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0. 4. 26. 12:49ㆍ우리 역사 바로알기
# 전염병 관련 기사
* 청 홍타이지가 천연두 감염으로 인한 병력 손실을 피하고자 병정노란(丙丁虜亂, 병자 인조 14년 1636.12.28. ~ 인조 15년 정축 1637. 2. 24. , 음력 1636년 12월 2일 ~ 1637년 1월 30일)을 단기전으로 끝냄. / ‘피두선귀(避痘先歸: 천연두를 피해 서둘러 귀환) : 《청태종실록》숭덕 2년 7월 5일(1637년 8월 24일) 2번째 기사
물론 4만7천여명의 소수병력(서울대 동양사학과 구범진 교수는 3만4천여명으로 추정)을 동원한 기습전으로 산성 거점 농성중이던 조선 근왕군 약 9~10만명의 남한산성 집결에 대한 대비와 명나라와의 배후 전쟁부담과 한양의 창고나 지방의 가을걷이한 곳간의 약탈로 인한 경제력 회복 등의 사유로 전략상 단기협상과 철군을 기도함.
* 임진왜란 직후인 광해군 5년(1613년) 봄, 여름 ~ 광해군 6년(1614년) 사이에 唐毒疫이라 불리던 역질(현 猩紅熱로 추정됨. 발진독소를 산출하는 용혈성연쇄상구균에 의해 발생하는 감염병)이 크게 유행함. / ≪광해군일기≫와 이수광(李睟光)의 ≪지봉유설 芝峰類說≫, 지봉유설에서 옥온(獄瘟)·당홍역(唐紅疫)이라는 병명으로 기록.
그러나 유행이 거듭됨에 따라 면역력이 획득되고 1931∼1932년경에 크게 유행했으나 광복 이후 중증 성홍열 환자는 줄어들어 점차 그 위험도가 떨어짐. 홍역과 함께 급격하게 줄어드는 소아전염병(小兒傳染病)의 하나.
ㅡ 유행 시기를 보면 대개 11월부터 환자가 늘어나기 시작해서 이듬해 6월에 절정을 보이고 8∼10월 사이에 환자 수는 적어진다. ≪벽역신방≫에서도 연운(年運)이나 기상과의 관계를 중시하였다. 1940년대까지는 치명률(致命率)이 높아서 20∼30%에 이르렀으나, 페니실린과 설파제가 특효를 나타내며 회복기 환자의 혈청이나 항독소(抗毒素)를 중증 환자에게 사용해도 효과가 있고, 면역력이 증가됨에 따라 이제는 이 병으로 사망하는 사람은 거의 없어지게 되었다.
ㅡ 내의원에서 만든 ≪벽역신방≫에 나타난 당독역의 증상을 보면 머리가 아픈 두통과 온몸이 아픈 신통(身痛), 오한·장열(壯熱:고열이 지속됨)과 함께 머리와 얼굴, 그리고 온몸이 벌겋게 부어오르고 동통(疼痛)이 심해지며, 정신이 혼미해지고 헛소리를 하며 목이 붓고 아프며 막히게 된다고 기록되어 있다.
* 유행성 감기(Influenza)
주로 천행수(天行嗽) · 윤수(輪嗽) · 시행(時行) · 감기 등으로 불렸다. 유행성 감기는 특별히 악성 감기[독감]로 일반적인 감기와 구별하지만, 역사적으로 악성 감기의 유행을 기록한 사료를 찾기는 어렵다. 다만, 의서에 유행성 감기로 추측할 만한 내용들이 수록되어 있다.
먼저, 15세기의 『향약집성방』에는 상한시기(傷寒時氣)라고 하여 “시기에 걸린 첫날은 머리가 아프고 열이 몹시 나며, 4일이 되면 몸에 열이 몹시 나고 팔다리가 아프며 가슴속이 답답하고, 5일이 되면 머리가 아프고 열이 몹시 나며 먹으면 구역질이 나고, 8~9일 되어서도 낫지 않고 명치 밑이 딴딴하고 그득하며 몸이 아프고 속과 겉에 열이 있어 답답하고 구역이 나며 불안해진다.”라고 기록하였다. 한편, 『동의보감』(1610년)에는 「천행수(天行嗽)」 항목에서 “시령(時令)이 고르지 않아 많은 사람들이 감기에 걸리는 것이다. 해수와 가래, 오한과 고열의 증세가 있다.”라고 유행성 감기를 설명하였다. 이 밖에 18세기의 『급유방(及幼方)』에는 “천행수는 시기가 고르지 않아 많은 사람들이 감기에 걸리는 것으로 일반적인 감기[四時感冒]와는 다르다.”라고 구별하였다.
* 코로나 바이러스 감염증 억제책(施案)
ㅡ 생물과 무생물의 경계인 바이러스성 병원체는 지구상에서 원시생명체의 발생기원 이전의 진화 전단계에 해당되며 gel상태의 단백질덩어리에서 핵산이 만들어져 이들 둘이 축적되어 단일세포로 이루어진 원핵생물인 원시생명체에서부터 존재하였기 때문에, 그후 오랜 지질시대를 거쳐 진화된 고등생명체의 각종 유전자 복제나 생명보전현상과 비슷한 기제를 가지고 숙주 세포내에서 복제의 순환과정을 거쳐 확산 유행됨으로 인하여 동식물 등 각종 고등생명체의 생명현상이나 대사과정에 위해를 주지않는 범위내에서 억제나 치료방법의 선택은 제한성을 갖는 특징을 가지고 있다.
생명체 진화과정에서 근 25억 년 동안 진행됐던 바이러스와 숙주의 전쟁은 인간의 세포 속에도 뚜렷한 흔적을 남겼다. 일종의 유전자 화석(genetic fossil)인 셈이다. 최근 항바이러스 물질 연구동향은 생물이 3세대에 걸쳐 이룩한 항바이러스 방어 시스템의 진화를 추적하여 원핵생물의 원시적인 방어체계를 활용하여 새로운 치료제 전달시스템을 개발할 수 있다는 결론을 도출했다.
오래된 항바이러스 싸움꾼들인 이 방어체계의 중심은 ‘드로셔(Drosha)‘라는 단백질과 이를 포함한 ’RNAse III 효소군(family of enzymes)’이다.
연구팀에 따르면 드로셔와 RNAse III은 원래 동물과 식물이 단세포 생물일 때부터 바이러스에 저항하던 싸움꾼이었다고 한다. 이들은 바이러스의 핵심인 유전물질(RNA, DNA)을 공략하는 방법으로 오랫동안 전투를 이끌어 왔다.
본래 박테리아의 RNA를 관리하는 단백질이었던 RNAse III은 바이러스의 유전물질도 제어할 수 있어 식물과 무척추동물에서 항바이러스 임무도 수행한다. 사람으로 치면 행정병이 전투 능력을 인정받아 최전방 격전지에 배치된 셈이다.
RNAse III이 바이러스에 대응하는 방법은 RNA간섭(RNAi)이다. RNA 간섭이란 RNA 중 일부가 짧은간섭RNA(siRNA)나 마이크로RNA(miRNA)가 전령RNA(mRNA)의 활성을 조절해서 유전자 발현을 방해하는 것을 말한다. 말 그대로 단백질 합성 정보를 담은 mRNA가 이제 막 단백질을 생산하려고 하는데 이를 ‘간섭’해서 막는 역할을 하는 것이다. 이렇게 mRNA의 발현을 막으면 바이러스가 기대하는 단백질의 합성을 막는 셈이다.
그림. RNA 간섭이란 RNA 중 일부가 짧은간섭RNA(siRNA)나 마이크로RNA(miRNA)가
전령RNA(mRNA)의 활성을 조절해서 유전자 발현을 방해하는 것을 말한다. 출처: Wikimedia
한편 척추동물은 바이러스를 물리치는 주 역할을 점차 인터페론(interferon)이라는 단백질에게 맡긴 것이다. 항바이러스 방어체계의 진화로 인해 단순한 RNAse III 기반 시스템의 효용성이 갈수록 떨어졌기 때문이다. 척추동물은 RNAse III의 일부인 드로셔와 관련 단백질들에게는 본연의 임무인 유전자 조절(gene regulation)이라는 업무를 부여했다.
그런데 드로셔는 바이러스와 싸우던 투쟁심을 잃어버리지 않았다. 연구팀은 우연히 인간의 세포에 바이러스가 침입했을 때 드로셔가 핵(nucleus)에서 빠져나오는 모습을 보고 한 가지 가설을 세워봤다. 척추동물의 세포에 바이러스가 침입하면 드로셔는 이와 싸우기 위해 핵을 벗어난다는 것이다.
연구팀이 드로셔가 결핍된 세포를 바이러스에 감염시킨 결과 실제 바이러스의 증식이 더 빨랐다. 이후 세균에서 추출한 드로셔를 물고기, 인간에게 삽입했더니 유의미하게 바이러스의 증식이 줄어드는 현상이 나타났다. 이에 대해 텐외버 박사는 드로셔는 모든 항바이러스 시스템의 베타버전과 같다고 표현했다.
연구팀은 이 연구를 바탕으로 흥미로운 발상을 해냈다. 만약 세포 내에서 드로셔가 원시 RNAse III 기반 방어체계와 같은 역할을 하고 있다면 세포 안으로 특정 유전자를 전달하는 ‘전령 바이러스’도 만들 수 있지 않을까? 즉 외부에서 들어온 물질은 면역체계에 의해 세포에 닿기 한참 전에 격퇴되지만 면역체계를 우회할 수 있어 막기가 어려운 바이러스를 드로셔 방어체계에는 민감하게 만들면 세포 안까지 무사히 약물이나 유전자를 전달할 수 있지 않을까?
이에 연구팀은 ‘좋은’ 바이러스를 이용한 벡터(특정 유전자를 표적 유전자까지 운반하는 매체)를 만드는 연구를 진행하고 있다. 목표는 RNAse III 기반 방어체계에 극히 민감한 ‘유전자 조작 바이러스(engineered viruses)’를 만들고 이를 이용해 원하는 형질을 담은 ‘자가복제 RNA(self-replicating RNAs)’를 조합해서 유전자 운반체를 만드는 것이다. 유전자 조작 바이러스의 민감성을 잘 조절하면 유전자를 편집하거나 치료물질을 전달하는 시간을 확보해서 유용하게 활용할 수 있을 것으로 기대된다.
디옥시리보오스 DNA
리보오스 RNA
* 코로나 바이러스 RNA 오각형 당구조의 2'번 탄소에 OH기가 결합되어 있으므로,
일정량 이상의 식초나 술 등 OH기가 있는 음식물의 섭취나 체액의 알칼리화를 피하고
외부의 식물에서 얻을 수 있는 항산화물질인 비타민C(키위·양배추 등에 함유), 비타민E(아몬드·해바라기씨 등에 함유),
베타카로틴(당근·토마토 등에 함유), 셀레늄(각종 해산물에 함유) 등의 섭취량을 코로나 바이러스 유행시기에 늘려주며
調息상태로 호흡명상을 하여 대사과정에서 뿐만 아니라 오존, 산화질소, 자외선과 흡연 등 외부의 환경오염에 의해서도
많은 양이 생성공급되는 활성산소(Free Radical)를 포함한 체내 산소공급량을 조절한다면
병원체에 감염되더라도 세포내에서 RNA형 바이러스 복제 순환과정을 지연 또는 저지할 수 있지 않을까?
(여기에서 과잉 활성산소가 체액중 물과 결합하여 여분의 수산화기(-OH기)를 세포내에서 합성 공급할 가능성이 크다는 가정하에)
어차피 숙주세포들과 공생하여 생육하고 번성하여야할 바이러스라면 복제지연요법으로 항체생성의 완만한 시간을 얻는 것이
면역계가 지나치게 발동하여 중증폐렴을 일으키는 사이토카인 폭풍(cytokine storm)' 을 억제하고
동물의 바이러스가 사람으로 전이되면서 질병의 범유행, 즉 판데믹(pandemic)을 지연시킬 수 있는 합당한 대책이 아닌가....
( RNA 바이러스에서 수산화기(-OH기)가 오각형 당구조의 2'번과 3'번 탄소와 두번 결합함으로서 바이러스 변이가 활발하여
독감백신 처럼 지속적인 백신개발의 필요성이 대두되고 바이러스성 항원에 대한 직접치료제 개발은 어려우며
회복기 환자의 혈청이나 항독소(抗毒素)를 중증 환자에게 사용하는 것이 효과가 있다고 예측하여...... )
*** 위 코로나19 관련 시안은 의학 비전공자가 자료조사하여 작성한 것으로 유사증상이 있어 자가격리 등을 할 때,
스스로 식이요법 호흡법 등의 보조수단을 통한 건강유지를 위하여 가설을 세운 것이므로 참고만 할 뿐
실제 유증상자는 반드시 방역당국이나 의료진의 지시나 통제에 따라야 합니다.
바이러스 복제의 순환과정
코로나바이러스 감염 환자의 몸 속에 자리한
녹색 빛깔을 띠는 갈색의 정상 세포가
분홍색의 사스-코브-2(SARS-CoV-2) 바이러스 입자에
심하게 감염되어 죽어가고 있음.
[자료 출처: 국립 알레르기 및 전염병 연구소(National Institute Of Allergy And Infectious Diseases, NIH]
[출처] 코로나바이러스의 역사|작성자 메이수
병자호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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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목차
1. 개요[편집]
2. 상세[편집]
굴욕으로 따지면 몽골의 침입과 원 간섭기가 더 심각하다. 이마저도 이들이 망조 국가였다는 것을 감안하면 이 당시 조선은 거의 망국 대접을 받았다.[9]
대중들에겐 흔히 '조선이 사대주의로 명나라를 섬기다가 연이은 삽질[10]로 자멸했고, 청의 홍타이지는 항복한 조선에 자비를 베풀어 멸망시키지 않았다'는 속설이 퍼져있지만, 이에 대해 반론을 제기하는 학자도 있다. 천연두가 홍 타이지와 청군의 귀국을 앞당겼다는 것(구범진)이다. 당시 조선과 청의 국력 격차는 쉽게 멸망이나 정복이 이루어질 만큼은 아니었고, 전쟁 중 천연두가 발병한 탓에 소모전을 바라지 않은 청은 전면전이 아니라 조선의 정치를 뒤집어서 외교적인 이득을 보기 위한 단기 전쟁을 필요로 했다. 그리고 몇 년 안 가서 명도 멸망했다.
한국의 병자호란사 담론은 청나라가 처했던 위기 상황보다도 침략을 당한 조선의 사정만으로 해석하려는 경우가 많다보니, 한림대학교의 오수창 교수는 청(淸)과의 외교 실상과 병자호란이라는 논문에서 '자초한 전쟁' 이라는 이런 통념들에 대해 비판을 하기도 했다. “병자호란 조선이 자초한 전쟁 아니다" 그 외에 다음 글을 참고하는 것도 좋다. 병자호란의 원인에서, '청나라' 의 입장 - 전쟁은 오직 조선 때문이 일어난 것인가? 물론 학자들 사이에서 객관적 연구와 논쟁이 더 필요한 부분이긴 하다.
신병주 건국대 사학과 교수가 출연했던 EBS 평생 대학) 역사 이야기 - 병자호란 편과 구범진 서울대 동양사학과 교수가 2019년에 출간한 《병자호란, 홍타이지의 전쟁》도 참고하면 도움이 된다.
4. 배경[편집]
4.1. 조선과 후금(청)의 관계 악화[편집]
4.1.1. 공유덕, 경중명의 후금 투항[편집]
이때, 조선은 명나라로부터는 공유덕과 경중명을 토벌하기 위해 압록강으로 온 토벌군의 식량을, 후금으로부터는 공유덕과 경중명의 식량을 공급하라는 양립이 불가능한 요구를 받게 되고, 곧 이어진 명나라의 인조의 부모 추봉(追封) 승인으로 인해 명군의 식량만 공급하였다. 이는 결국 조선은 결정적인 순간 명나라의 편이라는 것을 후금에 각인시키게 되며, 후금에게 조선은 언젠가 다시 손봐줘야 할 나라가 되었다. 또한 공유덕, 경중명의 투항으로 확보한 해군 전력으로 인하여 후금은 조선과의 결전시 도서 지역을 손쉽게 점령할 수 있다는 자신감을 갖게 되고, 이는 이들이 조선을 강하게 압박할 수 있는 군사적 바탕이 된다.
4.1.2. 미흡한 조선의 국방 및 계속되는 후금의 세력 확장[편집]
그동안 명의 승인으로 부모의 추봉(追封) 및 세자 책봉까지 마친 인조는 본인의 숙원 사업이었던 부친의 신주의 종묘 이전(부묘)를 추진한다. 이는 신료들의 격렬한 반대를 불러일으켰고 이로 인한 국왕과 신료들 간의 극한 대립은 1635년 상반기까지 계속된다. 또한 여기에 1635년 3월 선조의 능이 파손되는 사고가 발생하고, 이에 대한 정치적 책임 공방이 수개월간 지속된다. 유교 국가였던 조선 나름으로선 중요한 문제였겠지만 후금이 확장과 위협이 차곡차곡 커지는 동안 이런 국정놀음이나 계속되면서 조선은 국방력을 강화할 수 있는 시기를 놓치고 만다.
그러는 사이, 천총제의 후금은 착실하게 세력을 확장해서 명의 일부 영토를 획득하고 1635년 8월 경에는 차하르 몽골을 공격하여 복속시키는데 성공한다. 이 과정에서 과거 원나라의 옥새까지 획득하는 행운이 겹치고, 이는 천총제 및 후금 사람들의 사기를 크게 진작시킨다. 이에 더 자신만만해진 천총제는 조선의 정치적 혼란상을 지적하고 이에 따른 대책을 훈수(라고 쓰고 간섭이라 읽음)하는 내용의 오만한 국서를 조선에 발송한다. 이는 조선에게 앞으로 후금의 정책에 거스르는 행위를 하지 말 것을 요구하는 무언의 압박이었다.
4.1.3. 대 청(후금) 외교의 파탄[편집]
그러나, 이는 명의 황제만을 황제로 인정하는 조선을 충격에 빠뜨리게 되며, 후금에 대한 매우 적대적인 여론이 조선에 형성된다. 또한, 성균관 유생들이 반발하며 후금 사신들의 목을 베라고 촉구했으며, 사신들의 동선 근처에 조선 군인들이 무기를 든 채 돌아다니는 등 사신들이 생명의 위협마저 느낄만한 상황이 연출된다. 결국, 사신단은 급히 조선을 탈출하여 후금으로 귀국하고, 이는 사실상 후금과의 외교가 끝장난 것임을 의미했다.
1636년 4월, 결국 후금의 천총한(Abkai Sure Han)은 관온인성황제(Gosin onco Hūwaliasun Enduringge Han)로 즉위하고 국호를 대청(Daicing)으로 고친다. 즉위식에 조선에서 온 회답사와 춘신사도 있었는데, 이들은 숭덕제에게 삼궤구고두례를 행하는 것을 거부한다. 사신들은 숭덕제의 배려로 목숨은 부지하였으나, 대신 조선에게 보내는 국서를 받아서 귀국해야 했다. 국서는 그간 조선이 청에게 행한 섭섭한 일들(사르후 전투 참전, 공유덕, 경중명의 귀순 방해 등)을 꾸짖음과 동시에 조선의 왕자를 볼모로 보내 앞으로의 개선 의지를 표명하지 않으면 조선을 침공하겠다는 내용을 담고 있었다.
국서를 확인한 조선에서는 이를 즉시 찢어버리지 않고 받아온 사신들을 처벌하자는 논의가 일어나는 등 더욱 청에게 강경한 목소리가 힘을 얻게 된다. 이에 2달 뒤인 6월에는 급기야 양국간의 관계 파탄의 책임을 청의 탓으로 돌리는
4.1.4. 목소리만 컸던 주전론[편집]
4.2. 조선의 준비[편집]
그러나 인조는 전략적으로 무능한 인물이었다. 삼국지연의에 심취하기라도 한 것인지 병력이 적어도 장수만 뛰어나면 전쟁은 이길 수 있다는 막장 발언을 한 바 있다. 그것도 이괄의 난을 진압한 장수들인 정충신과 남이흥이 수비전을 주장하고 청의 군사력을 이야기하며 방비를 어떻게 해야할지도 설명하는데도 받아들이기는 커녕 그들을 '홍타이지는 하찮은 자에 불과한데 나가 싸울 생각은 못하고 병력 탓만 하는 한심한 놈들'이라고 막말까지 일삼으면서 뛰어난 장수들 찾아내면 문제 없다는 망언을 떠들어대고 만다. 이때문에 정충신과 남이흥도 인조한테 기가 막혔는지 정충신 문서에도 있는 내용대로 인조를 우회해서 비판을 한다.
그런데 문제는 정작 저런 말을 한 인조가 딱히 뛰어난 장수를 찾아냈느냐 하면 그것도 아니었다. 찾아내봤자 저렇게 말단이나 전전해서는 있으나마나였다. 특히 이괄의 난으로 정예라 할 수 있는 북방 방어선의 병력이 몰살당했으며 상당수의 지휘관이 이괄의 난에 휩쓸리면서 고위 지휘관 공백도 심각했다. 이때문에 인조는 반란에 가담한 투항자들이나 생존한 지휘관들도 닥치는대로 모아서 쓰려고 했으나, 측근들에게 지휘권이 집중되느라 쓸만했던 이 지휘관들은 고작 수백 ~ 수천 단위의 병력만 통솔하게 되었다. 이런 실전 경험자들의 대다수는 전쟁 초기부터 말기까지 가장 분전했으나 병력차로 허무하게 고립되었다. 이괄의 난 당시 완전히 밀렸던 수도권 북부 방어를 위해 총융청을 설치하는 등 여러 노력을 기울였으나 결과는 신통치 않았다.
그래도 인조반정 이후 당시 조선의 수비를 담당했던 속오군을 강화하기 위한 노력이 경주되었다. 정부 주도로 조총 생산을 서둘러 각 지방에 보급했고 호패법을 시행하여 병력을 확보하려 했다. 임진왜란 때 큰 문제를 드러낸 각 지방 수령들의 떨어지는 지휘력 문제를 개선하기 위해 전문적인 무관이 평시 훈련과 전시 단위 부대 지휘를 담당하는 전담 영장제가 실시된 것도 인조부터였다.[15] 정권 보위의 핵심이라 전투에 투입되지 않는 훈련도감 대신 실질적으로 전투를 담당할 수 있는 중앙군으로 어영군, 총융군, 수어청 군대가 창설되고 강화되기 시작한 것도 이때였다. 이러한 노력들을 통해서 병자호란 직전에는 어영군 6천여 명, 총융군 2만여 명, 수어군 1만 4천여 명, 훈련 도감군 5천 명 등의 병력이 준비되었고 전국적으로 8만 - 9만 가량의 속오군이 편성되었다. 다만 총융군 병력의 다수는 속오군이었기 때문에 병력이 겹쳤다. 전국적으로 36개 - 38개의 영(營)[16]과 이를 담당하는 전문 무관인 전담영장이 설치되면서 이러한 병력에 대한 지휘 체계도 잡혔다.
하지만 광해군 치세부터 이어진 재정 문제로 인해 준비에 만전을 기하기 어려운데다 병력 증강에 서둘렀지만 사르후 전투와 이괄의 난에서 잃었던 20,000명 ~ 30,000명 가량의 정예병을 제대로 회복했다고 보기는 어려웠다.[17] 특히 이괄의 난 이후 반란을 두려워한 인조와 정치인들은 유능한 지휘관들을 국내의 반란을 감시하는 용도로서 사용했다. 남이흥도 이때 다른 지휘관들과 국내 지방을 감시하느라 본인이 군사 훈련을 제대로 하지 못했고, 유언 또한 "군사 훈련 한 번 못해본 것이 안타깝다!"였다.[18] 당시 중앙 중심의 측근 정치로 의한 군권 장악이 얼마나 진행되었는지 알 수 있는 부분이다.[19]
이괄의 난 이후에 반란을 겪은 정치가들의 전형적인 기찰 정치가 발휘되어 서인들의 측근으로 이루어진 중앙의 공무원들이 각 부대들을 다 배속받았고 정작 군 전문가인 각 지방의 지휘관들에게는 지휘권을 주지 않았던 관계로 실전에선 유능한 장군인 정충신과 남이흥[20]마저도 이괄의 난을 토벌하는 공을 세웠음에도 차별 대우를 받으며 한직을 떠돌았다.[21] 나중에는 장만과 정충신마저 병사한 이후 김자점 같은 측근들로 채워진 사령관들의 역량은 매우 부실하였기에 군 전문가들이 남긴 많은 노력들이 실전에서는 허사로 돌아간다. 교전이 벌어졌을때 최고 지휘권을 보유한 국왕과 체찰사 김류가 남한산성에 갇힌 상황에서 지휘권을 행사해야 할 도원수 김자점은 지휘권을 포기해버려서 조선군 병력은 통합된 지휘 없이 따로따로 전투를 벌이게 되어 패전을 자초하였다.
공유덕과 경중명이 병선들을 이끌고 후금에 투항함으로써 적들도 수군을 지니게 되었으나 조선 정부는 이를 간과하고 강화도로 파천만 하면 될거라는 막연한 생각에 빠져있었다. 그마저 제대로 도망도 못가서 남한산성에 갇히게 된다. 심지어 후금에서도 '너희들은 분명 강화도로 갈 것이 뻔하다' 라는 말을 전한 적도 있다. 그러나 강화도의 수비를 맡은 강화도 유수 장신은 적들이 수전에 약하다며 방비조차 제대로 하지 않았으며, 강도검찰사 김경징 역시 방어태세를 살피기는커녕 안에 틀어박혀서 이민구와 더불어 술이나 쳐마시는 등 안일한 모습을 보였다.
5. 전쟁이 일어난 원인[편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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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쟁이 촉발된 가장 큰 원인은 1636년 4월, 청나라의 천총한(Abkai Sure Han)이 칭제건원하면서 조선에 인정을 요구할 겸, 명목상 당시 죽은 인조의 왕후 인열왕후에 대한 조문도 겸할 겸 사신으로 잉울다이, 마푸타 등과 새로이 복속된 내몽골의 보르지기트 왕족들을 보낸 것이다. 이전 정묘호란 때 조선과 화약을 맺으며, 조선과 명간의 특별 관계(군신 관계)를 인정하고 조선이 청이 아닌 명과도 외교를 하는 것을 인정하고 있었으나 (자세한 건 정묘호란 문서 참조).[22] 이제는 그것을 넘어 조선에 대해 명과 청 사이에서 양다리 서지 말고 이제는 설 줄을 명확히 해라는 요구를 하는 것이었다. 그런데 이런 사절이 청태종 자신의 명의가 아닌 한급 낮은 모두가 왕자급에 불과했던 8명의 호쇼이 버일러(hošo-i Beile, 和碩 貝勒), 17명의 구사이 어전(gūsa-i ejen, 固山 牛祿),[23] 49명의 버일러 명의로 왔다는 외교적 결례도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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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묘호란 이후 광해군의 현상 유지적 기미 정책을 어느 정도 계승하여 후금의 무리한 요구까지도 대부분 받아들이곤 했던 인조 및 대신들은 이에 대해 격앙된 반응을 보였으나,[24] 정묘호란으로 인해 상대가 강하다는 것을 알고 있어 대응 문제로 시간을 끌게 되었는데, 그렇게 되자 후금 사신들은 조선이 이를 받아들이지 않는 것으로 판단하고 바로 돌아가면서 전운이 고조된다. 게다가 사신이 떠날 때 백성들이 돌팔매로 응수한 것도 사태를 키웠다. 조선의 강경한 반응에, 사정을 전혀 모르던 몽골 왕족들이 "조선과 후금은 형제의 나라이니 후금이 황제가 된다면 당연히 기뻐할 줄 알았는데, 어찌 이런 반응을 보이느냐?" 라며 이해할 수 없다는 소릴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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청나라는 만주 일대를 휩쓰면서 만주족을 비롯한 이민족 뿐만 아니라 한족을 대거 받아들이고, 몽고가 들어오면서 엄청난 속도로 인구가 불어나게 된다. 하지만 문제는 명나라와의 교역이 끊겼다는 것이다. 누르하치의 청나라는 본래 정벌과 교역을 병행하여, 부를 쌓으면서 성장했다. 하지만, 명나라와의 전쟁이 본격화되자 교역이 끊기면서 청나라는 매우 심각한 경제 상황에 처해진다. 이런 난국을 돌파하기 위해 청나라는 대군을 동원하여 산해관을 공격해 중국 본토 침공을 노렸지만, 모두 실패로 돌아갔다.[25] 1625년이 되자 흉작과 겹쳐지면서 청나라의 경제적인 혼란은 심각해지는데, 특히 식량을 포함한 생필품의 가격은 극심한 인플레이션을 겪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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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때 청나라가 얼마나 다급했는지 명나라의 원숭환과 청태종의 교신에서 볼 수 있는데, 처음에는 화의의 조건으로 막대한 예물을 요구했으나, 명에서 거부하자 점차 낮추더니 끝내는 화의에 약조한 양의 절반이라도라는 매우 굴욕적으로 물자를 애걸하게 된다. 그러나 이런 대처에도 경제 위기는 나아지지 않았고, 1627년에는 4년 전에 비해 식량값이 8배 이상 치솟게 된다. 특히 1627년의 식량 위기는 가장 격심했는데, 곡물값이 만주 신(1.8석)당 8냥, 즉 1623년의 8배로 올랐고, 사람을 잡아먹고 강도 질을 한다는 흉문이 돌았다. 새로 항복한 백성들에게 줄 양식이 없었고, 곡식 창고는 비어 있었다. 새로 이주해 온 한인들에게 줄 땅도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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게다가 1635년과 1637년에 또 식량 위기가 닥쳤다. 군대의 보급 부족은 만주의 군사력을 심각하게 약화시켰다. 말은 너무 지치고 약해져 적을 추격하지 못했다.[26] 이는 1621년부터 식량 배급을 실시하고 있던 청나라에게 엄청난 타격이었고, 요동 지방에 명군이 있더라도 적당한 곳을 치지 않으면 안되는 상황에 이르게 된다. 이미 랴오시에서 농업 생산을 늘리려는 시도는 실패했고, 부유한 지주들에게 "가난한 이웃들에게 식량을 나눠주라"고 권고해도 대체로 우이독경이었으며, 만주족은 그들이 떨어져 나갈까 봐 저가에 곡식을 팔라고 강제할 수도 없었다. 조선은 다시 한번 매력적인 목표가 되었다.[27] 이는 동시에 왜 청나라가 병자호란을 일으키면서 속전속결을 원했는지 잘 설명해주고 있다.
지금 귀국(청나라)이 공갈 협박을 하면서 요구와 책망을 해서 백성의 재산을 모두 긁어가 백성들로 하여금 살아갈 수 없게 만든다면, 민심이 반드시 떠나가고 나라가 따라서 무너질 것입니다.
-인조 14년 음력 6월 17일 조선 인조가 청나라 홍타이지에게 보낸 격문 국서
이렇게 전쟁의 씨앗이 하나하나 쌓여가는 상황에서 인조는 음력 5월 26일에 조선군에게 전쟁에 대비하라는 교서들 보냈고# 그중 1장이 돌아가던 잉울다이를 비롯한 후금 사신들의 손에 넘어간다. 여기에 더해 인조는 초대형 사고를 치는데 인조 14년 음력 6월 17일 인조는 홍타이지에게 도요토미 막부의 예를 들어가며 청나라를 협박(?)하는 격문을 홍타이지에게 보내버린다. 원래 격문은 여러 사례를 보면 알겠지만 사실상 선전포고문이나 다름없는 문서로 다시말하자면 병자호란의 선전포고는 청나라가 아니라 조선이 먼저 보낸 것이다.# 이 미친 외교 문서도 백마 산성에서 잠시 가로막혔으나 역시 후금 사신의 손에 넘어간다.
이후로도 지휘관들을 교체하는 등 준전시 체제로 돌입하나 대 후금 외교의 베테랑이던 박로가 "지금 우리에게는 후금을 막을 힘이 없어요.[28] 지금이라도 미안하다 하고 받아들여요."라고 상소를 올렸고 "압록강이 얼어붙으면 끝장"이라는 최명길의 상소도 뒤를 잇자, 결국 화해를 요청하는 사절단을 보내기로 결정한다. 인조는 강경론을 주도하며 전쟁 분위기를 조성해 놓고, 정작 최명길을 비롯한 현실론의 반박이 있자 충격을 먹고는 자신에게 고무되어 최명길을 비판하는 삼학사 등에게 "젖비린내 나는 애송이"라고 꾸짖는 등 완전히 입장을 바꿨지만, 때는 이미 늦은 후였다.
하지만 이후에도 누가 이 조서를 가지고 갈 것이냐를 두고 조정에서는 무려 7개월 동안이나 토론이 진행되었다. 그도 그럴 만한 것이, 이런 조서를 가지고 간다 해서 청나라가 쉽게 받아줄 것 같지도 않고, 사신으로 가는 사람은 목숨까지 위태로울 수 있었다. 목숨을 걸어야 하는 상황이었던지라 누구든 쉽사리 나설 수가 없었던 것이다. 다만 7개월 동안 아예 가만히 있었던 것은 아니고 토론이 진행되는 동안에도 정묘 화약 때를 언급하면서 계속 명과의 특수 관계를 인정해주고 칭제를 넘어가달라는 취지의 글을 청에 몇 번씩 보냈지만 처음부터 작정하고 일을 벌인 청나라였기에 무반응이었다. 결국 전쟁이 벌어지기 코앞까지도 이런 지지부진한 인조와 신하들의 행태는 변함 없었다.
결국 11월에 이르러서야 화친 얘기를 꺼낸 박로가 사신으로 가서 화해를 요청하기로 결정되어 출발했지만, 그땐 이미 너무 늦어버렸다. 박로가 압록강을 채 넘기도 전에, 청군이 이미 얼어붙은 압록강을 건너고 있었던 것이다.[29]
6. 전쟁의 발발과 흐름[편집]
6.1. 압록강을 건넌 청군[편집]
물론 조선도 대비를 안한게 아니라서 의주의 백마산성에서 임경업의 정예 부대가 지키고 있었고, 이후 실제로 포격을 하였으나 청나라는 이를 무시하고 신속히 남하했다.(백마산성 방어전), 이후 모든 산성을 우회해서[31] 그래서 청군은 단 4일 만에 개성에 도착했고, 이후에도 빠른 속도로 남진하였다.
이는 자칫하면 조선군에게 퇴로가 막혀 그대로 궤멸당할 수도 있는 작전이였다. 그러나 청나라도 나름 생각이 있었는데, 당시 조선군이 임진왜란의 충격을 간신히 추스리던 참에 12년 전 이괄의 난이 터져 금쪽 같은 평안도 북방 정예병 12,000명이 박살나버리는 바람에 조선은 청의 진격로에 제대로 된 군대가 아예 없었고, 이를 회복하지 못했다는 것이다.
조선의 도원수였던 김자점도 청군의 이러한 빠른 작전 속도에 놀라 급히 군대를 동원하여 이들을 저지하고자 움직이기 시작했다. 12월 13일 마푸타는 300기병의 앞에 몇 기의 선발대를 보내 길잡이를 하여 황주에 도착하였는데 이들이 황주를 지나가자 김자점은 일부 병력을 이끌고 동선역에 매복한다, 조금 후에 마푸타의 300명가량의 본군의 선발대가 동선역을 지나가자 이완은 1차 선봉대 뒤에 따라오는 본군을 치자 건의하였으나 김자점은 인조가 하사한 상방검을 들고 명을 따르지 않으면 죽이겠다고 협박한다. 이에 이완은 김응해[32]와 함께 마푸타 군을 산골짜기로 유인하였고 김자점 본군이 기습을 가하여 성과를 거두었다.
다음날 12월 14일 2차 선봉대 청군의 기병 1,000명이 황주에 도착하자 김자점은 다시 동선역에 매복하는 작전을 계획하지만 이완은 어제의 전투로 이미 적이 동선역 매복에 대해 알고 있었을 것이라 말하나 김자점은 듣지 않고 다시 한번 매복 기습 작전을 실행하고 실패한다. 그리고 마침내 황주 정방산성에 인조의 서신이 당도한다, 이에 12월 20일 김자점은 5천 전군을 인솔하고 남한산성으로 향한다. 이때까지 김자점은 작계에 따라 동원령을 내려 정방산성을 5천 병력으로 지키고 있었다. 적의 남하를 최대한 막아보려 했으나 청 선봉대들은 전투를 회피하고 서울로 급행했고 남하한 선봉대는 몇 안되니 정방산성을 지키며 적의 본군의 상황을 지켜보겠다는 것이었다. 그러나 결과적으로는 봉화를 막고 1차 선봉대를 그냥 보낸 것이 인조를 크게 당황시키고 인조가 강화도를 포기하고 남한산성으로 이동하게 되는 원인 제공을 한 셈이다.
여하튼 인조가 남한산성에 있으면서 SOS를 치자 김자점은 더 이상 정방산성에 머물 수 없었다. 전군을 이끌고 급히 남한산성으로 이동했다. 그러나 청의 도르곤이 이끄는 좌익군이 12월 23일 황주에 도착하였는데, 도르곤은 주변 주민들을 착생하여 김자점의 1만 5천(실제 5천) 병력이 선봉대를 쫓아 남하했다는 정보를 입수하고 도르곤은 곧장 일부 병력을 떼어 추격하라 명한다.
김자점은 12월 24일 당시 토산에 영을 세우고 있었는데 다음날 새벽 청군은 토산에 김자점의 군대가 있다는 것을 알아챈 후 동틀 무렵 청군은 기습 공격을 감행하여 김자점 휘하 조선군은 일부 병력을 데리고 산위로 패퇴하였고, 다른 장교들도 자신의 휘하에 수십 명씩을 이끌고 뿔뿔이 흩어진 것으로 각종 사서에는 기록되어 있다. 그러나 어영청 포수들이 진지를 고수해서 청군을 물리쳤다거나 봉산군수 조후익만이 병력을 이끌고 반격하여 공을 약간 세웠다거나 하는 등의 기록들이 있는 것으로 보아 조선군이 다시 재정비를 하여 청군에게 반격을 가해 결과론적으로 토산 전투는 조선군의 승리로 끝나게 된 것으로 보인다.
다음날 12월 26일 김자점은 군사를 풀어 흩어진 군사들을 수습, 이에 2천 군사를 수습하여 남하를 개시하고 12월 30일 양평 미원에 도착하여 이곳에서 각지 근왕병의 재규합을 시도한다.
한명기 교수에 따르면 김자점은 황해도에서 청군과 교전한 후 싸우지 않고 양평까지 남하해 인조가 항복할 때까지 나오지 않았다며 쉽게 말하면 조선의 의주에서 한양까지 이르는, 요즘으로 치면 1번 국도상의 방어에 상당히 큰 문제가 있었던 셈이라고 지적했다. 사실 임진왜란 때의 일본군이나 정묘호란 때의 후금군처럼 산성을 일일히 점령하면서 가는 경우면 칩거와 농성이 의외로 시간을 버는 방법이 되었을 수도 있지만, 이번엔 수도를 향해 어택땅을 하는 상황이었기에 오히려 청나라에게만 좋은 일이 된 것이다.[33]
급보를 접한 인조는 두 왕자(봉림대군·인평대군)를 비롯한 비빈들과 문반, 무반과 그 가족들 그리고 종묘사직의 위패들을 우선 강화도로 피난가게 하고 소현세자와 함께 뒤따라가려 하였으나 이미 청군이 한강을 도하하여 강화도에 가는 길목인 김포, 통진까지 도착하는 바람에[34], 결국 광주 남한산성으로 피신한다.
참고로 밑의 문서는 청태종이 인조와 조선 백성들에게 각각 보낸 문서다.
대청국(大淸國) 관온 인성 황제는 조선 국왕에서 조서를 내려 유시[35]한다.
우리 군대가 지난날 동쪽으로 우량하(兀良哈)를 정벌했을 때 너희 나라가 군대를 일으켜 맞아 싸웠다. 그 뒤로 또 명나라를 도와서 우리에게 해를 끼쳤다. 그러나 우리는 이웃 나라와의 우호 관계를 생각해서 이를 마음에 두지 않았다. 우리가 요동을 점령하게 되자, 너희는 다시 우리 백성들을 유인하여 명나라에 바쳤다. 짐이 진노하여 정묘년에 군사를 일으켜 너희들 벌한 것은 진실로 이 때문이다. 이로써 강대함을 믿고 약자를 업신여겨 이유없이 군대를 일으킨 것이라고 할 수 있겠는가.
너는 또 무엇 때문에 너희 변방 신하에게 글을 보내 "사세[36]가 부득이하여 무리한 요구에 얽혔지만, 이제는 정의로써 결단을 낼 때이니, 경은 여러 고을을 깨우쳐서, 충의의 인사로 하여금 지략을 다하게 하고, 용감한 자로 하여금 정벌하는 대열에 나서게 하라'라고 했느냐. 이제 짐이 몸소 대군을 통솔해서 싸우러 왔다. 너는 왜 지모있는 자로 하여금 계책을 다하게 하고, 용감한 자로 하여금 싸우는 대열에 나서게 해서 친히 일전(一戰)을 시도하지 않느냐.
짐은 결코 힘의 강대함을 믿고서 남을 침범하려는 것이 아니다. 너희가 도리어 약소한 국력으로써 우리의 변경을 소란하게 하고, 우리의 지경 안에서 인삼을 캐고 사냥을 했으니 이는 무슨 까닭인가. 그리고 짐의 백성으로 도망자가 있으면 너희가 이를 받아들여 명나라에 보냈으며, 명나라 장수 공유덕과 경중명 두 사람이 짐에게로 귀순코자 했을 때 짐의 군대가 그들을 맞이하려 하자 너희 군대가 총을 쏘며 이를 가로막아 싸운 것은 또한 무슨 까닭인가.
이번 전쟁의 원인은 실로 너희 나라에 있다. 짐의 아우와 조카 등 여러 왕들이 네게 글을 보냈으나 너는 받아들이지 않았다. 지난 정묘년에 네가 섬으로 도망가서 화친을 애걸했을 때 바로 그 왕들 앞으로 글을 보내지 않았더냐. 짐의 조카나 아우가 어찌 너만 못하단 말인가.
그리고 외번의 여러 왕들이 너에게 글을 보냈는데 너는 여전히 거절하고 이를 받아들이지 않았다. 그들은 당당한 원나라 황제의 후손인데 어찌 또 너만 못하랴. 원나라 때 조선은 공물을 바치기를 그치치 않았다. 오늘날 어찌 하루 아침에 이처럼 오만해졌단 말이냐. 그들이 보낸 글을 거절해서 받지 않은 것은 너희 혼암과 교만이 극도에 이른 것이다. 너희 조선은 요, 금, 원 세나라에 대하여 해마다 공물을 받치고 신(臣)이라 일컬었다. 예로부터 너희 나라는 신하로서 북쪽을 바라보면서 남을 섬겨 평안을 보전하지 않은 때가 있었단 말이냐.
짐이 이미 너희 나라를 아우로 대했는데도 너는 갈수록 배역[37]하여 스스로 원수를 만들고 백성들을 도탄에 몰아넣었다. 성곽을 비우고 궁궐을 버려서 처자와 헤어지고 단신으로 산성으로 도망쳐 들어가 설사 목숨을 연장하여 천년을 산들 무슨 이로움이 있겠느냐. 정묘년의 치욕을 씻는다면서 지금의 이 치욕은 어떻게 씻을 것인가. 정묘년의 치욕을 씻으려 한다면, 무엇 때문에 몸을 움츠리고 여인의 처소에 들어앉아 달게 여긴단 말인가. 네가 비록 이 성안에 몸을 숨기어 구차스럽게 살기를 바라지만, 짐이 어찌 너를 그대로 버려 두겠느냐.
짐의 내외 여러 왕과 문무의 신하들이 짐에게 황제의 칭호를 권하여 올렸다. 너는 이 말을 듣고 이르기를 "이것이 어찌 우리 군신이 차마 듣고 참을 수 있는 말인가" 했다는데 이는 또 무슨 까닭이냐. 무릇 황제의 칭호를 올리고 안올리는 것은 너에게 달려 있지 않다. 하늘이 도우면 평범한 지아비도 천자가 될 수 있고 하늘이 재앙을 내리면 천자도 한 이름없는 사내가 되는 것이니, 네가 한 말은 심히 방자하고 망령스럽다.
또한, 맹약을 어기고, 성을 수축하였으며, 우리의 사신을 접대하는 예의가 소홀했다. 또 우리의 사신이 가서 너희 나라 재상을 만났을때 계교를 써서 우리 사신을 사로 잡으려 한 것은 무슨 까닭인가. 명나라는 부모의 나라로 섬기면서 우리를 해치려 꾀했음은 또 무슨 까닭인가. 이상은 너의 죄목 중에 큰 것을 들었을 뿐이고, 그 밖의 사소한 것은 이루 열거하기 어렵다.
이제 짐이 대군을 이끌고 와서 너의 8도를 무찌르려고 하는데, 네가 부모처럼 섬기는 명나라가 장차 어떻게 너희를 구해 주는지 보고 싶다. 자식의 위급함이 경각에 달려 있는데 구원하지 않는 부모가 세상에 있겠는가. 만일 그렇지 않다면 이는 네가 스스로 무고한 백성을 물불 속으로 몰아넣은 것이니, 억조의 많은 사람들이 어찌 너를 탓하지 않으랴. 만일 할 말이 있거든 서슴지 말고 소상하게 알려라.
한 줄 요약: "지금까지 명에게 사대해놓고 우리에게만 까불었지?? 어디 너네가 그렇게 좋아하는 명나라가 도우러 오는지 안 오는지 보자꾸나!!"
인조에게 보낸 이 문서는 조선왕조실록에는 누락되어 있고, 병자록과 청나라 실록에만 실려 있다.[38] 그런데, 인조와 신료들이 이 문서를 받고 열받아서 길길이 뛰는 내용은 또 있다.
② 조선 백성들에게 보낸 포고.
"대청국(大淸國)의 관온 인성 황제(寬溫仁聖皇帝)는 조선(朝鮮)의 관리와 백성들에게 고유(誥諭)한다. 짐(朕)이 이번에 정벌하러 온 것은 원래 죽이기를 좋아하고 얻기를 탐해서가 아니다. 본래는 늘 서로 화친하려고 했는데, 그대 나라의 군신(君臣)이 먼저 불화의 단서를 야기시켰기 때문이다.
짐은 그대 나라와 그동안 털끝만큼도 원한 관계를 맺은 적이 없었다. 그대 나라가 기미년에 명나라와 서로 협력해서 군사를 일으켜 우리 나라를 해쳤다. 짐은 그래도 이웃 나라와 지내는 도리를 온전히 하려고 경솔하게 전쟁을 일으키려 하지 않았다. 그러다가 요동(遼東)을 얻고 난 뒤로 그대 나라가 다시 명나라를 도와 우리의 도망병들을 불러들여 명나라에 바치는가 하면 다시 저 사람들을 그대의 지역에 수용하여 양식을 주며 우리를 치려고 협력하여 모의하였다. 그래서 짐이 한 번 크게 노여워하였으니, 정묘년에 의로운 군사를 일으킨 것은 바로 이 때문이었다. 이때 그대 나라는 병력이 강하거나 장수가 용맹스러워 우리 군사를 물리칠 수 있는 형편이 못 되었다. 그러나 짐은 생민이 도탄에 빠진 것을 보고 끝내 교린(交隣)의 도를 생각하여 애석하게 여긴 나머지 우호를 돈독히 하고 돌아갔을 뿐이다.
그런데 그 뒤 10년 동안 그대 나라 군신은 우리를 배반하고 도망한 이들을 받아들여 명나라에 바치고, 명나라 장수가 투항해 오면 군사를 일으켜 길을 막고 끊었으며, 우리의 구원병이 저들에게 갈 때에도 그대 나라의 군사가 대적하였으니, 이는 군사를 동원하게 된 단서가 또 그대 나라에서 일어난 것이다. 그리고 명나라가 우리를 침략하기 위해 배(船)를 요구했을 때는 그대 나라가 즉시 넘겨 주면서도 짐이 배를 요구하며 명나라를 정벌하려 할 때는 번번이 인색하게 굴면서 기꺼이 내어주지 않았으니, 이는 특별히 명나라를 도와 우리를 해치려고 도모한 것이다.
그리고 우리 사신이 왕을 만나지 못하게 하여 국서(國書)를 마침내 못보게 하였다. 그런데 짐의 사신이 우연히 그대 국왕이 평안도 관찰사에게 준 밀서(密書)를 얻었는데, 거기에 ‘정묘년 변란 때에는 임시로 속박됨을 허락하였다. 그러나 이제는 정의에 입각해 결단을 내렸으니 관문(關門)을 닫고 방비책을 가다듬을 것이며 여러 고을에 효유하여 충의로운 인사들이 각기 책략(策略)을 다하게 하라.’고 하였으며, 기타 내용은 모두 세기가 어렵다.
짐이 이 때문에 특별히 의병을 일으켰는데, 그대들이 도탄에 빠지는 것은 실로 내가 원하는 바가 아니었다. 단지 그대 나라의 군신이 스스로 너희 무리에게 재앙을 만나게 했을 뿐이다. 그러나 그대들은 집에서 편히 생업을 즐길 것이요, 망령되게 스스로 도망하다가 우리 군사에게 해를 당하는 일이 일체 없도록 하라. 항거하는 자는 반드시 죽이고 순종하는 자는 반드시 받아들일 것이며 도망하는 자는 반드시 사로잡고 성 안이나 초야에서 마음을 기울여 귀순하는 자는 조금도 침해하지 않고 반드시 정중하게 대우할 것이다. 이를 그대 무리에게 유시하여 모두 알도록 하는 바이다.
1637년 1월 2일.
한 줄 요약: 난 너네 나라가 자꾸만 우리에게 시비 걸어도 자비롭게 참고 친하게 지내려 했는데, 이게 다 인조와 조선 조정 때문이다. 그러니 쓸데없이 달아나거나 항전하지 말고, 생업에나 종사해라.
청군은 식량 등의 물자를 현지에서 약탈로 조달하며 기동력을 발휘해 한성에 들이닥첬다. 현지 조달로는 한계가 있을 수밖에 없으니 청군도 상당한 모험을 벌인 것이었다.[39] 일단 내몽골은 정리했지만 배후에는 아직 상당한 세력을 유지하고 있는 명나라가 있었으며[40], 당시 만주에는 기근이 들어서 식량도 부족했다. 청이 비록 내몽골의 몽골인과 요동의 한족 인구를 흡수했다고는 하나 여전히 인구에서는 조선이 많았으며, 청은 오직 "왕"을 잡기 위해 다른 지역을 최대한 건들지도 않고 수도로 공격해왔다.
조선군으로서는 민간의 막심한 피해를 무릅쓰고 청야전술을 시행하는 것이 방어 전략의 핵심이었다. 인조가 멀리 도망치면서 근왕군을 모으고, 청군의 기세를 죽이면서 시간을 끌어서 청이 더 이상 못 버티고 물러날 수밖에 없도록 만드는 것이 조선의 전략이었다. 물론 조선이 이를 제대로 구사할 수 있었다면 청군으로서는 영락없이 여수전쟁 때의 우중문이나 여요전쟁 때의 요 성종, 소배압 꼴 나기 십상이었겠지만, 정작 조선군의 전략은 제대로 작동하지 못했다. 애당초 농성(籠城)군을 제외하고 전략적으로 기동할 수 있는 야전군이 집결해 있지 않았다는 점에서 여수전쟁, 여요전쟁 같은 전략을 제대로 운용하기 어려웠다.[41]
6.2. 눈보라가 몰아치는 남한산성[편집]
결국 조선군은 청군을 제대로 저지조차 못했고, 단 8일 만에 수도인 한성을 내주면서 임진왜란 때의 기록(29일)을 큰 차이로 경신했다., 이후 청나라가 장사꾼 행렬로 위장한 300기의 기병으로 강화도로 가는 길도 차단해버리는 바람에 강화도로 피신도 못하고, 할 수 없이 남한산성으로 피신할 수밖에 없었다. 물론 임진왜란 때 선조처럼 후방으로 도망칠 수도 있었겠지만 제대로 된 군대랑 기동력 하나 없는 상황에서 이는 청군의 포로가 되겠다고 자처하는 것밖에는 되지 않았다.[42]
그럼에도 불구하고 남한산성의 방위력은 충분하여 전쟁 초반의 공방전에선 조선군이 선전하였다. 12월 18일에는 원두표가 응모한 군사들이 출전해 6명의 청군을 죽였고, 이틀 뒤 20일에는 신경진의 군사가 출전해서 30명의 청군을 죽이며 적의 진입을 저지하였으며, 심지어 19일에 청군이 공성을 위해 서양 대포인 홍이포를 남성으로 끌고 와 쐈을 때는 되려 천자총통으로 홍이포를 저격(…)하여 청나라 포병들을 죽이고 격퇴시켜버리는 위엄을 과시하기도 했다.[43] 치밀했던 청군이 유일하게 고려하지 못한 것이라고 할 수 있었다.
하지만, 남한산성 외부에 있던 식량고에서 미처 성 안으로 식량을 운반하지 못해,[44] 남한산성 안의 식량은 쌀 1만 4천여 섬, 간장 100여 독에 불과하였다. 군사 1만 2천여 명이 먹기에는 겨우 50여 일 분. 더구나 그해 병자년 겨울은 정말 추웠기 때문에 그야말로 설상가상이었다.[45] 결국 포위된 지 45일 만에 식량 결핍과 추위로 말미암아 성내의 장병은 방어할 기력을 거의 잃게 된다.
당시 기록들을 살펴보면 남한산성의 장병들이 이미 전의를 상실한 상태였다는 것을 알 수 있다. 1월 23일 남한산성의 수비군 수백 명이 체찰부와 행궁 앞에 몰려가 척화신들을 내보내라며 시위를 벌였으며, 청군의 홍이포 포격으로 남한산성이 쑥대밭이 된 1월 26일에도 병사들이 행궁 앞에서 척화신 압송을 요구했는데, 우승지 이행원이 칼을 빼어 들고 병조의 하급 관리를 나무라자, 병사들은 "칼을 빼어 든 모습이 용맹해 보인다. 기왕이면 적진에 가서 그 대단함을 보여 달라."며 야유를 보냈다. 어떤 병사는 "척화를 주장했으면 이기는 방법도 안다는 것 아니냐. 그러니 척화신들을 적진에 묶어 보낼 것이 아니라 장수로 삼아 싸우게 하자."며 비아냥거리기도 했다. 좌의정 홍서봉이 "오늘날 군사들의 마음이 외적보다 심각하다[今日軍情, 甚於外敵]"고 할 정도였으니, 강화도 함락과 상관없이 이미 남한산성에는 항전의 여력이 남아 있지 않았던 셈이다.
장병들이 전의를 상실했음을 뒷받침해주는 사료도 있다. 영화 남한산성(영화)에서도 등장하였듯이 실제로 성첩을 지키는 병사들에게 12월 25일경부터[46] 가마니[47] 를 지급한 것으로 보인다. 또한 25일에 굶어 죽게 될 말을 잡아 병사들에게 먹일 것을 도체찰사가 제안하여 나흘 후인 1월 1일에 병사들에게 지급하였다. 그러나 아무리 그래도 가마니를 줬다 뺏는건 사람 할 짓이 아니니 그 부분은 영화적 각색.....이었으면 참 좋았겠으나 안타깝게도 정사이다. 여기까지는 좋았는데, 갑자기 사흘 후인 1월 4일에 비변사에서 사복시(말을 관리하는 부서)의 말과 역말이 굶어 죽을까 두렵다며 가마니를 다시 거두어 들일 것을 제의하고, 인조는 별 말 없이 승낙한다. 음력 1월 4일은 양력 1월 29일으로, 현대의 남한산성 기준만 해도 평균기온 영하4도 내외, 최저기온 영하 10도를 넘나드는 강추위가 기승인 때인데 "그러나 점점 기후가 포근해져 군사들이 추위에 떨거나 동상에 걸리는 일이 매우 위급한 정도가 아닙니다" 운운하니... 답이 없다. 출처: 승정원일기 55책 인조 15년 1월 4일 갑진 5번째 기사 인조실록에 따르면 그로부터 열흘 후에 "성첩을 지키던 병사들 중에 얼어 죽은 자가 나왔다."...고 한다. 적은 계속 깔짝대서 상시 긴장해야하지, 눈, 비, 그도 아니면 둘 다 내려서 옷 젖지, 얼어 죽을 날씨에 고작 가마니 따위나 줬다가 며칠만에 말 먹인답시고 뺏어가지.... 그 와중에 동료도 얼어 죽었으니 이 정도면 전의를 생각할게 아니라 정말 반란이 안 일어난게 천운이었다.
6.3. 조선의 반격[편집]
강원도 지방군의 검단산 전투, 충청도 지방군의 험천 전투같은 패배도 있었으나, 광교산 전투와 김화 전투에서는 전라도 지방군과 평안도 지방군이 값진 승리를 거두기도 하였다. 특히 광교산 전투에서는 청태종의 매부 수무루 양굴리(Sumuru Yangguli, 舒穆禄 揚古利)를 비롯한 청군의 굵직한 장수 3명을 조총으로 사살하는 전과를 거두기도 하였다. 하지만 조선군은 체계적인 병력 보충과 군수 지원이 이뤄지지 못해 전과를 세우고도 퇴각해야 했다.
제일 큰 문제점은 도원수 김자점은 양평까지 남하해 인조가 항복할 때까지 나오지 않았다는 것이다. 북변의 오랑캐와 전투 경험이 풍부한 정예병이었던 함경도의 군사와 중앙군이 주둔하고 있었으며, 강원도 근왕군의 패잔병도 합류한 양평의 군세는 1만 7천에 달했다. 하지만 이들은 다양한 지역에서 모인 군대였기에 편제가 제각각이었고 새로 도원수로 임명된 심기원의 존재로 인해서 지휘권에 대하여 잡음이 생겨 이러한 일련의 문제들을 수습하느라 김자점은 결국 군사를 움직일 수 없었고 전쟁에서 효과적인 영향력을 행사하지 못했다.
인조가 남한산성에 갇혀 있었던 탓에 근왕군은 남한산성 구원에 집착할 수밖에 없었으며,[48] 지휘권이 분산되어 있어서 통일적인 움직임도 보이지 못했다. 사실 대규모의 병력이 집결만 했어도 청군에게는 커다란 위협이 아닐 수 없었다. 청나라가 이자성을 칠 때 동원한 병력이 18만이었던 것을 고려하면 당시 청은 명을 견제할 최소한의 병력 외에는 다 끌고 내려온 것이었다.
당시 조선 속오군은 8도 속오군을 다 합쳐 8만을 넘는 수준이었고 청군이 급하게 내려오느라 다수의 부대가 건재한 상황이었다. 후방도 전혀 안정되지 않고 군대의 대부분이 그대로 수도권에 대기타고 있는 청의 상황에서 10만 가까운 조선군이 집결하기만 해도, 홍타이지는 남한산성의 포위를 오랫동안 지속하기 어려웠다. 속전속결로 한양을 포위하고 항복을 받아내기 위해 군대를 급속도로 전개했고, 보급선이 제대로 구축되지 않아서 조금이라도 공성전이 길어진다면 역으로 청군이 집결한 조선군에게 압박을 당할 가능성이 크게 증가할 수 있었기 때문.
6.4. 강화도 방어전에서 패하다.[편집]
사실 인조가 항복한 이유는 간단하다. 쌍령 전투를 비롯한 근왕군이 모조리 격퇴당함으로써 조선군이 깨진 데다, 결정적으로 최후의 거점인 강화도가 함락당했기 때문이다. 만약 쌍령에서 말아먹었더라도 강화도라도 사수했다면 대몽항쟁 때와 달리 장기전에 대한 대책도 없던 청군은 그냥 철수하거나 인조만 잡아가거나 둘 중 하나였을 것인데, 강화도가 함락됨으로써 조선 정부 전체가 완전히 궤멸될 수밖에 없는 처지에 놓이게 된 것이다. 이 상황에서 항복을 거부한다면 최소한 백제 멸망 때처럼 인조와 그 자손들은 조선의 왕좌를 지키지 못하는 건 당연하고, 심지어 살아남지 못할 가능성이 높아지는 것이었다. 그리고 이러한 상황과 남한산성의 극도로 열악한 상황으로 인해 이미 조선군 병사들은 더 이상 싸울 의욕을 잃은 상태였다. 심지어는 병사들이 척화신을 청군에게 압송하라는 시위를 벌이고, 조정에서도 '군사들의 마음이 변해서 외적보다 심각하다'라는 우려를 하고 있었다. 이래서야 항전은 더이상 불가능했다.
7. 항복, 그리고 삼전도의 굴욕[편집]
조선 국왕 신 이종[49]은 삼가 대청국 관온 인성 황제 폐하께 글을 올립니다. 신이 이달 20 일에 성지(聖旨)를 받들건대 ‘지금 그대가 외로운 성을 고달프게 지키며 짐이 절실히 책망하는 조서(詔書)를 보고 바야흐로 죄를 뉘우칠 줄 아니, 짐이 넓은 도량을 베풀어 그대가 스스로 새로와지도록 허락하고, 그대가 성에서 나와 짐을 대면하도록 명한다. 이는 한편으로는 그대가 진심으로 기뻐하며 복종하는지 확인하는 것이며, 한편으로는 그대에게 은혜를 베풀고 전국(全國)을 회복시켜줌으로써 회군한 뒤에 천하에 인애와 신의를 보이려고 함이다. 짐이 바야흐로 하늘의 돌보심을 받들어 사방을 어루만져 안정시키니, 그대의 지난날의 잘못을 용서함으로써 남조(南朝)의 본보기를 삼으려 한다. 만약 간사하게 속이는 계책으로 그대를 취한다면 천하가 크기도 한데 모두 간사하게 속여서 취할 수 있겠는가. 이는 와서 귀순하려는 길을 스스로 끊는 것이다.’고 하였습니다.
신은 성지를 받들고서부터 천지처럼 포용하고 덮어 주는 큰 덕에 더욱 감격하여 귀순하려는 마음이 가슴 속에 더욱 간절하였습니다. 그러나 신 자신을 살펴보건대 죄가 산더미처럼 쌓여 있기에, 폐하의 은혜와 신의가 분명하게 드러남을 모르는 것은 아니었지만, 조서를 내림에 황천(皇天)이 내려다 보는 듯하여 두려운 마음을 품은 채 여러 날 머뭇거리느라 앉아서 회피하고 게을리하는 죄만 쌓게 되었습니다. 이제 듣건대 폐하께서 곧 돌아가실 것이라 하는데, 만약 일찍 스스로 나아가서 용광(龍光)을 우러러 뵙지 않는다면, 조그마한 정성도 펼 수 없게 될 것이니 후회한들 무슨 소용이 있겠습니까.
다만 생각하건대 신이 바야흐로 3백 년 동안 지켜온 종사(宗社)와 수천 리의 생령(生靈)을 폐하에게 우러러 의탁하게 되었으니 정리(情理)상 실로 애처로운 점이 있습니다. 만약 혹시라도 일이 어긋난다면 차라리 칼로 자결하는 것이 나을 것입니다. 삼가 원하건대 성자(聖慈)께서는 진심에서 나오는 정성을 굽어 살피시어 조지(詔旨)를 분명하게 내려 신이 안심하고 귀순할 수 있는 길을 열어 주소서.
최명길은 인조의 굴욕을 최대한 줄이기 위해서, 곤룡포를 입을 것을 허락해줄 것과 삼배구궤두 대신에 남한산성에서 태종을 향해 절을 하는 것 정도로 의식을 대신하는 것을 제안하는 등, 많은 노력을 했다. 하지만 용골대는 완강했고, 죄인인 인조가 정문인 남문으로 나오는 것도 허락할 수 없다고 거부했다. 이날 김상헌과 정온이 자결을 시도했지만 모두 실패했다. 1월 28일 청 태종의 답변이 도착한다.
관온 인성 황제(寬溫仁聖皇帝)는 조선 국왕에게 조유(詔諭)한다. 보내온 주문(奏文)을 보건대, 20일의 조칙 내용을 갖추어 진술하고 종사(宗社)와 생령(生靈)에 대한 계책을 근심하면서 조칙의 내용을 분명히 내려 안심하고 귀순할 수 있는 길을 열어 달라고 청하였는데, 짐이 식언(食言)할까 의심하는 것인가. 그러나 짐은 본래 나의 정성을 남에게까지 적용하니, 지난번의 말을 틀림없이 실천할 뿐만 아니라 후일 유신(維新)하게 하는 데에도 함께 참여할 것이다. 그래서 지금 지난날의 죄를 모두 용서하고 규례(規例)를 상세하게 정하여 군신(君臣)이 대대로 지킬 신의(信義)로 삼는 바이다.
그대가 만약 잘못을 뉘우치고 스스로 새롭게 하여 은덕을 잊지 않고 자신을 맡기고 귀순하여 자손의 장구한 계책을 삼으려 한다면, 앞으로 명(明)나라가 준 고명(誥命)과 책인(冊印)을 헌납하고, 그들과의 수호(修好)를 끊고, 그들의 연호(年號)를 버리고, 일체의 공문서에 우리의 정삭(正朔)을 받들도록 하라. 그리고 그대는 장자(長子) 및 재일자(再一子)를 인질로 삼고, 제대신(諸大臣)은 아들이 있으면 아들을, 아들이 없으면 동생을 인질로 삼으라. 만일 그대에게 뜻하지 않은 일이 발생하면 짐이 인질로 삼은 아들을 세워 왕위를 계승하게 할 것이다.[50]
그리고 짐이 만약 명나라를 정벌하기 위해 조칙을 내리고 사신을 보내어 그대 나라의 보병(步兵)·기병(騎兵)·수군을 조발하거든, 혹은 수만 명을 기한 내에 모이도록 하여 착오가 없도록 하라. 짐이 이번에 군사를 돌려 가도(椵島)를 공격해서 취하려 하니, 그대는 배 50척을 내고 수병(水兵)·창포(槍砲)·궁전(弓箭)을 모두 스스로 준비하는 것이 마땅하다. 그리고 대군이 돌아갈 때에도 호군(犒軍)하는 예(禮)를 응당 거행해야 할 것이다.
성절(聖節)·정조(正朝)·동지(冬至) 중궁 천추(中宮千秋)·태자 천추(太子千秋) 및 경조(慶吊) 등의 일이 있으면 모두 모름지기 예를 올리고 대신 및 내관(內官)에게 명하여 표문(表文)을 받들고 오게 하라. 바치는 표문과 전문(箋文)의 정식(程式), 짐이 조칙을 내리거나 간혹 일이 있어 사신을 보내 유시를 전달할 경우 그대와 사신이 상견례(相見禮)하는 것, 혹 그대의 배신(陪臣)이 알현(謁見)하는 것 및 영접하고 전송하며 사신을 대접하는 예 등을 명나라의 구례(舊例)와 다름이 없도록 하라.
군중(軍中)의 포로들이 압록강(鴨綠江)을 건너고 나서 만약 도망하여 되돌아 오면 체포하여 본주(本主)에게 보내도록 하고, 만약 속(贖)을 바치고 돌아오려고 할 경우 본주의 편의대로 들어 주도록 하라. 우리 군사로 죽음을 각오하고 싸우다 사로잡힌 사람은 그대가 뒤에 차마 결박하여 보낼 수 없다고 말하지 말라. 내외의 제신(諸臣)과 혼인을 맺어 화호(和好)를 굳게 하도록 하라. 신구(新舊)의 성벽은 수리하거나 신축하는 것을 허락하지 않는다.
그대 나라에 있는 올량합(兀良哈) 사람들은 모두 쇄환(刷還)해야 마땅하다. 일본(日本)과의 무역은 그대가 옛날처럼 하도록 허락한다. 다만 그들의 사신을 인도하여 조회하러 오게 하라. 짐 또한 장차 사신을 저들에게 보낼 것이다. 그리고 동쪽의 올량합으로 저들에게 도피하여 살고 있는 자들과는 다시 무역하게 하지 말고 보는 대로 즉시 체포하여 보내라.
그대는 이미 죽은 목숨이었는데 짐이 다시 살아나게 하였으며, 거의 망해가는 그대의 종사(宗社)를 온전하게 하고, 이미 잃었던 그대의 처자를 완전하게 해주었다. 그대는 마땅히 국가를 다시 일으켜 준 은혜를 생각하라. 뒷날 자자손손토록 신의를 어기지 말도록 한다면 그대 나라가 영원히 안정될 것이다. 짐은 그대 나라가 되풀이해서 교활하게 속였기 때문에 이렇게 교시(敎示)하는 바이다. 숭덕(崇德) 2년 정월 28일.
세폐(歲幣)는 황금(黃金) 1백 냥(兩), 백은(白銀) 1천 냥, 수우각궁면(水牛角弓面) 2백 부(副), 표피(豹皮) 1백 장(張), 다(茶) 1천 포(包), 수달피(水㺚皮) 4백 장, 청서피(靑黍皮) 3백 장, 호초(胡椒) 10두(斗), 호요도(好腰刀) 26파(把), 소목(蘇木) 2백 근(斤), 호대지(好大紙) 1천 권(卷), 순도(順刀) 10파, 호소지(好小紙) 1천 5백 권, 오조룡석(五爪龍席) 4령(領), 각종 화석(花席) 40령, 백저포(白苧布) 2백 필(匹), 각색 면주(綿紬) 2천 필, 각색 세마포(細麻布) 4백 필, 각색 세포(細布) 1만 필, 포(布) 1천 4백 필, 쌀 1만 포(包)를 정식(定式)으로 삼는다.
인조는 음력 1월 30일 성문을 열고 왕세자와 함께 삼전도[51]에 설치한 수항단에서 청태종에게 갓에 철릭 차림으로 삼궤구고두의 항복 의식을 치른다. 후에 이것은 삼전도의 굴욕이라고 불리게 된다. 해당 문서 참조.
결국 조선은 청과 강화 조약을 체결하였으며, 조약 내용은 다음과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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명과의 국교를 끊고 청과 군신 관계를 맺을 것.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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명의 연호 대신 청의 연호를 쓸 것.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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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자, 왕자 및 대시의 자제를 청의 수도(심양)에 인질로 보낼 것.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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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기적으로 조선은 청에 사신을 파견할 것.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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양국 신하 자제들과의 통혼을 장려, 우의를 다질 것.[5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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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곽을 보수하거나 새로 짓지 말 것.[5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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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은 매년 예물을 청에 세폐로 보낼 것.
세폐의 양은 황금 100냥, 백은 1,000냥, 수우각궁면(水牛角弓面: 활을 만들 때 필요한 소의 뿔[57]) 200우, 표범 가죽 100장, 차 1,000포, 수달 가죽 400장, 청서피(靑黍皮: 다람쥐류의 가죽) 300장, 후추[58](胡椒) 10두, 호요도(好腰刀) 26자루, 단목(丹木: 소목(蘇木)이라고도 하며 붉은 물감의 원료로 주로 천을 붉게 물들일 때 쓴다.) 200근, 호대지(好大紙) 1,000권, 순도(順刀) 10자루, 호소지(好小紙) 1,500권, 오조룡석(五爪龍席; 화문석의 일종) 4령(嶺), 각종 화석 40령, 백저포(白苧布: 흰모시) 200필, 각색 면주(綿紬: 명주) 2,000필, 각색 세마포(細麻布) 400필, 각색 세포(細布 : 麻布) 10,000필, 포(布) 1,400필, 쌀 10,000포.
7.1. 결과와 영향[편집]
요구 사항을 놓고 보면, 일단 세폐가 어마어마한 수치로 늘었다. 이는 명나라에 보내던 조공품의 몇 배에 달하고 병자호란 이전에 청의 공갈 협박에 보내던 세폐의 3 배에 달하는 수치다. 거기다 예전 중화 제국이 관례로 보답하는 하사품도 별 거 안 내줘서, 그야말로 등골 빠지는 수준의 세폐를 요구했다. 임란 이후, 명 사신들이 와서 뜯어갔던 걸 고려한다 해도 청나라의 요구로 세폐가 너무 크게 늘어서 조선이 지는 부담은 엄청나게 가중되었다는 것은 변함없는 사실이다. 이는 청이 세폐를 전쟁 배상금 명목으로 생각했기 때문이기도 하다.
여기에 명나라 공격에 원정군을 자비로 파견해야 했다는 점도 엄청난 부담이였다. 실제로 조선군이 참전한 전투 중에는 나중에 항복한 명군 장수들이 조선군의 저격[59]에 피해가 컸다며 이를 가는 경우도 있었다. 거기다 청은 귀환할 때도 약탈을 해대서 치를 떠는 기록이 존재하며, 남하 당시 현지 보급으로 초토화된 평안도 방면 대신 약탈을 피했던 함경도 방면으로 귀환하는 등 계획적으로 강간, 약탈을 시도하는 모습을 보여, 북도 일대의 피해는 가중되었다.
물론 장기적으로 보면 임진왜란 이후의 명나라에 사대하던 시절보다 크게 나빠진 게 없다고 볼 수도 있다. 어마어마했던 세폐도 청이 입관한 이후 크게 줄였고, 하사품이 늘어나 이전의 정상적인 조공 외교 관계로 돌아간다. 하지만 그 사이에 뜯긴 걸 돌려주지는 않았기에 조선은 전쟁에서 진 대가를 분명히 치러야 했다.
무엇보다 자신들에게 조공을 하던 오랑캐에게 반대로, 조공 관계를 맺는 조공국[60]이 된 사실에[61] 조선인들은 정신적 충격을 받았다.
이는 가히 윤관의 여진 정벌 이후 순식간에 완안아골타의 금나라가 군신 관계를 주장한 상황 그 이상이었다. 생각해보자. 청나라 황실의 조상 몽케티무르는 소시적 태조 이성계의 부하였고, 세종대왕 때는 4군 6진의 땅을 뜯어내기도 했고, 유목민[62] = 예비 약탈자라는 상황 탓에, 약탈하러 오기 전에 작살내 놓자는 생각으로(예방전쟁) 조선군이 틈틈히 쳐들어가서 여진족의 농토에 소금을 뿌리고 건물들을 작살내는 통에 노약자들이 울부짖었다는 기록도 많다. 그러니까 조선 초의 여진족은 그냥 조선군과 명군의 동네북이였다. 그것이 이렇게 뒤집힌 것이었다.
또한 당시 청군이 끌고 간 "환향녀" 문제는 당시 조선 사회에 큰 파장을 일으켰다. 수많은 조선 여자들이 청군의 포로로 잡혀 강간과 윤간을 당했고, 성노예가 되어 청군의 씨받이로 전락하여[63] 아비도 없는 혼혈 사생아들을 잉태 양산하였으며 이들 중 상당수가 나중에 조선으로 귀환하여 시가(媤家)를 다시 찾았는데, 인조가 직접 "강간 피해는 이혼의 대상이 아니니 내치지 말라."고 명령했음에도 사대부들이 무시함으로써 조선의 평판을 크게 깎는 데 기여했다. 결국 그녀들 대부분은 비구니가 되거나 친정으로 돌아갔지만, 그렇기 못한 경우는 자살하거나 기녀로 전락되어 성매매를 하는 비참한 지경에 이르렀다.
조선은 얼마 뒤 멸망한 명나라에 비해 매우 관대한 처분을 받았다고는 하지만 꼭 그런 것은 아니었다. 청이 조선을 멸망시키지 않은 것은 최초의 전략적 목표가 명을 치기 전에 후방을 안정하게 위해서였기에, 당연히 인조는 퇴위당하지 않았던 것이다. 백성들은 포로로 끌려갔지만 여러 방법으로 돌아올 가능성이 있었다. 그나마 무엇보다 탈출한 조선인들에 대한 청나라의 강제적인 송환 요구도 초기의 일이지, 나중에는 적당히 눈감아주는 쪽으로 바뀐다.
그래도 많은 백성들이 속량되는 일이 어려웠는데 그 이유가 가관이다. 병자호란 후 조선의 권력자들이 포로로 잡혀간 본인들 가족들만 빨리 구하기 위해 은 수천냥에서 수만냥의 몸값을 치르자 조선인 포로 몸값이 천정부지로 올라갔고, 당연히 이런 돈이 없는 백성들은 포로로 끌려간 가족이 자력으로 탈출하거나 조선인 포로 주인의 자비를 바라는 수밖에 없게 되었던 것. 이에 최명길이 이러다가 힘 없는 백성들만 속환되지 못하게 된다며 청나라에 가격상한제를 제시했지만 실효는 없었는 듯.[64]
그러나 한겨울에 심양까지 끌려가는 도중에 죽은 사람들 빼고 도착한 조선인 포로들은 최대 60만 명 정도로 추정(당연하지만, 정확히 조사하고 집계한 숫자가 아닌 조선 측에서 '대충 60만 명 정도 끌려갔다고 하더라' 하는 식의 추정치이다. 과거에는 과장해서 기록하는 경우가 매우 흔했다. 애당초 당시 후금은 기근과 명나라의 경제제재로 인한 극심한 경제난과 식량난으로 60만 명이나 되는 인구를 새롭게 부양할 능력도 전혀 없는 상황이었다.[65] 정확히 말해 그 당시 후금의 상황이란 경제난과 식량난에 포로와 노예로 끌려온 한족들이 곳곳에서 반란을 일으킬 정도로 식량난이 극심한 최악의 상황이었다. 무엇보다 60만 명 이라는 저 숫자부터가 후금 측에서는 전혀 나타나지 않는 기록이다.. 실제로 구범진 서울대 동양사학과 교수 또한 전쟁에서 포로로 잡혀간 조선인이 50만~60만 명에 달했다는 통설이 터무니없다고 반박하였다. 출처)되며, 고위 왕족들이 조선 여인과 결혼을 하려 한 경우는 극소수였으며, 대부분 포로 신분으로 첩으로 끌려간 조선 여인들은 청나라인 남편이나 본처들에게 심한 학대를 받아 죽거나 장애인이 되는 경우가 많아져, 사회 문제가 되었다. 이때문에 청 태종 홍타이지가 "조선 여인을 학대하는 남편은 처벌하고, 조선인 첩을 학대한 본처는 남편 사망 시 무조건 순장하라"고 칙령을 내릴 정도였다.
명을 칠 때 조선을 끌어들이거나, 러시아가 남하하자 나선정벌에서 병력을 요청한 경우도, 청이 조선에게 호감이 있어서 그런 게 아니다. 호란 때 이미 청나라에서 조선군의 조총병에 대한 평이 높았고, 조선군을 철저하게 고기 방패로 이용한 것에 불과한 것이다.
결과적으로 이 전쟁의 승리로 청은 뒷통수가 약간 근질근질하던 후방을 단단히 다져두었고, 경제 문제를 상당 부분 해결했으며, 명을 공격하는데 모든 전력을 쏟아부을 수 있게 되었다.
여담으로 인조는 왕좌를 지킨 이후에 대대적인 처벌극을 벌여 김경징, 장신을 비롯해서 강화도에서 달아났던 자들을 모조리 잡아 죽였고, 호종하지 않은 신하들과 근왕병을 데리고 오지 않은 장수들을 적을 눈앞에 두고 임금을 버리고 달아난 죄를 물어 엄벌했다. 이때 김자점도 도원수가 되어 뭉기적거리고 있었다고 처벌 당했으나, 이후 세자빈 민회빈 강씨의 사사와 봉림대군의 세자 책봉 때 인조에게 영합함으로 최고 권신 자리를 차지한다. 그리고 호종한 신하들에겐 상을 주었으나 김상헌, 김상용 등에게는 영 좋지 않은 반응을 보였다.
양사가 합계하기를,
“강도(江都) 수호의 임무를 받은 제신(諸臣)들이 방어할 생각은 하지 않고 날이나 보내면서 노닐다가 적의 배가 강을 건너자 멀리서 바라보고 흩어져 무너진 채 각자 살려고 도망하느라 종묘와 사직 그리고 빈궁(嬪宮)과 원손(元孫)을 쓸모없는 물건처럼 버렸을 뿐 아니라 섬에 가득한 생령(生靈)들이 모두 살해되거나 약탈당하게 하였으니, 말을 하려면 기가 막힙니다. 검찰사(檢察使) 김경징(金慶徵), 부사(副使) 이민구(李敏求), 강도 유수(江都留守) 장신(張紳), 경기 수사 신경진(申景珍), 충청 수사 강진흔(姜晋昕)은 모두 율을 적용하여 죄를 정하소서.
군부(君父)가 외로운 성에 거의 2달이 되도록 포위당하여 군사는 고단하고 양식은 적어 조석을 보전할 수 없었으므로 머리를 들고 발돋움하며 구원병이 이르기만을 날마다 기다렸지만 팔도의 군사를 거느린 신하로 한 사람도 성 밑에서 예봉을 꺾고 죽기를 다투는 이가 없었으니, 군신(君臣)의 분수와 의리가 땅을 쓴 듯 없어졌습니다. 함경 감사 민성휘(閔聖徽), 전라 감사 이시방(李時昉), 경상 감사 심연(沈演), 황해 감사 이배원(李培元), 북병사 이항(李沆), 남병사 서우신(徐佑申), 전라 병사 김준룡(金俊龍), 황해 병사 이석달(李碩達), 경상 좌병사 허완(許完), 충청 병사 이의배(李義培)를 모두 잡아다 국문하여 죄를 정하소서.”
하니, 답하기를,
“김경징·이민구·장신 등의 일은 아뢴 대로 하라. 신경진·강진흔 등은 그들이 지킨 곳을 김경징에게 물은 뒤에 처치하라. 민성휘 등은 용서할 만한 도리가 없지 않으니 우선 죄를 논하지 말라. 삼남(三南)의 병사는 이미 죄를 다스리도록 하였다.”
하였다.
병자호란은 어찌 보면 인조의 삽질, 청나라의 경제난이 모두 얽혀 작용했다고 볼 수 있다.
7.2. 조선의 패배 원인[편집]
정권 보위를 위해 한 행동이었으나, 이는 지방 군사들의 훈련도가 부실해지는 결과를 초래했고 정묘호란 때 크게 문제가 된다. 더 큰 문제는 전쟁에 문외한인 조정 대신들이 끼어들었다는 점이다. 정묘호란 당시 이귀는 전략 거점인 안주를 사수해야 한다는 남이흥의 주장을 무시하고 구성을 지켜야 한다고 주장했고, 인조는 이귀의 주장을 받아들인다.[66] 그 결과 청군은 안주로 쳐내려왔고, 수 백의 병력만 데리고 긴급 파송된 남이흥은 분전 끝에 패하자 자살한다. 가뜩이나 지휘관이 부족한 상황에 이런 식으로 소모시킨 대가는 병자호란 때 도원수 김자점에 강화 유수 장신 강도검찰사 김경징이란 참사를 불러왔다.[6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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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경징이 제 역할을 다했다면, 최소한 청군의 강화도 상륙을 지연시켜 왕족 일가가 대피할 시간은 벌었을 것이다. 그리 되었다면 인조가 전의를 상실하여 항복하지도 않았을 것이다. 또한 당시 충청도, 경상도, 전라도 근왕군이 재정비하여 올라오고 있었으며, 명나라도 산동 반도에서 강화도 방어를 도울 수병을 보내려던 중이었다. 봉림대군 등이 근왕군을 소집하여 남한산성 밖에서 김자점, 심기원 등과 청군을 견제했다면, 패배할지언정 인조가 직접 무릎꿇고 절하는 등의 굴욕은 면했을지도 모른다. 김경징은 전쟁 이전부터 장신과 병권을 두고 다투며 내분을 일으켰으며, 강화도의 방비를 점검하는 본연의 임무를 망각하고 안에 틀어박혀 놀기 바빴고, 전투 중에는 육전 지휘에까지 개입하여 병사들이 죄다 흩어지게 만든 후 혼자 도망치기까지 했다. 결국 강화도는 함락되었고, 봉림대군과 세자빈 등 왕족 일가가 포로로 잡히게 되었으며, 이는 인조가 전의를 완전히 상실하는 결정적인 원인이 된다.[70][71]
7.3. 청나라의 승리 원인[편집]
또한 이괄의 난의 잔당이 청나라에게 자신들이 일으켰던 반란을 알려주고, 조선의 정보를 알려준 것도 있다. 만약 이괄의 난 이전에 침공했다면 청나라는 현지 지리조차 제대로 모르는 상태로 병자호란 때보다 더 충실한 조선군을 상대로 싸울 수 밖에 없었기 때문이다.
8. 영향과 평가[편집]
8.1. 흑역사로 치부된 전쟁[편집]
오늘날 조선 중기는 사극에서도 역덕에게도 매우 흥미로운 시기이지만, 호란에 대한 관심은 왜란과 비교조차 안될 정도로 미미한 편이다. 왜란은 전쟁 초반에는 여러 성읍들과 수도인 한성이 일본군에게 함락될 정도로 안습했을지언정 중반, 후반에는 침략 / 점령한 일본군들을 몰아내는 통쾌함이나마 있었거니와, 이순신, 권율, 곽재우, 김시민 등 수많은 명장 영웅들이 한산도 대첩, 행주 대첩, 진주성 전투, 명량 해전 등 주요 전투에서 활약해 승전을 거두며 많은 이야깃거리들을 양산했지만, 호란은 시작부터 끝날 때까지 안습의 연속이라 완전히 흑역사가 되었다.[73] 2010년 드라마 추노 정도가 그에 근접한 시대를 다루었고, 병자호란 시대를 다루려는 <추노2>가 기획되었으나 깜깜 무소식인걸 보면 엎어진 듯. 그나마 2010년대 중반 들어 드라마 화정이나 영화 남한산성 등으로 이 시기가 매체에 소개되고 있다.
흑역사이지만 임진왜란과는 다르게 여러 매체에서 의외로 침략자에 대해 비교적 관대한 평가를 하는 역사이기도 한데, 심지어 어느 매체에서는 청나라에 우호적이지 않은 집단들은 대차게 까이기까지 한다(...). 여기엔 여러 가지 이유가 있겠지만 아마도 아래와 같은 이유가 주된 이유인 것으로 보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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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대에 대한 인식의 변화. 이 당시에는 재조지은 담론에서 보듯이 '명에 대한 사대'라는 명분을 무시할 수 없었지만, 지금은 사대주의라는 말이 있을 정도로 인식이 좋지 않다. 오늘날 전근대 중화체제가 일변하여 중국을 진정으로 한국의 상국으로 보는 인식이나 중국에서 많은 문물을 받아들여야 한다고 진지하게 주장하는 사람은 거의 없고 만주족을 오랑캐로 보는 시선도 사라졌다. 이런 인식의 변화에다가 이미 농민반란이 빈발하며 몰락해가던 당시 명나라의 상황도 부각되는 만큼 전쟁에 대한 원인으로 흔히 간주되는 '명에 대한 사대'가 오늘날에는 한심하게 보일 수 밖에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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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의 전쟁 수행 및 사후 처리에서의 문제점, 인조가 자초한 일부 실책들. 후술하겠지만 인조와 조선 정부의 군 인사 정책은 너무나 한심했고, 그렇지 않아도 불리한 상황에서 이는 조선군의 약화를 초래했고 결국 패배의 원인 중 하나가 되었다. 또한 전후 인조는 이런 책임자들의 처벌에는 매우 등한시했고 끝까지 비호했다. 여기에 소현세자에 대한 홀대와 민회빈 강씨의 옥사 등 개인의 인성 부분에서도 좋은 점수를 줄 수 없는 행동을 했다. 이 때문에 집권 후반기에 대동법 개정 등 개혁의 성과가 존재함에도 불구하고 인조 정권은 악평을 받을 수 밖에 없었다. 이것은 위에 나온 각종 편견 및 고정 관념을 정당화하는 데 큰 역할을 했다.
다만 최근에는 병자호란에 대해 물론 조선의 책임이 없지는 않지만 그렇다고 순수하게 조선의 책임만 있는 건 아니고 반대로 청나라 쪽에서 조선의 반청감정을 사실상 조장한 측면도 있다는 인식이 점차 늘어나고 있다. 그리고 후술할 내용대로 "병자호란은 애초에 조선을 정복하기 위한 전쟁이 아니었고 청나라의 식량난 때문에 오히려 조선을 정복하려는 시도 자체가 청나라의 자멸행위였다." 는 주장과 "처음에는 진짜로 조선 정복이 목적이었는데 천연두 때문에 그 목적이 급히 수정되었다." 는 주장이 나오고 있어서, 병자호란 당시의 청나라를 관대하게 보는 인식도 변화가 있을 것으로 보인다.[75]
8.2. 인조를 위한 변명[편집]
사르후 전투 이후 후금의 기세가 더욱 세지자[76] 국방에 관심을 보이는 모습도 광해군 일기와 인조 실록에도 기록되어 있는데, 광해군 대에 북방에 배치한 숫자들의 병력은 상당했고, 무기들도 꾸준히 지원하고 군사 훈련도 자주 시키는 모습이 보이며, 쓸만한 무장들을 골라내 배치시키며 이 때 정충신과 남이흥 같은 유능한 장수들이 발탁되어 중용되기도 했다.[77] 또한 홍타이지를 경계하며 홍타이지를 포섭하려 시도하면서도 동시에 홍타이지와 다이샨을 이간시키려는 시도도 벌어졌고, 후금에 대한 첩보를 명하여 상세한 정보를 얻어내고 홍타이지 포섭 시도는 명나라에는 그냥 적진을 탐색하는 것으로만 알려지도록 속여넘기기도 했다.
광해군은 홍타이지가 왕위에 오르면 반드시 조선을 칠 것이라 보고 서북 방면에 병력을 집중시켰다. 도성의 병력이 3,000명 밑으로 떨여져서 문제가 될 정도였다. 이런 국경 경비 강화가 민생에는 피해를 주긴 했겠지만 후금의 침략이 유력시되는 상황에서는 불가피한 선택이다. 북방에서 수자리 서느라고 고생하는 게 본인이나 가족들이 죽고 강간당하고 노예로 끌려가는 것보단 낫다.
이런저런 이유로 이렇듯 청을 관대하게 보면서 인조 정권에 대해 비판적인 시선은 상당히 널리 퍼져 있다. 분명 당시 정부의 실책이 있었고 명에 비하면 훨씬 나은 처분을 받은 것도 사실이지만 청 역시 조선에 상당한 만행을 저질렀다. 기록만 봐도 <지천집> : 50만 명이 포로, <남한일기> : 심양으로 속환한 사람 60만 이상. <산성일기> : 심양 시장에서 팔린 사람 66만 이상, <비어고> : 60만 이상이 포로. 이런 식이다. 물론 정확히 집계를 낸 것이 아니고 전쟁 중에 신상 파악이 불가능해진 사람들도 억지로 집어넣었을 수 있기에 실제 포로는 그보다는 훨씬 적을 가능성이 높지만 그래도 엄청난 숫자다. 조선 말이 될 시기에서는 청나라가 개화파들을 탄압하기에 이른다. 청나라도 결론적으로 조선에게 잘한 것은 하나도 없었으며 만주족에 대한 한국인들의 악감정이 많이 없어진 것도 만주족의 비참한 몰락에 대한 동정심 때문일 정도로 한국과의 좋은 인연은 거의 없다시피 했다. 말갈족 시절 고구려, 발해와의 좋은 인연도 먼 고대의 일이었으니 말이다. 말이 좋아 이민족이 세운 나라 중에서 가장 발달한 나라였지 청나라도 몰락할 때는 처참하게 몰락하기에 이른다. 개화파들[78]이 반청주의자들로 구성된 것을 보면 청나라가 조선 뿐만 아니라 명나라 심지어 일본까지 동아시아 역사를 얼마나 퇴보시켰는지 제대로 보여줬다. 가령 중국의 경우는 명나라 시절 유교를 청나라 시절에는 문자의 옥을 터뜨리며 마치 이것은 원나라의 한족 문화 퇴보에 거듭날 수준이었고, 일제가 행한 문화 말살 정책과 다를 게 하나도 없었다. 뿐만 아니라 이전에 명, 청 전쟁 때는 한족들을 상당 부분 학살했다. 조선의 경우는 병자호란을 일으켜 많은 사람들을 학살했으며 전쟁으로 인해 붕당을 시작으로 향전과 같은 정치적 혼란이 야기되었다.[79] 결국 병자호란으로부터 200여년이 지난 이후 태평천국 운동과 신해혁명으로 수많은 만주족이 한족들에게 보복 및 학살을 당했고 그나마 살아남은 만주족도 청나라에 이어 만주국이 멸망하여 끝내 나라 없는 민족으로 전락하였다. 즉, 만주족들은 조상들이 청나라 초기에 조선을 대상으로 한 조공을 가장한 수탈과 한족을 대상으로 한 탄압, 무리한 정복 전쟁으로 인해 신해혁명으로 대가[80]를 치르고 청나라 멸망 이후에 주권국가를 만들지 못해 나라 없는 민족으로 전락하는 등 청나라 당시부터 해온 행적들의 결과는 만주족 자신들이 아닌 신해혁명 이후의 중국 한족들에게 이득이 되어 버린 셈이다. 차라리 병자호란에서 조선이 승리하여 그 후유증으로 청나라가 중원 정복에 실패하고 조기에 쇠퇴했다면 변수에 따라 근현대 만주에 만주족의 근현대적 독립국가가 들어서 21세기까지 이어져올 가능성도 있었겠지만 이 또한 역사에 만약은 없다.[81]
8.3. 인조의 가장 큰 실책은?[편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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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략적으로 굉장히 무능했다는 점이다. 전술했듯이 인조는 병법에 무지했다. 이괄의 난 1달 후에 청의 움직임이 심상치 않자 이를 방비하자는 논의를 하던 중 안주성[82] 병력이 너무 적어 보충해야한다는 의견에 "자고로 개쩌는 장수 한명만 있으면 아무리 병력이 적어도 전쟁에서 이겨. 그리고 오랑캐 추장이라는 놈은 x밥이니까 우리에게 필요한건 병력을 모으는게 아니라 뛰어난 장수를 찾아서 배치하는 거야."라는 황당한 말을 하게 되고, 이를 들은 정충신과 남이흥은 황당해 하며 인조에게 "아니 병력이 없으면 그게 말이 안되는 거라니까요. 저희가 아무리 모자라도 10만명만 주면 요동성도 정벌할수 있습니다."라며 대놓고 디스하기도 했다.[83] 거기에 병자호란 직전에는 사실상 선전포고인 격문을 청으로 보내버리면서 사실상 전쟁개시를 알려버렸다.
"군사가 적더라도 적절히 사용하는 것은 장수에게 달려 있다. 지킬 수 있으면 지키고 싸울 수 있으면 싸워야 하는 것이다. 싸우기만 해서도 안 되고 지키기만 해서도 안 될 것이다. 요는 임기응변하기에 달려 있다. 지키기만 하고 나가 싸우지 않으면 쳐들어오는 적을 어떻게 막을 수 있겠는가." (중략) "오랑캐의 추장은 한낱 하찮은 자일 뿐이다. 우리 나라 수천 리의 지방에 어찌 적을 제어할 만한 사람이 없으랴마는, 찾는 데에 정성스럽지 못하므로 쉽게 얻지 못할 뿐이다. 지금 장신(將臣)들이 모두 들어가 지킨다는 것으로 말하면서 출전할 생각을 갖고 있지 않으니 어찌 한심하지 않은가."
하니, 정충신이 대답하기를,
"우리 나라는 본시 군사가 없는 나라인데 아무리 훌륭한 장수가 있더라도 누구와 함께 싸울 수 있습니까. 지금 10여 만의 무리를 뽑아서 1년 ∼ 2년 동안 훈련시킨다면 요동(遼東)도 진격하여 빼앗을 수 있을 것인데, 어찌 반드시 수어하려고만 하겠습니까. 지금 창성(昌城)·의주(義州)·안주(安州)의 제진(諸鎭)이 가장 요충지인데 이들 본진에 각각 민병(民兵)을 거느려 굳게 지킬 계획을 세우도록 당부하고, 입방(入防)하는 군사에 있어서는 그 수의 다소에 따라 편의대로 수어하도록 하고, 패강(浿江) 이서에는 가을 이후에 청야(淸野)하여 대비하도록 경계하면, 적이 오더라도 그 형세가 반드시 오래 머무르지 못할 것입니다."
하고, 남이흥이 아뢰기를,
"부원수의 수하 군사는 2천이 못 되니, 어떻게 이것으로 큰 적을 대항하겠습니까. 정병 수만을 교련할 수 있다면, 신처럼 못난 자도 목숨을 바쳐 싸워서 스스로 공을 이룰 수 있을 것입니다."
하였다. 상이 이어 주찬(酒饌)과 표피(豹皮) 등의 물건을 하사하였다.
인조실록 5권, 인조 2년 3월 14일 무진 1번째 기사. 연안 부사 남이흥 안주 목사 정충신과 함께 오랑캐의 방어 등에 대해 의논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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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사 정책 면에서 야전을 경험해 본 실제 지휘관들에겐 제대로 된 군권이 없었다는 점도 한 몫 한다. 2번에 걸친 침략에서 평안도에서 이름을 남긴 장수들은 수백명만 갖고도 전쟁이 끝나거나 죽을 때까지 계속 싸웠다. 이들의 지휘력은 그나마 좋은 편이었는데, 인조의 측근들이 수만명을 갖고도 태만하거나 패배했던 행적과 매우 비교가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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단순히 병력의 질적 문제뿐만 아니라 인적 자원의 배치 또한 패전의 이유 중 하나였다. 인조는 정충신 같은 국제 첩보 인력을 국내 감시용으로 썩혀버렸고, 북방에서 유일한 군단을 이끄는 도원수에는 김자점, 최중요 거점인 강화도에는 장신과 김경징, 체찰사에는 김류 등을 배치했다. 그 결과 김자점은 북방군을 이끌고 있었음에도 남한산성의 상황을 수수방관했고, 김류는 아들인 김경징의 안전을 위해 직접 강도검찰사에 김경징을 천거해 관철시키는 등 국가의 존망이 걸린 상황에서 가족을 우선시하는 이기적인 모습을 보였으며, 장신과 김경징은 강도의 방어를 허술히 하여 청군에게 패배하는 단초를 제공했다. 이런 원균급의 간신들이 우루루 사령탑으로 편성되어 있었으니 전쟁은 처음부터 질 수밖에 없었던 건지도 모른다.
9. 여담[편집]
9.1. 임경업의 역공?[편집]
임경업 위인전에서나 임경업의 역공에 기대를 거는 호사가들은 유임을 비판하기도 하지만 현실적으로 유임의 거절 명분은 충분히 일리있는 말이었다. 우선 청나라의 수도를 공격하는 것과 같은 국가적 중대사는 임경업과 유임 정도가 독단적으로 결정할 문제가 아니었고, 게다가 당시에는 이미 인조가 남한산성에서 포위되어 있는 상황이어서 모든 조선군은 인조를 구하러 가는 게 최우선 과제였다.[87] 그리고 애초에 유임의 병력도 겨우 2,000 명이여서, 이는 심양을 치기 위해 임경업이 원했다고 전해지는 5,000명에는 한참 부족했다.
또 있다고 쳐도 훈련도 제대로 안된 군사들이 먼 지역에 원정을 하라고 하면 제대로 될 가능성이...[88]
아무리 임경업 장군과 생사고락을 함께한 400 명[89]이라도 일단 청나라의 국경을 넘는 것부터가 큰 문제이고, 설령 소규모 부대 특색을 살려 전투란 전투는 다 무시하고 청의 수도인 심양까지 가더라도 일단 심양의 황제 호위군 최소 수 백은 궁궐 경비와 수도 치안 문제로 남아있었을 것이며, 심양에 있던 청나라 백성들 또한 최소 수 만이었다. 임경업의 병사 400명이 모두 일당백 용사라 하더라도, 청 황제 근위군 수 백은 무시하더라도 최소 2만 ~ 3만에 이르는 농민군을 상대해야 될 판. 설혹 운좋게 심양을 함락했다 치더라도, 이 병력으로는 무슨 시골 동네도 아니고 일국의 수도인 심양을 수비한다는 것 자체가 불가능한 주장이였다.[90] 그나마 가망성을 높게 잡자면 심양을 비롯한 지역에는 한인들도 많을테니 이들을 선동하는데 성공하면 일단 400명에 불과한 숫자지만 높게 잡으면 수천~만 정도의 병력을 얻을 순 있다. 문제는 훈련도 못받았을 오합지졸인 이들로 뭐 어쩔수 있냐는거다. 청나라가 개병신도 아닌 이상 허접쓰레기 따위를 수도를 지키게 할리가 없으니 심양을 지키는 군대는 조선군 따위와는 격을 달리하는 정예군이니 설령 선동에 성공해 엄청난 호응을 얻어내도 잘해봐야 반신반의 수준에 불과하다. 더군다나 이들이 임경업의 지휘를 받을거라는 보장도 없다.
원래는 명나라의 군대나 김자점의 북방군과 연계해서 역침을 할 계획이였을듯 한데, 이미 위에 언급된거처럼 김자점은 애초에 청나라군과 싸울 의지가 없었고 명나라는 송산 전투에서 청나라에 패배한 타격과 국내 각종 도적들의 반란들 때문에 이에 신경을 쓸 틈이 없었다.
고로 이는 여러모로 현실성이 없는 작전이라 당연히 실현되지 못했다. 결국 임경업은 이미 화의를 맺고 철군하던 청나라 황제의 조카 요퇴의 병력 300명을 압록강 인근에서 공격하여 격파했으나, 전쟁은 이미 끝난 뒤였고 이는 오히려 양국의 분쟁을 재촉발시킬 수 있는 위험한 행동이 되고 만다.
9.2. 청은 어째서 조선을 멸망시키지 않았나?[편집]
9.2.1. 견해 1: 청나라의 경제난[편집]
그러나 청은 원이나 요나라와 달리 경제난에 시달리고 있었다. 유라시아를 제패한 몽골 제국[94]이나 화북을 장악한 요나라와 달리 장기전을 수행할 형편이 아니었다. 전략적 거점들을 제치고 오로지 수뇌부만 노리는 전략은 한반도를 침공하는 나라들이 항상 펼치는 전략이긴 하지만, 청군처럼 극단적으로 후방을 포기하면서 내려온 사례는 우문술의 30만 별동대와 소배압의 10만 대군의 침공, 단 두 차례 였었는데 결과는 참혹했다. 그럼에도 청나라는 이런 위험한 도박을 할 수 밖에 없었고, 때마침 조선 정부가 상상 이상으로 무능해서 운좋게 전쟁의 목표를 달성할 수 있었던 것이다. 즉, 멸망과 왕조 교체를 노린 침공이라면 방어선 붕괴를 통한 장기전을 해야 했는데, 청나라는 장기전을 할 여력이 없었기에 빠른 지휘부 생포를 통한 경제적 이득을 취하는 단기전을 했던 것이다. 만약 청 태종이 오판해서 인조에게 더 무리한 요구를 해서 영토 획득이나 왕의 폐위 등 괴뢰화를 하려 했다면, 당연히 인조는 거부했을 것이고 병자호란은 장기전이 되었을 것이다. 그러나 상술했듯이 청은 조선에서 장기전을 할 여력이 없었고 만약 조선에서 장기전에 빠지게 되었다면 청은 경제난이 가속화되어 파산해서 멸망했을 것이다. 즉, 병자호란 당시 청은 조선을 멸망시킬 정도의 힘을 가지지 못했기에 경제적 이득을 취하는 선에서 전쟁을 빨리 끝낼 수밖에 없었던 것이다. 설령 조선을 멸망시키는 데 성공하더라도 그 과정에서 청의 국력이 매우 격렬하게 소모되는 바람에 결과적으로는 조선이 멸망한지 얼마 안 되어 청나라도 멸망했을 것이다.[95]
이 관점에서 보면 앞에 나왔듯 병사들이 빨리 전쟁을 끝내자고 시위한 것도 이해할 수 있게 된다. 만일 청의 목적이 조선의 완전정복, 합병, 멸망이라면 이들조차도 죽기 싫어서라도 반 자포자기의 심정으로라도 계속 싸울 수 밖에 없었을 것이다. 싸우다 보면 또 극적 반전이 일어날 거라는 생각을 가질 수 있었을 것이고... 하지만 청의 목표가 그냥 조선의 항복이기만 하다면 좀 다르다. 이렇게 되니 항복해도 나라가 망하는 것도 아니고 자기네들이 죽는 것도 아니다. 이렇게 되면 병사들이 잘 싸울 수 있도록 병사들에게 자극을 줄 수 있는 무언가가 필요한데 인조는 그 점에서 실패한 것이다. 최대한 멀리 도망침으로써 병자호란을 장기화시켰다면 최소한 남한산성에서 고립되어 절망적인 상황까지 갈 일은 없었을 것이며, 그 이전에 지방 실무자들을 우대하고 김자점이 아니라 훨씬 유능한 다른 사람을 도원수로 임명하는 등 국방력 강화를 위해 최대한 노력했다면 병자호란에서 조선이 이길 가능성이 매우 높았을 것이다. 결국 병사들이 빨리 전쟁을 끝내자고 시위한 것 자체가 인조가 자초한 일인 셈이다.
9.2.2. 견해 2: 천연두가 조선을 살리다[편집]
(수송에 이용할) 큰 길의 주변의 고려인에게 헛되이 범죄를 저지르지 말라. 그들은 모두 우리의 수에 포함될 고려인이니라.
성스러운 한(홍타이지)이 어리훈 버이러 두두에게 내린 조서 中 (《만문노당(滿文老檔)》숭덕 원년 12월 13일 기사)
내 그 글(인조가 하달한 선전교서)을 보고서 너희 조선국이 확실히 변심함을 조사하며 알고…너희 조선국의 팔도를 평정하며 깊숙이 들어온 것이다…이제 나의 몸은 왕경에 머물 것이다. 여러 군대를 너희의 팔도에 나눠서 주둔케 할 것이다.
성스러운 한(홍타이지)이 안주의 관리(유림)에게 내린 조서 中 (《만문노당(滿文老檔)》숭덕 원년 12월 16일 기사)
그럼에도 홍타이지가 조선을 정복하지 않고, 인조의 항복을 받아낸 뒤 단순히 자신의 권위를 확립하는 것만으로 종전한 까닭은 무엇일까? 기존 서술에 따르면 경제적 파탄이 지적되고 있지만 《속잡록(續雜錄)》과 《병자록》 등의 사료에 따르면 청군은 한양에 입성한 뒤 경창 등을 털어 충분한 식량을 얻어 더 이상 약탈 행위를 할 필요가 없어졌다. 1637년 2월 10일에 홍타이지가 수도인 묵던(선양)으로 보낸 조서에서 긴급하지 않은 소식은 3월 16일에 통원보(通远堡: 의주성과 묵던성의 중간 지점)에 사람을 보내면, 자신이 보낸 사람이 그를 조선으로 데려오게 할 것이라고 말했고, 3월 11일까지 압록강 지류에서 강화도 상륙전에서 사용할 배를 건조하는 것을 완료하고 요하 일대의 얼음이 녹으면 개성 앞바다에 주둔할 것을 명령했다. 이 조서에 따르면 홍타이지는 강화도를 함락하고 인조의 항복을 받아내려 했음으로, 청군은 실제 농성전 기간보다 족히 30일은 더 여유롭게 남한산성을 포위하고 있을 예정이었던 것이다. 최근 청사(淸史)를 연구하는 구범진 교수(서울대 동양사학과)는 《청태종실록》숭덕 2년 7월 5일(1637년 8월 24일) 2번째 기사에서 홍타이지 자신이 직접 병자호란 때 ‘피두선귀(避痘先歸: 천연두를 피해 서둘러 귀환)했음을 언급했다면서 전쟁이 단기간만에 종전한 이유는 천연두였음을 고증했다.[97] 만약 천연두 문제가 발생하지 않았다면 남한산성은 약 3만 명 중 2만여 명이[98] 전사·아사 등으로 죽은 대릉하성 전투와 같은 결과를 초래했을지도 모른다.
즉, 청이 조선을 정복한 뒤 조선을 직접적으로 통치하지 못한다고 해도 과거 금나라가 북송을 멸망시키고 제(齊)와 대초(大楚)라는 괴뢰국을 설치한 것과 같이 괴뢰 정권을 설치하고 때가 되면 그 정권을 해체하고 완전히 복속했을지도 모르는 일이었다.
물론 이게 사실이어도 병자호란이 장기화될 경우 조선이 이길 수 있었던 건 변함없다. 천연두로 청군 병사들이 죽어나가는 상황에서 병자호란이 장기화되면 천연두로 인한 청군의 병력 손실이 더욱 격렬해졌을 것이며, 변수에 따라선 아예 황제인 홍타이지조차도 천연두로 세상을 떠나는 바람에 청군이 구심점을 잃고 혼란에 빠져 끝내 조선군에 각개격파당할 수도 있었을 것이다. 다만 실제 역사처럼 인조가 남한산성에 틀어박힌 채 어설프게 청야 전술을 시도하는 한, 이 변수 이전에 남한산성이 함락되었을 가능성이 훨씬 높다. 인조의 해당 실책 때문에 조선이 병자호란을 장기전으로 이끄는 데 실패했으니 말이다. 병자호란을 장기화시키려면 제2차 여요전쟁 당시의 현종이나 임진왜란 당시의 선조처럼 적으로부터 최대한 멀리 도망쳐야 했다.[99] 다만, 인조는 청군이 한양에 근접했을 때서야 전쟁이 발발했다는 소식을 들었기 때문에 선조처럼 도망치지 못한 것이다. 물론 애초에 자기가 먼저 선전포고를 때린 상황이었으니만큼 전쟁이 불가피한 건 스스로도 잘 알고 있었을테고, 전쟁 발발이고 뭐고 하기 전에 미리 강화도로 기어들어갈 시간 정도는 있었다는 점에서 별로 인조를 옹호할 거리는 없지만 말이다.
9.2.3. 종합[편집]
결론적으로 말하자면 청나라가 극심한 경제난에 시달린 게 원인이 되어 일어난 병자호란이, 본래는 정복전쟁으로 계획되었으나 천연두라는 변수 때문에 급하게 예방전쟁으로 바뀐 거라고 볼 수 있을 것이다.
9.3. 일본의 파병 제안[편집]
하지만 일본이 정말로 대규모 군사 원조를 해줄 생각이 있었는지는 따져봐야 될 문제. 당시 일본은 시마바라의 난과 연이은 막부 내 다이묘 숙청으로 분위기가 별로 좋지 않았기에 실제로는 일부 영주 중심으로 소수의 파병만 이뤄졌을 가능성도 높다. 또 설령 왔더라도 홍이포와 몽골 기병이 주력인 팔기군에게 쓸렸을 확률이 높다고 보는 견해도 있다. 게다가 해군의 경우 청 해군은 당시 명나라에서 투항한 한족들 덕에 일취월장하고 있었다. 영문 위키 참고. 청 말기에 가서 영국군에게 추풍낙엽처럼 털리는 바람에 정크선에 대한 인식이 안습해졌지만, 명 시기까지만 해도 강한 해군력을 자랑했다. 고로 일본군이 청과 해군으로 맞붙었다면 별 도움이 안되었을 확률이 높다.
약해진 조선군을 보고 일본군이 조선 재침공을 시전했을지 모른다는 견해도 있긴 한데, 임진왜란 이후 미쓰나리와 도쿠가와의 내전으로 연이어 많은 병력을 소모했던 일본이 조선에 임진왜란 때처럼 대규모 병력을 바로 파견할 여건이 되었을지는 의문이다. 또한 임진왜란 덕분에 힘이 빠진 도요토미 가문을 물리치고 에도 막부를 설립한 도쿠가와 가문 입장에선 내실 다지기도 급했기에 조선 정벌에 딱히 메리트를 찾기 어려웠을 것이다. 오히려 반대로 에도 막부는 조선이 망하면 다음 차례는 자기들일 것이라는 것을 비록 실패했지만 과거 여몽연합군의 일본원정으로 몸소 체감했기 때문에 정묘호란 직후부터 조청 관계에 대단히 관심을 가지고 촉각을 곤두세우고 있었다.[102]
한편, 쓰시마 섬 도주는 정묘호란 직후의 혼란을 틈타 조선과의 관계에서 실익을 챙기고자 노력했는데, 실제 조선한테서 삥을 뜯는(...) 것도 성공한다. 문제는 쓰시마의 가로(家老)이던 야나가와 시게오키가 쓰시마 도주 소오 요시나리와 뒤지게 싸우다가, 과거 쓰시마가 조선에게 쳤던 사기를 에도 막부에 까발렸다는 것이다.[103] 허나 시게오키가 막부 핵심 인사와 친한 자신의 인맥을 믿고 벌인 하극상은, 정작 조선과의 외교 관계를 중시한 막부 측에서 대 조선 외교 노하우를 지닌 소오 가문의 손을 들어주면서 시게오키가 처벌을 받는다. 이 사건은 당시 조선에서도 큰 관심을 가지고 지켜봤는데, 청과의 관계가 악화되는 과정에서 일본마저 조선과의 외교를 전담하는 쓰시마를 건드리고 있으니 불안할 수밖에... 결국 조선은 남쪽 방면의 안정을 위해 일본에 유화책을 쓸 수 밖에 없게 된다.
한편, 항왜 중 한 명이었던 김충선 장군은 임진왜란과 이괄의 난에 이어 이번에도 무려 60살이 넘은 노구를 이끌고 활약한다. 그러나 결과는 알다시피 결국 국왕의 항복이라는 사상 초유의 사태를 맞게 된다. 그리고 병자호란 직전에 조선에서 일본으로 파견됐던 조선 통신사들은, 전쟁 직후에 귀국해서 전쟁을 피했다. 그러나 돌아와 보니 종로 길거리가 폐허로 변해 있었던 것은 큰 충격. 일본에 가서 도쿠가와 이에미츠에게 극진한 대접을 받는 등 성공적인 외교를 펼치고 돌아오니 이 모양 이 꼴이 된 상황에, 통신사들은 땅을 치고 통곡했다고 한다. 다만 이들의 노력 덕택에 그나마 조선이 북부의 평안도 지역[104]만 청에 밟히는 걸로 피해가 최소화됐던 것도 사실이다. 만약 일본이 본격적으로 개입할 움직임을 보였다면 사태가 여러 면에서 예측불허로 흘러갔을 것이다.
9.4. 명나라의 반응[편집]
그나마 산둥 지방을 통해 약간의 수병을 보내려 했다고 하는데, 이마저도 풍랑 때문에 중단됐다고 한다(...). 이 약간의 수병으로 전쟁의 결과가 뒤바뀌진 않았겠지만, 그나마 강화도를 수비하는데는 조금이라도 도움이 될 수 있었을지 모른다. 적어도 아예 싸우지도 않고 도망가기 바빴던 장신이나 김경징보단 나았을테니 말이다.
어쨌거나 모문룡 건과 더불어 이 일을 겪은 조선은 명에 대한 재조지은을 충분히 했다고 자체 결론을 내리고, 속은 어떨지 몰라도 겉은 명과의 관계를 정식으로 단절한 후 본격적으로 청의 편에 선다.[105] 도망쳐온 명나라 유민들을 받아준 게 유일한 성의였지만, 이것도 상국의 은혜를 갚는다는 이유보다는 망국에 대한 동병상련 혹은 그냥 인구 수를 늘리려는 요인이 컸다. 실제 많은 명나라 유민들은 초기엔 차이나타운 비슷하게 마을을 만들어 지냈으나, 이후 세금 납부 문제 등이 터지자 숙종 때 조선 사회에 동화될 것을 강요당했고 차별을 받았다.#
10. 관련 문서[편집]
10.1. 조선 측 관련 인물[편집]
10.2. 청나라 측 관련 인물[편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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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이신기오로 도르곤(다이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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타타라 잉굴다이(용골대)
10.3. 관련 전투[편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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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화도 방어전 - 삼전도의 굴욕의 원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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갑곶진 전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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갑곶 나루 전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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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화성 전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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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선령 전투 - 김자점이 그나마 밥값했던 시기, 조선판 춘천-홍천 전투, 여담으로 여기서 동선령은 고려시대의 여몽전쟁에서 지연전에 성공한 그 동선역이다. 참고로 이때도 지연전을 했지만 그 뒤 김자점이 짱박히면서 까방권을 날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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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마산성 공방전 - 병자호란의 서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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검단산 전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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험천 전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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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한산성 공방전 - 영화 남한산성의 배경이 된 47일간의 공방전이다.
10.4. 관련 작품[편집]
10.5. 관련 서적[편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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