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과화상화어록(苦瓜和尙畵語錄)』의 일획론(一劃論)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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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과화상화어록(苦瓜和尙畵語錄)』 // 화가는 첫 붓에 예술혼을 적신다

 염생이  2021. 10. 25. 1:02
 

 

『고과화상화어록(苦瓜和尙畵語錄)』의 일획론(一劃論)

   우리가 '그림' 하면 삶의 여백이나 여가의 즐거움쯤으로 생각하기 쉽다. 더구나 '동양의 그림' 하면, 먼저 문인들의 여기(餘技)나 풍류(風流) 생활과 멋을 연상하기 십상이다. 그러나 명(明)나라와 청(淸)나라의 교체기인 석도(石濤)의 시대와 생애를 염두에 두면, 석도의 그림과 이론을 그렇게 인식할 수만은 없다. 석도는 나라를 잃고 방황하던 자기 현실에서 생존을 위한 몸부림으로 그림을 대했을 것이기 때문이다. 즉, '태고의 무법에서 찾은 일획론'도 그 절박한 역사 환경에서 탄생한 것이다. 석도가 한 획을 그음에 얼마나 긴장하였는지, 붓 끝이 화면에 닿는 순간은 얼마나 통쾌했을지, 마지막 붓을 놓으며 얼마나 큰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을지 짐작이 간다.

   특히 석도의 생애에 비추어, 일획론의 한 획 그음은 붓끝의 움직임이라기보다 살을 에일 듯한 날카로운 칼끝으로 다가온다. 석도는 그러면서도 단순히 시대적 갈등이나 개인적 아픔에 머물지 않았다. 자신의 시대를 겪으며 쌓은 체험을 사상적으로 승화시켜 편향되지 않은 이론을 폈다. 다시 말해서 '일획론'을 어느 시대 누구에게나 공감하는 보편타당의 예술론을 체계화해낸 것이다.

5,000여 자 18장으로 구성된 『고과화상화어록』

   석도 화론은 언제 지은 것인지 밝혀져 있지 않다. 다만 석도의 사후에 제작된 여러 판본이 전해오는데, 1728년 장완(張浣)이 출판한 『고과화상화어록(苦瓜和尙畵語錄)』(이하 『화어록』으로 표기)과 1710년 호기(胡琪)의 서문이 딸린 상해박물관 소장 『석도화보(石濤畵譜)』 두 종류를 정본으로 꼽는다. 이 문헌들은 모두 석도가 세상을 떠난 뒤 후배들이 그 어록(語錄)을 정리하였을 것으로 추정된다. 이 중 『석도화보』는 근자에 발견되어 주목을 끌었고 한때 석도화론의 가장 원본에 가까울 것으로 평가받았으나, 대체로 진품이 아닌 위본(僞本)으로 보는 견해가 우세하다. 제작 시기와 제작자가 불분명하고 오자나 탈자가 많기 때문이다.

  5천여 자로 쓰여진 총 18장의 『화어록』은 일획론으로 일관되게 전개된다.1) 일획론이라는 회화 사상을 집약한 첫 장에서부터 시작하여, "한 획에 밝으면 화법에 장애받지 않고 거리낌 없이 마음에 따른다"는 제2장, "먹과 붓이 합하여 이룬 기(氣) 일획으로 혼돈을 개벽시킨다"는 제7장, "나는 한 획으로 산천의 신기를 꿰뚫을 수 있다"는 제8장, "그림은 누구나 그릴 수 있지만 정미(精微)한 경지의 한 획은 이루기 쉽지 않다"는 제15장, 그림과 글씨 서화일체론(書畵一體論)을 편 제17장, 산천을 그리면서 필묵의 즐거움을 이룬 선인들에게서 수신(修身)의 덕목을 찾은 제18장 등에 잘 피력되어 있다. 나머지 장들은 이 일획론에 근거하여 구체적으로 회화의 창작방식과 기교론을 펼친 내용으로서 주로 자연 풍광을 어떻게 잘 그릴 것인가에 대한 산수화론(山水畵論)이 그 중심을 이룬다.

   우리나라에서도 석도의 화론에 대한 연구가 일찍부터 진행되었고, 중국 미술사 가운데 가장 많은 관심을 쏟아 왔다. 『석도화보』를 번역한 김종태의 『석도화론』이 1981년에 첫 출간되었고, 1980년대에 권덕주, 백윤수, 허영환 등이 석도 화론에 관한 연구논문을 냈다. 이어서 1990년대에 도올 김용옥의 『석도화론-스타오 그림이야기』가 출간되어 석도의 생애와 정확한 판본 고증은 물론, 어려운 용어나 표현에 친절한 해설을 곁들여 석도를 쉽게 이해시키고 대중화하는 데 기여하였다. 근래에는 박선규의 『석도는 그림을 이렇게 그리라 하였다』(2001)가 출간되었고, 한서대학교 부설 동양고전연구소에서 국역총서로 번역 발간한 『중국역대화론Ⅱ』(2004)에 조남권ㆍ김대원이 역주를 붙인 「석도 화론」이 실려 있다.

태고에는 법이 없었다

   먼 옛날 태고 시절에는 무법(無法)이었다. 태고에는 순박함이 흩어져 있지 않다가, 한번 흩어짐에 법(法)이 생겼다. 법은 어떻게 세워 졌는가? 일획(一劃)에서 비롯되었다. 일획이란 온 무리의 밑바탕이요, 만 가지 형상의 뿌리이다. 그 작용이 신에게만 드러나고 인간에게는 숨겨지니, 사람들은 그것을 알지 못한다. 일획의 법은 자기 스스로 세워진 것이다. 일획의 법이 세워짐으로써 무법이 유법(有法)을 낳고, 유법이 많은 법과 통하게 된다. 무릇 획이란 마음에 따르는 것이다.

  석도(石濤)의 화론서(畵論書)인 『화어록』은 이렇게 시작한다. 총 18장으로 구성된 『화어록』에서 석도의 회화 사상이 응축되어 있는 제1장의 첫 문단이다. 화론의 첫 문장을 "태고에는 법이 없었다"로 시작한 점부터 예사롭지 않다. 그리고 '태고무법(太古無法)'에서 일획(一劃)의 법(法)을 끌어내었기에, 석도의 화론을 '일획론'이라 일컫는다.

  여기에서 일획론의 '긋는다'는 획(劃)은 '그린다'는 화(畵)와 어원이 같다. '畵'자를 '그림 화'라 읽기도 하지만 '그을 획'으로도 읽는 것만 보아도 그러하다. 석도도 획과 화를 구분 없이 모두 '畵'로 썼다. 획(劃)자는 '畵'자에 '칼 도(刀)'변을 더하여, 자르거나 긋는다는 의미를 강조한 글자이다. '畵'의 본 글자로 상형문자에서 딴 전서체는 '画'이다. '밭 전(田)'의 사방에 획을 그어 만든 글자인 셈이다. 이를 볼 때 '그림 화'자나 '그을 획'자는 농경문화에서 밭을 일구는 일과 그 밭의 소유를 나타내는 경계 표시에서 비롯되었음을 알 수 있다. 그런데 석도의 화론은 전반적으로 쉽지가 않다. 석도가 자기 생각을 압축한 표현에서는 의미도 잘 파악되지 않는 부분이 많아 우리말로 번역하기란 더욱 어렵다. 마치 선승(禪僧)이나 고사(高士) 혹은 도인(道人)이 화두(話頭)를 던지는 것 같은 느낌을 준다.

   석도는 명(明)나라 말에 태어나 청(淸)나라 초기에 활약한 화가이다. 따라서 석도의 화론은 철저히 화가로서 체험을 바탕으로 쓴 것이다. 허나 체험론에만 그치지 않았다. 오히려 철학적으로 심오하고 우주론적인 세계를 포괄했다는 평가를 받는다. 역대 선배 화가들의 화론은 물론이려니와 중국 역사에서 전통적으로 이어온 유교ㆍ불교ㆍ도교의 고전 철학과 사상을 섭렵하여 창출한 것이기 때문이다.

메트로폴리탄 미술관 소장

마음 따라 긋는 한 획, 한 획

   그러면 석도가 『화어록』의 서두에 제시한 '일획론'이란 무엇일까? 화가가 그림을 그리는 제작과정을 통해서 일획론의 의미를 짚어보자. 화가가 그림을 그리기 이전에는, '법이 없이 태고의 흩어지지 않은 순박한 상태'인 셈이다. 그리고 무엇을 그릴까 하는 생각을 떠올린 순간이 태고의 순박함이 한 번 흩어지는 상태일 것이다. 석도는 그 시점에 바로 '무법에서 유법으로' 법(法)이 발생한다는 주장이다. 예컨대 산이면 산, 나무면 나무 등 그릴 대상을 확정했다든지 눈앞의 현실에서가 아닌 추상적이거나 관념의 세계를 떠올리는 순간에 '어떻게 그릴 것인가'하는 법, 곧 그림의 '화법'이 결정된다는 논지인 셈이다.

  그 다음 작가가 붓으로 먹물을 찍어 화면에 첫 점을 대고 선을 긋는 순간이 바로 '일획'이다. 화가로서 석도가 이 순간을 얼마나 중요하게 여겼는지, "태고의 무법이 일획에 의해 유법으로 전환된다"는 것을 화론의 첫 대목으로 삼았던 것이다.

   일획론 중에서 무엇보다도 첫 획이 가장 중요하다. 작품의 성공 여부가 첫 번째 내리는 한 획 그음에서 결정나기 때문이다. 따라서 화가는 어느 때보다 첫 획에 혼신을 다하고 정신적으로 가장 집중해야 함이 마땅하다. 무법에서 법이 탄생하는, 극적 반전과 법열(法悅)이 이는 순간이니 그야말로 붓에 자신의 예술혼을 적셔 한 획을 그어야 하지 않을까?

  텅 빈 무법의 빈 공간에 긴장이 가득 찬 일획으로 법이 탄생한 이후, 한 점과 한 선의 '여러 법'이 보태지고 마지막 일획으로 붓을 놓는다. 이때 비로소 예술 작품으로서 그림이 완성되는 것이다. 이 대장정의 시작인 첫 붓부터 마무리까지 일획이 쌓여 이루어진다는 것 또한 석도의 화론인 일획론의 주요 근간이다.

   석도의 일획론은 화(畵), 곧 그림이란 붓과 먹으로 천지만물의 형상을 묘사한다는 데서 출발한다. 이는 동아시아 회화가 모필(毛筆)과 수묵(水墨)으로 그려지는 특성과도 무관하지 않을 듯하다. 특히 동서양의 회화를 비교할 때 그 특징이 잘 드러난다. 서양의 유화(油畵)가 딱딱한 붓에 유성물감을 묻혀 그리는 데 비하여, 동아시아의 수묵화(水墨畵)는 부드러운 모필에다 수성물감을 사용한다. 동양화의 모필은 평소에는 힘이 느껴지지 않을 정도로 부드럽다가, 수묵을 적시면 낭창낭창한 탄력이 살아난다. 여기에 의도하지 않아도 우연의 효과를 보는 단색조의 번짐이나 농담(濃淡) 변화가 큰 특징 때문에, 수묵과 모필은 대상 묘사의 도구이자 동시에 작가의 정신성이나 사상을 드러내기에 적합한 재료로 인식해 옴직하다.

   서양의 유화는 차분히 따복따복 오랜 시간을 갖고 그릴 수 있는 장점을 지닌다. 이에 비하여 수묵 모필화는 속도감을 요하고, 매순간의 흥(興)이 곧 바로 붓끝에 실려 화면에 전달된다. 이런 기법의 전통이 오랫동안 쌓이면서 동양회화는 화구의 물질성보다 작가의 정신세계가 더욱 강조돼 왔음은 잘 알려진 사실이다. 문인화론(文人畵論)에서 마음속 생각을 표출한다는 뜻의 '사의(寫意)'나 마음으로 우려낸 그림이라는 '심화(心畵)'를 중시하고, 화가의 인격이나 인품이 그림 평가의 주요한 자리를 차지하고 있는 이유도 그 때문이라 할 수 있다. 여기에서 한 걸음 더 나아가 석도는 그림의 일획론을 통하여 천하의 삼라만상의 이치를 깨닫게 하고 있다. 그러면서 전통의 법보다 '지금의 나'의 개성을 강력히 주장하였다. 자신의 그림에 "나는 스스로 나의 법을 쓴다"고 화제(畵題)를 쓸 정도로 기개가 넘쳤다. 이 점이 미래에도 변치 않을 석도 화론의 미덕이다.

일획은 그 가운데 만물을 포함하는 것이다. 획은 먹을 받아들이고 먹은 붓을 받아들이며, 붓은 팔을 받아들이고 팔은 마음을 받아들인다.

   이와 같이 『화어록』의 제4장에서 다룬 심화(心畵)내지 심획(心劃) 이론은 "필묵은 곧 성정을 표출하는 것"이라는 입장을 취하고 있다. 이 또한 지금이나 미래의 화가들에게 던지는 주옥같은 메시지이며, 석도의 화론이 지니는 영원성이라 할 수 있겠다. 또한 석도의 일획론에는 고대부터 전하는 중국의 전통화론과 철학사상이 녹아 있다. 일획론은 유교의 주역(周易) 사상과 불교의 화엄이나 선종(禪宗)사상 그리고 도교의 노자(老子)와 장자(莊子) 사상에서 그 연원을 찾는다. 그러하기에 화가로서 자신의 직접적인 체험과 중국역사에 쌓여온 철학 사상을 통합한 석도를 중국 회화론의 위대한 성자(聖者)로 꼽는 데 누구도 주저하지 않는다.

혼란기 개성주의 회화사조와 일획론

   혼돈스런 난세(亂世)가 성인이나 위대한 인물을 낳는다고 했던가. 석도는 그러한 시대를 한껏 풍미했다. 1642년에 명나라 왕실의 후손으로 태어나 1707년에 세상을 떠났으니 명(明)나라에서 청(淸)나라로 왕조가 교체되던 시절, 오랑캐라 인식하던 만주족의 지배를 받게 되면서 한족의 자존심이 무너진 때였다. 이처럼 어려운 현실에서 석도는 당대를 대표하는 화가 겸 이론가의 거장으로 우뚝 선 것이다.

   석도 화론이 '먼 옛날 태고에 법이 없었다'는 말로 시작하는 것으로 보아, 석도는 정말 통이 크고 속 깊은 사람이었던 것 같다. 그런데다 한 순간에 점획을 찍고 긋는 데서 출발한 '일획론'은 어떤 절대성을 연상시킨다. 한편 나라 잃은 망국의 시기에 황실의 후예면서 집안까지 역적으로 내몰린 탓에 유랑 화가처럼 살았던 점을 떠올리면, 석도의 그림과 화론이 새롭게 읽혀진다.

   우리가 '그림' 하면 삶의 여백이나 여가의 즐거움쯤으로 생각하기 쉽다. 더구나 '동양의 그림' 하면, 먼저 문인들의 여기(餘技)나 풍류(風流) 생활과 멋을 연상하기 십상이다. 그러나 명(明)나라와 청(淸)나라의 교체기인 석도의 시대와 생애를 염두에 두면, 석도의 그림과 이론을 그렇게 인식할 수만은 없다. 명나라 왕실의 후예였던 석도는 나라를 잃고 방황하던 자기 현실에서 생존을 위한 몸부림으로 그림을 대했을 것이기 때문이다. 석도가 머리 속에 그린 '아주 먼 옛날 태고의 무법에서 찾은 일획론'도 그 절박한 역사 환경에서 탄생한 것이다. 석도가 한 획을 그음에 얼마나 긴장하였는지, 붓 끝이 화면에 닿는 순간은 얼마나 통쾌했을지, 그리고 마지막 붓을 놓으며 얼마나 큰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을지 짐작이 간다.

   특히 석도의 생애에 비추어, 일획론의 한 획 그음은 붓끝의 움직임이라기보다 살을 에일 듯한 날카로운 칼끝으로 다가온다. 석도는 그러면서도 단순히 시대적 갈등이나 개인적 아픔에 머물지 않았다. 자신의 시대를 겪으며 쌓은 체험을 사상적으로 승화시켜 편향되지 않은 이론을 폈다. 다시 말해서 '일획론'을 어느 시대 누구에게나 공감하는 보편타당의 예술론을 체계화해낸 것이다.

   석도가 활동한 청나라 초기의 화단은 크게 복고적 모방과 혁신을 각각 내세운 정통파(正統派)와 개성파 - 혹은 혁신파라고도 한다 - 의 두 유파가 대립해 있었다. 정통파에는 사왕오운(四王吳惲)4)이 있었고, 개성파 화가들로는 석도와 주답(朱耷)을 비롯하여 양주에서 살면서 활동한 8명의 괴짜 화가 양주팔괴(楊州八怪))가 있었다. 옛 전통을 중시하여 옛 화풍을 모방하는 의고주의(擬古主義)에 빠진 정통파에 대응해서 출현한 것이 개성파였다. 이들은 기존의 정형을 부수고 광기어린 행동과 독특한 화법으로 그림을 그려 괴상하다는 '괴(怪)'를 강조했다.

소치 허련의 「방석도산수도(倣石濤山水圖)」(호암미술관 소장)

   개성파가 당대 문예의 중심이었음은 '지금과 나'를 강조한 점에서 찾을 수 있다. 전통을 벗어나고자 하는 개성파의 혁신적인 주장은 예술의 본질이기도 하려니와, 정통파보다 근대성 또는 근대 예술의 이념에 가깝기 때문이다. 그리고 이 개성파 예술론과 회화의 경향은 우리 조선 후기 화단에 영향을 미치기도 하였다.

   석도 그림을 모방하여 그린 사례로 소치 허련의 「방석도산수도(倣石濤山水圖)」(호암미술관 소장)가 전한다. 이 산수도에는 "소치가 석도의 그림을 임모(臨摸)하였으나 석도와 또 다른 화격을 이룬 가작이다"라는 스승인 추사 김정희의 화평(畵評)이 딸려 있다. 소치의 이 산수도는 김정희의 칭찬처럼 석도 화풍이라기보다 마른 붓질로 깔끔하게 그려 김정희 취향의 문인화풍을 보여준다.

   황산의 풍경을 비롯해서 양자강 하류의 강남 산수를 주로 그렸던 석도의 그림은 웅장한 형상들이 가득하고 엷은 먹인 담묵(淡墨)과 맑은 색으로 우려낸 담채(淡彩)의 신선한 맛이 일품이다. 하지만 거대하면서 감각적인 석도 그림에서는 막상 그가 주장한 일획론이 피부에 와 닿지 않는다. 오히려 동시대의 선배 화가인 팔대산인의 새나 물고기, 나무그림에서 석도의 일획론을 연상케 하는 간결하고 빠른 필묵법을 찾아볼 수 있어 흥미롭다.

   주답은 자신의 호 '팔대산인(八大山人)'을 두 글자씩 합쳐서 '통곡한다'는 뜻의 '哭之' 혹은 '웃는다'는 '笑之'라고 싸인하기도 하고 물고기나 새 그림에서 눈을 일부러 퀭한 모양으로 그림으로써 나라 잃은 한족의 심성과 시대 감정을 투영한 것으로 평가된다. 아무튼 명나라 황실의 후예로 승려 생활, 강남 지방의 유랑 등 비슷한 삶의 흔적을 남긴 두 화가는 청나라 초기 화단의 쌍벽이다. 회화 예술론에는 석도가 있고, 아무래도 그림에서는 석도가 팔대산인에게 앞자리를 양보해야 할 것이다.

지금의 예술론으로도 손색없어

   석도는 수묵 모필로 그림에 대한 순간의 흥취나 생각, 곧 정신성을 붓끝에 실어 내야 하는 동아시아 회화의 기법적 특징을 일획론으로 압축했다. 화가라면 누구나 그림을 그릴 때, 첫 붓에 온 신경을 쓰고 한 붓, 한 붓에 영혼을 실어 낸다는 생각을 갖지 않은 이가 없을 터이다. 이처럼 화가의 일상이고 보편적인 일에서 일획론의 이론화를 시도했다는 것이 석도의 남다른 점이다. 그런 탓에 '태고무법'으로 시작하는 석도의 화론을 한껏 칭송하게 한다.

  또한 그 '일획'의 의미를 무법에서 유법으로, 무위(無爲)에서 유위(有爲)로, 변화없는 무화(無化)에서 반응이 시작하는 응화(應化)로, 그리고 혼돈에서 창조의 개벽으로 전환케 하는 포인트로 잡았다. 그런데 석도는 일획에 의한 화법(畵法)의 탄생을 없음에서 있음으로 변화한 것이라기보다는 없음(無)과 있음(有)의 통합으로 여겼고, 인위적이거나 억지로 되는 일이 아님을 강조했다. 화가가 붓 끝에 마음을 실어 생명을 불어넣는 이 과정을 스스로의 타고남, 곧 무위자연(無爲自然)에 빗대었다는 점을 통해서 석도가 지향하는 예술철학을 엿볼 수 있다.

  이러한 석도의 화론은 중국의 역대 주요 화론, 곧 남북조시대 고개지(顧愷之)의 "그리고자 하는 형상에다 정신을 쏟아낸다"는 '이형사신(以形寫神)'과 사혁(謝赫)의 "대상의 생생한 표현으로 얻어진다"는 '기운생동(氣韻生動)', 북송(北宋) 때 형호(荊浩)의 대상을 쏙 빼닮게 그리는 '형사(形似)'와 대상에서 받은 느낌을 우선시하여 마음으로 그린다는 '사의(寫意)'의 조화, 명나라 때 서권기(書卷氣)ㆍ문자향(文字香)7)을 강조한 동기창(董其昌)의 '남종북종화론(南宗北宗畵論)' 등에 이은 것이다. 석도는 이들을 유불선(儒佛仙)의 전통 사상과 통합하여 '일획론'이라는 중국의 으뜸 화론을 완성하였다고 볼 수 있겠다. 마치 공자(孔子)가 "내 도(道)는 하나로 통한다"고 설파했듯이 말이다.

   석도의 화론은 지금도 그의 후예인 현대 중국 화가들은 물론이려니와, 한국과 일본에서도 최고의 화론으로 인기를 누리고 있다. 뿐만 아니라 미국이나 유럽에서도 일찍부터 석도 화론에 관심을 쏟는 학자와 화가들이 적지 않았다. 불가의 선(禪)이나 노장의 도(道)와 관련하여 석도의 '일획론'이 서구의 예술가나 지식인들을 그 만큼 매료시킨 결과이다. 특히 최근 유럽에 부는 속도감 넘치는 단순한 필치의 선화(禪畵)8) 풍의 회화가 유행하고 있음에 비추어 볼 때, 일획론은 지금의 회화 경향에 대한 예술론으로도 손색이 없음을 알 수 있다. 세계미술사에서 석도와 석도 화론의 위상을 다시 재음미하게 하는 대목이다.

더 생각해볼 문제들

1. 화가, 가능한대로 수묵 화가를 만나 본다.

"왜 그림을 그리는가"부터 "무엇을 어떻게 그리는가"까지 화가들의 예술관과 창작 방법을 들어 보며 석도의 화론과 비교해 본다.

2. 화가의 그림 그리는 과정을 살펴본다.

화가가 대상을 미세하게 관찰하고 한 획, 한 획 혼을 실어 작업하는 모습은 세상을 어떻게 바라보고 표현해야 할지 눈 뜨게 해 줄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