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2. 8. 30. 23:57ㆍ경전 이야기
가. 대장경 1. 삼장 삼장(三藏, Tripitaka)은 불교의 경전을 경, 율, 논의 3가지로 분류하고 이를 합쳐서 부르는 것이다. 대체적으로 경은 깨달은 자로서의 고타마 붓다의 말씀 또는 가르침, 논은 고타마 붓다 이후의 제자들이 경과 율에 대한 주석 등을, 율은 특히 계율에 대한 내용이다. 하지만 흔히 이 세가지를 모두 합쳐 경이라고 하기도 한다. 산스크리트어의 pitaka(한문 번역: 藏)는 '둥우리, 모음집'을 뜻하며, 고타마 붓다의 제자들이 고타마 붓다의 직접적 혹은 간접적 가르침을 모아서 그 성격에 따라 세가지 모음집으로 편성하여 'Tripitaka'(삼장(三藏))라 불렀다. 세친의 《섭대승론석》에 따르면 장(藏)은 '능히 포섭한다[能攝]'는 뜻으로, '마땅히 알아야 할 모든 의미[義]를 포섭한다'는 뜻이라고 말하고 있다.[1][2] 고타마 붓다의 말씀을 아함(阿含, Āgama)이라 일컬으며, 이를 직접 받아 적은 글들을 경(經, Sūtra)이라 부르고 있다. 이 경전을 고타마 붓다의 제자들이 후에 해설한 글들을 논(論, Sāstra)이라는 이름 하에 모아 편성하였다. 그리고 불교의 여러 가지 규칙과 의식 등에 관해 설명한 글 들은 율(律, Vinaya)이라고 부르고 있다. 흔히 대장경, 일체경이라는 낱말은 위의 세가지 불교의 경전을 총칭하는데 쓰이고 있다. 경장경장(經藏)은 Suttapitaka의 한문 역어이다.
율장율장(律藏)은 Vinayapitaka의 한문 역어이다.
논장1) 경장 경장(經藏, 팔리어: suttapiṭaka 또는 Sutta Pitaka 숫타 피타카, 산스크리트어: सूत्र पिटक Sūtra Piṭaka 수트라 피타카)은 경(經: Sutra)을 집대성한 것이다. 경은 고타마 붓다가 가르친 교법(敎法)을 가리킨다.[1] 옛날에는 경장이 9분교(九分敎), 12부경(十二部經)으로 분류되었다고 하는데, 일반적으로는 4아함(四阿含), 5부(五部)로 조직되어 있다. 12부경4아함[편집]5부[편집]5부(五部, 팔리어: Nikāya, 니까야)는 남방상좌부(南方上座部)를 통해 현재까지 전해지고 있는 팔리어로 된 다음의 다섯 경전군을 통칭한다.
2) 율장 율장(律藏, 팔리어: Vinaya Piṭaka 비나야 피타카)은 불교 교단의 계율을 집대성한 것이다. 계율은 고타마 붓다의 활동 당시부터 필요에 따라 제정되어 왔는데, 오늘날 전해지고 율장들은 불교 교단이 여러 부파로 분열된 후 특정 부파들에 의하여 전승된 것들이다. 종류율장은 여러 부파에서 수십 종이 전하고 있다.[1] 대표적인 율장은 다음과 같다.팔리 율장[편집]남방상좌부(南方上座部)의 율장.
한역된 부파의 율장[편집]다음 5부율(五部律)이 대표적이다.
역사적으로는 설일체유부가 먼저 분파하였지만 《사분율》과 《오분율》이 팔리 율장과 더 유사하므로 목록의 앞에 둔다. 법장부(法藏部)의 《사분율(四分律)》은 중국과 일본에서 율종(律宗)이라는 종파를 이루게 하였다. 서장 율장과 산스크리트어 역본[편집]산스크리트어 성전은 팔리어 성전이나 대장경과 달리 체계적으로 정리되어있지 않다. 또 주로 대승불교의 영향을 받은 중국 한역본의 번역한 것으로 알려져있다. 당나라 때 한역된 근본설일체유부의 《근본설일체유부비나야》(유부신율)의 티베트어 역본 9부(部)와 산크리트어 역 비구니계본 1부가 남아있다.[2]이외에 역시 설일체유부에 속하는 《바라제목차경》 또는 《십송경》으로 추정되는 산크리트어 역본과, 건도에 관한 산스크리트어 파편 등이 남아있다.[3]대승 율장[편집]아래 3가지가 대표적이다.내용적 구성[편집]율장은 내용적으로는 다음의 3부로 구성되어 있다.
주석서[편집]대표적인 5대 논서는 다음과 같다. 이를 오론(五論)이라고 하며, 4대광률과 합하여 사율오론(四律五論)이라고도 부른다.
3) 논장 논장(論藏)은 삼장(三藏)의 하나이다. 각 부파는 각기 경(經)과 율(律)을 중심으로 하는 성전이나 규범을 집대성한 다음 이들의 이해를 깊게 하기 위하여 교설과 어의(語義) 등에 주석이나 해설을 달고 그 중에서 자파의 교리학설을 체계화하는 데 노력하였다. 그 중에서 율에 대한 해설은 율장 속에 포함되어 전하여졌으나 경, 즉 교법에 대한 연구해석(對法)은 독립적으로 논(論:아비달마)이라 불리었고 그것이 집대성되어 논장이 된 것이다. 이 논장도 경율 2장(經律二藏)과 마찬가지로 여러 부파마다 자파의 독립적인 교리체계로서 각각 소유하였던 것으로 생각되는데 오늘날까지 그것이 완전한 형태로 전해지고 있는 것은 팔리어로 된 남방상좌부(南方上座部)의 7론(七論)과, 같은 상좌부 계통의 설일체유부(說一體有部)의 한역 7론(七論)이다. 유부(有部)는 부파불교의 사상을 가장 뚜렷하게 나타낸 대표적 존재이며 그 교리의 전거(典據)가 된 것은 기원전 2세기에 가다연니자(迦多衍尼子)가 지은 <발지론(發智論)>이다. 이것은 그 후에 나온 6론(六論)과 함께 '6족발지(六足發智)'라고 불리었으며, 이들 7론에는 다른 부파의 교리 인용과 그에 대한 비판을 가하고 있다. 팔리 논장 7론[편집]팔리 삼장에 포함된 논장은 이 7론이 전부이다. 이외의 논서는 주석서나 장외로 취급한다.
설일체유부 6론과 7론[편집]
2. 티베트 대장경 티베트 대장경은 티베트어로 씌어진 불교 경전의 총칭이다. 7세기에 티베트에 전해진 불교는 민족 종교인 본교와 융합되어 라마교라고 하는 독특한 종교를 성립시켰다. 그때까지 문자나 문법서가 없었던 티베트에서는 산스크리트어에 의거하여 티베트 문자와 문법서를 창작하고, 이에 의하여 7세기 경부터 번역을 시작하여 9세기에는 대부분을 출판하였으며, 그 후의 것을 합하여 13세기에 처음으로 《티베트 대장경》 (나르탄 고판)을 개판(開版)하였고, 그 후에도 나르탄 신판 · 데르게판 · 초네판 · 프나카판 · 북경판 · 라사판 등 여러 차례에 걸쳐 출판이 거듭되었다. 인도에서는 불교가 쇠망하였기 때문에 인도 후기 불교의 불경과 논서들은 티베트역으로 남아 있는 것이 많으며, 불교 연구에 귀중한 자료를 제공해 주고 있다. 특히 티베트역은 충실한 직역이기 때문에 티베트역으로부터 산스크리트어 원전(原典)을 복원(復元)시킬 수 있는 자료 구실도 하고 있다. 3. 팔리어 대장경 팔리어 대장경 또는 팔리어 경전은 팔리어로 씌어진 불교 경전의 총칭이다.[1] 팔리(Pali)에는 성전이라는 뜻도 있어서, 팔리라는 말 자체가 팔리 삼장(Tipiṭaka)을 의미하기도 한다. 고전적으로 팔리 문헌은 팔리, 즉 삼장과 앗타까타(aṭṭhakathā), 즉 주석서 둘로 분류하기도 했다.[2] 팔리어는 본래 서부 인도의 평민계층에서 쓰던 속어(俗語)이다. 고타마 붓다는 상류계층의 언어인 산스크리트어(범어)가 아니라 이 평민계층의 언어인 팔리어로 설법하였다. 고타마 붓다의 입멸(入滅) 후 원시불교의 교단이 서부 인도로 확대됨에 따라 성전 기록용 언어가 되었다.[1] 불교는 기원전 3세기경 아쇼카왕 시대에 마힌다에 의해 스리랑카에 전해졌다. 이후에 이 전통은 미얀마 · 타이 · 캄보디아 등 동남아시아의 여러 지역으로 퍼져 이른바 남방 불교를 형성하였다. 이 계통을 상좌부(上座部)라고 하며 부파 불교중에서 삼장(三藏)을 완전히 보존하고 있는 것은 팔리 삼장(三藏, tipitaka)뿐이다.[1] 또한 삼장 이외에도 시대에 따라서 많은 강요서(綱要書) · 주석서 · 사서(史書) 등이 팔리어로 만들어졌고, 이들을 일괄하여 장외(藏外)라고 부른다.[1] 4. 한역 대장경 한역대장경(漢譯大藏經)은 후한(後漢)에서 원대(元代)에 이르는 약 1천년 동안에 걸쳐 산스크리트 원전(原典)으로부터, 때로는 서역(西域)의 여러 지방에서 번역된 경전이나 논서(論書)를 중심으로, 혹은 중국 불교인의 손으로 이루어진 주석서나 연구서 및 위경류(僞經類)를 포함해서 편집한 것으로서 대소승의 경률론(經律論)이 모두 포함되어 있고 분량도 가장 많으며 불교 연구에 있어서 불가결의 자료일 뿐만 아니라 인도불교와는 다른 독자적인 발전을 한 중국불교 연구의 근본자료이기도 하다. 그것들은 남북조(南北朝) · 수(隋) · 당(唐)의 각 시대를 통해 모두 수집되어 여러 차례에 걸쳐 경전목록(經典目錄)이 작성되었으나 경률론의 삼장이 일괄적으로 개판(開版)된 것은 971년 송(宋)의 태조에 의해 이루어진 송판(宋版)의 제1회 《촉판대장경(蜀版大藏經)》이 최초이며, 그 후 중국 · 한국 · 일본 등지에서 20여 회에 걸쳐 개판이 이루어져 그때마다 증광(增廣)되었다. 한역대장경은 중국 · 한국 · 일본에서 불교 경전 또는 논서로 여겨지는 불교 문헌을 통칭한다. 1) 고려대장경 《고려 대장경(高麗大藏經)》은 고려에서 간행한 대장경을 이르며 다음과 같다. 이때 주의할 점은 각각의 대장경과 대장경판이 다른 물건, 곧 다른 문화재라는 점이다. 고려대장경은 고려 때 외침을 막고자 간행한 불경이다. 간행 횟수는 대장경 2회와 속대장경 1회까지 합하여 총 3회이다. 고구려를 기억하려는 의미로 정하여진 국호, 고려는 남조(통일 신라)의 전통을 거의 그대로 이은 귀족 문화를 가졌으며, 북방의 북조(발해)의 성립과 별도로, 후삼국을 군사적 대립과 복속으로 통일하였기 때문에, 문반과 무반의 차이를 문화의 특징으로 규정하지 않았다는 것이 맞다고 보아야 할 것이다. 불교에 바탕한 각 호족들과 그 사병 집단들의 느슨한 연합 구조가 유지되던 가운데, 거란과 몽고에서 시작된 북방의 유목 부족 국가들 간의 통일 전쟁으로 침입을 받게 되면서, 부처에 대한 믿음으로 나라의 안전을 꾀하려 하였다. 이것이 방대한 대장경의 간행 사업으로 나타났는데, 이는 제1차 대장경 간행, 제2차 대장경 간행으로 크게 둘로 나눌 수 있다. 1963년~1965년 해인사에서 1,339권으로 전판을 영인하였다.[1] 팔만대장경 합천 해인사 대장경판(陜川 海印寺 大藏經板) 또는 팔만대장경(八萬大藏經), 고려대장경(高麗大藏經, Tripitaka Koreana 트리피타카 코레아나[*])은 경상남도 합천군 해인사에 있는, 고려가 몽골의 침입을 불력(佛力)으로 막아내고자 1236년(고종 23년) 강화군에서 조판에 착수하여 15년이 지난 1251년(고종 38년)까지 총 16년에 걸쳐 완성한 고려의 대장경이다. 1962년 12월 20일에 대한민국의 국보 제32호 해인사대장경판(海印寺大藏經板)으로 지정되었다가, 2010년 8월 25일 현재의 명칭으로 변경되었다.[1] 현존하는 세계의 대장경 가운데 가장 오래된 것일 뿐만 아니라 체재와 내용도 가장 완벽한 것으로 평가되고 있는 팔만대장경은[2] 2007년도에 세계기록유산으로 지정되었다. 2) 다이쇼 신수대장경 다이쇼 신수 대장경(大正新脩大蔵経たいしょうしんしゅうだいぞうきょう) 또는 대정신수대장경(大正新脩大藏經, 大正新修大藏經), 신수대장경(新脩大藏經) 약칭 대정장(大正藏)은 1924~1934년에 일본 다이쇼 일체경 간행회(大正一切経刊行会)에서 출판한 대장경으로, 모두 88권이다. 도상부(図像部) 12권을 더하여 모두 100권으로 보기도 한다. 기호는 T를 사용한다. 팔만대장경을 저본으로 삼고, 전통적인 대장경 이외에도 중국과 일본의 많은 사본을 교감하고, 팔리어, 산스크리트어 장경과도 대조하여 편찬하여서 가장 광범하고 정확한 판본으로 평가된다. 돈황사본 등 새롭게 발견된 자료를 추가한 것도 이전 대장경들과 구별되는 특징이다. 다이쇼(大正たいしょう)는 출판 당시 일본의 연호이나, 대부분은 이후 쇼와 연간에 출판되었다. 이어서 1935~1941년에는 팔리어 대장경인 《남전대장경》(南伝大蔵経)을 출판한다. 나. 상좌부, 소승불교 1. 아함경 《아함경(阿含經)》은 불교 초기의 경전 모음이다. "아함"이란 산스크리트어 낱말 아가마(āgama)의 음역(音譯)으로 법장(法藏) 또는 전교(傳敎)라고 번역(飜譯)된다.[1] "아함"이란 문자 그대로 ""전승(傳承)" 또는 "전승(傳承)한 가르침"이며, 스승에서 제자로 계승한 것을 뜻한다.[1][2] 즉, 《아함경》은 고타마 붓다의 가르침을 전하는 성전(聖典)을 가리킨다.[1] 실제로는 고타마 붓다와 그 제자들의 언행록이며, 원시 불교 연구의 근본 자료이다.[1] 후일 대승 불교가 일어나자 아함(阿含)은 소승(小乘)이라고 천칭(賤稱)되어 중국 등의 전통적인 불교에서는 그리 중시되지 않았으나 근래에 이르러 원전 연구가 활발해짐에 따라 팔리어 대장경의 《4부(四部)》와 한역 대장경의 《4아함(四阿含)》의 비교 연구에 의하여 원시 불교의 진의(眞意)를 구명하려는 경향이 생겨 뛰어난 성과를 가져왔다.[1] 4아함[편집]한역된 《4아함(四阿含)》은 다음의 《장아함(長阿含)》·《중아함(中阿含)》·《잡아함(雜阿含)》·《증일아함(增一阿含)》의 4종의 《아함경(阿含經)》을 가리킨다:
4부[편집]《4아함》에 상당하는 팔리어 문헌의 《4부(四部)》는 다음과 같다.[1]《4부(四部)》에 《소부(小部)》 15경을 추가하여 《5부(五部)》라고 한다. 2. 법구경 《법구경》(法句經, K.1021, T.0210)은 서기 원년 전후의 인물인 인도의 다르마트라타(산스크리트어: Dharmatrata, 法救)가 편찬한 불교의 경전으로 석가모니 사후 삼백년 후에 여러 경로를 거쳐 기록된 부처의 말씀을 묶어 만들었다고 한다. 《법구경》은 불교의 수행자가 지녀야할 덕목에 대한 경구로 이루어져 있다. 주요 내용은 폭력, 애욕 등을 멀리하고 삼보에 귀의하여 선한 행위로 덕을 쌓고 깨달음을 얻으라는 것이다. 판본에 따라 내용이 조금씩 차이가 있으나 한역(漢譯) 법구경은 서문과 39개의 품(品)으로 이루어져 있다. 품의 종류[편집]무상품, 교학품, 다문품, 독신품, 제신품, 유념품, 자인품, 언어품, 쌍요품, 방일품, 심의품, 화향품, 우암품, 명철품, 나한품, 술천품, 악행품, 도장품, 노모품, 애신품, 세속품, 술불품, 안녕품, 호희품, 분노품, 진구품, 봉시품, 도행품, 광연품, 지옥품, 상유품, 애욕품, 이양품, 사문품, 범지품, 이원품, 생사품, 도리품, 길상품3. 밀린다왕문경 《밀린다왕문경(Milinda王問經)》 또는 《미란다왕문경(彌蘭陀王問經)》은 밀린다팡하(Milinda Pañha, 약호 Mil)의 한역으로 《나선비구경(那先比丘經)》이라고 하는데, 경이라고 하지만 불설(佛說)이 아니며, 팔리어 삼장에서는 장외(藏外)에 들어 있다.[1] 기원전 2세기 후반에 서북 인도를 지배한 인도-그리스 왕국(박트리아)의 국왕인 그리스인 밀린다(메난드로스 1세)가 비구(比丘, 불교승) 나가세나(那先)에게 불교 교리를 질문하면 나가세나가 이에 해답(解答) 하는 대화 형식의 성전이며, 성립 시기는 기원전 1세기 후반에서 기원후 1세기 전반 사이다.[1] 내용은 대별해서 3편 혹은 4편으로 되어 있으며, 제1편은 밀린다와 나가세나의 전생(前生) 이야기를 서술한 서론과 두 사람이 3일간에 걸친 대화 끝에 밀린다가 제자가 되는 이야기(서론과 대화의 부분을 2편으로 본다면 4편이 된다), 제2편은 밀린다가 불교 교리상의 어려운 문제를 들어 그 해답을 나가세나에게 구한 대화, 제3편은 수행자가 지켜야 할 덕목(德目)을 비유로써 풀이한 대화이다.[1] 특히 그리스적인 사유(思惟)와 인도나 불교적 사유의 대결이라는 점에서 사상적 의의와 가치가 있다 3. 본생경 《자타카(Jataka)》 또는 《본생담(本生譚)》은 팔리어로 씌어진 고대 인도의 불교 설화집이다.[1] 석가모니의 전생(前生)의 이야기, 즉 고타마 붓다가 석가족(釋迦族)의 왕자로 태어나기 이전, 보살로서 생을 거듭하는 사이에 천인(天人) · 국왕 · 대신 · 장자(長子) · 서민 · 도둑 또는 코끼리 · 원숭이 · 공작 · 물고기 등의 동물로서 허다한 생을 누리며 갖가지 선행 공덕(善行功德)을 행한 이야기 547종을 수집했고, 기원전 3세기경부터는 당시의 민간 설화를 모아 불교적 색채를 가하여 성립되었다.[1] 한 사람의 소작(所作)이라고는 생각되지 않는다.[1] 개요[편집]불교 경전에는 다양한 전세(前世)의 인연 이야기가 설해지고 주로 석가모니 부처의 전세에서의 인연을 밝히고 현세(現世)나 내세(来世)를 설하고 있다. 이를 자타카라고 부르는데, 넓은 의미로는 석가모니 부처뿐 아니라 석가모니의 제자나 보살 등의 전세의 인연도 포함해서 자타카 또는 본생담으로 부르는 경우도 있다. 그러나 본래 자타카란 특별한 형식과 내용을 갖춘 오래된 문학의 종류를 칭해서 부르는 것이었다. 또한 한역 불전으로는 이들 불경을 『본생경』(本生經)이라 총칭하며 팔리어 불전에는 22편으로 나뉘어 총 547개의 이야기가 자타카로써 수록 되어 있다. 이들 이야기의 형식에는 현세 이야기 ・ 전세(前世) 이야기 ・ 그 결과(또는 내세 이야기)라는 삼세(三世)로 구성되어 있다. 산문과 운문으로 구성되어 있고 기원전 3세기 무렵 고대 인도에서 전승되고 있던 설화 등을 토대로 하며 거기에 불교적인 내용이 부가되어 성립되었다고 여겨지고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불교가 인도에서 각지로 전파되고 세계 각지의 문학에도 영향을 주어 『이솝 우화』나 『아라비안 나이트』에도 이 자타카의 이야기 구성 형식이 채용되어 있다고 여겨진다. 한국의 《삼국사기》 및 《삼국유사》에 실려 있는 구토지설(龜兎之設), 일본의 『곤자쿠 이야기집』(今昔物語集)의 「달의 토끼」 등도 이 자타카를 기본으로 하고 있다. 일본 호류지(法隆寺)에 소장된 옥충주자(玉虫厨子)에는 자타카 이야기로써 시신문게도(施身聞偈図)의 설산 왕자(雪山王子)나 사신사호도(捨身飼虎図)의 살타왕자(薩埵王子)가 그려져 있는 것이 알려져 있다.4. 백유경 《백유경(百喩經)》은 우화로 이루어진 불경이다. 5세기 인도의 승려 가사나(伽斯那)가 정리했다고 하나 일설이다. 백구비유경(百句譬喩經), 백구비유집경(百句譬喩集經), 백유집(百喩集) 등으로 불리기도 한다. 소개[편집]동방의 이솝우화 『백유경』, 중국과 한국의 민간 서사문학 발전에 중대한 영향을 준 인도의 불경 이야기집이다. 온갖 비유로, 해학성이 넘치는 이야기 가운데 단순히 불교 가르침 이상의 깨달음이 있다. 이 보편적인 깨달음은 1500년 전 이야기가 아닌, 현재의 이야기로 다가와 우리에게 교훈을 준다. 각각의 이야기에 대한 두세 줄의 췌언은 세상에 대한 깊은 통찰을 가져다 준다.『백유경』은 고대 인도의 우화적인 구비설화를 중심으로 엮은 이야기책으로서 사람들의 어리석음을 일깨워 올바른 삶과 믿음의 경지에 이르게 하는 불교 경전이다. 기존의 불교 경전은 함축된 의미의 문장과 어려운 단어로 인해 불교의 가르침을 제대로 이해하기가 어렵다. 하지만 『백유경』에서는 재미있고 쉬운 비유를 통해 일반 대중들도 쉽게 불교 경전에 다가갈 수 있게 한다. 인도 고대인들의 생활 속에서 일어난 여러 가지 일들이 생생한 표현, 간결한 구성, 적절한 해학 등이 이 책의 가장 큰 매력이다. 고대 인도의 이야기가 단지 고대만의 이야기로 끝나지 않는다. 비록 우리와는 다른 시대의 이야기이지만, 현대에 살고 있는 우리의 삶과 다르지 않다. 가령, 젖소에게서 우유를 미리 짜서 우유가 상할까 봐 나중에 한꺼번에 짜려고 했다가 결국 말라서 우유를 얻지 못한 어리석은 사람의 이야기는 바로 앞만 보고 미래를 보지 못하는 현대의 우리와 다르지 않다. 재밌는 이야기 속에 본질을 담고 있는 우화가 쉽지만 깊은 깨달음을 보여준다. 5. 과거현재인과경 《백유경(百喩經)》은 우화로 이루어진 불경이다. 5세기 인도의 승려 가사나(伽斯那)가 정리했다고 하나 일설이다. 백구비유경(百句譬喩經), 백구비유집경(百句譬喩集經), 백유집(百喩集) 등으로 불리기도 한다. 소개[편집]동방의 이솝우화 『백유경』, 중국과 한국의 민간 서사문학 발전에 중대한 영향을 준 인도의 불경 이야기집이다. 온갖 비유로, 해학성이 넘치는 이야기 가운데 단순히 불교 가르침 이상의 깨달음이 있다. 이 보편적인 깨달음은 1500년 전 이야기가 아닌, 현재의 이야기로 다가와 우리에게 교훈을 준다. 각각의 이야기에 대한 두세 줄의 췌언은 세상에 대한 깊은 통찰을 가져다 준다.『백유경』은 고대 인도의 우화적인 구비설화를 중심으로 엮은 이야기책으로서 사람들의 어리석음을 일깨워 올바른 삶과 믿음의 경지에 이르게 하는 불교 경전이다. 기존의 불교 경전은 함축된 의미의 문장과 어려운 단어로 인해 불교의 가르침을 제대로 이해하기가 어렵다. 하지만 『백유경』에서는 재미있고 쉬운 비유를 통해 일반 대중들도 쉽게 불교 경전에 다가갈 수 있게 한다. 인도 고대인들의 생활 속에서 일어난 여러 가지 일들이 생생한 표현, 간결한 구성, 적절한 해학 등이 이 책의 가장 큰 매력이다. 고대 인도의 이야기가 단지 고대만의 이야기로 끝나지 않는다. 비록 우리와는 다른 시대의 이야기이지만, 현대에 살고 있는 우리의 삶과 다르지 않다. 가령, 젖소에게서 우유를 미리 짜서 우유가 상할까 봐 나중에 한꺼번에 짜려고 했다가 결국 말라서 우유를 얻지 못한 어리석은 사람의 이야기는 바로 앞만 보고 미래를 보지 못하는 현대의 우리와 다르지 않다. 재밌는 이야기 속에 본질을 담고 있는 우화가 쉽지만 깊은 깨달음을 보여준다. |
경전의 분류
경전은 크게 경(經), 율(律), 논(論) 세가지[삼장(三藏)]로 분류하고 있다. 이것을 시대적이며 사상적으로 구분하여 분류할 경우 대승불교가 일어나기 이전까지의 경전은 원시경전 최고 불전인 숫타니파타, 아함경, 열반경, 범망경, 법구경, 자타카, 백유경, 유교경, 밀린다왕문경 등을 묶어 소승경전이라 하고, 대품반야경, 반야심경, 금강경, 법화경, 무량의경, 유마경, 화엄경, 무량수경, 아미타경, 능가경 등을 묶어 대승경전이라 한다.
경전을 대승경전과 소승경전으로 이분하는 것은 인도로부터 내려오는 습관에 지나지 않으며 엄밀하게 말하면 대·소승 어디에도 속하지 않는 경전이 많다.
소승경전은 아함경에 국한하지만 대승경전은 여러 가지로 나눌 수 있어 소·대승분류는 정밀하지도 않으며 큰 의미도 없다. 경의 분류는 천태종의 지자대사(智者大師)가 교상판석(敎相判釋)할 때 쓴 것으로 화엄경류, 아함경류, 방등경류, 반야경류, 법화경류로 나누는 오분법(五分法)이 있다.
그러나 이것은 부족한 점이 많아 일본의 대정신수대장경에서는 아함부(阿含部), 본연부(本緣部), 반야부(般若部), 법화부(法華部), 화엄부(華嚴部), 보적부(寶積部), 열반부(涅槃部), 대집부(大集部), 경집부(經集部), 밀교부(密敎部)의 10류로 나누었는데,
이것이 현재 가장 합리적인 경전 분류로 인정되고 있다.
1) 아함부
아함이란 팔리어 Agama로 표기하며 말뜻은 전해 내려온 부처님 말씀을 모아서 완성했다는 의미의 경전이다. 아함경이란 모든 소승경전을 총칭하는 말로서 주로 사성제, 팔정도, 12연기 등 불교의 기본사상에 관한 가르침이 담겨 있다.
장아함경은 비교적 긴 내용만을 추려서 엮은 경, 중아함경은 중간정도의 길이 경을 모아 엮은 경, 증일아함경은 법수에 따라 설한 경이며 잡아함경은 짧은 내용을 모아 엮은 경이다.
2) 본연부
본연은 본생 또는 본기라고도 하는데, 주로 부처님이 아득한 과거세의 영겁다생으로 중생을 구제하고 자아의 완성을 위한 보살행을 한 일종의 고사, 전생설화 등을 담고 있다. 대표적인 경전이 자타카 즉, 본생경으로서 이 경이 부분적으로 번역되어 생경, 현우경, 잡보장경, 육도집경, 보살본연경, 보살본행경, 보살본생만론 등으로 불려진다.
3) 반야부
대승불교 초기의 경전으로 주로 공(空)사상을 설한 경전이며 금강경과 반야심경이 들어 있다.
4) 법화부
법화경은 대승불교를 대표하는 경이며 "무량의경", "관보현경"과 더불어 법화삼부경이라고 불리어 진다.
법화경 이전에 설한 삼승(三乘: 성문, 연각, 보살)은 참다운 진리에 이르는 방편이었음을 밝히고[會三歸一]모든 법의 실상(實相)을 설한 경이다.
5) 화엄부
대방광불화엄경 화엄경이라고 줄여 부르는 대방광불 화엄경은 대승보살도 사상을 구체적으로 보이면서 부처의 성도와 과덕, 그 경계를 문학적으로 장엄하게 기술하면서 실천하는 과정에 52위의 보살이 있음을 교리적으로 나타내 보이고 있다.
그리고 선재동자가 문수보살을 만나 대승보리심을 일으킨 뒤 52명의 선지식(先智識: 부처님의 지혜와 덕을 갖춘 이)을 찾아 불법을 묻고 보살도를 닦아 마침내 해탈경계를 성취하는 입법계품으로 끝맺는다.
6) 보적부(보적경寶積經)불교의 여러 경들을 모아 편집한 혼합 경전.
대보적경 보살이 수행하는 법과 장차 미래세에 부처가 되어 중생을 어떻게 제도하게 되리라는 예언을 받는 수기성불 등에 관한 경전을 말한다.
보통 원제대로 《대보적경(大寶積經)》이라고 하는데, 명칭은 법보(法寶)의 누적이라는 뜻에서 연유한다. 단독경(單獨經)이 아니라 120권으로 편집되어 있다. 49회(會) 77품(品)으로 꾸며져 있는데, 매회 각기 상이한 성격을 띠고 있으면서 대체로 보살의 실천 덕목, 보리심(菩提心)의 함양 등을 주제로 하고 있다. 한역본(漢譯本)은 당(唐)나라에서 인도의 승려 보리류지(菩提流支)가 왕명으로 706~713년간에 그 당시까지 유포되고 있던 경전들을 모아서 이미 번역되어 있는 23권과, 뜻이 통하지 않는 것을 다시 번역한 15권과, 아직 번역되지 않은 12권을 번역, 편집한 것이다. 보리류지 외에 축법호(竺法護) ·의정(義淨) ·달마급다(達磨笈多) 등 명성 있는 번역가들이 번역한 부분도 많다.
7) 열반부
열반경은 석존께서 입멸하기 직전 라자가하에서 입멸하신 구시나가라까지 가는 동안의 행적과 설법내용을 담고 있으며 입멸 후의 다비, 사리의 분배, 봉안 등이 자세히 설해진 경으로 이 중에는 나라를 지키는 7가지 법과 교단이 번영하는 7가지 법, 유명한 자등명(自燈明)자귀의(自歸依)의 설법, 순타의 공양과 발병, 최후의 유훈(遺訓) 등이 실려 있다.
8) 대집부
대방등 대집경 대집부에 해당하는 모든 경을 다 모았다는 뜻으로 이 경전은 13종의 독립적인 대승경전들을 분(分) 또는 품(品)단위로 분류하여 하나의 경전처럼 엮었다.
주 내용은 보살이 닦아야 할 불도를 반야경의 공사상에 근거하여 설교한 것이다.
대승대집지장십륜경을 줄여서 "지장십륜경"이라고도 하는데 내용은 지장보살의 물음에 대하여 부처님이 10종의 불륜(佛輪)을 설한 것이다.
9) 경집부
인왕경, 유마경, 입능가경, 약사경, 미륵삼부경, 부모은중경, 우란분경, 원각경, 능엄경 등이 여기에 속한다.
10) 밀교부
밀교는 다신교적이고 힌두교적인 요소가 불교에 유입되면서 대승불교 발전사에서 마지막에 나타난 사상으로 주로 진언과 다라니로 이루어져 있다.
대일경은 당 선무외 삼장이 번역했으며 구체적인 경전 명칭은 대 비로자나 성불신변가지경이라 한다. 전7권으로 되어 있으며 경의 본문은 6권이고 공양하는 순서와 방법에 대한 의식이 1권으로 묶여있다. 대일여래가 불가사의한 위신력으로 스스로 증득한 법신 자체의 경지를 말하는 경전이다. 금강정경은 불공 삼장의 역본이 유통되고 있으며 금강정 일체여래 진실섭 대승대교왕경이 있다.
우리가 신앙 측면에서 널리 독송되는 천수경과 진언은 의레적으로 밀교적 관음신앙 경전들에서 수용한 것들이다.
출처: https://amtb.tistory.com/432 [나무아미타불 :티스토리]
참고하기 위하여, 불교의 기본이라 할 수 있는 경전의 종류를 취합하고 조금 더 간략히 정리하여 보았다. 경전속으로 너무 깊이 들어가는 것은 교학에 치우칠 우려가 있으니 개괄적으로 의미를 알아가는 것이 좋을 듯 하다.
경전을 대하는 입장이 각자의 성향과 근기에 따라 모두 다르겠으나, 지식을 취하는 마음을 가장 먼저 경계하며 두루 살피고 그 핵심을 찾아 '길'을 가다보면, 언젠가 모든 경전에서 말하는 의미가 하나로 집약되어 질 것이다.
<불교 경전의 종류> (팔만사천대장경, 팔만대장경)
소승경전(초기경전) : 대승불교 이전까지의 초기경전. 숫타니파타, 아함경, 열반경, 범망경, 법구경, 자타카, 백유경, 유교경, 미린다왕문경 등
대승경전 : 대품반야경, 반야심경, 금강경, 법화경, 무량의경, 유마경, 화엄경, 무량수경, 아미타경, 능가경 등.
(1) 초기 불교 경전
● 아함경(阿含經)
석존이 입멸한 뒤 구전되던 가르침을 집대성. <장아함경> 긴 내용만을 추려서 엮음 <중아함경> 중간정도의 내용 <잡아함경> 짧은 경을 추림 외<증일아함경> 내용 : 사성제, 팔정도, 12연기등 불교의 기본 사상.
● 열반경(涅槃經)
입멸하기 직전 부터 입멸하신 후 까지 가는 동안의 행적과 설법내용, 입멸후의 다비(화장), 사리(유골)의 분배, 봉안등이 자세히 설해진 경. 유명한 자등명·자귀의의 설법, 순타가 올린 최후의 공양과 발병(發病), 최후의 유훈 등이 실려 있다.
● 범망경(梵網經)
범망이란 어부가 그물로 물고기를 잡듯이 갖가지의 견해를 건져 올린다는 뜻. 내용은 2부로 되어있다. 제1부는 소계·중계·대계에 대해서, 제2부는 당시의 여러 견해를 62가지로 추려서 정리.
● 법구경(法句經)
독립된 한 경이 아니라 총 423편의 시로 된 경을 26장으로 분류한 유명한 경. 주로 불교의 윤리적인 교리와 불교 입문의 지침에 설해져 있다. 불교 경전 중 가장 오래된 것으로 석존의 본뜻을 가장 정확히 전하는 주옥같은 경전.
● 숫타니파타(經集)
역시 독립된 한 경의 이름이 아니라 길고 짧은 시로 된 경전이며 중간에 산문도 있다. 총 5장으로 분류되어 있으며 『법구경』과 더불어 주옥같은 말들이 담겨 있다.
● 본생경(本生經 '자타카'라고도 한다.)
석존이 탄생하기 전의 전생, 부처가 되기 전 보살로서 수행하던 모습 등 과거에 쌓은 공덕의 인과로 부처가 된 이야기들.
● 백유경(百喩經)
총 98가지의 비유, 유화를 모은 경. 비유나 우스운 이야기를 통해 바르게 살고, 불교의 기본적 교리를 이해하게 한 경. 백비경, 백구비유집경, 백구비유경이라고도 한다.
● 부모은중경(父母恩重經)
부모의 은혜를 설하고 그 은혜에 보답하려면 어떻게 할 것인가를 설한 경.
● 유교경(遺敎經)
입멸에 즈음하여 제자들에게 마지막 설법을 하는 경. 녹야원에서 최초의 법을 설해 다섯 비구를 교화하고 마지막 설법으로 부사타라를 교화함으로서 중생제도의 사명을 다했으므로 입멸하신다는 말씀으로 시작. 제자들에게 바르게 수행하도록 당부한 내용과 극적인 석존의 최후를 아름다운 문체로 표현하고 석존의 근본적인 사상을 간결하게 정리한 경.
● 미린다왕문경(王問經)
그리스 미란다왕과 불교승려인 나가세나 장로가 불교 교리에 대해 문답한 끝에 왕이 출가해서 아라한이 된 경위를 설한 경전.
그밖에 사문과경 육방예경 옥야경 장로게·장로니게 과거현재인과경 불본행집경 불소행찬 육도집경 사십이장경 등이 있다.
화엄사
(2) 대승경전
● 대품반야경(大品般若經) 소품반야경(小品般若經)
대승불교 초기의 공사상을 설한 기본적인 경전. 대품이 20-40권 90품, 소품이 10권 29품.
● 대반야경(大般若經)
600권이나 되는 방대한 반야부 경전의 집대성.
● 반야심경(般若心經)
'마하반야바라밀다심경'이 원제로 ‘큰 지혜로 열반에 이르는 부처님의 진수의 가르침’이라는 뜻이다.
반야의 공사상을 가장 짧게 압축한(262자)경으로도 유명하다. 모든 법이 다 공하다는 이치와 이 이치를 바르게 보면 모든 고와 액을 멸하고 열반에 이른다고 설.
● 금강경(金剛經)
반야경과 더불어 반야의 공사상을 대표하는 경. 선종에서도 중요하게 여기는 경.
● 법화경(法華經)
법화경 이전에 설한 삼승(三乘 ; 성문, 연각, 보살)은 참다운 진리(一乘)에 이르는 방편이었음을 밝히고(會三歸一), 모든 법의 실상(實相)을 설한 경.
● 관음경(觀音經)
관음신앙의 가장 대표적인 경전으로서 관세음보살이 32신을 나타내어 중생의 재난을 구하고 소원을 이루게 한다는 내용.
● 무량의경(無量義經)
법화삼부경의 하나이며 법화경을 설하기 위한 서설이라고 할 수 있는 경. 따라서 내용도 법화경의 요점에 바탕을 두고 구성되어 있다.
● 유마경(維摩經)
반야부 경전 다음에 성립된 초기 대승경전의 하나. 장자 유마힐 거사를 통해 편협한 소승불교에서 벗어난 대승불교의 진수를 설한 경입니다. <중생들이 병들어 있기 때문에 나(유마힐)도 병이 났다>는 유명한 구절이 있으며 또 유마힐 거사와 문수사리보살과의 문답은 선종에서도 매우 중요하게 여기는 대목이며 보살들의 깨달음과 중생제도를 위해 들고 남이 자재함을 설한 경.
● 화엄경(華嚴經)
대방광불화엄경(大方廣佛華嚴經)이 본 이름. 석존이 깨달으신 내용을 그대로 설한 것으로서 아시아권의 정신문명을 재창조하게 할 만큼 큰 영향을 미친 대승경전으로서 대표적인 한역으로는 60권으로 번역된 것과 80권으로 번역된 것이 있다. 그 내용은 지혜와 자비가 완성되어 가는 것을 단계적으로 풀이한 십지품(十地品)을 비롯하여 선재동자의 구도 과정을 통해 대승수행의 경지를 설한 입법계품(入法界品)등으로 되어있다.
● 무량수경(無量壽經)
상권에서는 아미타불의 인과와 그 48대원을, 하권에는 중생이 아미타불 정토에 태어나려면 염불, 제행(諸行)의 두 가지 방법이 있음을 설하고, 받게 되는 과보에 대해 설.
● 관무량수경(觀無量壽經)
아미타불과 그 화신(化身)인 관음·세지 두 보살, 극락정토의 장엄을 구체적인 마음의 대상으로 관하는 법을 설한, 타력 신앙의 진실성을 밝힌 경. 관무량수불경, 무량수관경, 십륙관경, 관경이라고도 한다.
● 아미타경(阿彌陀經)
대경(大經:무량수경)에 대해 소경(小經)이라고 하며, 아미타불 신앙의 근본. 아미타불의 명호를 부르면 극락에 태어난다는 타력신앙을 설.
그밖에 여래장경 승만경 대보적경 대승열반경 대집경 미륵상생경 지장보살본원경 수능엄삼매경 금광명경 능가경 대일경 금강정경 원각경 우란분경 등이 있다.
또 계율에 관한 경전으로는 사분률 십송률 우바새계경 등이 있다.
논장으로는 대비바사론 구사론 중론 대지도론 유식 대승기신론 등이 있다.
[출처] <불교 경전의 종류>|작성자 여여
불교경전의 결집과 원류(源流)
흥륜사 21-09-26 17:35
불교경전의 결집과 원류(源流)
1. 팔리어 경전
21세기를 사는 우리들에게 지금부터 2500년 전의 한 인물에서 비롯된 막대한 지혜의 보고(寶庫)가 면면히 계승되고 있다.
그 분은 곧 인도 북부 갠지스 강 상류의 석가국(釋迦國)의 왕자로 있을 때는 "고타마-싯다르타"였다. 그는 출가할 때 왕의 지위도 재산도 아내도 아들도 이름까지도 다 버렸다.
출가 후 6년 뒤에 깨달음을 얻고 “붇다“가 된 그 사람을 당시 사람들은 인천의 스승 ”존사(尊師)“라고 부르고, 일부는 "고타마"라고 출가 전의 성(姓)을 부르고 있었다. 지금은 ”붇다“ 또는 "석존(釋尊)""석가모니"라고 부르고 있다.
그 석가모니 부처님이라고 불리는 분이 깨달음을 열고 열반 때까지 45년 동안 쉴 새 없이 깨달음으로 이끄는 지혜의 보고(寶庫)로써 현대에까지도 계속 이어지고 있다. 그 보고(寶庫)를 석가모니 부처님 당시의 말로서 "팔리(pali)"라고 불리고 있다.
석가모니 부처님은 자신이 주로 활동한 갠지스 강 유역의 "마가다"나라"코사라"국의 사람들이 사용하던 다섯 여섯 종류의 인도어로 가르침을 설하셨다.
그 가르침이 석가모니 부처님처럼 완전한 깨달은 제자들에 의해서 녹음된 것처럼 한 구절도 빠뜨리지 않고 잘못되지 않고 팔리(pali)로서 정리되었다. 언어는 석가모니부처님이 가장 많이 사용하던 "마가다"어를 그대로 전해졌으니 그것이 현존 팔리(pali)어 경전이다. 부처님께서 설하신 경전(經典)을 범어로 “수트라(sutra)”라고 한다.
부처님 경전의 결집(結集)
불멸후 부처님 제자들이 스승께서 설법하신 내용이 흩어지지 않게 저마다 듣고 외워두었던 것들을 철저히 검정하고 논의하여 부처님의 가르침을 편집하여 집대성한 것을 결집이라 한다.
1차 결집(結集)
제1 결집은 빠르고 확실하게 이루어졌다. 부처님이 열반하신 후 가르침이 흩어지고 빠지거나 외곡 될 것을 염려하였던 수제자 "마하가섭" 존자를 중심으로 부처님열반 후 3개월 뒤 500명의 제자들이 "마가다"국의 수도 "왕사성"칠엽굴(七葉屈)에 모여 평생 부처님법문을 가장 많이 들은 "아난다 존자“가 경전經典)을 기억하여 외워내고, "우파리 존자”가 계율을 암송해내면, 500백 명의 아라한들이 틀린 부분이나 잘못 된 곳이 없도록 정확히 검정하여 확정하였다.
이것이 제일결집(第一結集)이다. 경(經)· 율(律)·론(論)의 삼장(三藏)으로 구성된 경전 가운데 경(經)과 율(律)은 이때 확정되었다. 그러나 논(論)은 제삼결집(第三結集)까지 무엇도 기록되어 있지 않았다.
제일결집(第一結集)에서는 구두전승문화(口頭傳承文化)였기 때문에 기록으로 남지 않았다. 그래서 이를 “최초결집” “500백 결집”이라 하는데, 이후 모든 경전의 골격이 되었다.
2차 결집(結集)
불멸 100년 뒤에 "마가다"국과 "코사라"국의 중간에 있는 "비사리"라는 도시에서 아난존자의 제자 “야사비구”가 중심이 되어 700비구가 모여 보수적인 장로부가 부처님 당시 계율을 준수할 것을 결의하자, 이에 진보적인 대중부가 거세게 반대하면서, ❶오전 이라면 몇 번이라도 식사를 할 수 있게 하자, ❷ 아플 때는 알코르 성분이 적은 술을 마셔도 되게하자, ❸ 시주로부터 돈을 받아서 모아도 된다, ❹한 곳에 모이지 않고 따로 포살을 해도 좋다.“는 등 변경한 계율의 항목이 열 개나 되었다. 이로서 가족처럼 사이가 좋았던 교단이 분열하는 조짐이 보이기 시작하였다. 계율의 이러한 개변에 대해서 인도 서북부나 남서부로부터 장로비구들이 모여들어 ”비사리에서 합의한 열 가지 항목을 모두 잘못이라고 백지화시키고 다시 경전결집을 행하였으니 이것을 “제2차 결집, 또는 “700백결집” 결집이라 한다.
이로 인하여 불교는 인도 북서 남서 상좌부와 시대에 맞게 계율을 바꾸려던 인도 동북부 대중부가 분열되어 1백년 이상을 서로 독자의 길을 걸었다.
3차 결집(結集)
불멸 200년 후 세상에 나온"아쇼카"왕은 갠지스와 인더스의 두 큰 강을 포함한 인도 북부를 정복하고 "마울야"왕조 제3대 왕이 되고, 데칸고원이나 인도남부까지 정복하고 인도 전역을 통일하였다.
"아쇼카"왕은 동생의 권유로 불교에 깊게 귀의하였다, 이 때 교단은 여러 부파로 분열되고, 경전이나 계율이 자의적으로 개편되고, 스님이나 재가자의 정신이 황폐되어 불교가 쇠퇴하여 가는 모습을 우려한 "마울야"왕조의 수도 화씨성 계원사에서 아쇼카 왕의 지원으로 “목갈리풋타 티사”의 주재 하에 1,000명의 비구가 모여 경, 율, 론 삼장 (三藏)을 정비하고, 불교교단의 화합을 유도하였다. 이 때 경전이 최초로 문자화되었다. 이를 “화씨성 결집” “1.000결집” 제3결집“ 이라한다.
상좌부는 3차 결집 후 아쇼카왕의 권유에 따라 “왕자 마힌다" 스님을 중심으로 스리랑카에 불교를 전도하여 남방 소승불교의 시효가 되게 하였다.
중국 티베트는 북서인도와 밀접한 지형적 관계로 대중부 (설일체유부)계통의 불교를 받아드려 오늘의 대승불교로 발전하게 되었다고 본다.
여래오시如來五時
부처님께서 일생동안 설하신 지혜의 가르침을 크게 다섯 시기로 분류한 것을 여래(如來)오시(五時)라 한다. “화엄시. 녹야원시 아함 방등시. 반야시, 법화열반시”를 말한다.
경전의 구성
불교의 모든 경전은 서론<서분> 본론<정종분> 결론<유통분>의 형태를 갖추고 있다.
육성취(六成就) <육가원칙> ❶신(信)성취 ❷문(聞)성취 ❸시(時)성취
❹주(主)성취 ❺처(處)성취 ❻중(衆)성취 여섯 가지요건을 가추고 있다.
① 부처님의 가르침이 틀림없음을 확인하는 신성취(信成就=여시(如是)
② 내가 직접 들었다는 문 성취(聞成就 = 아문(我聞)
③ 설법의 때를 명시하는 시 성취(時成就 = 일시(一時)
④ 설법을 한 분이 부처님이라는 주성취(主成就= 불(佛)
⑤ 설법한 장소를 밝히는 처성취(處成就 =재사위국(在舍衛國)
⑥ 어떤 사람이 들었는가를 밝히는 중 성취(衆成就=여대비구(與大比丘)
그래서 모든 경전이 "여시아문 일시 불 재사위국 여대비구중"하고 시작하는 것이다.
서분은“여시아문(如是我聞)" 나는(아난)부처님말씀을 이와 같이 들었다. 유통분은 문불소설 개대환희 신수봉행(聞佛所說 皆大歡喜 信受奉行)으로 끝맺는다.
5. 불기<불멸 해[年]>는"아쇼카"왕의 연대로부터 산출할 수 있다.
"아쇼카"왕(재위 BC268~232년)의 연대가 거의 확실하다고 볼 때, 그보다 2백 년 전으로서 석가모니부처님의 연대를 알 수 있다. 부처님은 기원전 483년 전에 이멸한 것이 정확하다고 보고 불력(佛曆)으로 시작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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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편집]
atta스스로dīpā섬 vihar살다atha그리고 atta스스로saraṇā피난처 an~아니다.añña다른 것saraṇā피난처,
스스로를 섬으로 삼아 스스로에 의지하며 살아라. 다른 것에 의지하지 말고.
dhamma법dīpā섬 dhamma법saraṇā피난처 an~아니다.añña다른 것saraṇā피난처
진리를 섬으로 삼아 진리에 의지하라. 다른 것에 의지하지 말고.
대반열반경에 나오는 석가모니의 마지막 설법.[4]
2. 핵심 교리[편집]
2.1. 무아(無我)[편집]
‘이것은 내 것이다.’ 또는 ‘이것은 어떤 다른 자의 것이다.’ 하는 생각이 없다면,
내 것이라는 것이 없으므로, 그는
‘나에게 없다.’고 해서 슬퍼하지 않습니다.
숫타니파타 4장의 15. 폭력을 휘두르는 자에 대한 경(attadanda sutta)
'내 것'이라고 생각한 것을, 우연한 사고나 세월이 변함에 따라 "내 마음대로 할 수 없을 때" 괴로움이 생긴다.
우리는 내 몸을 항상 '내 것'이라고 생각하지만 사람은 언젠가는 죽으며 내 마음대로 할 수 없다. 건강뿐만 아니라 가족, 친구, 재산, 사회 등의 모든 것이 마찬가지이다. 내 마음대로 되길 원하지만, 현실은 내 마음대로 할 수 없는 것들이 대다수이다. 한 때는 '내 것' 이었던 것들도 언젠가는 '내 것'이 아니게 된다는 것을 받아들여야 된다.
언젠가 상황이 변해, 보내 주어야 할 때가 오면, 붙잡지 않고 보내 줄 수도 있어야 한다는 것.
2.2. 변(變)[편집]
2.3. 탐진치(貪瞋癡)[편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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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굴에서 떠나라. 스스로가 "좋다"고 생각한 것에 머물려고 하는 마음가짐을 '동굴'에 비유하였다. 동굴 속 '익숙함'과 '편안함'에 취해 밖으로 나가려 하지 않지만, 결국 언젠가 상황은 변하고 가진 것을 잃어버리게 되므로 심한 괴로움을 느낀다. 아무리 괴로워도 '이때까지의 익숙했던 상태'에서 절대로 벗어날 수 없다고 생각하여 상황이 다시 좋게 바뀌길 하염없이 기다린다. 기다리면 기다릴수록 괴로움은 심해지나, 이때까지 했던 것들이 생각나서 동굴을 떠나지도 못한채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고 있다. 그러니 '이대로 계속 괴로워하든지', 아니면 '변해버려서 내가 통제할 수 없는 것들을 버리고 자기인생을 살든지' 하라는 것이다. 건강에 대한 슬픔과 자신의 재산, 가족이나 친구, 연인과의 사랑, 사회 생활, 사람의 죽음에 대한 걱정도 동굴에 해당된다.[9][10][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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결점없는 완벽한 순수를 찾지 마라. 보고 듣고 느껴지는 그 어떠한 진리나 가르침에도, 결점없는 완벽한 순수란 없다. 그렇기 때문에, 결점없이 완벽하고 순수한 깨달음이 있다고 믿어서, 그 깨달음을 묻고 다니며 찾으려고 하는 것은, 어리석은 짓일 따름이다. 그것이 진리라고 해서, 종교적 가르침이나 삶의 깨달음이라고 해서, 그 말을 따르거나 하진 말아야 한다. 설사 완벽하고 순수한 진리가 있다고 하더라도, 우리 자신 스스로가 그러한 완벽한 순수를 구현해내기란 불가능하고, 삶을 더 괴롭게 만들 뿐이기 때문이다. 괴로움에서 벗어나고자 완벽한 순수를 찾았는데, 완벽을 추구하여 도리어 괴로워진다면 본말이 전도된 것이니, 이를 경계해야 할 것이다. 삶은 애초부터 괴로움에서 떨어질 수 없는 것인데,[14] 왜 괴로움이 없는 삶(진리)이 있다고 믿어 그것을 찾아다니는 것인가? [15][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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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고를 생각하곤 비교하지 마라. 어떤 것을 최고라고 생각하면, 최고가 아닌 다른 것을 볼 때는 '수준이 낮다'며 비교하게 된다. 내가 보고 듣고 느끼는 어떠한 것에도 "최고"를 두지 말라는 것. '좋아하는 것'을 두게 되면, 좋아하는 것을 '하고 싶어' 지고, 여기에 매달리게 되어 집착이 되므로 괴로워진다. 이렇게 비교는 집착의 씨앗이 되기 때문에 경계하는 것이다. [17]
2.4. 명상(冥想)[편집]
사람들은 어떤 평범한 사건이 발생하면 연상작용을 통하여 이에 대한 생각을 확대 재생산한다. 근본 불교에서는 이렇게 '왜곡된 방식으로 생각이 계속 확장되어 나가는 것'을 희론[21](Papañca)이라고 한다.[22] 종종 사람들은 희론에 필요 이상의 의미를 부여하며, 이는 실제 입은 피해보다 사람들을 더 과도하게 걱정하고 괴로워하게 만든다. 쓸데없는 잡생각이라고도 볼 수 있는 이러한 희론을 경계하는 연습이 명상이라 할 수 있다.
숫타니파타 5장에 따르면, 어떤 것을 느낄 때 '좋아하는 것'을 두지 말며, 내가 좋아하는 것만 '하고 싶다'고 '매달리지' 마라. 내 마음이 무엇을 하는지 감정의 흐름을 끊임없이 경계해서, 이윽고 어떠한 것을 보더라도 '좋다'거나 '나쁘다'는 생각을 하지 않는 것을 '깨달았다' 고 말한다.
다만 '호불호를 두지 않는 평상심'에 대해서 강조하는 이러한 명상은 '이래도 되고 저래도 되니 아무렇게나 하자'는 상대주의적 결론으로 나아가서는 안되며,[23] 삶이 괴롭다고 여겨질 때 이 감정을 극복하기 위한 방편으로써의 명상이 되어야 한다. 이렇기에, '호불호'를 버리고 나면은, '호불호를 버리고자 하는 마음' 마저 버려야 한다고 말하는 것이다.
2.5. 명색(名色)[편집]
숫타니파타 4장 투쟁과 논쟁의 경에서 원시적인 연기[24]와 사성제를 설명하는데 이 때 괴로움(부정적 감정)의 가장 근본원인이 바로 명색(名色) 이다.
즉, 어떤 물질에 우리가 의미(또는 이름)를 부여하면 그 때부터 그것에 대한 '감정'이 생긴다는 것. 행복에 의미를 부여하면 행복해지고, 불행에 의미를 부여하면 불행해진다. 우리가 감정적으로 지나치게 괴로울 때, 스스로가 '불행'에 의미를 부여하고 있었던 것은 아닌지 되돌아 볼 필요가 있다.
2.6. 오온(五蘊)과 행위(카르마)[편집]
윤회, 업보, 신의 유무, 지옥과 천당의 존재는 아트만(영혼)의 개념이 있어야 성립하는 것이며, 아트만은 본디 무아(안-아트만[27])의 개념과 공존할 수 없는 것이지만, 상좌부 불교 시대에 이르러 두 개념은 공존하여 모순을 만든다. 이렇기 때문에 상좌부 불교에서는 아트만이 있어야 개념이 성립하는 윤회를 받아들이면서도, '안-아트만'을 깨달아서 해탈하면 윤회에서 벗어난다는 모순된 해석을 하게 되는 것이다. [28][29]
atma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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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n없다.-atman아트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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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혼, 나, 아트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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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아 (안아트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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상좌부 불교에서 '나'라는 것은 나의 몸(색), 나의 느낌(수), 나의 기억(상), 내가 했던 것들(행), 나의 생각(식)들로 이루어 지는 것이라고 말한다. 여기서 핵심은 경험과 기억과 행위와 사고 들이 "쌓여서(蘊)", '나'라는 인격과 정체성을 만들어 나간다는 것이다. 이러한 색수상행식을 "다섯가지 쌓임, 즉 오온(五蘊)"이라 하는데, 오온 = 아트만(영혼: 수,상,행,식) + 육체(색) 라고 볼 수 있다. 물론 상좌부 불교에서도, 이런 오온으로 이루어진 '나(아트만)'는 가상이며 이런 오온이 실체가 없는 것을 알아 '무아'를 깨달으라고 말을 하지만, 사실 상좌부 불교의 가르침에 해당하는 고집멸도의 사성제와 팔정도에는 도리어 '나'라는 아트만의 개념이 있어야만 성립되는 '업보' 개념을 포함하고 있다는데서 모순이 생긴다.
우선 카르마에 따른 업보를 살펴보자. 업보란, 오온으로 이루어진 '내'가 지금 '올바른 행동(카르마)'들을 행한다면, 이 '올바른 행동'들이 쌓여 미래의 '나(자아)'를 만들게 되고, 이렇게 '올바른 행동'들로 만들어진 '나(자아)'라는 인격은, 올바른(좋은) 생각을 하여 괴로움을 쉽게 이겨낸다는 것. 반대로 지금 '내'가 괴로운 것은 과거의 내가 올바르지 못한 행동들을 했기 때문이다.[31]
'현재의 (어떤) 행위가 쌓여서, 이것이 미래에 영향을 미친다'는 업보(카르마)의 개념은 사성제와 팔정도에서 찾아볼 수 있다. 사성제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괴로움의 원인'이 무엇인가인데, 고집멸도에서 '집'이 바로 그것이다. 여기서 '집'은 집착의 '집'이 아니라, 모을 집(集)이다. 팔리어로는 'samudaya': sam- 쌓이다. udaya 일어나다. 합쳐서 해석하면, '쌓여서 일어나다.' 즉, 괴로움의 원인은 (행위karma가) 쌓여서 일어나는 것을 말한다. '' 이는 당연히 오온과 업보의 개념에 해당된다. 그렇다면 상좌부 불교에서 오온과 업보의 문제(괴로움)를 풀어주는 방법인 팔정도는 어떠한가. 팔정도의 정언, 정견 등에 보이는 正은 팔리어로 접두사 sam-, samma- 에 해당되며 sam-의 뜻은 '쌓는다'이다. 따라서 팔정도의 정언, 정견 등은 올바른 말을 쌓고, 올바른 것을 보는 것을 쌓아라는 것. 이는 마찬가지로 '(어떤) 행위가 쌓인다'는 오온과 업보(카르마)의 개념이다. 이 둘을 종합하면, 행위(경험의 축적)를 통해 '내(아트만-괴로움)'가 만들어지고, 이러한 '나'는 '올바른 행위'를 쌓음으로써(팔정도), 해결된다는 것. 즉, 올바른 말과 생각, 올바른 생활과 노력 등 팔정도에서 말하는 대상은 '나'일 수 밖에 없고, '나'는 아트만을 의미하므로, 아트만이 없어야 되는 '무아'개념과 모순을 이룬다는 것이다.[32] [33]
이 모순된 관점('무아를 말하면서 올바른 나를 또한 강조')은 상좌부 불교 이후의 대승 불교나 밀교에서도 찾아볼 수 있다. 물론 "팔정도에서의 '올바름'이란 '선악'을 말하는 것이 아니며, 여기서 '올바름'은 해탈(무아)을 이루려는 방향을 의미하기 때문에, 무아와 모순되지 않는다" 또는 "그것은 오해이고 사실 단견[34]과 상견[35]을 부정하며 연기의 원리로 현상을 이해하는 것이다"라고 말하는 사람들도 있지만, 불교에서는 윤회를 말하고 있고 그 윤회가 '전생'과 '내생'을 인정하는 한, 이러한 윤회를 하기 위해서는 그 '윤회의 대상'인 아트만(영혼)의 존재를 인정해야 하기 때문에, 아트만이 없다는 무아의 정의와 논리학적으로 모순되는 지점이 있는 것은 사실이다.[36] 하지만 이러한 모순에도, 과거의 행위들이 쌓여 현재 '나'의 상태를 만든다는 카르마(업보)의 개념은, 사람은 괴로움에서 벗어나기 위해서 '올바른 행위'를 쌓아 '올바른 나'를 쉬지 않고 만들어야하며, '나쁜 행위'를 쌓으면 '나쁜 나'가 만들어져 괴로움에 빠지기 때문에 경계해야 한다는 '인과응보'의 개념으로 나름의 가치를 지니며 지금까지 불교에 이어져 오고 있다.
2.7. 연기(緣起)[편집]
숫타니파타에서 가장 오래되었다고 추측되는 4장과 5장인 원시 숫타니파타에서의 연기는 명색 - 접촉 - 쾌불쾌 - 욕망 - 좋아하는 대상(집착) - 투쟁과 논쟁 순이며, 근본 원인은 명색에 있다. 명색은 '물질에 의미를 부여하는 것'을 뜻하며, 물질에 의미를 부여하므로서 괴로움이 시작된다는 것을 말하고 있다. 즉, 어떤 것에 의미를 부여하므로서 싸움과 슬픔이 생기고, 자만하거나 남을 헐뜯게 되어 괴로움에 빠진다.
반면, 상좌부 불교의 12연기[37]에서는 그 근본 원인이 '무명과 행'이 된다. 어리석은 생각(무명)과 행동(행)으로 인해서 '올바른 생각과 행동'을 쌓지 못하게 되므로 괴로워진다.
2.8. 공(空)[편집]
또한 공(空)은, 모든 가치적 판단이 상대적 기준에 의해 달라지므로 '모든게 의미가 없다'라는 뜻이 아니라, 상대적 기준에 따라 다르게 볼 수 있으므로 '그 어떤 것도 다 될 수 있다'는 의미를 지닌다. 어떤 가치적 판단이나 개념이든 간에, '정해져 변하지 않는 것'으로 보지 말고, '무엇이든지 될 수 있는 가능성'으로 봐야 된다는 것. 불교를 허무주의로 보는 것은 공(空)을 제대로 이해하지 못했기 때문에 생기는 것이다. 공(空)은 산스크리트어로는 '순야타(Śūnyatā)'라고 하며 "부풀어 속이 비어 있다"는 뜻이다. 비어 있기 때문에 물을 담을 수 있고, 주스를 담을 수 있으며, 우유를 담을 수 있고, 술을 담을 수 있다. 우리는 그릇이 비어 있다고 '이 그릇은 의미 없어'라고 말하지 않는다. 비어 있기 때문에 '의미가 없는 것'이 아니라, 비어 있기 때문에 '모든 것을 할 수 있다'는 것을, 알 수 있기 때문이다.[43]
삶이 괴로울 때, 사소한 행복도 공존해 있다는 것을 안다. 그리고 이 행복은 지금보다 커질 것이라는 것도 안다. 곧, 희망이다. 반대로 삶이 행복할 때, 괴로움도 공존해 있음을 알고, 언젠가 커질 이 괴로움을 통해 거만해지지 않고 앞선 미래를 준비하는 자세를 가진다. 우리 삶에서 괴로움만 남아 있다면 그 삶은 얼마나 힘든 것인가. 단편적 극단에서 괴로워하거나 그저 즐거워하는 것에서 벗어나, 괴로움의 이면에 행복이 공존해 있다는 것을 안다면, 삶을 이해하게 되고 또한 그 자체로써 위로가 되는 것이다.
물론 이 개념은 삶이 괴로울 때 '혹시 내 생각이 극단에 놓여 있는 것은 아닌가?'하며 다른 생각을 살펴보는데서 그 뜻이 있는 것이지, 이래도 되고 저래도 되니까 내 마음대로 할 것이라며 극단적인 행동하는 것을 합리화하기 위해서 사용되어서는 안된다. 우리가 우리의 감정을 컨트롤할 수 없이 너무나 괴로울 때, 생각의 지평을 넓혀서 여러가지 대안들을 살펴보자는 취지이며, 따라서 '포기'나 '체념'을 뜻하는 것도 아니라는 것에 유의해야 된다.
'반야'도 '공(空)'과 비슷한 개념이다. 산스크리트어를 그대로 직역하자면, '분별하지 않는 지혜'(나누어 보지 않는 지혜)를 뜻한다.
2.9. 유식(唯識)[편집]
우리가 정보를 받아들일 때 눈, 코, 귀, 입, 피부 등을 통해 시각, 촉각, 후각, 미각 등을 느끼고 생각하게 된다. 이러한 정보들은 왜곡 될 수 있다는 것이 '유식'의 핵심이다.
예를 들면, 길가던 나그네가 순간 뱀을 보고 깜짝 놀라고 무서웠는데, 다시 보니 노끈이었다는 얘기가 있다. 무서운 감정은 '잘못된 정보'가 들어왔기 때문이며, 마찬가지로 부정적 감정들의 대부분은 왜곡되고 확대-재생산되어 우리들을 괴롭힌다. 이러한 '왜곡된 정보'가 괴로움의 원인이되며, 왜곡된 정보로 인해 무서운 감정이 들었다는 것을 '아는 것'이, 괴로움에서 벗어나기 위한 해결책이다.
이렇게 내가 보고 느끼고 생각하는 것이 내 마음을 바꾸기도 하고, 또한 내 마음이 내가 보고 생각하고 느끼는 것을 바꾸기도 하므로, '모든 것은 마음의 문제' 라고 말하였다.
2.10. 이타심[편집]
이타심을 강조하는 것은 상좌부불교와는 차별되는 대승불교의 특징인데, 물론 상좌부불교 내에서도 이타심을 강조하는 부분이 많지만, 대승불교는 유독 이 이타심을 상좌부불교와는 다른 차별점이라고 특정지었다. 비교하자면, 상좌부불교에서는 '개인'의 올바른 수행을 강조하는 팔정도가 주된 가르침이지만, 대승불교에서는 '나'의 깨달음을 추구하면서도 '남'을 적극적으로 이해하고 공감하려는 수행을 하자는 '자비'가 주된 가르침이 된다.[44]
이러한 이타심의 수행방법은 대체적으로, '남이 나를 어떻게 대하고 있는가'에 집중하지 않고 '내가 남을 어떻게 대할 것인가'에만 집중한다. 왜냐하면 '남이 나를 어떻게 대하고 있는가'에 집중하는 순간, '남의 반응'에 맞춰서 대응하는 '나'를 생각할 수 밖에 없고, 이는 '나'와 '남'을 구별하게 하는 '분별심'을 유발시키기 때문이다. 이것을 더 쉽게 말하자면, 남이 나를 싫어하면 나는 그러한 남을 싫어하고, 남이 나를 좋아하면 나는 그러한 남을 좋아하게 된다면, 이것은 '너는 너, 나는 나'를 더 명확하게 구분짓는 사고방식에 지나지 않으므로, 이는 서로 다른 양극단을 하나로 이해하는 '공(空) 개념'과 일치하지 않게 된다는 것이다. 그러므로 대승불교에서는 앞서 말했던 '내가 남을 어떻게 대할 것인가'에 대해서만 초점을 맞춰야 된다고 강조한다.[45]
이러한 점은 대승불교의 대표적인 수행법인 '바라밀'과 '사무량심'에서도 나타난다. 바라밀에서는, '남을 아무런 조건없이 도와주는 보시'와 '남의 모욕적인 반응에도 평정심을 가지는 인욕'을 통해, '남의 반응과 상관없이 남을 대하는 나의 자세'를 강조하고 있는 '이타심'의 특징을 확인할 수 있다.[46]
또한 '4가지 측정할 수 없이 큰 마음가짐'을 뜻하는 사무량심은 자(慈), 비(悲), 희(喜), 사(捨)의 4가지 수행법이 있다. 자(慈)는 친절한 얼굴로 상대방에게 즐거움을 주고자 하는 마음을 뜻하고, 비(悲)는 상대방의 불행에 같이 슬퍼하는 마음을 뜻하며, 희(喜)는 상대방의 성공에 같이 기뻐하는 마음을 뜻하고[47], 사(捨)는 상대에게 이러한 마음을 되돌려받지 못하거나 이러한 나를 남들이 어리석다고 비난해도 평정심을 가지는 것을 말한다. 즉 상대방에게 열린 마음으로 다가서서, 상대의 아픔에 같이 슬퍼하고, 상대의 성공을 같이 기뻐하며, 내가 준 마음을 남이 나에게 되돌려주지 않는다고 하더라도 평정심을 가지는, '공감'의 이타심을 말하는 것이다. 여기서도 '남의 반응과 상관없이 남을 대하는 나의 자세'를 강조하고 있음을 알 수 있는데, 이것이야말로 '자비'로운 마음이라 할 수 있으며, 이러한 마음을 가지는 것은 대승불교의 '공(空)사상'을 몸으로 직접 실천하는 것이 된다. 이를 통해 '나'의 괴로움을 잊는 것 뿐만아니라 나에게 영향을 주는 '사회'의 괴로움마저 돌보아, 이 공통의 괴로움을 아우르고 거기서 평정심을 가지게 되는 것이다.
또한 이 개념에서 발전하여 세상 모든 것은 그물처럼 얽혀 하나로 연결되어 있다는 '화엄'사상이 생겨났다.
2.11. 상징과 신(神)[편집]
지나친 모욕을 당해 순간적으로 화가 치밀어 올라 감정을 주체 못할 때가 있다. 또는 생활에 바빠서 '깨달음'에 대해 잊고 사는 경우도 있다. 또는 '깨달음'에 대해 이해하면서도 막상 자신의 감정 앞에서는 무기력해지는 경우도 있다. 이럴 때는 어떻게 해야 될까?
이렇게 사는 게 바빠 순간순간 깨달음을 잊어버리고 괴로움과 무기력의 감정에 빠지게 된다면, 상징을 통해 계속해서 깨달음을 상기시키는 것이, 감정을 컨트롤하는데 있어서 많은 도움을 줄 것이다. 대표적으로 '나무아미타불, 관세음보살'을 외치는 것(진언[48]), 손가락 동작으로 '깨달음'을 상기시키는 것(수인[49]), 반야심경 등을 노래로 만들어 끊임없이 상기시키는 것, 눈에 띄는 곳에 불상을 두어 볼 때마다 '깨달음'에 대한 생각을 하는 것, 깨달음을 추구하는 사람들과 가깝게 지내서 서로 선한 영향을 주고 받는 것 등이 있다.
진언이나 수인, 노래나 문양 등의 상징을 통해 끊임없이 자신의 상태를 자각하는 계기를 만들자는 것이다. 이는 괴로움을 벗어나게 해주는 유용한 도구가 된다.
또한 불교에서 말하는 여러 신의 존재도, 절대자로써의 신이 아니라, 교훈이나 깨달음을 상기시켜 주는 일종의 "상징"의 역할을 한다.[50]
2.12. 결단[편집]
불교에서는 집착을 끊으라고 말하면서, 집착에서 벗어나는 것을 매우 중요시 여긴다. 집착에서 벗어나면 해탈이라는 마음의 평온에 이를 수 있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과연 집착이란 무엇일까? 그건 생각(또는 행동)을 반복하는 것이다. 한번 했던 생각을 다시 떠올리고, 머리속에 떠오르기 때문에 그것을 하고 싶고, 하고 싶기 때문에 행동으로 나타난다. 사람들은 그 대상에 대한 집착을 버려야된다는 것을 알고는 있어도, 그 대상을 계속해서 머리속에 다시 떠올리기 때문에 집착하게 되는 것이다. 그 생각을 거듭 떠올리는데서 집착이 만들어지므로, 이러한 '생각의 반복'을 하지 않겠다고 단호하게 마음을 먹는 것이, '결단'인 셈.
따라서 불교에서 '깨달음'이란, '반복된 생각을 하지 않겠다는 결심', 또는 '틀에 박힌 생각이나 고정관념에 사로잡히지 않고 창조적이고 자신만의 해석으로 세상을 바라보겠다는 결심', '삶의 관점을 항상 새롭게 만들겠다는 다짐'이라고 봐도 무방하다.[51] [52] [53]
그렇기 때문에 '결단'은 불교의 시작에서부터 지금에 이르기까지 매우 중요한 부분으로 취급되어 왔다. 숫타니파타에서는 '무소의 뿔처럼 혼자서 가라'며 '결단'을 촉구했으며, 선종에서는 돈오(頓悟)가 '결단'에 해당되어 이 이론으로 선종이 교종에서 벗어나는 결정적인 계기가 되기도 하였다. [54]
2.13. 현실[편집]
지눌은 교종의 이론과 선종의 수련을 합쳐서, 배워서 깨닫고 그것을 수련한다는 정혜쌍수[56]를 주장하였는데, 앞의 원효와 마찬가지로 하나의 큰 통일된 이론을 만들고자 하는 시도였다. 깨달음(이론)과 수행(참선)을 하나로 합치려는 정혜쌍수 역시 한국불교에 큰 영향을 미쳤는데, 이는 중국의 교종과도 다르고 중국의 선불교[57]와도 다른, 새로운 사상이라 볼 수 있겠다.[58] ("중국은 사상을 받아들여서 수많은 각론을 만들고, 한국은 중국의 각론을 받아들여서 종합하여 결론을 내며, 일본은 한국의 결론을 받아들여서 그대로 유지하고 이어나간다"고 이야기된다.)
한국의 불교는 원효와 지눌의 영향 아래서 이렇게 하나로 통합되기도 했었고, 현실을 극도로 중요시 하는 유교의 영향도 컸었기 때문에, '속세'마저도 '속세를 벗어난 세상'과 하나로 보아, 현실의 삶에서도 불교의 가르침을 어떻게 적용하고 유용하게 쓸 수 있는지를 끊임없이 궁리하였다. 승려가 따로 있고 일반인이 따로 있는 것이 아니라 그마저도 하나이고, 현실에서 벗어난 청정한 깨달음의 세계가 따로 있는 것이 아니라, 깨달음의 세계는 현실과 하나의 세상이다.
'모든 관념에서 벗어나라'는 것이 불교의 가르침이지만, 정작 지금 이 말 자체는 매우 관념적이다. 따라서 「 '관념에서 벗어나라'는 관념 」에서 다시 벗어나 현실로 돌아와야 되는데,[59] 세상을 버린 뒤에 다시 세상으로 돌아와야 되는 이치인 것이다. 성철스님은 이를 두고 '산은 산이요, 물은 물이로다'라고 말했다.
지금 '산은 산이 아니고, 물은 물이 아니다'는 것은 공(空)이고, '산은 물이고 물은 산이며, 다른 어떤 것도 될 수 있다'는 것은 유식(唯識)의 입장이다. 반면 성철 스님은 저 둘은 단지 탈속의 세상이고 거기서 얻어지는 깨달음은 또다른 관념이라는 허상이기 때문에, 결국 현실로 돌아와야만 그 깨달음이 '끝'이 나므로, 깨달음을 얻고 나면 그 깨달음을 잊기위해 살아야 한다(현실을 살아야 한다)[60]는 의미에서, 옛 고승의 말을 빌려와 '산은 산이요, 물은 물이로다'를 강조한 것이다.[61]
괴로움이란 삶의 현실 속에서 만들어진다. 모든 욕망에서 벗어난 깨끗한 경지가 절에 들어갈 때만 생긴다면, 절에서 나오고 나면 그게 무슨 소용이랴. 괴로움 속에서도 그 괴로운 감정에 최대한 휘둘리지 않으며, 그러한 괴로운 감정을 삶의 한 부분으로 받아들이고 이해하며 살아가자는 것이 불교의 가르침이다.
2.14. 종합[편집]
상좌부 불교에서는 '자아(오온)'는 나의 행위들이 쌓여서 만들어진 것이어서, 선한(올바른) 행위들을 쌓아가면 선한(올바른) 자아가 만들어지고, 악한 행위들을 쌓아가면 악한 자아가 만들어지므로, 괴로움에서 벗어나려면 올바른 행위[62]를 통해 '올바른 자아'를 만들어야 됨을 강조하였다. 즉 언어적 잊힘 보다 '행위'를 강조한 것. 부처님 사후, 제자들은 무리를 이끌고 승단을 만들어 장로가 되었다. 이렇게 승단이라는 '사회'가 만들어 졌기 때문에 '선한 행위'를 강조함으로써 사회적 질서를 세우고자 했던 것이다.
대승불교(나가르주나)는 상좌부 불교의 모순을 해결하고자 했다. 근본 불교는 '내 것이 없음(무아)'를 강조하는데 상좌부 불교는 반대로 '좋은 나를 만들기(오온, 카르마)'를 강조하는 모순이 생겼기 때문이다. 이에 모순을 제대로 설명할 수 있으면서도 사회를 유지하는 질서까지 생각하는 개념을 탄생시켰으니 그것이 '공'이다.[63] '공'이라는 것은 모든 개념은 서로가 서로에게 의존하므로, 한 극단은 혼자 존재할 수 없으며 다른 극단과 함께 존재한다는 것이다. 따라서 '양극단은 공존하기에 하나로 봐야된다'는 것. 또한 모든 가치적 판단은 상대적 기준에 의해 달라지므로 '어떤 것도 될 수 있다'는 가능성을 지닌다. 이러한 공개념은 나와 남을 하나로 보아서 '나의 이익은 남을 이롭게 하는 데서 나온다'는 자리이타와 자비의 개념으로 발전하였고, 이를 통해 '남을 도움으로써 사회가 무너지지 않게 하는' 사회적 질서 역시 설명할 수 있었다.
이후 유식학파에서는 용수의 공사상이 모든 것을 하나로 인식하는데서 문제가 있음을 깨달았다. 현실은 하나가 아니라 수만가지로 다양한데, 용수의 말처럼 모든 개념이 하나로 귀결된다면 이러한 현실의 다양성을 어떻게 설명할 수 있을 것인가에 대한 문제였다. 또한 세상의 다양한 물질들은 우리의 눈, 귀, 코, 입, 피부를 통해 시각, 청각, 후각, 미각, 촉각, 생각 등으로 분별되어 각각 다른 물질들로 받아들여지지만, 이러한 정보는 쉽게 왜곡, 확대 재생산 되어서 괴로움이 된다는 것을 깨달았기에, 이러한 왜곡된 정보들에 벗어나서 바르게 생각하는 것이 중요하다고 말했다. '불행'이라는 정보를 내가 어떻게 받아들이느냐에 따라 내가 괴로워지기도 하고 괴로움에서 벗어나기도 한다는 것이다. 따라서 모든 것은 어떻게 생각하느냐에 달린 문제, 모든 것은 자신의 마음에 달린 문제라는 것을 강조했다.
괴로움이 '주어진 정보를 어떻게 생각하느냐'에 달렸다는 것은, 역으로 '처음부터 의도적으로 좋게 가공된 정보'를 통해 괴로움을 피해갈 수 있다는 것을 의미한다. 이는 가상의 신이나 상징을 믿어 의지하는 것도 괴로움을 잊는 하나의 방편이 될 수 있다는 것. 이에 밀교에서는 여러 신들을 믿는 것 뿐만 아니라 진언(주문)이나 수인(손동작) 등의 상징 마저도 괴로움을 잊는 도구로 사용되었다.
이렇게 삶의 괴로움에서 벗어나는 방법에는 여러가지가 있다.
'나의 것'이라 생각하지 않는 방법(무아), 물질에 의미를 부여하지 않는 방법(명색), 삶은 쌓아가는 것이며 결과는 나중에 나타난다는 것을 깨닫고 옳음을 꾸준히 행하는 방법(오온 또는 카르마), 양극단이 공존하는 것을 알아서 괴로움과 즐거움을 하나로 합쳐 보아 삶을 이해하는 방법(공), 내가 받아들인 정보는 왜곡됨을 알아 내 생각을 왜곡된 정보에 휘둘리지 않게하여 내 마음의 주인이 되는 방법(유식), 의도적으로 가공된 정보를 이용하여 마음의 평안을 유도하는 방법(신이나 상징을 믿음) 등이 그것이다.
이러한 방법들을 종합하자면... 불교가 말하는 괴로움에서 벗어나는 방법이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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욕심과 문제의 대상이 언제까지나 '나의 것'이 아님을 알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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닥쳐온 불행에 '의미를 부여'해서 거듭 괴로워하게끔 하지 않으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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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좋아하는 것'을 따로 두지 않아서, 비교의 씨앗을 만들지 않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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양극단을 하나로 합쳐 보아[64] 삶을 너그럽게 이해하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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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삶은 선한 것을 꾸준히 쌓아가는 것'임을 알아, 문제를 부정하지도 않고 포기하지도 않으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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천천히 사회는 변화하고 개인은 쌓아온 것들을 자신의 '선한 성격'으로 돌려받는다는 마음가짐을 가지는 것.
3. 주요 특징[편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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석가모니는 해탈과 열반으로 가는 길을 안내하는 존재다. 석가모니 부처님은 후에 이상화(理想化)되고 확대되어 절대(絶對) ·무한(無限) 및 그 밖의 성격이 부여되고, 각성과 구제의 근거가 되고 있으나 정복자와 같은 자세는 취하지 않는다. 역사, 문화적으로 유일신교적 관념이 기본 바탕에 깔려 있는 유럽/아메리카/아랍인들이 처음에 가장 혼란스러워 하는 것이 이 부분이다. 사람들이 이 세상의 이해못할 것들을 설명하기 위해 '신'이라는 절대적 존재를 만들어내고 그 존재를 숭배하는 그 '믿음'을 기반으로 하는 것이 전통적인 유럽/아메리카/아랍에서의 Religion의 개념이기 때문에 불교를 공부한 뒤 자국에 불교를 설명하는 유럽/아메리카/아랍인들이 '불교는 Religion이 아니다'라고 하는 경우가 있는 것이 이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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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만 대승불교에서 부처가 반신적 존재로 여겨지는 것은 맞는다.대승이 등장했을 무렵은 이미 붓다가 죽은 지 수 세기가 지난 뒤였고, 그의 삶에 대한 이야기들이 더욱 과장되고 윤색되었기에, 그는 반신적(半神的, semi-divine) 존재로 여겨지기에 이르렀다. 이러한 신비로움은 마지막 열반에서의 그의 지위를 둘러싼 모호함에 의해 고조되었다. 상좌들은 비록 그가 이 세계를 넘어서 마지막 열반에 들었다고 가르쳤지만, 그를 초월적 영역에 존재하는 것으로 생각하는 것 또한 가능했던 것이다. 대승을 따르는 이들은, 붓다처럼 자비로운 존재는 자기 자신을 다른 이들로부터 떼어놓지 않을 것이라고 논했다. 그들은 그런 존재가 ‘저편’ 어딘가에 여전히 있으면서, 지상에서 행했던 것처럼 온갖 존재들의 안녕을 위해 열심히 활동하고 있다고 믿었던 것이다. 이러한 믿음과 궤를 같이하여 그에게 존경과 숭배를 바치고 간구(懇求)하는 봉헌(奉獻)적 신앙도 생겨났다.
-데미언 키온(Damien Keown)[66], 『불교』 - 참고로 같은 책에서는, 불교의 종교적 요소를 제거하고 현대화하여 읽는 독법이 서구에서의 인기를 얻을 수는 있어도 불교의 '인기 없는 요소'를 훼손할 수 있음을 지적한다.[6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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항상 변하고 실체가 없는 허상에 대한 욕망과 집착이 모든 번뇌를 야기한다고 본다. 이를 없애기 위한 수행, 참선이 강조되며 허상을 버리고 현실을 직시(直視)하는 경향이 강하다. 여기서 직시란 '단견'과 '상견'의 관점을 모두 버려 대상을 치우침없이 적관하는 것을 말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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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승 불교에서는 바라밀이라는 방법의 수행을 권한다. 바라밀이란 산스크리트어로 'paramita'. 직역하자면, '저쪽 언덕(피안)에 도달한 상태'. 초기불교에서부터 인간의 '감정'을 강물에다가 비유했는데, '감정'이라는 급류를 인간이 건널 때 대부분의 인간들은 그 강물에 빠져 평생을 고통속에서 허우적댄다고 보았다. 바라밀이란 이 '감정'이라는 강물을 안전하게 건너, 이쪽 언덕에서 저쪽 언덕으로 차분하게 넘어가는 것을 말한다. 즉 불교에서 바라밀이란 해탈하는 방법이다. 6가지의 바라밀이 있는데, 이 6바라밀에 보시, 지계, 인욕, 정진, 선정, 반야가 있다. [68] 보시는 베푸는 것, 지계는 계율을 지키는 것, 인욕은 고난을 참고 이겨 나가는 것, 정진은 노력하는 것, 선정은 마음을 안정시키려고 집중하는 것, 반야바라밀은 진실하고 올바른 지혜로 나머지 다섯 바라밀을 성립시키는 근거로서 중요하게 여긴다. 선정 바라밀은 반야 바라밀이 발현되게 하는 원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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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 것'이 없다는 무아의 개념은, 부처님 유언에 '스스로에 의지하라'는 말과 상충되지 않는냐는 의문이 생길 수 있다. 이는 '삶의 주체인 나'와 '나라고 생각하는 환상'을 구별하지 못해서 생기는 문제이다. 우리는 '나'라는 개념을 버린다하더라도, 실제로는 '삶'을 살아가는 존재이다. 즉, 전자와 후자는 다른 것. 따라서 '삶의 주체인 나'는 신뢰하되, 모든 것은 변하기 때문에 '언젠가는 내 것이 될 수 없는 '내 것이라는 환상'(이 환상은 변하지 않는 것이 있다고 믿기 때문에 생긴다.)'에 집착하지 말라는 것이다. 쉽게 말하면, (삶을 살아가는 주체로서의) 현재의 '나'를 믿기 때문에, 굳이 (변해버렸거나 변해버릴) 과거와 미래의 '내 것'에 집착하지 않는 자세를 말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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불교는 포스트모더니즘 철학과 비슷한 점이 많다. 이 때문에 종종 이를 연관시켜 설명하는 현대철학자들도 많다. 삶을 방해하는 절대적 권위-'언어', '고정 관념'-에 대한 탈권위주장은, 포스트모더니즘와 불교가 공통적으로 가지는 특징이라고 볼 수 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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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승 불교 한정, 여타 종교에 비해 저승과 하늘이 다양하다. 천국과 지옥만 언급하는 개신교나 거기에 더해 연옥의 개념이 있는 가톨릭과는 다르게 대승 불교에서는 천국과 지옥 및 그 외의 장소들까지 상세하게 설명되어 있다[69]. 대승 불교에는 욕계 6천, 색계 18천, 무색계 4천까지 수많은 하늘을 정밀하게 구분하고 있다. 지옥은 불지옥 8종류와 얼음지옥 8종류에, 재판받는 길목마다 지옥들이 존재한다. 때문에 가장 지옥의 종류가 많은 종교이기도 하다. 또한 동물로 태어나는 환생을 지옥에 가긴 애매한 죄를 가진 영혼이 가는 형벌로 분류해 놓았다. 그리고 축생계보다 죄가 무겁지만, 지옥을 갈 정도는 아닌 정도의 죄를 지은 영혼은, 불교 고유의 세계인 아귀도나 아수라 등을 간다고 명시되어 있다.
그러나 실제 석가모니는 '우리가 어디에서 왔고, 어디로 가는지 따위를 고민치 말고, 지금 당장 우리가 겪고 있는 고통에 집중하여 현실을 살라.'며 저승에 대해 비중을 두지도 관심을 가지지도 말라고 가르쳤다. 이는 현실을 직시하는 경향이 강한 불교의 색감이 강하게 드러나는 부분이다. 석가모니의 행적을 살펴봐도 충분히 현실적인 색채를 느낄 수 있는데, 고행을 포기한 후에 깨달음을 얻거나 타인을 믿지 않고 스스로가 자기 자신을 구원해야 한다는 논리가 그렇다. -
해탈에 도움이 안되는 쓸데없는 형이상학적 질문에 석가모니는 아무런 대답도 하지 않았다. 위키백과 14무기 참조. 여기서 '무기(無記)'란, '현실의 삶에 도움이 되지 않으며 답도 찾을수도 없는 형이상학적 질문은 기록하지 않는다'는 뜻이다. 물론, 불교에 형이상학적인 질문이 많지 않느냐고 반문할 수 있을 것이다. 여기서 말하는 '형이상학적인 질문'이란 '형이상학을 위한 형이상학'을 말하는 것으로, 불교에서 어쩔 수 없이 사용되는 형이상학 질문은 오로지 '현실의 삶 - 그 괴로움'에 기반을 두어야 한다는 것이 불교의 기본 원칙이다
4. 분파[편집]
현재의 불교는 크게 대승 불교(마하야나)와 상좌부 불교(테라와다), 티베트 불교로 구분된다. 자기인생을 자기가 살지 못하고 남에게 얹혀서 살려는 사람이 중생이고, '남의 인생을 살지 않고 자기 인생을 살며, 과거에 살지 않고 현재를 살아라'는 것이 본디 불교의 가르침인데, 여기서 '바른 말과 행동들을 쌓아서 올바른 삶을 살자'는 것이 상좌부(테라와다)이며, 여기서 '남을 조금이라도 도와줘야 되지 않겠냐?'며 자비를 강조하는 것이 대승이다. 사람들은 '좋아하던 것'이 다르게 변해간다는 사실을 받아들이지 못하고 괴로워하는데, 이 생각에서 벗어나서 보고 느낄 때 '좋아하는 것'을 따로 두지 않아 호불호에서 자유로워지는 것이 불교의 가르침이다. 보통 괴로움에 빠진 사람들은 자신의 삶을 살지 않고 다른 것에 의미를 두며, 과거에 얽매여서 현재를 괴롭힌다.
대승 불교는 한자문화권에 주로 분포하고 있으며, 과거에는 인도 서북부, 중앙아시아, 동남아시아에서도 흥했으나 현재는 소멸하였다. 상좌부 불교(테라와다)는 스리랑카와 태국, 미얀마를 비롯한 베트남을 제외한 동남아에 주로 분포한다. 티베트 불교는 티베트와 몽골에 주로 분포한다. 티베트의 불교는 상좌부 불교, 대승 불교, 밀교를 시대별로 차례차례 받아들인 북전 불교와는 달리 인도 반도를 통해 모든 사상을 한꺼번에 받아들였으며 독자적인 체계를 갖추게 되었다. 실질적으로는 밀교가 강하긴 하지만.
이외에도 불교는 북미나 유럽에 전해져 여러 지역에서 다양하게 분포한다. 그 중 티베트 불교가 북미/유럽에서 가장 대중화된 불교 종파가 되었다. 프랑스 같은 경우는 일본식 선불교와 함께 가장 인기 있는 불교 종파이기도 하다. 게다가 티베트를 탄압하는 중국조차도 화북지역 한족이 티베트 불교를 열렬히 신봉하는 아이러니한 모습을 보이고 있는데, 청나라가 티베트 불교를 받아들인 것이 지금까지도 큰 영향을 미쳤다. 중국에서도 세가 상당히 크며, 티베트인 뿐만 아니라 일반 중국인들[70]도 상당히 많이 믿고 있기 때문에, 달라이 라마 14세가 망명 중임에도 불구하고 신앙 자체에 대한 탄압은 받지 않는다. 물론 티베트 독립운동은 중국에서 국가분열죄로 다스린다. 북미/유럽의 유명인 중에 티베트 불교 신자가 의외로 많다. 리처드 기어, 스티븐 시걸 등. 티베트 불교 이외에는 일본 선불교가 있다. 일본 선불교 신자로 대표적인 이는 스티브 잡스.
대승 불교(Mahayana)가 발전되었을 시기에는 대승 불경을 읽지 않는 부파 불교를 대승 측에서는 소승 불교(Hinayana)라고 칭하였다. 그러나 대승 불교의 관점에서 붙인 비하적 명칭이라는 성격 때문에 1950년 열린 세계불교도우의회에선 소승 불교라는 표현은 어떠한 불교 종파에 대해서도 써선 안된다고 결정하였다.
5. 역사[편집]
부파 불교는 보통은 상좌부(Sthaviravada)와 대중부로 나뉜다. 근본 불교가 끝나고 제자들 사이에서 사상적인 분열이 일어나는 시기이다. 상좌부(Sthaviravada)에 속하는 분별설부로부터 테라와다가 나왔으며, 오늘날에 흔히 일컬어지는 상좌부 불교는 이 테라와다이다.
대승 불교는 부파 불교의 한 종파인 대중부에서 발전하여, 3세기 용수가 공(空)사상을 주장함으로써 시작된 불교를 말한다. 크게 중관학파와 유식학파로 나뉜다. 중관학파는 '양 극단을 하나로 보아야 하며, 분별해서 말해선 안된다는 반야를 주장하였고, 유식학파는 내가 보고 느끼고 생각하는 것이 내 마음을 바꾸기도 하고, 또한 내 마음이 내가 보고 생각하고 느끼는 것을 바꾸기도 하므로, '모든 것은 마음의 문제(일체유심조)' 라고 주장하였다.
5.1. 전파[편집]
불교는 석가모니 생전에 이미 교단(敎團)이 조직되어 포교가 시작되었으나 석가모니에 의해 교의가 전해져 내려왔다.
대승 불교는 북방 경로를 통해서 중앙아시아에 전해졌는데 이는 도시 상인 계급의 불교 선호 및 브라만교,카스트 제도에 대한 유목민들의 반발과 거부감에서 비롯되었다.[74] 상인들의 호응을 받는 종교였던 불교는 이후 중앙아시아에서 동북아시아로 전파되었다. 서역(西域)을 거쳐 중국으로 유입되는 과정에서 여러 인도인, 토하라인, 중국인들의 노력을 통해 불교 경전이 한어로 번역되었다. 이후 중국에서 한국으로, 한국에서 일본으로 전래가 이루어져 세계적 종교로서 자리를 굳혔다. 베트남 역시 한자문화권으로 중국을 통해 대승 불교가 전파되어 주류가 되었다. 이 밖에도 대승 불교는 남방 경로를 통해 동남아시아에도 전해져 성행하였다. 스리위자야는 대승 불교를 국교로 삼았으며, 크메르 제국도 대승 불교를 받아들였다. 하지만 베트남을 제외한 동남아시아의 대승 불교는 이슬람과 상좌부 불교의 팽창으로 소멸하였다. 현재 대승 불교는 한자문화권이나 동북아시아 이주민들이 많은 지역에서만 강세이다.
부파 불교의 한 부류인 상좌부 불교는 스리랑카와 타밀족의 촐라 왕조의 영향을 받은 곳에서만 유력하였다. 그러다가 11세기 이슬람의 인도 정복 이후 동남아시아로 전파되어 성행하였다.
중국에서 불교가 유행하게 된 결정적인 계기는 위진남북조 시절 한족 지식인들의 염세주의, 유목 정복왕조의 중화주의 견제를 위한 불교 진흥 정책이었으며, 이와는 별 관련이 없던 한국과 일본에서 불교가 받아들여진 계기는 왕즉불 사상 때문이었다. 이는 중앙집권을 강화할 명분을 만들어주어 지배계층의 수요를 만족시켜 주기 위한 일종의 정치적인 프로파간다에 가까웠지만 말이다. 사실 왕즉불 사상은 정치적 프로파간다 정도가 아니라 석가모니의 사상에 완전히 배치(背馳)되는 것이다. 하지만 종교와 정치의 결탁은 언제나 있어 왔으니.[75] 백제의 성왕(이름 자체가 전륜성왕에서 따옴), 신라의 경우엔 법흥왕부터 진덕여왕까지 왕권 강화 차원에서 불교식 왕호를 사용했고, 진흥왕의 경우엔 전륜성왕을 자처하기도 했다. 고려시대에도 태조 왕건의 청동상을 불상처럼 만들거나, 고려사 악지에 임금을 '제왕 부처'(海東天子當今帝佛)라고 칭하기도 했다.
5.2. 분포 관련 역사[편집]
본토인 인도 반도에서는 석가모니 사후 마우리아 왕조 시대 아소카 대왕의 보호와 포교로 크게 교세를 확장하여 6세기경까지 전성기를 이루었으나, 여전히 다수 종교였던 힌두교에 점점 밀려 교세가 약해졌다. 오히려 인도로부터 선교를 받은 박트리아 등지의 중앙아시아에서 강세였다. 하지만 이슬람의 유행으로 중앙아시아의 불교세도 점차 사그라들었고, 이 연장선으로 14세기 이후 인도까지 이슬람에 정복당하여 크게 세력이 약화되었고, 신자들도 이슬람교로 대거 개종되었다. 이때 수많은 인도 북동부의 불교 사원과 유적이 파괴됨으로써 거의 소생 불가의 치명타를 받고 인도 본토의 불교는 절멸하였다. 예수의 고향인 팔레스타인과 이스라엘에서는 지금도 아랍계 기독교인들이 상당수 거주하고, 기독교 교파 여럿이 모여서 성지 관리를 하는 등 현재까지도 기독교의 명맥을 이어나가는 것과는 대조적이다.
인도 영토 내의 티베트계 지역 주민들은 티베트 불교를 믿고 있다. 인도에 병합된 시킴은 원래부터 불교 왕국이었고, 아루나찰프라데시등 미얀마, 티베트와 접경 지역인 인도 동북부 지역에도 토착 불교 신자가 꽤 있다. 티베트에서 망명해온 티베트 불교 승려들의 포교도 인도 불교 신자 수 증가의 원인으로 꼽히고 있다.
현대에는 빔라오 람지 암베드카르의 불교로의 개종을 시발점으로 하여서 마하라슈트라 지역을 중심으로 나바야나(Navayana)라는 불교 종파가 인도에 발생하였다. 하지만 이는 옛부터 이어져온 것이 아니라 새로이 만들어진 신흥 종파이다. 일부 카스트 제도에 반대하는 사람들과 하층 계급, 일부 지식인들을 중심으로 나바야나 신도가 유지되고 있다. 마하라슈트라주에는 나바야나 불교 정당이 있을 정도. 물론 그래봤자 인도 전체 인구의 1% 정도밖에 되지 않는다.
원나라는 티베트 불교가[76] 국교였으며, 한국의 경우에는 삼국시대 때부터 불교가 성행하여 삼국 및 고려 시대에는 국가와 협력-공생 관계였으나, 조선 시대에 들어서면서 유교에 밀려 차별당하고 박해[77] 받기도 했다.[78]
20세기 들어 태국과 대만을 제외한 중국과 동남아시아 등지 상당수 불교권 국가들에서(몽골, 중국, 캄보디아, 베트남, 라오스 등) 공산주의 정권이 들어선 이후로는 공산당에 의해 탄압받기도 했다. 몽골의 경우에는 대다수의 사원이 강제로 폐쇄당하기도 했고, 중국도 문화대혁명의 광풍 속에서 상당수의 사찰과 불교 문화재들이 홍위병들에 의해 훼손되기도 했다. 물론 공산권이라고 해도 나라에 따라 사정이 은근히 다르기는 했지만 말이다. 스리랑카에서는 힌두교 세력과 내전을 치르기도 했고, 미얀마 등지에서는 군부정권이 버마족의 민족적, 국가 정체성으로 불교를 밀어, 21세기 들어서 불교 근본주의가 대두되고, 이로 인해 로힝야족 탄압 등을 초래하기도 했다.
인구 대비 불자 수가 많은 나라들은 스리랑카를 제외하면 동아시아와 동남아시아에 있다. 전통적으로 태국과 미얀마에 많은 신도들이 있으며, 절대적인 수로는 불자 인구가 세계 1위인 중국을 비롯해 티베트, 몽골, 등도 불교 인구 다수 지역이다. 세계구 급으로 골고루 퍼진 기독교와 이슬람과는 달리 불교는 중국과 불교권 동남아시아를 중심으로 집중되어 있으며, 서구 일부 지역을 제외한 동유럽, 중동, 중남미 등 나머지 지역에서는 거의 교세가 없다시피 하다. 본고장 인도에서도 교세가 매우 약해서, 1% 수준으로 시크교나 기독교 인구보다도 적다. 또 특이하게 이슬람권인 오만, 카타르, 쿠웨이트 등지에도 신자가 조금 있는데, 이는 아시아계 외국인 노동자의 영향이다.
20세기 후반 이후로 일부 유럽, 미국 등지에서 소수종교로서 점차 교세가 커지고 있다. 현재도 증가 중. 예전에는 티베트 불교나 일본 불교(젠 부디즘)이 중심이었는데,[79] 근래에 들어서는 한국에서 출가한 북미/유럽인 승려들이나 불자 교민들의 불사와 노력을 통해 한국 불교도 점차 퍼져나가는 중이다. 게다가 최근 서구 백인들 중에선 절에 다니는 비율이 증가한 추세이며, 빌 클린턴과 같은 유명 인사들도 명상이나 불교를 공부하는 모습이 언론에 노출되어 영향을 미치고 있다.
만약 “절이 가장 많은 도시가 어디인가?”라는 질문을 받게 되면 대다수 사람들은 아시아의 어느 나라라고 응답하게 될 것이다. 그러나 세계에서 가장 많은 절이 있는 도시는 2016년 기준, 놀랍게도 미국의 LA(로스앤젤레스)이다. 현재 LA에는 무려 300개의 사찰이 있으며 75개의 불교협회, 2500여 개의 명상센터가 있다고 한다. 아놀드 토인비는 불교가 북미/유럽에서 주류 종교가 될 것이란 말을 했는데, 물론 과장된 점이 없지는 않지만, 의미심장한 발언이다. 다만, 2016년 갤럽 기준 미국의 불교 신자 수는 1% 남짓하며, 이는 0.8%인 이슬람교와 거의 비슷하다. 기독교는 73.7%. 아직도 미국 내에서 불교 신자의 비중은 실제로는 매우 낮은 편이다.
중국 불교의 경우 문화대혁명의 여파가 가신 이후로 중국 정부의 암묵적인 지원으로 현재 중국 내 불교 신자는 최소 2억 명이 넘는 것으로 조사되고 있으며, 최근 몇 년간의 증가세를 감안하면 최소 몇 년 내에 4억 명을 돌파할 것이라는 전망이 나온다. 현재 중국을 제외한 세계 불교 신자가 3~4억 명 내외인 것을 감안하면 향후 국제 사회에서 중국 불교의 위상은 더 커질 것으로 전망된다. 중국 불교는 중국불교협회를 중심으로 문화대혁명 시기에 잃어버린 옛 영광을 재현하는데 성공하면서 동남아는 물론 세계 불교계에서의 주도권 쟁취에 적극 나서고 있다. 특히 세계불교포럼을 주최하면서 중국 불교의 영향력 확대를 꾀하고 있는 중. 자세한 사항은 중국/문화 참조.
아프리카에는 불교 신자가 거의 없다. 위키백과의 세계의 불교(영어) 내용에 따르면, 10억여 명의 인구가 있는 아프리카에서, 불자의 수는 10만여 명에 불과하고 인구에서 불자가 차지하는 비율도 0.012%로 가장 낮단다.
유럽에서는 칼미크 공화국(러시아의 자치 공화국)이 유일한 불교 국가다. 이유는 칼미크 공화국은 몽골계 민족 칼미크인이 중심이 되는 나라이기 때문이다. 과거 약 5만명의 오이라트인이 이 지역으로 이주한 것이 칼미크 족의 기원으로, 이들이 불교를 믿고 있어 불교를 국교로 삼게 되었다. 칼미크 남쪽은 다게스탄 공화국, 체첸 공화국 등 무슬림이 많고, 칼미크 북쪽은 정교회가 지배적이라, 이슬람과 정교회 사이에 불교가 끼어있는 오묘한 상태다.[80] 일찍이 러시아는 옐리자베타 여제 시절에 불교를 러시아 제국의 종교들 중 하나로 인정하였고, 칼미크 뿐 아니라 동시베리아의 투바와 부랴티아에서도 불교세가 강하다.
또 오스트레일리아령 크리스마스 섬에도 불자가 많다. 아마도 이 섬의 인구 중 약 70% 정도가 중국계이기 때문인 것으로 보인다. 같은 이유로 싱가포르 역시 불교 강세 국가이다.
6. 불경[편집]
6.1. 근본 불교[편집]
6.2. 부파 불교[편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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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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율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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위나야 삐따까(Vinaya Piṭaka)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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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분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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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분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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십송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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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부신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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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하승기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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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탈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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범망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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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가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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삼취정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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논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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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비담마 삐따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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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족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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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3. 대승 불교[편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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반야부 경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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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품반야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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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품반야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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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묘장구대다라니 - 천수경의 일부이기도 하면서 독립적인 경전으로 인정받기도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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논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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금강삼매경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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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지도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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삼론(백론, 십이문론, 중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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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장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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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정신수대장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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티베트대장경
7. 성지[편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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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다가야: 석가모니가 깨달음을 얻은 곳. 마하보디 사원과 깨달음을 얻은 장소의 보리수 나무를 볼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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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르나트: 석가모니가 최초로 설법 한 곳. 오비구에게 사성제와 무상고무아를 가르쳤다. 사슴동산을 뜻하는 녹야원이 위치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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쿠시나가르: 석가모니가 돌아가신 곳. 히란냐바티강에 석가모니를 화장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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슈라바스티: 코살라국의 수도. 사위성. 석가모니가 가장 오래 머물렀던 기원정사(기수급고독원)가 있는 곳.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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산카샤: 간담바 나무 아래에서 천개의 몸을 나뉘는 기적을 행한 곳.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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라지기르: 마가다왕의 수도. 왕사성. 석가모니의 주된 불교 교화의 중심지. 가까운 곳에 제자를 가르친 영취산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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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이살리: 리차비족의 주도로 자이나 교조 마하비라의 탄생지여서 자이나교가 득세하였으나, 석가모니의 가르침 하에 불교로 전향된 도시.
8. 붓다[편집]
9. 각종 오해와 통념들[편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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불교에 관한 대표적인 오류 중 하나다. 애초에 석가모니가 했던 말은 ‘탁발해서 얻어먹는 놈들이 고기를 탐하고 그러면 보기도 안 좋고, 특히 자기를 위해 죽여서 고기로 만들면 살생하지 말라는 계율을 간접적으로 범하니까 탁발로 뭘 주든 그냥 바라에 담아주는 대로 먹어라.’였다. 좀 더 쉽게 설명하면 자신이 고의로 살생을 저질러서 얻은 고기가 아닌 자연사한 동물로부터 얻은 고기는 먹어도 좋다였다. 이러다가 불교가 중국으로 전해지고 남북조시대의 양무제에 이르러, 승려들은 절대 고기 먹지 말라는 계율이 만들어졌고 이 관습이 한국에서도 비판없이 전래되었다.# 반면에 상좌부 불교 쪽의 동남아에서는 과거든 현재든 고기, 생선을 가리지 않고 먹으며, 현대 불교의 어지간한 거대 종파에서도 이제는 계율 위반도 아니고 승려들도 고기, 생선을 굳이 가리지 않고 먹는다. 다만 한국 최대 불교 종파인 조계종에서는 여태껏 육식을 금지하지 않았는데 2013년 조계종 승려들 도박 파문이 벌어지면서 자체 이미지를 쇄신하겠다고 계율로 승려들은 아프지 않으면 고기 먹지 말라고 규정을 만들어서 금지시켜버렸다. 자정 노력은 좋지만 약간 시대 흐름을 좀 거스르긴 한 케이스. 또한 고기 먹고 오신채 먹고 그러면 '힘이 좋아져서' 수행에 방해되기 때문에 잘 먹지 않기도 하다. 한국 최대 불교 종파인 조계종 승려들이라면 나이 어린 승려들이 성장을 위해, 또는 아플 때나 대접 받은 요리를 먹을 때 일부 들어있으면 굳이 빼내지 않고 그냥 먹는 정도인 듯. 승려도 이런데 당연히 불교 신자들은 고기건 생선이건 오신채건 잘만 먹는다. 다만 몇몇 신도가 개인적으로 채식을 하는 경우는 있다. 승려들 중에서도 소림사의 경우 무술시범승(무술 시범단)과 전투승(무술 수련단)은 고기와 오신채를 되려 일반인보다 더 많이 먹는다. 이유는 그래야 무술을 할 수 있기 때문이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파계승으로 간주하진 않는데 이는 어디까지나 임무 목적상의 육식 섭취일 뿐이지 살생을 즐기는 게 아니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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단지, 종단에서 내부적으로 "타인의 시선을 조심하라" 고 주의하는 지침 정도는 내리는 듯하다. 그도 그럴 것이, 스님들이 육식을 하는 모습을 보면 놀라 까무러치는 사람들이 하나 둘이 아니다. 과장이 아니라, 실제로 현장에서 경기를 일으키는 목격자들도 간혹 있다. 그러니 눈 앞에서 스님이 고기 뜯는다고 땡중이나 파계승이라고 단정하지 말자. 종파마다 다르다.[8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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만일 불교에서 육식을 완전히 거부를 한다면 태국 요리에서 육류요리가 발달했을 리가 없으며 티베트 요리는 지역이 산악지대라는 특성 때문인지 오히려 채소의 비중이 적은 편이라고 한다. 일본 또한 불교 때문에 육식 금지령이 내려져서 천 년 넘게 고기를 안 먹다보니 일본인들이 고기를 먹을 줄 몰라서 메이지 유신 때 들어온 고기 요리를 낯설어하여 고기 비중을 낯춘 돈까스, 카레, 고로케 등을 개발한 걸로 알기도 하는데, 소, 닭, 돼지 같은 메이저 육류는 정말 금지했지만 멧돼지, 토끼, 곰, 오리 등 다른 고기류들은 실컷 먹어서 고기를 구경도 못한 민족은 절대 아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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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약하자면 육식 자체를 금지하는 것이 아닌 살생 금지로 인해 어느 정도 자제하는 것으로 보는 것이 옳으며 실제로도 자기 자신을 위해 도축된 것이 아닌 고기는 먹어도 된다고 한다. 본인이 평범한 일반인 불교 신자라면 동물이나 곤충을 직접 잡아 먹는 행위나, 활어회, 산낙지 등의 주문 즉시 손질해 내놓는 해산물, 사육장과 붙어 있어 바로 잡아 요리하는 닭요리집 같은 곳 정도만 금하면 된다는 소리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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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본의 승려들은 결혼을 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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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건 한국과 같은 마찬가지로, 종파마다 다르다. 단지 한국과 차이점이 있다면 일본 불교계는 결혼을 허용하는 종파가 다수라는 것.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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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장경 전체를 기준으로 하면 불경의 총 분량상 절대 불가능하다. 양이 적은 불경 몇 권의 경우 달달 읽고 다니다 보면 외울 수도 있지만[92] 팔만대장경 전체를 어떻게 다 외우고 다니겠는가. 물론 초기 불교 시절의 스님들은 정말 다 외우고 다녔지만, 당시의 초기 경전들은 분량과 종류가 후기 경전들만큼 다양하지 못했고, 문헌의 형태도 시나 단문(수트라)였으며, 구전의 한계로 부파마다 차이점이 보인다는 점도 감안해야 한다. 그리고 구전과 암기로 경전을 전승하던 초기 불교 시절 스님들도 결국 패엽경을 거쳐 경전을 문서화하게 된다. 동북아 스님들과 달리 자체 노동을 통한 식량생산도 안 하고 오롯이 불교 수행생활에만 전념하면서도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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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외적으로, 남전불교계의 경우 삼장법사 칭호를 얻으려면 8천 장이 넘는 빨리어 삼장을 정말로 한 글자도 안 틀리고 다 외워야 한다(...). 아무리 빨리어 삼장이 북방불교계 대장경보다 적다지만 이는 보통 일이 아니기 때문에 삼장법사 칭호를 받은 스님이 한 번 나오면 그 스님은 전 국민의 존경을 받을 정도다. 물론 이해도에 무게를 두는 북방불교계에서도 삼장법사 칭호를 받는 것은 그 시대의 불교계에서 두루 인정을 받아야 할 수준에 올라야 한다는 의미이기에 매우 어려운 일이다. 괜히 삼장법사라는 칭호가 불교 종파에 상관없이 극존칭에 속하는 게 아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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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승세계에서는 염라대왕이 킹왕짱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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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떤 경우엔 자살을 하게 되면 저승사자가 되어 죽은 사람들을 데리러 다니며 삶이 얼마나 소중한지 깨우치며 반성하라는 벌을 받게 된다고도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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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고 중요한 사실은 윤회도 생전에 얼마나 선행을 했는지에 따라 갈린다. 태국 같은 경우엔 이 점을 교묘하게 이용하여 지도층들의 부의 축적을 정당화시킬 정도다. 놀랍게도 윤회를 통한 정당화는 부처 생전에도 있던 일이다. 이러한 태도에 대해서도 부처가 직접 힐난한 바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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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약하자면 자살하지 않고 정상적으로 삶을 마치되, 생전에 얼마나 선행을 비롯해 훌륭한 일을 하며 살았는지에 의해 다음 생이 결정된다. 선한 일을 많이 한 이타적인 사람이라면 다음 생에 유복한 집안의 자식 등 좋은 환경에서 태어날 것이며, 악행을 주로 했다면 생전보다 나쁜 환경에서 태어나거나, 심하면 사람으로 태어나지도 못하고 짐승이나 벌레로 태어날 것이다. 불교의 기본 행동원리는 '노력과 수행 없이는 아무것도 얻지 못한다'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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불교는 전쟁과 폭력을 한번도 저지르지 않은 평화로운 종교이다.아쇼까는 전륜성왕(轉輪聖王, Cakravartin)이라는 전통적 개념, 곧 정의로운 불교적 왕을 모델로 삼으려 한 것으로 보인다. 그러나 비록 신화적인 전륜성왕이 다르마의 힘에 의해 평화적으로 정복한 것으로 그려지긴 했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가 군대를 보유하고 있었고 이웃 왕국들을 여행할 때 군대와 함께 갔다는 점은 주목할 만하다. 그런 불합리한 점을 고려하여 몇몇 학자들은 무력의 사용에 대한 불교의 입장이 처음에 보이는 것만큼이나 분명한지에 대해서 의문을 표하기도 하였다. 그러한 유보적 태도는 후대의 문헌에 의해 강화된다. 초기 대승의 자료로서 아마도 2세기 저작으로 추정되는 『사띠야까의 변화Satyakaparivarta』〔『불설보살행방편경계신통변화경佛說菩薩行方便境界神通變化經』 또는 『대살차니건자소설경大薩遮尼乾子所說經』으로 한역됨〕는 일종의 정당한 전쟁옹호론의 초기 형태를 제시하였는데, 왕은 전쟁에 의지하기 전에 무엇보다도 먼저 우호적으로 대하고, 도움을 주고, 이어 위협을 가하도록 노력해야 한다는 전제를 달면서도 전쟁은 다른 수단이 소용없을 때 추구할 수 있는 것이라고 주장한다. 이 문헌은 자비나 방편과 같은 대승의 개념을 사용하여 불교의 영향력을 확산시키려는 정복 전쟁을 옹호하면서 전쟁과 고문, 가혹한 처벌을 정당화하고 있다. ...... 스리랑카의 초기 역사에 따르면, 싱할라족과 인도 출신 타밀족 사이에 수많은 전투가 벌어졌다. 싱할라족 왕인 둣타가마니(Duṭṭhagāmaṇi, 1세기)는 타밀족 장군인 엘라라(Eḷāra)를 격퇴함으로써 민족적 영웅으로 여겨졌고, 이 섬의 역사를 담은 『대사(大事, Mahāvaṃsa)』라는 5~6세기 싱할라 연대기는 이 승리를 기리고 있다. 이 연대기는 그 분쟁을 불교도와 힌두교도 사이의 일종의 ‘성스러운 전쟁’으로 묘사하면서 불교의 승리를 찬미한다. 여기에서는 (아쇼까가 그랬던 것처럼) 둣타가마니가 전쟁에서 승리한 뒤에 회한을 느끼지만, 깨달은 승려(아라한)의 말을 듣고 다르마를 수호하는 과정에서 그가 불교의 계율에 맞지 않는 것은 그 어떤 것도 하지 않았음을 이야기하고 있다. 오늘날 고(故) 왈폴라 라훌라(Walpola Rāhula, 1907-1997)와 같은 지도자급 승려들은 ‘정치적 민족주의’를 승인하는 말을 하면서 둣타가마니의 군사작전을 ‘십자군’으로 묘사하곤 하였다.
데미언 키온(Damien Keown)[98], 『불교』-
불교 국가 중에서도 정복과 약탈에 적극적이었던 국가들도 있다. 준가르 칸국이나 칼미크인들이 세운 칼미크 칸국의 경우 노예 사냥이 주 산업 중 하나였다. 우리에게 익숙한 요나라(거란)도 엄청난 불교 국가였다. 고려를 침공한 요 성종의 이름은 문수보살의 종이라는 뜻의 '야율문수노'였을 정도다. 이러한 편견(?)은 상당부분 달라이 라마 14세의 평화주의 노선에서 비롯되었다. 현대에도 동남아 불교 신자들이 무슬림들과 힌두교 신자들을 린치하는 사례가 발생한다. 일례로 미얀마 출신의 로힝야 족의 경우, 국가적으로 불교 문화권이지만 이들은 무슬림들이기 때문에 국가에서 추방당해 보트피플이 되었다.[99] 일본의 승려들도 태평양 전쟁에 극도로 동참했다는 내용의 서적 《전쟁과 선》도 함께 참고해 보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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불교 신자들은 현실을 등한시하기 때문에 게으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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교리로만 따지면 불교만큼 현실적으로 신앙생활이 힘들고 삶이 빡쎈 종교도 드물다. 불교는 신자들이 맹목적인 믿음을 가진다고 상을 약속해주지 않는다. 오로지 모든 것은 신자 스스로의 노력과 수행, 학습, 선행의 실천에 의해서만 달성된다. 이를 위해서 무엇보다 요구되는 것은 현실을 명확히 파악하는 지성, 그리고 근면성이다. 현실에서 오로지 빌어먹기만 하는 사람이 부자가 될 수는 없듯이, 불교 또한 의미 없는 믿음보다는 목적이 명확한 실천을 중요시하며, 현실적으로 이룰 수 없는 것은 가르치지 않고 믿으라 하지도 않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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순수한 불교 국가들은 모두 가난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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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로 근본주의 성향의 기독교, 이슬람 관련한 선교단체에서 자주 사용하거나 불교 단체 중에서 무소유 정신을 과대 해석하여 왜곡하여 쓰는 레퍼토리이다. 해당 주장은 대개 대표적 반례인 일본이나 그 외 동남아의 부유한 화교들을 제외하는 방식 등을 이용하여 통계를 짜깁기해서 만들어진다. 반대로 기독교 등의 신앙을 고수하는 국가들 중 경제적, 문화적으로 낙후된 경우를 얼마든지 찾아 볼 수 있다. 실로 논할 가치가 없는 유치한 프레임 공격. 원래 종교가 재산의 많고 적음을 가지고 사람을 차별하지 말라는 가르침을 포함하기 마련인데, 특정 종교 신자들이 부유하니 가난하니 같은 주제를 가지고 선교에 이용한다는 자체가 종교인으로서 잘못된 행동이라 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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불교는 중년층이나 노년층이 믿는 고지식한 종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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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종의 일반화이자 흑백 논리적인 발언이다. 이는 불교를 전파하는 승려들이 고승들이 주를 이루고 있으며, 불자들에게 하는 법문이 고연령층 불자에 맞춘 (즉 젊은 층에게는 난해한) 법문 방식이다보니 생긴 오해로 현재는 젊은 청년층들의 입장에 맞춰 법문을 하는 승려들도 늘어나고 있다. 장장 혜민만 하더라도 몰락하기 전까지는 청년들의 여러 문제를 해결해주는 방식의 활동을 해왔고, 그런 만큼 청년 불자들이 주로 지지했었던 승려이다. 고연령층 승려도 예외는 아닌 게, 법륜 역시 청년들을 위한 즉문즉설을 상시 열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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불교는 논란을 많이 일으키는 종교이며 스님들은 민폐를 많이 저지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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불교 관련 사건 사고로 생긴 일반화. 특히 승려들 중에서 도박 사건등의 반드시 지켜야 하는 오계를 어기는 케이스가 나오는 경우도 발생한 적도 있고, 심지어 불교 신도들 중에서도 종종 문제를 일으키며 민폐를 일으키는 사례도 나오다보니 요즘 불교는 문제가 많다는 비판 의견이 더욱 수면 위로 올라오고 있다. 또한 최근에는 혜민의 풀소유 논란과 불교인들 및 신도들이 나랏말싸미를 옹호하는 현상까지 있다보니 이런 의견은 더욱 불이 붙는 중이다. 더욱이 이런 문제점 때문에 나무위키에서도 대한민국 불교의 비판 항목이 서술되었을 정도.
그러나 이런 문제는 불교에 한하지 않고 모든 종교에서도 안고 가는 문제이며, 굳이 불교로 한정하더라도 이런 문제에 관심을 가지고 활동하거나, 논란을 일으키지 않고 청결하게 지내는 승려들은 찾아보면 있다. 이런 문제는 위에 서술된 불교는 평화로운 종교이다라는 오해와 연결되는 부분이며, 즉 불교는 청결할 거라는 지나친 환상을 가지는 바람에 발생한 것이라고도 볼 수 있다. 물론 이런 오해가 퍼진 가장 큰 원인은 사건 사고를 접한 사람들의 일반화이기도 한데, 특히 불교 근본주의를 지닌 신도들 중에서 이런 원인을 쉽게 찾을 수 있다. 특히 인터넷 등이 활성화 되면서 이들 중에서는 SNS나 인터넷 뉴스의 종교 관련 기사 등의 덧글창을 통해 불교는 가망 없다고 주장하거나, 이예 불교를 바꿔야 하는 개혁 운동을 해야 한다고 주장하는 부류가 나오는가 하면 심한 경우에는 불교나 승려들을 일반화와 함께 비난하는 사람들까지 늘어나고 있다. 당연히 이런 오해는 불교는 중년층이나 노년층이 믿는 고지식한 종교란 오해와 연결되기도 하는데, 젊은 층에서 이런 민폐를 보는 순간, 불교는 꼰대들이 많은 종교라 생각해서 거부감이 느끼게 될수도 있기 때문. 심지어 타 종교의 극단주의자들이 이런 문제를 빌미 삼아 불교를 비난하거나 자기 종교가 청결하다 주장하는 저질스런 댓글을 쓰기까지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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불교는 악인을 미화하는 종교이다/불교는 위선적인 종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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불교는 모두를 포용하는 종교로 알려진 만큼, 이 포용은 범죄자들도 예외는 아니다. 그런 만큼 범죄자들을 수용하는 교도소 등에 가서 포교를 하는 모습을 보이지만, 일반적인 시선에서 보면 범죄로 민폐를 끼친 범죄자들은 필요 없는 사회악으로 여겨지는 만큼 이런 행위는 악인을 미화하거나 실드치는 게 아니냐는 시선도 피할 수가 없다. 더욱이 아래 항목에 서술되어 있다시피, 불교라고 해서 타 종교를 비판하지 않은 적은 없기에, 타 종교와 화합하려는 움직임은 오히려 위선적이란 생각도 나오기도 한다.
그러나 불교는 악인에게 자비를 베풀어도, 그들의 범죄 행위까지 옹호하지는 않는다. 당장 앙굴라마라 설화만 하더라도 석가모니는 그에게 남아있는 부처로서의 심성을 보고 개심을 시켰을 뿐, 그가 저지른 살인행위에 대해서는 갚아야 할 업이라 생각하며 일체 관여하지 않았다. 즉 현대시대에서 보이는 범죄자에 대한 표교 활동은 이들이 과거의 일에 대한 반성과 동시에 새출발을 하길 바라는 것일 뿐이며, 법적인 처벌은 별개로 치며 선을 딱 긋는다.
그리고 애초에 교도소 가서 포교하거나 종교관련 업무를 처리하는 것은 다른 종교들도 마찬가지이다. 또한 범죄자에 대한 포용/갱생 개념은 세계 주요 종교 모두가 중요시하는 부분이다. 이 부분을 갖고 특정 종교만 걸고 넘어지는 것은 그 자체로 자신이 종교에 대한 이해도가 낮다는 것을 광고하는 행위이자, 불온한 목적성이 지나치게 눈에 띄는 선동일 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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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 대한민국에서의 불교[편집]
10.1. 종단 목록[편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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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한불교진불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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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한불교대각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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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한불교원융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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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한불교용화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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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한불교대승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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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한불교삼론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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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불교여래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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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한불교진언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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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승불교본원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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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불교법륜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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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한불교법화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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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한불교법연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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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한불교영산종
10.2. 한국 불교의 역사[편집]
11. 관련 용어[편집]
11.1. 붓다, 승려 등을 뜻하는 용어[편집]
11.2. 교리 관련[편집]
11.3. 수행 관련[편집]
12. 관련 인물[편집]
12.1. 석가모니와 불제자[편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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라훌라 - 십대제자에도 속하지만, 석가모니의 친아들이란 부분도 있으므로 따로 분류.
12.2. 고승 및 불교 사상가[편집]
12.2.1. 인도[편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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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가르주나(용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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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수반두(세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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디그나가(진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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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르마키르티(법칭)
12.2.2. 중앙아시아[편집]
12.2.3. 중국[편집]
12.2.4. 한국[편집]
12.2.4.1. 근현대[편집]12.2.5. 일본[편집]
12.2.6. 베트남[편집]
13. 부처들과 보살들, 그 외의 신들[편집]
13.1. 불·여래[편집]
13.2. 보살[편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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담무갈보살(법기보살) - 당나라 때 중국에서 편찬된 화엄경에 등장하는 보살로, 금강산에 머물며 설법한다고 한다. 실제로 금강산에는 이 보살이 현신했다거나, 만났다는 설화가 많이 전해지고 있다.
13.3. 명왕[편집]
13.4. 그 외[편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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선재동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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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십사제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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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4. 불교에 영향을 받은 종교와 사상(가)[편집]
14.1. 종교[편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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힌두교 - 브라만 교 때는 영향을 받았다가, 불교가 크게 커지고나서 역으로 영향을 주기도 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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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니교 - 출가자와 재가자를 엄격하게 구분하는 부파불교의 수행 방식을 받아들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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원불교 - 창시자인 소태산 박중빈 대종사가 깨달음을 얻은 이후 경전들을 두루 열람하면서 금강경을 읽은 뒤 석가모니가 자신의 연원이라고 결론지었으며, 교전인 <원불교전서> 내에서 《불조요경》항목에 금강경, 반야심경 등 불교에서 외는 경전 일부가 들어있기도 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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선교 - 과거 이름은 선(仙)불교. 정부에 등록된 법인명칭은 "선교유지재단". "1997년 창교된 선교교단, 재단법인 선교(仙敎)와 무관하다." 선종(禪宗)과 다르다. 원불교와 비슷하게, 불교의 영향을 받은 다른 종교이다. 원불교처럼 선불교도 불교의 한 갈래가 아니다. 1994년 11월 교주이자 창시자 만월 도주가 출가하였으며, 이때를 선불교가 만들어진 날이라 해서 창교일로 잡는다. 한국 토속신앙의 하느님을 신앙하며, 단군을 불광선인이라 부르면서 성인으로 받들어 모신다. 공식 홈페이지 교리의 유사성 등을 들어 단월드와 관련이 있다는 의혹이 있지만 명확한 입장 표명을 한 적이 없어서 확인되지 않았다. 공식 홈피의 주요 연혁을 따르면, 선교로 이름을 바꾼 시기는 2016년. 2016, 2017년 연속 재단법인 선교(仙敎)를 사칭하여 오인혼동유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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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슬람 수피즘: 이슬람 수피즘은 중앙아시아 불교 교리와 수행 방법에 적잖은 영향을 받았다. 낙슈반디야 교단의 경우에는 티베트 불교의 영향을 받았다.
14.2. 사상(가)[편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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헤르만 헤세 - 싯다르타란 저서를 쓴 적이 있다.
15. 불교 신자[편집]
16. 타 종교 간의 관계[편집]
17. 기타[편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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철학적인 관점에서 바라본 불교에 대한 KBS 다큐멘터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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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리엔탈리즘의 영향으로 불교에 왜곡된 긍정적인 관점을 지닌 사례도 있다. 공격적인 독설로 유명한 이탈리아 유명 여기자인 오리아나 팔라치는《나의 분노, 나의 자긍심》이라는 책에서 불교를 가장 평화로운 종교라면서 긍정적으로 평가한 적이 있었다. 자신은 기독교 신자(가톨릭)이지만, 기독교나 이슬람이나 유대교 같은 종교는 피비린내나는 역사를 가지고 있던 걸 그리도 혐오하는 그녀에게 종교 자체를 들이대며 학살이란 걸 저질러본 적이 없는 불교는 위대하다고 엄청나게 불교를 칭송했다. 그러나 이런 주장은 정작 과거-현대의 불교도들의 모순과 폭력에 대한 이해가 아예 없는 무식한 발언이다. 실제로 유럽 역사학자들은 이런 팔라치의 편견에 맞서 승병인 소헤이를 반론의 근거로 든 적이 있다. 그야말로 동아시아에 대한 환상과 편견으로 점철된 시각이라 볼 수 있다. 그리고 그녀가 불교를 공부했다는 기록도 없다(...). 사실 이와 같은 불교에 대한 유럽 지성인(?)들의 편견은 니체의 '안티크리스트'같은 서적에서도 볼 수 있으며 지금도 마찬가지다. 예를 들어 리차드 도킨스는 비난의 대상인 종교를 칭할 때에 불교는 예외라는 의견을 밝혔다.[10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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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 불교계가 무아마르 알 카다피에게 인권상(...)을 수여한 적이 있다. 참고 하지만 카다피는 독재자가 된 영웅이라는 평가를 받을 정도로 초기 집권은 나쁘다고만을 볼 수 없고 오히려 서방에서도 긍정적인 지도자로 평가했다. 카다피는 남녀평등을 위해 여성에게도 교육을 실시, 대규모의 문맹 추방 그리고 석유회사 국유화로 남는 이익을 국민을 위해 사용하기도 했다. 불교계에서도 이 당시인 2003년에 수여한 것으로 해당 수여 내용을 2011년에 뒤늦게 가져와 불교계가 카다피에 인권상을 준 것이 당혹스럽다는 식으로 보도하는 것은
억까다소 어불성설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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불교의 형벌에는 축생계가 존재하는데 이건 다른 두 개[107]에 비하면 벌이라면서 벌이 아닌 것 같다며 모순 아니냐고 지적하는 사람도 있지만, 패리스 힐튼 같은 엄청 유명인의 애완동물[108]로 태어나면 어지간한 인간을 웃도는 수준으로 호화롭게 살다가 천수를 누리고 죽는 경우도 있기는 있지만 이런 식으로 유명인의 애완동물로 간택되는 짐승들이 전체 동물의 몇 %나 될지 생각하면 그렇게 태어나 산다고 그게 마냥 좋다고 볼 수도 없다. 말로 태어날 경우 경주 실력만 뛰어나면 은퇴 이후에도 씨수마로 귀족 대우를 받으며 천수를 누리다 가며 개는 그 대우가 이미 준인간이라고 지적하기도 하지만, 씨수마가 아닌 말들의 경우 그렇게까지 우대받지는 않는다. 개들도 대우가 준인간인 경우는 주인을 잘 만났을 경우[109] 그렇다는 것이지, 주인의 성격이 아무리 좋다고 한들
아니, 당장에 중성화 수술 받고라도 오래 사는 길을 택하고 싶으냐고 물으신다면...유럽의 경우 소, 돼지, 닭 등으로 태어나면 죽을 때 그 한 순간만 참수로 생을 마감할 뿐이지 그 나머지 생애는 엄청 편안하다는[110] 사례를 들기도 하지만, 태어난 순간부터 누군가에게 먹히기 위해서 사는 호화스러운 삶을 '행복하다'고 부를 수 있는가 하는 문제를 생각하면 형벌이라면서 형벌이 아닌 것 같다고까지 말할 근거는 될 수 없다. 애초에 불교의 육도란 부처가 되지 못한 중생이 전생 혹은 현생을 살면서 행한 행적들의 인과를 따라 죽음 이후 부처가 될 때까지의 유예기간 동안에 머물 곳이 거듭 정해진다는 개념인데, 딱히 죄를 지어 받는 '형벌'이라기보다는 자신이 살아 생전에 행한 과보의 나머지를 환생해서 마저 갚는다는 '부채(負債)'에 가깝다. 불교의 지옥은 한 번 떨어지면 영원히 빠져나올 수 없는 것이 아니고, 대승불교의 경우 석가모니를 해치려다 지옥 가장 깊은 곳에 처박힌 데바닷타가 석가모니의 전생의 스승으로 석가모니 전생의 성불을 도왔던 인연으로 지옥에서 자신이 저지른 '석가모니 살해 미수'의 죄의 부채를 다 갚고 나면 성불해 부처가 되도록 예정되어 있다는 법화경의 구절을 보아도 좀 가혹한 형태로 죄값을 치르느라 선업의 대가가 아주 오랜 기간 유예되어 있는 공간에 가깝다.징역 56억은 있어도 종신형은 없는 감옥.그리고 석가모니 부처의 전생을 전하는 본생담 가운데 자신이 스스로 죽음을 택한 사슴 왕이나 자신의 몸을 불길에 던져 굶주린 선인에게 공양했다는 토끼 등 짐승들이 포함되어 있는 것이나, 석가모니가 태자 시절에 타고 다니던 칸다타라는 말이 석가모니 부처로부터 축생도에서 인간도를 뛰어넘어 천상도에 태어났다는 이야기를 보면 당연히 축생도에 떨어진 짐승이라고 해도 선업을 닦았던 것이 있다면 부처가 될 근기가 갖추어져 있고 얼마든지 부처가 될 수 있다는 것이 불교의 가르침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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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 매트릭스(영화)의 주제도 워쇼스키 남매가 인터뷰에서 직접 밝혔듯 불교사상을 바탕으로 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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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독교가 뿌리내리면서 기독교에서 유래한 표현들이 일상적으로 쓰이는 경우가 많은 기독교 계열 국가들과 마찬가지로, 불교가 뿌리내린 불교 계열 국가들은 불교에서 유래한 표현들이 일상적으로 쓰이는 경우가 많다. 가령 어진 성격의 사람을 '부처'로 부르거나, 삼가 고인의 '명복'을 빈다는 표현도 불교에서 유래한 표현이며, 이 외에도 강당, 건달, 대중, 면목, 집결, 아비규환, 아수라장 등등 생각보다 많은 단어들이 불교에서 유래한 단어들이다. (대략적인 정리) 이제는 이 표현들이 불교에서 유래된 표현이라는 자각조차 사라질만큼 해당 국가들의 언어들에 꽤나 강하게 자리를 잡아서 이 표현들이 빠져버리면 일상 회화가 불가능할 정도라서, 불교를 멸시하는 타 종교의 극단주의자들조차 그 불교에서 유래한 단어를 일상회화에서 자연스럽게 쓰는 웃지못할 상황이 매우 빈번히 발샐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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