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크랩] 정토불교의 세계 / 제9장 중국의 정토사상 - 3. 담란의 생애와 정토사상

2013. 8. 27. 16:11경전 이야기

 3. 담란의 생애와 정토사상

 

 

                                                                 장휘옥 著/불교시대사

 

생애와 저술

 

담란(曇鸞, 467~542)은 북위시대 대동부안문(大同府雁門, 山西省) 출신으로서, 오대산에서 출가한 후 공관불교의 사론(四論)과 불성에 대해 배우고 <대집경>을 연구했다.

 

그는 <대집경>에 난해한 점이 있어 주석서를 저술하는 도중에 병에 걸려 일단 완쾌되었으니 저술을 완성하기 위해서는 오래 살아야 할 필요가 있다고 생각하였다.

 

이에 불로장생법을 구하기 위해 당시 선술(仙術)의 대가로 불리던 강남의 도사(道士) 도홍경(陶弘景)을 찾아 양나라의 금릉으로 가 장생불사의 선술을 배웠으며 <선경(仙經)> 10권을 받았다.

 

돌아오는 길에 낙양을 지날 때 보리류지를 만나 불법 가운데 선술에 비견할 만한 장생불사의 법이 있는지 물었다.

 

보리류지는 땅에 침을 뱉으며 그의 어리석음을 비웃고 불경을 주면서 만약 이것으로 수행한다면 생사를 해탈하여 무량한 수명을 얻을 수 있다고 하였다.

 

담란은 잘못을 확연히 깨닫고 곧바로 선경을 불태우고 정토의 법문을 깊이 공부했다고 한다.

 

이때 보리류지에게서 받은 불경에 관해서는 논란이 있지만, <속고승전>에서는 <관무량수경>이었다고 한다. (일설에서는 세친의 <정토론>이라고도 한다.)

 

북위의 황제는 담란에게 깊이 귀의하여 신란(神鸞)이라 부르면서 숭배했으며, 칙명으로 병주(幷州)의 대암사(大巖寺)에 살게 했다.

 

만년에는 분주(汾州, 山西省)의 현중사(玄中寺)에서 살았다. 또한 개산(介山)의 북쪽으로 가 여러 가람들과 함께 염불을 닦았으며, 동위(東魏) 흥화 4년(542)에 평요(平遙)의 산사에서 입적했다.

 

당시 중국에서는 용수의 <중론><십이문론><대지도론>과 용수의 제자인 제바(提婆)가 지은 <백론>등 네 개의 논을 연구하는 학파를 사론종(四論宗)이라 했는데, 담란은 이 사론종 출신 사람으로서 후세에 사론종의 조(祖)로 추앙받았다.

 

저술에는 <왕생론주>(정토론주라고도 한다) 2권, <찬아미타불게> 1권, <약론안락정토의> 1권이 있으며, <약론안락정토의>는 일본 에도 시대에 위작론(僞作論)이 제기 되었다.

 

주된 저술은 <왕생론주>인데 세친의 <정토론>(원명은 <무량수경우바제사원생게>, <왕생론>이라고도 함)을 주석한 것으로서 후대의 정토사상 발전에 큰 영향을 미쳤다.

 

이것으로 실질적인 中國 정토교의 초조(初祖) 역할을 했으므로, 후세에 그를 중국 정토종의 제1조라 불렀다.

 

 

 

담란의 정토사상

 

담란의 사상 기반은 용수의 공관(空觀) 계통의 불교와 세친의 유가유식 계통의 불교를 종합·절충해서 무상(無相)의 사상을 매개로 유상(有相)의 불교를 표현하였다.

 

용수의 공관불교란 인간의 관념을 일단 공이라 하여 부정하는 불교다. 즉 인간은 일체의 만물을 자아의 눈으로 잘못 보고 있기 때문에, 그 잘못된 인간의 모든 견해를 부정해야 한다.

 

일단 잘못된 생각을 일소하면 거기에 만물은 그대로의 진실상을 나타낸다. 즉 만물은 나무 한 그루 풀 한 포기도 진실한 모습(諸法實相)을 보이지 않는 것이 없는데, 이것을 보는 인간의 관념이 잘못되어 있으면 그 진리를 깨닫지 못한다.

 

이에 인간의 존재에 관한 일체의 잘못된 개념을 부정하기 위해 일단 일체개공(一切皆空)이라하기 때문에 공관불교라 한다.

 

그러나 모든 존재는 그대로 진실을 나타낸다고 하는 적극적인 면에서는 실상(實相)의 불교라고도 한다.

 

이에 대해 세친의 불교는 인간세계는 꿈과 같은 것으로서, 이 꿈(夢)의 세계가 어떻게 성립하고 전개해 가는지를 연구하는 것이다.

 

이것을 유식설(唯識說) 혹은 유심론(唯心論)이라고도 하는데, 인간이 보는 세계는 인간의 잘못된 마음이 그려내는 것으로서, 그 그려내는 과정과 근원을 규명하여 마음이 잘못된 원인을 발견해서, 이번에는 잘못되지 않은 마음으로 올바른 세계관을 구성하려고 하는 것이다.

 

마치 꿈의 세계를 보고 있는 몽심을 깨닫게 해서 깨달은 마음으로 깨달은 세계관을 성립하려고 하는 것과 같다. 이러한 유식설을 또한 유가(瑜伽)불교라고도 한다.

 

인도에서는 용수 계통의 실상불교와 세친 계통의 유가불교가 불교의 두 이론으로 대립하여 전해 왔는데, 담란은 용수의 사상을 근거로 하면서 세친의 <정토론>이해에 노력했지만, 결과적으로는 용수와 세친과는 다른, 자신의 사상을 수립하였다.

 

불교의 근본진리는 유(有)의 부정 즉 공(空)으로 표현하지만, 단지 '공'이라고만 하면 허무사상이 되어 버린다. 이에 '유'를 긍정하지 않으면 안 되는데 그것은 부정을 거친 긍정이라야만 한다.

 

이러한 담란의 정토사상은 그가 정토에 태어난다(왕생)고 하는 의미를 '생즉무생(生卽無生, 無生의 생1)'이라 이해한 것 등에서 잘 나타난다.

 

특히 그의 업적은 세친의 <정토론>에서 힌트를 얻어 <무량수경>을 중심으로 한 정토삼부경으로 정토사상을 확립하고자 노력한 것에 의의가 있으며, 다른 한편으로는 중국고유의 민간신앙도 원용하여 정토사상을 중국에 정착시키는 기초를 마련하였다.

 

 

난행도와 이행도에 대한 새로운 해석

 

용수의 난이이도설(難易二道說)에 대해 담란은 <왕생론주>권상에서 다음과 같이 주석하고 있다.

 

용수보살의 <십주비바사론>에는 보살이 불퇴(不退)를 구하는 데 두 가지 길이 있으니, 하나는 난행도고 다른 하나는 이행도다.

 

난행도란 세간이 타락한 시대에 더구나 부처님이 재세하지 않는 때에 보살이 불도의 수행에서 불퇴의 경지를 얻을 수 없는 것을 말한다. 그 이유는

 

①외도가 표면적으로는 선인(善人)으로 가장하여 보살의 수행을 방해하고,

 

②성문의 자리의 생각이 보살의 이타의 자비를 무디게 하며,

 

③악인이 수승한 공덕을 깨뜨리고,

 

④잘못된 선과(善果)가 올바른 행을 파괴하며,

 

⑤자력의 수행이기 때문에 남이 도와주지 않는다.

 

이상의 곤란을 물리치고 수행하는 것이기 때문에 육로로 걸어가는 고통과 같으므로 난행도라 한다.

 

이행도란 오직 부처님을 믿는 것을 인연으로 해서, 정토에 태어나고자 원하면 부처님의 원력으로 아미타불의 서방정토에 왕생할 수 있다.

 

정토에 태어나면 부처님의 힘으로 불퇴전의 경지에 들어 가는데, 이것은 마치 해로로 배를 타고 즐겁게 여행하는 것과 같으므로 이행도라 한다.

 

담란의 생각은 용수의 난행도와 이행도의 견해와는 많이 다르다. 용수의 경우는 난행도든 이행도든 현생에서 불퇴전의 경지를 얻는다고 한 것에 대해, 담란은 현생에서 불퇴전을 얻는 것이 난행도이고, 아미타불의 본원력으로 정토에 왕생하여 그곳에서 부처님의 가피력으로 불퇴전을 얻는 것이 이행도라 함으로써, 정토에서 불퇴전을 얻는 것에 중점을 두고있다.

 

따라서 담란의 난행도와 이행도는 현세에서 수행하는지, 정토에서 부처님의 가피력으로 이루어지는지로 구별되기 때문에 용수가 현세에서의 난이를 말한 것과는 상당히 다르다.

 

또한 이행도에서 부처님의 가피를 빌리는 것도, 용수는 아미타불을 포함한 삼세 여러 부처님의 명호를 불러서 불퇴전의 경지를 얻는다고 한 것에 대해, 담란은 아미타불 한 부처님을 믿는 인연으로 왕생해서 불퇴전의 경지를 얻는 것은 왕생의 필연적인 이익이라는 것이 큰 차이점이다.

 

담란이 용수의 설을 받아들여 더구나 원래의 의미와는 달리 부처님을 믿는 인연으로 정토에 왕생하는 것을 이행도라 해석한 것은, 그 후 한국·중국·일본의 정토교 발달에 큰 영향을 미쳤다.

 

그것은 불도를 닦는 데 있어서, 담란이 열거한 다섯 가지 장애가 있는 현세에서는 정토에 왕생하는 수밖에 별다른 방법이 없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이후부터는 오로지 정토에 왕생하기 위해서는 <무량수경>에 있는 정토왕생의 방법 가운데 어느 것을 선택하는가 하는 문제에 초점이 맞추어졌다.

 

 

타력본원설

 

담란은 또한 아미타불의 본원과 그 성격을 올바르게 포착해서 타력본원설을 주장하였다.

 

그는 <왕생론주>권하에서 "저 정토에 태어나는 것과 저 정토에서 이루는 보살·천인들의 모든 수행은 아미타여래의 본원에 의한 것이다."라 하였다.

 

정토에 왕생하는 것도, 정토에서 보살행을 닦는 것도 모두 아미타불의 본원에 의해 가능하다는 것이다.

 

이어서 담란은 그 증거로서 법장보살의 48원 가운데 제11·제18·제22원 세 원을 인용해서 타력의 증상연(增上緣)이라 불리는 부처님의 가피력을 설한다.

 

제11원은 주정정취원(住正定聚願) 혹은 필지멸도원(必至滅度願)이라 부르는 것으로서, 정토에 왕생한 자는 '정정취(正定聚)에 머물러 반드시 멸도(滅度)에 이른다'고 하는 것인데, 담란은 이것을 '정정취 즉 불퇴전의 경지에 머물게 하는 원'이라 해석하였다.

 

제1원은 염불왕생원 혹은 지심신락원(至心信樂願)이라 부르는 것으로서, 서방세계의 중생들이 왕생하기 위해 '지극한 마음으로 신심과 환희심을 내어 아미타불을 내지 열 번만 부르면 극락에 태어난다'고 하는 것이다.

 

담란은 제18원의 힘으로 시방의 모든 중생은 정토에 왕생할 수 있으며, 왕생한 후에는 제11원의 힘으로 불퇴전의 경지에 들 수 있다고 한다.

 

그런 후에는 다시 필지보처원(必至補處願) 혹은 환상회향원(還相廻向願)이라 부르는 제22원의 원력으로 보현보살과 같은 보살행을 닦고, 시방세계의 무량한 중생들을 교화해서 그들 중생들에게 무상정진도(無上正眞道)를 얻게 하는 보살도를 행하게 한다고 한다.

 

다시 말하면 담란은 법장보살의 48원을 성취한 아미타불의 원력을 타력이라 하고, 모든 중생은 이 타력(他力)으로 왕생과 불퇴전의 경지와 보살도 세 가지를 왕성한다는 타력본원설을 밝혔다.

 

그리하여 난행도는 자력뿐으로 타력의 도움이 없지만, 이행도는 부처님의 원력으로 정토에 왕생해서 신속히 성불할 수 있다고 함으로써 자력과 타력의 의미를 명확히 구분지었다.

 

 

 

오념문에 대한 새로운 해석

 

담란은 왕생과 불퇴전의 경지와 보살도를 완성해서 신속히 성불할 수 있는 것은 모두 아미타불의 제11원·제18원·제22원의 타력의 힘이지만, 그러나 이 타력은 강한 증상연(增上緣)이라 불리는 부처님의 가피력으로서, 스스로 노력해서 구하지 않는 자에게는 주어지지 않는다고 하였다.

 

스스로 노력해서 구하는 것이 오념문이며, 바로 정토에 왕생할 수 있는 요인이다.

 

그러므로 담란은 세친의 오념문, 즉 제1 예배문·제2 찬탄문 · 제3 작원문 · 제4 관찰문· 제5 회향문에 대해 다음과 같이 해석하고 있다.

 

제1 예배문은 항상 서방정토에 태어나고자 하는 마음으로 아미타불을 예배하는 것이라 하였다. 이것은 세친의 견해와 같다.

 

제2 찬탄문에 대해서는, 세친의 아미타불을 찬탄하는 것은 입으로 '모든 시방의 무애광여래'의 명호를 외우는 것으로서 여실히 제3 작원문과 제4 관찰문에서 의미하는 상응(相應, 瑜伽), 곧 지관(止觀)을 닦기 위한 것이라 하였다.

 

이것은 세친은 "구업(口業)으로 찬탄한다.

 

저 여래의 명호를 외우는 데 있어서 저 여래의 광명지상(光明智相)과 같이 하고, 저 명의(名義)처럼 여실히 상응을 수행하기를 원하기 때문이다."라 하였다.

 

그러나 담란은 이 '상응'의 의미를 유가(瑜伽) 라는 번역말로 보지 않고, 아미타불의 명의에 찬탄하는 자의 마음이 상응하는 것이라 해석하였다.

 

그러므로 담란은 부처님의 광명은 지혜의 상(相)이기 때문에 광명지상이라 하며, 이 광명은 능히 중생의 무명의 어둠을 제거하고 일체 중생의 원을 성취해 주기 때문에 여실히 수행하면 이와 같은 공덕을 얻을 수 있다.

 

그러나 중생이 칭명·억념하더라도 무명이 제거되지 않고, 또한 원이 성취되지 않는 것은 여실한 수행이 명(名)과 의(義)에 상응하지 않기 때문인데, 그 이유는 부처님이 실상신(實相身)이고 위물신(爲物身)이라는 것을 몰라서 신심이 돈독하지 않기 때문이라 하였다.

 

담란은 부처님의 실상신과 위물신에 상응하지 못하는 이유를 세가지 든다.

 

첫째는 신심이 돈독하지 못해 있는 듯 없는 듯하기 때문이고,

 

둘째는 신심이 순수하게 하나로 결정되어 있지 않기 때문이며,

 

셋째는 신심이 한결같이 계속되지 못해서 다른 잡생각이 끼어 들기 때문이라 하였다.

 

한마디로 신앙심이 없는 세 가지 상태를 설명한 것이다.

 

그러나 이와 같은 세 가지 불신(三不信) 상태를 벗어나, 반대로 세 가지 신심(三信), 곧 돈독한 신심으로 아미타불을 억념하는 데 한결같고 다른 잡생각을 섞지 않고 광 명을 찬탄하는 명호를 계속 부르면, 부처님의 명의에 상응해서 일체의 모든 원이 이루어진다고 한다.

 

이 세 가지 불신과 세 가지 신심은 후에 선도(善導)의 삼심설(三心說)의 선구가 되었다.

 

담란은 세 가지 불신과 세 가지 신심(三不三信)의 대상이 되는 여래의 명의를 실상신과 위물신이라 간주하고, 명의(名義)의 '명'을 위물신, '의'를 실상신(實相身)이라 하였다.

 

실상신은 아미타불을 이치 그 자체(法性法身)로 본 것인데, 이치 그 자체는 의미로서의 실재(實在)이지 모습이나 형태가 없기 때문에 인간이 감각적인 대상물로 취급할 수 없다.

 

이에 인간의 실천 대상으로서, 그것을 향해 신앙심을 일으킬 수 있도록 방편신(方便身) 혹은 화신(化身)이 출현했는데, 이것이 위물신이다.

 

위물신은 아미타불 쪽에서는 신앙심을 일으키기 위한 방편으로 출현한 것이지만, 신앙하는 중생 쪽에서는 아미타불의 명과 의를 믿고 받아들일 수 있는 신앙의 대상이다.

 

간단히 말하면, 아미타불은 본질적으로는 법성법신인 실상신으로 형상이 없지만, 현상적으로는 상호(相好) 장엄을 갖춘 방편신인 위물신으로서, 이 둘은 다르지만 둘이 아니다.

 

그러므로 '실상신을 안다'고 하는 것은, 중생을 구제하기 위해 출현한 부처님의 작용의 위대한 의의를 아는 것인데, 이때 '안다'고 하는 것은 머리로 이해하는 것이 아니라 마음으로 믿어 아는 것이다.

 

또한 '위물신을 안다'고 하는 것은, 시방세계에 광명을 비추어 모든 중생을 섭취하는 부처님의 작용과 작용의 의미를 밝히는 명(名)을 아는 것이기 때문에 결국 부처님의 대자비심을 마음으로 믿어 아는 것이다.

 

따라서 여래의 명의와 상응한다는 것은, 이 위물신(명)과 실상신(의)에 상응하는 돈독한 신심으로서 마음으로 믿어 아는 것을 말한다.

 

이상의 설명에 따르면 담란은 찬탄문에서 특히 신심의 결정, 즉 세 가지 신심을 설하고 신심만 돈독하면 부처님의 명의에 상응하여 일체의 원을 성취할 수 있다고 하였다.

 

제3 작원문은, 세친은 마음을 적정·청정하게 하는 선(禪)과 같은 사마타(止)라 했지만, 담란은 사마타의 의미를 선정(禪定)과 같은 지(止)로 보지 않고, 방지한다는 의미의 지(止)로 해석하였다.

 

그리하여 첫째 일심으로 아미타불을 염해서 저 정토에 태어나기를 원하면 이 부처님의 명호나 정토의 명호는 능히 일체의 악을 막아준다.

 

둘째 서방정토는 삼계(三界 ; 欲界·色界·無色界)를 초월한 곳이기 때문에 이곳에 왕생하면 자연히 신·구·의로 짓는 악이 그친다.

 

셋째 아미타불의 가피력은 자연히 소승의 마음을 멈추고 대승의 마음을 내게 한다. 이러한 세 가지를 멈추게 하는 힘은 말할 필요도 없이 부처님의 여실한 공덕에서 나오는 것이기 때문에 세친은 '여실히 사마타를 수행한다'고 설했다고 해석하였다.

 

제4 관찰문도 작원문과 마찬가지로 새롭게 해석하였다.

 

세친의 관찰문은, 서방정토의 갖가지 모습을 3엄 29종의 장엄으로 정리해서 이것을 대상으로 여실히 비바사나(毘婆舍那, 觀)를 수행하는 것이었다.

 

이것은 작원문의 사마타에서 마음을 명경같이 적정·청정하게 해서 그 위에 3엄 29종으로 정리된 정토의 장엄을 생생하게 떠올려 관(觀)하는 것이다.

 

러나 담란은 관(灌, 毘婆舍那) 에는 두 가지 의미가 있다고 하여 차토(此土)와 피토(彼土)로 나누었다.

 

관의 첫번째 뜻인 차토란, 이 땅에서의 공덕의 의미로서, 이 인간세계에서 저 정토의 3엄 29종 장엄의 모습을 관찰하면 그 관찰한 공덕이 여실하여, 관한자는 여실한 공덕을 얻어 정토에 왕생할 수 있다는 것이다.

 

관의 두번째 뜻인 피토는 정토에 왕생한 후의 공덕으로서 정토에 태어나 아미타불을 만나면 미증정심(未證淨心)의 보살은 정심(淨心)의 보살이나 상지(上地)의 보살과 마찬가지로 평등법신을 증득할 수 있다고 한다.

 

여기서 미증정심의 보살이란 초지 이상 칠지 이하의 보살을 가리키고, 정심의 보살은 팔지의 보살, 상지의 보살은 구·십지의 보살을 가리키므로 결국 정토에 태어나면 초지 이상의 보살은 모두 아미타불의 가피력에 의해 평등법신을 증득할 수 있다는 것이다.

 

그리하여 이 차토와 피토에서의 공덕을 관하는 것은 '여실히 비바사나를 수행하는 것'이라 해석하였다. 제5 회향문에 대해서는, 세친의 견해와 근본적으로 큰 차이는 없지만, 세친이 언급하지 않은 내용이 첨가되어 있다.

 

세친의 회향문은 정토에 왕생하기 위해 예배·찬탄·작원·관찰을 행한 공덕을 자기 한 사람을 위한 것으로 하지 않고, 일체 대중의 성불을 위해 베푸는 것으로서 이 목적에 자기의 행위를 순화시키는 것이었다.

 

그러나 담란은 이 회향을 왕상(往相)회향과 환상(還相)회향 두 가지로 설명하였다.

 

왕상회향이란 자신이 행한 공덕을 모두 일체대중에게로 되돌려 대중과 함께 아미타불의 극락정토에 태어나기를 원하는 것이고, 환상회향은 서방정토에 태어난 후에는 사마타(止)와 비바사나(觀)를 얻어 중생구제의 방편력이 성취되면, 생사의 숲이라 불리는 인간세계로 되돌아와 일체 대중을 교화해서 함께 불도로 향하는 것을 말한다.

 

담란의 왕상과 환상 두 회향은 결국 정토왕생의 마음은 보리심이어야 함을 밝힌 것인데, 담란은 다음과 같이 설명한다.

 

<무량수경>에 의하면, 삼배왕생 가운데 수행에 우열이 있다고 하지만 모두 무상보리심(無上菩提心)을 내지 않는 이가 없다. 무상보리심이란 곧 원작불심(願作佛心)이다.

 

원작불심이란 도중생심(度衆生心)을 말하고, 도중생심이란 중생을 섭취해서 무든 부처님의 국토에 태어나게 하는 마음이다.

 

그러므로 저 안락국토에 태어나기를 원하는 이는 반드시 무상보리심을 내어야 한다.

 

보리심을 내지 않고서는 정토에 왕생할 수 없다.

 

정토에 태어나는 것은 부처가 되고 싶다는 원작불심을 위해서지만, 부처가 된다는 것은 도중생, 즉 중생을 구제하기 위해서며, 그 구제를 위해 중생을 정토에 태어나게 하지 않으면 안 된다.

 

중생을 정토에 태어나게 하기 위해서는 먼저 자신이 행한 선근공덕을 중생을 위해 베푸는 것이다.

 

담란은 대중불교 사상을 철저하게 정토왕생으로 실천화하고 있다.

 

이상에서 본 것처럼, 담란은 용수가 <정토론>에서 설한 다섯 가지 수행방법인 오념문을 중시해서 수행 방법의 올바른 방향을 제시했다.

 

특히 그가 깨달음을 구하는 마음인 보리심과 칭명염불과 신심에 주목한 점은 타력신앙의 핵심을 나타낸 것이다.

 

 

십념업성설

 

담란이 처음으로 제시한 문제로, 후대 정토교의 중대한 논의의 대상이 된 업사성변(業事成辨)이 있다.

 

이것은 정토에 왕생하기 위해 염불이나 보리심을 닦을 때 그 사람의 수행이 어느 단계일 때 정토왕생이 결정되는가 하는 문제이다.

 

예를 들면 <무량수경>의 '내지 일념(一念)'은 '나무아미타불'을 한 번만 칭명하는 것이라 해석해서, 한 번의 칭명으로 왕생이 결정된다고 주장하는 일념업성설(一念業成說)이나 <무량수경> 제 18원의 '내지 십념(十念)'에 의해 열 번의 칭명으로 결정된다는 십념업성설, 혹은 '내지 십념'의 내지에 주목해서 많은 염불로 결정된다는 평생업성설 등 여러 가지가 있다.

 

담란은 <무량수경> 제18원의 "아미타불을 내지 십념(十念)해서"라는 '내지 십념'과 <관무량수경>의 구품(九品) 가운데 하품하생(下品下生)에 "소리를 끊지 않고 아미타불을 십념(十念)하면"이라는 '십념'의 두 가지에 주목해서, 십념상속(十念相續) 업사성변을 주장하였다.

 

그리고 십념상속에 대해 <약론안락정토의>에서는 다음과 같은 비유를 들고 있다.

 

어떤 사람이 넓은 들판에서 원수를 만나 살해 당할 처지에 놓이자 도망을 쳤다. 그런데 갑자기 눈앞에 강이 가로놓여 있음을 보았다. 강을 건너기만 하면 살 수 있으므로 그 사람은 오직 일념으로 강을 건널 생각뿐이었다.

 

옷을 입고 물에 뛰어들면 빠져 죽을지도 모르며, 원수가 따라오기 떄문에 벗을 새가 없다는 생각조차 할 여유가 없었다.

 

그래서 그 사람은 오직 강을 건너갈 일념으로, 강에 뛰어들어 무의식중에 강을 건너 위험을 모면했다고 한다.

 

이 비유에 나오는 사람에게는 나오는 사람에게는 오직 강을 건널 일념뿐, 타인을 부르거나 방향을 바꾸거나 다른 것으로 마음을 돌리려는 생각이 전혀 없었다고 하는, 그 순수한 심정(다른 잡생각이 끼어들지 않은)이 바로 일심으로 아미타불만을 염(念)하는 마음이며, 이러한 마음으로 일념일념이 계속해서 십념상속하면 업사가 성변한다고 한다.

 

불교의식이 끝날 때 '나무아미타불'을 열 번 반복하는 것을 볼 수 있는데, 이것을 십념이라 한다.

 

이 십념은 분명히 담란의 업사 성변의 십념상속에서 유래한 것이다.

 

또한 장례식 끝에 '소리가 끊이지 않게 아미타불을 십념하라' 하여 스님과 대중이 함께 아미타불을 열 번 외우는 것도, 원래는 <관무량수경> 하품하생자가 염종 때 선지식의 도움으로 아미타불을 열 번 불러 서방정토에 왕생하는 것에서 연유한 것이지만, 왕생의 업사성변의 십념상속이라하는 의미를 붙인 담란의 설에 의해, 죽은 사람이 업사성변해서 반드시 정토에 태어나도록 행하는 것이다.

 

그런데 비유에서처럼, 원수에게 쫒겨 강을 건너는 것에만 전념하는 것과 같은 심경이 되어, 부처님의 명호를 부르거나 부처님의 상호를 관한다 할 때, 어떻게 십념상속했다고 하는 횟수를 알 수 있을까가 문제다.

 

다시 말하면 만일 횟수를 세고 있으면 순수한 십념상속이 아니라는 문제가 생긴다.

 

이것에 대해 담란은 염불하는 사람은 그런 것을 생각할 필요없이 일심으로 다른 생각을 섞지 않고 생각을 끊이지 않게 계속하면, 부처님은 분명히 횟수를 알기 때문에 업사성변한다고 하였다.

 

이외에도 담란은 오역죄와 정법을 비방한 죄를 저지른 사람은 왕생하지 못한다는 것에 대해서, 정법을 비방한 자는 죄가 무겁기 때문에 왕생 불가능하지만, 오역죄를 지은 자는 십념(十念)염불하면 본원의 힘으로 정토에 왕생할 수 있다고 하여 악인왕생의 가능성을 강조하였다.

 

또한 담란은 극락정토를 아미타여래의 청정본원인 무생(無生)의 생(生)이라 하여, 본질적으로는 실체가 없는 것이지만 본원의 인연에 의해 존재하는 것이라 설하였다.

 

또한 위작이라 의심되는 <약론안락정토의>에서 극락은 생사가 있는 삼계(欲界·色界·無色界)의 범위에 속하지 않는, 다시 말하면 삼계를 초월한 경지라 하였다.

 

 

 

 

 

 

 

출처 : 미주현대불교
글쓴이 : 파초 원글보기
메모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