끌었을 것이다.

이백의 시에도 등장하는 ‘절풍’이란 도대체 무슨 의미인가. 여기에 대해선 일찍이 조선시대부터 석학들의 관심의 대상이 돼 왔다. 李瀷, 李晬光, 鄭東愈, 李圭景 등이 그들의 저서에서 절풍의 의미와 형태에 대한 각자의 제설을 제시했으나, 고구려 고분벽화 등 절풍에 대한 실제 자료를 접하지 못하고 고문헌 자료만으로 해석하려다보니 한계가 있었다. 이들의 연구를 지금 소개하지 못하는 것이 아쉽지만 다른 기회가 있을 것이다. 그 뒤로 현대에 이르러 李如星, 石宙善의 연구가 있었고, 논문으로 李龍範 교수의 「高句麗人의 鳥羽揷冠에 대하여」(『韓滿交流史硏究』, 동화출판공사, 1989)와 金鎭玖 교수의 「折風의 硏究」(<복식문화연구> 제3권 제1호, 1995)가 깊이 있는 연구였다.
이러한 선행연구 내용과는 다른 방향에서 필자가 진행한 연구는 例의 四徵에 의한 방법이었다. 먼저 절풍의 어원에 대해서 ‘折’이 ‘東’이란 자료를 확보했다.『山海經』 「大荒東經」에 ‘日月所出 名曰 折丹 - 東方曰折, 來風曰俊 - 處東極以出入風’ 이란 문징을 보았다. 그 외에 『禮記』 「祭法」에서, 그리고 胡厚善과 丁山의 논문에서 ‘折’이 ‘東’이란 해석 자료를 더 확보했지만 지면상 여기에 일일이 다 소개하지 못한다. ‘折’이 ‘東’의 의미라면 ‘折風’은 ‘東風’이란 의미가 된다.
그런데 東風을 다른 명칭으로는 ‘晨風’이라 하는데, ‘晨風’은 『詩經』 「秦風」과 「晨風」에서, 『爾雅』 「釋鳥」, 『廣韻』등에서 보이는데, 해석하기를 솔개(鷹類, 鷙類, 鴟類)로 풀이하고 있다. 그러므로 ‘절풍’의 어원은 ‘折風 → 東風 → 晨風 → 솔개(鷹)’로 해석된다. 고구려 민족은 솔개처럼 강인하고 날쌔며 용맹하기도 했지만, 태양숭배사상과 새 숭배사상을 생활속에 실천했으며, 그것을 그들의 고유사상으로 발전시켜 나간 우리들의 자랑스런 조상이다. 절풍의 진화와 변화발전은 다른 항목과 연계되므로 다음으로 미루고 이 글은 여기서 마무리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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