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려 팔관회의 종교적 성격과 의미 / 이원태(덕성여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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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려 팔관회의 종교적 성격과 의미 이원태(덕성여대)|도교 선도(仙道) 논문

낙민 | 조회 70 |추천 0 |2016.02.13. 00:10 http://cafe.daum.net/jangdalsoo/dC5H/4




고려 팔관회의 종교적 성격과 의미

 


이 원 태*

 


1. 들어가는 말 

2. 팔관회는 불교 행사인가? 

3. 팔관회의 儀禮
4. 主祭者로서의 王과 神性
5. 祭天儀式에서의 山神신앙
6. 祭祀儀式과 百戱歌舞
7. 百戱歌舞의 의의
8. 맺는 말

 

【국문요약】
주제어 : 고려팔관회, 제천의식, 산신신앙, 百戱歌舞


   겉으로 나타난 고려 팔관회의 의례만을 들여다보면, 왕권의 과시 내지 강화의 목적을 달성하기 위한 의례로만 보인다. 그런데 이러한 팔관회의 종교적 성격에 대해 민족고유의 신앙을 바탕으로 하는 제천의식으로 보거나 불교 행사로 보는 두 견해가 주장되고 있다. 본 연구는 불교의 비본질적 요소를 가지고 고려 팔관회를 이해하는 것으로부터 자유롭고자 한다. 고려 팔관회의 종교적 성격에서 불교의 비본질적인 요소를 걷어냈다고 하여 일련의 주장처럼 고려 팔관회가 곧바로 전통적인 祭天행사일 수는 없다. 본 연구는 고려 팔관회가 과연 제천행사였는가? 라는 질문을 다시 하고, 그에 실질적인 답을 하고자 한다.



* 덕성여자대학교 강사


10 道敎文化硏究 제30집

 

   고대 神敎의 제사는 迎神 – 娛神 – 神意 청취의 세단계로 진행되는 것이 일반적이다. 본 연구는 이 세단계의 과정을 염두에 두고 진행되었다. 이를 위해 왕이 天神의 대리자임을 확인하고, 主祭者로서 지녀야 할 王의 神性을 담보하였다. 또 제사의 대상과 祭場이 갖춰졌음을 확인했다. 이를 통해 고려 팔관회가 祭天儀式으로서의 의의를 지니고 있었음을 확인할 수 있었다. 팔관회는 고려의 주체성과 자주성을 대표하는 국가행사이며 그 팔관회를 팔관회답게 하는 것은 바로 百戱歌舞에 있다. 고려의 팔관회는 한민족의 역사와 전통을 계승하는 固有의 祭天儀式인 것이며, 그 정통성의 주요근거는 가무에 있다고 보았다. 가무를 통한 팔관회 의식의 극치는 저 하늘로부터 만물에 이르기까지 和氣가 두루 통하여, 저마다 喜悅의 충만함에 이르는데 있다. 고려 팔관회는 왕조의 시작과 함께 쇠퇴를 맞이할 때까지 유지하였던 국가행사였다. 불교가 신앙되고 중국도교가 행해지며 유학의 사상이 자리 잡던 시대에 고려 팔관회는 고려의 중심을 지탱하던 것이었다. 그 중심에 神敎가 있다.

 

1. 들어가는 말
   고려는 한민족의 역사 안에서 실질적인 최초의 통일국가였다. 고려 팔관회는 왕조의 시작과 함께 쇠퇴를 맞이할 때까지 유지되었을 정도로1) 나라를 대표하는 국가행사였다. 그러한 까닭에 지금까지 고려 팔관회에 대한 관심과 연구 성과는 적지 않다. 연구자들 가운데 역시 대표적인 연구쟁점은 고려 팔관회의 종교적 성격에 관한 것이다. 즉 고려 팔관회를 민족 고유의 신앙의 측면에서 보려는 것과 불교 행사로 보는 두 견해가 가장 대표적 주장이다.

 

1) 고려의 팔관회는 한때 정지된 적도 있긴 하지만 강화 천도라는 어려운 시기에도 열렸었고, 마지막 왕인 공양왕 시기까지도 열렸다.


고려 팔관회의 종교적 성격과 의미/이원태 11

 

   팔관회가 민족고유의 신앙과 불교가 習合된 성격을 갖는다고 보는 점에서는 양자가 일치를 보는 것 같다. 그래서 각자의 입장을 견지하는 한에서, 다만 어느 측면을 강조해 볼 것인가 하는 정도로 타협을 할 수도 있을지 모르겠다. 사실 고려 팔관회에 대한 관심은 일제강점기의 신채호, 최남선 등과 같은 민족주의자들에 의해 촉발되었다. 그러나 민족주의자들의 주장이 충분한 사료 검토와 근거가 부족했던 것도 사실이다. 이에 반성적인 고찰과 연구가 불교연구자 내부에서 있었다.

다만 한국불교를 논하면서 ‘한국적인 것’을 볼 것인지, ‘불교적인 것’을 볼 것인지에 대한 반성은 그다지 없어 보인다.


   본 연구는 ‘한국적인 것’에 초점 맞추려 한다. 그래서 불교의 비본질적인 요소를 가지고 고려 팔관회를 이해하는 것으로부터 자유롭고자 한다. 고려 팔관회의 종교적 성격에서 불교의 비본질적인 요소를 걷어냈다고 하여 일련의 주장처럼 고려 팔관회가 곧바로 전통적인 祭天행사일 수는 없다. 본 연구는 고려 팔관회가 과연 제천행사였는가라는 질문을 다시 하고, 그에 실질적인 답을 하고자 한다.
고려 팔관회의 의식을 대표하는 내용은 크게 고려사 ‘仲冬八關會儀’2) 기록된 儀禮와 歌舞百戱, 그리고 王이 法王寺 행차하는 일의 세 부분으로 구성된다. 팔관회를 법왕사 행차라는 말에서 보면 대단히 불교적이지만, 가무백희는 너무나도 비불교적이다. 이를 習合으로만 이해하기에는 그 이중성과 모순성을 충분히 설명할 수 없다.
겉으로 나타난 팔관회의 의례만을 들여다보면, 왕권의 과시 내지 강화의 목적을 달성하기 위한 의례로만 보인다. 그것이 과연 제천행사였다면 누가 어떻게 무엇을 대상으로 행한 儀式인지 분명하지 않다. 다시 말해서 이른바 ‘天’의 개념 자체가 모호하다. 또한 그 의례와 제천의식과의 관련성도 분명히 해야 할 필요가 있다.

 

2) 高麗史 69卷 志23 禮11 嘉禮雜儀 仲冬八關會儀.(이하 ‘ 高麗史 仲冬八關會儀’로 표기한다)


12 道敎文化硏究 제30집

 

   특히 본 연구는 가무백희를 주목한다. 그것이 팔관회 의식을 진행하는 동안에 실행되었던 것은 물론, 의례가 끝나고 왕이 법왕사로 행차했다가 궁으로 다시 돌아와서도 관람하고 즐겼을 뿐 아니라, 都城 전체를 들썩거리게 하는 일이었기 때문이다.
보통 가무가 전통적인 제사방법이었음을 긍정한다. 물론 전해지는 기록이 부족한 까닭이기도 하겠지만, 그 어떤 추가설명도 없다. 본 연구는 그 최소한의 의의라도 밝히고자 한다.

 

2. 팔관회는 불교 행사인가?
   고려 팔관회를 불교적이라고 볼만한 근거는 사실 ‘八關’이라는 명칭 이외에는 없다. 팔관회는 印度의 八戒齋로부터 기원한다고 한다. 그 내용은 살생하지 않음(不殺生), 도둑질하지 않음(不偸盜), 음란하지 않음(不邪婬), 거짓말하지 않음(不妄言), 술 마시지 않음(不飮酒) 노래하고 춤추며 풍악놀이를 하지 않으며 그런 것을 가서 보고 듣지도 않음(不歌舞娼妓及不往觀聽) 등이다. 아울러 중국의 팔관회에서도 그 유래를 찾을 수 있는데, 여기서는 八關을 八禁으로 풀이한다. 결국 팔관은 여덟 가지의 惡을 닫아 막으라는 불교 계율이다.

   그러나 ‘팔관’이라는 명칭에 대해서도 전혀 다른 해석이 있음을 우리는 안다. 즉 민족주의자들의 언어분석은 다르다.3) 분명한 것은 팔관의 역사적 의미가 분명 불교적이라는 것을 부인하기는 어렵다. 그러면 고려 이전 역사에서 팔관회는 어떠했는가?
팔관회에 관한 우리나라 역사 기록은 新羅 시기의 惠亮의 기사가 처음이다.

 


3) 주로 사상과 관련된 해석으로, 여기서 자세히 밝힐 필요는 없다. 민족토착신앙의 입장에서 八關이라는 명칭을 차용했느냐는 문제는 또 하나의 연구를 필요로 한다.


고려 팔관회의 종교적 성격과 의미/이원태 13

 

(眞興王 12) 혜량을 僧統으로 받아들여, 처음 百座講會와 八關之法을 행하였다.4)
겨울 10월 20일, 전사한 사졸을 위해 외사에서 팔관 연회를 베풀었다. 7일 만에 파하였다.5)

   혜량이 고구려에서 귀화한 승려였다는 점에서 고구려에서도 팔관회가 실행되었으리라 추측할 수는 있겠다. 인도의 팔계재가 중국을 거쳐 고구려, 신라로 전해졌을 것이다. 그리고 인용된 기록만 가지고 보면 신라의 팔관회는 전사자를 위로하는 위령제의 성격을 띠고 있는 불교행사로 보이기도 하다.
그런데 불교행사로서의 팔관회는 한 달에 6일 동안 八戒를 지키는 것을 그 내용으로 한다. 신라의 팔관회가 7일 만에 파해졌다는 것을 보면 신라의 팔관회는 불교적 형식이 지켜졌던 것 같기도 하다. 그러나 고려 팔관회는 15일을 전후하여 준비하는 날, 그리고 小會日과 大會日 3일 동안 개최되었다. 한 달에 6일 동안 팔계를 지키는 것과 그 시기와 기간의 측면에서 다르고, 그 내용도 전혀 다르다. 고려 팔관회는 전혀 금욕적인 행사가 아니었다.

   불교를 무엇이라 정의할 것인가라는 문제에 혹 논란이 생길 수도 있겠지만, 적어도 원시불교를 기준으로 삼을 때, 불교의 핵심은 역시 無我論와 因緣說에 기초한 解脫에 있을 것이다. 팔계를 지킴은 그 목적이 해탈에있다. 그러나 앞으로 살펴볼 고려의 팔관 의례 어디에도 苦痛로부터 벗어나 해탈을 지향하는 모습은 전혀 보이지 않는다. 게다가 八戒 가운데에는 음주가무를 금지하는 내용이 있다. 반면 고려 팔관회에서는 음주가무가 행해지고 있다. 그러므로 고려 팔관회는 전혀 불교적이지 않다.
한편 신라의 팔관회 성격을 알아볼 수 있는 다음과 같은 글도 보인다.

 

4) 王以爲僧統 始置百座講會及八關之法.( 삼국사기 권44, 列傳4, 居柒夫)
5) 冬十月二十日, 爲戰死士卒, 設八關筵會於外寺, 七日罷.( 삼국사기 新羅本紀 4, 진흥왕 33년)


14 道敎文化硏究 제30집

 

(慈藏法師가) 중국 太和池 가를 지나는데 갑자기 神人이 나와서 묻는다. “어찌하여 이곳에 오셨소?” …… 자장이 대답한다. “우리나라는 북으로 말갈에 연하고 남으로는 왜국에 이어졌으며, 고구려와 백제 두 나라가 번갈아 국경을 범하여, 이웃 나라의 횡포가 자주 있사오니 이것이 백성들의 걱정입니다.” 신인이 말한다. 절 안에 구층탑을 세우시오. 그러면 이웃 나라들은 항복할 것이며, 九韓이 와서 조공하여 王業이 길이 편안할 것이오. 탑을 세운 뒤에는 팔관회를 열고 죄인을 용서하면, 외적이 해치지 못할 것이오.6)

   이글은 호국적인 성격을 지니고 있었던 황룡사 9층탑의 연기설화에 해당하는 글로서, 그 가운데 일부이다. 팔관회의 기능 가운데에 ‘護國’이라는 기능이 있음을 인용문은 분명히 보여준다. 그러므로 신라의 팔관회는 단지 위령제적 성격만을 띤 佛事가 아니라 호국적 성격을 지니고 있기도 하다.
그런데 9층탑이 완공된 후에 팔관회가 개최되었는지는 기록에서 확인할 수 없기도 하지만, 불교의 塔과 팔관회가 어떤 관련성이 있는지 분명하지도 않다. 塔은 대단히 불교적이지만, 죄인을 용서하는 일은 국가적인 일이다. 다만 황룡사탑 건립이 부처를 신앙하기 위한 목적이 아니라 호국을 위한 목적 때문이라면 팔관회의 기능과는 합한다.

   한편 고려의 팔관회에 불교적 성격을 부여할 수 있는 기회는 고려사 ‘仲冬八關會儀’條에 기록된 儀禮 뒤에, 法王寺 혹은 興國寺, 長慶寺 등의 사찰로 왕이 행차하는 일에서 찾을 수 있다. 나중에 살펴볼 ‘중동팔관회의’의 절차에는 들어있지는 않지만, 팔관회를 열고 법왕사에 행차한 기록은 고려사 에 자주 보인다. 기록에만 의존하여 보면, 법왕사에 행차한 기록은 成宗 즉위년(981년)부터 시작되었다. 그런데 성종은 팔관회의 주요 행사 가운데 하나인 가무백희를 부정하고 폐지하여 팔관회 행사를 축소,

변경하였으며, 마침내는 팔관회를 폐지하였던 임금이다. 20여년 뒤에 다시 팔관회가 부활한 뒤에야 법왕사 행차가 상례적인 일이 되었던 것이다.


6) 經由中國大和池邊, 忽有神人出問. 胡爲至此? …… 藏曰, 我國北連靺鞨, 南接倭人, 麗濟二國, 迭犯封陲, 隣寇縱橫, 是爲民梗. 神人云, 成九層塔於寺中. 隣國降伏, 九韓來貢, 王祚永安矣. 建塔之後, 設八關會, 赦罪人, 則外賊不能爲害.( 三國遺事 卷第3, 塔像 第4, 「皇龍寺九層塔」)


고려 팔관회의 종교적 성격과 의미/이원태 15

 

따라서 그 이전까지는 팔관회 행사와 법왕사 행차는 별개의 행사였다. 다만 성종 이후의 법왕사 행차가 팔관회 행사와 관련된 공식적 의례로 여겨지는 것을 부정하기는 힘들다. 그러면 법왕사 행차를 어떻게 이해할 수 있을까? 법왕사에서 어떤 절차가 이루어졌는지는 역사기록이 남아있지를 않아서 분명하지는 않지만, 李奎報「法王寺八關說經文」에 다음과 같은 글이 보인다.
   돌아보건대 종과 북 등의 모든 악기를 늘어놓은 것은 나만을 즐기려는 것이 아니라, 사람과 하늘이 함께 기뻐하여 그로 인해 태평함을 열고자 함입니다. 이에 절에 나가서 엄숙히 불사를 행하여, 취봉의 開士들을 청하고, 용궁의 신령스러운 글을 연설하옵니다. 엎드려 원하옵건대, 부처님 신력의 加持를 입어서 온 백성들의 마음이 편안하여지고, 온나라 크게 형통하여서 먼 곳까지 다 품어주고, 만세토록 누릴 경사스러운 기반을 보존하여 자손 대대로 전함이 끝이 없게 하소서.7)

   이 글은 고려시기 팔관회를 열고, 법왕사에 가서 부처에게 국가의 안녕을 바라는 내용을 담고 있다. 팔관회가 불교행사로서 전래되었다는 점에서 또 불교를 신앙하는 시기에 사찰을 방문하는 일은 이상한 일이 아니다. 그런데 왕의 법왕사 행차는 깨달음을 목적한 것이 아니라 국가의 안녕과 번영을 기원하기 위함이다.
불교행사로서의 팔관회 역사는 印度로까지 거슬러 올라간다. 인도에서의 八戒齋는 인도 전래의 액막이 풍속으로부터 기인하였다고 한다.8) 그렇다면 이 역시 순수한 불교행사라기보다는 이미 인도 고유의 신앙과 습합된 성격의 것임을 알 수 있다.

 


7) 顧鐘鼓之畢陳, 非以自樂, 欲人天之同悅, 因啓大平. 玆卽香城, 寔嚴梵事, 邀鷲峯之開士, 演龍柱之靈文. 伏願承佛力之加持, 亘民心而康豫, 致庶邦之丕享, 無遠不懷, 保萬世之慶基, 垂裕罔極.( 東文選 卷114, 道塲文, 「法王寺八關說經文」)

8) 고려의 국가불교의례와 문화 – 연등ㆍ팔관회와 제석도량을 중심으로 (안지원, 서울대학교출판부, 2006) 123쪽.


16 道敎文化硏究 제30집

 

다면 이 역시 순수한 불교행사라기보다는 이미 인도 고유의 신앙과 습합
된 성격의 것임을 알 수 있다.
한국불교를 말할 때 호국불교로 그 특징을 삼는 것이 일반적이다.9) 그러
나 이는 불교가 호국적임을 뜻함이 아니다. 호국적인 것은 한국적인 것을
설명함이지, 그것이 불교적임을 말하는 것이 아니다. 불교의 호국성이 불
교 경전 어디에도 나타나지 않음을 불교연구자들도 인정하고 있다. 그렇다
면 신라의 팔관회나 고려의 팔관회에 나타나는 호국적 의의를 가지고 고려
팔관회를 오로지 불교적 성격의 행사로 보려는 것은 최소한 ‘한국적인 것’
에 대한 논의가 부족한 상황에서 그다지 바람직한 평가가 아니다.
우리는 睿宗 원년에 팔관회를 열고, 왕이 법왕사와 神衆院에 행차하였
다가 돌아와서 궁궐 마당에서 百神에게 배례하였다는 기록10)을 주목할
필요가 있다. 삼국유사 를 지은 僧 一然은 건국시조 환인을 제석으로 본
다.11) 제석은 불교용어이다. 그러나 제석천에 대한 제사 내지 많은 무당에
걸려있는 제석의 그림은 전혀 불교적이지 않다. 마찬가지로 팔관회 행사
에서의 부처는 불교라는 종교의 신앙대상으로서 그 존재 이유가 있다기
보다는 百神 가운데 有力者로서의 의미가 더 크다고 보는 것이 맞지 않을
까?

 

3. 팔관회의 儀禮
고려 팔관의례는 매년 10월에 서경에서, 그리고 11월에 개경에서 15일

 

9) 연구에 따르면 호국불교로서 한국불교를 이해하는 것은 일제강점기의 일본학자
들에 의해 왜곡된 것이라는 평가도 있다. 따라서 호국성을 가지고 불교를 말하 는 것은 논의가 필요하다.(김종명, 한국중세의 불교의례: 사상적 배경과 역사적
의미 , 문학과지성사, 2001. 277-286쪽 참조)
10) 辛丑設八關會, 幸法王寺神衆院, 還拜百神于闕庭.( 高麗史 12卷 世家12 睿宗)
11) 古記云: 昔有桓因(謂帝釋也).( 三國遺事 卷1 紀異1 古朝鮮)
고려 팔관회의 종교적 성격과 의미/이원태 17

 


을 전후하여 3일간 열렸다. 11월 팔관회의 의식은 정종 시기에 정형화된
틀을 갖추어, 고려사 ‘仲冬八關會儀’條에 정리, 기록되어 있다. 먼저 그
대략을 살펴본다.
팔관회의 의식은 小會日과 大會日로 나뉘어 이틀간 열렸다. 의식은 소
회일 하루 전부터 각 부서별로 맡은 바 사전 준비를 한다.12) 무엇보다도
어떠한 실수도 용납 없는 엄격한 절차 진행을 위해 예행연습을 할 정도였
다.
소회일 행사는 고려사 에 크게 두 가지로 구분되어 설명되어 있다. 즉
임금의 행차가 궁전을 떠남(鑾駕出宮)과 왕이 전상에 앉아 축하를 받고
뭇 신하들은 헌수함(坐殿受賀, 群臣獻壽)이란 작은 제목 아래 기록되어 있
다. 대회일의 의식 절차는 고려사 에 ‘전상에 앉음(坐殿)’이란 작은 제목
아래 설명되어 있다.

① 임금의 행차가 궁전을 떠남(鑾駕出宮)
이른 새벽 禮司가 첫 번째 신호(初嚴)를 하면, 의장대 등이 구정에 나와
정렬한다. 두 번째 신호에 문무백관들이 정장을 하고 대관전 뜰에 도열한
다. 임금이 선인전으로 나올 때 禁衛에서 산이 외친다(山呼)13)고 아뢰고,
신하들이 차례로 축하를 드린다(朝賀). 임금이 대관전에 나와 자리에 오르
게 되면, 일련의 의례를 거친다. 예사의 세 번째 신호에, 임금을 태운 수레
가 의봉문에 이르게 되면, 추밀관들은 왕을 선조(왕건)의 초상화 앞으로
인도하고(樞密引王詣祖眞前), 왕은 북쪽을 향해 두 번 절하고 잔을 드리고

 

12) 팔관회를 위해 八關寶 혹은 八關司라는 기관을 두고 있었다. 또한 팔관회 의식
절차를 담당한 이는 도교의 도사도 아니었고, 사찰의 승려도 아니었다. 충렬왕 시기 羅裕가 의례를 잘 안다고 하여 팔관회 의식을 맡아보게 하였다는 기록( 高
麗史 권104 列傳17 羅裕) 등과 같이, 관리들이 팔관회 의식 절차를 담당하였다.
13) 山呼: 중국 한나라 무제가 嵩山에 제사 지내려 오를 때, 숭산이 세 번 만세를 불
렀다.( 前漢書 , 「武帝紀第六」: 親登嵩高, 禦史乘屬, 在廟旁吏卒咸聞呼萬歲者三.)고
한다. 보통 황제를 찬양하는 의식으로 만세를 부른다는 뜻과 같으나, 여기서는 글자 그대로 번역했다.
18 道敎文化硏究 제30집

 


다시 재배한 뒤에(北向再拜酌獻) 휴게실로 물러나면, 백관들이 각자의 정
해진 자리에 위치한다.
② 왕이 전상에 앉아 축하를 받고, 뭇 신하들은 헌수함(坐殿受賀, 群
臣獻壽)
잠시 쉰 뒤에 임금이 자리에 오르면, 舍人은 ‘태자 이하 백관들은 재배
하고 춤추며(再拜舞蹈) 다시 두 번 절하고, 태자는 성군께서 萬福을 누리
기를 기원하시오’라고 외친다. 이에 따라 태자를 비롯한 신하들은 차례로
팔관회를 경축하며 임금의 만세를 기원하는 의식을 행한다.
다음은 태자가 임금에게 술을 올리고 또 음식, 그리고 다식을 드리는
의식을 거행한다. 이러한 일련의 절차 마디마디마다 음악이 연주되고, 태
자 이하 백관들은 재배하고 춤추며 다시 두 번 절한다. 왕은 또 차와 술,
과실 등을 백관들과 하급관리에게까지 하사한다. 절차에 따라 술과 음식
을 먹는다.
③ 대회일의 의식 절차 : 전상에 앉음(坐殿)
왕이 처음 선인전과 대관전에서 문안을 받고, 의봉루에서 향을 피우고
잔을 드린다. 문무백관이 자리를 잡고, 왕이 자리에 앉은 뒤에 의식을 거
행하는 절차는 소회일의 그것과 거의 같다. 대회일의 절차는 전체적으로
宴會적 성격이 짙다.
특기할 사항은 행사에 참여한 송나라 상인의 우두머리, 蕃子와 耽羅사
람도 예물을 바치고 임금의 만복을 빌며, 만세를 부르고 재배한다는 점이
다. 다음으로 임금에게 꽃과 술을 바치고, 또 문무백관들이 꽃과 술을 받
는 절차가 이어진다. 마침내 왕이 궁전에서 내려와 수레를 타고 돌아가면,
신하들도 읍하고 물러가면서 의례는 끝난다.
고려 팔관회의 종교적 성격과 의미/이원태 19
이상의 겉으로 드러난 절차에서만 보면, 팔관회 행사가 왕과 왕실의 복
을 기원하는 내용을 담고 있으며, 이는 왕의 권위를 드러내어 왕권강화라
는 정치적 목적을 달성하기 위한 절차로만 보인다. 그러나 태조는 ‘訓要十
條’에서 팔관회의 본질적 성격이 “내가 지극히 원하는 바 … 팔관은 천령
ㆍ오악ㆍ명산ㆍ대천ㆍ용신을 섬기는 것”14)임을 분명히 하고 있다. 이러한
본질을 이 의례가 보이는 절차에서 어떻게 이해할 수 있을까?

 

4. 主祭者로서의 王과 神性
팔관회 의례에서 뚜렷이 드러나는 특징은 왕을 중심으로 진행되는 절
차였으며, 그 목적은 임금의 만복을 기원하는데 있다. 이는 정치적으로 보
면 엄격한 절차에 따라 百官의 축하를 받는 형식을 통하여 왕권을 강화하
려는 목적으로 실행된 국가행사였다고 보는 것이 가장 설득력 있다. 하지
만 필자는 이러한 정치적 목적 이외에 종교적 목적도 아울러 있다고 본
다. 즉 태조 왕건이 지극히 원했던 팔관회는 왕권이 하늘로부터 온 것임
을 闡明하는 의식이었으며, 왕은 神性을 가짐으로써 비로소 팔관회를 통
하여 하늘에 제사를 지낼 수 있는 지위를 갖추게 되는 의의가 있다고 보
는 것이다. 이 점을 밝히기 위해 먼저 태봉의 弓裔가 개최했던 팔관회와
관련된 기사부터 살펴본다.
태조 원년(918) 11월에 유사가 말하기를, “이전의 임금은 매년 11월에
팔관회를 크게 열고 복을 빌었습니다. (전하께서도) 그 제도를 따르십시
오”라 하니, 왕이 그의 말을 좇았다.15)

 

14) 朕所至願, … 八關所以事天靈五嶽名山大川龍神也.( 高麗史 2卷 世家2 太祖2)
15) 太祖元年十一月有司言: 前主每歲仲冬大設八關會以祈福. 乞遵其制. 王從之. ( 高麗
史 仲冬八關會儀)
20 道敎文化硏究 제30집

 

이 글에 보이는 이전의 임금은 후고구려를 세운 태봉의 궁예를 가리킨
다. 왕건의 팔관회 설치는 궁예의 팔관회 제도를 계승하고 있으며, 그 목
적은 죽은 자를 위한 위령제도 아니고 해탈을 목적으로 하고 있지도 않으
며, 복을 빌기 위함이었음을 우선 지적한다.
태봉의 궁예가 왕을 자칭하고 후고구려를 세운 것은 901년이었다. 그가
국호를 고려라 함은 고구려 계승을 자임함으로써 고구려 지역의 주민들
이 지니고 있을 토착의식에 기대어 공동체 결속이라는 효과를 가져 올 목
적이었을 것이다. 그렇다면 계속 「동맹제」를 복원, 유지하였어도 되었을
터인데, 이미 國號를 정하기도 전인 899년 11월에 처음 팔관회를 개최한
다.16) 왜 팔관회를 개최하였을까? 궁예 자신은 彌勒佛임을 자처하여 스스
로를 신격화하고자 했다. 팔관회를 통하여 왕권의 神性을 담보하고자 함
이 아니었을까? 이러한 정황을 고려 초기 상황에서 살펴보자.
왕건이 국호를 고려라 하여 고구려의 계승자임을 자처하였지만, 아직
고려왕권 자체는 지방 호족들의 지원이 필요할 만큼 확고한 세력을 형성
하지 못하였다.17) 그러므로 그들 세력을 흡수하여 고려의 기반을 튼튼히
하고 건국의 정통성을 확인할 필요가 있었다.
국가 혹은 왕조에는 모두 나름대로의 始祖가 있다. 태조 왕건이 갖는
국왕으로서의 신성성은 高麗國祖神話인 虎景說話로부터 作帝建설화까지
로 장치된다.18) 이는 건국영웅들의 神異한 출생과 행적을 이야기하고, 그

 

16) 冬十一月, 始作八關會( 삼국사기 권50, 列傳10, 弓裔). 신라에서는 팔관회가 10월
에 실행되었다. 궁예가 적대적이었던 신라의 의례를 따랐을 것이라고는 생각할 수 없다. 11월에 팔관회를 개최한 것은 오히려 고구려의 10월 동맹을 계승한 것 으로 보인다. 신라의 팔관회를 전해준 혜량이 고구려 사람이었다는 점에서 고구 려에도 팔관회가 이미 행해지고 있었으리라 짐작할 수 있다면, 옛 고구려 지역 에 남아있는 동맹의 유풍이 팔관회를 통하여 전해오고 있었으리라 짐작된다.
17) 이러한 까닭에 원래 국왕은 신성성을 보장받는 초월적인 존재임에도, 중국의 천 명사상 같은 철학적 기반을 갖고 있지 못하였기에, 조선조와 달리 고려의 왕권 은 초월적 지위를 보장받지 못했다는 평가도 있다.( 5백년 고려사 , 박종기, 푸
른역사. 1999. 63쪽 참조) 그러나 필자는 이에 동의하지 않는다.
18) 高麗史 「高麗世系」와 金寬毅의 編年通錄 참조.
고려 팔관회의 종교적 성격과 의미/이원태 21

 

것을 사실로 믿고 섬기게 함으로써 고려 왕실의 권위를 세우고, 왕권을
신성화시키려는 목적을 지니고 있다.19) 이러한 신성성은 왕건이 고려를
세우고 '天授'라는 자주적인 연호를 사용함으로써 확보된다. 즉 왕권은 하
늘이 내려준 것이라 하여 신성을 부여하였으니, 왕건은 그 시호가 神聖大
이기도 하였다 그러면 이러한 신성성이 팔관회와는 어떤 연관을 갖는 . 王
것일까? 다음과 같은 글이 고려사 에 보인다.
충렬왕 원년(1236) 11월 경진에 본전에 행차하여 팔관회를 열었는데,
金鼇山 액자에 씌어있는 ‘성수만년’이란 네 글자를 ‘경력천추’로 고치고,
‘한 사람이 경사스러우면 팔방의 표문이 殿庭에 이르고 천하가 태평하다’
는 등의 문자를 다 고치고, ‘만세’라고 부르던 것을 ‘천세’로 부르게 하
고, 행차 길에 황토 펴는 것을 금했다.20)
‘聖壽萬年’, ‘八表來庭’, ‘天下太平’, ‘呼萬歲’, ‘黃土’ 등은 중국의 황제만
이 사용할 수 있는 용어들이다. 이 글은 하늘에 대한 제사는 천자만이 지
낼 수 있다는 의식을 갖고 있던 중국 원나라의 간섭으로 고려의 왕권이
약화됨을 단적으로 나타내주고 있다. 또 그에 따라 팔관회의 위상도 퇴색
되었음을 드러내고 있다. 그러나 동시에 고려가 건국한 이래 적어도 300
여 년 동안 고려의 국왕들은 皇帝로서 天子의 지위를 누리고 있었으며,
이는 팔관회를 통하여 발휘되었음을 反證하고 있기도 하다. 즉 고려는 자
주성을 갖고 있었으며, 고려의 왕은 스스로 하늘에 제사지낼 수 있는 지
위를 지니고 있었다. 팔관회는 바로 고려의 자주성을 대표하는 의식이었
19) 한 불교 연구(안지원, 위의 글. 184쪽)에 따르면 “팔관회의 법왕사 행향은 佛法
의 王인 부처님을 상징하고 있는 법왕사로 國王이 행차하여, 법왕과 국왕을 동
일시하려고 했던 태조의 王卽佛 사상을 재확인하는 의식으로 이해될 수 있다.”
고 한다. 그렇다면 팔관회에서의 법왕사 행차와 부처는 불교행사로서가 아니라 왕권의 신성을 위한 것이라 이해해도 무방할 듯하다.

 

20) 忠烈王元年十一月庚辰, 幸本闕, 設八關會, 改金鼇山額聖壽萬年四字爲慶曆千秋, 其
一人有慶, 八表來庭, 天下太平等字, 皆改之, 呼萬歲爲呼千歲, 輦路禁鋪黃土.( 高麗史
仲冬八關會儀)
22 道敎文化硏究 제30집

 

으며, 신성한 왕이 하늘에 드리는 제사(祭天儀式)로서의 의의를 지니고 있
었음을 확인할 수 있다.
팔관회에서의 왕의 신성성은 이제 하늘에 제사지낼 수 있는 主祭者로
서의 지위를 확보할 수 있게 해준다. 그러므로 필자는 세단계의 과정으로
진행되는 팔관회 의례에 나타난 절차가 다음과 같은 상징적 의미가 있다
고 보고자 한다. 첫째 단계인 ‘鑾駕出宮’은 이른바 권력자로서의 임금이
세속적인 것으로부터 벗어남을 의미한다. 그리하여 선조(왕건)의 초상화
를 대하고 두 번 절함으로써 신성성의 정통성을 확인한다. 둘째 단계인
‘坐殿受賀, 群臣獻壽’는 임금이 세속으로 벗어나 祭를 올릴 수 있는 성스
러운 자리에 앉았음을 뜻하고, 그에 걸맞은 축하를 받는 것이다. 셋째 단
계로서의 大會日 절차는 殿上에 앉음(坐殿)에 해당하는 바, 이미 그 성스
러움을 예배하고 찬양하며 萬福의 기원을 받는 단계임을 나타낸다.

 

5. 祭天儀式에서의 山神신앙
왕의 신성성은 이제 하늘에 제사를 드릴 수 있는 바탕이 된다. 그런데
여기서 말하는 ‘하늘(天)’이 과연 무엇을 가리키는지가 막연하다. 고대의
祭天儀式으로 전해지는 고구려의 東盟, 부여의 迎鼓, 동예의 舞天 등에 나
타나는 祭天信仰은 각각의 始祖神話로 매개됨으로써 祖上祭와 밀접한 관
련을 지니고 있다.21) 그러면 고려의 경우는 어떠한가? 한 연구22)에 따르

 

21) 「高麗時代 佛敎와 土着信仰의 接觸關係 – 燃燈會ㆍ八關會의 宗敎儀禮機能을 中心
으로」(李恩奉, 宗敎硏究 권6, 韓國宗敎學會. 1990) 15쪽 참조. 지은이는 고구려
의 ‘東盟’의 사례를 통하여 天神의 代理者이면서 始祖神인 朱蒙을 설명함으로써
제천의식과 조상제의 관련성을 설명하고 있다. 또 한국고대종교사상 (이은봉,
집문당, 1999. 239쪽)에서는 삼국 공통으로 始祖神은 天神의 대리자로서 농경의
풍흉을 지배하는 막강한 힘을 가진 神이었음을 논증한다.
22) 「高麗의 山神信仰」(朴昊遠, 민속학연구 2호. 국립민속박물관. 1995) 177-180쪽
참조. 특히 지은이가 178쪽에서 불교의 호국적 기능이 기존의 산신신앙과 기능 상 중복되면서 상호 융합을 가져왔음을 지적하는 것도 눈에 띤다.
고려 팔관회의 종교적 성격과 의미/이원태 23

 

면 고려국조설화에 등장하는 고려 왕실의 始祖 虎景이 山神신앙과 관련
을 맺고 있다고 한다. 즉 왕실의 역사성과 신성성을 드러낼 목적으로 고
대의 산신신앙을 始祖와 연결시킴으로써 고대의 토착적 산신신앙이 고려
로 전승되고 있는 것이다. 그래서 小會日의 절차 가운데, 선조의 영정 앞
에서 북쪽을 향하여 재배하고 잔을 드리는(樞密引王詣祖眞前, 北向再拜酌
獻) 의식은 조상을 매개로 한 산신신앙의 한 표현으로 이해된다.
태조 왕건 자신은 ‘훈요십조’ 제 5조에서 “三韓 山川의 신령한 도움으
로 대업을 이루었다”23)고 말함으로써 산신에 대한 신앙을 분명히 밝히고
있다. 또한 고려조 내내 산신신앙이 중시되어 왔음은 고려사 에 산재된
많은 사례와 기록들을 통하여 확인할 수 있다. 고려시기에 산신은 ‘하늘
(天)’의 실질적인 의미이다.24)
‘훈요십조’는 후손들에게 앞으로 준수해야할 규범들을 제시한 것이다.
그래서 지역적이고 토착적인 산신신앙에 대한 왕건의 관심은 개인적 차
원을 넘어, 그 자신과 후손들로 하여금 국가적 행사인 팔관회를 통하여
신앙할 것을 강조하기에 이르렀으니, 제 6조에서 다음과 같이 말한다.
내가 지극 원하는 것은 연등과 팔관에 있다. 연등은 부처를 섬기는 것
이요, 팔관은 天神과 五嶽ㆍ名山ㆍ大川ㆍ龍神을 섬기는 것이다. 함부로 증
감하려는 후세 간신들의 건의를 절대 금지할 것이다. …… 君臣이 함께
즐기며, 마땅히 공경하여 이대로 행할 것이다.25)

 

23) 其五曰: 朕賴三韓山川陰佑, 以成大業.( 高麗史 卷2, 世家2 太祖26년 4月條)
24) 이은봉(「高麗時代 佛敎와 土着信仰의 接觸關係 – 燃燈會ㆍ八關會의 宗敎儀禮機能
을 中心으로」 29쪽 참조)은 土龍, 海神, 山川 등에 대한 제사 사례를 들고, 이것
들이 祈雨祭였다는 점에 착안하여 팔관회가 農耕儀禮와 관련된 祭天 형태이었음
이 틀림없다고 지적한다. 또 朴昊遠(「高麗의 山神信仰」, 194-199)은 산신신앙을
守護의 기능, 비의 조절 기능, 祈福 등으로 설명하고 있는 바, 山神이 곧 하늘의
실질적 의미임을 알 수 있다.
25) 朕所至願在於燃燈八關. 燃燈所以事佛, 八關所以事天靈及五嶽名山大川龍神也. 後世
姦臣建白加减者, 切宜禁止. …… 君臣同樂, 宜當敬依行之.
24 道敎文化硏究 제30집

 

일단 팔관회는 불교의 법회를 의미하지 않는다.26) 팔관회는 천신으로부
터 종래의 지역적 토착신들 전반, 즉 百神을 섬기는 행사임이 분명하다.
소회일 행사 가운데에는 행사에 참여하지 못하는 지방관들로 하여금
賀表를 올리게 하는 절차가 있다. 이에 “동서 양경, 동북 양로, 병마사, 4
도호 8목에서는 각각 표를 올려 축하하였다”27)고 한다. 즉 지방관들은 팔
관회를 맞아서 팔관회를 경축하는 하표를 작성하고 공물을 준비하여 봉
표원을 파견하였다. 이들은 중앙의 문무백관과 함께 팔관회 의식에 참가
하였다. 즉 팔관회 행사는 도성의 궁전에서 이루어지는 것이지만, 행사는
중앙과 지방이 모두 참여하는 전국적인 국가행사였다. 그 정점에 국왕이
있는 것이다. 이로부터 팔관회가 전국의 천령, 오악, 명산, 대천, 용신 등
의 제사를 모아서 중앙에서 합동으로 제사한다는 의미도 분명하게 지니
게 되었다고 본다. 즉 지역적이고 토착적인 百神을 국가적인 神으로 승격
하여 중앙에서 국가적 제사로 통합해서 섬기게 된 것이다. 이것이 팔관회
가 국가적 제사로서 가지고 있는 의의 가운데 하나이며, 고려조 내내 연
중행사가 된 까닭도 여기에 있다.
그러면 이러한 산신신앙이 팔관회 儀式 안에서 어떻게 구현되어 있는
지 살펴보자. 사실 “왕건이 처음 팔관회를 창설한 것은 천지귀신을 위한
것”28)이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仲冬八關會儀’에 나타난 절차 안에서는
여전히 제천의식의 구체적 모습이 보이지를 않는다. 다음은 처음 개최되
었을 당시의 팔관회를 설명한다.
태조 원년(918) 11월 유사가 말하기를, “이전의 임금(궁예)은 해마다 11
월에 팔관회를 크게 열고 복을 기원하였습니다. 그 제도를 따르시기를
바랍니다”라고 하였다. 왕이 따랐다. 마침내 毬庭에 바퀴모양의 등을 설

 

26) 연등회가 불교의 법회라는 뜻도 아니다. ‘훈요십조’에서 “연등회가 부처를 섬기 는 것(燃燈所以事佛)”이라 하였어도, 연등회 역시 불교의 전형적인 행사가 아니
라는 견해가 있을 수 있다.
27) 東西二京ㆍ東北兩路ㆍ兵馬使ㆍ四都護ㆍ八牧, 各上表陳賀.( 高麗史 仲冬八關會儀)
28) 太祖始設八關, 盖爲神祇也.( 高麗史 64卷 志18 禮6 凶禮 國恤)
고려 팔관회의 종교적 성격과 의미/이원태 25

 

치하고, 사방에 향등을 일렬로 배열하였다. 또 綵棚 두 채를 세웠는데, 그
높이는 5장이 넘었고, 앞에서 갖가지 유희와 노래와 춤을 공연하였으니,
四仙樂部, 용ㆍ봉왕ㆍ코끼리ㆍ말ㆍ수레ㆍ배 등은 모두 신라의 전통이
다.29)
이 글은 ‘중동팔관회의’에 나타난 의례에서는 잘 안 드러나는 팔관회의
의식 광경을 잘 나타내고 있는 글이다. 다시 말해서 ‘중동팔관회의’에 나
타난 절차가 주로 왕의 神性에 초점 맞춰져 있다고 한다면, 이 글은 실제
제사가 벌어지는 祭場에 대한 형용이라 여겨진다.
겉으로 드러난 모습을 다시 형용해보면 윤등과 향등과 같은 조명장치
가 주변을 밝히고, 채붕이 설치되어 그 앞에서 백희가무가 실행된다 하였
으니, 공연장의 모습과 다를 것이 없다. 채붕은 山臺, 鰲山 등의 이름으로
도 불리는데, 일종의 높은 무대 배경이나 무대를 가리키는 말이다. 그런데
이 무대에는 山이 假說되었던 것으로 보인다.
(연등회) 소회일에 …… 전중성에서는 등롱을 부계의 상하좌우에 진열
하고 彩山을 殿庭에 만든다.30)
旽이 燃燈에 火山을 開設하고 …… 또 雜獻를 성대하게 베풀었다.31)
충렬왕 원년 11월 경진일 본전에 행차하여 팔관회를 개설하였는데, 금
오산 액자를 고치어 ……32)
仲冬의 아름다운 계절을 택하여서 나라의 옛 제도를 시행하였습니다.
보좌에 하늘이 임한 듯 千官을 끌어 앉고, 鼇山에는 땅이 용솟듯 만세 소
리 우렁찹니다.33)

 


29) 太祖元年十一月有司言: “前主每歲仲冬大設八關會以祈福. 乞遵其制.” 王從之. 遂於
毬庭置輪燈, 一座列香燈於四旁. 又結二綵棚各高五丈餘, 呈百戱歌舞於前, 其四仙樂
部龍鳳象馬車船, 皆新羅故事.( 高麗史 仲冬八關會儀)
30) 小會日 …… 殿中省列燈籠於浮階之上下左右, 設彩山於殿庭.( 高麗史 69卷 志23 禮
11 嘉禮雜儀 上元燃燈會儀)
31) 旽, 燃燈設火山, …… 又盛陳雜戱.( 高麗史 132卷 列傳45 叛逆6 辛旽)
32) 忠烈王元年十一月庚辰, 幸本闕設八關會, 改金鼇山額 …….( 高麗史 仲冬八關會儀)
33) 履仲冬之佳節, 講有國之舊章. 黼座天臨而擁千官, 鼇山地湧而薦萬歲.( 東文選 卷31
26 道敎文化硏究 제30집

 

앞의 두 사례는 고려의 또 다른 국가행사인 연등회에서의 사례이고, 뒤
의 사례는 팔관회 행사에서의 山과 관련된 기록이다. 궁정 뜰에 채산 혹
은 화산이 설치되었음이 분명하고, 이것이 팔관회에서는 금오산 혹은 오
산으로 명기되었음을 밝히고자 한 것이다. 특히 火山은 三角山을 형용한
것이라면34), 鰲山은 신선이 사는 산인데, 삼신산을 자라가 지고 바다 위를
떠다닌다고 하여 오산이라고도 불린다. 산은 天神이 강림하는 곳이다.35)
결국 화산이나 오산은 山에 대한 고려의 신앙을 투영하고 있는 것인 바,
신앙 대상인 자연적 山을 상징적으로 假設하여 무대장치처럼 궁정 뜰 안
으로 끌어들이고 있음을 알 수 있다. 綵棚이나 山臺는 단순히 공연과 유
흥을 위한 장소가 아니라 神을 모시고 교감하는 신성한 공간인 셈이다.
즉 채붕은 제사를 올리는 祭場으로서 신성한 장소이다. 이상에서 볼 때
팔관회의 의식은 山神신앙을 구현하고 있음을 확인할 수 있다.

 

6. 祭祀儀式과 百戱歌舞
지금까지 팔관회 의식에 제사를 치룰 수 있는 자격을 갖춘 主祭者가 있
고, 제사의 대상과 祭場이 갖춰졌음을 확인했다. 神을 맞이할(迎神) 준비
가 된 셈이다. 제사의식은 이제 맞이한 신을 즐겁게 함(娛神)으로써 儀式
의 목적을 달성하게 된다.
팔관회 의식의 목적은 천지귀신을 섬기기 위함이고, 그 실제 목적은
“사람과 하늘이 모두 기뻐하도록 함”36)에 있다. 기쁨을 얻는 방법으로 百
戱歌舞만한 것이 없다. 그야말로 노래하고 춤추며 온갖 놀이를 하는 것이
다. 백희가무야말로 팔관회 의식의 핵심이다.
成宗은 팔관회를 폐지하였다. 그가 처음에는 雜技가 떳떳하지 않으며

 


表箋. 「八關會仙郞賀表」)
34) 南京鎭三角山, 火山也.( 高麗史 134卷 列傳47 辛禑2)
35) 한국고대종교사상 (이은봉), 101쪽
36) 致使人天咸悅.( 高麗史 18卷 世家18 毅宗2)
고려 팔관회의 종교적 성격과 의미/이원태 27

 

또 번잡하고 요란하다고 생각하여, 그것을 다 그만두었다. 그리고 팔관회
를 오직 불교적 행사로만 행하여, 법왕사에 행차하는 일과 毬庭에서 신하
들의 축하 받는 일만을 계속 했다가37), 마침내는 5년 뒤 팔관회를 정지시
켰다.38) 慕華思想으로 인해 불교행사를 치룰 이유도, 主祭者가 지녀야 할
神性을 확인해야할 이유도 더 이상 없었기 때문이다. 그런데 성종 시기에
거란이 침입하여 토지 일부를 내어줄 것을 강요하는 일이 벌어진 적이 있
었다. 이에 대해 다음과 같은 기사가 보인다.
경솔히 토지를 베어서 敵國에게 버리는 것 보다는 다시 先王의 燃燈ㆍ
八關ㆍ仙郞 등의 일을 행하여 다른 지역의 異法을 행하지 말아서 국가를
보전하여 태평을 이룩함이 좋지 않겠나이까? 만일 그렇다고 생각하신다
면, 마땅히 먼저 神明에 告하고, 그런 뒤에 싸움하고 和解하는 것은 오직
임금께서 판단하소서’라고 하니, 成宗이 그렇게 여겼다. 당시에 成宗은 중
국의 風을 좋아하여 따르고자 하였으나, 國人은 기뻐하지 아니하였다. 그
래서 知白이 言及한 것이다.39)
이 글의 핵심은 慕華思想에 경도되어 있었던 성종에 대해, 民心이 동의
하지 않고 자주성을 회복할 것을 주장하는 데 있다. 또 그 자주성의 관건
이 바로 팔관회의 회복에 있음을 분명히 밝히고 있다. 성종이 팔관회를
문제 삼았던 것은 결국 백희가무였다. 그렇다면 팔관회는 고려의 주체성
과 자주성을 대표하는 국가행사이며, 그 팔관회를 팔관회답게 하는 것은
바로 백희가무에 있음이 反證된다.
한편 고려사 를 보면 다음과 같은 재미있는 사건이 기록되어 있다.

 


37) 王以八關會雜技不經且煩擾悉罷之. 幸法王寺行香, 還御毬庭受群臣朝賀.( 高麗史 3
卷 世家3 成宗)
38) 冬十月命停兩京八關會.( 高麗史 3卷 世家3 成宗6)
39) 且與其輕割土地, 弃之敵國, 曷若復行先王燃燈八關仙郞等事, 不爲他方異法以保國家
致大平乎? 若以爲然則當先告神明, 然後戰之與和, 惟上裁之.” 成宗然之. 時成宗樂慕
華風, 國人不喜, 故知白及之.( 高麗史 94卷 列傳7 徐熙)
28 道敎文化硏究 제30집

 

(明宗, 14年)五月 甲午에 金나라 祭奠使 太府監 完顔辜가 왔다. 처음 서
쪽 교외의 정자에 이르자, 接伴使 大將軍 張博仁이 춤을 추며 문안의 예
를 올렸다. 辜는 나라가 근심스러운 때에 춤을 추는 것은 실례라고 말하
며 조롱하였다. 박인은 이 조롱을 오히려 이해하지 못하였다.40)
중국의 使者에게 춤은 단지 흥을 돋우는 유흥의 수단으로만 이해될 수
밖에 없었기 때문에, 國喪 중에 춤을 춘다는 것은 禮에 어긋난 것으로 보
일 수밖에 없었을 것이다. 그러나 박인은 오히려 이를 이해하지 못하였다.
왜냐하면 고려인의 의식 안에서 춤은 최대의 敬意를 표시하는 행위였기
때문이다. 팔관회 의례가 진행되는 가운데 문무백관들이 왕에게 춤을 추
며 절하는 모습은 이미 지적한 바가 있다.
부여의 영고, 동예의 무천, 고구려의 동맹 등의 제천의식에서 공통적으
로 음주가무가 행해졌었고, 그 음주가무가 한민족의 오랜 전통적인 祭天
의 방법이었다는 것은 익히 알려진 사실이다. 가무는 원래 신을 즐겁게
하고, 인간이 신과 교감하게 해주는 의식이다. 당나라의 孔潁達도 “가무가
신을 섬기는 일”41)임을 명언한 바 있고, 현대사회에서 춤을 연구하는 이
도 춤이 고대 祭儀로부터 기원하였음을 확인한다.42) 가무가 제천의 방법
이었음은 더 이상 재론할 필요는 없을 것이다. 여기서 필요한 것은 고려
팔관회의 가무가 지니고 있는 역사성과 전통성을 확인하는 일뿐이다.
이제 宣和奉使高麗圖經 의 徐兢은 고구려의 동맹과 관련하여 고려의
팔관회를 다음과 같이 기술하고 있다.
전대의 역사(三國志, 魏志東夷傳)에 이르기를, 그 풍속이 음란해서 저녁

 

40) 五月甲午金祭奠使太府監完顔辜來. 初至西郊亭, 接伴使大將軍張博仁舞蹈行問上禮.
辜以國恤舞蹈譏之曰: “何失禮也!” 博仁猶不悟.( 高麗史 64卷 志18 禮6 凶禮 國恤)
41) “무당은 가무로 신을 섬긴다(巫以歌舞事神).”( 尙書ㆍ伊訓 “敢有恒舞于宮, 酣歌于
室, 時謂巫風”條 孔潁達 疏)
42) 「韓國 祭儀式에 나타난 歌舞的 要素 – 神話, 古代祭儀, 八關會를 中心으로」(김효
분, 대한무용학회논문집 권35, 大韓舞踊學會, 2003)와 같은 글에서 제의의 가무
적 의의를 확인할 수 있다.
고려 팔관회의 종교적 성격과 의미/이원태 29

 

이 되면 으레 남녀가 무리지어 노래하고 즐기며 귀신ㆍ사직ㆍ靈星을 제
사한다. 10월에 하늘을 제사하기 위해 큰 모임을 갖는데 그것을 동맹이라
부른다. …… 그들이 10월에 동맹하는 모임은, 지금은 그 달 보름날 소찬
을 차려놓고 그것을 팔관재라 하는데 의식이 극히 성대하다.43)
이 글은 고려의 팔관회가 고구려의 제천의식인 동맹에서 기원하였음을
지적한다. 동맹의 儀式에 대한 관련 기록이 없는 한에서, 만약 고려의 팔
관회를 보고 고구려의 동맹을 연상하였다면, 서긍의 본 두 의식의 공통점
은 음주가무였다.
우리 태조가 등극하여 古國의 유풍이 오히려 이어지지 않고 있다 여기
시고, 겨울에 성대한 팔관회를 열어, 양가의 자제 4명을 뽑아 무지개 옷
을 입혀 열을 지어 뜰에서 춤을 추게 하였다.44)
여기서 말하는 古國의 유풍은 신라의 仙風을 가리킨다. 또 이미 앞에서
四仙樂部가 팔관회에서 행해졌음을 보았다. 여기서 인용된 글과 함께 보
면 四仙樂部는 四仙의 花郞舞임이 분명하다. 즉 仙風은 花郞舞45)를 통해
숭상되었으며, 이것이 팔관회에서 실행된 것이다. 일련의 연구자들은46)

 

43) 前史以謂其俗淫, 暮夜輒男女群聚, 爲倡樂, 好祠鬼神ㆍ社稷ㆍ靈星. 以十月祭天大會,
名曰東盟. …… 其十月東盟之會, 今則以其月望日具素饌, 謂之八關齋, 禮儀極盛. ( 宣
和奉使高麗圖經 卷第17, 祠宇)
44) 我太祖龍興, 以爲古國遺風尙不贊矣, 冬月設八關盛會, 選良家子四人, 被霓衣列舞于
庭.(李仁老, 破閑集 券下)
45) 「팔관회의 국가축제적 성격」(구미래, 韓國宗敎民俗試論 , 민속원. 2004. 145쪽)에
서도 화랑의 가무가 놀이로서가 아니라 신령과 교감하는 일종의 주술적 의례였
음을 긍정한다.
46) 가령 안지원(위의 책, 140-165쪽) 같은 연구자는 고려 팔관회에 보이는 전통적 요소를 살피면서 신라적 요소와 고구려적 요소로 구분하여 설명한다. 이러한 설 명방식도 의미 있다. 고려의 팔관회는 개경에서만 열렸던 것이 아니라 서경에서 도 열렸기 때문이다. 왜 고려의 팔관회는 두 곳에서 두 번 개최되었는지도 설명 을 필요로 하는 과제이다.
30 道敎文化硏究 제30집

 

고구려와 신라라는 문화적 차이를 가지고 고려 팔관회를 그 두 측면에서
이해하려는 경향을 보인다. 그러나 歌舞라는 측면에서 보면 고구려와 신
라의 차이는 없다. 즉 고려 팔관회는 한민족의 역사와 전통을 계승하는
固有의 제천의식인 것이며, 그 정통성의 주요근거는 가무에 있다.

 

7. 百戱歌舞의 의의
고려사 ‘仲冬八關會儀’에 나타난 의례만을 보면 오직 왕을 중심으로
한 君臣간의 절차처럼만 보이나, 구경꾼들이 거리에 쏟아져 나와 도시를
기울게 할 정도였다. 백희가무의 실행 없이 군신간만의 절차였다면 불가
능한 일이다. 왕도 위봉루로 가서 그 백희가무를 참관하여 즐겼다.47) 아울
러 팔관회가 宮庭에서만 개설되었을지라도 이미 나라 전체의 참여라는
상징적 행사였음은 이미 밝힌 바 있다. 팔관회는 고려의 俗節이었다.48) 고
려 팔관회는 하늘과 인간이 함께 즐길 수 있는 행사였고, 萬民이 즐거워
하는 행사였기 때문이다. 팔관회는 민중적인 祝祭이기도 했다.
팔관회에는 고려인만이 참여했던 것도 아니다. 기록에 의하면 송나라
상인, 동서의 蕃, 탐라국에서도 방물을 헌납하였고, 그들에게 앉아서 음악
을 관람하게 한 것은 상례가 되었다고 한다.49) 이는 고려의 국가적 권위
를 과시한 것으로 보이기도 하지만, 팔관회의 의식은 異質的인 사람과 文
化의 참여마저도 포용함을 뜻한다.
팔관회에는 산 자뿐 아니라 심지어 죽은 자의 참여도 이루어졌다. 예종
15년 10월 팔관회에서 왕이 잡희를 관람할 때, 태조 때의 공신 金樂과 申
崇謙의 偶像이 뛰어다니는 가면극을 보고 감동하여, 이른바 ‘悼二將歌’라

 

47) 觀者傾都. 王御威鳳樓觀之.( 高麗史 仲冬八關會儀)
48) 俗節: 元正ㆍ上元ㆍ寒食ㆍ上巳ㆍ端午ㆍ重九ㆍ冬至ㆍ八關ㆍ秋夕.( 高麗史 卷84, 志
38 刑法1 名例 禁刑)
49) 宋商客東西蕃耽羅國, 亦獻方物, 賜坐觀樂, 後以爲常.( 高麗史 仲冬八關會儀)
고려 팔관회의 종교적 성격과 의미/이원태 31

 

는 詩歌를 남긴 일이 있다.50) 이 가면극의 내용을 보면, 태조가 두 공신이
팔관회에 없음을 애석히 여겨, 우상을 만들어 복식을 갖추고 자리에 앉게
하니, 두 공신이 술을 받아 마시기도 하고 일어나 춤을 추기도 한다는 것
이다. 고려조 때에는 많은 우상들이 만들어졌다. 이 가면극은 죽은 자의
명복을 빌기 위함이 아니다. 죽은 자를 산 자의 세계에서 살아 있는 사람
으로 대하여 함께 놀고자 함이었다.
그 밖에 팔관회 의식에는 百神의 상징물로 이해해도 좋고, 가면극으로
이해해도 좋을 용ㆍ봉왕ㆍ코끼리ㆍ말 등과 같은 사물들마저 함께 한다.
팔관회는 이처럼 세속에 속한 모든 것을 포용하고자 한다.
채붕의 무대에는 가무와 온갖 놀이51) 그리고 飮酒 등 제의에 참여한 사
람들을 위한 집단적인 놀이판이 마련되어 있다. 의례의 진행에서 오는 긴
장과 엄숙함으로부터 백희가무에서 오는 이완과 소란함의 주고받음은 의
식을 고조시키고, 이는 마침내 신과 접하는 神性과 비일상적 체험을 느끼
게 되는 시간과 공간에 빠져들게 한다. 祭儀的 混沌이라 할 엑스터시를
맞이하게 되는 것이다. 다음의 몇 가지 사례를 살펴보자.
庚申에 팔관회를 열었다. 王이 구정에서 돌아와 闕門 앞에 이르러, 駐
蹕하고 오랫동안 노래하고 화답하다가, 광대에게 命하여 仗內에서 歌舞케
하더니, 거의 三更에 이르러서야 御史大夫 崔贄와 雜端 許載가 간하거늘
王이 이를 嘉納하였다.52)
우왕 12년 11월 정묘일에 팔관회를 거행하였다. 우왕이 기녀들과 궁녀
들을 데리고 헌부의 북산으로 올라가 이를 구경하였다. 이 때 팔관회에
서 순군과 근시가 길을 다투다가 큰 싸움이 되어서, 근시 편에서 창에

 


50) 辛巳設八關會, 王觀雜戱, 有國初功臣金樂申崇謙偶像, 王感歎賦詩.( 高麗史 14卷
世家14 睿宗3)
51) 李穡의 「山臺雜劇」( 牧隱集 권33)에는 고려의 가무백희를 살펴볼 수 있는 내용
이 집약되어 있다. 이 내용을 분석하는 것도 하나의 과제라 생각하는데, 그 가운 데 ‘처용무’가 실행되고 있음만 지적한다.
52) 庚辰設八關會. 王自毬庭還, 至閤門前, 駐蹕唱和久之, 命倡優歌舞仗內, 幾至三鼔. 御
史大夫崔贄雜端許載進諫, 王嘉納之.( 高麗史 14卷 世家14 睿宗3)
32 道敎文化硏究 제30집

 

찔려 부상한 자가 많았다.53)
(忠肅王 원년 11월에)팔관회를 거행하고 의봉루에 올랐다. …… 고관대
작들의 노비들이 넓은 뜰에 들어와 서로 싸우며 돌을 던지니 누각 위에
까지 날아들었다.54)
팔관회 행사는 흔히 종교라는 말로부터 떠올려지는 경건성이나 엄숙성
등의 형식만으로는 설명되지 않는다. 고려사 곳곳에는 팔관회와 관련하
여 밤새도록 가무백희가 이어지면서 왕과 백성들이 즐긴 기록들이 많이
보인다. 위에 인용된 사례들은 저 높은 지위의 왕으로부터 노비에 이르기
까지의 비일상적인 모습을 보여주고 있다. 이는 규범과 제도, 계급 등으로
유지되던 틀과 일상으로부터 해방된 亂場의 모습이다.
무질서가 곧 질서의 파괴를 의미한다면, 그것은 오히려 일상으로부터
오는 고통과 억압, 획일 등으로부터 벗어나 기쁨과 해방 그리고 다양성을
긍정 받게 해준다. 난장은 헝클어짐이기에 무질서하지만 그래서 또한 역
동적이다. 일상으로부터 벗어나는 일탈과 해방은 자유를 가능케 하기 때
문이다. 그러하기에 그 어떤 이데올로기를 개입시킬 여지도 없다.
난장은 혼돈을 지향한다. 혼돈에는 일탈이 주는 자유가 있고, 그래서 그
안에는 어울림이 있다. 혼돈은 왕과 노비라는 계급적 차별은 물론, 너와
나 사이의 틈을 없애주고, 타민족과 문화의 이질성마저 해소시킨다. 마침
내는 삶과 죽음의 관념으로부터 벗어남은 물론 신과 인간 그리고 만물의
경계마저 허물어준다.
일상으로부터의 해방에서 오는 亂場的 역동성은 다양한 群像들로 하여
금 신바람을 일으켜 삶의 生氣를 얻게 해 주기도 한다. 그러하기에 金富
軾은 “경건한 儀式을 갖추어 성대한 禮를 거행하오니, 지성이 하늘을 감
동하여 群靈이 다 흐뭇해하고 和氣가 두루 통하여 만물이 모두 鼓舞되나

 

53) 丁卯設八關會. 禑率妓及宮女, 登憲府北山觀之. 是會巡軍與近侍爭路雜沓, 近侍多爲
槊所傷.( 高麗史 136卷 列傳49 辛禑4)
54) 庚子設八關會王御儀鳳樓. …… 大會權貴僕從入廣庭, 相鬨投石及於樓上.( 高麗史 34
卷 世家34 忠肅王1)
고려 팔관회의 종교적 성격과 의미/이원태 33

 

이다.”55)라 하였다. 또 李奎報는 “팔관의 아름다운 모임을 차리고, 백성과
함께 즐겨 萬國의 즐거워하는 마음을 고르게 하오니, 기쁨이 天神과 地神
을 흡족하게 하고, 경사가 朝野에 비등합니다. 공손히 생각건대, 성상폐하
께서 神道의 가르침을 베푸시니, …… 아름다운 상서가 답지하여 큰 거북
은 산을 이고 작은 거북은 圖를 지고 나오며, 온갖 음악을 다 벌이니, 용
이 피리를 불고 범이 비파를 타나이다”56)라 하기에 이른다. 팔관회 의식
의 극치는 하늘로부터 만물에 이르기까지 和氣가 두루 통하여, 저마다 喜
悅의 충만함에 이르는 데 있다.

 

8. 맺는 말
고대 神敎의 제사는 迎神 – 娛神 – 神意 청취의 세단계로 진행되는 것
이 일반적이다. 사실 필자는 이 세단계의 과정을 염두에 두고 본 연구를
진행하였다. 이를 위해 왕이 天神의 대리자임을 확인하고, 主祭者로서 지
녀야 할 王의 神性을 담보하였다. 또 ‘仲冬八關會儀’의 절차를 진행함에
主祭者가 있고, 제사의 대상과 祭場이 갖춰졌음을 확인했다. 이를 통해 고
려 팔관회가 祭天儀式으로서의 의의를 지니고 있었음을 확인할 수 있었
다.
팔관회는 고려의 주체성과 자주성을 대표하는 국가행사이며, 그 팔관회
를 팔관회답게 하는 것은 바로 百戱歌舞에 있다. 고려의 팔관회는 한민족
의 역사와 전통을 계승하는 固有의 祭天儀式인 것이며, 그 정통성의 주요
근거는 가무에 있다고 보았다. 가무를 통한 팔관회 의식의 극치는 저 하
늘로부터 만물에 이르기까지 和氣가 두루 통하여, 저마다 喜悅의 충만함

 

55) 祗率彜儀, 張皇盛禮, 至誠上格, 群靈所以懷柔, 和氣旁通, 萬物靡不鼓舞.( 東文選
卷31 表箋, 「賀八關表」)
56) 講八關之嘉會, 與民同樂, 均萬國之懽心, 喜洽神祗, 慶騰朝野. 恭惟聖上陛下, 神道設
敎, …… 休祥沓至, 鼇戴山而龜負圖, 廣樂畢張, 龍吹箎而虎鼓瑟.( 東文選 卷31 表
箋, 「敎坊賀八關表」)
34 道敎文化硏究 제30집

 

에 이르는 데 있다.
고려 팔관회는 왕조의 시작과 함께 쇠퇴를 맞이할 때까지 유지하였던
나라를 대표하는 국가행사였다. 불교가 신앙되고 중국도교가 행해지며 유
학의 사상이 자리 잡던 시대에 고려 팔관회는 고려의 중심을 지탱하던 것
이었다. 그 중심에 神敎가 있다.
고려 팔관회의 본질은 天地鬼神을 위한 것이었다. 삼국시기를 거쳐 고
려로 이어지는 팔관회 행사의 전통은 불교라는 특정종교의 계승을 의미
하지 않는다. 실질적인 최초의 통일국가인 고려와 그의 팔관회는 한민족
의 역사와 문화를 잇는 역사성을 지니고 있으면서, 다음 시대로 그것을
전하는 위치에 있다. 따라서 고려 팔관회의 전모는 그 역사성에 상응하는
정도의 탐구로부터 이해될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주지하다시피 자료의
빈곤은 커다란 장애요소로 남는다. 한국고대철학을 밝힐 자료의 빈곤은 한
국철학 자체의 근간을 흔드는 문제이다. 그러하기에 본 연구는 고려사 와
그와 관련된 주변의 몇몇 자료에 한정될 수밖에 없었다. 그럼에도 고려
팔관회에서 최소의 진실을 얻을 수 있다면, 그를 한국철학의 근간을 逆推
할 수 있는 디딤돌로 삼을 수도 있겠다. 아울러 그것이 진실로 한민족의
역사와 문화를 전하는 것이라면 그로부터 ‘지금’을 설명할 수 있는 길도
열릴 것이라고 믿는다.

 

고려 팔관회의 종교적 성격과 의미/이원태 3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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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6 道敎文化硏究 제30집


【中文提要】



                                                                            http://cafe.daum.net/jangdalsoo/dC5H/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