도봉산 바위 글씨길

2022. 8. 22. 04:45산 이야기

5일차 도봉산 바위 글씨길

 설렘  2021. 8. 5. 16:57

 

도봉서원 터를 중심으로 도봉산 계곡에는 17세기에서 구한말까지 선비들이 자신들의 학문적 소신 등을 글이나 시구로 새겨 놓은 바위가 있다. 도봉서원과 각석군[ 道峰書院-刻石群 ]은 2009년 10월 22일 서울특별시 기념물 제28호로 지정되었다. 지정 면적은 2만 557.4㎡이며, 서울특별시에서 관리를 맡고 있다.

도봉산 초입에서는 어른 키보다 큰 바위에 노론의 태두 우암 송시열(1607~1689)이 쓴 ‘도봉동문’(道峯洞門)이 우선 눈에 띈다. 

충북 괴산 화양구곡에 있는 송시열의 글 ‘화양동문’이 있다. 도봉동문은 화양동문 각석군과 비교해 전혀 뒤떨어지지 않는다고 평가받고 있다. 여기에서 동문(洞門)은 이상향의 의미다. 

도봉동 영역을 설정하는 기준으로 잡는 이 각석은 우암이 62세 때 경기 양주 선산에 왔다가 개성 송도의 박연폭포를 보고 돌아오는 길에 도봉산에서 하룻밤 머물렀다 가면서 남겨 놓은 글이다. 당시 도봉서원의 선비들이 글을 적어 달라고 해 가장 큰 붓으로 쓴 것으로 파악하고 있다. 행서체(行書體)로 활달하면서도 장중한 느낌을 준다. 

각석군은 분포 위치상 도봉서원을 중심으로 도봉 계곡 초입, 도봉서원 앞 계곡, 도봉서원의 위쪽 계곡으로 분류해 찾아볼 수 있다. 

도봉계곡 초입과 도봉서원 앞 계곡에는 우암(尤庵) 송시열(宋時烈)[1607~1689], 한수재(寒水齋) 권상하(權尙夏)[1641~1721], 동춘당(同春堂) 송준길(宋浚吉)[1606~1672], 한천(寒泉) 이재(李縡)[1680~1746], 곡운(谷雲) 김수증(金壽增)[1624~1701] 등 서자(書者)와 대략의 제작 시기를 가늠할 수 있는 각석들도 있으나, 그 외의 다른 각석들의 제작자와 제작 시기는 정확하게 파악할 수가 없다. 

도봉서원을 중심으로 도봉 계곡의 바위들에 새겨진 각석들은 도봉 계곡의 각석들은 경치의 아름다움을 표현하는 것과 성리학적 이상을 표현하는 각자(刻字)들로 나뉜다. 그 수가 많을 뿐만 아니라, 송시열, 권상하, 송준길, 김수증 등 17세기에 활동하였던 유학자들의 작품들이 다수 남아 있다. 이들이 바위의 새긴 내용들은 선진 유학의 주요한 경전과 주돈이, 주희 등 송학을 성립시킨 주요한 인물들의 어록을 출전으로 삼고 있으며 이러한 경향은 조광조를 배향한 도봉서원과 관련이 있는 것으로 판단된다. 또한 이들 각석군을 살펴보면 각기 초서(草書), 행서(行書), 해서(楷書), 팔분(八分) 등 다양한 서체들이 구사되어 있으며, 각각의 작품들은 세련되고 유려한 한편으로 강건하고 고졸한 풍취를 지니는 등 비교적 폭넓은 시각적 미감을 보여 주고 있다. 글씨가 분포하고 있는 곳이 도봉서원을 중심으로 하고 있다는 점에서 도봉서원에 드나들던 수많은 문인·학자들이 자연 속에서 심신을 단련하며, 자연의 아름다움과 학문적인 성취, 도학 정치의 실현 등을 다짐하기 위해 바위에 글을 새겼다 하겠다.

1. 마애 각석 1군(도봉계곡 초입 각석군)

   마애 각석 1군은 ‘도봉동문’에서 시작한다. 도봉동문은 계곡으로 들어가지 않아도 볼 수 있다. 그러나 다음 바위글씨들은 계곡으로 들어가야 한다. 이곳부터는 각석의 훼손을 막기 위해서인지 공단의 허락을 받아야 들어갈 수 있게 만들어 두었다. 그래서인지 도봉서원 앞 계곡은 울타리로 둘러 있다. 그 울타리를 통해 계곡으로 들어가야 비로소 ‘필동암’, ‘춘주담’을 비롯하여, ‘제일동천’, ‘동중즉선경 동구시도원’을 글씨가 새겨진 바위를 만날 수 있다. 

또한 ‘연하롱처동문개 지향운산물외벽 만장봉고단굴심 화옹견추자천석 정축구월도봉초수’ 외에 ‘연단굴’, ‘만석대’ 등의 글씨가 새겨진 각석이 각각 위치해 있다.

 

2. 마애 각석 2군(도봉 서원 앞 계곡 각석군)

   2군은 도봉서원 앞 계곡에 위치에 있는 각석들로서 가장 아래쪽에 ‘제월광풍갱별전 요장현송답잔원 화양노부서’가 있다. 이 각석은 송시열이 1668년(현종 9) 도봉서원을 참배했을 때 남긴 글씨로 알려져 있다. 내용은 ‘백록동서원강회(白鹿洞書院講會)’에서 주자가 학생들에게 유학의 도학적 지향과 학문하는 자세에 대해 권고한 두 편의 시에서 한 구씩 발췌한 것이다. 바위에 가로로 뉘어져 새겼으며, 서체는 초서체(草書體)이다.

‘무우대 한수옹’는 한수재 권상하의 친필 초서체로 『논어(論語)』 선진(先進) 편의 글귀이다. ‘염락정파 수사진원 춘옹서’는 동춘당 송준길이 쓴 것이다. ‘염락(濂洛)’은 각각 염계(濂溪)와 낙양(洛陽)을 의미하는 것으로 이곳은 주돈이(周敦頤)와 그의 제자 정호(程顥), 정이(程頤) 형제가 각기 강학하던 곳이다. 또한 ‘수사(洙泗)’는 공자가 강학했던 곳을 일컫는 말이다. 자연석에 세로 두 줄의 행서체(行書體)로 새겼으며, 글자 각각의 자형(字形)은 정방형에 가깝다.

‘광풍재월 천옹서’는 한천 이재의 글씨로 알려져 있다. 광풍재월은 주돈이의 인품을 표현한 구절이자 또한 세상이 잘 다스려진 상태를 의미한다. 넓고 평평한 자연석 위에 장방형의 구획을 짜고 그 안에 글씨를 세로로 새겼다. ‘고산앙지’는 김수증이 쓴 글씨이다.

‘고산앙지’는 『시경(詩經)』에 나오는 문구로 ‘높은 산처럼 우러러 사모한다’는 의미이다. 도봉서원에서 향사하고 있는 조광조(趙光祖)[1482~1519]의 덕을 우러른다는 의미이다. 해서체(楷書體)이나 팔분체(八分體)가 가미되어 있어 고졸(古拙)한 느낌을 준다. 이 글귀들은 도봉서원에 드나들던 송시열 등 당대 학자들의 성리학적 인식을 반영한 것이라 할 수 있다.

 

3. 마애 각석 3군(도봉서원 위쪽의 각석군)

   3군은 도봉서원 위쪽에 있는 각석들인데 서로 다소간의 거리를 두고 위치해 있다. ‘복호동천’, ‘서광폭’, ‘화락정’ 등의 마애 각석이 산재되어 있는데 1군의 일부와 2군의 각석들과는 달리 제작가나 제작 시기를 가늠할 수 있는 기록이 남아 있지 않다. ‘문사동’은 스승을 모시어 맞아들이는 곳이란 의미로 스승과 제자가 함께 학문을 논하던 곳이었음을 말해 준다. 초서체(草書體)로, 운필이 비교적 부드러우며 동세가 적극적으로 표현되어 있지 않아 전체적으로 단정한 느낌을 준다.

 

출처 :  https://blog.naver.com/hkii0302/222458114248