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크랩] 정토불교의 세계 / 제9장 중국의 정토사상 - 4. 도작의 성문과 정토문

2013. 8. 27. 16:11경전 이야기

 

4. 도작의 성문과 정토문

 

 

                                                                            장휘옥 著/불교시대사

 

생애와 안락집

 

담란에게는 직제자라 전하는 사람은 없지만 그의 정토사상을 계승한 사람으로는 도작을 들 수 있다. 도작(道綽, 562~645)은 담란이 입적한 후 21년째 되는 북제(北齊)의 하청 원년에 병주(幷州, 山西省)의 문수(汶水 혹은 幷州 普陽)에서 태어났다.

14살 때 출가하여 <열반경>을 연구하고, 24번이나 강의했으며 후에는 창주(滄州, 河北省)의 혜찬(慧瓚, 532~603)에게 <반야경>을 배웠다고 한다. 우연히 담란이 살았던 분주 현중사에 참배하러 가, 담란의 덕을 기리는 비문을 보고 깊이 감명을 받아 수나라 대업 5년(609) 48세 때에 열반종을 버리고 정토문에 귀의했다.

그때부터 아미타불의 명호를 하루에 7만 번씩 외우고, 또한 <관무량수경>을 200회나 강의했으며, 진양(晋陽)·태원(太原)·문수(汶水) 세 현의 승려와 속인을 교화하고, 7세 이상의 사람에게는 반드시 아미타불을 염불하게 했다. 칭명할 때마다 콩 한 알씩을 놓았는데, 정진을 잘하는 사람은 콩의 양이 80,90석(石), 중간 정도 사람은 50석, 정진을 잘못하는 사람이라도 20,30석은 되었다고 전한다.

당나라 정관 19년(645) 4월 24일에 현충사에서 입적했다.

저술로는 <안락집(安樂集)> 2권이 있다. 당시 삼론종의 가상길장(嘉祥吉藏)은 일체개공(一切皆空)의 교리(無相大乘)를 설하여 아미타불은 중생의 모습을 취한 화신이지 진실한 불신인 보신이 아니며, 극락도 부처님이 임시로 나타내 보인 화토지 진실한 불국토인 보토(報土)가 아니라 하여 정토교를 비난하였다. 또한 섭론종에서는 '별시의취(別時意趣)'를 제창하여 극락왕생은 곧 바로 얻는 것이 아니라 먼 미래에 그 성과를 기대하는 것에 지나지 않는다고 하여 서방왕생을 과소평가했으므로 정토신앙은 거의 절멸할 위기에 처해 있었다. 이에 도작은 이러한 잘못된 견해를 바로잡고, 정토종을 확립하기 위해 <안락집>을 찬술하였다.

 

도작의 정토사상

 

<관무량수경>을 주석했다는 도작의 <안락집>은 담란의 <왕생론주>에 큰 영향을 받아 왕생안락의 방법을 설하였다. 따라서 대승의 공관(空罐)에 입각해서 그 논지를 전개한 담란의 입장을 계승하고 있음은 말할 필요도 없지만, 담란이 <무량수경>을 주로 한것에 반해 도작은 특히 <관무량수경>을 중시하여 염불을 말법시대에 맞는 수행방법이라 한 것은 그의 독자성으로 인정받고 있다. 도작에게는 강한 말법의식이 있었으며, 말법중생이 왕생하는 길은 <관무량수경>하품하생의 교설에 있다고 믿었기 때문이다.

도작은 일찍이 용수가 수행의 어렵고 쉬움(難易)에 따라 난행도와 이행도로 나누고, 담란이 수행 그 자체보다 수행의 목표에 의해 난행도와 이행도의 구별을 지운 것에 반해, 도작은 난행도와 이행도라는 용어 대신에 '성도'와 '정토'라는 용어를 사용하여 소위 성도문(聖道門)과 정토문(淨土門)의 교판을 세웠다.

현세에서 불교의 이론에 따라 선(禪)이나 그 밖의 수행방법으로 불도를 닦아 석가모니가 인간에서 부처가 된 것처럼 보살이 자기 힘으로 깨달음을 여는 것을 '성도문'이라 하였다. 이에 반해 이것을 실천할 수 없는 사람이 아미타불의 본원에 의해 정토에 왕생해서 정토의 공덕으로 보살도의 수행을 닦아 부처가 되는 것을 정토문이라 하였다.

현세에서 자력으로 성스러운 불도를 닦는 것이 성도문으로서, 이러한 사람들은 예를 들어 아직 깨달음을 얻지는 못했어도 성자라 불리기에 어울리는 사람들이지만, 정토문은 그러한 것을 견딜 수 없는 범부라 불리는, 소위 마음도 실천수행도 겁약한 사람들이 들어가는 문(門)이라 하고, 현대는 종교적으로 정토문밖에 선택할 수 없는 겁약한 사람들의 시대라고 하였다.

도작이 이렇게 생각한 것은 인간사회의 현실을 보고 그렇게 내린 결론이겠지만, 또한 당시 중국 불교계를 풍미한 말법사상의 영향도 있었다. 말법사상은 석가모니가 입멸한 후부터 세월이 흐를수록 불법이 쇠한다는 불교의 역사관에 근거하여, 불교의 위기적·종말적 시기를 말한다.

도작은 <대집월장경>을 인용해서 말법시대를 다음과 같이 설명하고 있다. <대집월장경>에 의하면, 석가모니가 입멸한 후의 시대를 5백 년씩 다섯 차례로 나누어 각 5백 년간의 불교계 모습을 예언처럼 기록하고 있다. 즉 제1차의 5백 년간은 불교의 혜(慧)를 견고하게 닦고, 제2차의 5백년간은 정(定)을 견고하게 닦지만, 제3차의 5백년간에는 불도의 수행은 없어지고 다만 불교 경전을 많이 듣고 많이 읽는 것이 견고하게 행해지는 시대가 되며, 제4차의 5백 년간에 들면 이미 불도를 닦을 수 없어 겨우 사탑을 세우거나 복을 쌓거나 참회해서 불교의 공덕을 얻으려는 일이 견고하게 행해지며, 드디어 최후의 5백 년간이 되면 불교는 사라지고 약간의 도덕적인 선(善)만 행하는 시대가 된다고 한다.

이외에도 불멸 후의 시대를 세 단계로 나누어 정법(正法)·상법(像法)·말법(末法)으로 구분한다. 정법시대는 석가모니 입멸 후부터 5백 년(혹은 천 년)간을 말하는데, 이 시대에는 불교의 가르침과 수행이 뛰어나 깨달음을 얻는 자가 나오는 때다. 다음 상법시대는 정법시대가 지난 후 천 년(혹은 5백 년)간에 해당되며, 가르침과 수행은 있지만 깨닫는 사람이 없다. 마지막으로 말법시대는 상법시대가 지난 후 만 년간을 말하는데, 이 시대에는 가르침만 있고 수행하는 사람도 깨닫는 사람도 없는 시대로서, 결국에는 세상도 사람도 불교를 행하지 못할 정도로 타락해서 불교는 완전히 멸한다고 한다.

당시 중국의 북제(北齊)에는 법상(法上)이나 도안(道安) 같은 사람들이 석가모니의 입멸 연대에 대해 연구하고 있었는데, 법상은 석가모니의 입멸 연대를 연구한 결과 기원전 890년으로 보았다. 이 계산에 따르면 수나라 대업 7년 (611)이 되면 <대집월장경>의 제4차 5백 년간에 들게 되므로, 드디어 불도의 수행은 행해지지 않고, 사탑을 세우거나 복을 쌓거나 참회하여 죄를 멸하지 않으면 안 되는 시기에 들었다고 생각하였다.

이러한 말법시대를 증명하는 것으로는, 당시 남북조 말기의 정치는 흥망이 빈번하고, 또한 불교에 대한 탄압과 파괴가 수차례에 걸쳐 반복되었으므로 말법시대에 이르렀다는 생각이 강하게 만연해 있었다. 도작은 이러한 시대에는 성도문의 불교를 실천하는 자는 있을 수 없기 때문에 정토문이 말법시대에 가장 적합한 종교이며, 이것으로 대중을 구제하지 않으면 안 된다고 생각했다.

그는 정토문이야말로 꺠달음의 첩경이며, 부처님의 서원은 범부로서 근기가 낮아 악을 저지르는 사람들을 대상으로 구제활동을 한다고 하였다. 이상과 같은 이유로 도작은 불교를 성도문과 정토문으로 나누고, 말법시대의 사람들이 선택할 것은 정토문 외에는 없다고 했던 것이다.

도작이 불교를 성도와 정토의 2문으로 나눈 것은 말할 필요도 없이 담란의 설을 그대로 이어받은 것이지만, 도작은 이것을 말법사상과 결합함으로써 그의 주장을 더욱 강하게 하였다.

그리하여 그는 세친의 <정토론>에서 설하는 다섯 가지 염불방법인 오념문을 열 번의 염불로 집약하고, 이 염불에 의해 <관무량수경>에서 설하는 아홉 부류의 사람(九品) 가운데 최하위인 하품하생에 속하는 악역무도한 사람까지도 아미타불의 정토(報土)에 태어날 수 있다고 주장하여 칭명왕생을 강조하였다.

또한 <관무량수경>의 하품하생을 설명하는 곳에서는 오역십악(五逆十惡)을 지은 중생이라도 임종할 때 '열 번(十念)만 온전히 나무아미타불을 외우면' 80억 겁의 생사 죄를 멸하고, 숨이 끊어지면 순식간에 극락세계에 왕생할 수 있다고 설한다.

도작은 하루에 7만 편의 염불을 했으며, 또한 남에게도 권하며 콩으로 염불의 횟수를 세었다고 하므로 그가 구칭염불을 주로 하고 그것을 왕생의 요인으로 삼았다는 것은 분명하다. 그러나 도착의 사상을 종합적으로 보면, 역시 그도 관념(觀念)을 중시 여겨 삼매견불(三昧見佛)을 가르쳤으며, 또한 십념의 내용이 억념의 상속일 뿐 아니라, 보리심을 정토왕생의 요인으로 삼고, 생 즉 무생의 이치를 깨달을 것 등을 권한 것에서, 그의 사상은 아직 완전히 성도문적인 경향을 벗어나지 못하고 있었음을 알 수 있다.

아미타불과 정토에 대해서 도작은 삼론종에서 아미타불과 정토를 화신불과 화토라 주장한 것에 반대해서 <안락집>을 만들었기 때문에 독자적으로 아미타불을 보신불, 극락정토를 보토라 해석하고, 극락은 정토 가운데 초문(初門)이고 사바세계는 예토 가운데 종처(終處)이기 떄문에 극락세계와 사바세계를 서로 경계를 접하고 있으므로 왕생하기에 매우 편리하다고 하였다.

 

 

 

 

 

 

출처 : 미주현대불교
글쓴이 : 파초 원글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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