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정탁의 장자 이야기 - ⑮ ‘物謂之而然’의 언어철학

2022. 8. 20. 01:43잡주머니

김정탁의 장자 이야기 - ⑮ ‘物謂之而然’의 언어철학

 

문화일보 : 2016년 07월 20일(水)

 

 

그것이라 부르니 그것이 되듯… 말의 의미는 고정되지 않는다

 

 

 

▲ 일러스트 = 안은진 기자 eun0322@

 

 

  말은 단순한 바람 소리가 아니어서 말하려는 의미를 담는데 그 의미는 고정되지 않는다. 그렇다면 말은 언어로서 역할을 제대로 하는 걸까, 못하는 걸까? 사람들은 말을 어린 새가 지저귀는 소리와 다르다고 여긴다. 그렇다면 지저귀는 새 소리와 사람의 말 사이엔 구분이 있는 걸까, 없는 걸까?

  ‘장자’ 제물론에 등장하는 글로서 장자의 언어철학이 잘 드러나는 대목이다. 장자는 언어성립의 전제에 대해 근본적 의문을 제기함으로써 자신의 언어철학의 출발점으로 삼는다. 노자도 언어문제를 중시한 탓인지 ‘도덕경’ 시작부터 이를 본격적으로 거론한다. ‘도가도비상도 명가명비상명(道可道非常道 名可名非常名)’이 그것이다. 이는 언어가 완벽하지 않은 소통수단임을 일깨워주는 내용이다. 현대 언어철학의 선구자 비트겐슈타인도 이와 비슷한 생각을 한 바 있다. 그래서 언어의 ‘그림론’을 폐기하고 ‘용도론’으로 자신의 입장을 재정리했다.(이에 대한 설명은 6월 22일자 참조)

 

  말이란 우리 몸 안에서 부는 바람에 의해 만들어진다. 바람이 목을 통해 나올 때 입과 혀 모양을 달리함으로써 ‘아’ ‘이’ ‘우’ ‘에’ ‘오’ 등의 여러 소리를 내기 때문이다. 그렇지만 말은 결코 단순한 바람 소리가 아니다. 말하려는 의미를 늘 담는다. 그래서 말이 언어(言語·language)가 된다. 이 점이 새의 지저귀는 소리와 다르다. 지저귀는 새소리엔 어떤 의미가 담겨 있지 않아서이다. 적어도 인간이 새소리를 들을 때는 그러하다. 그렇지만 우리도 모르는 사이에 새가 지저귀는 소리를 통해 의미를 서로 주고받는다면 그것도 새의 언어임이 분명하다.

  그런데 언어가 지니는 의미는 고정되지 않고 항상 변화한다. 예를 들어 자비(慈悲)란 말은 원래 ‘사랑’ 자(慈)와 ‘슬플’ 비(悲)란 서로 반대되는 의미를 동시에 지녔는데 어쩐 일인지 지금은 사랑의 의미로만 사용한다. 마음이 아프더라도 쓴소리를 하며 자식을 가르쳐야 하는 비(悲)의 의미가 실종되어서이다. 또 장자는 “나를 소(牛)라 부르면 소라 하고, 나를 말(馬)이라 부르면 말이라 할 것이다”고 말한다. 언어의 의미가 고정되지 않음을 단적으로 표현한 내용이다. 또 어린아이를 ‘강아지’라 부르면 좋아하지만 ‘개새끼’라 부르면 화를 낸다. 같은 의미지만 동원된 언어에 따라 의미가 확 바뀐다.

 
 

 

  이런 점에서 장자의 언어철학은 공자의 그것과 다르다. 공자는 의미를 언어로 고정해야 한다는 입장이다. 이는 공자 정명론(正名論)에서 잘 드러난다. 공자는 “이름이 바르지 않으면 말이 순조롭지 않고, 말이 순조롭지 않으면 일이 이루어지지 않고, 일이 이루어지지 않으면 예악이 흥하지 않고, 예악이 흥하지 않으면 형벌이 적중하지 않고, 형벌이 적중하지 않으면 백성은 손과 발을 편히 두지 못한다. 고로 군자는 이름을 바로 하면 반드시 말할 수 있고, 말할 수 있으면 반드시 행할 수 있어서 자기 말에 소홀함이 없다”고 말한다(‘논어’- 자로). 이것이 정명론의 요지이다. 이처럼 이름을 바로 하는 것, 즉 의미를 고정하는 게 바로 공자식 소통의 전제이다.

 

   그렇다면 장자는 어떤 방식으로 소통하려는 걸까? 장자는 길(道)과 말(言)이 지닌 서로의 공통점을 찾아 이로부터 소통을 모색한다. 먼저 길이 어떻게 만들어지는지 생각할 필요가 있다. 이에 대한 장자의 답변은 ‘도행지이성(道行之而成)’이다. 즉 길은 사람들이 다니다 보니까 저절로 만들어진다. 그런데 사람들은 길을 좋은 길 나쁜 길 등으로 구분한다. 목적지까지 빨리 가는 게 길의 존재 이유라면 똑바른 길이 좋지만 산에 오를 때는 오솔길이 제격이다. 이처럼 길은 나름대로 역할이 있는데 빨리 가는 것만을 존재 이유로 삼기에 장자는 “도는 작은 이룸에 가려진다(道隱於小成·도은어소성)”고 말한다. 흥미로운 사실은 여기서 형이하학적 길의 의미가 형이상학적 도의 의미로 절묘하게 탈바꿈한다.

 

  말도 마찬가지이다. 사물을 그것이라 부르다 보니까 사물은 저절로 그것이 된다. 이것이 ‘물위지이연(物謂之而然)’이다. 그래서 말은 입에서 나오는 순간 무슨 의미로든 쓰인다. 그럼에도 우리는 좋은 말 나쁜 말 등으로 애써 구분한다. 예를 들어 과장되고 화려한 말은 좋은 말로, 절제되고 소박한 말은 나쁜 말이라 생각한다. 이런 생각은 언어에 대한 지나친 의존에서 비롯된다. 그런데 과장되고 화려한 말일수록 오히려 사물의 자연스러운 본성을 깨뜨릴 수 있다. 그래서 사물의 실체를 파악하는 데 애를 먹을 수 있다. 이에 장자는 “말이 무성한 언변에 가려진다(言隱於榮華·언은어영화)”고 경고한다. 무성한 언변이 곧 과장되고 화려한 표현이다.

 

  그렇다면 작은 이룸(小成)은 왜 생겨나는 걸까? 작은 지혜(小知)에 매몰되어서이다. 장자는 큰 지혜를 한한(閑閑)으로, 작은 지혜를 한한(閒閒)으로 규정한 바 있다. 큰 지혜의 한한은 여유롭고 널널한 반면 작은 지혜의 한한은 촘촘하고 꼼꼼하다. 그래서 작은 지혜는 따지고 분별하는 걸 좋아한다. 장자에 따르면 높은 데서 아래를 내려다보는 게 큰 지혜라면 낮은 데서 아래를 내려다보는 게 작은 지혜이다. 장자서 시작인 대불의 비상대불의도 이와 직접적인 관련이 있다. 대붕처럼 하늘 높이 올라 멀리서 보는 걸 큰 지혜로, 작은 새처럼 힘껏 날아봐야 느릅나무밖에 오르지 못해 가까이서 보는 걸 작은 지혜로 파악하기 때문이다.(이에 대한 설명은 4월 20일자 참조)

 

  춘추전국시대 유가(儒家)와 묵가(墨家)의 유명한 논쟁도 장자가 볼 때는 서로가 작은 지혜의 입장에 서 있어서 생겨난 것이다. 묵가가 그르다 한 걸 유가에선 옳다고 하고, 유가가 옳다 한 걸 묵가에선 그르다고 한 것이다. 이 논쟁은 너무 치열했기에 장자도 이를 언급하지 않고 넘어갈 수 없었다고 생각한다. 그런데 이 논쟁의 출발은 단순하다. 유가는 인애(仁愛)를, 묵가는 겸애(兼愛)를 주장해서이다. 물론 ‘차등이 있는 사랑(仁愛)’과 ‘차등이 없는 사랑(兼愛)’을 주장했다는 점에선 차이가 있을는지 모르지만 유가나 묵가가 모두 사랑(愛)을 강조했다는 점에선 매한가지이다. 즉 한 단계 위로 올라가면 ‘사랑’이란 개념에서 서로 만난다.

 

  그럼에도 이 논쟁이 당시의 지성계를 뒤흔들 정도로 왜 이리도 치열했을까? 의미를 언어로 고정한 결과로 보인다. 즉 유가는 인애라는 개념으로, 묵가는 겸애라는 개념으로 각자의 생각을 고정해서이다. 의미를 언어로 고정하는 순간 인애와 겸애 사이의 간격은 점점 멀어지고 만다. 그 결과 서로 간의 타협과 화해는 불가능하다. 차라리 언어로 개념화하지 않았더라면 이런 갈등은 애초부터 없었을 것이다. 그러니 언어가 소통의 도구가 아니라 소통의 장애가 된 셈이다. 이렇게 보면 생각이라는 상부구조도 언어라는 하부구조에 의해 결정되는 게 아닌가. 마르크스가 다시 살아나면 ‘자본론’이 아니라 ‘커뮤니케이션론’을 쓸 거라는 우스개 얘기도 여기서 비롯된다.

 

  이런 식으로 보면 지혜조차 말에 의해 구속된다. 그래서 작은 지혜는 작은 말(小言)에 의해서, 큰 지혜는 큰 말(大言)에 의해서 생겨나는 것이다. 그런데 장자는 큰 말은 아름다우면서 힘차며, 작은 말은 수다스럽다고 말한다. 그리고 아름다우며 힘찬 말을 하는 사람은 그 지혜가 여유롭고 널널한 반면, 수다스러운 말을 하는 사람은 그 지혜가 촘촘하고 꼼꼼하다 말한다. 그럼에도 사람들은 왜 아름다우며 힘찬 큰 말보다 수다스러운 작은 말을 선호하는 걸까? 그것은 자기 생각을 가능한 한 과장되고 화려하게 포장하려고 들어서이다. 그러다 보니 말이 많아지고 또 독해지면서 언변은 자연 무성해진다.

 

  무성한 언변이란 무엇인가? 커뮤니케이션학의 전문 용어로 설명하면 낮은 정세도(精細度·definition)가 아니라 높은 정세도를 지닌 표현이 무성한 언변이다. 그렇다면 정세도란 무엇인가? 한 번 예를 들어보자. 사랑은 인애나 겸애에 비해 정세도가 낮다. ‘애’가 인애·겸애에 비해 높은 데 있는 상위개념이어서이다. 그러니 대붕처럼 높은 데서 아래를 내려다보면 인애·겸애의 구분이 없어지고 이 두 개념이 합쳐진 ‘애’만 보인다. 이것이 정세도가 낮은 상태이다. 반면 뱁새나 어린 비둘기처럼 낮은 데서 아래를 내려다보면 ‘애’가 인애·겸애로 구분이 된다. 이것이 정세도가 높은 상태이다.

 

  버락 오바마 대통령의 연설 중에 이런 게 있다. “우리 민주당에는 두 그룹의 애국자가 있습니다. 하나는 이라크전을 찬성했던 애국자이고, 다른 하나는 이라크전을 반대했던 애국자입니다.” 이 연설은 오바마가 민주당 대통령 후보로 지명되는 데 결정적 역할을 한 것으로 유명하다. 이는 ‘애국의 방법’이란 높은 정세도보다 ‘애국’이란 낮은 정세도로 의미를 담아냈기에 호소력이 있었던 것이다. 만약 유가와 묵가의 논쟁 당시 장자가 이들을 상대로 연설할 기회가 있었더라면 분명 오바마처럼 했을 것이다. “우리 제자백가 사상가 중에는 사랑(愛)을 강조하는 두 그룹이 있습니다. 하나는 차등이 있는 사랑(仁愛)의 그룹과 다른 하나는 차등이 없는 사랑(兼愛)의 그룹입니다.”

 

  장자가 최고의 소통사상가라는 평가를 받는다면 이 대목이다. 장자는 구체적이고, 또 실감 나는 소통의 방법론을 편다. 이 점이 노자나 비트겐슈타인의 관점과 다르다. 어쩌면 장자 소통사상은 노자와 비트겐슈타인에 비해 덜 철학적이지만 더 근본적이고, 덜 이론적이지만 더 실용적이다. 또 장자의 소통론은 원효의 화쟁론(和諍論)과 비교해서도 마찬가지 평가를 받을 수 있다. 화쟁론의 핵심은 각 주장의 부분적 타당성, 즉 일리(一理)를 변별하여 수용하고, 또 각 견해의 의미 맥락을 제대로 식별하라는 것이다. 장자 소통론과 비교할 때 너무나 합리적이고, 또 규범적이다. 마치 하버마스 이론을 다시 듣는 듯하다. 그러니 실천 가능성은 그만큼 떨어진다.

 

  커뮤니케이션처럼 우리의 일상을 지배하는 행위도 없다. 그런데 커뮤니케이션학이 만들어낸 수많은 이론이 소통을 구현하는 데 그다지 소용이 없다면 커뮤니케이션학은 강단 학문 수준에서 벗어나지 못하는 게 아닌가! 그런데 이 난관을 장자가 해결해 주고 있어서 커뮤니케이션 학자로서 고맙기 짝이 없다. (문화일보 6월 22일자 24면 14회 참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